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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의 본질/ 설교의 접근방식
    2003-06-09 03:08:58   read : 4799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존 부로우더스(John A. Boradus, 1872-7895)가 본 설교의 본질]

    가장 오래되고 가장 영향력있는 설교에 관한 책 가운데 하나는. 1870년 존 부로우더스가 쓴 [설교 준비와 전달에 대한 고찰 (A treatize on the preparation and Delivery of Sermons)] 이라는 책이다. 그 책은 편집자가 세번 바뀔 때마다 다시 편집되어 출간되곤 했다. 다른 많은 설교학 책의 저자들도 부로우더스의 이 책을 참고하였다.

    '미국 주석 시리즈 (American Commentary Series)' 중 부로우더스의 마태복음 주석은 많은 신약학자들에게 고전(古典)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버지니아와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여러 교회의 목회자로 사역하다가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그린 빌레에 있는 (Baptist Seminary)의 학장이 되었고. 1889년에는 켄터키 주의 루이스 빌레의 (Southern Baptist Seminary)의 학장이 되었고. 같은 해에 예일대학에서 라이만 비쳐 설교학 강좌 (Lyman Lectures on Preaching)를 담당하였다.

    여기에 소개되는 내용은 “설교 준비와 전달에 대한 고찰”이라는 책의 서론에서 뽑은 것이다. 이 발췌문은 부로우더스가 설교의 본질에 대해서 가지는 관점들을 보여 줄 것이다.

    설교는 기독교의 특징입니다. 거짓 종교치고 종교적인 강화와 권면을 듣게끔 정규적으로 대중이 함께 모이는 기회를 제공하는 적이 없습니다. 유대교가 선지자들의 사역을 통하여 그런 모습을 취합니다. 그 후에는 유대교가 회당에서 율법을 낭독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을 통하여 그러한 양상을 띄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유대교는 나중에 기독교로 발전되어 나갈 종교였습니다.

    어떤 이방 종교의 교사들이 설교의 힘을 알아차리고 때로는 이러한 방면에서 기독교를 모방하려고 애를 쓰기도 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보통 배도자(背道者)로 일컬어지는 로마 황제 쥴리안 (Julian)은 이교 철학자들에게 크리스챤들이 행하는 것과 같이 매주 설교하라고 지시를 하였다고 합니다. 중국이나 일본. 인도 등지에서는 설교와 같은 것을 받아들인 경우가 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려지기는 설교의 기원과 역사는 독특하게 기독교의 제도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기 위해서 지정된 위대한 방식은 설교입니다. 개인이든 모인 회중에게든지 말로 전해진 말씀이 설교입니다. 그 어느 방식도 이것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가르치는 재능이 있고 진리로 불타는 영혼을 소유한 한 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그 사람은 그 진리가 자기를 구원하였다고 믿고 있으며. 그 진리가 다른 사람도 구원할 것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동료에게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면서 말하되. 그 말을 하는 사람과 말을 듣는 사람 사이에 전율어린 마음의 공명(共鳴)이 오고 갈수록 그 두 사람은 서로를 더높게 고양시켜 더 심오한 생각을 가지게 하고. 정말 감동이 넘치는 정서의 자리로 올라가게 하고. 결국 세상을 초월하는 불병거를 타고 가는 것같이 됩니다. 거기에 사람을 감동시키는 능력과 성품에 영향을 끼치고 생명과 운명에 영향을 끼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그 어떤 인쇄술에도 결코 담을 수 없습니다.

    “목회의 일”은 정말 중요합니다. 모든 설교자들은 그 일을 수행하는 데 부지런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이 설교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강단의 힘이 부족한 것을 완전히 보충할 수도 없습니다. 둘 다 서로 보완적인 역할을 합니다.

     각각 서로 보완을 해주지 않으면. 그 어느 한쪽만 가지고는 가장 복있는 결과들을 이룩할 수 없습니다. 설교를 하는 사람이 인애어린 목회자요 믿을만한 상담자요 젊은이나 노인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의 친절하고 고상한 친구이고. “그 사람의 입술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리가 나올 때” 사람들의 마음 문은 신비의 힘에 의해 스스로 열릴 것입니다.

    그러나 심방을 하는 사람이 설교자일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그가 철저한 성경지식을 가지고 있고 고상한 인생관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유능하고 열정어린 강론이 확신과 놀라운 감동을 불러 일으킬 만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으로 녹아드는 경우라고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신으로 늘 사람들 앞에 서있고.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 말씀의 권위와 신성에 늘 젖어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그런데 그가 고통을 받는 사람. 슬픔에 처한 사람. 시험을 받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을 때. 그의 심방은 의미도 없는 사람들에게 의미와 힘을 갖게하는 것일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역자가 이런 여러 분야의 노력 가운데 어느 한가지에 특별히 매력을 느낀다는 생각이 들면 그 사람은 역시 그렇지 못한 다른 분야의 노력에도 부지런하도록 자신을 부추겨야 할 것입니다.

    종교의 “의식(儀式)"들이 교훈적이고 인상을 끼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린 아이들을 교육할 때 하는 것같이 구약시대에는 그런 의식들이 사용되었습니다. 심지어 최소한의 의식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 마저 근본적인 사실들을 예증합니다.

    또는 단순하지만 인상깊은 두 성례들을 통하여 자주 깊은 종교적인 인상을 끼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규례들은 단지 예증만을 위한 것이며. 가르치고 죄를 깨닫게 하고 사람들을 얻고 붙잡아 주는데 도움을 주는 것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성령으로 능력있는 설교가 수행해야 하는 그러한 일들을 보조하기 위한 것이란 말입니다.

