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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버 교회의 존재와 미래를 대비하라 / 온라인(On-line) 교회와 오프라인
    2002-08-30 11:28:39   read : 3008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Off-line) 교회의 대립과 조화

    수년 전 영국 성공회가 고해성사를 인터넷을 통해서 받기 시작했다는 신문기사를 대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 해괴한 일이다 싶은 마음과 함께 우리의 일로 전혀 공감을 느끼지 못하였다. 사이버 교회, 가상 공간에서의 재택 예배, 온라인 헌금, 심지어 인터넷 성례전과 같은 말은 우리에게 미래 공상과학 소설에 등장하는 가상적 용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벌써 이런 개념들이 집의 문을 통과해서 현관에서 신을 벗고 마루로 올라서려는 상황에 도달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더군다나 그 진행속도의 가속화는 놀랄 만하다. 대문을 지나서 현관까지 오는 시간에 비하면 현관에서 안방에 가부좌를 틀고 앉기까지는 그 시간이 십분의 일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나와 상관없는 미래의 일로 거부하기보다는 심각하게 목회자의 목회수첩에 우선순위를 차지하여야 할 주요 항목으로 변화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는 감당하기 어려운 변화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가 보니 일부 목회자들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무시하기 쉬운데 이는 마치 신문을 보지 않고 사는 것이 더 편하다는 목회 태도와 같다.

    필자가 공과 대학을 다니던 70년대 후반에 컴퓨터 과목을 배웠다. 당시 공대 캠퍼스 안에 전산 건물이 있었고 최고의 첨단시설이라고 자랑하였다. 20여 년 전 일인데 오늘날 이 이야기를 하면 우리의 자녀 세대들은 코웃음을 친다. 그럴만한 것이 당시는 컴퓨터 모니터라는 것이 없었다. 오늘날처럼 모니터에 내가 명령을 쳐서 입력시키는 것이 아니라 노란 펀칭 카드에 천공기로 구멍을 뚫어서 명령어를 입력시키는 시대였다.

    공대생들의 가방은 항상 수백 장의 펀칭 카드를 운반하느라 지쳐 있었다. 또한 당시 최고의 시설이라는 컴퓨터 용량이 오늘날 목회자들의 책상에 올려져 있는 테스크 톱 컴퓨터보다 작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다. 최근 국내에서 4기가 바이트 반도체가 0.1미크론 가공기술로 시제품이 나왔다는 기사를 읽으며 정말 격세지감을 느낀다. 당시 전산 건물의 큰방을 차지하던 크기의 메모리 설비가 이제는 명함 1/3만한 크기로 변화된 것이다.

    수년 전 출판된 미래 기술에 대한 책에서 인간 기술의 최종 물리적 한계가 0.1미크론 기술이라고 지적하였는데 이미 우리 눈앞에 실현되어 있는 것이다. 필자가 처음으로 개인 컴퓨터를 1987년 여름 미국에서 구입할 때 컴퓨터 가계의 미국인 기술자가 아마 당신 평생을 써도 다 채우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을 하며 붙여준 것이 20메가짜리 하드디스크 드라이브였다. 그 기술자의 장담은 1년도 못가서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제는 기가바이트가 아니라 벌써 테라바이트 단위의 초전도 소자 반도체가 언급되고 있는 시기이다. 5년 전인 96년도에 출간된 ┏사이버 트렌드┛라는 미래 기술에 대한 책을 보면서 이미 미래의 기술에 대한 책이 아니라 역사책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당시의 미래 기술은 이미 필자의 손끝에서 이용되어지고 있다.

    이미 전자의 흐름을 이용한 컴퓨터는 한계에 도달했고 광자의 움직임을 이용하는 광컴퓨터 시제품이 개발되고 있다. 광컴퓨터가 등장하면 현재의 모든 컴퓨터들은 박물관의 진공관 라디오 옆에 놓여서 후손들에게 신기한 구경거리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그때가 바로 수년 후일지도 모른다.

    이런 기술 문명의 발전은 단순한 기술의 발전이 아니라 이 문명 속에 있는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있다. E. H. 카(E. H. Car)가 지적한 대로 역사 발전의 주체는 기술이 아니라 사람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사람들조차 이런 변화 가운데 적지 않은 속도로 변화되어가고 있음을 목회자들은 주목하여야 한다.

    오늘날 청년, 청소년 세대의 세계관과 가치관은 40~50대의 기성세대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별히 사이버 세계의 존재와 참여의 면에서 기성세대와 거대한 간격이 이미 벌어져 있다. 이들에게 사이버 공간은 더 이상 가상(假象)의 세계가 아니다. 어쩌면 이들은 벌써 오프라인의 한국에서 사이버 세계로 이민을 떠났는데 오프라인의 부모들은 다른 공간에서 이들을 찾아다니고 있는 새로운 이산가족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민을 가면 개척적 목회자들이 따라가서 이민교회가 형성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법칙인 것처럼 사이버 세계로 이민간 새로운 세대를 위해서 사이버 교회와 사이버 목회가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른다.
    사이버 교회에 대한 논쟁은 이미 수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논쟁을 자세히 살펴보면 대부분이 사이버 교회에 대한 부정적 경계의 소리를 높이는 것이었다. 상당수의 주장은 사이버 교회를 교회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난 수년 동안에 여러 변화가 생겼음을 감안할 때 새로운 차원에서 이 문제를 논해 볼 필요를 느낀다. 이 변화에는 기술의 발달, 특히 초고속정보망의 구축, 쌍방향 통화와 멀티미디어의 실현으로 감각을 겸한 커뮤니케이션의 구현, 컴퓨터 속도의 비약적 발전, 사이버 공간에 대한 세대간 의식의 변화, 최근 다양한 교회 형태의 등장으로 인한 교회관의 확장 등을 지적할 수 있다. 새로운 관점에서 사이버 교회의 존재와 미래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 볼만한 시점이다.

