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멋(딤전 2:9-10) /진리가 없이 "믿습니까"를 연발하는 목사 2003-05-05 10:05:17 read : 3990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딤전 2:9-10)
조병수 교수/ 합신 신약신학
여자는 그 자체로 아름다움이다. 남자는 흙으로 지음받았으나 여자는 남자
의 몸에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서는 여자가 그냥 웃는 것만으로도, 입을 오물거리며 말하는 것만으로도, 눈
짓하며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멋이며 아름다움이었다. 그런 세계에서는 머리
를 꾸미고 몸을 장식하며 좋은 옷을 입지 않아도 여자는 그 자체로 아름다움
이었다.
사도 바울은 창조와 타락의 전망에서 여자의 위치를 바라본다 (딤전 2:13-
14). 사도 바울의 시각은 사회학적이라기보다는 신학적이다. 비록 선명하게
언급은 하지 않더라도 신학적 시각에서는 당연히 창조와 타락에 이어 구속이
라는 차원이 첨가된다. 사도 바울은 구속이라는 차원에서 이 글을 쓰고 있
다. 구속의 위치에서 창조와 타락을 조망한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구속의 위
치에 있는 여자들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여자들" [문자적으로는 "경건을
고백하는 여자들"], 2:10)이 어떤 멋을 지녀야 할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것은 두 말할 것 없이 타락세계의 멋이 아니라 창조세계의 멋이어야 할 것이
며, 조금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창조세계와 맘먹는 구속세계의 멋이어야 할
것이다. 창조세계에서 여자가 그 자체로 아름다움인 것처럼, 구속세계에서도
여자는 그 자체로 아름다움이다.
구속세계에 들어와 있는 여자의 멋은 땋은 머리나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
로 표현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을 무조건 도매금으로 악한 것이라고 밀어붙
일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사도 바울이 여자는 단장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사도 바울은 여자가 단장하는 것을 무조건 잘못이
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어떻게 단장해야 할 것인지를 말하고자 하
는 것이다. 단장이 문제가 아니라 단장의 방식이 문제이다. 그래서 대조되는
것은 단장한다와 단장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염치와 정절을 갖춘 아담한
옷"과 "땋은 머리나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이다. 사도 바울은 구속의 세계
에 들어와 있는 여자가 멋있어야 한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단지 어떤 방
식으로 멋있어야 하는지가 문제일 뿐이다.
신앙의 여성을 가장 멋있게 만드는 것은 선행이다. 선행은 하나님에 대한
경건을 고백하는 여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경건을 고백하는
것으로부터 나오는 선행은 여성을 가장 아름답게 만든다. 여기에 여성의 미
를 위한 사슬이 성립된다. 여성의 멋은 아담한 옷에서 나온다. 아담한 옷은
염치와 정절에서 나온다.
염치와 정절은 선행에서 나온다. 선행은 경건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여자의 멋을 결정하는 것은 경건이다. 경건을 갖춘 여자는
그냥 웃는 것만으로도, 손짓으로 인사하는 것만으로도, 아름답다. 요란하게
머리를 꾸미고 찬란한 보석을 차고 고가의 의상을 걸치지 않아도 된다. 경건
이 외모를 찬란하게 만들고 세안수가 여성의 피부를 깨끗하게 만드는 것이 아
니라 경건이 정결하게 만든다. 화장품이 피부를 화려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
라 경건이 찬란하게 만든다.
경건은 여성의 멋의 원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남자들에게 기도를 요
구한다면 여자들에게는 경건을 요구한다. 선행은 여자의 멋을 결정한다.
아합의 왕후 이세벨이 반란군을 이끈 예후가 죽음의 칼을 들고 방문을 여는
순간까지도 눈을 그리고 머리를 꾸미며 화장하는데 열중했다는 것은 소름끼치
는 일이다. (왕하 9:30).
경건이 없는 여자는 그 자체로 추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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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화 (딤전 2:8c)
조병수 교수
가인의 실패는 제물에서 끝난 것이 아니다. 성경을 잘 읽어보면 가인의 결
정적인 실패는 하나님께서 그의 제물을 열납하지 아니하셨을 때 심히 격분하
여 얼굴을 떨구었다는 데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물
을 열납하지 아니하시면서는 별반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아니셨지만 유독 가인
의 분노에 대하여는 꼬집듯이 한 말씀을 주셨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
며 안색이 변함을 어찜이뇨" (창 4:6).
성경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이 화를 내며 억지를 부린다고 해서 될 일이 아
닌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웃시야 왕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웃시야가 하나
님께 직접 분향을 드리겠다며 성전에서 들어가면서 자신을 가로막는 제사장들
에게 노를 발했을 때 그의 이마에 문둥병이 피어올랐다는 것을 읽어보라 (대
하 26:19).
