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철목사:一死覺悟/ 김익두목사: 성령의 세례/남궁혁목사 2002-04-13 12:02:57 read : 2875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주기철목사/一死覺悟 (요11:16)
일사각오 (一死覺悟)
『듸두모라 하는 도마가 동무에게 말하되 우리도 또한 가서 같이 죽자 하더라.』
요한복음 11장 16절은 나사로의 부생장으로 읽게 되다. 예수님 전도의 시기는 점점 끝나게 되고 십자가는 차차 가까와 오는 때 마침 사랑하는 친구 베다니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 그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에게 사람을 보내어 급히 오시어 병고쳐 주시기를 간구하였다. 이틀이나 지체하는 중 나사로는 그만 죽었다. 예루살렘에는 예수를 죽이려는 무리들이 기회를 노리고 있는 형세이다. 그러나 주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베다니를 향하여 한 걸음 두 걸음 올라가시었다. 그러므로 예수를 따라 위험한 곳에 전진하는 제자들은 위구(危懼)한 생각이 깊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에 도마가 동무에게 이르되 우리들도 또한 가서 같이 죽자고 부르짖었나니 이는 솔직한 도마가 위험 직전에 일사를 각오하는 말이다. 비판의 사람 도마도 사선(死線)을 넘어선 이상 창검이 족히 두려울 바 없는지라 후일의 도마는 과연 파사와 인도에서 선교하다가 인도인의 창에 피를 뿌려 순교하므로 인도 교회의 터를 개척하였다. 그래서 7월 1일은 도마의 순교일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도마와 같이 일사 각오가 있어야 한다.
一. 예수를 따라서의 일사각오
이제 위험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예수를 따라가려면 생명을 아끼고는 따라갈 수 없다. 도마의 생각에 금번 행차에는 위기를 벗어난다 하더라도 수난의 최기(最期)는 멀지 않은 장래에 닥쳐올 것을 직감(直感)하였던 것이다. 예수를 버리고 사느냐? 예수를 따라 죽느냐? 예수를 버리고 사는 것은 정말 죽는 것이오 예수를 따라 죽는 것은 정말 사는 것이다. 그래서 솔직한 도마는 「우리도 또한 같이 죽자」고 일사를 각오한 것이다.
예수를 환영하던 한 때도 지금 지나가고 수난의 때는 박도하였나니 물러갈 자는 물러가고 따라갈 자는 일사를 각오하고 나서라.
『무릇 나에게 오는 자는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자기의 생명보다 나를 더 사랑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또 누구든지 저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 14:26-27)
『그리스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들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신지라』 (벧전 2:21). 이 천지간 머리 둘 곳 없는 곤궁의 자취 사람들에게 스러버리우는 고독의 자취를 우리도 밝아야 하고 병자와 가난한 자를 위하여 수고하는 사람의 자취, 도처에 핍박하던 곤고의 자취를 우리도 따라 나가야 한다. 망하여가는 예루살렘 성 하에 눈물의 자취 겟세마네 동산의 피땀의 자취! 우리도 일보 이보 눈물과 땀방울의 자취를 걸어야 하고 골고다에 흘리신 피의 자취, 우리도 이 피자취에 엎디어 이 몸을 십자가의 제단에 드려야 한다.
내 주의 지신 십자가 우리는 안 질가 십자가 각기 있으니 내게도 있도다. 성 도마의 일사각오 인도 도상(印度途上)에 뿌리는 피! 오늘 우리에게도 예수를 따라 일사각오!
二. 남을 위하여의 일사각오
주님의 이번 베다니 행차는 한 사람 친구 나사로를 위한 모험이오, 마르다와 마리아의 간구에 응하여 수고하시는 것이니 남을 위한 모험이다. 이 예수를 따라가는 제자의 일행도 남을 위한 수고라 하겠다. 그러므로 『우리도 또한 가서 함께 죽자』는 도마의 결심은 남을 위한 일사각오다.
예수의 일생은 순전히 남을 위한 일생이니 이 세상에 탄강하심도 남을 위하심이오 십자가에 죽으심도 죄인을 위하심이었나니 이 예수를 믿는 자의 행위도 또한 남을 위한 희생이라야 한다. 세상 사람은 남을 희생하여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지만 예수교는 자기를 희생하여 남을 구원하는 것이다.