    설교는 언제나 필연성을 띄어야 하며. 좋은 설교는 강력한 능력을 가진다는 것은 아주 당연한 논리입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로 사람들을 몰아가던 때부터 모든 기독교 시대마다 원인이나 결과에 있어서 설교의 새로운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도 위대한 신앙운동이나 성경진리의 회복운동이나 순전한 경건의 속성이 있었던 적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설교를 “잘” 하는 것을 발견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매주마다 모든 세계에서 행해지는 설교 가운데 참으로 훌륭한 것은 비율적으로 얼마나 적습니까. 언제나 설교에 대한 조롱으로 채워 넣는 어설픈 글꾼들은 의심할 것도 없이 정말 불친절하고 부당하게 판단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의도적으로 평범한 설교와 가장 세련된 문학 작품들을 비교해 보고는. 마음 속으로 공명하는 이해심이 자기들에게는 전혀 부족하다는 것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이해심이 없으면 문학적이고 예술가적인 모든 판단은 오류를 범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설교하는 것을 사랑하고 설교를 하려고 애를 쓰는 우리는 그들보다 우리의 노력을 저해하는 부족과 우리의 일 가운데서 만나는 난관들을 더욱 잘 압니다.

    고상하고 탁월하게 쓰임을 받는 어느 사역자가 한번은 기대어 있던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며 이렇게 논평하던 것이 생각납니다. “자. 난 오늘 저녁에 설교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설교할 수 없습니다.

     나는 이제까지 결코 설교한 적이 없는 셈이지요. 나는 정말 어느 누가 설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거든요.” 우리의 이 일은 정말 외경스럽고 매력적이고 정말 엄숙한 책임성이 부여된 일이요. 그러면서도 복된 일이지요. 우리는 이 일을 하면서 최고의 탁월성을 지향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만일 다른 형태의 대중의 언어 가운데 가장 좋은 예를 찾는다면 키케로가 젊은 웅변가에게 들려 주고 싶은 말이라고 하면서 했던 말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열심히 노력하라고 권면할 뿐 아니라 간절히 부탁하네.” 좋은 설교란 무엇입니까. 보다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웅변이란 무엇입니까. 이것은 단순한 사변적인 질문이 아닙니다. 설교 문제에 대한 우리의 근본적인 관점은 우리가 눈치채는 것보다 우리의 실제 노력에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문제를 많이 논의하지 않고도 다음의 진술을 제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웅변이란 단순히 판단을 확실하게 내리도록 하고 상상력에 불을 붙이거나 감정을 움직이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의지에 강력한 충격을 주기 위하여 하는 말”이라고 말입니다. 웅변이 아니고도 가르침이나 확신을 주는 일은 있을 수 있습니다.

    시(詩) 소설을 통해서도 공상이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를 보고 웅변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감상적인 동화나 마음을 쓰리게 하는 묘사를 통해서도 감정이 깊게 소용돌이 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 거기에 부응하는 행동을 제안하지 않으면 그것을 웅변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반면에. “웅변은 자기가 말하려는 요지를 전달하도록 하는 말이다”라고 한다면 엄격하게 바른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설교자가 자기의 설교를 듣는 회중들이 회개하게끔 유도하지는 못하면서 진정으로 웅변적일 수 있을 때와 같이 피할 수 없는 선입견이나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의지에 “강력한 충격”을 주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얻어 맞았다는 느낌을 가지고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면서. 최소한 어떤 행동을 하겠다는 결심으로 나아갈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각성을 주고 상상력에 불을 붙이므로 말미암아 의지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그러한 효과를 주는 말. 그것을 웅변적인 말이라고 부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어거스틴은 “진리를 분명하게. 진리를 즐거운 것으로. 진리를 감동적인 것으로 만들라 (veritas pateat, veritas placeat, veritas moveat)"고 했습니다.

    그러니 웅변은 실천적인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 실천적인 결과를 목표하지 않으면 가짜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일랜드의 유명한 애국자요 법률가인 다니엘 오코넬 (Daniel O Connel)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웅변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요점은 판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보통 주일의 웅변은 그러한 말을 들을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단순히 유쾌한 마음을 일으킬 맘으로 공상의 세계에 불을 붙이는 설교자. 단순히 정서적인 유쾌함을 주기 위하여 감정만을 북돋아 주는 설교자는 웅변적인 설교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부류의 설교자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단순히 즐거움 만을 주는데 관심을 가지는 허망한 위선자들 외에도. 그들이 매우 그럴듯한 것을 말할 수 있고 사람들로 하여금 무언가를 “느끼게” 할 수만 있다면 사람들이 “어째서” 그렇게 느끼는지. 그러한 감정이 진정으로 어떠한 종교적 의도로 진전되는 지를 탐구해 보지 않고 스스로 설교를 잘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속이 텅비고 가치없는 부스러기 같은 것을 가지고 신문에서 웅변이라고 부추겨 세워 주는 일이 얼마나 잦은지요. 교회에서 돌아오는 아직 덜 배운 신출내기들의 이야기 속에서 그런 것들이 웅변으로 추대되는 일이 잦은데 그런 것을 보면 부끄럽습니다.

    웅변은 진지한 것입니다. 한 강론에서 한 문단이 매우 진한 흥미를 자아낸다고 해서 “매우 웅변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높은 명성을 얻을 만한 연사는 도덕적인 진지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때에 맞게 우아한 유머의 빛 속으로 빠져 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부수적인 것이고. 보다 철저한 진지함과 열심이 잇따르는 것이어야 합니다.

    데어민 (Theremin)은 유익한 소논문. '웅변은 하나의 덕'에서 웅변은 윤리학에 속한 것이고 말하는 사람의 정신이 주요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이론은 물론 지나치게 과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론은 퀸틸리안 (Q.uintilian)이 이미 부분적으로 관찰한 바와 같이 진리의 중요한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비네트 (Vinet)는 이렇게 말합니다. “웅변의 진정한 터는 무엇인가. 만일 웅변이 평범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현대의 많은 경우에서처럼 웅변이 차원 높은 철학적 사고들과 결합될 때. 우리는 대번에 웅변에서 받은 인상을 철학의 소산으로 여기려는 시험을 받게 된다.