    1. 사이버 교회의 정의

    가상이라는 의미의 ‘사이버’라는 말은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라는 용어에서 기원된 단어이다. 이 용어는 20세기 천재 수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노버트 위너(Nobert Wiener)가 1948년 자신의 책제목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만든 신조어였다. 의미는 세상의 여러 조직체들, 특히 전자제어기기와 생물체들이 그 물리적 성질과 재료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아주 비슷한 원리에 의해서 작동된다는 일반적 제어의 원리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 단어의 유래는 헬라어의 조타수 혹은 항해사라는 뜻의 귀버네테스(kybernetes)에서 왔는데 제어 이론을 상징하기 위한 것이었다. 오늘날에는 모든 인조적인 시스템의 배경을 이루는 것으로 사이버라는 용어를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사이버 교회란 가상 세계인 사이버스페이스(cyberspace)에 존재하는 무형교회를 지칭하는 말이다. 물론 무형이라는 용어의 정의도 논쟁의 대상이 된다. 무형교회와 유형교회간 차이점의 기준이 유형적 건물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사이버 교회는 무형교회에 속한다.

    그러나 기준이 일정한 멤버십을 가진 성도들의 조직체라는 것이라면 사이버 교회가 굳이 무형교회가 아닐 수도 있다. 즉 사이버 교회란 유형적 교회 건물이나 집회 장소를 가지지 않고 가상 공간인 인터넷 상에서 교회의 기능을 감당하고 있는 교회라고 정의할 수 있다.

    현재의 시점에서 사이버 교회라고 불리우는 교회들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되어지고 있다. 첫째는 교회의 기능을 행하기보다는 단지 지역교회의 홍보매체 정도로 인터넷을 사용하고 있는 경우이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가 홈페이지를 온라인에 올리고 있는데 주로 교회 소개, 목회자 소개, 지난 주 설교 게재, 교회 광고, 프로그램 안내 등의 홍보적 기능을 행하고 있을 뿐이다. 목회자와 성도 간, 혹은 성도와 성도간의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물론 이런 교회들도 자신들이 사이버 교회를 하고 있다고 말하곤 한다.

    두 번째는 어느 정도 온라인 상에서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나고 교인들의 참여도 있지만 교회의 기능을 균형있게 행한다기보다는 기존 교회의 보조적 차원에 머무르는 교회이다. 첫 번째 홍보기능에 머무른 교회보다는 발전했지만 실제적인 사이버 교회로서는 아직 미흡한 상황의 교회이다.

    최근 한국의 일부 앞선 교회들이 운영하고 있는 교회들이 이 두 번째 수준의 사이버 교회이다. 세 번째가 교회의 거의 대부분의 기능이 온라인 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실제적 사이버 교회이다. 즉 예배, 친교, 교육, 봉사 등의 기능과 전도, 선교 사역까지 온라인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교회는 유형적 집회장소를 가지고 있지 않거나 혹 극히 제한적인 유형 모임을 운영할 수 있다.

    대신 성도들은 온라인 공간에서 적극적으로 교회활동에 참여한다. 예배는 재택 예배로 드려지게 된다. 이 세 번째 유형의 교회가 궁극적으로 사이버 교회라고 불리워질 수 있는 교회이다. 현재 국내에서는 이런 수준의 성공적 사이버 교회의 예는 아직 거의 없다고 보인다. 일부 모험적 시도가 있었고 장애인을 대상으로는 이런 재택 예배가 수년 전에 벌써 실시되기도 하였지만 기술적 문제로 지속되지 못하고 폐쇄되어지곤 하였다. 본고(本稿)에서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유형에 속하는 교회들만을 사이버 교회의 범주에 속한 것으로 간주하겠다.

    2. 사이버 교회에 대한 부정적 견해들

    앞에서 간략하게 언급한 것처럼 지금까지 기존교회들은 사이버 교회의 등장에 대해서 달갑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그 요인들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사이버 교회에 관련된 문제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첫 번째 요인은 가상 공간에 대한 거부감이라고 하겠다. 가상(假象)이란 용어의 사전적 정의는 ‘주관적으로 그렇게 보일 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거짓 모습’으로서 실재의 반대 개념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가상 공간에 있는 가상 교회라는 개념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거짓이라는 의미를 내포하므로 역사적 진리를 추구하는 기독교에서는 거부감을 느끼게 된다. 즉 가상 공간에 들어간다는 것은 자신의 진리를 스스로 허상으로 만드는 것으로 간주되어 거부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두 번째 요인은 급격한 기술의 발달을 쫓아가지 못함에 따른 거부감이다. 이를 ‘문화적 지체현상’(cultural lag) 이라고 부른다. 문화의 변화 발달을 소화 흡수할 만큼 인식의 변화가 따라가지 못하면 이런 거부감을 가지게 된다. 알핀 토플러가 지적한 대로 우리는 이미 ‘제3의 물결’(the third wave) 속에 살고 있다. ‘제1의 물결’은 농경사회로서 주로 인력에 의한 생산 체계를 가지고 있던 시절이다.

    이것이 기계를 통한 대량 생산의 시대로 넘어가면서 ‘제2의 물결’이라고 부른 산업사회로 넘어오게 된다. 이 시기 초기에 변화된 산업사회를 쫓아가지 못하던 사람들은 러다이트 운동이라고 부르는 기계 파괴 운동을 일으켰다. 이들은 대량생산을 이루는 기계가 인간의 존재와 행복을 파괴할 것이라고 단정하였었다. 그러나 산업사회는 이 세상을 바꾸는 주류가 되었다. 19세기에 시작된 산업사회는 20세기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 급속하게 ‘제3의 물결’ 즉 정보사회로 넘어가게 되었다. 정보 시대는 산업시대의 중심가치인 조직, 관리, 통제에 거대한 변화를 수반하였다.

    상하구조와 연공서열에 따른 조직, 관리, 통제의 체계가 무너지고 정보의 소유와 활용 능력에 따라서 새로운 계급구조가 형성되어지게 되었다. 이를 따라올 수 없는 사람들은 정보화 사회라는 변화 자체에 적지 않은 거부감을 나타내게 되었다. 실제 기업체와 공직 사회가 구조를 전산화하였던 지난 1980~90년대에 전산화 작업의 가장 커다란 장애가 바로 40~50대의 비컴퓨터 세대인 중간관리층이었다. 이 당시 이들이 내세운 여러 거부 이유들은 오늘날 시점에서 볼 때는 합리적이지 못하다.