분노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는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사도 바울
의 말대로 하자면 분노는 기도와 상극이다. 사도 바울은 "분노와 다툼 없이
기도하기를" (딤전 2:8) 권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노가 생기는 이유는 무엇
인가? 내적인 불만과 외적인 자극이 분노의 첫째와 둘째 원인일 것이다.
사실 이 두 가지 원인은 서로 엮여있다. 내적인 불만이 외적인 자극에 민감하
게 만들며, 외적인 자극이 내적인 불만을 심화시킨다. 무엇인가 결핍되고 부
족하여 마음이 만족스럽지 못하면 분노가 일어난다. 인격을 손상시키는 말을
듣거나 몰지각한 행동에 부딪히면 분노가 일어난다. 분노는 어떤 방식으로든
지 반드시 표현된다.
분노가 표현되는 방식은 주로 얼굴과 언어와 행동 세 가지이다. 화가 나면 얼
굴이 찡그려지며, 욕설이 뛰쳐나오고, 폭력이 휘둘러진다. 분노의 결국은 다
툼과 범죄이다.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분하여 하는 자는 범죄함이 많
으니라" (잠 29:22). 분노의 결과가 다툼이라는 증거는 가인에게서 찾을 수
있고, 분노의 결과가 범죄라는 증거는 웃시야에게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누
가 뭐래도 분노의 가장 무서운 결과는 마귀로 틈을 타게 만들어 하나님께 나
아가는 길을 가로막는다는 것이다 (엡 4:26-27). 따라서 한 마디로 말해서 분
노는 기도의 가장 큰 적이다.
특히 사도 바울은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 없이 기도하기를" 요구한다. 이것
은 기질적으로 여자보다는 남자들이 훨씬 더 쉽게 분노와 다툼에 말려든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어쨌든 사도 바울은 "분노와 다툼 없이 거룩한 손을 들
고" 기도하라고 말함으로써 남자들에게 있어서 분노와 거룩한 손 사이에는 어
떤 역학관계가 있다고 말하려는 듯이 보인다.
화를 내는 남자들은 거룩한 손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화는 손을 더럽게
만든다. 공교롭게도 분노로 말미암아 형제를 살해한 가인에게서도 손이 문제
가 되었고 (창 4:11), 분노가운데 분향하려던 웃시야에게서도 손이 문제가 되
었다 (대하 26:19). 이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사도 바울은 위에서
언급한 분노의 일반적인 결과들을 이렇게 압축하고 있다. 분노는 거룩한 손
을 상실시키고, 거룩한 손의 상실은 기도의 길을 막는다. 이 때문에 곳곳에
서 사도 바울은 분노를 버려야 한다고 역설했던 것이다 (엡 4:31; 골 3:8).
분노와 기도는 절대로 합치될 수 없는 상극이다. 사실 기도에 열심내는 것
과 분노를 제압하는 것도 역학관계를 가진다. 남자들은 기도하기 전에 분노
를 진화해야 하며, 분노를 진압하기 위해 기도에 열심내야 한다. 남자들은 분
노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자신이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남
자들이 분노를 억제하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인식할 때 다른 이에게 분노를
일으키는 것을 삼갈 수 있으며, 스스로 분노를 표현하는 것을 억제할 수 있
다. 남자들은 기도에 힘쓰기 위해서 자신을 온유한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
남자들은 기도에 더욱더 적극적으로 참여할수록 더욱더 분노를 억제하게 된
다. 이렇게 볼 때 기도는 남자들이 분노를 소멸시키는 지름길이다. 분노는 기
도를 막고, 기도는 분노를 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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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손 (딤전 2:8b)
조병수 목사/ 합신 신약신학
동화에서 만지는 것마다 금으로 바꾸는, 그래서 결국은 하나밖에 없는 소중
한 딸까지 금 덩어리로 만들어버린 황금의 손을 가진 왕에 대한 이야기를 읽
을 때 남자들은 자신의 자화상을 읽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부귀를 추구하다
가 파멸의 수갑에 채인 남자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고금을 통틀어 여
자가 미모를 열망한다면 남자는 재물을 갈구한다. 남자는 재물로써 여자의 미
모를 사들이고, 여자는 미색으로 남자의 재물을 빼앗는다. 참으로 두려운 일
이지만 재물은 하나님과 경쟁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마 6:24).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 편지의 뒤쪽에서 두세 차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
다" (딤전 6:10)든가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 (딤전 6:17)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다.
