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성탄절이 다가옵니다. 금년(2022년)에도 변함없는 성탄의 은혜를 묵상하고 누리는 때입니다. 이때 목회자에게는 또 하나의 부담이 있습니다. 바로 성탄설교입니다. ‘뻔~’한 이야기로 은혜의 설교를 하려는 것만큼 힘든 일이 없다고 합니다. 과거의 성탄 설교를 통해서 오늘의 은혜의 아이디어를 발견하시기를 바라며 ‘성탄설교’ 3편을 재편집해 보았습니다. <편집자 주>
① 제목: 세상이 바라 본 하나님의 승리
본문: 이사야 52:7-10, 히브리서 1:1-4, 요한복음 1:1-14
석의적 접근
a. 구약의 말씀(이사야 52:7-10): 본문은 성탄절에 가장 중요한 주제인 기쁜 소식과 왕의 도착을 말하고 있다. 10절의 ‘하나님의 팔’은 거룩한 승리를 나타내는 말로써, 이는 신명기 26장 8절의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해 내셨다는 것과 같은 표현이다. 그리고 8절의 하나님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심에 대한 말씀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하는 것이다. 왕의 돌아오심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전 세계가 보게 될 것이다.
b. 서신서의 말씀(히브리서 1:1-4): 본문은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을 언급하고 있는 중요한 내용이다.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시던 하나님께서 이 모든 마지막 날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결정적으로 말씀하셨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결코 침묵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언제나 말씀하셨고 바뀐 것은 말씀의 사자들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함에 대하여 말씀한다. 곧 기독론이 강조되고 있는 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후사이다. 그리스도는 창조자이며 이 세상을 유지시키는 분이며 또한 높으신 제사장임을 말씀하고 있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선재하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는 창조자이실 뿐만 아니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런 모든 탁월하심을 한 마디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바로 3절 말씀이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요, 하나님의 본체이시기에 그 어떤 피조물도 그에 비할 바가 아니요, 천사도 그에 비할 바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탁월하신 그리스도의 오심과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으로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를 우리가 맞이함은 크리스마스의 가장 중요한 주제인 것이다.
c. 복음서의 말씀(요한복음 1:1-4): 본문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을 선포한다. 그리고 그분께서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의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신 바 되었음을 선포한다.
원래 본문은 흔히 서막으로 알려져 있는 1-18절까지의 일부인데, 이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관한 말씀이고, 둘째는 말씀을 통해서 인간의 삶에 관여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거룩하신 은혜와 진리를 제공하심에 관한 말씀이다. 특별히 그중에서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라는 14절의 말씀은 이 서막의 정점이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욕구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사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영생이다. 그러나 누구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으며 비록 하나님께서 창조자이며, 만물을 붙드시는 자이며,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어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관찰이나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을 너무나도 사랑하셨기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모든 무지의 어두음과 죽음의 세력을 몰아내셨다. 바로 이 이야기를 전하기 위하여 요한은 그 당시 사람들이 익숙한 개념인 로고스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 말씀은 만물이 창조되기 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인격체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인 것이다.
설교를 위한 조명
a. 서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가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할지라도 평화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다. 오늘 수많은 나라들이 전쟁을 준비하는 데는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고 있으나 평화를 위한 연구에는 아주 적은 비용을 쓰고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시작된 승리는 모든 세계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다.
b. 정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승리는 일시적인 승리가 아니다. 또한 승리가 가져다주는 평화는 위장된 평화가 아니다. 이것은 겉으로는 평화를 부르짖으면서도 뒤로는 핵무기를 만드는 그런 위장된 평화가 아니라 이미 갈보리 산상의 십자가에서 온전히 이루어진 완전한 승리이다.
c. 동기 부여
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완전한 승리가 우리에게 필요한가?