    다만 그들의 의식의 변화가 기술의 변화만큼 따라올 수 없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문화적 지체현상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회 내에서 동일한 문화적 지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보인다. 물론 여러 가지 신학적, 교회론적 이유를 내세우겠지만 어쩌면 이들을 포괄하는 문제는 문화적 지체 현상일지도 모른다.
    교회에서는 이러한 문화적 지체 현상을 무조건 잘못된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이런 거부 반응 자체도 하나의 현실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변화가 항상 선(善)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는 것이다. 다만 기성세대와 다른 세대는 제3의 물결 속에 이미 살고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판단의 잣대가 이전 세대와는 달리 다원적일 수 있음을 용납해야 한다.

    세 번째 사이버 교회에 대한 부정적 견해는 사이버 교회에는 인격적 접촉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참된 의미의 교회 공동체가 될 수 없으며 이곳에서는 참된 영성의 전달도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수년 전에 제시된 사이버 교회에 대한 일반적 견해에서 가장 주요 요인으로 제시된 문제점이다. 그러나 이는 접촉 혹은 교제의 개념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면에 따라 재고의 여지가 있다.

    뒷 부분의 교회의 기능에서 다루겠지만 인터넷을 통한 교제가 피상적이거나 실제적이지 않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부정적 측면이지만 오늘날 인터넷 채팅을 통한 교제는 평범한 가정 주부로 하여금 가정을 파괴시키게 할 만큼 강력한 것이다. 청소년들이 인터넷 메시지를 통해서 자살을 결심하기도 한다. 동호회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요즘에는 사이버 마약이라고 할 정도의 깊은 커뮤니케이션 중독이 일어나고 있다.

    네 번째 문제는 사이버 교회는 성례전이 없다는 것이다. 교회의 기본 기능은 성례전이므로 성례전이 행하여 질 수 없는 사이버 교회는 교회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는 성례전에 대한 신학적 논쟁으로 파급되어질 수 있는 문제이다.
    다섯째는 표면적으로 부상되어지지는 않지만 목회자 권위의 상실 문제이다. 만약 인터넷을 통한 사이버 교회가 활동할 경우 이전과 같은 전통적인 목회자의 권위는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렵다. 전통적 교회에서 목회자는 정보의 독점자였다.

    자신만이 신학 교육을 받았고 높은 수준의 성경 해석을 할 수 있었고 이를 근거로 설교를 하며 성경공부와 훈련의 최고 권위자였다. 이전 시대에는 성경 주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교회에서 목회자뿐이었다. 헬라어와 히브리어에 대한 지식도 목회자만 가질 수 있었으므로 항상 자신의 해석에 권위를 더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이버 세상에서 정보는 이제 더 이상 일부 특권층의 점유물이 아니다. 누구라도 성경에 대한 고도의 해석 자료에 접할 수 있고 원어에 대한 적절한 번역 및 해석에 접근할 수 있다.

    수많은 다른 성경공부 자료에 접근할 수도 있고 동일한 본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한 눈에 비교해 볼 수도 있다. 신학적 지식도 사용자의 손 끝에 항상 대기하고 있게 되었다. 이런 시대에 권위적 목회자는 더 이상 군림할 자리를 잃어버리게 된다. 정보 공유자로서 네트웍 상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목회자의 새로운 입지가 형성되어야 하는데 기존 목회자들에게는 환영할 일이 아닐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단의 문제이다. 오늘날 Church라는 단어를 검색 사이트에서 쳐보면 수많은 사이트가 나타나는데 이중에 적지 않은 이단 그룹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들은 유형적 모양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세련된 홈페이지 디자인과 카피라이트 문구만을 가지고 젊은이들에게 잘못된 교리를 마음껏 호소할 수 있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사이버 공간을 사단이 지배하는 악의 공간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수많은 포르노 사이트와 폭력, 테러, 자살 등을 방조하는 사이트, 기존의 가치관을 일거에 타파하는 엽기 사이트들, 심지어 딴지신문과 같이 사회현상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마음껏 비어를 사용하여 평가하는 사이트까지 오늘날 사이버 공간은 혼탁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정도의 차이이지 오프라인 세상과 다른 것이 없다. 오프라인 세상을 사단의 소유라고 할 수 없다면 온라인 세상도 결코 사단과 이단의 것으로 내어줄 수 없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이단의 존재가 사이버 교회의 존재의 장을 거부할 요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피할 수 없는 거부감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서 기존 교회들은 사이버 교회에 대해서 묵시적(默示的)인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중심으로, 그렇다면 사이버 교회의 존재와 미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다루어 보도록 하겠다.

    교회는 시대적 변화에 지혜롭게 대비해야

    3. 실재라는 개념

    사이버 교회에 대한 거부감의 핵심 중 하나는 가상 공간의 존재로서 실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체(實體) 혹은 실재(實在)라는 개념은 철학적 개념으로서 “무엇이 실재인가?”라는 질문을 새로이 해보아야 한다. 서구 철학은 실재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꾸준히 해왔다. 그리고 실재의 개념은 시대에 따라서 계속 변화되어져 왔다.

    플라톤은 이전 희랍 철학자들이 연구했던 원초적인 물리적 힘을 저급한 것으로 간주하고 이데아적 형상들만이 ‘진정으로 실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반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이데아를 이차적인 실체로 간주하여 그 위상을 강등시키고 그것은 우리가 진정한 실재로부터 추상해낸 희미한 모습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진정한 실재란 우리가 주변에서 만지거나 느낄 수 있는 개별적인 개체들뿐이라고 하였다.

    중세시대에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가물거리는 것들이 실재인 것으로 인정되었다. 성경적, 종교적 상징들이 초현실적인 메시지를 실재에 덧붙이고 거기에 영원성이나 의미를 부여했던 반면에 사물의 물질적 측면은 덜 실재적이고 단지 지상의 것이며 결점이 많은 허접 쓰레기에 불과하다고 여겨졌다. 르네상스 시기엔 감각에 의해서 반복적이고 관찰될 수 있고 셀 수 있는 사물들만이 실재적인 것이라고 여겨졌다.