     그러나 웅변은 보다 대중적이다. 웅변은 영혼의 '원시적'인 선율을 우리 속에서 떨리게 하는 힘이다 (순전히 인간적인 요소들을 말이다) 다른 경우는 말고 이러한 경우에만 우리는 그러한 힘을 발휘하는 사람을 웅변가라고 하는 것이다”

    어머니. 자녀. 친구. 가정. 나라. 하늘. 호수같은 평범하고 친숙한 개념들과 연관시키지 않고는 그 어느 주제라 할지라도 웅변적일 수는 없습니다. 연사의 임무란 자료를 모으고 예증하는 방식을 통하여 자신이 감동한 정서로 말미암아 이런 친밀한 개념들이 신선한 흥미를 불러 일으켜 듣는 이들의 마음에 그런 친밀한 개념들이 강하게 부딪히게 하는 것입니다. 강론을 위해 완전히 새로운 자료들을 찾아다니는 사람은 자료의 원천성에 대하여 신용을 얻을 수는 있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감탄을 불러 일으키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웅변에 속한 살아있는 능력을 발휘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설교자”가 필연적으로 친숙하게 된 사활을 좌우하는 복음 진리들을 말할 때만이 진정한 웅변가가 될 수 있습니다. 만일 보다 차원 높은 사고(思考)가 없더라도 올바른 웅변술은 설교자가 복음을 설교할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옛 진리들을 붙잡고. 그 진리들을 새로운 관심과 능력으로 옷 입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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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캠벨 몰간이 말하는 설교의 접근방식 -

    캠벨 몰간(G. Campbell Morgan, 1863~1945)은 영국과 미국에서 노스필드 사경회(Northfield Bible Conference)의 강사로 봉직하였다. 1916~1929년까지는 순회 설교자로서 봉사하였다. 그 기간동안에 많은 설교 자들과 목회자들은 캠벨 몰간의 글을 통해서 설교 준비에 도움을 얻었음을 인정 할 것이다.

    몰간은 캠브릿지의 췌샨트 대학(Cheshunt College) 학장으로 있던 1920년대 초기 설교에 대하여 많은 강론을 하였다. 그 강론들은 설교 (Preaching)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그 책에 수록된 강론 가운데 네 편을 소개한다면 설교의 본질적인 요점들, 설교 본문 선택, 중심 메시지, 설교의 서론과 결론등이다. 여기에 소개하는 내용은 설교의 본 질적인 요점들에서 뽑은 것인데, 설교의 본질에서 설교의 접근방식으로의 전환을 도와준다.

    기독교 사역자에게 가장좋은 사역은 설교 사역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는 한 가지 중요한 것을 무시한 채 사소한 천 가지의 문제거리에 매어달리는 위 험천만한 시대입니다. 그 중요한 한 가지는 설교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진리를 전달해 주는 언어활동을 가리키는 어휘들을 다 모아 보라고 권면하고 싶습니다(물론 제가 말하는 것은 헬라 원문으로 된 신약성경입니 다). 여덟 개에서 열 개의 헬라어 어휘가 있는데, 단어마다 설교하는 일의 어떤 국면을 지시합니다. 그러나 그 어휘 가운데 최상의 어휘가 둘 있습니다.

     영어 번역에서 언제나 그 어휘가 명백하게 드러나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나머지 어휘들 은 모두 가치있는 어휘들이지만 부수적인 어휘들입니다. 두 어휘란 '유앙겔리조'와 '케루소'인데 , 이것들은 우리 설교의 가장 중요한 국면을 지시하며설교에 대한 전반적인 신약의 이상을 보여주는 어휘들입니다.

    유앙겔리조는 복음을 전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이 영어에는 "preach the Gospel"이며 문자 그대로는 좋은 소식을 선포한다는 뜻입니다. 그 말에서 영어의 "evangel", "evangelist", "evangelistic"이라는 어휘가 파생되어 나온 것입니다. 이 어휘는 헬라어의 번역이 아니라, 헬라어에서 전이된 어휘입니다.

    만일 설교가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것이라면, 그것에는 인간의 필요와 하나님의 은혜를 다 함축하고 있을 것입니다. 신약의 입장에서 설교를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바로 이 어휘를 통해서 두 요점이 전제되고 있습니다.

    좋은 소식을 사람 들에게 선포하는 것은, 사람들이 좋은 소식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암시할 것입니다. 모든 인류의 죄와 슬픔과 비참이 거기에 함축된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은혜 의 전체적인 사실, 곧 하나님의 엄청난 계시와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합니다. 좋 은 소식을 선포하는 설교는 인간의 필요와 하나님의 은혜를 전제합니다. 우리가 설교를 할 때마다 우리는 인간의 필요와 하나님의 은혜 사이에 서있는 것입니다.

    우리 설교자들은 그 필요에 대해 은혜를 전하는 메신저들입니다.

    케루소란 단어는 매우 흥미있는 어휘로서, 왕좌에서의 선포를 의미합니다. 그 말은 통치자를 대신하여 메신저가 무엇인가를 전달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단어를 사용하면 두가지 개념, 즉 권위적인 왕좌와, 메신저가 명을 받아 전할 명령을 다시 주목해야 합니다.

    이 두 개념들을 매우 간단하게 함께 모아 생각하여 보십시오. 설교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일은 수백 가지의 여러 요점들과 다양한 국면들과 많은 다양한 어조를 수반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통일된 사상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설교하는 일은 하나님 보좌의 권위로 인간의 필요를 향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듣는 자들에게 선언된 것에 복종할 것을 요청합니다.

    저는 한때 어느 교역자 모임에서 어떤 분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설교하는 일이 설교자와 군중 사이의 갈등이었습니다. 그 는 많은 대중들 앞에서 그들이 복종할 것을 강압적으로 주장해야만 하였습니다.

    그러한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설교자의 소명이 바뀐 것입니다. 저는 참 놀랐습니다 만일 설교하는 일이 샐패하였거나 실패하고 있다면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설교자는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말을 하면서 반드시 자기가 무너뜨리려는 요새가 바로 인간 의지의 요새임을 늘 기억하지않으면 안됩니다. 그는 여러 감정의 노선을 따라서 오르락 내리락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의지를 추적하는 것입니다. 지성의 노선을 따라서 접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추적하는 궁극적인 표적은 의지입니다. 설교하는 일이 지성의 영역에서 단순하게 토론하는 것이거나, 또는 이러한 식으로 말하는 것을 용서하십시오라고 한다거나 감정의 영역에서 어리석음을 떠는 것이라면 실패합니다. 하나님의 의지 아래로 인간의 의지를 몰아 복종시킬 수 있을 때만 그 설교가 성공적입니다. 설교자는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옵니다. 그러나 좋은 소식은 작고 사소한 문제거리가 아닙니다.

