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은 어떤 종교인가? 2013-11-14 21:44:12 read : 6553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이슬람은 어떤 종교인가?
새세대아카데미 ‘한국교회와 이슬람’ 목회심포지움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엄주연 교수 / GMTC
1.서론
이슬람이 어떤 종교인가를 한마디로 말하는 것은 기독교가 어떤 종교인가를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가톨릭, 정교회, 독립교회, 정교회, 영국 국교회, 그리고 개신교 등을 포함하는 ‘기독교’(Christianity)는 그 역사가 2천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구원론과 교회론을 비롯한 가장 기본적인 신학적 관점에서 조차도 일치된 견해를 갖고 있지 않다.
이와 마찬가지로 ‘단일성’(singleness)을 핵심 가치로 하는 이슬람 내부의 정치, 사회, 문화, 그리고 종교적 차이는 마치 이슬람과 타종교의 차이만큼이나 크고 다양하다. 이 차이가 이슬람 세계의 전 역사를 통해 내부적 갈등과 분쟁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현대 이슬람 진영은 근본주의와 세속주의, 민속 이슬람과 정통 이슬람, 순니파와 시아파, 신비주의와 이교적 이슬람, 명목상의 무슬림과 경건한 무슬림, 정치적 이슬람과 군사적 이슬람, 세계화된 이슬람과 지역화 된 이슬람, 과거지향적인 이슬람과 미래지향적인 이슬람, 이슬람 국가들 사이의 첨예한 정치적 갈등과 대립 구조, 그리고 타 종교와 국제 사회와의 관계 등 서로 융화되기 어려운 매우 복잡한 본질적 그리고 구조적인 차이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이슬람이 어떤 종교인가에 대한 명확한 규정을 시도하기에 앞서 이렇게 거대한 차이를 지니고 있는 이슬람의 실체에 대한 단순화된 학술적 묘사(academic description)의 한계를 인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이슬람에 대한 외부자적 관점(etic view)에서의 분석이 내부자적 관점(emic view)과는 극복하기 어려운 태생적 한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전제를 가지고 제한적으로 그 실체에 접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제약과 한계를 인정하는 가운데 한국 기독교 신자들의 이슬람에 대한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작성된 것이다.
2. 타 종교 연구의 전제와 방법론
첨예화된 세계화, 과학화, 그리고 다원화된 21세기의 세계도 여전히 매우 종교적이다((Peterson, Hasker, Reichenbach & Basinger 2001; Oxtoby & Segal eds. 2007; Nigosian 2008). 우리는 종교가 지닌 본질적 의미와 함께 전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다양한 종교 현상들에 대해 깊이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개신교 초기의 선교사들은 힌두교, 불교, 도교, 그리고 민속 종교들과 같은 타 종교 연구의 선구자들이었다. 윌리엄 케리(William Carey, 1761-1834)와 제임스 렉(James Legge, 1815-1897) 선교사는 타 종교 경전을 번역하기도 하였는데 그들의 이러한 노력은 서구에서 한 학문의 분야로서의 종교 연구에 대한 기초를 제공해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난 20세기 기독교의 타 종교 연구 성과를 검토해 볼 때 현대 사회의 종교 전통에 대한 보다 더 통합적이며 균형 잡힌 연구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대표적인 복음주의 종교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헤롤드 네틀랜드(Harold Netland)는 기독교가 타 종교 연구에 대한 관심은 있었으나 복음 전도의 수단으로서의 실용주의적 연구에만 치중해 왔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한국글로벌리더십연구원(GLF)이 2009년에 공개 강좌로 개최한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종교다원주의: 복음주의와 타 종교” 세미나에서 네틀랜드는 기독교의 타 종교 연구는 ①대부분 지상 대 명령(the Great Commission)의 수행을 위한 목적에만 한정되어 있었고 ②타 종교 연구에 관한 전문가와 학자가 부족하며
③선교학적 관심이 반영된 민속 신앙(folk religion)적 차원에 치중, 타 종교의 고등 종교(high religion)로서의 세계관과 문화 현상에 대한 심층적 이해와 대응이 부족했고 ④타 종교의 가시적 현상론 연구에 치중한 결과로 연구의 대상이 아닌 정복의 대상일 뿐이라는 이분법이 작용하였으며 ⑤복음주의 진영은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의 “종교간의 대화”에 대한 강한 반발로 타 종교 연구 자체에 대한 편견을 갖게 되었다고 진단한 바 있다(Netland 2009).