    인간의 정신은 감각자료의 근저에 놓여있는 견고하고 물질적인 기반을 추론해 내지만 그러한 기반은 양화되거나 관찰되기가 쉽지 않으므로 덜 실재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현대에 이르면 실재 개념은 내적인 역동성이나 에너지를 갖는 원자적인 물질에 귀속된다. 그러나 이내 실재성의 질문은 복잡성을 띤 과학의 분석적 경향에 따라 그리고 예술적 스타일의 다양화됨에 따라 분명한 의미를 잃어버리고 말게 된다.

    중세시대의 실재론과 유명론의 논쟁 속에서 요하네스 둔스 스코투스(Johannes Duns Scotus)는 모든 사물의 개념은 경험적인 속성을 갖고 있지만 그 경험의 대부분은 현실에서의 형식적인 방식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가상적 방식 혹은 가상 공간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물의 객관적 성질을 알기 위해서는 비록 우리의 경험을 들추어 파내야 한다고 할지라도 실제의 사물은 단일한 통일체 내부에 자신의 경험적인 성질들을 이미 포함하고 있다. 실재라고 여기는 현실은 삶에서 얻어지는 것이라기보다 먼저 우리에게 주어진 선험적인 것에 의해 이차적으로 얻어지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경험이라고 일컫는 것을 얻는 것은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해 직접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단 가상의 어떤 형식으로 변한 다음에 그 가상이 우리에게 경험으로 축적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철학적 주장들을 종합하여 본다면 실재라는 것을 현대의 사람들은 물리적 물질이라고 정의하는데 실제로는 물체라기 보다는 경험을 포함하는 인식의 문제라는 것이다. 인식에 따라서 실재의 개념은 달라질 수 있다. 신앙인들은 영적인 세계를 실재라고 인식한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게 영적인 영역은 인터넷의 가상공간보다 더 큰 가상의 공간이다.

    또한 우리가 보고 있는 공간이 유일한 물리적 공간이냐도 문제이다. 고전 물리학의 영역에서는 물리적 공간이라는 개념은 분명한 삼차원적 공간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성 원리가 인정되어지자 시간이라는 개념이 포함되어진 사차원적 공간이 실재가 되었다. 우리 눈에 보여지는 현상적 세계는 사차원적 공간의 한 단면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의 육감이 느끼지 못하는 엄연한 물리적 공간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자 최근 들어서 일부 학자들 중에는 사이버 공간은 허상이 아니라 실재하는 하나의 공간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는 가상의 공간에서 지식을 얻고 경험을 얻고 있다. 문자를 통한 서적이 우리에게 이런 가상의 공간을 제공해 주었다. 문학세계는 현실의 그림자와 같은 가상의 세계이지만 우리는 이것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지 않다. 기독교인들도 문자 매체가 제공해주는 가상의 공간에서 오랫동안 이미 생활해 온 것이 사실이다.

    가상 공간이라는 용어에서 ‘가상’(假象)이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 의미로 인해서 생기는 거부감은 신중하게 재고해야 할 문제이다. 가상(假象)이 허상(虛像)은 아닌 것이다. 대부분 사이버 공간 하면 사람들에게 연상되어지는 것은 컴퓨터 게임이다. 게임에 나타나는 세상은 글자 그대로 허상이다. 영화 속의 세상처럼 허구(fiction)의 장(場)이다. 그러나 게임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이버 공간은 현실 실재와 분리되어지지 않는 공간이다. 오늘날 유행하는 사이버 세계를 살펴보라. 필자는 사이버 뱅킹을 이용하고 있다.

    사이버 뱅크는 건물이 있는 유형 은행은 아니지만 사이버 뱅킹에서 처리되어지는 모든 과정은 결코 가상이 아니다. 실제로 나의 돈이 나가고 들어온다. 사이버 마트(온라인 쇼핑)를 이용하면 실제로 물건이 내 집으로 배달 되어온다. 사이버 머니를 사용하면 실제 그만큼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사이버 오피스에서 처리되어진 업무들은 실제로 유효한 결정들이다. 사이버 전쟁은 실제 국방체계에 막대한 피해를 주고 있다.

    오늘날 수많은 IT 기업들은 사이버 세상에서 실제로 막대한 돈을 벌고 있다. 이들은 사이버 공간에서 가상이 아닌 실제 자신의 인생을 건 승부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이런 현실을 부인하려는 사고가 오히려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사이버 세계는 결코 사이비 세계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가상이라는 단어의 부정적 의미를 버리지 못하는 세대를 위해서 사이버 교회 혹은 가상 교회라는 용어가 적합하지 않다는 느낌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 오히려 사이버 공간은 네트워크로 구성되어진 실제적 공동체라고 볼 때 차라리 온라인(on-line)과 오프라인(off-line)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래서 필자는 사이버 교회를 온라인 교회, 전통적 유형교회를 오프라인 교회라고 부를 것을 제안한다.

    4. 새로운 세대의 등장

    세대차이라는 것은 오래 전부터 있어 왔던 것이지만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세대차이는 이전과는 다른 제2의 물결과 제3의 물결 사이에 존재하는 거대한 인식의 차이라고 하겠다. 단순한 미적 감각의 기준이 다르다든지 행동의 차이, 성숙, 미성숙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생활하는 공간이 달라졌다. 흔히 오늘날 젊은 세대를 n세대라고 부른다. 이는 network의 첫 글자를 지칭하는 것인데 이들은 물리적 공간보다는 인터넷으로 구성된 네트워킹 속에서 살고 있는 세대라는 것이다.

    이들에게 온라인은 결코 가상의 공간이 아니다. 실제 그들이 살고 있고 사랑하고 싸우고 고민하는 현실 삶의 장이다. 청소년들은 채팅에 깊이 빠져 있다. 기성세대는 이들을 이해할 수 없다. 만나서 이야기하지 왜 얼굴도 볼 수 없는 컴퓨터 상에서 쓸데없는 잡담과 같은 이야기에 그토록 귀한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핸드폰을 통화에 사용하기보다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기계로 간주하고 있다.