    설교자는 왕의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메시지는 강제적인 요구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사역에 있어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본래의 사역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에 전무하리라(행6:4). 그것이 바로 신약성경에서 집사를 세우게 된 연유입니다. 지금 집사들이 어떠한 사람이든지 당시의 집사들은 그러한 차원에서 세워진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그들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교회의 직임을 세우는 원리를 주목해보십시오. 그들의 임무는 대단한 사역인 성찬을 거들어서, 말씀의 사역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수종들고 기도로 준비하는 일에 전무하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언어 사용의 무미건조함을 깊이 인식합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설교자가 된다면 대번에 그 일이 엄청난 일임을 인식할 것입니다. 설교하는 것은 위대한 일입니다. 몇년 전에 프레저(Frazer)감독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시대가 바라고 요구하는 것은 제사장이 아니고 선지자다. 지금 이 시대는 선지자를 받을 준비를 하고있다.

    우리는 오늘 설교하는 일을 위하여 세상이 알았던 그 어느 때보다 더 엄청난 때를 맞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를 밝히는 신학적 논쟁의 불행이 사람들을 만족시 킬 수 없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신약적인류의 설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곧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위대한 은혜의 메시지, 그것도 자기들은 하나님 의 보좌를 대변하고 그 보좌에 복종하라는 요구를 당당하게 할 수 있음을 인식한 사람들이 전하는 은혜의 메시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이제 설교 내용의 본질적인 요점들과, 그 요점들을 설교화하는데 있어서 본질적인 사항들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진수적인 사항들은 진리, 명료성, 열정입니다.

    저는 제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설교학 강의를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강론을 다른 사람들에게 한 적은 많이 있 습니다. 설교학에 대한 강론을 잘 준비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하는 설교학 강론을 들어서는 안됩니다 저는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에 나오는 설교들,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과 복음전도자들의 위대한 설교 행위를 탐구해보려고 애썼습니다. 그리고 저더러 한 편의 설교 내용의 진수들을 몇 단어로 모아 표현 해 보라면, 진리와 명료성과 열정이라는 세 단어로 약축시키겠습니다.

    진리

    저는 진리라는 말을 한 가지 방식으로 사용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쓴 마지막 편지인 디모데후서에서 너무나 통렬하고 너무나 놀라운 말로 디모데에게 도전적인 권면을 합니다.

    말씀을 전파하라. 이 전파하라는 동사어는 전령으로서 권위있게 선포하라는 의미의 동사입니다. 그의 메시지는 말씀이어야 합 니다. 신약에서 말씀이라는 어휘가 사용되는 용도를 살펴보십시오. 영어 성 경에서 그 단어가 대문자 Word로 씌어있는 곳이 여러 곳 있습니다. 어떤 곳에서 는 소문자 word로 그냥 씌여 있기도 합니다. 그러면 어째서 이렇게 서로 차이나게 씁니까?

    요한복음의 놀라운 서론에서 요한은 그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태초에 말씀(Word)이 계시니라. 그 말씀(Word)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그 말씀(Word)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곧 그런 다음 조금 건너뛰어 1장 14절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하였습니다.

    이 경우에는 모두 영어성경에서 말씀(word)을 대문자 Word로 썼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성경의 역사적인 모든 문건들에 그렇게 중요한, 위대한 서론을 살펴보십시오. 말씀의 목격자되고 일꾼된 자들의라는 어구가 나옵니다. 여기서는 소문자로 word라고 씌어 있습니다. 그 차이는 무엇입니까 어째서 번역자들이 여기 서는 대문자 대신 소문자로 그 단어를 썼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모르겠다고 대답 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째서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두 곳 다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말씀(소문자로 쓴)은 누가가 인자(人子)를 나타내는 최종적인 명사입니다. 물론 머리말은 언제나 마지막에 쓰여집니다. 그는 복음서를 쓰고 나서 이 머리말을 쓴 것입니다. 데오빌로에게 복음서를 소개하기 위하여 머리말을 쓴 것입니다. 그 안에서 예수님을 말씀(Word)으로 부릅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만일 제 책 가운데서 인용하여 그 말의 의미를 축소시키려 한다고 해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로고스(말씀)라는 단어가 신약에서 두 가지 방식으로 사용됩니다. 두 경우는 각각 서로 다른 경우를 반드시 함축합니다. 로고스라는 말이 가진 제일 되고 가장 단순한 경우는 말이나 언어를 나타내는 경우입니다. 다른 사람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진리를 표현하는 말이나 언어를 뜻합니다. 두번째 경우는 더 깊은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는데, 절대적 진리 자체를 뜻합니다.

    헬라어 학자 데이어 (Thayer)가 지적한 바와 같이, 로고스라는 헬라어는 그런 의미에서 라틴어 라티오, 곧 영어의 rational(이성적, 합리적)이나 reason(이성)이라는 말 을 파생시킨 어휘와 정확한 대응을 이루는 어휘입니다. 이 어휘의 의미를 주목하십시오. 그래서 로고스는 말(speech)입니다. 말로 전해진 진리, 이성 또는 진리의 표현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 개념들이 상호 관련을 지어 사용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성육신한 말씀은 하나님의 진리였고, 하나님에 대하여 말 을 하는 경우는 영원한 진리를 표현하는 경우입니다. 말씀과 이치는 논리적이고 진실한 말의 개념을 표현하여야 합니다. 신약성경을 연구할 때 말씀이 언급되는 문맥에서 어느 의미로 그 말이 사용되는지를 유심히 구별하는 일은 필요합니다.

    때로 그 단어가 이미 진술된 말을 가리키기도 하고, 그 진술을 나오게 한 본질 적인 진리를 가리키고, 어떤 경우에는 두 개념이 아주 분명하게 드러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설교자들이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 경우는 성경을 전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그렇습니까 그렇지요. 그것이 모두입니까 아닙니다. 위에서 말한 모든 개념이 거기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보다 더한 것, 모든 개념을 다 합한 것보다 더한 것을 원합니다.