살신 애인(殺身愛人) 그 얼마나 숭고한 정신이며 그 얼마나 거룩한 행위이냐! 감리교 제 1대 선교사 아펜셀라 목사는 조선 감리교의 기초석이오 배제와 이화학교의 아버지다. 이보다 저의 최후는 더욱 고귀하였나니 마지막 전도 여행에 수증기선으로 남행하다가 그 배는 불행히 파선하였다. 자기는 一等室 손님으로 구조를 받아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행자인 조선인 여학생을 건지려다가 그만 죽어버렸다. 오! 이 얼마나 거룩한 죽음이냐! 남을 위하여, 일개 외국인 여학생을 위하여 만리 타국에 그 생명을 버리는 그 정신은 우리 조선 교회 역사상에 살아있고 그 영혼은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빛나리로다. 더구나 그 아들 그 딸도 조선을 위하여 선교를 계속하여 있지 아니한가?
흑노 해방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아브라함 링컨의 아름다운 일생, 아프리카 개척을 위하여 몸을 드린 선교사 리빙스톤의 장열한 일생! 이는 다 남을 위한 제물이다. 남양군도와 인도와 중국의 선교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자 百이요 千이다. 이들은 다 예수의 정신을 계승한 희생이다. 당년 나사로를 위하여 일사를 각오한 도마는 후일 억만의 인도인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었도다! 숭고할거나! 도마의 일사각오! 오늘 우리에게도 남을 위한 일사각오.
三. 부활 진리를 위하여 일사각오
주님 이번 베다니 행차는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기 위하여서의 모험이다. 주님이 베다니에 도착한 때는 벌써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애곡의 베다니었나니 주님은 사랑하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인생의 비극을 눈물뿌려 곡하시었다. 기도와 함께 『나사로야 나오라』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응하여 천지도 놀라는 듯 나사로는 부생하였다. 아! 부활! 할렐루야! 영광일세.
나사로의 부생은 이적중 최대의 이적일 뿐 아니라 부활의 최대 교리를 산 사실로 보여주는 이적이오 또한 장래에 예수의 부활을 알려주는 사실이다. 그래서 『너희들을 위하여 기뻐하는 것은 너희들로 하여금 믿게 함이라』(요11:15) 고, 『이 말을 하옵는 것은 둘러산 사람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함이라』(요11:42) 고 예고한 대로 나사로는 부활하였다. 이는 주님의 부활과 신자의 부활을 믿게 하는 큰 이적이다.
도마가 이번에 예수를 배종(陪從)하여 부활의 사실을 목도하게 되었으니 『우리도 또한 가서 같이 죽자』함은 미리 안 것은 아니나 부활을 목도할 수 있는 일사의 각오라 할 수 있다. 후일 도마는 예수의 부활을 확신하고 대오철저(大悟徹底)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고 증거하였다. 그런즉 도마는 나사로의 부생을 통하여 예수의 부활을 확신하는 동시에 신자의 부활을 확신하였다. 그래서 도마는 이 부활의 복음을 파사와 인도에 전하였다.
인류에게 유익을 주는 진리의 발명은 모두 희생을 결과 아닌 것이 없다. 아메리카 대륙이 인간의 복지되기까지 콜럼버스 이래 허다한 항해자의 수고가 있었고 전기 등이 우리 앞에 밝아지기까지에는 에디슨 같은 과학자들의 뇌고가 쌓였던 것이다. 함지사지면후생(陷之死地面後生)이요 유사이생(有死而生) 죽음이 있는 뒤에 삶이 있다. 한신(韓信)의 배수진(背水陣)도 일사각오다. 일사각오 한 뒤에 승리가 있고 발명이 있고 살 길이 있다. 하물며 천래의 진리 부활의 진리리오, 내세를 부인하는 공산당 무리도 그 주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늘 영생을 믿고 부활을 소망하는 신자들은 왜? 죽음을 두려워하느냐?
부활의 복음이 우리에게 이르기까지 피로서 전지 우전하여 나려오는 것이다. 로마제국의 박해하에 오십만 성도의 피가 흐르고 참 복음을 위하여 로마교 법왕 악형하에 백만 신자의 피가 흘렀다. 바디칸 궁중에 봉쇄된 성경을 개방하여 만민의 성경이 되기 위하여는 위크리프의 백골이 불에 타지고 틴달의 몸이 재가 되지 않았는가? 신학생 여러분, 제군의 읽는 성경은 피의 기록! 피의 전달이다. 신학을 말하므로 제군의 사명이 다 되는 것인가. 피로써 전하여 온 부활의 복음을 우리 또한 지키고 피로 전하사이다. 일사각오 도마는 부활의 복음을 위하여 인도 도상에 피를 뿌리었소. 오! 오늘 우리에게도 부활의 복음을 위한 일사각오!