    전화해서 간단히 말로 하면 될 것을 힘들여서 두 손가락으로 작은 숫자판을 여러 번 반복해서 눌러서 메시지를 만들어 보내는지 알 수가 없다. 내용도 잡담 수준도 아니 쓸데없는 이야기들 같다. “너 뭐하니?” “잘 자!!!!” “3333U3333” 등. 이는 효율성과 조직력을 중심으로 하는 세대에게는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새로운 세대에게는 자신이 네트워크 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마치 기성세대가 아름다운 수풀 속에서 편안한 의자에 앉아 있을 때 편하고 쉼을 누리고 사는 것 같이 느껴지는 것이나 n 세대가 자신이 온라인 상에 위치하고 있음을 확인할 때 느끼는 편안함이나 동일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들에게는 더 빨리, 더 많은 정보를, 더 편하게 주고받는 것이 중요한 가치이다. 공중전화 박스 문 앞에서 핸드폰으로 전화를 거는 세대를 보면 어른 세대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전화 박스의 문을 열고 들어가서 주머니나 지갑에서 카드나 동전을 찾아 꺼내서 수첩에서 전화 번호를 확인한 다음에 전화를 건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오늘날 세대는 점차 컴퓨터를 켜서 윈도우가 부팅되기까지 수십 초를 기다리기가 힘들어진다. 아니 컴퓨터가 있는 사무실이나 방까지 찾아가는 것을 힘들어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날 n세대가 이미 m세대로 넘어갔다는 주장도 있다. m세대란 mobile세대라는 말로 무선으로 모든 정보망에 접근하는 세대라는 것이다. 선(線)이 있는 데까지도 가기 싫다는 것이다.
    자동차에서 운전 중 인터넷에 접촉할 수 있는 차량이 개발되어지고 핸드폰으로 인터넷에 접촉하는 것이 중요 과제이다. 덩치 큰 컴퓨터보다는 손에 들고 다니면서 PIM과 인터넷 접속, 이메일 송수신, e-book reading을 하는 손바닥에 들어오는 PDA가 필요한 시대이다. 이들은 걸어가야 하고 악수를 해야 하고 허리를 숙여서 인사하는 등 신체적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과 아는 체를 해야하고 예의와 체면을 차려야 하고 남들과 비슷하게 행동해야 하는 등의 사회적 요구를 따라 가는 것보다는 사이버 공간에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더 편하다.

    물론 2001년의 우리 사회는 아직 이런 극단에는 도달하지 않았지만 빠른 속도로 이를 향하여 진행하고 있다.
    이런 세대들을 향해서 교회는 손을 놓고 이들이 뭔가 잘못되었다고 책망만 하고 있을 것인가? 만약 한 세대가 지난 후 온라인 교회가 대중화되어졌을 때 교통 체증을 겪으며 주차장 문제로 인상을 쓰며 어린아이를 업고 걸리고,
    추운 날씨에 시내의 교회 건물을 향하여 가는 것을 어리석게 여기는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이들을 무슨 근거로 정죄할 수 있을까? 오늘날 언급하는 목회적, 신학적, 교회론적 주장들을 그 시대에는 보수주의자들의 꽉 막힌 견해에 불과했었다고 코웃음치게 되지 않을까? 이는 심각한 대비가 필요한 문제이다. 아직 극단적 형태의 온라인 교회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최근의 발전의 속도를 볼 때 이 책이 출간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벌써 절실하다고 지적이 될지도 모른다. 교회는 세상에서 뱀처럼 지혜롭게 대비하고 구체적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목적은 맹목적으로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려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 율법 있는 자 같이 … 율법 없는 자에게는 … 율법 없는 자와 같이 …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고전 9:20~22)라는 사도 바울의 모범을 쫓으려는 것이다.

    5. 교회론적 평가

    이제 본격적으로 온라인 교회에 대한 교회론적 평가를 시도해 보자. 교회의 정의가 무엇인가부터 시작하자. 구약에서는 교회의 원형에 가까운 개념으로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가 있는 지리적 위치’를 지칭하곤 하였다.
    그러나 신약시대로 들어오면서 이 개념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 일반적으로 신약성경에 사용되어진 ‘에클레시아’라는 용어는 ‘믿는 자들의 무리’라는 의미와 때로는 ‘특정 지역의 모든 믿는 자들’(롬 16:5; 고전 16:19; 골 4:15)을 지칭하는 말이다.

    특정 지역이 어떤 한정된 지역이면 ‘지역교회’라고 불리우고 전 세계를 지칭하면 ‘우주적 교회’라는 개념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항상 부언되는 것은 교회는 건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때로는 ‘모이는’(gathering) 이라는 개념을 강조하기도 하는데 이는 잘못하면 교회의 개념을 예배에만 국한시키는 문제를 일으킨다. 교회의 정의를 ‘믿는 자들의 무리’라고 한다면 온라인 교회도 오프라인 교회와 대등하게 교회라는 정의를 하는데 큰 문제가 없다고 본다.
    문제는 교회의 정의보다 온라인 교회가 오프라인 교회와 동일한 교회의 기능과 사명을 행할 수 있느냐라는 것이다. 교회의 기능과 사명은 내적으로는 예배와 친교, 교육이고 외적으로는 선교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교회는 성례전적 공동체라는 특징을 가진다. 이러한 기능과 사명, 특징이 온라인 교회에서 어떻게 가능할지를 평가해 보겠다.


    ⊙ 예배

    오프라인 교회도 따라가지 못하는 이상적인 예배를 논하기보다는 현실적인 오프라인 교회의 예배와 온라인 교회의 예배를 비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예배란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경배하고 인정하며 그 분의 말씀 선포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목적을 위해서 오프라인 교회의 예배는 주로 기도와 찬송, 설교, 헌금 등의 순서로 이루어져 있다. 예배 중 옆 사람과 인사를 하도록 하기도 하지만 교제의 기능은 현재 오프라인 교회에서도 별로 크지 않은 것 같다. 현재 개발되어 있는 기술로는 오프라인 교회의 프로그램을 온라인 상에서 진행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전에는 초고속 통신망의 미비로 주로 설교 본문을 텍스트로 보내주어서 참여자가 읽는 수준이었지만 현재는 이미 동화상을 공급하는 것이 실용화되고 있다.