    말씀 은 나타나 계시된 진리입니다. 말씀(word)은 내 자신의 지성적인 삶의 활동을 통 해서 내가 발견해낸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말씀을 내 지성적인 삶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표현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시편 119편을 철저하게 연구하려한다면 (그 시편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위대한 시편임),

    그것이 토라 곧 율법, 네빔 곧 선지자들, 케투빔 곧 기록된 말씀 등만 을 언급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 시편은 진리, 진수 적인 진리, 하나 님께서 알리신 진리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우리 설교자들을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 모아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이 문서를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을 던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체험이 없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문서는 체험을 시험합니다. 순교자 저스틴이 하나님의 말씀 에 관하여 말하면서 정자(精子)와 같은 말씀이라고 엄청난 묘사를 했습니다.

    말하자면, 씨앗, 규범적인 배아 상태로 있는 진리라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 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대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바로 우리가 배아와 규범으로 된 진리를 발견합니다.

    성경에 이것을 적용해보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배아 상태로 있는 진리는 표현되고 발전되고 적용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설교자의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역시 규범적인 진리를 가집니다.

    이 말은, 우리가 우리의 생각을 그것으로 시험해보아야지 우리의 생각으로 그 진리를 시험해 보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설교자는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께서 알리신 말씀인 진리에 붙들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어떻게 알리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당신의 아들 안에서 말씀, 진리를 알리셨고

    성경문서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행사를 위한 준비, 역사적인 사실, 가장 우선적인 해석에 대한 완전한 기록을 가지게 됨을 논증의 여지없이 단정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노선을 따르십시오. 구약성경은 전부 준비 단계요, 사복음서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완전한 기록이요, 21개의 모든 서신은 진리 계시에 대한 주도적인 해석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말씀(word)이 되시는 이 위대하신 분을 중심 하여 성경의 모든 문서는 존재합니다.

    우리가 설교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계시, 나타낸바 된 진리를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안에서 당신 자신을 나타내셨으며 성경은 그러한 하나님의 자기 표현을 문서라는 전제 위에서 기독교 사 역을 시작하여야 합니다. 성경을 그런 관점에서 보지 않으면 그 순간에 우리는 최종적인 계시로서의 그리스도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저는 논쟁적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언제나 그렇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손해를 감수하는 사람들에게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무슨 이 유에선가 성경의 권위를 부인하면서도 자기는 그리스도 편에 설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어떠한 분입니까 오늘날 어떤 설교자들 가운데는 예수님께 나아가는 접근 방식에 대하여 말하고 설교하는 것을 유행으로 삼는 일 이 있습니다.

    우리는 초기 예수님의 제자들이 했던 것같이 예수님께 돌아가야 한 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한 입장을 취하는 사람의 오류를 우리가 찾을 수 있었습니까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셔야 했던 제한된 시기에 그 사람들은 주님 의 말씀을 이해했습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눅 12:49~50)그 말씀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복음의 바로 그 장에 나 오는바 당신의 사명을 이루기까지 자신을 알리실 수 없으신 고초를 표현하신 그리스도의 위대한 독백의 의미를 말입니다. 주님은 괴로워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무엇을 가르치셨느냐가 그리스도에 대한 최종적인 사실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시냐가 그리스도를 전부 다 말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승천하신 사실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그리스도께 나아가야 하며, 그러한 그리스도를 붙잡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완전 충만한 하나님 말씀입니다.

    모든 설교는 진리의 총체에서 나온 메시지입니다. 그런 거룩한 진리를 해석하는데 실패한 설교는 모두 실패작입니다. 그 총체성은 작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습니다. 그 안에 신성의 충만이 육체로 거합니다.

    문서를 통하여 자기에게 해석된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그리스도를 설교하기 시작하는 사람은 결코 다함이 없을 일을 시작한 셈입니다. 그는 결코 더 이상 전할 메시지가 없을 정도로 메시지가 고갈날 끝에 이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메시지는 끝없이 충만하고 영원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계시하여 주신 것이니, 설교한다는 것은 바로 그 진리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발견하는 비밀(mystery)이라는 말을 생각해 봅시다. 비밀이란 말을 할 때 우리는 무엇을 뜻합니까 보통 그 말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헬라 철학자들은 그 말을, 비밀을 전수 받은 사람에게만 알려질 수 있는 것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전혀 말해줄 수 없는 것으로 철학자들은 이해하였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비밀이란 말이 그러한 의미로 사용된 적이 없습니다. 신약성경에서 계시될 때는 인간의 지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바울은 우리가 이해할 수없는 것이란 뜻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경건의 깊은 핵심과 의미는 인간 지성의 발견을 초월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것 은 계시된 것입니다. 비밀이라는 말 대신 나타내다란 말을 놓아 보십시오. 나타난 것은 이해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설교를 하려고 한다면 여기에 우리의 부요함이 있습니다. 설교자 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인간의 지성이 발견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계시하셨기 때문에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약의 설교자는 언제나 초자연의 영역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자기가 이적이라고 부르는 작은 문제들을 따로 떼어놓을 때 자기는 초자연적인 것을 배제한 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된 일입니다. 제가 작다고 말하는 것은 비교적 그렇다 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적이라고 부르는 예수님의 이적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 비교하여 볼 때 이차적이고 중요하지 않는 것이고, 예수님과 예수님의 능하신 말씀에 비하면 정말 무의미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적을 물리적인 사물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활동을 의미한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초자연적인 것을 다루어야 합니다.

    모든 설교자들은 응당 그래야 합니다. 설교자들은 역시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설교자들이 다른 세계에 속하는 것 을 그만 둘 때, 치료시키고 고양하는 능력으로 이 세계를 감화시킬 어떤 능력도 상실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사람에게 온 계시된 진리의 영역에서 움직입니다.

    그 점은 우리들에게 유별난 사람이 될 것을 요구합니다. 설교하는 일은 이론의 선포나 의심을 논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어떤 종류의 이론이든지 선포하거나 자기의 의심을 논할 완전한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설교는 아닙니다. 만일 그대가 어떤 사람을 얻으려면 그대 확신의 유익을 내게 달라. 그대의 의심을 자신에게만 간직하고 있으라. 나는 내 자신의 의심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괴테는 말했습니다.

