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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사님과 성도님 들께 드리는 질문 / 왜 문자적 성경 읽기를 문제 삼는가?
    2015-06-19 11:07:55   read : 4176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임종석
    이것은 목사님들께 드리는 질문입니다만, 저도 목사이니 제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내친김에 성도님들께도 여쭤 보고 싶습니다.


    주의 종은 교인들의 상전인가

    목사를 가리켜 흔히들 ‘주의 종’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 또는 ‘하나님의 종’이라 했고, 야고보도 자기를 가리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라 했고, 유다서를 기록한 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목사가 스스로를, 그리고 성도들이 목사를 지칭하여 ‘주의 종’이라고 하는 데에 문제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종’이란 어떠한 존재일까요. 신약성경이 기록되었던 당시의 헬라 사회에서의 종(둘로스)이란 가장 비천한 노예를 표현하는 말이었는데, 바울도 야고보나 베드로도, 그리고 유다도 ‘그리스도의 노예’라는 철저한 자기인식에 의해 자기를 그리 말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주의 종’의 ‘종’이란 가장 비천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목사님들은 은연중 자신들이 높고 거룩한 주님의 종이니 일반 성도들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 노골적으로 교인들보다 높은 위치에 있음을 드러내어 행동하기도 합니다. 종이라면 낮을 대로 낮아져야 하는데, 상전이 된 것이지요.

    제가 초신자 시절 교인 몇 명이 목사님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목사들을 가리켜 ‘주의 종님들’이라 했습니다. 이를 들은 목사님은 언짢은 표정으로 ‘종’이란 하찮은 존재인데, 거기에 ‘님’자를 붙이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 했습니다. 그럼 목사를 ‘종님’이라 하지 않고 그냥 ‘종’이라 해야 하느냐는 말에 ‘종이 아니라 사자(使者)’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말로는 ‘종’이라 하면서도 상전으로 행동하는 사람들보다 어쩌면 이 목사님의 말이 조금은 더 정직하고 논리적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설마한들 지금도 그 같은 목사가 있겠습니까마는, 목사는 만왕의 왕의 종이니 일반 백성에 해당하는 평신도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목회자가 없다고는 장담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부터 질문을 시작할까 합니다.


    第1問: 목사님께서는 자신이 교인들과 평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실제로 자신을 평등한 위치에 놓고 행동하십니까?

    ① 심방이라든가 식사 등에서 상석(좋은 자리)이라고 생각되는 자리를 다른 성도, 특히 자기보다 연상의 성도에게 양보하고 있습니까?

    ② 차로 이동할 때에도 상석을 자기가 차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 예수님께서는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에 앉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마23:6, 눅14:8 이하 참조).

    ③ 은연중에라도, 또는 무의식중에라도 주의 종인 사역자들에게 특권이 주어진 것으로 여기는 일은 없었습니까?

    * 믿음의 사람들은 그게 누구라 할지라도 특권 아닌 손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목사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④ 목사를 비롯한 사역자들만 ‘주의 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믿는 사람 모두가 ‘주의 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⑤ 주의 종인 목사에게 잘하면 축복을 받고 잘못하면 징벌을 받는다는 식의 설교를 한 적은 없습니까?

    * 설령 일반교인들은 아니고 목사 등의 사역자들만 주의 종이라 할지라도 믿는 사람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까지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종이 더 소중할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딸이 더 소중할까요? 이는 물론 말장난에 지나지 않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마25:40)이라 하셨고, 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마25:45)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사회적 약자를 대접함으로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이 옳을까요? 아니면 주의 종이라는 목사를 대접하는 것이 더 옳을까요?



    시체가 사람이 아니듯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

    복 중에서 가장 큰 복은 믿음입니다. 지옥에 갈 사람이 아무런 조건도 없이 믿음 하나만으로 하늘나라에 갈 수 있으니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기독교에서는 믿음을 그렇게도 강조하는 것입니다. 누구누구는 믿음이 좋다 하기도 하고 믿음이 좋지 않다 하기도 합니다.

    저는 방금 아무런 조건도 없이 믿음 하나만으로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고 했는데, 정말 그럴까요. 맞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그야 성삼위 하나님을 나의 구주(구원의 주)로 믿는 것이지요. 그런데요, 야고보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약2:26)이라 했습니다.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예수께서는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믿는 우리를 가리켜 ‘빛’과 ‘소금’과 ‘향기’라고도 하시는데, 그 ‘빛’과 ‘소금’과 ‘향기’로 사는 것이 곧 착한 행실이 됩니다. 그런 것들이 바로 믿음의 믿음 된 증거가 됩니다. 여기에서 또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第2問: 목사님께서는 자신의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고 있습니까? 그리하지 못함으로 자신의 믿음을 혹 죽은 것으로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① 목사님께서는 믿는 사람이라서, 목사님이라서 역시 다르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직접 드러내어 한 말을 들은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그런 감정을 가졌다는 것을 느낀 적이라도 있습니까?