    동화상은 음성과 함께 제공되어지므로 육신적인 몸이 참여하지 않았을 뿐이지 오프라인 교회의 건물 안에 있는 것과 동일한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 오히려 온라인 상에서는 오프라인 교회가 제공할 수 없는 보조적인 배경이나 분위기, 추가적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
    온라인은 아니었지만 미국에서는 1980년대와 90년대에 텔레비전 교회(televised church)가 한때 유행하였다. 회중은 자신의 집에 있는 TV 앞에서 예배에 참석한다.

    목회자가 예배를 인도하고 성가대의 찬양도 있으며 필요할 경우 미리 녹화되어진 간증이 실제 상황 속에서 드라마처럼 볼 수 있도록 제공되어진다. 헌금은 온라인 구좌로 보내면 된다. 미국에서의 텔레비전 교회는 일부 부흥사들의 전유물이 되다시피 하였고 이들의 지나친 헌금 강조와 몇몇 부흥사들의 타락한 생활로 파국에 이른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의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텔레비전이 오프라인보다 너무 강력한 매체였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보수적이고 복음적인 교회 목회자들이 지금까지도 기독교 채널을 통해서 건전한 텔레비전 교회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이 텔레비전 교회는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혼합형태였다.

    즉 오프라인으로 예배가 진행되어지고 이를 텔레비전으로 방영하는 방식이었다. 예배에 참석 못한 사람들이나 관심있는 사람들에게 접근한 방식이었다. 일부 텔레비전 교회는 오프라인 회중보다 오프라인이 아닌 회중이 더 많기도 했다. 이것은 온라인 교회의 중간 단계로 받아들여 질 수 있고 예배 자체의 경험으로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일부에서는 인격적 접촉이 없는 이런 예배들을 통해서는 영성의 전달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방법상의 정도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영성이 인격적 접촉만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서적을 통해서도 훌륭한 영성의 전달과 감동을 받곤 한다. 때로 목사님의 설교 테이프를 들으면서 감동과 변화를 체험하기도 한다.

    일부 순복음교회에서는 지역교회 목회자가 설교를 하지 않고 큰 교회에서 온 비디오 테이프를 보며 예배를 드리기도 한다. 그러나 충분한 예배 체험이 된다고 한다. 특별히 현재 개신교 예배가 점차 설교 중심의 예배로 되어지고 있는 현실에서는 온라인 예배를 금하거나 막을 논리도 저항력도 갈수록 떨어질 것이다.

    온라인 교회의 예배는 오프라인과는 달리 시공을 뛰어넘을 수 있으므로 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복음서의 예수님 말씀을 강해할 때는 이스라엘의 지리적 배경을 눈으로 보면서 들을 수 있다. 선교에 대한 메시지에서는 선교현지의 모습이 말씀과 함께 제시되어질 수 있다. 마치 청중이 사건의 현장에 있는 느낌을 가지고 말씀을 들을 수 있다.

    필요한 통계와 사진, 지리적 상황, 지도, 참고 구절, 원어 해설 등 오프라인 상에서 공급하지 못하는 고급의 정보를 함께 보내줄 수 있다. 메시지를 지금과 같은 강연 형식의 1차원적 방법보다는 다양한 기술의 도움으로 입체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 최근 젊은 층에 호응을 얻고 있는 연극이나 드라마의 방식을 설교에 가미시킬 수도 있다. 시각적 미디어의 영향이 절대적인 세대에게 현재와 같은 연설식의 설교가 얼마나 먹혀 들어갈지를 고민한다면 온라인 교회의 설교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는 가능성을 가진다.

    설교 이외의 부분인 찬양과 기도의 체험은 약화되어진다는 주장도 있다. 이도 방법상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최근 한국에 ‘열린 예배’로 큰 영향을 미치는 새들백 교회나 펠로우십 교회와 같은 ‘사도적 교회’(Apostolic Church)들은 회중 찬송보다는 전문적인 찬양 사역자들의 찬양으로 예배를 인도한다. 본인이 원하면 함께 부르고 원치 않으면 안 불러도 괜찮다.

    이를 문제삼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기도의 참여는 온라인 상에서는 오히려 오프라인처럼 순서와 시간에 쫓겨서 간략하게 넘어갈 필요가 없다. 목회자의 목회 기도를 원하면 다시 문자로 읽을 수도 있고 중보기도도 자신이 원하는 만큼 깊이 오래 기도하고 다음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 동시에 언제라도 사람들의 기도 요청에 접근할 수 있고 교회의 기도 제목을 받아서 기도하면 응답의 결과도 온라인으로 확인이 가능하다.
    결론적으로 성례전을 제외한 예배의 대부분의 기능을 온라인 상에서 처리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 교제

    교제란 그리스도의 몸과 연결되어져 있는 교회의 중요한 기능이다. 지금까지 온라인 교회의 약점으로 인격적 접촉이 없으므로 진정한 교제 공동체가 될 수 없다는 지적이 있었다. 또한 온라인을 통한 교제는 익명(匿名)성으로 인해서 진정한 교제를 왜곡시키는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실제의 자신이 아니 이상적 혹은 가상적인 자신을 소개하고 이로 인해서 실제 오프라인에서 만나게 될 때 실망하고 거짓됨에 상처를 받기도 한다. 그리스도인의 교제에 이런 방법이 가능하겠는가?

    필자는 이 교제의 문제도 역시 인식의 문제라고 본다. 부정적인 관점에서 보면 한없이 부정적이지만 새로운 세대의 관점에서 볼 때 오히려 역기능보다 순기능이 더 많을 수 있으며 부정적 문제점은 얼마든지 보완이 가능하다. 우선 온라인 상의 교제가 가지고 있는 순기능적 역할을 살펴보자. 한번 인터넷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동호인 모임에 들어가 보라. 엄청나게 많은 동호인 모임이 존재하는 것에 놀라게 된다.

    그리고 이 동호인 모임에서 오프라인보다 더 깊이 있는 교제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최근 교회의 중고등부에서는 상당수가 동호인 사이트에 교회의 사이트를 개설하고 있다. 필자의 아들이 참여하고 있는 사이트에 들어가면 매일 적지 않은 아이들이 대화에 참여하고 있고 젊은 교회 선생님들도 참여하고 있다. 잡담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자주 얼굴과 얼굴을 대하고서는 쉽게 말하지 못하는 것들을 선생님들에게 털어놓는 것을 보게 된다.