남자들은 재물에 대한 욕심 때문에 손을 더럽히게 된다. 이것을 위하여 역
사와 현실가운데 얼마든지 많은 예를 찾아낼 수 있겠지만, 일일이 열거할 것
없이 성경의 이곳저곳에서 한 두 가지 예를 살펴보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이
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탐하여 피를 흘렸고 (왕상 21:1-16), 유다는 은
삼십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팔았다 (마 26:15). 땅을 빼앗기 위해서 백성
의 피를 흘린 임금이나 돈을 얻기 위해서 선생의 피를 부른 제자나 모두 남자
들이 가지고 있는 물욕이 얼마나 무서운 죄악을 야기시키는지 또 다른 예를
제시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역력하게 보여주는 예가 된다.
하지만 남자들은 이렇게 변명할 것이다. 사회생활을 해봐라. 사회는 어차
피 재물과 관련하여 불법과 부조리가 횡행하는 곳이지 않은가. 사회에서는 모
든 남자들은 구조악에서 벗어날 수 없이 거짓말과 속임수, 편법과 아부, 등쳐
먹기와 짓밟기, 증오와 배신, 이런 것들이 반복되는 가운데 살고 있다. 그렇
다면 어떻게 나라고 그런 생활을 하지 말란 법이 있는가. 나 혼자서 거룩하
고 순결한 손을 가지고 산다고 해서 사회가 조금이라고 새로워지겠는가. 그렇
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구조악에 파묻혀 남들과 같이 사는 것이 속 편한 일
이 아닌가. 부조리한 사회에서 더러운 손을 가지고 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남자들은 자신의 부조리한 행위가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일이라고 정당화할 것이다.
하지만 남자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이런 사회생활에 동참
할 때 그의 손에는 잠시동안 무엇인가 번쩍이는 것이 들려지겠지만 순환되는
죄악 속에서 언젠가는 다시 누군가에 의해 그것을 강탈당할 것이며, 비록 아
직은 그것이 자기 손에 들려있다 할지라도 언젠가는 빼앗기리라는 불안감이
그의 마음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러나 이보다도 남자들이 모르고
있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사실은 모든 인생의 성패가 벨사살 왕이 앉은 맞은
편 벽면에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고 기록한 하나님의 손끝에 달려있다
는 것이다 (단 5장). 사회에서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남자는 자신의 손을 사회에 내맡기는 것
이 아니라 하나님께 내맡기는 법이다. 신앙의 남자에게는 사회의 악에 거침없
이 손을 대는 것이 용기가 아니다. 신앙의 남자의 진정한 용기는 부조리한 사
회에서 활동하는 동안에도 하나님께 거룩한 손을 내보일 수 있다는 데 있
다. "만일 네가 마음을 바로 정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들 때에 네 손에 죄악
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욥 11:13-14). 그는 손에 불의한 피가 묻으면 하나
님을 향해 손을 펼지라도 하나님께서 눈을 가리실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사 1:15).
남자는 그 손에 황금을 가지고 있을 때 위대한 것이 아니라 성결을 가지고
있을 때 위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신앙의 남자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더러
운 큰 손보다 거룩한 작은 손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남자들이 구해야 할 것
은 황금의 손이 아니라 거룩한 손이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그러므로 남자
들이 거룩한 손을 들고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딤전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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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가 없이 "믿습니까"를 연발하는 목사
균형 (딤전 2:7c) / 조병수 교수
기독교계 신문지상을 통해 지금은 꽤 이름 있는 목사인 것을 알게 되었지
만 두 번 다시 만나본 적이 없는 그 사람과의 첫 대면은 내가 대학입시를 준
비하고 있던 여름이었다. 겨우 한낮의 더위가 물러나 마음을 추슬러 책을 잡
았을 때 열린 창문을 넘어 어디선가 솔솔 들려오는 찬송소리에 이끌려 발이
닿은 곳은 동네 교회였다.
사십 세가 훨씬 안된 듯한 설교자는 말끝마다 자신
이 정통교회의 목사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믿습니까,
믿습니까"를 연속적으로 수없이 반복하였다. 물론 청중이 중년의 설교자의 말
이 끝나기도 전에 목이 터져라 아멘을 외쳐댔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나
는 한 시간도 넘게 그 자리에 앉아서 귀를 기울였지만 소란스러운 설교와 아
멘 소리에 속만 울렁거릴 뿐 아무 진리도 얻지 못하였다. 그 날 나는 한 가
지 다짐한 것이 있다. 그것은 앞으로 다시는 이런 무의미한 집회에는 참석하
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믿음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뭐라 할 사람이 없을 것이
다. 주님께서 얼마나 자주 믿음이 없는 패역한 세대를 꾸중하셨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믿음이 겨자씨만큼만 있어도 산을 명하여 옮길 수 있다고 주님
께서는 가르치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믿음 없는 것을 도와달라고 주님께 간구
했던 것이다. 주님의 생각은 사도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었다. 대표적으로 사
도 바울이 믿음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는 디모데에게 보내는 첫째 편
지의 앞부분을 조금만 읽어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 문제이다. 사도 바울은 디
모데를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딤전 1:2)이라고 부르면서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 (딤전 1:4) 대신 변론을 일으키는 잘못된 교훈을 피할 것을
권면하고 "거짓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 (딤전 1:5)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믿음은 절대로 홀로 서서는 안된다. 믿음은 반드시 진리와 함께 가
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은 매우 위험한 것이 된다. 진리 없는 믿음은 우
신 (愚信)이며 맹신이며 광신이다. 이것은 의심과 소신 (小信)과 불신만큼 위
험한 것이다. 그래서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 (고전 13:2) 사도 바울의 말은 진리가 없으면 아무것
도 아니라고 바꾸어 써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믿음을 바른 믿음으로 잡아주
는 것은 진리이다.
