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과 같이 은혜 받기를 원하는 말씀의 제목은 ‘야곱의 결사보고’입니다. 야고의 일생을 거울로 삼아 우리의 생활을 비추어 보면서, 잘한 것은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못한 것은 회개하고, 새해를 위하여 새로운 설계를 하여 결재받는 엿새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한 농부가 좋은 씨앗을 구하여 땅에 심었습니다. 뾰족뾰족 새생명의 싹이 움텄습니다. 씨를 심은 농부가 ‘이번 농사는 잘 되는구만’ 마음이 좋습니다. 싹이 푸르고 푸르게 무럭무럭 자라나니 농부의 마음도 흐뭇합니다. 가을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무르익은 곡식이 황금 물결을 치기 시작합니다. 지나가는 사람은 칭찬하고 땀 흘려 농사지은 농부는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듯이 만족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좋은 것은 ‘거두리로다 거두리로다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입니다. 풍년 곡식을 거두어서 창고에 가득 쌓아 놓을 때에 농부의 기쁨은 절정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어린애들이 잘 자라나는 것이 대견합니다. 젊은 사람이 실력 있게 일하는 것도 귀합니다. 그러나 어려서 잘 자라나고 젊은 사람이 일을 잘 하는 것도 좋고 좋지만 연세가 높으신 다음에 하나님을 높이고 만민에게 미칠 선한 일을 많이 하여 평생의 업적을 쌓아놓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아랫사람들에게 대접을 받고 자손들에게 효도를 받는 성공한 사람을 보면 너무나 부럽습니다.
그보다 더 귀한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날 때에 천 사람 만 사람이 옷깃을 여미면서 ‘아까운 분이 가셨구나, 나도 저 분처럼 살아야지’하는 말없는 교훈을 받고 결심하는 사람이 많이 생겼다면 그 사람은 세상에 와서 밥값을 톡톡히 하고 하늘나라에 가서 면류관 상 받을 성도입니다.
오늘이 설교를 들으시는 젊은이들은 실력 있는 일군이 되기를 부탁하고, 이 말씀을 들으시는 연세 높으신 분들은 자손들에게 축복하시며 하나님을 만날 준비하시기를 부탁드리고, 이 말씀을 듣는 저와 여러분은 한 분도 빠짐없이 하나님 앞에 선한 업적을 쌓아놓고 면류관 상을 받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면 오늘은 야곱의 결산보고서를 한 번 더듬어 보면서 은혜를 받겠습니다.
이삭이 아들 둘을 키웠는데, 큰 아들의 이름은 에서요, 작은 아들의 이름은 야곱입니다. 야곱은 쌍둥이로 어머니의 복 중에서 똑같이 자라났건만 먼저 나지 못하고 후동이로 났기 때문에 동생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맏아들이 못된 것이 마음에 원망스러웠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사람은 재산을 자손들에게 나누어 줄 때 맏아들에게는 꼭 두 몫을 줍니다.
또 맏아들은 종갓집으로 그 조산을 계대하는 권한이 있습니다. 생각을 해 보니 맏아들이 못되어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마음이 아파서 ‘내가 왜 몇 분 떨어져 나와 후동이 동생이 되어 이 꽁이 되었나, 내가 비록 동생이만 맏아들의 복을 하나님 앞에 받았으면 좋겠다’하여 장자의 축복을 사모하고 사모하다가 인간의 수단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리석은 형을 속이고 눈먼 아버지를 속이고 아버지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연세가 높아 눈이 어두워진 아버지는 큰아들인 줄만 알고 야곱에게 마음껏 복을 빌어주었습니다.
이렇게 복을 받았으나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버지는 노하여 ‘이놈의 자식 늙은 애비를 속였구나’하시고, 형은 ‘이 놈의 자식 아버지만 세상을 떠나면 죽여버린다’ 이렇게 중얼대는 말을 어머니가 들었습니다. 그러니 어머니는 작은 아들 야곱을 불러서 “네 형이 너를 죽이려고 그러나 야단났구나” 말했습니다.
깜짝 놀란 야곱은 형의 낯을 피해서 밧단아람 외삼촌의 집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야곱은 도망을 가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응답을 받았고 심촌 집에 이른 다음에는 부지런히 일을 했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일을 했던지 하나님의 축복과 함께 사람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20년 동안 밧단아람에서 지내는 동안 어머니가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도 몰랐습니다.
이렇게 20년이 지난 후에 많은 재산과 열두 아들과 딸 하나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집을 떠날 때에는 지팡이만 들고 도망가돈 외로운 졸장부가 돌아올 때에는 큰 부자가 되어 많은 가족을 거느린 가장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동생을 미워하던 에서는 20년이란 세월이 흘렀건만 동생을 죽여버리려는 생각을 잊어버린 적이 없습니다. 마침 동생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옳다. 때가 왔구나, 아버지가 비록 살아계시지만 이번에는 죽여버리고 말겠다’ 이리하여 부하 400명을 거느리고 야곱을 맞으러 나옵니다. 야곱을 맞으려는 곳은 광야입니다. 도시가 아닌 빈광야입니다. 여기서 야곱이 형을 만나면 누가 야곱을 보호하겠습니까?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야곱은 형이 400명 군인을 거느리고 온다는 말을 들으니 ‘이제는 죽었구나’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습니다. 이 때에 야곱이 보통 사람 같으면 세상을 원망하고 형을 저주하면서 냉금냉금 뛸 터인데, 형이 자기를 죽이려 온다는 말을 들은 야곱은 다음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첫째, 하나님 나는 약합니다. 자기의 약함을 알고 겸손해졌습니다.
둘째, 형이 나쁜 것이 아니고 내가 형을 분노시킨 죄인입니다. 형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자기가 범한 죄를 가슴치고 울며 회개에 들어갑니다.
셋째, 내가 형하고 싸움을 해 봤댔자 애꿎은 사람만 죽고 나는 질 것이니, 될 수만 있으면 형의 마음을 돌려 화목하도록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래야 암양 200마리, 수양 20만 마리, 암염소 200마리, 수염소 20만 마리, 약대와 그 새끼, 소와 그 새끼, 지금 우리 돈으로 말하면 1억이 넘는 많은 선물을 자기를 죽이려고 달려오는 형에게 먼저 보내었습니다. 그 다음에 야곱은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가리까
“하나님 나를 버리시면 나는 이제 갈 곳이 없습니다. 내 죄가 나를 죽이는 저주를 불러왔는데 내가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하나님 내 죄를 용서하시고 형의 마음을 부드럽게 바꾸어 주옵소서”
야곱은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자기의 죄를 회개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매어달려 울부짖어 기도할 때에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천사를 붙들고 “나를 축복해 주세요” 이러기를 밤을 새웠습니다.