타 종교 연구에는 언제나 잠재적 위험 요소가 존재한다. 가장 일반적인 위험 요소는 기독교 신앙과 타 종교에 대한 타협의 위험이다(Netland 2009). 모든 기독교 신자들은 구원과 성화를 위해 필요한 모든 진리가 성경에 계시되어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따라서 타 종교 연구는 종교적 경험의 보완이나 대안 종교를 찾기 위한 시도가 될 수 없다. 타 종교의 고유한 가르침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일반 계시적 차원의 진리는 언제나 삼위일체 하나님의 특별 계시인 성경적 진리의 빛 가운데서 검증되어야 한다.
이러한 전제에 대한 확신 가운데서 만약 타 종교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 할 때 그들의 진지한 경청을 기대한다면 기독교 신자들도 같은 자세로 그들을 대해야 한다. 이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눅 6:31)는 성경 말씀이 기독교의 타 종교 연구에도 황금률(golden rule)로 작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타 종교 연구의 과정에서 발견하게 되는 새롭고 신선한 통찰력이나 아름다운 전통의 요소들을 긍정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거의 모든 주요 종교적 전통들 가운데는 인류가 역사와 문화를 초월하여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진리를 일부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 종교 다원주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거나, 선교의 필요성을 약화시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타 종교 연구는 대상 종교의 존재론적 그리고 현상학적 연구 그 자체에 목적을 두지 않고 그 종교적 관습을 추구하는 많은 신자들의 궁극적 필요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모든 타 종교 연구의 목적과 관심은 그들과 진실한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누는 것이다.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는 오랜 이슬람 역사를 갖고 있는 일부 국가들을 제외하고는 그 실체와 영향력에 대해 과거에는 거의 한 번도 심각하게 고려해 본적이 없는 거대한 종교 문명에 직면하면서 적지 않은 당혹감을 갖게 되었다. 유럽과 미국 등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국가들과 아프리카, 아시아 그리고 남미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 세계가 미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가운데 이 독특한 종교적 실체를 맞이하고 있다. 이 거대한 종교가 가진 거대한 영적 실체에 대해 세상은 놀랍게도 “이 종교가 나에게 유익한
가?” 실용주의적 평가 기준을 갖고 접근하고 있다. “무엇이 진리인가”에 대한 판단 기준은 21세기 이전부터 이미 보편적인 실용주의적 가치관으로 자리 잡은 “그 종교가 나의 필요를 채워준다면 그것은 진리임에 틀림없다”는 공식으로 대체되었다(Hiebert 1994, 2008). 현대 이슬람 세계는 이미 이 사실을 명확하게 간파하고 다른 어떤 타종교들 보다 더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대 이슬람은 포스터모더니즘과 상대주의의 허상(虛像)에 회의를 느끼고 돌아선 사람들에게 유일신 사상과 궁극적 진리로서의 꾸란을 제시하고, 정치 경제적 갈증에 대한 욕구를 채워줄 뿐만 아니라 개인주의로 인해 상실해 버린 공동체적 소속감을 강화시켜주는 등 인간의 보편적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침략과 테러 그리고 불관용의 종교라는 종래의 인식을 깨트리기 위해 다양한 작업들을 할 뿐 아니라 “당신이 무엇을 필요로 하든지 우리는 그것을 채워줄 수 있다”는 전략적 대응책을 갖고 전 방위적인 확산을 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슬람이 어떤 종교인가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실용주의적 유용성(usability consideration)을 논하기에 앞서 이슬람의 종교적 신념의 진리와 거짓에 대한 질문(authenticity)을 먼저 해결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기독교와 이슬람은 모두 유일신, 죄, 그리고 죽음 이후에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그 대답은 완전히 다르다. 따라서 진리에 대한 탐구가 실용주의적 유용성의 문제보다 우선해야 한다.
한국교회를 포함한 범세계적 기독교 공동체가 현대 이슬람의 실체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가 선교를 해야 하는 이 세상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더 나아가 인류의 역사와 문명, 그리고 현대의 사회와 정치적 현실에 대한 이해 또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이슬람에 대한 우리의 탐구는 보다 더 통합적 관점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3. 이슬람의 태동과 발전 과정
‘이슬람‘이라는 단어는 ‘알라에 대한 복종’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꾸란은 이슬람을 ‘삶의 방식’(way of life) 이라고 묘사한다. 이슬람을 추종하는 사람을 뜻하는 ‘무슬림’(Muslim)은 ‘알라의 뜻에 복종하는 자’ 혹은 ‘권리, 희망, 자유 따위를 양도한 자’를 뜻한다. 꾸란은 또한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무함마드 등 모든 성경과 꾸란의 주요 인물들과 그 추종자들을 모두 무슬림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슬람 태동 당시의 아랍 사회는 흔히 혼란과 무지의 시대로 표현되곤 한다. 조직화된 정부와 법이 존재하지 않았고, 부족과 도시국가로 이루어진 중동 사회는 오직 부유한 자의 권력이 곧 법으로 통하는 부족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무덥고, 건조한 사막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동 아랍 사회는 가축을 키우는 유목민이 전통적 문화와 낙타를 주요 교통수단으로 하는 상업교역이 또 하나의 문화적 중심축을 이루고 이었다. 메카에 위치한 카바 신전은 거의 모든 중동 아랍 부족 사회가 자신들의 신으로 숭배하는 360여개의 우상들을 모셔놓은 종교적 제단의 역할을 담당했다.