진리는 믿음의 지팡이이며 신앙의 길잡이이다. 그래서 사
도 바울은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딤전 2:7c)
고 말했던 것이다. 틀림없이 자신들의 종교에 심취해있던 이방인들에게 믿음
을 충동하는 것은 쉽지만 진리를 설명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사
도 바울은 쉽다고 해서 감정적으로 믿음만을 충동하지 않고 어렵기는 하지만
지성적으로 진리를 설명했다. 믿음과 진리는 항상 같이 가야한다는 것을 알았
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첫째 편지를 써내려
갈수록 진리에 관하여 중요한 언급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은 모
든 사람이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것 (딤전 2:4), 교회는 진리
의 기둥과 터라는 것 (딤전 3:15), 성도는 믿음과 진리에 균형 잡힌 사람들이
라는 것이다 (딤전 4:3).
오늘날 적지 않은 경우에 우리에게는 믿음만 있고 진리가 없다. 입버릇처
럼 목사는 설교 중에 "믿습니까"를 연발하고 성도는 기도 중에 "믿습니다"를
반복하지만 진리는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는다. 분명히 우리는 설교에서든
지 기도에서든지 기독교적인 것을 수없이 반복적으로 주절거리며 뇌까리고 있
는데 그 가운데 진리는 없다. 어쭙잖은 시사실력을 뽐내며 길거리 약장수처
럼 이야기를 늘어놓는 목사 그리고 우스개 소리에 만족하고 희학을 즐기는 성
도가 즐비한 것이 우리의 현실 기독교이다. 오해의 소지가 있는 위험한 발언
인 줄 알지만 (!)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정통교회라는 곳에는 진리추구
가 없고 이단집회라는 곳에는 (물론 잘못된 것이지만) 진리추구가 있다. 우리
는 지금 균형을 잃은 채 표류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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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길(딤전 2:8a)
조병수 교수/ 합신 신약신학
고대신화의 세계에서 남자는 돌발적인 자연현상을 헤쳐나가고 무시무시한
괴물과 싸워 이김으로써 초자연적인 힘과 용맹을 떨치는 영웅적인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참으로 우스운 일은 지성을 그렇게도 강조했던 르네상스 시대조
차도 고대신화의 사상적 반경을 벗어나지 못한 채 남자를 심지어 운동과 체조
의 만능적인 존재로 이해하여 두 다리를 묶은 상태에서 사람들의 어깨를 뛰어
넘었다던가 아무리 사나운 말이라도 올라타기만 하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이런 남자의 상은 우리 시대라고 해
서 예외가 아닌 것 같다. 지금도 많은 경우에 남자는 근육질의 상징으로 여겨
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랜 인류 역사의 오솔길을 따라 남자가 걸어온
길이다.
역시 고대신화의 물리적인 울타리 속에서 살았던 사도 바울도 남자의 길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믿음을 가진 남자는 이방세계의 남자들이 가는 길을 가
지 않는다. 사도 바울이 믿음의 남자들에게 원하는 것은 초자연적, 만능적,
근육질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다. 거두절미하고 간단히 말하자면 사도 바
울은 남자들이 기도하기를 원한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신앙적인 남자의 길
은 이방적인 신화정신이 보여주는 남자의 길과 달리 기도로 성립된다. "그러
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
하노라" (딤전 2:8a). 이것은 힘과 용맹을 자랑하는 남자의 상이 지배하던 세
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뜻밖의 요구이다. 사도 바울 자신도 인정하듯이 기
도란 힘없는 여성이 하는 것이라면 (딤전 5:5) 남자에게 기도를 요구하는 것
은 정말 너무나도 우스운 일이지 않는가.