“이것 놓으란 말이야”
“못 놓겠습니다.”
“놓아”
“못합니다”
천사가 야곱을 메치니 디굴디굴 나가떨어집니다. 날이 밝아옵니다. 이제는 죽을 판 살 판입니다. 이제 축복을 못 받으면 야곱은 죽습니다. 이리하여 야곱은 결사적으로 천사의 옷자락을 붙들고 복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네 이름이 무엇이냐?”
“제 이름은 야곱입니다.”
야곱이라고 하는 말은 나는 거짓말쟁이요 도적놈이라는 뜻이니 이 대답은 회개하는 말입니다. ‘나는 형과 아버지를 속인 거짓말쟁이요, 형의 장자의 명분을 도적질 한 도적놈이니 나는 죄인입니다’하고 회개하는 야곱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오내, 이제는 네 이름을 고쳐라”
“예?”
“이스라엘이라고 해라”
이스라엘이 무엇입니까? 승리자! 자신을 이기는 승리자! 원수를 사랑으로 이기는 승리자입니다.
“승리자로 만들어 주마”
그제서야 야곱은 천사의 옷자락을 놓아주었습니다.
“구주 예수 의지함이 심히 기쁜 일일세
허락하심 받았으니 의심 아주 없도다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예수 예수 귀한 예수 믿음 더욱 줍소서”
천사는 가고 없지만 야곱은 하나님의 허락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승리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니 형을 무서워할 필요도 없고, 형을 미워할 필요도 없고, 자신이 약해도 낙심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승리할 것을 허락받은 야곱은 낙심하지 않고 400명을 거느리고 칼을 들고 다가오는 에서를 향하여 담대하게 마중을 나갑니다.
멀리서 형과 400명 용사가 말을 타고 무섭게 달려오는데 야곱은 땅에 엎드렸습니다. 절을 합니다. 또 몇 걸음 나아가다가 땅에 엎드려서 절을 합니다. 에서가 가까이 오는데 멀리서부터 일곱 번이나 침착하게 땅에 엎드려 절을 합니다. 이렇게 일곱 번이나 절을 하는 것은 질서 있는 움직임입니다. 조심성 있고 너무나 질서정연한 발걸음입니다.
에서는 ‘이놈의 자식 죽여버린다’고 칼을 들고 오다가 한 번 절을 하는 것을 보고는 ‘저 놈의 자식이 절을 한다’ 두 번 절하는 것을 보고 ‘아따 저것 봐라’ 세 번 절을 하니 ‘아하’ 네 번 절하는 것을 보고 ‘ 저 놈의 자식이 새 사람이 되었나 보다’ 다섯 번 절할 때에 칼을 집에 꽂고 여섯 번 절하고 일곱 번 절할 때에는 에서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말에서 뛰어내려, 동생의 목을 칼로 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잘 있었니” 하며 목을 얼싸안는 것이었습니다. 미움을 사랑이 정성을 녹여버린 승리자!
“형님 이렇게 저를 사랑으로 대해 주시는 형님의 얼굴을 뵈오니 하나님을 대한 것처럼 기쁩니다”
“음, 그동안 수고했구나”
서로 울면서 천년 가도 녹일 수 없던 미움을 사랑으로 몽땅 녹여버렸습니다.
에서가 야곱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나니 야곱은 미리 지시해 두었던 대로 자식들을 차례차례 형님 앞에 절을 시킵니다.
“이 사람들은 누군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맏아들, 둘째 아들, 셋째 아들, 넷째 ...아들입니다.”
“오 그래 조카들이 잘 샜겨구만”
“이 사람은 또 누군고?”
“네게 주신 딸입니다.”
“이쁘기도 하구나”
“이건 또 누군고?”
“열한째 아들입니다.”
“아이고 더 잘 생겼구만”
이렇게 울다가 웃다가
“그런데 어제 자네가 무엇을 많이 보냈는데, 그것은 무엇인가?”
“제가 형님을 대하려니 너무 기뻐서 적은 정성이나마 선물을 보냈습니다.”
“적다니? 많이도 보냈더라, 너 그동안 객지에서 수고했으니 내가 선물을 받은 셈칠테니 도로 가져라. 나도 큰 부자로 너만 못 하지 않아. 네 것은 네가 가져라”
“아이고 형님 무슨 말씀입니까? 그저 적지만 받아주십시오”
(따라합시다)
“미움을 사랑으로 승리하니 손톱 하나 안 다치고 양 한 마리 안 죽고 사랑의 잔치가 베풀어지고”
야곱은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란 이름 그대로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승리한 야곱이 147살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만하면 장수도 했습니다.
이제 147살이 되도록 장수한 야곱은 하나님 앞에서 어느 정도 복을 받았습니까? 아들이 열 둘이요, 딸이 하나인데 하나도 죽지 않고 147세에 세상을 떠날 때에 열두 아들이 고스란히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열두 아들의 효도를 받았습니다. 열한 째 아들 요셉은 천하의 부자 나라 애굽의 국무총리이니 국무총리의 아버지로서 만민 앞에 존경을 받았습니다.
(따라합시다)
“하나님의 사랑받고, 자손들의 효도 받고, 만민의 존경받고”
이스라엘 백성은 조상 세분을 꼽는데, 아브라함, 이삭, 야곱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 말합니다. 이같이 큰 축복을 받고 살았습니다.
야곱은 147세에 세상을 떠나기 바로 직전에 열두 아들을 자기 앞에 앉히고 축복기도를 해 줍니다. 그런데 야곱이 축복해 준 복이 3천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 자손에게 임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세상을 떠나면서 유언을 합니다.
