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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지금 몇 시인가? / 교회란 무엇인가 2010-01-12 10:03:38 read : 6553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한국교회는 지금 몇 시인가?
위기의 계절로 접어든 한국교회의 대안
지금 한국 교회는 어느 계절인가?
신년에는 새해 아침을 맞는 느낌으로 밝게 해야 어울리는 것 같아서 제목을 '희망찬 새해 아침' 정도로 하면 좋겠지만, 겨울밤 같은 시대를 사는 우리에겐 근거 없는 낙관론보다는 어두운 현실을 바로 보는 것이 더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지금 몇 시인지, 어떤 계절을 지나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
1970년부터 1980년대는 한국 기독교가 무섭게 성장하던 시기였다. 그때는 교회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오늘날 서울에 있는 세계적인 대형 교회들이 다 그때 세워지고 큰 교회들이다. 이 교회들의 사역 이야기를 읽으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이러한 경험을 우리도 할 수 있기를 바라지 않은 그리스도인이 있을까?
그러나 그때는 현대화가 극적으로 성공한 한강의 기적이 있던 현장이었고, 마침 서구화한 기독교회가 산업화의 수혜자가 되었던 시절이었다. 현대화의 물결에 편승했던 좋았던 그때 그 시절이 또 재현되기를 기다리는 것은 감나무 밑에서 입을 벌리고 감이 떨어지기만 기다리는 사람만큼 어리석다. 쌀가게 하고 철공소 하다가 현대 기업을 이룬 정주영 씨 같은 분이 21세기에 또다시 나타나기 어렵듯, 70년대 교회의 폭발적인 성장이 재현되기란 기대하기 어렵다. 과거 교회와 오늘날의 교회는 서로 갈 길이 다른데 아직도 옛 시대의 부흥이 교회의 정상적인 모습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장년 교인들은 대다수 70년대와 80년대의 교회에서 자랐고 선배들의 부흥 스토리를 들으며 자랐다. 나는 가끔 내가 30년 일찍 태어나 70년대에 안수를 받았다면 어떨까 생각한다. 한국은 부흥의 시기였고, 미국도 교회만 세우면 성도들이 모이던 시기였다. 교회 수는 부족하고 성도들의 기도는 뜨거웠다. 이런 시기에 목회를 하는 목사는 행복했을 것이고, 성도들도 속속 맺히는 열매를 보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고 믿음이 자라던 여름 행사들이 있었다. 사람들로 북적이던 성경 학교와 전도 모임. 뜨거운 여름같이 무엇이든 왕성한 시기였다.
어쩌면 지난 세대의 기독교 성장은 과거 200년간 박해 속에 죽어 간 천주교 신자들과, 일제의 박해와 한국전쟁 가운데 목숨을 잃은 순교자들이 보낸 모진 겨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만사에는 때가 있다. 가을이 지나 다시 겨울이 되었다. 물론 좋은 교회의 수는 아직 적다 할 수 있지만 교회의 수는 포화 상태에 이르렀고, 목회자와 교회의 질은 떨어졌다. 교회에 다녀 보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것 같아, 교회가 주는 신비함도 없고 부끄러움도 드러났다. 성도의 수는 줄었지만 대신 교회 별 것이 없다고 느낀 안티 기독교인이 늘어났다. 건물은 화려해졌지만 영향력은 초라해졌다. 많은 공부를 한 유학생들, 박사들은 많아졌지만, 성도의 삶은 그리 깊어진 것 같지 않다. 봄날은 갔다. 여름과 가을이 가고 기독교의 겨울이 왔다.
한국교회는 병들었는가?
약간 주춤할 뿐 겨울은 아니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진단이 잘못되면 처방이 나올 수 없고, 진단이 저마다 다르면 마음을 합하기 어렵다. 과연 한국 기독교는 감기에 걸렸는가, 병들었는가?
우리는 어떨 때 어느 조직이 병들었다, 썩었다고 진단하는가? 병원 조직의 예를 들자. 병원이 썩었다고 말할 때, 환자의 살이 썩었거나 환자가 병에 걸린 것을 말하지 않는다. 병원의 원장이 되기 위해서 암투가 벌어지고, 의사들은 서로 환자의 안위보다는 몸보신하고, 실적을 올리기에만 급급하여 환자와 가족들의 고통을 이용해서 필요 없는 수술을 감행하고, 터무니없는 의료비를 청구할 때, 의약품을 하나 쓰는 데도 검은 돈이 오고 가고, 병원의 청소부를 뽑을 때에도 연줄이 없으면 되지 않는 병원을 볼 때, 우리는 그 조직이 부패했다고 말한다.