- 죄 가운데 빠진 인간이 이룰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 사탄은 아직도 이 세상의 공중권세 잡은 자로서 우리를 괴롭히며, 죄와 사망의 그늘 밑에서 우리를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다.
d. 방법론
어떻게 이 승리를 실현할 것인가? 이 승리는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므로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주 쉬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만들어 놓으신 이 결정적인 승리를 제 것으로 하지 못한 채 의심하며, 계속해서 사탄의 유혹과 속임수에 넘어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하나님의 승리를 나의 것으로 하려면 우리는 이 귀한 승리를 결정적으로 이루려고 만물의 마지막 때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영접해야 한다.
e. 결과
그리스도께서는 이 승리를 우리 모두에게 주시고자 이천 년 전에 이 세상에 오셨다. 미움과 시기와 분쟁과 싸움과 혼돈이 있는 곳에 오셔서 온전한 사랑을 선포하셨고, 참 평화를 이루셨다. 성탄절에 우리는 이 큰 기쁨의 소식을 나의 기쁨, 나의 승리로 간직하고, 좋은 소식을 온 세상에 전하는 파수꾼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대림절(혹은 대강절, 강림절)은 원래 ‘옴’, ‘도착’을 뜻하는 라틴어 ‘adventus’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직접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뜻한다. 교회절기로서의 대림절은 성탄절로부터 4주일 전인 11월 마지막 주일에서 4주간 계속된다.
사도신조의 내용에 따라 성부, 성자, 성령의 구속적 활동을 그 내용으로 담은 삼위일체력에서는 성부 하나님에게 속하는 계절인 창조절이 교회력의 시작이지만, 그리스도론을 주축으로 하는 축제력에서는 대림절로부터 교회력이 시작된다. 이 대림절은 단순히 성탄절을 준비하는 기간이라기보다는 세상 끝날에 심판주로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기간으로 엄수되고 있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대림절은 구세주의 오심을 감사하는 절기이다. 동시에 다시 오시마고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절기이다. 동시에 다시 오시마고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절기이다. 주께서 언제 오실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주님은 약속하신 대로 오실 것이며, 다시 오셔서 새하늘과 새땅을 완성하실 것이라는 약속은 분명한 사건으로 나타날 것이다.
성탄절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성육신의 사건이다. 그는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처녀 마리아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탄생하신 하나님 자신이시다. 예수의 탄생은 하나님의 구원 행위의 첫 출발점과 시작이 되는 역사적 사건이며 또한 하나의 종말론적 사건이다. 예수의 탄생은 절망과 곤경 가운데 있는 지상의 모든 개인들과 민족들에게 해방의 소식이 되며, 평화의 소식을 알리는 구원의 메시지이기 때문에 하나의 큰 축제가 된다.
2. 탄생의 성서적 배경
(1) 확실한 순종의 사건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고백은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탄생을 고백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 문제는 치열한 논쟁의 주제가 되어 왔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사건에 대하여, 기독교의 복음은 처녀탄생을 믿는 것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내용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신약성서 안에 처녀탄생을 직접적으로 증거하는 것은 마태복음 1장 18-25절과 누가복음 26-38절에 한정되어 있다. 요한복음 1장 13절과 갈라디아 4장 4절에서도 예수님의 탄생이 언급되어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 요한과 바울은 처녀탄생에 대하여 직접으로 증거하기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의 선재성과 성육신에 대하여 초점을 모으로 있다. 요한과 바울의 문서에서는 선재성이 처녀탄생을 대응으로 삼고 있으나 그렇다고 처녀탄생을 불신임한 것은 아니고 오히려 처녀탄생을 알고 있으면서도 선재성이 보다 강조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몸을 통과함으로써 땅의 존재를 취하신 하늘의 육체를 입은 하늘의 사람이란 의미이다.
마태의 기록은 예수님의 족보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이 처녀탄생으로 성취되었다고 본다. 이 사실은 천사가 요셉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를 때 강조된다(마태 1:20). 여기서 예수님은 ‘그의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건져낼 사명을 가진 분으로 통고되었다. 이 사실은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영원히 함께 계신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사건이다(마태 1:23). 이것은 다윗의 자손이라는 족보를 입증해 주는 것이다. 비록 그 아이가 성령으로 수태되어 났고(20절), 요셉은 예수 출생 이전에 마리아와 성적 교제를 하지 않았지만(25절), 마리아는 여전히 그의 아내요(20절, 24절), 그는 그녀의 남편이다(19절).