6세기와 7세기의 정치적 배경은 아랍 반도의 북서쪽에 해당하는 지중해 연안, 북아프리카, 그리고 팔레스타인 지역을 점령하고 있던 비잔틴 기독교 제국과 현재의 이란과 이라크의 일부 영토에 해당하는 조로아스트 페르시아 제국이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아랍반도는 비잔틴과 페르시아의 중심 종교 권력으로부터 박해 받는 비주류 기독교 분파들과 소수 종교 추종자들의 피난처가 되기도 하였다. 척박하고, 광활한 중동 사막은 오히려 이들 소수 종교 세력을 위한 안전지대의 역할을 해 주었다.
무함마드는 AD570년 당시 메카를 통치하던 강력한 권력을 갖고 있는 꾸라이쉬 부족의 바누 하심(Banu Hashim) 가문의 아버지 압드 알라(Abd Allah)와 어머니 아미나(Aminah)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는 무함마드가 태어나기 6개월 전에 죽고, 그가 여섯 살 되던 해에 어머니마저 사망했다. 그는 삼촌 아부 탈립(Abu Talib)의 돌봄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그는 삼촌과 함께 상인으로 성장했고, 25세가 되던 해에 첫 번째 부인 카디자(Khadijah)와 결혼했다. 무함마드가 40세 되던 해의 라마단월(9월) 27일(AD610년 8월 6일)에 히라산에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알라의 계시를 듣게 된다.
가브리엘 천사는 두려움에 사로 잡혀 있는 무함마드에게 첫 계시를 전달했다. 무함마드로부터 이 계시를 전해들은 카디자는 그를 격려했고,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던 카디자의 사촌 와라카(Waraca)도 역시 알라의 계시가 틀림없다고 확인해 주었다. 그러나 와라카는 무함마드가 아랍인들을 위한 선지자인 것을 선포하였으나, 그 자신은 무슬림이 되지 않고, 2년 후에 사망했다.
자신이 알라의 선지자라고 하는 확신을 갖게 된 무함마드는 그가 받은 계시를 확신을 갖고 선포하게 되었다. 무함마드는 알라 한 분만이 유일한 신이라고 선포하고, 메카의 모든 우상 숭배를 거부했다. 처음 계시가 시작된 이후 3년 동안은 그의 추종자가 불과 40여명 밖에 되지 않았지만 점차적으로 무함마드의 가르침은 메카의 전통적인 우상숭배 사회에 종교적으로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심각한 위협이 되었고, 이에 따라 무함마드와 그의 추종자들은 극심한 핍박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무함마드가 계시를 선포하던 초기에는 단지 비웃음과 조롱거리에 불과하였으나, 곧 폭력과 박해로 이어졌다. 아직 소수의 추종자밖에 없었던 초기 메카 시대의 무슬림들은 돌에 맞고, 매질을 당하고, 감옥에 투옥 되는가 하면, 일부 상인들은 무슬림들과 거래하기를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 메카로부터 북쪽으로 약 448km 정도 떨어져 있는 메디나로부터 온 방문자들이 무함마드에게 반가운 소식을 들려주었다.
그들이 메디나는 지금 강력한 지도자를 필요로 하는데 유일신에 대한 믿음을 가진 무함마드를 지도자로 모시고 싶다고 요청한 것이다. 공식적인 이슬람의 역사는 무함마드와 그의 추종자들이 메카로부터 핍박과 고난을 극복하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무사히 새로운 도시에 입성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메디나로 이주한 AD622년을 이슬람력의 원년(Hijra)으로 정하고 있다.
무함마드는 메디나에서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처음으로 알라의 계시에 의해 통치되는 재정일치의 국가를 이룩하게 된다. 그러나 메카의 핍박 자들과 수차례에 걸쳐 전쟁을 치러야 했는데, 첫 전쟁에서 승리하였으나, 그 다음 전쟁에서는 참패를 경험하게 되고, 무함마드 역시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AD627년에는 메카군대가 메디나를 공격하였으나, 무함마드와 그의 추종자들이 결사 항전하여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AD630년, 무함마드와 그의 추종 세력들이 역사적인 메카 재입성에 성공하여, 아랍 사회의 우상숭배 제단으로 사용되고 있던 카바 신전을 알라에게 재 봉헌하기에 이르렀다. 무함마드는 거의 모든 메카 사람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한 것을 확인하고, 다시 메디나로 돌아와 AD632년에 사망했다.