    오히려 청소년 세대는 온라인 상의 대화가 오프라인 상의 대화보다 더 쉽게 마음을 열 수 있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예배에 대한 반응, 선생님에 대한 생각, 친구에게 상처받은 것, 자신의 가정적 문제, 외로움, 신앙에서의 의심, 학교 생활, 친구와의 수다 등등. 현대의 젊은 세대는 핸드폰으로 대화하기보다는 문자 메시지를 더 즐긴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시간이 더 많이 걸리고 타자를 치는데 불편하지 않은가라는 것은 오프라인 세대의 고민일 뿐이다. 이들은 말하는 속도와 비슷하게 문자를 쳐나간다. 물론 문법과 맞춤법은 사라져 가고 있지만… 멘토링과 같은 일대일의 교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오히려 오프라인 보다 더 깊은 대화가 가능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이들이 선호하는 것은 시간과 장소의 장애가 없다는 것이다. 매일 저녁 9시에 교회에 모여서 중고등부 모임을 한다고 생각해 보라. 아마 모일 수 있는 학생은 극히 적을 것이다. 부모들도 매일 밤 자신의 딸이 어두운데 나가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매일 저녁 9시에 온라인 상에서 원하는 학생들이 모이도록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적당한 시간에 선생님이 대화를 중단시키고 잠자라고 말려야할 정도이다. 교사가 잘 인도만 한다면 특정한 신앙 주제에 대해서 매일 토론을 할 수도 있다. 토론 문화에 약한 한국인이지만 온라인 상에서는 쉽게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다.
    온라인 교회의 교제는 익명성을 지양(止揚)하여야 한다. 익명은 정직하지 않은 교제를 유도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교제의 장에는 실명을 사용하고 자신의 개인정보를 올려놓아 주어야 할 것이다.

    교제 중 상대방의 이름을 클릭하기만 상대방의 사진과 함께 주소, 연령, 가족관계, 직업 등 기본적 정보가 보이도록 해주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인터넷이 음란과 폭력 등 유해한 공간이 되어 가는 것은 모두 익명성이라는 특징에 있다. 온라인 교회는 강력하게 실명을 사용하고 자신의 정보를 공개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최근에는 화상대화가 가능해 지고 있다. 수년 전에는 꿈같은 일이었지만 이제는 웬만한 사람들은 PC 카메라를 장착시키고 있다. 아직은 통신망의 문제로 실감이 나지 않지만 잠시 후에는 여러 명이 서로 한 화면에 얼굴을 보면서 마음껏 대화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런 시대에 교회가 온라인 상의 교제를 하는 것은 오늘날 전화 교제보다 더 적절한 방법이 될 것이다.

    5.교회론적 평가


    ⊙ 교육

    교육의 기능은 오히려 오프라인 보다 온라인 교회가 더 유리한 부분이다. 최근 들어서 실제 학교에 출석하지 않는 온라인 대학들이 설립되어지고 있다. 수년 전에만 해도 필자 자신도 컴퓨터 상에서 온라인 교육이 효과가 있을 것인지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이었다.

    컴퓨터 화면에 교수의 강의 노트를 올려준다고 해서 강의 효과가 있을 것인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개발되어진 온라인 강의들을 보면 이런 염려를 완전히 불식시켜 줄만큼 발전이 되어있다. 초기의 웹보드를 사용하던 기술에서 이제는 온라인 강의 전용 프로그램들이 잘 발달되어서 오히려 오프라인 강의보다 강의 효과가 높다고 평가할 정도이다.

    단순한 텍스트나 동영상으로 강의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질의 응답 기술을 활용하고 효과적인 노트작성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실시간에 간단한 시험이 따르면서 집중하지 않고 강의에 참여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어졌다.
    교회는 이러한 온라인 교육의 개념을 교회 교육에 받아들여야 한다. 오히려 오프라인 교회가 누리지 못하는 많은 교육의 기회를 온라인 교회는 활용할 수 있다. 제자훈련, 성경공부, 교리 교육, 새신자 훈련, 직분 교육, 주제별 세미나 등 온갖 교육을 재택 교육의 방법으로 실시할 수 있다.

    특히 바쁘다는 말이 입에 붙어있는 현대의 세대들에게 시간적 공간적 제약이 없다는 것은 커다란 장점이다. 필자 자신도 실제 온누리 교회에 가본지는 15년이 넘지만 자주 온라인 상에서 온누리 교회를 방문하고 교회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교육의 기회들을 즐기고 있다. 온라인 교육은 초기 프로그램 개발에 적지 않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지만 일단 한번 완성되어지면 업그레이드시키는 것이 쉽고 얼마든지 자료를 확대 보충할 수 있어서 좋은 교육의 장이다.


    ⊙ 선교

    선교는 교회의 기본적 존재이유이다. 선교의 개념을 문화적으로 이해하여서 국내선교와 해외선교로 구분하던, 신학적으로 이해하여서 복음전파와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으로 이해하던 선교는 교회의 근간이다.

    교회를 모이는 교회와 흩어진 교회로 역할을 구분한다면 선교는 흩어진 교회의 사명이다. 물론 선교에 대한 교육과 도전, 전략 수립 등 모이는 교회 부분에서 감당해야 하는 면도 있지만 선교의 실행 자체는 오프라인 교회의 경우에도 교회의 울타리 밖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이런 면에서 온라인 교회가 선교적 기능을 감당하는 면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온라인 교회의 회중들도 자신의 직장에서, 이웃과의 관계에서, 친적 간에 전도의 삶을 살아가는데 오프라인 교회의 회중과 차이가 없다. 선교사를 위한 기도, 선교에 대한 도전 등은 예배와 교제, 교육의 기능에서 능히 이루어질 수 있다.

    여름을 이용해서 단기 선교여행을 행하거나, 헌신한 사람이 단기나 장기로 선교사로 지원하는 일 등에는 오프라인 교회나 온라인 교회나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사회 봉사적 기능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실제 시간을 내서 자원봉사로 참여하여야 하는데 온라인 교회의 사람들도 자신의 사회 활동의 한 부분으로 참여하여야 한다.