    설교자들이 무턱대고 사색할 때는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사색하고 있으며 때로는 사색해야 합니다. 때로 나는 말합니다. 나는 생각하고 있다. 기록하기를 중단하라고. 사색은 설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의 것을 선언하는 것도 설교는 아닙니다. 설교하는 일은 말씀, 계시된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맡은 것은 진리의 총체성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큰 것 을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반세기나, 한 세기를 살며 설교를 해야 한다 해도, 우리가 맡은 것을 결코 다 써버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내가 의탁한 것을 저가 그 날까지 능히 지키실 줄 확신하노라.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 바른 번역이라고 확신하지는 않습니다. 해석하는 것은 하나의 시도입니다. 그것을 문자 그대로 번역한다면, 능히 내가 맡든 것은 지키실 줄 확신하노라로 변역 해야 합니다. 우리 번역자들은 언제나 바울이 주님께 맡긴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저는 오히려 주님께서 바울에게 주셔서 바울이 맡은 것을 능히 지키실 줄 확신한다고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이 책임맡은 것을지키실 줄 확신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 속에 응축되고 구체화된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총체를 바울이 맡았다는 의미로 이해한다는 말입니다. 그 진리의 총체성은 한 문서(성경을 의미함-역자 주)를 통하여 해석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설교자들의 임무입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시대의 정신을 포착해야 합니다. 설교자가 그렇게 한다 해도 하나님은 관대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임무는 시대의 정신은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진리를 통하여 시대의 정신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그것은 옹졸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진리 가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아도 될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설교는 모든 점에서 인생을 다룰 것입니다.

    우리는 상황을 논의하러 사람들 앞에 나가는 것이 아니고 메시지를 전하기 위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자기 입술에 자주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공식과 같은 말을 두지 않으면, 자기 영혼을 돌아보면서 사람과 여러 조건들 앞에서 항상 서서 견디어야 합니다. 여기 설교자가 다루어야 하는 진리는, 사람이 자기의 모든 노력과 모든 진지함과 부단함과 모든 지성적인 활동으로는 전혀 발견할 수 없고 다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시하고 알리신 진리입니다(히1:1~1:14).

     하나님은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위대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과거 여러 시대 여러 경우에 조금씩 다양한 방식으로 말씀하시고 자신을 알리다가 마침내 한 인격 안에서 말씀하시고 자신을 알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모든 계시 부분들을 모아, 한 포괄적이고 궁극적인 계시 안에서 한꺼번에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독교 사역에 임하여 설교자가 될 때, 우리가 맡아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진리의 전(全)체계입니다.

    제가 진리라고 말할 때는 모든 충만한 범주를 다 함축한 말씀을 의미합니다.

    저는 다시 진리라는 어휘를 통하여 계시, 하나님의 자기 계시, 중심적이고 궁극 적이고 최고로 아들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의 계시를 뜻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물론 문서를 통해서는 진리가 성경에 있습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진리 가 모든 개개 상황과 관련되는 대로 하나님의 진리를 선언하는 일입니다. 말씀 을 전파하라.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든 설교는 위대한 진리의 총체성의 어느 부분을 해석하는 것이며, 또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모든 설교는 다 두 가지 요점, 즉 남의 손을 거치지 않아야 하는 독창성과 권위로 특징지어 집니 다.

    독창성

    저는 길게 인용하려고 합니다. 한 35년 전인가, 저 스스로를 위하여 이 점을 상세하게 진술해 놓았습니다. 저는 그것을 제 곁에다 두고 매우 자주 읽어보곤 하였습니다.

    그것은 설교의 독창성에 관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부단히 독창적이라는 어휘를 사용하면서, 설교자는 마땅히 독창 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해왔습니다. 우리는 한 설교를 비평하는 말 속에서 그 어휘 가 튀어나오는 것을 듣습니다. 그 설교는 매우 좋았는데 독창적이지 못하였 다. 우리는 무엇이 정말 독창적인가를 인식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쉐드 (Shedd)의 글에서 길게 인용해보려고 합니다.

    독창성이란 말은 자주 사용되는 용어인데, 그 말이 정규적으로 사용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고, 또 자주 오해되는 용어라 할 수 있다. 그 용어를 진리의 창출을 묘 사하는 어휘로 생각되는 때가 매우 잦다. 통속적으로 흔히 독창적 이지(理智)란 그 전에는 전혀 들어보지 못한 개념이나 진리들을 표현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인간의 이지로는 모방이나 짐작도 전혀 하지 못하였던 개념이나 진리들인데 그것이 어떤 조짐이나 예고도 없이 급작스런 비약으로 말미암아 돌출하어 나오게 된 것 이다.

    그러한 독창성은 유한성을 지닌 지성에서는 전혀 가능하지가 않다. 그러한 독창성은 창조주만의 특권이며, 그 용어의 엄격하고 전문적인 의미에서 그 독창성 의 결과는 계시이다. 하나님만이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실 수 있으 시다. 하나님만이 절대적으로 새로운 진리를 전달하여 주실 수 있다.

    사람에게 있어 독창성은 언제나 상대적이며, 절대적이지 않다. 예증을 위해서 철학계에서 독창적인 사상가를 골라보자. 생각이 깊고 심오하게 신선하고 살아있는 철학자 플라톤을 들어 생각해 보라. 그의 무게있고 음악적인 철학적 업적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그 모든 지혜가 그 사람의 정신적인 체질에서 발산되어 나온 것은 아닌지를 스스로 물어보라.

    그 사람이 그러한 윤리학의 제일되는 진리들이나 논리의 필연적인 형식이나 물 리학의고정된 원리들을 절대적으로 독창적으로 창출한 것은 아니다. 그러한 것들은 더 높은 작자에 의해서 절대적으로 이루어진 이성적 구조 안에 다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 사람의 독창성이란 그러한 것들을 해석하고 풀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면서 우리에게 전혀 알려지지 아니하고 전혀 들어보지 아니한 어떤 것을 듣는 것 같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정말 당연한 이치다. 우리의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본성 속에 그의 말에 상응하는 소리가 있음을 발견한다. 인류 가운데서 위대한 사상가들 앞에서 조차, 생각이 있는 모든 인격은 자증적인 진리와 명제들을 가리키면서 오만한 태도가 아닌 경외심 어린 다부진 어조로 욥이 한 말을 할 수 있다.