기도는 무엇인가? 기도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로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이 자신의 힘과 능력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도는 사람이 무엇인
가 할 수 있다는 것을 솔직하게 부정하는 것이다. 기도는 자신의 힘을 근본적
으로 의심하고 자신의 능력을 철저하게 비판하는 사람에게서 시작된다. 그래
서 기도는 기도자의 자기부인이다. 이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을 낮추
고 때리며 죽인다. 둘째로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도움과 은혜를
의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도는 하나님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을 인
정하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도움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절대적으로 대망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는 기도자가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
고 복종하며 항복하는 것이다. 이렇게 기도는 양면적인 성격을 가진다. 기도
란 기도자가 한편으로는 자신의 불능성을 고백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가능성을 수용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자신에의 불신과 하나
님에의 신뢰가 기도의 두 요소이다.
신의 능력에 호소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확신하며 자부하던
신화세계의 남자들이 볼 때 사도 바울이 신앙의 남자들에게 기도를 요구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고 유치하며 수치스런 일로 여겨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
만 분명하게 사도 바울은 남자들이 기도하기를 원한다. 사도 바울은 남자들
이 세상의 눈에 어리석고 유치하며 수치스런 길을 가기를 원한다. 사도 바울
은 남자들이 기도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고 겸손해지며, 기도함으로
써 하나님께 매이고 붙잡히기를 원한다. 사도 바울이 남자들에게 기도하라고
요구함으로써 바라는 것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는 것이며,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약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중요한 것을 알고 있었다. 남자는 기도함으로써 낮아지
지만 높아지며, 약해지지만 강해진다는 것을! 기도는 사람이 비록 자신을 신
뢰하지 않기에 약한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강한 것이기 때문이
다. 기도야말로 진정한 능력이다. 기도는 신앙의 남자가 걸어가야 할 길이
다. 신앙의 남자로서 기도하는 것이 영광이며, 신앙의 남자로서 기도하지 않
는 것이 수치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남자들에게 오직 이 한 가지 일, 기도
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남자들이여, 그대들은 신화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
면 신앙의 길을 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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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될 것 없는 신분 (딤전 2:7b)
조병수 교수/ 합신 신약신학
전도사 시절이었다. 어느 날 독일문학을 전공하는 절친한 친구 (나의 첫 번
째 헬라어 성경은 그가 선물한 것이었다)와 둘이서 점심식사를 하면서 대화
를 나누고 있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는 친구의 질문에 뭔가 멋진 인상을
심어주고 싶어서 괴테를 읽고 있다고 대답을 했다. 그리고 나는 거기에다 침
까지 튀어가면서 괴테를 읽는 이유를 덧붙여 말했다. 그것은 좋은 설교를 하
려면 문학을 비롯하여 다방면에 학식과 조예가 있어야 할 것 같기 때문이라
는 것이었다. 친구는 내 이야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수저를 탁자 위에 내려놓
고 자세를 바로 잡더니 눈을 부릅뜨면서 소리를 쳤다. "내가 설교시간에 너한
테 듣고 싶은 것은 괴테가 아니라 성경이야". 이제는 꽤 오래된 대화이지만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게 울리는 친구의 음성은 나의 신분을 깨우치게 하는 천
둥소리였다. 그렇다, 나는 괴테를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성경을 말하는 사람
이다!
사도 바울은 피를 토하듯이 목청을 돋구어 자신의 신분에 관하여 진실을 말
하고 있다.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
이 아니라" (딤전 2:7b). 사도 바울의 자기의식 한가운데는 돈 될 것이라고
는 하나도 없는 직분에 대한 의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사도 바울은 전도자와
사도와 교사일 뿐이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나님이 사도 바울
을 세우신 것은 이 신분 때문이었고, 사도 바울이 자신에 대하여 자랑스러운
것도 이 신분 때문이었으며,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사랑하는 것도 이 신분 때
문이었다. 이 신분은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신분 때문에 사도
바울은 환난과 핍박도 두려워하지 않고 굶주림과 헐벗음도 무서워하지 않으
며 칭찬과 영광을 즐거워하지 않고 손해와 빈곤 앞에서 괴로워하지 않았다.
그렇다, 사도 바울은 전도자요 사도요 교사일 뿐이지 그 외에 아무 것도 아니
다!
얼마 전 남쪽 어느 작은 도시에 성경을 가르치기 위하여 내려갔을 때 요즘
은 사람들이 신학대학과 같이 공인된 기관에서 발급하는 자격증을 수여하지
않으면 이런 성경교육장소에 오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으면서 억장이 무
너지는 것 같았다. 이제는 사람들이 성경을 배우는 것보다 자격증을 얻는 것
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구나. 하긴 성도들을 탓할 수만도 없는 것이 심지어
목사들까지 무슨 박사니 무슨 회장이니 하는 명칭을 가지고 있는 것을 자랑스
레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총회장이니 위원장이니 이사장이니 하는 명
칭을 지니고 있을 때 성도들로부터 더 존경을 받을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그
래서 이런 목사들은 목사 외의 신분을 얻기 위하여 기를 쓰고 별별 치사한 방
법과 너절한 수단을 다 동원한다. 이것은 우리의 몰락을 의미한다. 그렇다,
우리는 실없는 성도들과 천박한 목사들에 에워싸여 스스로 몰락하고 있다!