    ②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을 떠나서 상대방을 배려하며 생활하고 있습니까?

    ③ (시시하게 느껴지기 쉬운 것입니다만, 이런 행동 하나하나가 쌓여 믿음의 인격을 만드는 것인데), 아파트 현관이나 엘리베이터에 떨어진 과자껍질 같은 것을 보면 어떻게 하십니까? 줍습니까, 그대로 둡니까? 좁은 길을 가다가 마주 오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불편하지 않게 지나갈 수 있도록 비켜 주는 일 등이 습관처럼 되어 있습니까?

    ④ 자신을 얼마나 진실하다고 생각하십니까?

    ⑤ 작은 것일지라도 나누며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내려 주신 가장 큰 은총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내려 주신 가장 큰 은총은 성경입니다. 성경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계시는데도 없는 것이 됩니다. 있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본모습이 아니라 미신의 대상처럼 됩니다. 성경을 무시한 꿈이나 환상, 또는 기도 중에 받았다는 계시 같은 것이 위험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러기에 믿는 사람들은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 강조는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읽으라는 사람은 많지만, 그대로 실천하라는 사람은 적다는 데에 있습니다. 성경은 읽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읽고 행하기 위해 있는 책이니 말입니다. 이에 대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第3問: 목사님께서는 성경을 읽으실 때 어디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까?

    ① 목사님께서는 성경을 읽으라는 것과 그대로 행하라는 것 중 어느 것에 역점을 두고 설교를 하십니까?

    ② 성경에 따라 살게 해 주시라는 기도를 얼마나 하고 있습니까?

    ③ 성경에 따라 살려고 하는 노력은 어느 정도 하고 있습니까?

    ④ 헌금에 관한 설교를 헌금이 성경에 나온 비율(또는 중요도)만큼만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이상으로 하고 있습니까? 나는 헌금에 관한 설교를 하지 않는다고 자랑처럼 말하는 분도 있는데, 목사님께서도 혹 그러시는 것은 아닙니까?

    * 헌금에 대한 설교를 너무 많이 하는 것이 문제이지만, 성경에 헌금이 나오고, 기독교 신앙에서 헌금이 무척이나 중요한 게 사실인데, 그에 대한 설교를 전혀 하지 않는 것도 문제입니다.

    ⑤ 성경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이라 하셨는데, 목사님께서는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분의 마음을 닮아 가려고 얼마나 기도하며 노력하고 계십니까?



    기도는 육적 욕심을 채우기 위한 도구인가

    기독교에서 성경(말씀)과 함께 쌍벽을 이루고 있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러기에 말씀은 영혼의 양식이요 기도는 그 호흡이라는 말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인들은 성경을 많이 읽으라는 말과 함께 기도 많이 하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안도록 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구하라는 말을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아니 이 또한 수도 없이 많이 들어 온 것이 사실이지만, 그게 대부분 바른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리하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육적 필요도 “더하시리라”라고도 말씀하십니다. (마6:31-33 참조)

    우리가 구해야 하는 가장 우선적인 것, 가장 중점적인 것, 가장 소중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입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고 그에 우선하여, 그리고 중점적으로 육적 필요를 구하는 것을 가리켜 기복신앙 또는 구복신앙이라고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질문 드리겠습니다.



    第4問: 목사님께서는 구복신앙 타파를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계십니까?

    ① 목사님께서는 구복신앙의 비기독교성에 대한 설교를 하고 계십니까? 그리고 목사님 자신에게서 구복신앙적 요소를 제거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기도와 노력을 하고 계십니까?

    ② 일용할 양식의 소중함을 얼마나 깊이 인식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설교도 하고 계십니까?

    * 현대에 있어서의 ‘일용할 양식’은 자급자족이 가능했던 농경사회의 그것과는 다릅니다. 의식주만이 아니라 최소한의 자녀교육과 취미생활 등도 포함됩니다.

    ③ 기도소리로 남에게 피해를 주어도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니 괜찮다는 식의 생각을 하신 적은 없습니까? 그 정도는 아닐지라도 기도가 남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에 무신경하지는 않습니까?