    즉 온라인 교회란 주로 모이는 기능이 온라인 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전도, 선교, 봉사적 기능에서 조차도 인터넷 상에서만 행해지는 교회란 의미는 아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과 헌신에 근거해서 그들은 온라인 교회가 제안하는 다양한 사역과 봉사의 기회에 실제 시간을 내서 참여하여야 한다. 이런 행함조차도 온라인에만 존재한다면 그것은 사이버 교회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 허상의 교회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온라인 교회는 사역적, 봉사적 기능을 오프라인 교회만큼이나 강하게 요구하고 훈련시켜야 한다.


    ⊙ 성례전

    교회는 성례전적 공동체이다. 만약 성례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온전한 교회 공동체로 인정할 수 없다. 이 면에 있어서 두 가지 상반된 주장이 제시되어있다. 하나는 성례전에서 침례는 반드시 신앙고백자의 침수가 있어야 하므로 온라인 상에서 침례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성찬도 마찬가지로 온라인 상에 있는 회중이 육신적으로 분병과 분잔에 참여할 수 없으므로 성찬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온라인 성례전에는 물도 떡도 없으므로 성례전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이것을 허용하면 현대판 영지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성례전은 집례자의 영적 권위를 중히 여기므로 온라인 상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온라인 교회는 성례전이 없는 불완전한 교회라는 것이다. 반대의 주장은 침례와 성찬이라는 성례전 자체가 상징이라는 것이다. 실제 침수하는 물에 특별한 영적 권능이 있는 것이 아니며 성찬에 사용되어진 떡과 포도주가 실제 예수의 육신과 상관된 것이 아니라 모두 실체를 나타내는 상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실체가 아니라 상징이라면 행위보다는 의미가 중요하므로 온라인 상에서 이들을 상징적으로 처리하는 사이버 성례전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즉 집례자가 상징적인 성례전을 집행하고 온라인 상의 참여자는 그 상징적 의미에 동감하기만 한다면 성례전적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신학적 답변은 쉽지 않다. 개신교회는 지금까지 가톨릭 교회가 주장하는 ‘화체설’(化體說)을 부인하면서 떡과 잔을 상징적 존재로만 인정하여 왔다. 그렇다면 이 상징적이라는 개념이 한번 더 비약을 해서 눈으로 보기만 하는 상징으로까지 갈 수 있겠는가? 성례전이라는 의식도 문화적 변화에 초월된 존재는 아닌 듯하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 친히 보여주신 모델은 하나의 떡을 찢어서 나누고 한잔의 포도주를 돌아가며 마시는 의식이었다. 오늘날은 시간상의 문제와 위생상의 문제로 기계가 찍어낸 듯한 동전모양의 떡과 개인 잔을 마신다. 이런 성찬에서는 이미 나눔이라는 공동체적 성격은 깨어져 버린 것이다. 점차 현대 교회에서 성찬의 위치는 약화되어져 가고 있다.

    가톨릭 교회처럼 미사의 중심이 아니라, 개신교회 중에는 일년에 한두 번의 성찬식만을 행하고 그것도 성도가 많이 나오지 않는 주일 저녁에 집행하는 교회들이 적지 않다. 아마 일년 내내 성찬에 참여하지 않는 성도도 있을 것이고 현대 교회는 점차 이것을 문제삼지 않는 추세이다. 일부 논자들은 개신교회는 앞으로의 온라인 시대에 지금과 같은 오프라인 교회로서 생존하기 어렵겠지만 성례전을 중시 여기는 가톨릭 교회는 오프라인 교회로 생존할 것이라고 예견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례전의 중요성은 단순히 문화적 산물로 간과될 수 있는 성질은 아니다. 우리에게 성례에 참여할 것을 예수께서는 명령하셨다. 성례전 자체는 물론 상징적 의식이지만 의식이라는 것이 우리의 신체적 경험을 통해서 의미를 배우도록 하는 기능이라면 단순한 의미의 전달 이상이라고 보아야 한다. 필자는 차라리 온라인 교회가 성례전만은 오프라인으로 이루기를 제안한다.

    이는 현재의 온라인 교회가 오프라인 교회의 보조적 수준에 머무르는 것의 반대 개념이다. 즉 오프라인 형태의 교회가 단지 온라인 교회의 보조적 수단이 되는 것이다. 교회의 모든 기능을 온라인 상에서 처리하지만 성례전을 위해서는 일년에 몇 번 지역별로 모여서 오프라인의 모임을 갖는 것이다.
    요약을 하면 교회의 정의라는 면에서나 교회의 기능이라는 면에서 온라인 교회가 교회로서 인정되어질 수 있느냐라는 질문에 필자는 온라인 교회를 교회로 인정하는데 하등의 문제가 없다고 본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충분한 예배와 교제의 기능을 행할 수 있고 교육의 면에서는 오히려 오프라인 교회가 따라오기 어려운 유리한 면을 가지고 있다. 선교, 전도, 봉사 등의 영역은 실제 오프라인 교회와 온라인 교회 사이에 구분이 불필요한 영역이다.

    성례전의 취약점이 있지만 이를 오히려 오프라인 모임을 보조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 문제가 없다고 본다. 물론 이때의 오프라인 모임은 기존 교회와 같은 구조를 가질 필요는 없다. 가족 단위로 이루어질 수도 있고 혹은 나누어진 많은 소그룹으로도 가능하다. 오히려 온라인 교회는 오프라인 교회가 따라올 수 없는 강점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시공의 제약에서 벗어나게 된다. 온라인 교회의 메인 서버가 서울에 위치한다고 해서 서울지역의 사람들만 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부산에 있는 사람도 참여할 수 있고 심지어 외국에 있는 교포도 교인으로 참여할 수 있다. 함께 교제할 수 있고 교육도 받을 수 있다. 온라인 교회는 국경과 민족을 넘을 수도 있다. 통신망만 충분하다면 선교지 교회의 기능을 해줄 수도 있고 지도자가 부족한 곳에 얼마든지 훌륭한 교회의 역할을 행해 줄 수도 있다. 주일을 중심으로 활동하지만 주중 언제라도 참여 가능한 글자 그대로 항상 열려 있는 교회가 될 수 있다.

    이 현 모 교수
    침례신학대학교 (선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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