제대로 된 성도가 목사에게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며, 제대로 된 목사가 성도에게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이
다. 바른 성도 치고 목사의 다른 신분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없고, 바른 목
사 치고 성도의 다른 자격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없다. 만일 그런 성도와
목사가 있다면 그것은 성도도 아니며 목사도 아니다. 우리가 몰락하는 중대
한 원인은 성도와 목사라는 신분에 대한 자부심을 잃어버리고 성도 아닌 다
른 신분, 목사 아닌 다른 신분을 향해서 곁눈질을 하고 있다는 데 있다. 비
록 이것이 아무런 돈도 되지 않는 신분이라 할지라도 이 신분이야말로 우리
가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진정한 프라이드가 아닌가 (고전 4:1; 벧전 2:9).
우리가 이 몰락의 내리막길에서 떨어지는 속도를 줄이고 다시 오르막길로 돌
아설 수 있는 방법은 이 프라이드를 회복하는 것 밖에는 없다.
그렇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방법 밖에는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증
거하기 위하여 전도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움을 받았다는 사도 바울의 자랑이
우리의 것이 되지 않는 한, 우리에게는 회복의 소망이 없다. 그래서 내가 전
하고 싶은 것은 괴테가 아니라 예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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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딤전 2:7a)
조병수 교수/ 합신 신약신학
"그는 바울이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바울은 작은 체구에 벗겨진 머리와 구부정한 다
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양 눈썹은 서로 붙을 것처럼 짙은 모습을 하였고 코는 약간
툭 튀어나온 모양새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초대교회 시대의 어느 문서에 나오는 사
도 바울의 생김새에 대한 설명이다. 성경 밖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
지는 의문스럽지만, 사도 바울 스스로가 자신의 연약함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는 것을 미
루어 볼 때 조금은 수긍할 수 있을 것 같다. 외모로만 보자면 사도 바울에게서 별로 건
질 것이 없다. 사실상 사도 바울은 육체에 박혀있는 사탄의 가시로 말미암아 (고후
12:7) 몸이 매우 약하여 (갈 4:13) 추측하건대 안질이든 뭐든 (갈 4:15) 어떤 질병으로
고생을 했을 뿐 만 아니라, 심지어 대적자들로부터 강한 비난을 받고 또한 자기의 입으
로도 스스로 고백할 정도로 말이 어눌하고 시원하지 않았다 (고후 10:10; 11:6). 게다
가 내면적으로 볼 때 사도 바울은 매우 심약해서 사람들 앞에 서면 약해지고 두려워하
며 떨었다 (고전 2:3). 오죽하면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자랑할 것이라고는 약한 것 외
에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을까 (고후 11:30; 12:5).
그러나 왜소하고 흉측한 외모와 병약하고 초췌한 신체와 그리고 심약하고 소심한 마음
을 지니고 있는 사도 바울은 놀랍게도 지금 자기를 대단히 힘있게 드러내고 있다. "내
가..." (딤전 2:7. 본문에는 "나"를 강조하는 대명사 ego가 사용되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나" (ego)를 조금이라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도리어 자신의 "나"를 서슴지 않
고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자신의 "나"를 거리낌이나 주저
함이 없이 표명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첫째로 그것은 사도 바울이 자아의 원인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의 자아는 그가 능동적으로 스스로 자신의 능
력으로 빚어낸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하여 강압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
는 "내가 세움을 입은 것은... "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사도 바울의 "나"는 수동적 자
아이다. 사도 바울은 본래 스스로는 획득할 수 없는 직책을 하나님에 의하여 얻게 되었
다. 사도 바울의 자아의 근원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고전 15:10). 둘째로 사도 바울이 자아를 이렇게 강하게 드러내는 까닭은
자아의 목적이 무엇인지 똑바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자아는 자신을 목적으로 하
지 않는다. 사도 바울의 존재는 오직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는 "이를 위
하여 내가 세움을 입은 것은... "이라고 말한다. 바울의 자아는 목적적 자아이다. 바울
의 존재목적은 하나님의 구속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 목적이 아니라면 밥을 먹는 것도
옷을 입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돈을 버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 목적을 위하
는 인생이라면 굶주리고 헐벗어도, 잠을 자지 못하고 돈을 벌지 못해도 영광스럽고 가치
가 있다. 바울의 자아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고전 10:31). 그러므로 사도 바울
은 말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
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 (롬 14:7-8).