    ④ 하나님의 목이라도 조르는 것처럼 강요하는 것을 간절하여 좋은 기도라는 식으로 교인들을 가르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앞에서도 언급한, 말씀은 영혼의 양식이요 기도는 그 호흡이라는 것은 적절한 비유인 것 같습니다. 사람은 숨을 쉬지 않고 먹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듯 성경을 읽어 그것을 영적 생명의 양식으로 하지 않고, 기도하여 영적으로 숨을 쉬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도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기만 하고 행하지 않으면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바라만 보고 먹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기도를 하기는 하지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으면 호흡을 하되 유독가스로 오염된 공기로 하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은 죽게 됩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는 성경말씀을 정말 생명의 양식으로 섭취하고 계십니까? 그리고 기도로 호흡하여 영생하는 힘을 얻고 계십니까?



    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양인가, 목사의 양인가

    ‘목사’의 ‘목’자나 ‘목자’의 ‘목’자는 둘 다 기를 목(牧)를 쓰는데, ‘목사’는 ‘목자’처럼 보살펴 기르는 것이 주된 일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세 번이나 거듭 거의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네 어린양’이나 ‘네 양’이라 하지 않고 ‘내 어린양’과 ‘내 양’이라 하셨을까요. 우리는 모든 것에 있어 주님의 청지기 일뿐이지 소유주는 아닙니다. 그러니 주님의 양인 교인들은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한국이 낳은 성자 손양원 목사는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목사는 목자이옵고

    목자는 양을 치는 자인즉,

    양이 목자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양을 위해 있는 것인즉,

    주여,

    나, 양을 위해 있게 하옵소서.



    나의 배와 명예와

    주장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양을 위해 일하는 자가 목자이오니

    주여,

    양의 털 깎아 나의 옷 해 입고

    양의 젖을 짜 내 배 채우고

    양들 위에 군림하여 호령하는 나

    아니 되게 하옵소서.



    여기에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第5問 : 목사님께서는 주님의 양을 자기 양이라고 착각하신 적이 없습니까?

    ① 목사가 교인들을 위해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교인들이 목사를 위하여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② 양(羊)이 많으면 털도 많이 깎고 젖도 많이 짜는데, 그렇게 불어난 양(量)과 자기에게 돌아올 양(量; 收入)과의 상관관계를 무의식중에라도 염두에 두신 적은 없습니까?

    ③ 양을 기르고 치는 것은 보호하고 꼴을 먹이는 것인데, 꼴의 많은 부분은 설교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양들에게 먹여 살을 찌워야 할 그 꼴을 가지고 소위 미운털 박힌 교인을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하신 적은 없습니까?



    목사님들께 드리고 싶은 질문이 어찌 이것밖에 없겠습니까만, 생각나는 대로 대충 정리해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이것만을 가지고 자기 평가를 한 번 해 보시는 것도 무익하진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허하게 자기반성의 기회를 가져 보셨으면 하는 마음에서 몇 가지의 질문을 드려 보았습니다.



    -----------------
    성도님들께 드리는 질문

    내친김에 성도님들께도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기까지의 목사들에게 한 질문을 읽으시며 그것들의 상당부분이 평신도에게도 적용되는 내용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에 비추어볼 때 자신은 어떠한가 하는 생각도 해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도님께서는 어떻습니까? 목사만 주의 종이고 자신은 아니라고 생각하신 적이 없습니까? 앞에서 이미 운을 떼었습니다만, 아닙니다. 믿는 사람은 모두가 다 주의 종입니다. 그럼 여기에서 질문을 시작하겠습니다. 아니, 질문이 아니라 자기평가를 부탁드린다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입니다.

    ① 목사님의 신앙이 자기보다 나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바꿔 말해 은연중일지라도 나는 평신도이니 목사님의 신앙보다 못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신 적은 없습니까?

    * 목사의 신앙이 평신도만 못하다면 부끄러운 일이지만, 평신도라 해서 자기의 신앙이 목사보다 못한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목사가 평신도보다 신학적 지식이 많고 깊은 것은 당연하지만, 신앙도 그런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평신도가 목사보다 신앙이 좋은 사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② 이것도 앞에서 이미 말씀드린 내용입니다만, 성도님께서는 주의 종인 목사님을 독거노인 등의 사회적 약자보다 더 잘 섬기려고 하는 경향은 없습니까?

    * 만약 그렇다면 성도님의 신앙은 수정하는 것이 옳습니다. 주 예수의 종보다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 더 옳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회적 약자(작은 자)에게 한 것이 자신에게 한 것이라 하셨습니다.

    ③ 한국교회가 이 지경이 된 데 대해 성도님은 목사 탓, 교회 탓은 하면서 자기 탓은 하지 않은 게 아닙니까?