무함마드가 사망한 후 2년 만에 아랍 반도 전체가 이슬람화 되었고, 100년이 지나지 않아 대서양과 거의 중국 국경에 이르기까지 그 세력을 급속하게 확장해 나갔다. 이슬람 영토가 급속하게 확장됨에 따라 이슬람 왕조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서 무함마드 사망 이후 4대에 걸친 이른바 정통 후계자들에 의한 라쉬둔 칼리프 왕조(Rashidun Califate: AD632-661), 다메섹을 중심으로 한 우마야드왕조(Ummayad왕조:661-750), 압바시드왕조(Abbasids: AD750-969), 11세기와 12세기에 북서부 아프리카와 유럽 남서부 스페인을 장악한 알모라비드왕조(Almoravids),
파티미드왕조(Fatimid:AD969-1179)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중근동 지역을 지배했던 셀주크왕조(Seljuk),인도의 무굴제국(Mughal:AD1526-1858), 페르시아의 사파비드 왕조(Safavids:1501/1502-1722), 그리고 터키 오토만제국(Ottoman:1516-1916) 등이 가장 규모가 크고, 강력한 왕조와 제국을 형성하였다. 21세기의 현대 이슬람은 16억 명을 상회하는 연 변화율 1.84%의 전 세계의 거의 모든 국가에 존재할 뿐 아니라 어디에서나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종교가 되었다.1)
4. 이슬람의 기본 믿음체계와 실천사항(육신오행)
유대교, 기독교, 힌두교 그리고 불교 등 세계의 주요 종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은 역사를 지닌 이슬람은 다음과 같은 비교적 단순한 믿음과 실천의 체계를 지니고 있다.
1) 유일신 알라에 대한 믿음
유일신에 대한 믿음은 이슬람 신앙의 핵심이며, 본질이다. 이슬람의 알라는 모든 물리적, 신체적 속성을 초월한 분이고, 인간 존재의 한계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 그는 부모, 자녀 혹은 동역자가 없이 홀로 존재하며, 알라는 창조자, 주관자, 자비, 빛, 용서하는 자 등을 포함하여 99개의 이름으로 묘사할 수 있다.
이슬람 신앙은 알라의 초월성과 독특성을 강조한다. 이는 알라가 다른 어떤 존재와도 구별되며, 모든 만물과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꾸란에는 “그분에 비유할 것 아무 것도 없도다”(Surah42:11)라고 기록하고 있다.
성경과 마찬가지로 꾸란에서도 알라가 인간을 창조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알라가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했다는 기록을 발견할 수 없다. 무함마드의 언행록에 해당하는 하디스(Hadith)에는 아담이 알라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 본문에 대한 정통성과 해석에 있어서 이슬람 내부의 일치된 견해는 갖고 있지 않다.
2) 천사에 대한 믿음
이슬람 신앙에 의하면, 알라는 빛으로 천사를 창조했다. 이슬람 천사의 개념은 서구 세계가 갖고 있는 날개가 있는 사람 형태의 천사 모습과 다르다. 천사는 인간과 그 속성과 모양에 있어서 전혀 다른 피조물이고, 인간과는 달리 자유 의지를 갖고 있지 않다. 각각의 천사는 고유한 사명을 담당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죽음의 천사는 그 주인을 기다리고 있고, 모든 사람에게 각각의 선행과 죄악을 기록하는 천사가 있고, 선지자에게 알라의 뜻을 계시하는 천사도 있다.
이슬람과 기독교 천사론의 가장 큰 차이점은 천사의 자유 의지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슬람의 천사론에 의하면, 천사는 자유의지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알라에게 불순종하거나 반역을 일으킨 타락한 천사의 존재가 있을 수 없다(Surah 66:6). 아울러 선한 천사와 악한 천사의 구분이 없으며, 모든 천사는 오직 알라의 명령을 수행할 뿐이다. 진(Jinn)이라고 불리우는 사탄은 인간, 천사와 함께 또 하나의 피조물이다. 천사는 인간이 창조되기 이전에 빛 혹은 불꽃으로부터 창조되었고, 각각 지위와 크기, 모양, 역할 등이 다르다.