< 編者曰에, 이 설교는 평양신학교 부흥회 첫날 설교였는데 朱 牧師 순교 후 『일사각오』 소리 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으나 당시 설교 내용이 기억되지 않는다. 간절히 기도하는 중 5월 20일 아침 도마의 『일사각오』 朱 牧師의 『일사각오』가 알리워지기로 많은 감동 중에 씁니다. (金鱗瑞 追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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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 김익두/ 성령의 세례 (행1:1-5)
성령의 세례
주님은 30년간은 인륜(人倫)을 배워 지키시고, 3년간은 하나님 말씀을 전파하셨다. 그 때에 수종자는 많았으나, 끝까지 수종한 자는 120명 인줄 안다. 평시에 주를 따른 자는 그 이적과 기사를 본 연고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고통이 찾아 올 때에는, 수종 들던 자들이 다 흩어졌다. 베드로도 가고, 요한까지도 물러갔다. 주님은 전 세계를 구원할 책임을 그 제자들에게 맡기려 할 때에, 다른 말씀하시지 않고, 다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하시고, 또는 「아버지의 허락을 기다리라」 하셨다. 성령의 세례 받지 않는 교회는, 아무리 교회 건물은 장엄하고, 음악의 설비가 야단스러워도 소용 없는 것이다.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참 교회가 되는 것이다. 예수의 원수는 미신자(未信者)보다 신자 중에 많은 것이다. 성경을 모르는 자보다 성경을 잘 아는 자 중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 성경학자이던 바리새 교인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을 보라. 근대에 있어서도 신학자가 예수를 반대하지 않았는가? 요한복음 14장을 보면,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가서 보혜사를 보내겠다고 하셨다. 우리 예수교의 특색은 성령의 세례받는 것만은, 우리 예수교회에만 있는 복된 은총의 특권이다. 그러면 성령의 세례란 무엇인가? 원산(元山) 어떤 곳에는 기도하는 여인이 있다고 한다. 그 여인은 성령을 받았노라고, 돌아다니며, 별소리 다 하면서 사람 유혹한다는 것이다. 그 여인은 공교하게 사람을 만나면, 사주(四柱)장이도 하는 일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런 것을 보고, 성령받은 자로 알아 미혹 받는다고 하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랴! 이제 성령의 세례받는 일을 말하려 한다. 성경에 성령은 불(火), 물(水), 바람(風), 비둘기(鳩), 기름(油) 이런 여러 가지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다.
Ⅰ. 불의 성령(火聖靈)
불에 두 가지 특성이 있다. 첫째로, 불은 광명한 빛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성령의 불 세례를 받은 자는 빛 가운데 있게 되어,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알며, 자기 죄를 알고 영생을 알며, 부활을 알게 되는 것이다. 불이 없는 곳에는 흑암 뿐이다. 그러므로 세인들은, 천문(天文)과 지리는 통달(通達)하면서도, 하나님은 모른다. 천국도 모르고 지옥도 모르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성령의 불 세례를 받은 자는, 자연 과학은 모를지라도 하나님은 분명하게, 의심없이 알게 된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동시에, 죄를 미워하는 생애에 살게 되는 것이다.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었다가도, 부끄러워서 울며, 회개하게 된다. 털끝만한 죄라도 이런 사람에게는 용납되지 못하는 것이다. 둘째로 불 세례를 받으면 열이 생기는 것이다. 나는 예수를 믿은지 3개월만에 확실히 성령을 받았다. 나는 눈물속에서 몇날동안 주야로 통회의 생활을 했다. 드디어 나는 완전히 세상과 작별하게 되고, 전에 좋아하던 것과 시원히 절연하게 되었다. 그 다음부터는 남을 사랑하는 뜨거운 눈물이 있게 되고, 남을 사랑하는 뜨거운 사랑이 생기게 되었다. 하루는 주일(主日)인데 집에 돌아온즉 나의 어머니는 비누질을 하고 계셨다. 그때 나는 가슴이 아파 견딜 수 없어서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어머니는 「왜 우느냐?」고 하셨다. 나는 대답으로 「어머니! 오늘이 무슨 날입니까?」고 했더니, 어머니는 「내가 하지 않을터이니 울지 말아라」하셨다. 또 나는 아내가 잘못 할 때에, 전 같으면 완력(腕力)으로 제재하였을 것이나, 아내를 향하여 울게 되었다. 이렇듯 나의 마음에는 불이 일어나게 되었다. 교인이 잘못하는 것을 보면, 눈에서 눈물이 흘려서 견디지 못하게 되었다. 예레미야가 왜 울었던가? 죄중에 사는 그 민중을 볼 때, 속에서 불이 일어났던 까닭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성령의 세례를 받게 되면, 이런 뜨거운 불이 마음 속에 붙게 되는 것이다.