사도 바울의 자아는 근원적으로는 하나님의 구속은혜에 결부되고, 목적적으로는 하나
님의 구속사업을 지향한다. 사도 바울의 에고 (ego)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비로소
존재하는 자아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드디어 활동하는 자아이다. 하나님의 은혜
는 자아의 의미를 설정하고, 하나님의 영광은 자아의 가치를 설정한다. 이 둘을 한 마디
로 묶어서 말하자면 사도 바울의 자아는 종속적인 자아이다. 사도 바울의 자아는 뒤쪽으
로는 하나님의 은혜에 종속되고 앞쪽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
로 지금 사도 바울은 하나님에 의하며 하나님을 위하는 종속적 "나"를 언급하는 것을 조
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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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예수 (딤전 2:6a)
조병수 교수/합신신약신학
대학시절 잠시 과외를 지도한 일이 있었다. 수업이 중도에 도달하면 일하
는 아주머니가 과일접시를 내밀 뿐 이상하게도 학생의 어머니는 한번도 나타
나지 않았다. 속으로 무척 궁금했지만 물어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여러 가지 사정으로 과외지도를 그만두게 되었는데, 마지막 수업을 하던 날
학생의 어머니를 보게 되었다. 아, 나는 움찔 놀라고 말았다. 그 어머니의 얼
굴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야기를 들어보니 아이가 어렸을 때 목조로 된 집에 불이 났는데 아이를 끄집
어내려고 뛰어들었다가 그만 심한 화상을 입어 얼굴이 엉망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
기를 속전으로 주셨다 (딤전 2:6a). 이 한 토막의 짧은 진술에서 우리가 놓쳐
서는 안될 것은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한 속전으로 내주신 것이 다름 아
닌 "자기" 자신이었다는 사실이다. 구속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께서는 창조자
의 권위를 가진 분으로서 빛을 창조할 때처럼 한 마디 말씀을 하시면 안되었
을까? 옛날 여호와 이레의 산에서 아브라함을 위하여 준비하셨던 것처럼 양이
나 한 마리 주시면 안되었을까? 광야를 걸어가는 이스라엘에게 시은소를 베푸
셨던 것처럼 신령하고 천상적인 물건을 내주시면 안되었을까? 인류의 구속을
이루기 위하여 거룩한 제사장 아론이나 위대한 성군 다윗 같은 인물을 대신
죽이면 안되었을까? 아니, 가브리엘이나 미가엘 같은 찬란하게 광채 나는 천
사를 인류구속을 위한 희생물로 내놓으면 안되었을까?
예루살렘의 시릴 (Cyril)에게 귀를 기울여 보라: "우리를 위하여 죽은 것
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어떤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비이성적인 짐승도
아니었고, 평범한 사람도 아니었고, 심지어 천사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성
육신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Cat. 13,33).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
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내주셨다. 이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처사인
가?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
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마 16:26)고 가르치신 예수께서 사람들을
구속하겠다고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으니 이 얼마나 모순되는 일인가? 예수께
서는 인류구속을 위하여 더욱 지혜로운 방법을 찾지 못하고 가장 어리석은 방
식을 택하신 것이다. 말구유에 어린 아기로 오신 것도 미련한 일이요, 가난하
고 병약한 자들을 친구로 삼으신 것도 어리석은 일인데, 인류를 구속하겠다
고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못에 박히고 창에 찔리어 피를 쏟고 살이 찢겨 처참
하게 죽었으니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어리석은 자이다. 그가 행한 모든 것
이 어리석은 일이다. 게다가 그가 구원하기를 소원했던 인류가 무슨 보배라
도 된단 말인가? 죄인들, 악인들, 사특한 자들, 범법자들, 불의한 자들, 무법
자들,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인간들을 위하여 예수 그
리스도는 자신의 목숨을 내주었으니 정말 어리석고도 어리석은 자이다.
어리석은 예수! 그 못난 행위에, 그 미련한 방법에, 그 어리석은 처신에 손
가락질하며 비웃어라. 먼지 같고 벌레 같은 인생을 구하겠다고 하나님의 신분
을 내버린 어리석은 예수를 향하여 마음껏 비웃어라. 어리석은 예수를 비웃
는 자는 아기를 구하려고 불 속에 뛰어든 어머니를 비웃는 자이다. 아이를 구
하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불 속으로 내던진 어머니를 누가 감히 어리석다
고 하는가? 어머니의 어리석음이야말로 아이에게 가장 큰 은혜인 것을 모르는
가? 예수의 어리석음이 은혜이다, 절대적인 은혜이다. 예수께서 인류를 구원
하기 위하여 언어를 사용하든지 물건이나 짐승이나 사람이나 천사를 내주는
지혜를 발휘했다면 그것은 부분은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멸망 받
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내주신 예수의 어리석음이 절
대은혜이다. 먼지와 같고 벌레와 같은 나를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내주
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앞에서 가슴이 떨리는 것을 숨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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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예수 (딤전 2:5d)
조병수 교수
손톱사이마다 까맣게 때 낀 어린아이들의 조막손을 매만지며 이마로 흘러내
린 머리카락을 귓바퀴 뒤로 곱게 빗겨주시며 쓰다듬던 예수는 사람이셨다.