3) 선지자에 대한 믿음
이슬람에 있어서 선지자는 미래를 예언하는 사람이 아니다. 선지자는 전적인 알라의 뜻에 의해 선택되고, 알라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며, 인간을 알라의 뜻대로 이끌어 가는 사람이다. 아울러 선지자는 인간이 유일신에게로 돌아가도록 인도하고, 알라에게 복종하는 삶에 대한 살아있는 실제적인 모본을 보여주고,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받는 길을 가도록 돕는 역할을 담당한다. 선지자는 알라의 어떠한 신적인 권위나 능력도 지니고 있지 않은 단순한 인간에 불과하다. 선지자를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며,
어떤 선지자도 인간이 알라로부터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중재자가 될 수 없고, 자비와 용서를 베풀 수 없다고 가르친다. 이슬람은 알라가 아담, 아브라함, 롯, 이스마엘,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아론, 다윗, 솔로몬, 엘리아, 욥, 요나, 여로보암, 세례(침례) 요한, 예수, 무함마드 등을 비롯한 여러 선지자들을 선택했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들을 포함한 알라의 계시를 인류에게 전달한 모든 선지자들을 무슬림으로 간주한다. 이슬람은 또한 알라는 마지막 선지자인 무함마드에 이르기까지 인류 전체를 향해 전 역사를 통해 지속적으로 자신의 뜻을 나타내셨다고 주장한다.
4) 무함마드에게 계시된 꾸란
무슬림들은 현재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성경의 다양한 번역본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알라의 계시에 대한 자의적인 첨삭, 분실, 훼손 등으로 그 의미가 손상되어 더 이상 알라의 완전한 계시로서의 의미가 없어 졌다고 보는 것이다. 아울러 무함마드를 통해 계시된 최종적인 알라의 뜻이 완벽하게 원형 그대로 보존된 꾸란을 그들의 신앙적 최종 권위로 간주하고 있다.
5) 최후의 심판에 대한 믿음
이슬람은 심판의 날과 육체적 부활을 믿는다. 알라의 전능한 능력으로 인해 심판의 날에 인간은 다시 육체의 몸을 입고, 영혼과 재결합하여,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 심판의 날 이후에는 죽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인류는 영원히 살게 된다.
심판대 앞에 선 인간은 그가 행한 가장 작은 행위라도 낱낱이 드러나서 심판을 받게 되고, 거짓과 속임은 전적으로 불가능하게 된다. 인간은 그 행위에 따라 천국과 지옥을 그 대가로 받게 된다. 천국과 지옥은 실제로 존재하는 물리적 장소이고, 어떠한 상징적 혹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이슬람의 천국 개념은 강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정원으로 가꾸어져 있고, 덥거나 춥지 않고, 질병이 없으며, 악이 없고, 피곤하거나 지치지 않는 쾌락과 기쁨의 장소로서 전적으로 알라의 자비와 인간의 행위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다.
6) 알라의 주권에 대한 절대적 권위
이슬람은 알라는 그가 창조한 모든 피조물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가르친다. 알라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것도 알고 있으며, 알라의 지식은 완전하다. 알라는 그의 피조물에 대한 절대적 주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의 뜻과 의지, 그리고 그의 지식의 범위를 넘어서는 어떠한 일 혹은 지식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무슬림 신자는 다음의 다섯 기둥을 실천해야 할 의무를 갖는다. 다섯 가지 의무 사항을 실천하지 않는 것은 곧 바로 죄를 범하는 것이며, 이 가운데 하나라도 부정하는 자는 무슬림이 될 수 없다고 간주한다.
① 신앙고백 : 누구든지 무슬림이 되기 위해서는 의무적으로 “알라 이외에는 다른 신이 없고, 무함마드는 그의 선지자이다”라는 고백을 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이 단순하고, 간결한 신앙 고백은 자신이 무슬림인 것을 선포하고, 자신이 믿는 바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이슬람 신앙의 핵심이다. 이슬람은 다신교 혹은 다원주의를 엄격하게 배제한다. 알라 이외의 모든 신적 실체나 속성 등을 부정한다.
오직 알라만을 유일한 신으로 인정하며, 알라만이 유일하게 경배를 받을 수 있는 분임을 강조한다. 또한 이 신앙고백에는 무함마드가 알라의 선지자라는 고백이 포함되어 있다. 무함마드를 마지막 선지자로 인정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받은 계시의 기록인 꾸란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할 것을 강조할 뿐 아니라 이슬람의 권위 있는 전통과 관습의 근거가 되는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Hadith)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을 포함한다.