    * 남의 탓만으로는 교회도 목사도, 그리고 나도 변하지 않습니다. 내가 변해야 너도 변하고 모두가 변합니다.

    ④ 성도님은 신앙을 지상(至上)의 가치로 여기고 있습니까?

    *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입으로는 돈보다도 어느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더 소중하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사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비록 그렇게 살 수는 없다 할지라도 그렇게 살려고 기도하며 노력하는 것이 크리스천입니다. 그런 기도, 그런 노력이 없다면 성도님은 성도라 불려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믿는다는 말을 해서도 안 됩니다. 많이 미치지 못할지라도 바른 신앙의 길로 가기 위해 죽게 되면 죽겠다는 각오와 결단이 가슴을 메우고 있어야 진정한 신자가 됩니다.

    ⑤ 예배출석과 교회봉사, 헌금 같은 것이 신앙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은 아닙니까?

    * 예배며 봉사, 헌금 등은 소중하고 또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처럼 소중한 것도 평소의 생활이, 그러니까 일상생활이 그것을 뒷받침해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모래위에 지은 집(砂上樓閣)과도 같습니다. 일상이 예배가 되고 산제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예배요 산제사입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욕을 먹는 것도, 지탄을 받는 것도 그 같은 크리스천다운 일상이 이루어지지 못한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이대로는 안 된다는 데에 아니라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네 탓이라는 사람만 있고 내 탓이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한국교회를 쇠퇴의 길로 내몰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한국 기독교의 재기를 위해 나의 채찍은 자신을 향해야 합니다. 천하보다 귀한 나의 생명을 위해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도려내야할 부분이 있으면 아프더라도 도려내야 합니다. 고칠 데가 있으면 힘이 들더라도 고쳐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삽니다. 그리고 내가 살아야 한국교회도 삽니다.


    ================================
    왜 문자적 성경 읽기를 문제 삼는가?

    최재석

    J 목사님이 보내주신 책 창조신앙과 창세기의 인물들에 관한 두 권의 책을 잘 받아 읽었습니다. 그 책의 머리말에서 보니 목사님은 철저한 보수적 신앙을 지닌 분이군요. 진보적인 신학대학에서 공부하신 후 미국의 보수적인 신학대학에서 박사를 취득하시기 위해서 공부하시는 동안 보수신앙만이 한국교회를 살리는 길이라는 사명감을 갖게 되었군요. 그동안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열심히 목회를 하셨습니다. 그 외에도 대학에서 시간강사와 겸임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시고 무려 15권의 단행본 저서를 내시면서 보수신앙의 전파를 위해서 힘써 오셨네요.

    목사님이 제게 전화하셨을 때, 제 글 “신앙인과 문학”을 읽으셨다고 하면서 제가 그 다음에 낸 책들을 알고 싶어 하셨고 기독교 문학작품들의 목록을 보내달라고 하셔서 저는 목사님이 제 글의 내용에 찬동하시는 줄 알았었습니다. 그런데 제게 보내주신 책들을 읽어보니 제가 잘못 판단했었군요. 목사님은 성경을 문자적, 문법적으로 읽으시기 때문에 저처럼 문학적으로 읽으려는 사람과는 다른 입장을 취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성경과 문학’ 과목을 가르친 신학대학교에서 문자적 성경 읽기를 가르치신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학생이 목사님의 수업과 제 수업을 모두 들었다면 상당한 혼란을 겪었을 것 같습니다.

    목사님이 제게 이 책들을 보내주신 것은 그것들을 통해서 제 생각이 잘못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시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목사님이 제 글 “신앙인과 문학”을 읽으신 후 그 책들에서 태고사를 문자적으로 읽는 법을 제게 말씀하셨으니, 이제 저는 목사님의 책들을 읽고 목사님에게 태고사를 문학적으로 읽는 법을 보여드리고 싶어서 이 편지를 씁니다. 그리고 목사님과 제게서 서로 다른 성경읽기를 배운 학생들에게,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 두 가지 성경 읽기를 비교하는 기회를 주는 것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창세기 1장 읽기

    J 목사님은 창세기 1장에 기록된 모든 것을 문자적 의미 그대로, 달리 말해서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한 글로 받아들입니다. 창조의 순서와 6일 동안의 창조를 받아들입니다. 광명체가 있기 전에 빛이 있었고, 햇빛이 있기 전에 식물이 있었다는 것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넷째 날 해와 달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셨다는 언급은 지구 중심적인 생각인데, 지구 중심적인 생각도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지구는 태양계 주위를 도는 태양계에 예속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문제는 1장의 기록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다 보니 모든 현대 과학을 불신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1장에 나오는 지구중심적인 생각을 받아들이면 지동설을 거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목사님은 과학적 지식과 성경의 내용이 대립할 때 과학을 버리고 성경의 편에 섭니다. 언뜻 보기에 아주 신앙적인 자세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 바람직한 것일까요?