Ⅱ. 비둘기의 성령(鳩聖靈)
비둘기는 순한 것을 의미한다. 예수는 순하기가 비둘기와 같으시다. 그러므로 예수교인도 순해야 한다. 서양 격언에 설교는 사자 같이 하고, 남을 해하는데는 비둘기와 같이 하라고 하셨다. 사도 바울은 종교가이면서도, 교회를 박해하고, 혈기로써 사람을 해하며, 별별 잔인한 일을 기도(企圖)하였다. 그러나 성령 받은 후에는, 맞아 죽는 경우에 아론 때도, 경찰에게 의뢰하지 않고, 고소 한번 않고서, 다시 일어나서는 또 전도하러 나아갔다. 각 교회가 저만 잘 한다고 뽐내지만, 성령을 받게 되면, 즉석에서 겸손하여지는 것이다. 욕(辱)을 먹을 때 좋지는 않다. 마는 같이 욕은 하지 않게 된다. 매 맞을 때에 같이 대항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기어이 전하면, 노하여, 담뱃불이 뻘건 담뱃대로 때리는 일이 있다. 그래도 쫓아가면서 전하노라면, 이런 비위 좋은 놈 보아라 하고는, 전도지를 받아 코를 풀어버린다. 나는 그 때 기도하기를 「하나님! 저론 코는 썩어지게…」하다가, 「아! 하나님! 잘못했습니다」하고 회개했다. 말 한마디라도 실수하고는 아파서 견디지 못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를 배우라고 하였으니, 이는 비둘기 같은 성령의 소리이다. 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교만이다. 기도 많이 하면 교만하여 지고, 성경 많이 보면 교만하여 진다. 나는 신구약 성경을 연 3회 통독하는데, 그것으로 자만하지 못하겠다. 엘리야가 「주여 나만 남았습니다」고 하였으나, 주님은 7천명을 남겨두셨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신앙에 있어서 교만이 무서운 것이다. 한국 교회가 장로파니, 성결파니, 감리파니 하고, 서로 엄수히 여기는 것은, 구원이 떠난 증거라 할 수 있다. 미국은 서편에 있으나, 동으로부터 가는 것과 같이, 천국은 위에 있다. 그러나 천국에 가는 길은 아래로 나려가는 것이다. 낮아지고, 낮아지고 하는 그 곳에 천국의 영광이 빛나는 것이다. 바울은 말하기는 나는 제일 작은 자라 하고, 또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라 하고, 죄인의 괴수라 하였다. 온전히 자기는 없어진 것이다. 다윗이나 솔로몬은 제일 은혜 받았을 때, 실패하였다. 설교 잘한다, 찬송 잘한다하는 칭찬 들을 때에, 교만 죄에 떨어지기 쉬운 것이다. 승리했다고 자력(自力)을 믿는 것이, 교만이란 죄의 장본(張本)이다. 비둘기의 성령은 온유와 겸손인 것이다.
Ⅲ. 물의 성령(水聖靈)
물은 정결케 하는 것이다. 성경에 성령을 물이라고 하였다. 세상에 제일 괴악한 죄는 음란한 죄이다. 성령의 물세례 받은 자는, 범죄할 경우에도 요셉과 같이, 범죄하지 않게 된다. 이는 성령이 그의 마음을 주관하게 되는 까닭이다.
Ⅳ. 바람의 성령(風聖靈)
바람에는 사람이 눈으로 볼 수 없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람은, 성령의 능력을 의미함이다. 성령의 세례받은 자에게 신기한 능력 두 가지가 있다. 일은 자기 죄를 이기는 능력이다. 일곱가지의 죄를 승리하는 능력이다. 가나안의 7족을 멸하는 능력이다. 외부의 죄뿐 아니라, 내부의 죄까지 승리하는 능력이다. 그는 마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다. 사람의 마음은 도덕으로나 수양으로 개혁하지 못한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시면, 개혁이 생기는 것이다. 바람이 한번 지나가면 동서남북을 진동시키는 것과 같이, 성령의 바람이 한번 불어오면, 전 가정과 전 교회 및 전 사회가 크게 변동되는 것이다.