② 기도 : 모든 무슬림은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무슬림들이 유일신 알라를 향해 예배하기 위한 목적으로 처음 지어진 건축물의 의미를 갖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에 위치한 내부가 비어있는 육면체 구조물인 카바(Ka’bah)를 향해 기도해야 한다. 전 세계의 모든 무슬림들이 같은 방향으로 기도하는 것은 한 분 알라를 경배하는 하나된 공동체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기도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정한 시간 간격을 두고 진행되는데, 이는 기도하는 자가 알라의 뜻에 지속적으로 복종할 의무를 다 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알라에게 기도하는데 있어서 어떠한 중재자도 필요하지 않고, 알라에게 직접 예배와 감사, 그리고 용서와 자비를 구하는 내용의 기도를 하게 된다. 이슬람은 정해진 기도 시간이 존재하고, 준수해야 할 의무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언제나, 어디서나 기도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③ 구제 혹은 자선 : 모든 무슬림은 해마다 의무적으로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자선을 베풀어야 할 의무를 갖고 있다. 구제 혹은 자선을 베푸는 것은 단순히 이웃을 돕는 차원에만 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물질적 소욕으로부터 ‘정화’(purification)함으로서 모든 만물의 소유자가 오직 알라 한 분이라는 신앙적 고백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사회적으로는 수익의 일부를 환원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빈부의 격차를 해소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자신은 기부자의 영혼을 정화할 뿐 아니라 탐욕을 줄이고, 보편적 인류애를 실현하는 목적을 갖고 있다. 기본적으로 년간 순 수익의 2.5%를 자선을 위해 사용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④ 금식 : 신체적으로 건강한 모든 무슬림 성인은 이슬람력으로 9월에 해당하는 라마단 기간 동안 금식을 해야 한다. 9월은 무함마드가 처음으로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알라의 계시를 받은 달이기 때문에 무슬림들에게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슬람력은 태양력과 달리 달의 순환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1년에 11일 정도가 더 짧아, 라마단 기간은 해마다 기간이 달라져서 점차적으로 모든 계절을 통과하게 된다. 금식은 해당지역의 일출부터 일몰까지의 시간 동안 진행된다. 금식하는 시간 동안 일체의 음식과 음료, 성생활 등이 금지된다.
일몰 이후에는 금식이 자동적으로 해제된다. 기도와 마찬가지로 금식도 자기 절제와 인내의 정신을 함양할 뿐 아니라, 내 의지대로 필요할 때 마다 먹고 마실 수 있었던 물질적 축복에 대해 감사하고, 예배를 통해 알라에게로 나아오는 영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라마단 기간 동안의 금식이 끝날 때의 축제(’Eid Al-Fitr)를 금식을 마친 모든 무슬림이 함께 행한다.
⑤ 성지순례 : 모든 무슬림은 그가 신체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한 일생에 한번은 반드시 성지 순례를 해야 한다. 전세계의 모든 무슬림들이 알라를 예배할 목적으로 일생에 한번 함께,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이다. 해마다 수백만의 무슬림 신자들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카바를 방문하여 하지(hajj)의 의무를 실천한다.
이 의식은 기본적으로 아브라함에 의해 시작되었고, 무함마드가 복원한 신성한 종교 의식으로 간주하고 있다. 인종과 문화, 빈부를 초월한 단순한 의복을 입고 참여하는 모든 순례자들은 평등하게 실천하는 성지 순례 의식을 통해 인내와 절제, 그리고 경건성을 확립하는 계기를 갖게 된다. 성지순례가 끝날 때 축제(’Eid Al-Adha)를 행한다.
5. 무슬림의 입장에서 본 삼위일체론과 예수 그리스론 이해
삼위일체론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믿음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기독교의 신앙적 본질이다. 성경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기록한 책이다. 따라서 삼위일체의 진리를 부인하는 것은 성경 전체의 권위를 부인하는 것과도 다르지 않다.
꾸란의 삼위일체론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거부는 ‘관념연합설 혹은 연상심리학’(associationism)과 관련이 있다(Moucarry 2002). 꾸란은 만약 삼위일체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면, 그것은 즉각적으로 하나님에게 아내 혹은 아내들(Surah72:3)이 있다는 것과 아들(Surah2:116; 6:100-101; 10:68; 17:111; 18:4; 19:91-92; 21:26; 25:2)과 딸(Surah6:100; 16:57; 17:40; 37:149-153; 43:19; 53:27)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따라서 꾸란은 삼위일체론이 하나님의 단일성에 위배된다고 믿고 있다(Surah5:116).