    나의 눈이 이것을 다 보았고 나의 귀가 이것을 듣고 통달하였느니라. 너희 아는 것을 나도 아노니 너희만 못한 내가 아니니라. 이 시점에서 욥기의 말씀을 인용한 것은 정말 적절하다. 우리가 독창적인 것에 관심은 둘 때 우리 말에 귀를 기울이는 모든 사람마다 그 이야기를 한다.

    이 위대한 사상가들은 자신들이 먼저 그 점을 인정한다.피조계 내, 유한한 지성의 한도 내에서 창의성이란 해석의 능력을 의미한다. 그 점을 아무리 분석하 고 생각해 보아도 해석이다.이미 존재하고 이미 전달되어 있고 이미 소유 하고 있던 개념이나 진리를 순전하고 예리하고 정확하게 해석하는 것이다.거기 에는 창조란 전혀 존재하지않고 발전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절대적인 창작이 아니라 적용만 있다.

    그러나 정신적인 진행과정은 얼마나 신선하고 얼마나 창의적이었던가 플라톤이나 그를 연구하는 수천의 철학자들도 본질적으로 동일하였다. 그럼에도 모든 각 경우마다 열심이 있었고 자극이 있었고 생명과 감정의 모든 열광적인 용솟음 이 새로운 대륙과 새로운 별을 발견하는 일에 함께 존재하였던 것이다.

    그때 새로운 유성이 시야를 벗어나 사라져갈 때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처럼 그는 느꼈네.

    아니면 그가 이글거리는 독수리의 눈으로 태평양을 바라볼 때

    견고한 코르테츠같 이

    그의 모든 사람들은 어림짐작으로 서로를 쳐다보며

    조용히 다리엔의 봉우리를 바라보았네.

    사람의 독창성이란 진리를 창출하는 능력이 아니라 이해하는 능력이다. 두 위 대한 책이 그에게 진리를 전달해 주었다. 하나는 자연의 책이고, 또 다른 하나는 계시의 책이다. 진리가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구조를 통하여 전달되고 창조적인 손길로 인간 본성의바탕 속에 심겨졌다면, 그것이 씌어진 대로 읽고 씌어있는 대로 해석하는데 있어서 가장 성공적인 사람은 가장 창의적인 사상가다.

    만일 진리가 이적이나 주님의 성육신이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전달되었고, 특별 한 영감에 의하여 분여되어 객관적이고 기록된 계시로 말미암아 그 앞에 놓여있 다면, 그것을해석하는데 가장 성공적인 사람은 창의적인 사상가이다. 그 사람이 진리의 살아있는 요소들을 분석하는데 가장 예리하다. 자기 자신을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존재로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가장 간절하고 충직한 사람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이 인용문은 나의 삶과 일과 설교하는 일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진술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 인용문이 독창성의 문제를 어디서 생각하는지 알게 합니 다. 만일 설교자로서 우리가 맡은 것이 말씀 속에 들어 있는 진리의 총체성, 곧 우리가 해석하기 위하여 대면하여야 하는 기록된 말씀 속에 들어 있는 진리의 총 체성이라면, 우리는 언제나 독창적일 것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진리를 창안해 내거나 발견해내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계시된 진리의 의미를 이해하고, 또 다 른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독창성을 소유한 모든 기독교 설교를 통하여 그 진리의 총체성을 해석하고 있다는의미에서 그러합니다. 그 독창성은 진실한 설교의 표증입니다. 단지 자신의 사고방식들을 따라서 사색만 하는 사람은 결코 독창적이지 못합니다.

    설교하는데 독창적이라는 것은 계시를 해석하는 것을 함축합니다. 계시는 너무 위대하고 위엄에 찬 나머지, 만일 우리가 각 메시지에서 그것을 다루고 그 속으 로 빨려들어간다면, 우리 설교에는 언제나 독창적인 것이 있게 마련입니다.

    권위

    또한 설교는 권위의 특징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7장에는 우리 가 산상설교라 부르는 주님의 말씀-산상설교는 오히려 왕의 위대한 윤리선언 이라고 해야 좋을 것임-을 들을 수 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효과가 나타났는지를 언급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받은 감화에 관하여 기록한 대목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28~29).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권세있는 자로서 말씀하셨다는 선언이지만, 그것이 여기서 주목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무엇이 우리를 사로잡습니 까 이 진술 가운데서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대조나 구별시키는 바로 그 작은 어구입니다. 저는 그 대목을 거듭거듭 읽어보았어도 여전히 그런 시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물론예수께서 말씀하실 때 권세있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래 전 부터 나를 사로잡고 놓지 아니하는 것은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라는 대조 어구입니다.

    서기관들은 권위있는 교사들이었습니다. 서기관의 반열은 모세의 법에는 들어 있지 않고 에스라 때에 들어온 것입니다. 에스라가 나무 강단을 세우고 우리가 첫번째 사경회라 부르는 집회를 열었을 때,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 하였습니다. 이 말은 먼저 그가 히브리어로 된 율법책을, 포로로 잡혔다가 돌아 온 자들이 알고 있는 언어로 번역하여 읽어주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율법을 해석하고 적용하였습니다. 그래서 거기서부터 서기관의 반열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들은 권위있는 교사들이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 권위를 인정하셨을 정도 니까요. 마태복음23장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그들이 행하는 바는 본받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요점입니다.

    처음에 모세의 법에는 지정되어 있지 아니한 자리였는데 그들의 권위가 인정받았다니 말입니다. 우리 주님도 그 점을 인정하십니다. 그들은 분명히 권위를 가지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 가운데서 느낄 수 있는 권세는 서기관들의 가르침에서 느낄 수 있는 권세의 성질에 속한 것과는 달랐습니다. 그 차이는 무엇입니까 서기관의 권세는 자기들이 인정받은 지위를 함축하는 것이고, 그들이 모세의 율법을 해석하는 자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기초한 것입니다. 그것은 부여받아 행사하는 권세입니다. 그 차이는 무엇입니까 그는 권세를 가진 자로서 말씀하신 것이지 권세를 부여받은 자로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주님의 권세가 그의 품행이나 태도나 얼굴에서 발견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몸을 입고 계시던 그 당시에 살아 그의 말씀을 직접 들었다면, 그분의 인격의 존귀와 기이함을 알아보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의 권위는 주님이 말씀하신 것에서 오는 권위입니다. 그 권위가 수많은 사람들을 얻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묵묵히 그 권위에 순응하였으니 말입니다.