Ⅴ. 기름의 성령(油聖靈)
이 집회에 모이신 여러분! 성령의 세례를 받으면 세계라도 두려울 것이 없다. 이제 우리는 조선 사람됨을 불행으로 생각말자. 할 일 많은 곳은 조선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일을 감당하기 위해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겠다. 이제 성령의 세례를 받기 위해 기도하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허락함을 기다리자. 주의 제자들은 10일간을 떠나지 않고, 기도하였다. 우리도 이 자리에서 성령을 확실히 받은 증거가 있기까지 기도하자. 성령 받은 동기는 추호만한 죄라도 범하지 않고, 성결한 생애에서 활약하는 그것이다. 성령을 받으려 할 때, 무슨 신비를 구하려고 하지 말 것이다. 인도에 산다싱처럼 이상한 신비를 구하려다가, 탈선되는 자가 많아. 성경에 기록된 말씀 외에 무슨 다른 진리가 있겠는가? 성경에는 무엇이든지 다 기록되어 있다. 부족된 것 조금도 없다. 자기 영광을 받으려고 성령을 구하지 말 것이다. 세례 요한은 성령 받았기 때문에 목이 떨어지게 되었다. 사도 바울도 성령 받으므로 모든 고생, 모든 핍박, 모든 환란, 끝으로 죽음까지 당하게 된 것이다. 야고보도 성령 받으므로 목이 떨어지게 되었고, 베드로도 성령 받은 고로 시험을 당하고, 죽음의 쓴잔을 마시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령 받으면 환난을 당하게 된다. 고통이 온다. 죽음이 온다. 그렇지만 성령 받은 사람은, 이 고난과 박해를 두려워 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기에 기쁨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의 세례 받아, 사명을 감당하여 보자.
김익두(金益斗 : 장로교 부흥사 : 이 설교는 1934. 6. 17. 성결교 신학교 성별회에서 한 설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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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힘쓰자(엡4:13) ㅁ 남궁 혁 목사
적어도 15, 6성상(星霜)이 기나긴 세월을 학해(學海)에서 헤매이다가, 이제 영예로운 졸업장을 손에 들고 나갈 여러 학생에게 몇 마디 말씀드릴 기회를 얻은 것은, 참으로 지대한 영광으로 생각한다. 물론 여러분은 장래를 위한 경륜(經綸)을 가지고 있고, 이상과 포부와 희망도 있을 것이다. 무론 이런 것들이 이루어지고, 아니 이루어짐은 별 문제이겠지만, 하여간 여러분은 여기 대하여 세 가지 사고(思考)할 점이 있다. ◎ 즉 여러분 각자의 택한 사업은 어떤 종류의 것인가? ◎어떠한 주지(主旨) 아래 그 사업을 택했는가? ◎ 그 사업을 성취하려면, 어떠한 방법을 취할 것인가? 이 세 가지는 가장 중요한 점이라고 할 것이다.
Ⅰ. 여러분 각자의 택한 사업은 어떤 종류의 것인가?
여러분 중에는, 이 앞으로 일층 더 학리 연구 방면에 들어가실 분도 있을 것이고, 또 실제 사회 생활에 나갈 이도 있을 것이다. 그 어느 방면을 택하든지 불가(不可)하지 않다. 다만 각자의 택한 그 사업이 어떤 종류의 것이냐, 즉 자기의 안일(安逸), 자기의 명예를 목표로 한, 자기 중심의 사업이냐, 그렇지 않으면 사회를 위주한 봉사(奉仕)에 관한 사업이냐, 이것이 우리들이 크게 관심을 기울여야 되는 것이다. 현재 우리 백의민족(白衣民族)의 생활 상태에 있어서, 작게는 자기 한몸, 크게는 자기 일가족의 생활 안정을 해결하는 사업을 영위(營爲)한다는 것도, 초미(焦眉 : 危境)의 긴급사가 아니랄 수 없다. 정교(精巧)한 연구가가 되고, 광박(廣博) 사업이 아닌 것이 아니며, 유의한 실업가가 되어, 민족의 일반 경제를 윤택케 함도 중요한 사업이며, 법률가 혹은 정치가가 되어, 민생의 행복을 중징케 하는 일이 좋지 않은 것 아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참으로 유위(有爲)한 사업가, 가치 있는 성공자가 되려면, 「내가 무슨 사업을 하여야 인류사회에 최선의 비익(裨益 : 補益)을 끼쳐주겠는가?」라는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미국의 어떤 학교 졸업생이 한 말, 즉 「오늘날 미국의 급선무는 개발 사업, 즉 치산치수(治山治水), 토지 개량, 도로 개수, 교통 시설을 잘 하는데 있다」는 말을 들은, 한 설교가는 이것을 정면으로 부정하여 말했다. 「아니, 미국의 급선무는 미국의 국토개발에 있지 않고 미국인의 개발에 있다. That the great need of America is not that America be developed but that we deveope the Americans.」라고. 저 유명한 실업가 벤슨씨는 「우리의 건강과 행복은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물질에 기인(基因)한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의 심령 여하에 기인되는 것이다. 잠시 있다가 없어질 세상의 성공은, 혹 다른 방법으로도 얻을 수 있으나, 영구한 성공, 즉 모든 사람이 다 같이 참으로 요구하는 성공은 오직 영혼 개발에 있는 것이다.