한국교회에 신실한 기도의 사람들이 있고, 새벽이슬 같은 순순한 젊은이들의 헌신과 풍성한 신학생들의 개혁 정신이 살아 있으며, 건전한 교회가 곳곳에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단과 교회 전체의 방향을 바꾸려는 바람직한 교회 어른들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가 병들었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개개인이 병든 것이 문제가 아니라, 조직의 구조가 병들어서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영향력 있는 자리에 있는 분들이 부패와 벗 삼고 있으며, 말씀으로가 아닌 미신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여전히 많다. 하나님의 능력으로가 아니라 마케팅과 전략으로 목회하고, 겸손과 섬김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위협과 협박으로 믿음의 길을 오도하는 목회자들의 여전한 모습을 보면 교회가 이미 큰 병에 들었다고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이는 아직 건강한 사람이 많이 있으므로 희망이 있다고 한다. 얼마나 병들어야 제대로 병든 것인가? 아직 50%는 건강하다 말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80% 건강한 것은 건강한 게 아니다. 몸의 5%만 썩었어도 생명이 크게 위태로운 것을 왜 모르나? 희망은 병을 덮어 둘 때 생기지 않는다. 병든 사람을 병들었다고 진단하고 고치기 시작해야 희망이 있다.
나는 25년째 예수를 믿어 왔다. 한국에서 청년부 간사부터 시작해서 7년을 사역하고 신학하고 목사가 되었다. 미국에서도 공부하고 한인 교회를 섬기고 미국 교회와 비교했으며 개척한 지 10년이 되었다. 그동안 나의 판단이 성급하고 틀릴 수 있다는 생각에 진단을 미뤄 왔지만, 이제는 말할 때가 된 것 같다. 확실히 한국교회는 병들었고, 계절로 치면 겨울에 접어든 지 오래다.
한국교회에 세 차례의 수적인 감소가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때와 지금이 바로 그것이다. 앞의 둘은 일제와 공산당이 준 외부의 핍박에서 기인한 고생이었지만, 지금의 것은 우리 스스로 부패하고 범죄해서 받는 고난이라는 차이가 있다. 그마저 우리의 잘못과 죄, 오만과 무지의 탓으로 그 시기가 앞당겨진 것 같아 아쉽다. 외부의 핍박이 아니라 우리 내부의 병으로 이 같은 문제가 생겼으니, 면목이 없다.
병든 교회에 희망은 있는가?
한국교회에 희망은 있는가? 희망은 있지만 과거 화려한 여름 같은 부흥은 당분간 기대하기 어렵다. 지금이라도 돌이키면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동일하다. 그러나 교회가 돌이키는 과정이 우리 생각처럼 쉽고 짧은 기간에 끝날까?
이스라엘이 범죄하자 70년을 바빌론에 포로로 보내신다. 당시에도 선지자들은 곧 돌아온다, 희망은 있다고 말했지만 성경을 이들을 거짓 선지자로 규정한다. 예레미야는 대 놓고 바벨론에 가거든 땅을 사고 집을 지으라 한다.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이 장기적으로 진행될 것을 예언했고 그대로 되었다.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과 성벽을 짓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얻었지만, 다시 범죄한 이후 무려 400년간의 침묵기가 이어진다. 그동안 그리스와 로마로부터 받은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313년 기독교가 허용되기까지 무려 200년 이상 소외되고 박해당했다. 중세 기독교에는 1,000년간 그 암흑이 계속되었다. 교회사에 빛나는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유럽 교회는 19세기 이후에는 거의 100년 이상 맥을 추지 못하고 있다. 중국 교회는 선교사들이 오래전부터 힘을 쏟아서 한국에 복음을 전하는 등 선교적 가능성이 큰 지역이었지만, 무신론 공산 정부 수립 이후 선교사들이 추방되고 무려 40년 동안 지하에 숨어서 믿음을 유지해야 했다. 이렇듯 성경과 역사는 한 번 범죄하고 병든 교회가 심판을 받고 회복되는 데 제법 오랜 시간이 필요함을 말해 준다.
한국 기독교의 잘못으로 인해 침체기가 오고, 회복되기까지 적어도 100년은 어둠의 세월을 보내야 할지 모른다고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까무러칠 것이다. 줄여서 50년 정도 침체가 지속될 것 같다고만 해도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일 것이 분명하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회복과 희망의 메시지만 적용하지 이스라엘을 향한 경고와 심판이 우리에게 해당할 수 있음을 생각하지 않은 까닭이다. 택하신 이스라엘 민족도 범죄하면 막대기로 징계하셔서 고치시는 분이신데, 하물며 한국교회가 정결케 되도록 연단하시지 않겠는가?