“내가 이제 세상을 떠나면 장례를 하되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막벨라 굴을 준비했는데 거기에다 나를 장례해다오”
애굽 카이로에서 500리가 넘습니다. 얼마나 멉니까? 500리가 넘는 곳에 장례를 해 달라니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너무 어려운 것을 유언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장례식이 널아마 굉장했습니까? 국무총리의 아버지의 장례식에 장관들이 다 나섭니다. 마병대가 나섭니다. 성경 가운데 야곱의 장례식처럼 굉장한 장례식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아브라함보다 이삭보다 오히려 야곱의 노후가 너무나 행복스러웠습니다. 그러면 야곱의 놀라운 평생을 저와 여러분은 옛말 듣는 것처럼 흘려보내지 말고 우리도 이 복을 받아야겠습니다. 이 복을 받을 사람이 누구입니까? 야곱이 복 받은 일곱 가지 배경을 결론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귀중성을 안 것입니다. 야곱은 돈도 귀하고 명예도 귀하고 아들 딸도 귀하지만 하나님의 축복이 더 귀한 줄 알았습니다. 돈을 벌려다가 하나님께 욕을 돌리므로 하나님의 축복이 떠나면 돈이 있어도 멸망인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다음에 돈이 생기면 그 돈이 귀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다음에 장관이 되면 그 권세가 귀중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다음에 박사가 되면 그 박사가 귀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없는 박사, 하나님의 축복이 없는 권세는 멸망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얼마나 귀합니까?
둘째로, 부지런히 일한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내게 복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으니 나는 팔자가 좋을 거야’하며 놀면서 게으름을 피웠습니까? 사람은 일하고 밥을 먹어야 비로소 값있고, 일하고 남겨서 남을 주면서 살아야 칭찬과 존경받는 사람이지, ‘팔자 좋은 사람은 놀아도 잘 살아’한다면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하신 하나님 앞에 매를 맞습니다.
충현교회의 젊은이들이여, 남이 일하는 시간에 놀지 말고 남이 공부하는 시간에 장난하지 마고 자기의 책임에 땀을 쏟고 뼈가 아프도록 일을 할 줄 아는 노력하는 사람이 됩시다. 야곱은 피땀흘리는 노력가였습니다.
셋째로, 항상 겸손한 것입니다. ‘내가 복 받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지 내가 잘나서 이 복을 받았나’ 야곱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면서 겸손했습니다.
넷째로, 자기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질 줄 안 것입니다. ‘형이 칼을 갈고 죽이러 오다니 형이 못 되었지 20년 전에 한 번 속인 것을 가지고 이제까지 죽이려고 그래? 형은 너무해 너무해’ 형이 너무하다고 천 번 말할 수 있겠지만 야곱은 그 말을 안 했습니다. ‘내가 범한 죄가 형의 마음을 20년 동안 괴롭혔으니 이 놈이 죄인이지’ 야곱은 모든 죄의 책임을 자기가 걸머지고 회개한 사람입니다.
다섯째, 할 수만 있으면 화목을 도모한 것입니다. 형은 20년 전에 두 번 속였다고 칼을 갈고 가지고 400명을 거느리고 오지만 야곱은ㅇ 도망도 가지 않고 싸울 준비도 하지 않고 선물을 준비해서 형에게 보냈습니다. 선물의 값은 아무리 계산을 적게 해도 우리 돈으로 1억이 넘습니다. 아무리 큰 부자라도 그런 많은 선물을 보낼 수 있겠나 말입니다. 이것은 원한을 풀고 화복하기 위해서 생명을 내 놓은 희생의 화목운동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회개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고, 형에게 선물을 보내어 형님과 화목을 한 화목동이입니다.
여섯째, 기도한 것입니다. 야곱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낙심도, 원망도, 저주도 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해결해 주옵소서” 천하가 무엇이라고 해도 기도하여 하나님의 허락만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허락은 귀합니다. 야곱은 환도뼈가 부러져도 매어달려 축복받기를 원했습니다.
일곱째, 매사에 조심하여 산 것입니다. 야곱은 축복을 받은 다음에도 질서있게 조심하고 살았습니다. ‘너는 이스라엘이다. 형을 이긴다’라는 허락을 받았지만 ‘형 나 이제 왔어 그동안 잘 있었어?’ 이러면서 나타나지 않고 일곱 번이나 절을 하고 끝까지 겸손하고 끝까지 조심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도 겸손하고 조심했습니다. 말 한 마디를 조심하면서 질서 있게 움직이고 일곱 번 절한 다음에 형이 목을 안고 입을 맞출 때에 자기의 자손들을 차례차례 나가서 절을 하게 하니 얼마나 질서 있는 일인가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저와 여러분은 야곱의 결산보고 중에 일곱 가지 중요한 것을 잊지 맙시다.
- 하나님의 축복의 귀중성을 알고
- 부지런히 일할 줄을 알고
- 언제나 교만 없는 겸손한 자가 되고
- 어려움이 생기면 남에게 핑계하지 말고 내 잘못부터 찾아 회개하고
- 될 수만 있으면 원수 삼지 말고 가슴 치며 회개하고, 용서하며 화목하고
- 어려운 일 만나도 하나님 앞에 매어달려 기도하고
- 응답을 받은 다음에도 끝까지 조심합시다.
이같이 하여 야곱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만민에게 대접을 받고, 오고 오는 후손들에게 축복해 주고, 자신은 하나님 앞에 면류관 상급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김창인, 절기설교집, 충현교회출판부, 1986, pp. 414-427
② 제목: 보라, 새날이로다
고린도후거: 5:16-17
새해가 되면 모든 것이 새롭습니다. 달력도, 계획도, 마음도, 기분도, 모두가 새롭습니다. 금년에는 잘 해야지 하고 다짐도 새롭게 합니다. 사실 1월 1일이라고 해서 다른 시간보다 새로울 것은 없습니다. 보통 시간과 똑같이 반복될 뿐입니다. 그래서 케에르케고르는 사람은 원형으로 된 문자판에 의해서 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시계 바늘이 끊임없이 반복하여 원을 그리며 도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한결같이 내일도 오늘처럼 그렇게 돌겠지 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새해라고 해서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꾸준히 흐르는 시간을 그냥 계속해서 흐르도록 놓아두지 않았습니다. 시간을 토막토막 끊어 놓으신 것입니다. 즉 1년을 4등분으로 해서 춘하추동으로 구분해 놓으셨고, 1년을 12달로 나누어 놓으셨으며, 365일을 1주기로 돌고 나서는 새로 다시 시작하도록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과 끝을 만들어 놓으심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늘 새롭게 각오하고, 새롭게 다짐하고, 새 마음으로 출발할 수 있도록 구분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새해 첫 주일을 맞이해서 새롭게 각오도 하고 또 새롭게 다짐도 하여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다”라고도 하였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면 새로워집니다. 정신도, 몸도, 영도, 생활도, 모두 새로워집니다. 이렇게 새로워진 우리가 새해에는 더욱더 새로워지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적어도 금년에는 네가지 면에서 새로워져야 하겠습니다.