Our health and our happiness we know to be depent not on things but on our state of soul, Temporary worldly success may come by other means, but success which is permanent, which we all really want, Can come only through the developement of the soul」라고 말하였다. 이 얼마나 우리에게 뜻 깊은 교훈을 주는 말인가! 과연 인생성공의 비결은, 그 사람의 심령 수양에 있는 것이다. 이를 아는 현명한 제군(諸君)은 이기주의보다도 애타주의(愛他主義), 자아(自我)의 안일(安逸)을 구함보다도 봉공(奉公)의 정신, 향토주의보다도 국가주의, 편협한 애국심보다도 광박(廣博)한 인류주의, 이와 같이 좀 더 친절하고, 좀 더 관후(寬厚)하며, 좀 더 진실하여, 인자(人子)는 참으로 섬김을 받으려 오시지 않고, 오직 섬기려 왔노라고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친히 수건으로 허리를 동이시고, 손에 대야를 들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그리스도의 정신을 체(體) 받아, 인류의 행복을 목표로 하는 사업을 할 것으로, 그러한 사업이면 그 사업의 성질 여하를 막론하고, 다 좋은 사업이라 할 것이다.
Ⅱ. 어찌하여 우리는 이와 같은 사업을 택해야 할 것인가?
물을 것도 없이, 이는 인생의 가장 귀한 사명인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를 위하여 여러분을 세상에 보내셨고, 이를 위하여 여러분을 수양시키신 것이다. 우마(牛馬)는 주인의 경작(耕作)과 운반을 위해 있고, 닭과 개는 주인을 위해 도적을 지키며, 시간을 알리는 것이 본무라 할 것이면, 인생은 그 형제를, 그 주인된 하나님의 뜻을 받을어 섬김이 본무일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즉 예수는 일찍이 우리에게 지극히 귀중한 보훈을 내리셨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귀하다」하셨고, 「너희는 사람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사람에게 대접하라」하셨는데, 이는 인생 생활의 원리 원칙을 보이신 말씀이다. 세상 사람은 받기를 기뻐하고, 주기를 싫어하며, 사람에게 대접받기를 즐겨하고, 사람을 대접할 줄은 모른다. 이는 참으로 본분을 망각하고, 말미를 구하는 일이니, 산에서 고기를 구함이요, 바다에 연목(椽木)을 구하는 것이다. 가는 것 없이, 어디에 오는 것이 있겠으며, 주는 것 없이 받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이 원리는 이에만 그칠 것이 아니다. 인간 생활의 전국면(全局面)을 살펴볼지라도 그러하다. 우리는 현대 문명의 혜택을 구가(嘔歌)하는 동시에, 또한 그 문명의 기원을 고구(考究)하여 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환경 전부를 돌아볼 때, 어는 것이건 후생(後生 : 後世人)들을 위한 선배의 희생과 봉사의 결정(結晶)이 아닌 것이 있는가? 교통이 편리하게 된 것을 회고할 때에, 스티븐슨(Stephesen, George 1781-1848, 영국의 기차 발명가)의 노력이 없었던들, 오늘날 기차가 없었을 것이요, 제임츠 팔츠의 봉공(奉公)과 정성이 없었던들 오늘날 기선의 편리가 없었겠고, 오늘날 자동차의 신속(迅速)을 감탄할 때 반드시 월터 하낙의 공을 치하할 것이며, 오늘날 공중비행을 말할 때에 헨리 캐벤디시(Cavendish, Henry 1731-1801, 영국의 물리학자, 화학자)의 노력(勞力)을 회고할 것이고, 현재 문명의 중심을 잡고 있는 전기, 무전(無電), 라디오의 기이(奇異)함을 탄복하는 자는 에디슨(Edison, Thomas)의 희생과 봉공을 잊을 수 없다. 과학의 발명, 사상의 계발, 정치, 경제, 미술, 종교, 그 어느 방면을 물론하고, 우리가 향유(享有)하는 일체 행복의 모두가 우리들의 선배의 봉사의 피땀의 혜택이 아닌 것이 없다. 한 마디로 하면, 오늘날 우리는 타인의 봉사에 의해 생활하는 것임을 잠시라도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들이 선배의 혜택을 입음이 이와 같을진데, 우리가 사람에 대하여 가질 책임과 의무가 크다는 것을 또한 알아야 할 것이다. 