삼위일체론에 대한 꾸란의 가르침은 무함마드는 당시 메카의 이교도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소위 “마리아(Mariamites)”라는 기독교 분파가 믿고 있던 이교적인 삼위일체의 개념인 하나님, 마리아, 예수를 기독교의 삼위일체로 이해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마리아파는 마리아가 천국의 여왕이라고 믿고 있다. 이는 무함마드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이해가 알라의 계시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당시 중동 기독교 분파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가르침이 일부 개종자들로부터 차용된 것일 가능성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3’은 ‘1’이 될 수 없고, 같은 원리로 ‘1’은 ‘3’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삼위일체론은 용납될 수 없다는 이성주의적 합리성이 이슬람 유일신론의 배경을 이루고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성경과 꾸란 모두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의 이성보다 상위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지적 능력과 이성적 분별력으로 초월적 절대자의 신성과 인성에 대해 거부하는 것은 꾸란의 가르침도, 진리를 분별하는 올바른 방법론도 아닐 것이다.
기독교의 삼위일체신론(Trinitarian monotheism)은 이슬람이 이해하고 있는 삼신론(三神論) 혹은 삼위이체론(三位異體論, Tritheism)과 다르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부의 삼위이신 한 분 하나님이며, 하나님, 마리아, 예수로 이루어진 ‘세분의 하나님들’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몸에서 기적적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기적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의 속성을 갖고 이 땅에서 태어나셨다.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은 인간을 신격화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육신은 인간의 신격화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있는 것을 보여 준다. 성육신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이고, 신격화는 인간을 신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를 아들로 취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기독교가 인간인 선지자 예수를 신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기록한 꾸란의 가르침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엄격히 말하면, 기독교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나 신성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그 분 자신을 예배하는 것이다. 신성과 인성의 연합 그 자체가 하나님인 것은 아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창조자이신 하나님 한 분을 믿는 자들이며, 그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을 신성화하지 않는다.
6. 이슬람은 계시 종교인가?
이슬람은 선지자들을 통해 기록된 알라의 계시를 믿는다. 꾸란에는 다음 다섯 가지의 기록된 계시를 언급하고 있다: ①아브라함에게 계시된 계시 ②모세에게 계시된 율법 ③다윗에게 계시된 시편 ④예수 그리스도에게 계시된 복음서 ⑤무함마드에게 계시된 꾸란. 무슬림들은 현재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성경의 다양한 번역본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알라의 계시에 대한 자의적인 첨삭, 분실, 훼손 등으로 그 의미가 손상되어 더 이상 알라의 완전한 계시로서의 의미가 없어 졌다고 보는 것이다. 아울러 무함마드를 통해 계시된 최종적인 알라의 뜻이 완벽하게 원형 그대로 보존된 꾸란을 그들의 신앙적 최종 권위로 간주하고 있다(Warraq 2002; Wansbrough 2004; Esposito e d1.995).
꾸란에 기록되어 있는 수많은 사건, 신앙적 교훈 혹은 신학적 교리 체계 등의 근원이 무함마드가 순수하게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것이라고 믿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자료들이 유대교, 아랍 기독교 분파, 조로아스트교, 그리고 사비안(Sabaean)교 등을 비롯한 무함마드 이전 혹은 그 당대의 아랍 종교 전통과 신앙 체계, 그리고 우화적, 민속적 전승들과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으며(Abdul-Haqq1980; Moucarry 2001; Elass 2004),
그 도입과 편집의 과정에 있어서 신학적인 부분의 정교한 손질의 흔적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꾸란의 기록들이 최종적인 그리고 완벽하게 보존된 하나님의 계시가 아닌 무함마드가 종교와 정치 그리고 사회적 변혁을 포괄하는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면서, 무함마드가 개인적인 명상을 통해서 얻은 영감과 아랍의 다양한 종교적 전통을 새로운 시각에서 광범위하게 통합한 하나의 ‘포괄적 종교 문헌’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7.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인가?
‘이슬람’이라는 용어 자체가 ‘평화’(salama)에 그 뿌리를 두고 있고, 알라를 향한 복종과 모든 사람을 향한 평화의 종교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세계의 모든 무슬림들이 “당신에게 평화가 임하기를”(Al-Salamu Alaikum)이라고 인사하는 것도 ‘이슬람’의 본질적 의미와 무관하지 않다(Surah6:54).
꾸란은 천사가 믿는 사람들에게 ‘평화가 있으소서’라고 인사하고(Surah10:10), 아브라함도 아버지에게 평화를 기원한 바 있으며(Surah19:47), 무슬림의 생애에 있어서 요람에서 무덤까지, 그리고 더 나아가 부활의 순간에도 평화가 임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Surah19:15). 이처럼 꾸란은 평화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갖고 있고, 무슬림들은 이 평화를 그들의 인사에서부터 시작하여, 출생에서부터 죽음, 그리고 그 이후에 이르기까지 궁극적 삶의 목표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이 추구하는 평화는 알라에게 복종할 때의 보상과 불복종할 때의 처벌 사이의 긴장으로부터 발생하는 두려움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꾸란의 가르침에 의하면 무슬림들을 포함한 모든 인간은 이 세상에서 쌓은 행적, 의향, 거동, 생각, 말 하나 하나가 모두 헤아려져 정확히 기록, 보존되며(Surah18:49;54:52,53) 심판일에 이 모든 것이 심리(審理)된다(Surah18:49;20:15). 기록이 좋은 사람은 보상을 받지만 기록이 나쁜 사람은 형벌을 받아 지옥으로 던져진다.