첫째는 “생각이 새로워져야”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만 가장 복된 것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기능입니다. 세상의 모든 물건들은 모두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좋은 생각을 가지 사람들은 좋은 물건을 만들어 내고 나쁜 생각을 가지 사람들은 나쁜 물건을 만들어 냅니다. 똑같은 도구도 좋은 생각을 가지 사람들이 사용하면 인류 공익을 위해서 유익을 주는 결과를 가져오지만 옳지 못한 생각을 가지 사람들이 사용하면 엄청난 재해를 불러 오는 저주의 도구로 바뀌기도 합니다. 사람은 옳은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마음도 생활도 선해집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만나는 생활입니다. 하나님을 육신으로 마나는 것이 아니고 생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내 생각 여하에 따라서 하나님을 만날 수도 있고 못 만날 수도 있습니다. 생각 속에 온갖 잡념이 가득 찬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옳은 생각과 옳은 마음을 간직하여야만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금년에는 무엇보다도 생각을 새롭게 하는 해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둘째는 “시각이 새로워져야” 하겠습니다.
옳게 보고, 바르게 보고, 정확히 보는 시각이 중요합니다. 매사를 옳게 볼 때 오해가 없고 편견이 없고 사랑스럽게 보입니다. 편견을 가지고 사람을 보게 되면 정확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실패는 시각의 굴절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들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을 뿐 아니라 잘못 보았습니다. 롯의 아내는 보지 말았어야 할 것을 보았기 때문에 낙오하였습니다. 무엇을 보느냐, 어떻게 보느냐, 어떤 마음으로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축복도 보는 것에서 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주시기 전에 먼저 환상부터 주셨습니다. “네 자손을 땅의 모래와 같이, 하늘의 별과 같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마도 그 약속 당시 아브라함을 밖으로 불러내서 별을 보여주시면서 “보라 저 무수한 별들만큼 네게 자손을 주겠다” 그리고 그를 광야로 데리고 가서 “보라 저 무수한 모래만큼 내게 네게 자손을 주겠다”하고 약속 하셨을 것입니다. 이것이 환상적인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때부터 아브라함은 마음속에 풍부한 환상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밤만 되면 밤하늘을 우러러보며 “내 자손이 저렇게 많아질 거야”하며 장래 이루어질 환상을 그려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밤만 되면 즐거웠을 것입니다.
또 낮이 되면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도 뜨겁거나 피곤하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에게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꿈을 꾸며 광활한 대지 위를 걸어갑니다. 먼 지평 위에 널려 있는 모래와 돌멩이들이 모두 장차 태어날 자손들의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기에 뜨거운 태양도 그에게 문제가 되지 아니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뜨거운 낮이 되어도 즐거웠을 것입니다. 밤 하늘의 무수한 별들은 장차 태어날 자손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보였을 것이고, 대낮의 대지 위에 널려 있는 그 수많은 모래들은 또한 자손들의 수많은 머리로 보였을 것이니 가히 이런 광야의 생활이 그에게는 꿈의 생활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시각을 통하여 오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현실적인 축복을 주시기 전에 먼저 영롱한 환상부터 마음속에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천국은 네 마음 속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청결한 마음, 깨끗한 시각을 가진 사람만이 볼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시각부터 새롭게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불란서의 어머니들은 아이들의 공부방에 성화를 걸어준다고 합니다. 그 성화를 바라보게 되면 경건한 마음을 갖게 해 주고, 성스러운 시각을 조성해 주기 때문입니다. 위인들의 사진을 보면서 또한 지혜와 용기를 갖게 해 줍니다. 알프스 산을 올려다보고 있는 나폴레옹의 사진을 보면서 자녀들로 하여금 자신감도 갖게 해 준다고 합니다. 이것이 시각의 교정입니다.
그런데 탈선하는 아이들의 방에는 어딘가 문제가 있습니다. 공부방에 걸린 사진들과 꽂혀 있는 책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틀림없이 여자 사진이 걸려 있을 것이고, 음란 기사로 가득 찬 잡지책들이 꽂혀 있을 것이고, 건전치 못한 퇴폐 음반들과 비디오 테이프들이 널려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거기서 과연 어떤 생각과 상상들이 떠오를 것입니까?
경건한 가정과 세속적인 가정과의 차이는 그 집안의 장식물들을 통해서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벽에 어떤 그림이 걸려 있고 진열장에 어떤 것이 놓여 있는지만 보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하아가 선악과를 바라봄으로써 타락을 하였습니다. 롯의 아내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봄으로써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야곱의 딸이 음란의 거리를 기웃거릴 때 강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보지 말았어야 할 여체를 유심히 바라보았기 때문에 실수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을 한밤중에 밖으로 불러내서 은구슬 금구슬을 뿌려 놓은 것과 같은 환상적인 밤 하늘의 뭇 별들을 보이면서 약속을 하였겠습니까? 그것은 환상을 주시려고, 꿈을 갖게 하시려고, 꿈의 영상을 환상 속에서, 생각 속에서 익어가게 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꿈을 지니고 환상을 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시각을 새롭게 할 때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셋째는 “언어를 새롭게”하는 일입니다.
오늘날은 말의 공해 시대입니다. 말이 너무 많습니다. TV를 켜 놓아도, 라디오를 틀어 놓아도 언제나 우리는 쏟아져 나오는 언어를 접할 수 있습니다. 그밖에 수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이 다 말이 아닙니다. 책이 다 책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어 생활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서양인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Good morning” “좋은 아침입니다”로 하루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입 버릇처럼 무의식 중에 기지개를 켜면서 내뱉은 말이 “아리고 죽겠다”입니다. 하는 일 조금만 어려워도 내뱉는 말이 “죽고싶다”입니다. 부부가 다투다가 너무 쉽게 내 뱉는 말도 “우리 갈라서자”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말입니다. 말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말은 은영중에 자신에게 암시를 주는 힘이 있습니다. 나중에는 그 암시가 무서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말을 하는데 진지해야 하고 새로워져야 합니다.
최면학에서 잠이 오지 않는 사람에게 “잠이 온다, 잠이 온다”하고 암시를 주면 곧 잠이 오게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같은 암시를 최면학에서는 힌트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장가가 나온 것입니다. 자라, 자라 하면 아이가 금방 잡니다. 또 “너는 바보다”하고 어린아이에게 자주 힌트를 주면 그 아이는 진짜 자신을 바보로 믿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설교를 할 때마다 소망적인 자기 암시의 설교를 하면 설교를 듣는 성도들은 긍정적인 신앙인들이 되어 가지만 세상적인 어두운 면만을 자꾸 들추어내면 성도들은 “그러니 나만이라도 바로 살자”하고 각오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이 정도쯤이야”하고 자신의 부정을 합리화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말의 힘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라보는 꿈과 영롱한 환상이 없는 사람에게는 가나안이 보일 리가 없습니다. 그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삭막한 땅과 삼킬 듯한 메마름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불가능”입니다. 그들은 끝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올바른 언어를 사용하여야 합니다. 신앙인들은 무엇보다도 언어에 새로워져야 합니다. 매사에 불평이나 하고 불만을 토로하고 핑계하고 탓을 하다보면 그의 생활에서 밝음과 소망이 사라지고 맙니다.