확실히 영적인 겨울을 보내고 있다. 어떻게 몸을 녹이며 추운 겨울을 버티며 봄까지 살아남을까 걱정해야 할 때다. 과거처럼 건축하면 사람들이 몰려오고, 행사를 열면 미어터지고, 집회마다 사람들이 기적적으로 은혜를 체험하고, 은혜를 받아 다 변하고 하는 식으로 옛날 좋았던 시절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 병든 상처를 치유하고 회개하며 풍성한 은혜의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릴 때다. 이것이 범죄하여 벌 받는 교회가 취할 마땅한 자세다.
예수님이 태어나던 시기, 예루살렘에 잠잠히 참고 기다리며 구원이 오기까지 기다리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을 만나 보자.
위로를 기다리던 사람들
예수님이 태어난 지 팔 일째 되는 날 요셉은 아이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할례를 받게 한다. 이때 두 사람을 만나게 된다. 어린 예수를 안은 선지자들의 운명적 만남이었다.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행할 때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수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이름이다. 모세의 법대로 그들이 정결하게 되는 날이 차서, 그들은 아기를 주님께 드리려고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그것은 주님의 율법에 기록된 바 '어머니의 태를 처음 여는 사내아이마다 주님의 거룩한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 한 대로 한 것이요,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드려야 한다' 한 대로, 희생 제물을 드리기 위한 것이었다." (눅 2:21-23)
첫 번째 사람은 경건한 시므온 할아버지였다. 의롭고 경건한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령이 충만하여 메시아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던 그는 마침내 그날 성전에 들렀다가 마침 어린 그리스도를 만나 자기 팔에 안는 감격을 누렸다. 찬양하며 예언하고 마리아에게 아이에 대해 일러 주었다. 그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므로 이스라엘이 받을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고, 또 성령이 그에게 임하여 계셨다. 그는 주님께서 세우신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할 것이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은 사람이었다. 그가 성령의 인도로 성전에 들어갔을 때에 마침 아기의 부모가 율법이 정한 대로 행하고자 하여 아기 예수를 데리고 들어왔다. 시므온이 아기를 자기 팔로 받아서 안고 하나님을 찬양하여 말하였다.
'주님, 이제 주님께서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이 종을 세상에서 평안히 떠나가게 해 주십니다. 내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모든 백성 앞에 마련하셨으니, 이는 이방 사람들에게는 계시하시는 빛이요,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시므온이 아기에 대하여 하는 이 말을 듣고서 이상하게 여겼다. 시므온이 그들을 축복한 뒤에 아기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 가운데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서게도 하려고 세우심을 받았으며, 비방 받는 표징이 되게 하려고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칼이 당신의 마음을 찌를 것입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의 마음 속 생각들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눅 21:25-35)
두 번째 사람은 안나 할머니다. 그녀는 일찍 과부가 된 뒤 성전에 살며 기도하던 선지자다. 그도 이내 예수님이 기다리던 메시아인 것을 알아보았다,.
"아셀 지파에 속하는 바누엘의 딸로 안나라는 여예언자가 있었는데, 나이가 많았다. 그는 처녀 시절을 끝내고 일곱 해를 남편과 함께 살고, 과부가 되어서 여든네 살이 되도록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금식과 기도로 하나님을 섬겨 왔다. 바로 이때에 그가 다가서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예루살렘의 구원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였다. 아기의 부모는 주님의 율법에 규정된 모든 일을 마친 뒤에 갈릴리의 자기네 고향 동네 나사렛에 돌아왔다." (눅 21:36-39)
이들이야말로 이스라엘의 가장 추운 계절을 지나던 사람이다. 400년간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려 왔다. 정치적·종교적으로 이스라엘은 혼란스러웠고, 더없이 약해졌다. 바리새인은 열심은 있었지만 율법주의로 흘렀고, 사두개인은 소망을 잃었다. 서기관과 제사장들도 무감각해졌다. 열심당원은 자기 힘으로 해 보려고 했고, 엣센파는 세상을 등졌다. 이런 혼란한 겨울에 이들은 무엇을 했는가?
시므온은 의롭게 되기 힘썼다. 경건하기를 중단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과 위로를 기다렸다. 성령의 지배를 받았고, 될 수 있는 대로 성전을 가까이하여 하나님을 섬겼다. 안나도 50년 이상 홀로 살면서 경건한 과부로, 이스라엘의 여선지자로 소명을 다했다. 밤낮 금식과 기도로 하나님을 섬기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러다 그 성전에서 예수님 가족을 보았다.