    기록자는 3천여 년 전에 그가 살고 있던 시대의 문화 안에서 그리고 그가 알고 있던 지식을 동원해서 창조신앙을 표현했습니다. 이 기록자가 현대의 과학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창세기 1장에 나오는 기록이 우리의 과학적 상식과 맞지 않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의 독자들은 1장의 기록이 자기들의 상식과 맞지 않기 때문에 1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창조를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신 목사님은 창조신앙을 믿으려면 과학을 외면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현대의 과학을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에, 과학적 지식을 받아들이면서 1장에 기록된 창조신앙을 받아들일 수 있는 해석 방법을 찾아낼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구약신학자들은 바벨론의 ‘에누마 엘리쉬’ 서사시 가운데 1장과 비슷한 창조설화가 나온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 서사시에 나오는 마르두크 신과 하나님이 많이 다르지만, 구약학자들은 두 가지 창조설화에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신이 천지를 창조한 뒤 휴식을 취했다는 것이나 빛에서 시작해서 인간으로 끝나는 창조의 순서 등이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구약성서의 창세기 기록이 ‘에누마 엘리쉬’에서 변형된 것이거나, 두 이야기가 모두 동일한 제 삼의 원전에서 파생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의 기록자는 3천여 년 전의 신화의 시대에 살고 있었습니다. 바벨론의 ‘에누마 엘리쉬’ 서사시에 나오는 창조설화와 1장의 내용이 비슷하다는 데서 우리는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화적인 것을 표현하는 설화는 상상력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그런 신화적인이야기를 호머의 서사시에서 쉽게 접합니다. 상상력을 동원해서 표현한 신화적 이야기는 문학적 표현입니다. 신학자들은 성경의 언어를 신화적이고 은유적인 언어라고 말하는데, 그 말은 성경이 하나님의 뜻을 문학적 형식을 빌려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1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적 지식을 뒷전으로 미루고 3천여 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세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그 기록을 통해서 그들이 표현하고자 한 창조신앙을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현대의 과학적 상식을 가지고 그 기록을 보면 허무맹랑한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죠.

    어느 기록자가 21세기에 그의 창조신앙을 표현하려고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그는 지동설, 천체물리학, 지질학, 생물학 등의 지식을 총동원해서 그 신앙을 표현할 것입니다. 그 신앙적 기록을 3천 년 후의 독자가 읽는다면 그의 지식은 21세기의 것과 많이 다를 것이기 때문에 그 독자는 21세기의 기록자가 자기의 것과는 다른 3천 년 전의 지식을 동원해서 창조에 대한 그의 믿음을 고백하고 있구나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가 3천 년 후의 지식을 기준으로 해서 21세기에 기록된 창조신앙을 읽는다면 그 신앙적 기록이 허무맹랑한 것으로 보이겠죠. 그는 21세기의 과학적 지식을 감안하면서 그 기록을 읽어야 그 기록자의 진의를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기록된 시대의 문화를 감안하면서 읽으면 그 기록자가 표현하려고 한 창조신앙의 진정성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록자가 창세기 1장에서 능력의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셨다는 그의 신앙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의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를 이끄시고 우리 삶 가운데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 기록이 신화적인 설화이니까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1장이 기록된 시대가 신화의 시대였는데 기록자가 어떻게 신화적 표현을 피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시대의 언어로 창조신앙을 표현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 기록을 신화적인 기록이 아니라고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한 글이라고 주장하면 엉뚱한 일이지요. 현대과학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이 기록한 글을 놓고 그 기록이 우리의 과학적 상식에 맞지 않으니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 역시 지각이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1장을 신화시대에 산 사람이 그의 언어로 창조신앙을 표현한 것이라고 읽으면 1장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현대의 과학을 외면할 필요가 없습니다. 1장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목사님은 창세기의 내용과 맞지 않는 과학을 외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우리가 과학을 외면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그 과학이 마련해준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며 살고 있는데 과학을 외면하라는 것은 억지 주장이지요.