넷째는 “옳은 의식”을 갖는 일입니다.
성경은 “ㅤㅇㅔㅆ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골 3:9)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의식은 그 사람의 생활을 지배합니다. 의식 구조가 잘못되어 있으면 구태의연에서 헤어날 길이 없습니다.
오늘날은 첨단의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 아직도 구태의연한 의식에 사로잡혀 살게 되면 자유한 신앙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신앙인들 가운데서도 옛날의 구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쓸데없는 미신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 아직도 조상 제사에 연연해서 어중간한 위치에 서 있는 사람, 아이들의 이름을 짓기 위해서 작명소를 기웃거리는 사람, 정초만 되면 점치는 골목을 배회하는 사람, 자녀들의 결혼을 앞두고 사주와 택일을 놓고 고심하는 사람들, 아직도 남존여비의 사상에 찌든 채 부인을 천시하는 사람들, 그리고 묘 자리에 연연하는 분 등 이 같은 정신들은 반드시 새로워져야 하고 고쳐져야 할 낡은 사고 방식과 의식 구조들입니다.
새시대는 새사람을 요구하고 새정신과 새마음을 필요로 합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움 피조물이라”
새해에는 새로운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십시다. 그리고 새해에는 옳은 생각, 옳은 언어, 옳은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십시다. 그래야 삶이 새로워지고, 생활이 바뀌고, 신앙의 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새 아침에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이요 요구입니다.
** 이정익, 교회력에 맞춘 절기설교(상), 생명의말씀사, 1994, pp.11-17
③ 제목: 축복의 아침
성구: 요한복음 21: 3-14
드디어 새해 첫 날이 왔습니다. 시간은 다 귀하고 값이 있지만 1년 365일 가운데서 그래도 가장 뜻이 있고 새로운 의미가 이쓴 날은 1월 1일 바로 오늘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매년 한 번씩 새해가 돌아오지만 이 날을 맞을 때마다 언제나 마음은 새롭습니다. 아마 여러분 모두 오늘 아침은 기분이 좋은 것입니다. 뭔가 새롭게 다짐도 하고 계획도 새롭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긴 시간을 토막토막 잘라서 365일을 한 묶음씩 묶어서 그것을 일년이라 해 놓으시고 다시 그 한 묶음이 끝나면 또다시 시작되도록 하셨습니다. 시간은 다 똑같지만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새롭게 다시 시작하여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이제 새날, 새 아침에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힘 있게 한 해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굉장히 흐뭇한 광경이 나오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새해 아침에 여러분들에게 본문에 나와 있는 모습 그대로 축복을 기원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자 제자들을 뿔뿔이 흩어져 각기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베드로 형제도, 야고보 형제도, 고향으로 돌아가서 옛 직업인 고기잡이를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아주 옛날로 돌아간 셈입니다. 성경을 보니까 그 날 제자들은 밤을 새워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디로 잡지를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허기지고 고달프고 지친 모습으로 새벽녘에 와서 빈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그날 아침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완전히 실패의 날이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배 오른편에 한번만 더 던져 보라”로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베드로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다시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그물 가득히 고기가 잡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잡은 고기로 강가에 나와 거워서 주님과 함께 조반 식사를 나누는 광경이 오늘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이 디베랴 강가의 아침, 이것이 축복의 아침의 모습입니다. 주님이 생선을 구원서 나누어 주시는 것을 받아먹는 그 아침, 주님이 떡을 구워서 주시는 것을 받아먹는 그 아침, 이게 축복의 아침이 아닙니까?
금년 한 해 동안 할 수만 있다면 이렇게 wsla이 여러분들의 가정에 오시고, 일터에 오셔서, 떡을 떼어 주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함께 잡수시는 그런 축복의 생활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1.
우선 내년에는 여러분들의 “그물이 가득 채워지는 축복”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제자들이 밤을 새워 가며 고기를 잡았지만 고기라고는 한 마리도 잡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얼마나 허기졌겠습니까? 일을 하거나 고리를 잡을 때 어느 정도는 잡혀 주어야 고기 잡을 맛이 나지, 전혀 안 잡히면 맛이 안 나는 법입니다. 제자들이 밤새 고기를 잡아보았지만 한 마리도 못 잡고 지칠 대로 지쳐서 철수 하려고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그 때 주님이 그곳에 오셨습니다. 그랬더니 비로소 고기가 그물 가득히 채워지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그물이 아무리 좋아도 빈 그물이면 무엇합니까? 교회를 아무리 웅장하고 크게 잘 지어 놓았어도, 속이 텅 비어 있으면 그게 무슨 자랑거리입니까? 여러분 한 가지 명심하십시오. 계획을 아무리 크고 거창하게 세웠어도 주님이 이루어 주시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밤잠 설치고 끼니 굻어가며 뛰어다니고 일을 해도 주님이 채워주지 않으시면 헛수고입니다. 제자들이 밤을 새워 수고를 해 보았지만 주님이 없는 그곳에서는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습니다.
그물은 채워져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채워집니까? 주님이 함께 하셔야 채워집니다.
여러분, 꿈도 좋고 계획도 좋고 포부도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채워주지 않는 꿈이나 계획이나 포부는 아무런 소용없는 것입니다. 새해에는 주님이 여러분들의 일터에 이렇게 찾아오시고, 가정으로 찾아오셔서, 그물 가득히 채워주시는 축복이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2.
또 주님의 “말씀에 순응하시는 한 해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제자들이 밤을 새워 고기를 잡았는데도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았을 그 때는 신경이 굉장히 날카로웠을 것입니다. 그 때는 정말로 만사가 귀찮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주님이 그곳에 오셨습니다. 제자들은 그가 주님인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분이 하는 말이 그물을 배 오른편에 다시 한 번 던져 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위대한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지금 허기지고 지쳐서 신경이 날카로워진 채 그물을 씻고 있다고 두말하지 않고 그물을 또 던졌습니다. 얼마나 위대한 행동입니까?