이들의 기도와 경건은 평상시가 아니라 교회의 겨울, 교회의 침체기, 영적인 혼란기, 기다림의 시기임을 기억하라. 이들이 침체기를 맞는 우리의 모델이 될 수 있다. 동시에 시므온, 안나, 세례 요한의 부모 사갸랴 내외의 좋은 예는 집단의 영적 침체기에도 개인은 얼마든지 경건하고 의롭고 충만하게 신앙을 유지할 수 있는지 증거가 된다.
영적인 겨울을 나는 법
한국교회의 침체기가 100년이 지속되어도 우리는 불평할 수 없다. 40년보다 짧지 않은가? 그런데 나는 30년 정도만 벌 받고, 회개하고 새롭게 되어 30년 뒤에 다시 한 번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도구가 되었으면 좋겠다.
만약 하나님의 진노가 앞으로 30년 만에 그치고 30년 뒤에 위로가 내린다고 하면, 우리는 무엇을 할까? 대부분의 장년이 은퇴할 무렵에야 예전 같은 영광이 찾아올 것이라는 계산이다. 목사인 나는 은퇴할 70살까지는 좋은 시절을 맞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침체기에 목사가 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하필 침체기에 교회의 식구가 되어 섬기는 우리는 무엇을 하여야 하나? 겨울을 나는 교회의 십계명이랄까, 대안을 생각해 보자.
교회가 할 일
1. 각성 - 침체가 3년 뒤에 끝날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버리라. 얼른 회개하기도 시간이 부족하다. 회개하지 않으면 징계가 더 길어질 뿐이다.
2. 회개 - 먼저 회개해야 한다. 잘못은 고쳐 주고, 위로에 합당한 열매를 맺자. 우리 지체가 병들었으면 병든 삶과 행동을 벗고 새로워질 수 있도록 돕자. 고칠 수 있으면 고쳐 주자. 선지자들은 핍박을 받았지만, 나중에 옳았음이 밝혀졌다. 이런 선지차가 되어 한국교회의 병들었음을 알리고 회개를 촉구하자. <담대하게 말하고 겸손하게 침묵하라>는 책처럼 겸손히 개혁을 외칠 때다.
3. 변화 - 예전과 같은 신앙의 부흥을 기대하지 말고, 침체기에 맞는 교회의 일을 찾아서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으라. 한국교회에 거의 처음 맞는 침체기이므로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역사를 통해 성경을 통해.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4. 공동체 - 교회는 행정이나 건물, 프로그램이 아니라, 믿음과 하나님과 사람과의 돈독한 관계로 굳게 유지되는 신앙 공동체로 변해야 한다. 정부의 통제나 간섭, 경기 침체의 변화에도 영향 받지 않고 살아남는 생명체적인 구조를 갖춰야 한다.
개인이 할 일
5. 절대 신앙 - 순교자들의 믿음을 생각해야 한다. 다른 외형적인 것을 다 제하고라도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해 사는 참된 그리스도인만이 끝까지 남게 될 것이다.
6. 소명 - 장기전으로 들어갈 준비하자. 30년이면 짧은 세월이 아니다. 여름날에 세운 개인의 야망과 진로를 겨울철에 맞게 수정하고, 침체기에 주어지는 새로운 소명을 찾아내고 각자 은사대로 할 일을 찾자.
7. 인내 - 믿음으로 인내하며 경건의 싸움을 끝까지 싸우라. 위로가 올 때까지 경건의 훈련을 계속하자. 참 지루한 일이겠지만,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시므온처럼, 안나처럼 믿음으로 경건하게 버티면 주님의 위로를 끝내 보게 된다.
8. 전파 - 소망이 있다. 이 침체기는 분명히 지나고 위로가 임할 것이다. 위로를 기다리는 동료들을 많이 만들자. 침체기에 신앙생활을 하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자녀들에게 이 위로의 신앙을 전해 주자.
9. 전달 - 30년 뒤에 우리 자녀 세대들이 변절하지 않고 다시 영적인 황금기를 맞이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 주고 유산을 물려주자. 그들도 버텨 내게 하고, 다시 부흥할 역량을 길러 주어야 한다.
10. 감사 -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찬양하라. 기독교가 침체하고 교회의 수가 줄어도 하나님의 영광은 가려지지 않는다. 우리가 본질을 회복하지 않으니 하나님께서 외부의 영향을 통해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실 것을 감사하라. 알곡만 남기고 쭉정이를 가려내는 작업을 통해 교회는 교회답게, 신자는 신자답게 될 것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모두 주님의 계절임을 몸으로 배워 고백하는 계기로 삼으라.