    창세기 2-3장 읽기

    창세기 2:4b-3에 오면 창조의 이야기가 다시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천지창조는 1장에 나오는 천지창조와는 달리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고 에덴동산에 사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써 그 동산에서 쫓겨나는 인간의 삶에 대한 이야기체의 기록입니다. 에덴동산의 이야기는 먼저 문체가 1장과는 아주 다르죠. 1장에서는 첫째 날, 둘째 날의 순서에 따라서 천지가 창조된 것을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는데, 에덴동산에서는 순서에 따르지 않고 이야기체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내용도 다릅니다. 1장에서는 천지 전체를 말씀으로 창조하고 마지막에 인간을 창조하시는데, 여기서는 하나님이 흙으로 인간을 지으신 후 그 창조된 인간 내외가 생활하는 가운데서 죄를 짓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죄의 문제는 4장 이하에서 11장까지 이어지는 중심 주제가 됩니다.

    여기서 자료비평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해야겠네요. 자료비평가들은 구약성경의 각 책 안에 서로 다른 문체, 어휘, 신학적 관점이 나타나는 일정한 길이의 단위들이 섞여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 다른 단위들이 섞여 있는 것은 성경의 각 책이 단일 저자의 기록이 아니고 이미 존재하던 여러 자료를 후대의 저자들이나 편집자들이 수집하고 나름대로 배열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자료비평가들은 본문 배후에 있는 자료들을 확인하기 위해서 성경의 각 책에 나타나는 문체와 어휘, 시각의 다양성, 하나의 구절이나 여러 구절 사이에 있는 모순과 불일치, 진행되는 구절의 계속성을 깨뜨리며 갑자기 나타나는 단절부분 그리고 중복과 반복부분들을 분석 확인합니다.

    그들은 1장의 문체와 내용이 에덴동산의 이야기와 다른 것에 주목해서 그 자료가 다른 데서 왔다고 봅니다. 그래서 1장을 사제문서(P문서), 2-3장을 야훼문서(J문서)라고 부르죠. 그들은 이 두 문서에 나오는 신의 이름이 다름 데에 주목합니다. 아시다시피 사제문서인 1장에서는 신을 Elohim이라고 부르지만, 야훼문서인 2-3장에서는 Jehovah라고 부릅니다.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Elohim을 하나님으로 Jehovah를 여호와 하나님으로 번역했죠. 그러나 자료비평가들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 문자주의자들은 이 두 가지 천지창조 이야기는 동일한 기록자가 같은 사건을 다른 시각에서 본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현대의 신학자들은 대부분 자료비평가들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있어요. 물론 J 목사님은 축자영감설을 받아들여서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으시기 때문에 자료비평가들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겠죠. 보수적 성향이 강한 한국교회에서는 많은 목회자들이 목사님처럼 가르칩니다. 그런데 문자적으로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현대의 과학적 상식을 외면할 뿐 아니라 이렇게 신학자들의 연구 결과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현대의 문화와는 담을 쌓고 계몽주의 이전으로 돌아가려는 퇴행적 태도를 취합니다. 그래서 문자주의자들은 어둡고 좁은 우물 속의 세계에 안주하면서 밝고 넓은 세상을 외면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제 2-3장의 이야기체를 언급하겠습니다. 여기서 하와가 뱀과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사탄을 상징하는 뱀을 의인화해서 우화적인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취해서 하와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우화적 이야기의 틀 안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물론 흙으로 아담을 지으시고 숨을 불어넣으신 전능하신 여호와께서는 갈빗대를 취해서 여인을 만들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지적하려는 것은 에덴동산의 이야기에 우화적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화적 요소를 지적하는 것은, 에덴동산의 이야기를 문학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섭니다. 문학적 표현을 빌려서 하나님의 창조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죠.

    에덴동산의 창조 이야기를 문학적인 형식을 빌린 것으로 본다고 해서 창조신앙이 무시되거나 약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J 목사님은 창조신앙에 관한 책에서 1장에 집중하시고 2-3장은 간단하게 다루셨는데, 창조과학자들 역시 1장에 치중합니다. 문학적 표현을 빌린 에덴동산의 창조 이야기는 별로 어려움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죠. 이렇게 문학적 형식을 빌려서 우리의 신앙을 표현할 때 쉽게 그 믿음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기록자들이 문학적 형식을 빌렸고, 신학자들이 성경을 문학적으로 읽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비유를 좋아하신 이유를 생각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창세기 4-11장 읽기