나는 여기서 비로소 베드로가 베드로 된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밤을 새워 가며 그물을 던진 사람이 오른쪽 왼쪽 안 던져 본 곳이 있겠습니까? 생전 보지ㅗ 못한 사람이 와서 오른쪽에 던지라고 했을 때 그렇지 않아도 신경질이 나는 판인데 핀잔이나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아무 소리 하지 않고 또 던집니다. 그랬더니 고기가 가득하게 잡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해를 살아가는 동안 좋은 충고가 주어지거든 고맙게 받아서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한 해를 살아가는 동안 주님의 뜻이라면 여러분의 의지를 주님께 맡기고 순종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을 믿습니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기 위함 아닙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에 순응해서 살아가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 때 그물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3.
그리고 “열심히 일하는 한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에 뜻을 두고 열심히 일을 하면 반드시 거기에 좋은 결과가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는 휴식이 따로 없습니다. 그 일 자체가 휴식입니다. 정말 기쁨으로 일을 하면 그 일이 바로 휴식인 것입니다.
밤새 고기를 잡는 제자들의 집념을 보십시오. 새벽까지 그물을 던졌다고 했습니다. 몇 번 해보고 안 잡히면 그만둘 일인데도 새벽까지 끈질기게 던졌습니다. 자중에 지쳐 있을 때 주님이 오셔서 한 번 더 던져 보라고 하니까 그때도 포기하지 않고 또 던졌습니다. 그리고 끝내는 그물 가득히 잡아 올리는 개가를 올렸습니다. 그 집념이 얼마나 강하고 끈질깁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은 의지 있는 삶입니다. 끈기 있는 삶입니다. 끝까지 시도해 보는 집념이 있어야 합니다. 한 사람 전도하기로 계획을 세웠으면 끝까지 찾아가 보십시오. 열 번 찍어 안 넘어 가는 나무가 없다고 했습니다. 집념이 있는 사람이 기도를 하면 인내를 가지고 합니다. 그래서 끝내는 응답을 받습니다.
어떤 청년이 사랑을 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 사랑은 짝사랑이었습니다. 상대편에서 전혀 관심을 주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습니다. 매일 편지를 보냅니다. 전혀 답장이 없습니다. 어느 날은 결정적인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그 편지 속에 쓰기를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더라”고 써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신속하게 답장이 왔습니다. 아주 짤막하게 한 줄이 쓰여 있었습니다. “도끼와 나무 나름이다” 끝내 이 청년이 그 여자와 결혼을 하고서는 한 말이 있답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사람은 이 세상에는 없다”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입니까?
인내라는 말은 ‘후포모네’라는 말입니다. 즉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오늘을 참는 마음을 인내라고 합니다. 무서운 집념이 있는 사람은 앞에 있는 즐거움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참아내며 이겨내는 것입니다.
4.
또 그물이 채워지되 그 “그물이 찢어지지 않게 되기를”바랍니다. 어부가 고기를 잡기 위해서 바다에 그물을 던졌으면 그물 가득히 고기가 잡혀야 복입니다. 그런데 그물 가득히 채워지는 것만이 반드시 능사는 아닙니다. 그물이 찢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고기가 많이 잡히기는 했는데 그만 그물이 찢어지면 안 됩니다. 그러면 고기도 보리고 그물도 못쓰게 됩니다. 아예 잡히지 않은 것만도 못합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은 오히려 손해입니다.
돈을 많이 벌ㅤㄱㅣㄵ 벌었는데 도둑을 맞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농사를 잘 짓긴 했는데 잡자기 홍수가 나 버리면 소용없는 일입니다. 고식을 추수해서 곳간에 가득 쌓아두었는데 집에 불이 나 버리면 아무 소용없는 일입니다. 사업이 엄청나게 아주 잘 되기는 하는데 몸에 병이 들면 소용없는 일입니다. 물론 그물은 채워져야 합니다. 그러나 끌어올릴 때 찢어지지 말고 몽땅 올라와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이 온전한 수확입니다. 올라오다가 그만 그물이 툭 터져 보리면 그물도 버리고 또 고기도 버리게 됩니다.
이 말은 사람이 억지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욕심껏 살아보려고 한다고 해서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한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손이 수고한 만큼만 채워지기를 기대하는 일입니다. 어떤 분은 수고와 노력은 조금하고 나서 많은 것을 움켜잡으려고 하다가 그만 그물까지 찢어지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생활 속에서 많은 문제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때로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새해에는 여러분의 가정이 하나님의 은혜로 그물 가득히 채워지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일터가 번창하기를 바랍니다. 계획도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물이 찢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5.
그리고 혼자만 먹지 말고 주님과 함께 먹는 생황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자들이 밤새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를 못한 그 밤이 얼마나 허기지고 피곤하고 배가 고팠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난 후 허탈하고 지쳐 있던 그들인데 그 밤이 얼마나 외로웠던 밤이었겠습니까? 그렇게 지쳐 있을 때 주님이 그곳에 오셨습니다. 그곳에 주님이 오시니까 비로소 그렇게도 잡히지 않던 고기들이 가득 잡혀 올라왔고, 주님이 오셔서 아침을 함께 먹으니 그 아침이 얼마나 복된 아침입니까? 아마 그 때 제자들은 기운이 솟았을 것이고, 소망이 넘쳤을 것이고, 감격의 눈물이 나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생활은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먹고, 함께 마시고, 살아가야 합니다. 밤 한 그릇을 앞에 놓고서도 주님께 감사할 줄 알고, 감사히 먹고 사는 생활, 이것이 축복입니다. 성도는 주님이 주시는 것을 머고 살아갈 때 그것이 영양이 되고 배가 부른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물을 마셔야 갈함이 없습니다. 또 주님이 재워주시는 잠을 자야 단잠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죄 지은 사람이 단잠이 옵니까? 뇌물을 먹은 사람이 참 배부름이 있습니까? 그렇게 살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그 날 주님과 함께 모처럼 평안한 마음으로 마음껏 먹고 배가 불렀을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순리적인 삶입니다. 이것이 디베랴 강가에서 있었던 축복의 아침의 광경입니다.
6.
그러나 여기서 만족해하면 안 됩니다. 그 다음에는 할 일이 또 있습니다. 배가 부르고 기운을 차린 제자들은 생각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제자들은 비로소 자기들이 할 일이 무엇인가를 찾았습니다. 눈을 뜨고 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해보니까 이제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 생각났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발견한 것은 자신들이 할 일은 고향에서 이렇게 고기를 잡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들에게는 할 일이 따로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물을 다시 버려두고 고향을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부활하신 주님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이후 제자들은 디베랴 강가에서 다시 마난 그 부활의 예수를 일평생 동안 전하는 불멸의 사도들이 된 것입니다.