이런 것이 침체기를 맞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이 오늘날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숙제다. 시므온처럼 안나처럼 의롭고 경건하게 한국교회를 향한 주님의 위로를 기다리자.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이 도래함을 찬양하는 그날이 반드시 이를 것이다.
김범수 / 시애틀 드림교회 목사·커피브레이크 소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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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란 무엇인가
김백형
교회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딱 잘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성경을 보면 교회가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위하여 수많은 비유들을 상징적으로 사용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교회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여러 각도로 교회에 대한 정의를 내릴 때에 비로소 교회가 어떤 것이며,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을 통하여서 교회를 정의하였다고 하여도 그것을 가리켜서 '이제는 교회가 무엇이며, 어떠한 것인지를 다 알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 인간의 머리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교회의 정의를 100% 정확하게 이해하며, 동시에 그 이해한 바를 실제적으로 적용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셨으며, 앞으로도 세워 나가실 것을 믿고 있다. 동시에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 역시도 교회를 세워 나가기 위해서 힘써야 함을 강조하는 바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교회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 한 마디로 '교회는 이것이다!'라고 100%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 앞에서 우리들은 교회에 대한 속단적인 정의를 추구할 것이 아니라, 폭넓은 의미에서 교회를 정의하고 연구해야 할 것이다.
잘 알고 있듯이 장님들끼리 코끼리를 만지면서 '이것이 코끼리의 전부다!'라고 말하는 것이 우스운 것과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려면, 우리들 역시도 교회에 대하여 '교회는 이것이 전부다!'라고 속단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때문에 필자는 지면을 통하여서 교회에 대한 다양한 접근을 하려고 하며, 이에 대한 교회의 다양한 정의를 내려 보려고 시도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교회는 다양한 정의를 가질 수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단 하나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한 저마다의 비유요, 유비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 오직 참되고, 거룩한 공회는 오직 하나요, 오직 주님을 머리로 삼고 있는 우주적인 교회도 하나임일 기억하면서 조심스럽게 교회가 무엇인가라는 주제에 대하여 접근해 보려고 한다.
한 가지 먼저 밝히고 싶은 것은 이 글은 신학자들의 논문처럼 딱딱한 형식을 취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때로는 신학적인 것을 논하기도 하겠지만, 가급적이면 설교적이면서도 쉬운 문장으로 글을 쓰려고 노력할 것이다.
또한 종종 조직신학에서 논하는 용어들이 등장한다고 해도 독자들은 당황하지 않기를 바란다. 원래 이와 같은 무게가 있는(?) 주제들을 다루려면 어떠한 학문을 연구하든지 생소한 용어가 나오기는 마련이다.
그러나 되도록이면 그러한 생소한 용어를 오늘날 우리들에게 익숙한 용어로 바꾸어 사용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만일 어려운 용어가 등장할 경우에는 최선을 다하여 그에 대하여 설명을 해 보려고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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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탄생과 확장
교회의 탄생
교회는 과연 언제부터 탄생했을까? 즉 교회는 언제부터 존재했느냐는 것이다. 우리들은 교회를 가리켜서 '헬라어'로 '에클레시아'라고 부른다. 즉 헬라어인 '에크'(~로부터)라는 전치사와 '칼레오'(부르다)라는 동사가 합쳐져서 '~로부터 부름을 받았으며', 동시에 다시금 '~로 보냄을 받은 구원받은 거룩한 공동체'가 '교회'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에클레시아'는 과연 언제부터 존재하였는가? 아마도 그 기원은 아담과 하와의 부부로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아니 어쩌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신 그때로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완전한 자로 창조하셨다. 그리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영광 받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그때는 인격적인 존재란 하나님과 아담 둘뿐이었다. 다시 말하면 아직까지는 교회로서의 회원 수가 아담 홀로였다. 아마도 이때는 교회로서의 기능적인 요소 가운데 전도적 요소, 선교적 요소는 작동하지 아니한 때였다고 본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요소가 작동하기 시작한 때는 언제부터인가?
바로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빗대를 취하여서 하와를 창조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교회의 전도적, 선교적 요소는 기능하기 시작되었다고 본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자로서 하와에게도 이와 같은 사실을 일러 줄 필요성이 있었다. 물론 하와 역시도 그와 같은 사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즉 중요한 것은 이때로부터 교회로서의 기능을 하나둘씩 갖추어 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기 시작하자 교회 안에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바로 사단의 유혹이 시작된 것이다. 바로 선악과를 통한 사단의 유혹이 그것이다. 때문에 이때부터 교회는 다양한 기능이 생김과 동시에 정의가 생겨나게 되었으며, 나아가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는100% 교회의 정의를 이해하며 동시에 이를 적용할 수 없게 되었다고 본다.