    창세기 11장까지를 원역사 혹은 태고사라고 부릅니다. 이 부분은 12장 이하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른 다음에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족장사와 구별됩니다. 족장사가 사실적 이야기라면, 태고사에는 신화적인 요소가 많습니다.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태고사에 나오는 많은 사람이 9백 세 이상 살았다는 것입니다. 가장 장수한 므두셀라는 969세까지 살았죠. 족장시대에 가서는 수명이 좀 줄어드는데, 어떻든 인간이 9백 년 이상 살았다는 이야기는 사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들은 신화시대의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족장시대에 앞서는 이 시대의 이야기를 태고사라고 부르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이때에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자손들은 거인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J 목사님은 하나님의 아들을 천사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경건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했다는 것은 신이 인간과 결혼하는 그리스의 신화를 생각나게 합니다. 그리고 네피림을 언급하면서 그들의 아들이 용사였다는 기록 역시 신화적 인물을 생각나게 하지요. 문자적으로 성경을 읽으시는 J 목사님은 여기서 신화적 요소를 보지 않으려고 하시는데, 태고사에 신화적 요소가 많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습니다. 3천여 년 전의 신화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신화적인 표현을 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구약학자들은 바벨론의 “길가메쉬” 서사시에도 7장과 8장에 나오는 홍수와 비슷한 대홍수가 나온다고 말합니다. 물론 노아가 겪은 대홍수와 “길가메쉬” 서사시의 홍수가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원시사회에서 근동의 사람들과 이스라엘인들이 비슷한 것을 말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목사님이 지지하는 창조신학자들은 노아의 방주가 발견되었다고 말하면서 그 사진을 공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배의 유적을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목제로 만든 그 방주가 화석이 아니라면 현재까지 남아있을 수 없겠지요. 이러한 면에서 태고사의 홍수가 바벨론의 서사시에도 나온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해 줍니다. 그들은 비슷한 시대에 비슷한 사고의 틀 안에서 비슷한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이야기 아닐까요?

    이제 홍수 사건에서 나오는 서로 맞지 않는 기록에 대해서 언급하려고 합니다. J 목사님은 짐승들이 암수 한 쌍씩 방주에 들어갔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기록은 6:19와 7:15-16에 나옵니다. 그런데 7:2에는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 들어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 3절에는 새도 암수 일곱씩 데려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숫자의 차이를 자료비평가들은 각기 다른 자료에서 나온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그런 차이에 대해서는 눈을 감으시고 한 쌍씩만을 언급하셨습니다. 문자적으로 성경을 읽는 분들, 다시 말해서 축자영감설을 주장하는 분들은 이러한 상충하는 숫자를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일곱 쌍을 무시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렇게 서로 다른 숫자가 홍수의 기간에 대한 기록에서도 나옵니다. J 목사님은 노아가 승선해서 하선하기까지의 기간을 1년 17일로 370일이 걸렸다고 계산하셨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370일은 1년 5일이기 때문에 1년 17일과는 12일의 차이가 있습니다. 노아가 홍수 시작 7일 전에 승선했으니까 홍수가 1년 10일 동안 계속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2월 17일에 홍수가 시작해서 다음해 2월 27일에 하선했으니 홍수의 기간은 실상 1년 11일이 됩니다. 목사님은 첫날은 계산에 넣으시지 않았지만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다. 더욱 큰 문제가 있습니다.

    목사님의 계산에 따르면 370일은 150, 150, 70을 더한 기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맨 앞에 나오는 150이라는 기간은 물이 땅에 넘친 날의 수이기 때문에(7:24),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370일은 승선에서 하선까지의 기간이 아니고 물이 넘친 시기부터 하선했을 때까지의 기간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물이 넘치기 전부터 홍수가 시작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승선해서 하선하기까지의 기간은 370일보다 더 길어야 합니다. 이렇게 계산하다보니 독자들이 따라오기가 힘들 것 같네요. 내친 김에 좀 더 이야기하죠. 물이 마른 기간을 70일로 계산하셨는데, 그 숫자가 어떻게 해서 산출되었는지 그 근거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목사님은 7장과 8장에 나오는 숫자의 미로에서 길을 잃었네요. 그래서 날짜의 계산이 뒤죽박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료비평가들은 7장과 8장에 두 가지 문서가 뒤섞여 있다고 봅니다. 하나의 문서에서는 40일 동안 비가 내리고 그 후 3주 동안에 노아가 비둘기를 내놓은 다음 물이 걷힌 것을 언급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 문서에서 말하는 홍수 기간은 61일입니다. 다른 문서에서는 2월 17일에 시작해서 다음해 2월 28일에 끝났다고, 총 기간이 1년 11일이었다고 말합니다.