이 같은 상황은 종종 마치 아무런 대비 태세도 갖추지 못한 채 체포되어 자신의 입장을 대변해 줄 중재자도 없이(Surah2:255;6:51,70,164;10:13) 곧바로 법정에 서야 하는 죄수에 비유되기도 한다. 무슬림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죄를 범하지 않고 선을 실천할 때(Surah4:124; 16:97; 40:40), 노력할 때(17:19; 21:94), 그리고 모든 의무 사항을 준수할 때에만 주어지는 ‘보상’(4:40; 6:160; 39:10)일 뿐이다. 알라는 모든 무슬림들을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Surah14:4; 6:125).
더 나아가 알라의 뜻은 사람을 언제나 옳은 대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징벌하는 것이다(Surah32:13). 따라서 이슬람은 개인의 삶 가운데서 진정한 평화는 오직 모든 악으로부터 자신을 완전하게 보호하고 모든 금기 사항과 의무 사항을 완전하게 준수할 때에만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실현이 불가능한 하나의 신학적 개념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반면에, 자신이 범한 크고 작은 죄에 대해 어떤 처벌이 내려질 지 모르기 때문에 오는 막연한 두려움이 평화의 보상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갖고 무슬림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슬람이 주장하는 평화의 실체는 타 종교 혹은 비무슬림들과의 관계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슬람은 모든 인류가 인종과 국적, 피부색, 그리고 종교에 관계없이 평화와 안전, 정의와 평등, 그리고 사랑과 관용에 기반을 둔 진실한 인간 관계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al-Ghazali 2005). 그러나 기독교를 포함한 비 이슬람 세계는 이슬람이 이러한 우주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이 이슬람이 추구하는 평화의 가치 때문에 보다 나은 삶을 살고 있다는 체감 효과는 거의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Küng 2004; Griffith 2002; Smith ed. 2005).
오히려 이슬람의 전 역사에 걸쳐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는 순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을 비롯한 대내외적인 정치, 종교, 군사적 분쟁 등을 비 이슬람권이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 이슬람이 진정으로 평화를 추구하는 종교라면 극단적인 원리주의 이슬람의 대내외적인 테러 행위에 대해 지금보다 훨씬 더 적극적이고도 정직하게 자성하고 진정한 평화의 종교로서의 면모를 보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한국 기독교를 비롯하여 한국 국민 모두가 우려하고 있는 폭력성을 지닌 근본주의적 이슬람의 국내 유입으로부터 적극적으로 한국을 보호할 수 있는 가장 우선적이고 적절한 기관은 바로 한국 이슬람 공동체임을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평화, 안전, 정의, 평등, 사랑, 관용 등의 주제들은 이슬람 세계와 기독교가 대화와 관계의 발전을 위한 중요한 보편적 관심사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공통의 관심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한 보편적 매개체의 역할을 담당하는 구속적 유비(redemptive analogy, Richardson 2005)가될 수 있을 것이다.
8. 결론
이슬람이 유대교와 기독교 신앙을 수정, 보완한 최종적인 신적 계시의 종교라는 주장은 어떤 측면에서 검토해 보아도 그 신빙성을 찾기 어렵다. 오히려 무함마드와 그의 추종자들이 당시 아랍 사회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정치와 종교가 통합된 새로운 형식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종교적 전통과 신념들을 편집, 수정하여 이슬람의 신학적 체계를 확립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안타깝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랑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이 종교가 그 사랑을 증거 해야 했었던 기독교와 거의 전 역사에 걸쳐 갈등과 반목의 긴장 관계를 지속해 온 것이 사실이다. 무슬림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대적하고, 무찔러야 할 적들이 아니며, 우리가 무한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품어야 할 아브라함의 자손, 이삭의 형제 이스마엘의 후손들이다.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정신과 원리를 실천해야 할 사랑과 용납의 대상이다(Nichols & Corwin 2010). 질시와 반목, 적대감과 비난은 그들을 하나님의 은혜의 빛 가운데로 나아오게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무한한 희생적인 사랑이 필요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격적 피조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통한 구원의 역사는 이슬람의 신앙과 실천으로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도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여타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죄에 대한 자백과 용서, 그리고 믿음으로 구원받아야 할 긍휼이 필요한 영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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