    명료성

    다시 모든 설교는 명료성을 가져야 합니다. 물론 저는 모든 방면에서 진술의 명료성을 의미합니다.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설교가 끝마칠 때 회중 들이 설교자가 이렇게 말했어라고 말하면서 흩어질 정도로 설교자는 설교해 야 한다.제가 이해하기로 그 진술의 요지는, 설교란 회중들을 사로잡는 어떤 것을 분명하게 진술하는 분명한 메시지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이 흩어지면서 설교자가 말한 것이 이것이다 할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 니다. 명료성. 설교에서 모든 것은 이 점에 속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하는 다른 것은, 명료하게 만드는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성령에 달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을 설교하는 것은 성령의 나타남과 성령의 능력 안에서 행해져야 합니다. 단순히 성령의 능력이 아 니라 명백하게 하는 성령의 나타남 속에서 행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기독교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진실하면, 그는 성령께서 자기와 협력하여-나는 경외하는 심정으로 이 말을 하나 이치에도 합하 게 이 말을 하는 것임-명백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 도 성령의 하시는 일에만 전적으로 매달릴 권리가 없습니다. 설교를 준비하고 전 할 때 설교자는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진술을 만들도록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말씨와 예증과 전달자세등도 여기에 관련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이해하기 위하여 설교합니다.

    명료성은 예증의 전체 문제에 영향을 줍니다. 그것은 또다른 큰 지엽적인 문제 입니다. 그러나 저는 모든 젊은 설교자들이 적용할 예증의 간단한 공식을 제공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예화들이 설교에 빛같이 쓰이도록 사용하여야 하며, 일부러 끌어드리는 예화는 사용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이 설교하고 어느 스토리를 말해주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스토리가 전하는 메시지와는 정말 없어서는 안되는 관계를 가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 예화를 설교 속에 넣고 회중들의 지루함을 덜어주고 그 순 간에 회중들로 미소를 머금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설교 내용과는 아무런 관계 가 없습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 제가 아는 가장 뛰어난 기술을 소유한 사람 가운데 존 헨리 조웽(John Henry Jowett), 워킨슨(W. L. Watkinson)이 있습니다. 조웽 박사의 예화는 그가 전하는 메시지의 주요 주제 속으로 빛을 쏩니다. 그의 설교를 듣고나서는 그 설교에 나오는 예화를 최상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예화 는 최상의 주제를 예증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저는 그 사람이 버밍험에서 한 얘기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인간성을 인간적인 방식으로 분별하는 것과 하나님의 방식으로 분별하는 것은 근본적으로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분별 방식은 수직 적인 것이고, 인간적인 방식은 수평적입니다.

    우리가 함께 있을 때, 그는 찬송가를 집어 곧바로 세워 들고서는 이렇게 말했 습니다.

    자, 제가 뜻하는 바를 보여드리지요. 그것이 바로 좌우를 하나님의 방식으로 분별하는 방식입니다.

    그런 다음에 그 책을 옆으로 뉘어 들고는 이것이 바로 수평적인 것입니다.

    위, 중간, 아랫 부분이지요. 그것이 바로 인간적인 분별 방식이지요.그것은 참 대단한 예증이었습니다.

    우리 설교자의 임무란, 설교를 구성하고 있는 진리의 국면과, 언제나 그 자체로 권위를 갖춘 피할 수 없는 진리 안에 있기 마련인 위대한 독창성을 가지고 어떻게 해서든지진리를 우리의 말씨, 우리의 예증, 물론 말할 나위없이 우리의 방식을 통해서 명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열정

    끝으로 세번째 본질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열정입니다. 저는 이 점에 대하여는 매우 간단하게만 말씀 드리려합니다. 참된 설교에는 언제나 정열이 있게 마련 입니다. 그러나 열정적인 것이 어떤 인위적이고 의식적인 노력에 의해서 만들어 진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선언하고 있는 것과, 그것에 대하여 우 리 의식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날 설교의 절반-제가 잔인하게 말 해도 용서하십시오-은 열정의 요소가 없어서 실패하는 것입니다.

    저는 단순한 흥분을 가리켜 이렇게 논증하고 있지 않습니다. 불 그림을 그려 놓은 것으로는 절대로 타지 않습니다. 모방적인 열심은 설교자 안에 존재할 수 있는 가장 허망한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한 메시지가 설교자에게 주어지고, 그 메시지가 어느 시점의 삶에 관계하는지를 알았다면, 불과 힘과 열기로 정신을 잃고 종종 사로잡히지 않는다는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진리, 명료성, 열정-저는 진정한 설교는 언제나 이 세 요소가 있게 마련이라고 믿습니다.

    제 관점으로 보면, 진리는 언제나 영혼에 권위의 인상을 남기나, 그 진리가 단순히 이지적인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으로서 우리 인격을 통하여 나가는 경우가 아니면, 그 진리가 영혼에까지 미치게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어느 설교자도 자기 체험의 수준 이상으로 청중들을 고양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 합니다.

    그것은 저의 확신입니다. 만일 설교자들이 진리를 정확하게 음미하였다 할지라도, 단순한 이지적인 진술에 불과한 채 청중들로 하여금 진리의 힘을 느끼게 하려고 한다면,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출판과 설교 사이의 차이입니다. 책을 읽으면 진리를 얻습니다. 그러나 설교를 통해서는 진리에 다 사람을 더하여 얻습니다. 우리가 이 둘을 분리할 수 있을 정도로 합해져 있는 것은 아니라, 진리가 사람을 통하여 나에게 구체적으로 표현된다는 말입니다.

    진리와 삶은 설교에 있어서 함께 갑니다. 나는 진리라고 말씀하신 분이 또 한 나는 생명(삶의 분원으로서의-역자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삶으로 진리의 영원한 예증을 얻습니다. 그것은 정도는 다르지만 진실로 설교하는 모든 사람들을 통하여 재생산되어야 합니다. 물론 설교는 회중에게 강 의를 하거나 회중과 어떤문제들을 놓고 토론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 설교자들이 관계하는 일은 그런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임무란 하나님의 말씀을 말로 전파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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