이제 새해 새 아침이 밝았습니다. 새해에는 아무쪼록 여러분들의 그물에 고기가 가득 잡히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물이 찢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또 주님과 함께 동행하고, 주님이 먹여주시고, 입혀주시고, 인도해주시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일하고 전하는 생활도 아울러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이정익, 교회력에 맞춘 절기설교(상), 생명의말씀사, 1994, pp. 38-45
④ 제목: 새 일을 행하리라
성구: 이사야 43:14-21, 요한계시록 21:5-7
1.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가?
최근에 뜻있는 사람들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가 정말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걱정을 합니다. 어느 날 신문 사회면을 펴들고 보니까 이런 단어들이 나왔습니다. 부정, 폭력, 무질서, 향락, 퇴폐, 유괴, 살인, 인신매매, 뺑소니 사고, 공해, 오염, 이혼율 급증, 원조교제, 횡령, 에이즈 방화, 단란주점 화재, 음란물 적발, 마약... 이런 단어들을 보면 오늘의 세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퇴폐문화는 극을 달리고 사람들의 도덕적 감각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가치관이 막 혼란스러워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나가다가 정말 미래의 우리 사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걱정이 도비니다. 남녀 중고등학생의 흡연율이 세계 최고라고 하고, 전체 흡연율은 세계 2위라고 합니다. 사망률이 높은 암 중에 작년까지는 한국에서 위암이 제일 높았는데 이제는 폐암 사망률이 제일 높다고 합니다. 청소년 자녀들, 젊은이들의 건강이 정말 걱정입니다. 그들은 곧 내일의 한국을 이끌어가야 할 인재들이 아닙니까? 탄식이 절로 나옵니다. “하나님, 절망의 그림자가 깊어지는 이 세태를 어떻게 하렵니까?”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선민 유다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전 722년에 북쪽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먼저 망했고, 남쪽 유다 왕국은 주전 586년에 강국 바벨론에게 여지없이 멸망당하였습니다. 그 화려했던 솔로몬 성전이 다 훼파되고 성벽은 불타 없어졌으며 많은 인재들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유다 민족은 철저하게 무너지고 망했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처참한 상처만 남았습니다. 물론 이런 상황은 하나님을 떠나 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미리 예고된 대로 이루어진 재앙이었습니다만, 그들의 충격은 컸습니다. 탄식이 깊어지고, 원망과 절망의 소리가 높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다고 슬퍼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우리를 떠나셨구나. 하나님은 잠잠하시는구나?”하고 탄식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정말 이럴 때 우리는 탄식밖에 더 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내일의 희망이 별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은 새일을 행하십니다.
어둠이 깊어지면 새벽은 다가옵니다. 테니스 공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은 다시 공중으로 튀어오르는 때입니다. 하나님은 절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메시지를 보내셨습니다. 위로의 메시지, 사랑의 메시지, 구원의 메시지, 약속의 메시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자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 왕이니라, 바다 가운데 강을 큰 물 가운데 첩경을 내고 병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 내어서 그들로 일시에 엎드러져 일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 가는 등불 같게 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시랑과 및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들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나의 택한 자로 마시게 할 것임이라”(사 43: 15-20)
첫째, 하나님의 새일은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선민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는 일이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새 일은 선민 이스라엘을 재건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해방과 재건은 하나님의 하시는 새 일입니다. 한국의 8.15해방도 하나님이 이루신 일입니다. 동적상잔의 부끄러운 6.25전쟁 후 한국의 재건도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입니다. 한국의 경제부흥이 흔히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려지고 있습니다만 실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입니다. 50년의 국민소득과 현재를 비교하면 약 200배 이상 잘 살게 된 것입니다.
지난 20세기 하반기에는 한국의 기적이 일어난 반세기라고 합니다. 첫째는 경제부흥, 둘째는 산림녹화, 셋째는 문맹퇴치, 넷째는 기독교의 신장입니다. 이와 같은 것들이 짧은 기간에 이루어진 나라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게 특별하다는 점에서 한국의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조건이 좋았습니까? 우리가 머리가 특별히 뛰어났습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라고밖에 달리 설명할 말이 없습니다.
세계 200여 나라 중 연간 무역고가 11위, 12위에 이르는 나라가 된 것, 거의 모든 가정이 자가용을 굴리며 자동차를 수출하고 컴퓨터 칩을 양산하여 수출과 IT산업, 정보통신산업에서는 우리가 일본을 앞서고 있다는 것, 국제적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스포츠에서도 우리가 이만큼 이름을 내고 있는 것은 참으로 기적입니다. 극동 한반도 전쟁폐허의 나라가 이렇게 도약할 줄은 누구도 몰랐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푸시니 가능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나라에 새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뜻을 받들며 t는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새 일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죽은 것을 살리시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부서지고, 무너지고, 망해 버린 것을 다시 고쳐 주시고 다시 쓰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왕이십니다. 창조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새 일을 이루시는 그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새롭고 창조적인 삶을 살아갈 능력을 얻습니다.
3. 하나님은 만물을 새롭게 하십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계 21:5)
첫째, 만물을 새롭게 하실 분은 만물을 만드신 그분, 창조주 그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인 자연만물은 창조주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에서 존재합니다. 땅의 기초도 하나님이 두셨고, 땅과 물의 경계선도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솟아오른 산과 낮아진 골짜기도 하나님의 조화로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그것을 새롭게 하십니까? 그 이유는 만드신 만물이 또 하나의 피조물인 사람의 죄로 인하여 피해를 보고, 탄식하고, 신음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만물의 모든 것을 정화하시고, 고치시고, 다듬으시고, 새롭게 하여야 할 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대기의 오염이 얼마나 심각한지 모릅니다. 자동차에서 뿜어대는 아황산가스, 공장 굴뚝에서 솟아오르는 검은 연기가 공기를 오염시킵니다. 생각해 보면 자동차자 편리하기는 하지만 공기오염의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속히 무공해 물질로 이용되는 자동차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지나친 화학비료 살포로 땅이 거칠어지고 있습니다. 땅속의 미생물이 죽어가기 때문입니다. 비료 때문에 땅속의 지렁이가 살 수 없고, 땅강아지가 죽습니다. 온갖 오염물질 때문에 물이 썩어가고 있습니다. 지나친 합성세제 사용, 샴푸, 공장 오염 물질 방류 등으로 물이 죽어갑니다. 우리가 먹을 식수원조차 오염되고 있습니다. 물고기가 죽습니다. 여러분, 현대문명이 좋긴 하지만 심각한 것은 이렇게 산천초목이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대로 두면 자연 만물이 죽고 인간도 죽습니다.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다 없어지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본래의 의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선언하실 만합니다.