때 구정물에 찌든 꾀죄죄한 옷에서 비린 냄새가 물씬 풍겨나는 갈릴리 아이들
을 그대로 덥석 안아주신 예수는 사람이셨다. 사람 예수는 아이들, 이방 여
자, 따돌림당하는 세리들, 살이 썩어 문드러지는 문둥병자, 가난한 사람들,
바리새인, 어부들, 청년, 마음이 상한 사람들, 아이의 죽음 앞에서 통곡하는
사람들, 누구든지 가리지 않고 만나주셨다. 예수는 사람들을 물리칠 줄 몰랐
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온 몸에 힘이 모조리 빠져나간 고통스러운 상태에
서도 강도에게 하늘의 소망을 말해주셨다. 사람 예수의 중심에는 연민과 동정
이 있다.
늦은 밤 대화를 신청한 바리새인을 앉혀놓고 참된 생명이 무엇인지 조목조
목 가르쳐주신 예수는 사람이셨다. 사람 예수는 이야기를 그칠 줄 몰랐다. 회
당에 들어가면 회당에서, 바닷가에 서면 바닷가에서, 산에 올라가면 산에서,
집안에 앉으면 집안에서 어느 곳이든지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예수께는 말할
수 없는 장소가 아닌 곳이 없었다. 왁자지껄한 잔치자리에서 이런 사람들 저
런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며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셨던 예수는 사람이셨
다. 예수는 하늘에 나는 새, 들녘에 피는 꽃, 씨뿌리는 사람, 양치는 목자,
혼인잔치, 포도원, 맷돌질하는 것, 반죽덩어리, 하인들의 모습, 전쟁하러 나
간 왕, 모래와 반석에 지은 집... 사람들 사이에는 일어나고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이야기의 소재로 삼았다.
예수의 이야기 속에서는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을 위하여
흥겨운 풍악이 울리고,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처녀들이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하여 문을 두드리며 슬피 우는 소리가 들리고, 자기만을 위하여 창고를 짓
고 모든 수확물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흐뭇해하다가 하룻밤에 목숨을 잃는
어리석은 부자의 모습이 나오고, 일하러 간다 안 간다 하며 아버지의 속을 썩
이던 아들들의 괘씸한 행동이 나온다. 사람들의 시시콜콜한 일상생활을 들먹
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예수의 이야기 속에는 놀라운 진리가 들어있다. 예수
는 인생사에 관하여 말하는 듯 싶더니 어느새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하
신다.
웃는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하나님의 뜻이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나
는 것을 보고 기뻐하며 웃던 사람 예수. 울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인간적인
가? 나사로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앞뒤 안 가리고 달려갔을 때 우르르 몰려나
와 슬피 우는 그의 누이동생이며 이웃집 여자들 앞에서 그냥 눈물을 쏟으신
사람 예수. 태양 아래 걷고 걸어 더 이상 한 걸음도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죽
음처럼 무거운 몸을 주체할 수 없어 우물곁에 그대로 주저앉은 사람 예수. 십
자가의 죽음 앞에서 고난의 처절함을 영혼과 육체로 느끼며 잔이 옮겨지기를
피땀으로 기도하신 사람 예수.
예수는 사람이셨다. 예수는 참으로 사람이셨다. 예수는 우리와 똑같이 영혼
과 육체를 가지신 인간이셨다. "그는 육체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
다 하심을 입으셨다" (딤전 3:16). 예수는 참 사람이기에 하나님을 향하여 완
전한 희생물이며 인간을 위하여 완전한 대언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참 사람
이신 예수에게서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완전한 희생물을 발견하시고, 사
람들은 참 사람이신 예수에게서 자신들의 문제를 표현하는 완전한 대언자를
발견한다. 만일 예수께서 사람이 아니었다면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
의 중보자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
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딤전 2:5).
돌짝길에 상하고 흙탕물에 더럽혀진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위해 그 귀하신
손을 아끼지 않고 내미신 예수, 베데스다 못에 반평생을 불구의 몸으로 누워
불신과 원망으로 얼룩진 영혼을 자비로운 눈으로 바라보신 예수, 그 예수는
사람이셨다. 오늘도 부드러운 손과 자비로운 눈을 가지신 사람 예수께서 어루
만지시도록 죄악으로 때묻은 육체와 영혼을 나는 내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