하물며 타락한 지위에 처했던 인생, 하나님의 진노를 면키 어렵게 되었던 자로서 분에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죄에서 구속함을 입고, 의롭다 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되는 특권을 받은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에 감동하는 바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을 깨달은 우리로서, 하나님의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마음이 있다면, 이것을 반드시 표현치 아니하면 아니될 것이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수 있으며, 알지 못하는 그의 뜻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을까? 예수는 「이 어린 소자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 행한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가 한결같이 사랑하사, 위하여 생명까지 버려 주신 인류에게 이것을 표현할 것이다. 즉 하나님께 대한 사람의 감사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발표할 것이다. 인생으로써 이 원리를 깨닫는 자가 복 있는 자이며, 이 주의 이상을 실현하는 자가, 성공하는 자이다. 우리들은 먼저 이성공의 진의(眞意)를 알아야 한다. 세상 사람은 이것을 오해하는 자가 많다. 일시적 승리를 성공으로 아는 자가 많으나, 그 실은 그런 것이 아니다. 성공은 이로 말미암아 미치는 그 영향의 범위의 여하와 그 효과의 대소(大小)에 의하여 판정(判定)될 것이다. 클로디우스와 소크라테스, 헤롯과 세례 요한, 빌라도와 예수의 예를 들어보면, 누가 승리자이며 누가 실패자인가? 물론 그 시대인들은 전자를 가르켜 승리자라 하고, 후자를 참패자라 하였을 것이나, 후세인은 이 판정을 정면으로 뒤엎지 아니하면 아니될 것이다.
Ⅲ. 그러면 여러분이 이러한 고상한 사업을 목표로 하고 나아감에 있어서, 이 이상을 성취하기 위하여 어떠한 방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하여 몇 가지만 생각하자.
1. 결심이다. 사람이 무엇을 경영하든지 결심이 선결문제이다. 자기의 이상(理想)의 정부(正否)를 검토하여 보고 r 취하려는 목적이 옳은 것을 발견한 때는, 실현(實現)하기로 결심할 것이다. 「잘 시작함은 그 사업의 절반이다」라는 것은, 서양의 명잠(銘箴)이요, 「알고도 행치 않으면 알지 못함만 같지 못하다」는 것은 동양의 철언이다.
2. 연구를 게을리 말 것이다. 졸업예식을 영어로는 커멘스먼트(Commencemene Etercise)라 한다. 이것은 일(業)을 시작하는 예식이란 뜻이요, 사업을 필(畢)한다는 뜻이 아니다. 즉 학교에서는 연구하는 방식을 배운 것에 불과한 것이요, 실제 연구는 이 앞으로 하여야 될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과연 지식이라 함은, 모든 사업 성공의 첫 계단이다. 이 지식의 계단을 밝지 않고, 아무것도 성공이 있을 수 없다. 인류생활의 모든 필수 지식도, 실로 이제부터 일보일보(一步一步) 나아가야 될 것이다. 보다도 여러분은 좀 더 큰 지식을 요구하여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함은 모든 지식의 근본이다」라고 하였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을 분명히 깨닫고, 각 방면으로 보여주신 그의 계시(啓示)를 좀 더 자세히 배우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이다. 사도 바울도 이 의미에 있어서 골로새 교회 신자들을 위하여 「너희로 하여금 성령의 지혜의 총명을 얻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 주시기를 기도한다」고 하였고, 빌립보 교인을 대하여 「자기가 모든 것을 잃은 것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더욱 아름답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자기의 가장 큰 욕망이요, 가장 아름다운 일이라고 하였다. 뉴톤(Newton, Sir Isaac)이 말한바 「나는 넓은 바다에서 몇 개의 조개껍질을 얻은 어린 아이에 지나지 못한다」고 한 것은, 자기의 자연과학에 대한 지식의 천박함을 탄식한 일이지만, 사울 사도는 「업적 지혜와 지식이 풍부함은 그 길이와 높이와 넓이와 깊이를 가히 측량할 수 없다」고 하였고, 자기는 이러한 하나님의 지식을 만분의 일이라고 얻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권능과 사랑을 경험할수록 더욱 더욱 가히 형언할 수 없을만치 큰 것을 깨달았으며, 따라서 그 사랑과 그 능력 속으로 깊이깊이 들어가기를 간절히 사모한 것이다. 