둘째, 만물을 새롭게 하기 위해 먼저 인간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만물이 병들었다면 그 원인 제공자는 당연히 인간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만물의 관리를 위임받았기 때문에 책임은 관리자 인간에게 있습니다. 인간을 새롭게 하시는 방법으로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롭게 되었도다”(고후 5:17)
만물훼손 죄인인 인간은 스스로 새롭게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으로 가능합니다. 새 영, 새 마음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새로워지는 존재는 이전 상태보다 더 나은 상태의 존재가 아닙니다. 본래 있던 도덕성이 양적으로 불어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전혀 새로운 존재입니다. 새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질적 변화, 새로운 창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사람이 있을까?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사람들입니다. 사도행전 2: 43-47의 무리들은 전혀 새로운 공동체입니다. 유무상통의 공동체입니다. 서로 믿고 나누고 의하고 돕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할 수 있는 공동체입니다. 그들은 새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실 새로워질 사람들의 모델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성령으로 예수 안에서 인간을 새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고 이 사회가 원하는 새 인간의 모습은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새 인간의 모습을 가진 자가 많은 나라와 사회는 새 나라, 새 사회가 됩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새 일이 됩니다. 그들이 하는 노래는 새 노래가 됩니다. 그들이 하는 예배는 새 예배가 됩니다.
** 나겸일 외, 목회와 설교자료, 한국장로교출판사, 2001, pp. 7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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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 예배 유감
장로의 유전 개혁하기
박창진 ( 기자에게 메일보내기 )
신약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는 장로의 유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지키라고 주신 율법에 인간적인 생각을 더한 것이 장로의 유전입니다. 랍비들은 율법을 더 잘 지키고자 하는 마음으로 여러 조항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주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 교회 전통도 원리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가 좋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더 잘 섬기고자 만드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장로의 유전이 될 수 있습니다. 전통을 만드는 당사자들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장로의 유전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성경의 원리에 입각하여 그 전통들에 대해 살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한국교회는 한 해의 마지막 날 밤 12시를 기점으로 송구영신 예배를 합니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예배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기에 송구영신 예배를 긍정적으로 생각하여야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나름대로 의미 있는 시간이기에 하나님께 예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찬식이 행해지고 송구영신 감사 헌금이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인가 아니면 장로의 유전인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경적인 원리를 따라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의 날, 곧 주일
공적 예배는 주일에 대한 이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모든 날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받은 것은 분명합니다. 교회는 모든 날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새 언약의 교회가 옛 언약의 유대인들과는 구별된 방식으로 하루를 지킵니다. '안식 후 첫날'입니다(행 20:7). '안식 후 첫날'의 다른 표현이 '주의 날'입니다(계 1:10).
'주의 날'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 쓰인 주의 날과 아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본문 외에 주의 날이 쓰인 곳은 세 군데이고(살전 5:2, 살후 2:2, 벧후 3:10), 다른 곳에서는 '그날'이라는 표현으로 아주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주의 날, 그날은 도적같이 임하는 심판의 날입니다.
이는 일차적으로 주후 70년에 이루어지는 옛 언약의 백성에 대한 불 심판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옛 질서에 속한 온 세상의 멸망이었습니다(벧후 3:10,12). 노아 시대의 홍수를 기점으로 옛 세상이 멸망하고 새 세상이 열렸던 것과 같습니다(벧후 2:5, 3:6~7). 주후 70년 옛 언약의 공적 파기를 가리키는 주의 날, 그날은 원리적으로 주님께서 강림하신 날입니다.
주의 날에 상응하는 구약적 표현은 '야웨의 날'입니다. 야웨의 날은 일차적으로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멸망을 가리키고 원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그분의 모든 사역을 가리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 때에 있었던 헤롯의 행위 곧 베들레헴에 사는 두 살 이하의 모든 아기를 죽이는 사건을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마 2:17~18, 렘 31:15).
이처럼 주의 날은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는 언약의 백성들에게 심판의 칼을 빼어 들고 나아오시는 날입니다. 두렵고 떨리는 날입니다. 불순종하는 언약의 백성에 대한 심판은 순종하는 언약의 백성들에게는 가시 곧 고통거리가 제거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들이 그렇게 부르짖었던 악한 자들에 대한 심판을 통해 의인들이 평화를 얻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더욱 굳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에 입각하여 인자함과 진실함을 앞세우시고, 한 손에는 긍휼과 자비를 다른 한 손에는 심판의 칼을 들고 그의 백성들에게 나아오십니다. 그 하나님을 만나는 날이 주의 날이며, 그 방식이 공적 예배입니다. 물론 모든 언약의 백성은 모든 날과 시간에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만남, 교제가 가능하고 이루어져야 하지만 주의 날은 공적으로 만나는 특별한 날입니다.
하나님은 주의 날에 '그날의 영'으로 그의 백성들에게 나아오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날의 영으로 그의 백성들에게 찾아가심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되었던 일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아가시는 장면이 그것입니다(창 3:8).
우리 성경에는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야웨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그들이 그날의 영으로 오시는 야웨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라고 번역되어야 합니다(1). 그 소리는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 대하여 진노하시어 급박하게 다가오시는 소리였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두려워서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이 날은 제 칠일 곧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날로 보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제 육일에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이 종류대로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창조되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창세기 2장에는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짓고 그의 갈빗대로 여자가 창조되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2장의 모든 일은 한날 곧 육일에 이루어진 것이 됩니다. 그리고 곧 이어 범죄에 대한 말씀이 창세기 3장에 기록되어 있기에 이는 제 칠일에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날의 영'이라고 할 때에 '그날'은 안식일과 직접 연결되고, 이후의 성경에서 쓰인 심판의 날로서 '그날'의 원형입니다. 곧 야웨의 날, 주의 날의 원형입니다. 안식의 날에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심판주로서 급박하게 오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고, 그 하나님께 뱀과 여자와 남자의 순으로 이어지는 심판의 선언을 듣게 되었습니다(창 3:14~19). 아담은 자신의 아내를 '생명'이라는 뜻의 하와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심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심판의 선언 가운데 주어진 약속을 붙잡았던 것입니다. 회개입니다. 이는 첫아들을 "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