    7장과 8장의 기간에 대한 언급은 J 목사님이 혼동하실 만큼 복잡합니다. 그런데 자료비평가들은 그 퍼즐을 간단하게 맞추어 냅니다. 문자적으로 읽는 분들은 축자영감설을 고집하면서 이렇게 상충하는 기간에 대한 언급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지요. 그러다 보니 납득하기 어려운 계산을 하게 됩니다. 문체, 어휘, 시각의 차이를 자세히 비교 분석해서 판단하는 자료비평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상충하는 숫자에 대한 말이 나왔으니 바벨탑에 대한 이야기도 해야겠네요. 11:1에는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탑을 쌓아올리는 것은 언어가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해서 그들이 탑을 쌓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10장에서는 노아의 세 아들의 족보를 언급하면서 이미 그들의 언어가 족속마다 달랐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0장 5절, 20절, 그리고 31절에서 반복적으로 그들의 족속이 갈라지면서 언어도 다르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11장에서는 온 땅의 언어가 하나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바벨탑 사건이 먼저 나와야 할 것 같은데, 뒤에 나와 있네요.

    태고사에는 창조기사의 반복을 비롯해서 엇갈리는 기록들이 많이 나옵니다. 이러한 반복이나 상충되는 기록을 변호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료비평을 받아들이면 성경의 권위가 훼손된다고 염려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만, 성경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신학자들의 연구결과를 외면하고 엄연히 나와 있는 상충되는 기록들을 보지 않으려 하는 것은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일 아닐까요? 그것은 사실로 증명된 지동설을 외면하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러한 자료의 뒤섞임을 알더라도 그리고 과학적 상식을 외면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태고사에 나타나 있는 신학적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1장에서는 능력의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신앙적 기록을 읽습니다. 다른 시각에서 언급되는 2-3장의 창조기사에는 우화적인 문학적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것을 말해줍니다. 여기서는 1장에서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결과 죄가 들어왔다는 것을 전해주죠.

    3장 이하에서는 신화적인 이야기가 나오고 숫자가 엇갈리고 순서가 뒤바뀌기도 하지만, 그런 것에 너무 신경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문자적으로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성경을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글이라고 보기 때문에 신화적 요소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고 엇갈리는 기록을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역사적인 사실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 아니고 기록자들의 신앙을 기록한 은유적인 글입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편드시는 창조과학자들은 과학적으로 창조기록을 증명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과학적이 아닌 글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은 엉뚱한 일이죠.

    에덴동산에 죄가 들어온 후, 3장 이하에서는 가인이 하나님의 처사에 불만을 품고 동생을 죽이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라서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노하셔서 홍수로 인간을 멸하십니다. 바벨탑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죄성에도 불구하고 셈의 자손 가운데서 아브라함을 선택해서 그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족장시대로 이어집니다.



    마치면서

    오늘 그동안 미루어 왔던 답장을 쓰게 되었습니다. J 목사님이 제 글을 읽으시고 2014년에 내신 두 권의 책을 보내주시면서 제게 말씀하시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가를 그 책들에서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책들에 대한 제 의견을 피력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목사님이 내신 책의 내용을 언급하면서 독자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노력했습니다만, 그렇더라도 목사님의 책들을 읽지 않은 독자들은 제 이야기를 따라오는 데에 어려움이 많았을 것입니다.

    목사님이 그 두 책에서 다루신 태고사에 대한 제 생각을 장황하게 언급했는데, 인간의 생각에는 항상 한계가 있어서 우리가 말하는 것이 하나님의 세계를 올바로 드러내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우리는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 데에 불과하죠. 철학적 사상도 과학적 연구 결과까지도 계속 변합니다. 그래서 과학혁명이라는 말도 나오지 않았어요? 신학 역시 마찬가지이죠. 우리의 문화가 달라지고 우리의 생각이 달라지면, 우리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로 하나님의 세계를 말하려고 하지요.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의 문화가 바뀌고 생각이 바뀌면 새로운 언어로, 다시 말해서 현대인이 납득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점입니다.

    지금 문학적 성경 읽기가 대세가 되어 있습니다. 이 문학적 성경 읽기는 문자적 읽기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 나온 것입니다. 자료비평은 문체나 어휘의 차이를 가지고 문서를 구별하는 문학적 분석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문학에서는 신화적 언어도 우화적 표현도 모두 받아들입니다. 문학적 성경 읽기를 내세우는 사람들은 그러한 언어와 표현을 빌려서 성경의 기록자들이 그들의 신앙을 표현하고 있다고 봅니다. 문자적으로 성경을 읽는 분들은 그런 문학적 표현 방법을 외면하는데, 중요한 것은 그런 표현방법을 통해서 전달되는 신앙의 내용입니다. 문학적 표현은 수단이지요. 중요한 것은 내용, 즉 하나님에 대한 신앙입니다. 여기서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문학적 형식을 빌렸다고 해서 신앙적 내용이 훼손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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