이와 같이 만대(萬代)에 있어서 모든 진실한 신자들은, 선배들이 깨달은 바 이와 같은 지식을 더 얻기를 사모하였으며, 얻는대로 이 것을 더욱 확충하여 후세에 전하기를 힘쓴 것이다. 여러분이 일찍이 재학시에 과정의 하나로 성경을 배울 때, 어떠한 감상(感想)아래, 얼마나한 취미를 가지고 공부했는지 모르지만, 이 앞으로 그 말씀은 때때로 여러분의 전도(前途)를 적지않게 도와 드릴 줄로 나는 확신한다. 과연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 되며, 내 길의 빛이 되나이다」함은 시편 저자의 큰 감상이다. 사도 바울은 일찍이 에베소 장로들에 대하여 「지금 내가 너희를 하나님과 그 은혜 베푸신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능히 너희를 보호하시고 세우사, 거룩한 무리 가운데 업이 있게 하시리라」고 하였다. 과연 그 말씀은 절망(絶望)의 검은 구름이 여러분을 둘러 있을 때, 일조(一條)의 광명을 줄 것이며, 미로(迷路)에서 방황할 때, 여러분에게 일조의 활로(活路)를 보여 줄 것이다. 바라노니 여러분은 이 앞으로 이 성경 말씀을 좀 더 귀히 여기고, 좀 더 연구하여, 이로써 좌우의 명잠을 삼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모든 감추인 이치를 발견하였으며, 그로부터 영량(靈糧)과 영천(靈泉)을 취하여, 자아의 영적 생활을 풍부케 하는 동시에, 이로써 대중의 활로를 지도할 수 있기를 바란다.
3. 중도에 낙심말 것이다. 산을 올라갈수록 길은 험하며, 그 올라가는 길이 험하고 어려울수록 안계(眼界)는 광활한 것이요, 나려가는 길일수록 길은 평탄하고 쉬우나, 안계(眼界)는 좁아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생의 향상의 길은 어렵고, 타락의 길은 쉬운 것이다. 평범한 생활은 시비(是非)가 적으나 소득이 적고, 고상한 생활은 난관은 많으나 수확이 많은 것이다. 인내는 성공의 비결이요, 절망은 실패의 근원임을 여러분은 각오하여야 한다. 과연 여러분의 전도에는 장해(障害)가 중첩(重疊)하고 파란이 많을 것이다. 우리의 처지는 옛날 애굽을 탈출하던 이스라엘 민족의 신고(辛苦)와 방불한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뒤에는 좇아오는 애굽의 천병만마(千兵輓馬)가 따르고, 앞에는 홍해(紅海)에 몸을 던져 깨끗한 죽음으로써 애굽인의 치욕(恥辱)을 대신하리라고, 혹은 이래도 저래도 죽기는 일반인즉, 죽을 바에는 한번 악이나 써 보고 죽겠다고 하여 애굽인과 일전(一戰)하기를 결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도자 모세는 그것 저것을 다 물리치고, 그 민중으로 하여금 그들이 일찍이 생각하여 보지 못한 다른 방법으로 인도했다. 그리하여 그는 민중을 안돈(安頓)시키고, 엎디어 하나님께 구원하여 주시기를 간구했다. 과연 하나님은 믿고 구하는 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지라, 그는 곧 이스라엘 자손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라 명하셨다. 인생의 절망시는 하나님의 활동시기이다. 홍해(紅海)는 좌우편으로 갈라져 대로(大路)를 이루었고, 그를 신뢰하고 따르던 민중은 전부가 구원을 얻었다. 그러나 그 반면, 그를 거스리고 반역하던 애굽군병은 살아서 돌아간 자가 없었다. 우리는 이것을 유일한 전감으로 하여, 오직 정의의 하나님을 순종하고 앞으로 전진할 따름이다. 여러분은 「불능이란 말은 사전에서 빼어야 한다」는 나폴레옹의 호언장담을 기억하는가? 나는 한글 사전에서는 「실망」이라는 말을 빼어 버리라고 한다. 한국 청년에게 실망은 금물이다. 바라보니 여러분은 오직 대장부가 되어, 촌보(寸步)라도 퇴보치 말고, 오직 우리 대장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 한 마디에 절대 복종하여, 일보일보(一步一步) 나아가 마침내 승리의 면류관을 받고, 또 여러분은 자라고 또 자라며, 나아가고 또 나아가, 그리스도의 충만한데까지 이르시기를 간절히 바라서 몇 마디 말씀드리는 바이다.
<이 글은 1939년에 장로교 총회장을 있던 낭궁 혁 박사가 기독교 학계의 최고 학부인 연희 전문학교 졸업생에게 한 설교이다>
낭궁 혁(南宮爀前 : 평양신학교수 장로교회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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