교회의 확장
아담과 하와를 시작으로 교회는 타락의 자리로 빠지기도 하였고, 다시금 온전한 자리로 나아오기도 하는 반복적인 사이클을 오늘날까지도 계속하고 있다. 즉 교회의 탄생은 아담과 하와를 중심으로 생겨난 것으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교회의 회원 수도 늘어가기 시작했다.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교회 공동체로서의 정의가 시간과 공간적으로 계속적으로 지속되어졌고, 그 넓이와 깊이에 있어서도 발전되어 가는 우주론적인 정의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이제는 과거보다도 교회라고 할 때 보여지는 부분과 보여지지 않는 부분의 구분이 커져 가는 동시에, 그 구분도 매우 복잡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오늘날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그 구분은 더더욱 어려운 숙제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즉 중요한 것은 교회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보여지는 교회로서의 정의와 보여 지지 않는 교회로서의 정의로 계속해서 구분되어 갔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들은 이 구분을 정확하게 할 수 없음을 고백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구분이 이루어짐이 성경적임을 우리는 성경 자체를 통하여서 발견할 수 있다. 이를 가리켜서 조직신학에서는 '유형 교회'와 '무형 교회'라고도 이야기를 하고, '가시적 교회', '불가시적 교회'라고도 말한다. 또한 '가견 교회'와 '불가견 교회'라고도 부른다.
환언하자면 교회는 아담과 하와의 교회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교회로 확장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때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교회라고 말할 때에 이는 꼭 100% 혈통적인 의미에서의 이스라엘 민족의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물론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을 시작하여 하나의 거대한 민족으로 발전되었던 그 당시까지는 아마도 혈통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교회의 구성원들로 우열적인 위치에 있었을 것이라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교회라고 말할 때 100% 혈통적인 의미로서의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들은 기억해야 한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여 애굽에서 나올 때에 그 대열에 합세한 무리들 가운데에는 많은 숫자는 아닐지라도 소수의 이방인들도 함께 출애굽 대열에 끼어 있었다. 즉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교회의 확장은 이미 구약시대부터 혈통적인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방인들의 구별을 허용하고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단 이것이 신약시대로 갈수록 더더욱 그 빛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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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사람이며 주요소
교회란 사람(성도)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이다. 즉 성경이 말하고 있는 구원자 하나님과 창조주 하나님을 올바로 고백하고, 동시에 성경의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이와 같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곧 교회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개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 역시도 교회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로서의 모습을 지닌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 대한 개념 혹은 정의는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가? 이론적으로는 교회란 거룩한 공동체요, 우리들 각자가 교회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우리들이 경험하는 바로 교회는 건물로서의 의미가 강하다. 특히 예배당인 건물을 가리켜 성전이라고 말하며 구약의 성전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저마다 의견이 분분할 것이다. 그래도 거룩한 성도들이 모여 예배하는 장소이기에 공간적 의미에서의 한 장소 역시도 중요하다는 의미에서 성전이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말에 있어서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필자는 그렇다고 해서 특정한 장소요, 특정한 건물 자체가 성전이 되어서 마치 그곳에만 하나님께서 존재하시고, 그곳에 가야만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듯한 이미지의 성전은 옳지 않다고 본다.
교회는 주유소와 같다
교회는 주유소와도 같다고 볼 수 있다. 주유소란 말 그대로 휘발유나 경유를 충전하는 곳이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하나님의 은혜를 공급받는 곳이다. 성령의 충만을 공급받는 곳이 교회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흔히 우리들은 이 말씀을 생각할 때에 '빛'과 '소금'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즉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와 동일하게 중요한 단어가 있다. 바로 '세상'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빛과 소금으로서의 사명은 세상에서 발휘되어져야 한다는 의미다. 물론 교회 안에서도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교회 안의 빛과 소금이 아니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셨음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곧 교회의 존재 목적은 교회 안에서 받은 은혜와 능력을 교회 안에서 발휘하는 장소로서 기능한다기보다는 그 받은 바 은혜와 능력을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발휘할 수 있는가를 알려 주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들의 사역지는 교회라기보다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주유소에서 주유를 마친 자동차는 주유소 안에서 모든 기름을 다 쓸 것이 아니라 바다나 산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에 기름을 쓸 때에 그 가치와 의미가 있는 것과도 같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 받은 은혜는 세상 속에서 그 빛을 발휘할 때에 그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이다. 즉 교회는 주유소와 같이 은혜를 충전받는 곳이지 모든 기름을 다 소비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발견할 때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이 땅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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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유기체며 보여져야 한다
교회란 유기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교회는 건물도 아니고 조직 자체도 아니다. 교회는 성도요, 동시에 성도들의 공동체이다. 때문에 교회는 살아 잇는 유기체 그 자체다. 뿐만 아니라 교회가 진정으로 살아 있는 유기체로서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근원은 바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살아 계신 인격적인 존재인 주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바로 이 주님의 머리 되심이 있기에 교회는 진정으로 살아 있는 유기체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교회는 단순히 기업적이고, 조직적인 기업체로 인식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가시적 교회(유형 교회, 지역 교회)는 그 형태와 나름대로의 조직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만을 가리켜서 교회의 전부라고 말할 수 없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와 같은 교회의 요소는 부차적인 것이요,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즉 교회는 본질적으로 조직적이고 기업적이고 형태를 지닌 건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유기체라는 것이다.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세포요 생명체라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 교회를 섬긴다는 것은 곧 내 옆에 있는 성도를 섬기는 것이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성도가 오물로 더러워져 있다면 내가 그를 위해 목욕을 씻겨 준다거나 그를 닦아 주는 것이다.
또한 옆에 있는 지체가 굶주려 있다면 그를 위해 먹을 것을 제공해 준다거나 돈이 좀 모자랄 경우에는 중국집으로 데리고 가서 자장면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는 것, 이것이 곧 교회가 섬긴다는 의미요, 교회를 세워 가는 것이다.
물론 이것만이 교회를 세우는 것의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것 역시도 교회를 세우고, 섬긴다는 것의 한 측면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교회를 섬기고, 세워 간다는 것은 어느 것 하나만을 가리켜서 '이것이 전부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교회는 보여져야 한다
흔히 불신자들이 기독교인들을 위선적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단순히 그들의 심령이 강팍하거나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일까? 아니면 사단에게 사로잡혀서 헛소리만 떠들어 대는 것일까?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이 위선적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 맞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실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솔직히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을 보아도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면이 강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항상 위선적이고, 가식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항상은 아닐지라도 내 자신을 비롯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여지는 위선과 가식은 정말 놀랍고 놀라울 정도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심각한 영역이 있다면 교회 안에서와 교회 밖에서의 모습이 그렇다. 언젠가부터 우리들은 교회를 건물로서 인식하는 경향이 커지기 시작했다. 때문에 교회의 거리가 1km 혹은 500m로 가까워 질수록 우리들의 언행은 좀전과는 달리 고상하고 멋진 모습으로 포장하기 일쑤다.
이와 같은 교회에 대한 이해는 우리들로 하여금 바로 이원론적인 삶을 초래하도록 만들었다. 즉 교회와 세상은 구별되어 있으며, 이 둘은 전혀 상관이 없는 다른 영역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배우고 들은 성경 말씀은 실제로 나의 삶의 영역에서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하나의 교리나 신조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교회라고 불리는 건물 안에서의 나의 언행과 교회라는 건물 밖에서의 나의 언행은 전혀 일치하지 않는 불일치의 모습을 드러내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성도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와 같은 문제는 성도들 자신의 문제에 앞서서 교회의 문제인 것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교회라기보다는 목회자들의 문제라고 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왜 그럴까? 학생의 문제는 교사의 잘못된 교육으로 인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녀의 문제 역시도 부모의 잘못된 자녀 교육관의 문제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도의 문제는 목회자들의 잘못된 교육관이 문제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목회자들이 성도들에게 제대로 가르쳐 주지 못한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교회는 모이는 곳이기도 하지만, 흩어지는 곳이기도 한 것을 목회자들은 가르쳤어야 한다. 그런데 특히 한국교회의 문제는 무엇인가? 모이기는 잘하는데, 흩어져서는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발생하는 문제가 바로 그리스도인으로서 '본'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언행의 불일치는 이제 문제도 아니라는 것이다. 즉 이것은 죄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것 말고도 얼마나 많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죄가 있는데 왜 하필 이러한 것을 가리켜서 잘못되었다고 떠드느냐는 식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교회는 보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교회는 본이 되어야 한다. 곧 언행이 일치해야 한다. 세상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을 향해서 위선적이고 가식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의 기준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지금 우리들이 우리들 스스로 제시하는 성경의 기준을 가지고 우리들을 판단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 '프란시스 쉐퍼'라는 신학자는 이러한 말을 했다.
"만일 여러분들이 플라스틱 문화를 배척하고 위선에 싫증 내는 난폭한 젊은이들이 진리에 대한 말만하고 무심코 비진리를 실천하는 여러분들의 말에 감명을 받으리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그들은 절대로 듣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 스스로가 자신의 기초를 파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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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모이고 흩어져야 한다
교회는 모이고 흩어지는 곳
교회는 우선적으로 세상으로부터 구출을 받은 공동체이다. 즉 하나님을 모르는 상태에서 이제는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주 하나님, 그리고 나아가 심판주 하나님을 아는 상태로 구출을 받은 이들의 거룩한 공동체가 교회인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교회의 거룩한 사명은 모이는 것과 흩어지는 것이다. 모이는 것은 무엇보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함이고, 동시에 그 예배함을 통하여서 구원의 감격을 다시금 덧입기 위함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금 누리기 위함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흩어져야 할 사명이 있다. 흩어져야 할 이유는 모임을 통하여 경험한 그 하나님의 은혜를 세상 사람들과 나누기 위함이다. 때문에 교회는 모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떠한 면에서 보면 흩어지는 것 역시도 중요함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는 어떠한가? 모이기에는 힘쓰지만, 흩어지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교회의 사명을 오로지 모이는 것으로만 수많은 목회자들이 이끌어 가고 있다. 물론 설교와 수많은 입을 열어 이야기하기는 이 둘 다를 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어떠한가? 과연 그러한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오늘날 왜 그리 많은 모임이 있고, 예배는 또 왜 그리 많으며, 소그룹 모임은 더할 나위 없이 많다. 뿐만 아니라 무슨 무슨 타이틀을 내걸은 기도회 모임은 얼마나 많은가? 지금 나는 이러한 것이 잘못되었으며, 나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나는 균형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기도를 이 정도 했으면 그 기도한 대로의 삶 역시도 그 정도로 균형을 맞추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말씀을 이 정도로 읽고 묵상을 했다면 정말 그 말씀대로 누군가를 섬기고, 사랑하고, 돌봐 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들 자신이 기도하는 시간은 많고 성경의 지식은 해박함에도 불구하고 항상 다른 이들의 눈살을 찡그리도록 만든다면 이것은 균형을 상실한 신앙인 것이다. 즉 교회는 성도들로 하여금 모이도록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세상 속으로 보내는 사역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할 줄 알아야 한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단순히 설교와 입술로만 떠드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들이 세상 속에서 어떠한 역할로 어떠한 방식으로 자신들이 현재 일하고 있는 분야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낼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도 제시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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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십일조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 예물과 제물을 드리라는 내용을 신구약 성경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께 예물과 제물을 드리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자원함으로 드려야 하는 예물과 제물의 성격이 강제적으로 혹은 강요에 의해서 드려지게 되면 문제가 발생된다는 데 있다.
특히 그 가운데 올바른 십일조에 대한 성경의 진리를 살펴보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오늘날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전 교회적으로 물질주의와 기복주의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물질주의와 기복주의가 성경이 말하는 십일조의 본질을 훼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듯이 말라기 3장 7~10절의 말씀을 보면 십일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과연 여기서 말하고 있는 십일조가 오늘날 교회에서 강조하고 있는 십일조와 동일한 걸까? 다시 말하면 지금 이 본문을 한국교회는 어떻게 해석하고 있으며, 적용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환언하자면 이 본문에 대해 제대로 맞는 해석 및 적용을 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우선적으로 말라기 전체의 내용을 살펴보면 말라기서는 무엇보다도 제상장의 타락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는 책이다. 동시에 백성들에 대한 책망도 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제사장들의 타락과 잘못을 그 무엇보다도 심도 있게 지적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말라기 3장의 십일조에 대한 이야기는 제사장들이 백성들의 십일조를 빼돌린 것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요, 하나님의 책망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자세히 여기서 다룰 수는 없을 것 같다. 이에 대해 더 자세한 사항을 알고 싶다면 조누가(조성기)의 <십일조를 넘어서>를 참고해 보면 좋을 듯하다.
중요한 것은 한국교회의 교회론 가운데 가장 문제인 부분이 바로 물질주의와 기복주의의 혼합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성전 건축이라는 타이틀과 맞물리면서 문제는 더 복잡하게 꼬이게 되었다.
우리가 이미 익히 잘 알고 있듯이 도대체 '성전의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것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맘몬'이라는 '신'이 교회 내부에 만연해 있는 모습은 한국교회의 교회론을 다시금 정립하도록 부추기고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