요셉은 예수가 그의 아들임을 인정한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사건은 탄생을 가능케 했던 성령의 수태고지에 대한 천사의 메시지 전달에 대한 요셉과 마리아의 태도였다. 마태와 누가는 요셉(마 1:24)과 마리아(눅 1:38)가 말씀을 순종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 사건에서 은총의 주인공이 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같이 하여 역사적으로나 범적으로나 예수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가문에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요셉이 꿈속에서 마리아가 임신된 사실을 알게 되고, 동방박사의 내방, 그리고 헤롯의 강한 분노는 예수님의 출생에 대한 역사성과 섭리적 의미를 더 강조해 주는 것이 된다.
(2) 새 백성을 형성한 사건
예수님의 출생 시 천사는 목자들에게 말하기를 이 사건은 전 인류가 축복을 받게 될 사건이라고 한다. 모든 백성(눅 2:10)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아니고(마 1:21 같이) 도리어 누가복음 2장 14절을 비추어 볼 때, 하나님께서 온 인류 안에서 불러내어 형성한 ‘새 백성’으로 이해된다. 누가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후에 이 계보를 넣고 있다. 누가는 예수님의 족보를 아담에게까지 소급하여 만든다. 이것은 예수님의 참된 인간성을 강조하려는 데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누가가 예수님의 탄생을 아담으로부터 출발했고, 마태는 이스라엘의 혈통으로부터 그 출발을 삼고 있다고 해도 두 복음서의 족보에는 다 같이 요셉은 다윗의 가문에 속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탄생사건은 이스라엘의 옛백성을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새 백성을 위해서 오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3)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인하여 처녀 마리아의 몸을 통하여 잉태되고 탄생하신 성육신의 사건이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성육하시는 처녀탄생의 이야기는 이사야 7장 14절 예언에서 그 기원을 찾기도 하지만, 마리아의 몸에서 성령에 의하여 기적이 일어난 사건은 마태복음 1장 20절, 누가복음 1장 35절에서 나타난다.
또한 마태복음 1장 21절에 의하면 예수의 출생은 선택된 백성을 그 죄로부터 구원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누가(눅 1:46-55)는 예수의 출생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에게 주마고 약속한 모든 것을 완성할 하나님의 능력의 표현으로서 찬양하고 있다.
우리는 이 성육신의 사건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처녀탄생을 단순한 원시교회의 창작으로 이해한다든가, 하나님께서 특정한 사람에게 준 은혜로서 이해될 수 없는 ‘자연기적’으로 본다든가, 혹은 생물학적 기형물로 이해하려는 작업을 시도한다면 큰 과오를 범하게 된다. 만약 우리가 처녀탄생의 역사성을 거부하면서 성육신 사건의 정신적인 면이라든가 신앙의 신비로써만 이해하려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단순히 신화로서만 남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인 성육신의 사건을 결코 신화적 사건으로 돌릴 수는 없다. 성육신의 사건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요한과 바울은 선재성을 처녀탄생보다 더 강조하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의지에 의하여 구원의 사업을 펼쳐 가시고자 하는 첫 출발점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4) 해방과 평화의 사건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의 복된 소식을 출발점으로 한다. 이 복된 소식은 절망과 곤경 가운데 있는 모든 개인과 민족을 행방시키려는 하나님의 구원활동을 성취해 가는 첫 관계이다. 복음서의 틀 안에서 본다면 처녀 탄생의 이야기가 가르치려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인류의 구원에 관심을 가지고 계심으로써, 성령을 통하여 한 ‘거룩한 사람’이 죄 있는 인류 안에 출생했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 탄생의 복음은 곧 해방의 복음이 되는 것이다. 탄생의 복음이란 틀 속에서 볼 때 역시 복된 소식의 절정은 평화의 소식이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천사들이 궁극적으로 전달하는 메시지는 평화를 갈망하는 모든 개인들과 민족들에게, 특히 하나님께서 ‘새 백성’으로 불러서 형성하신 절망과 곤경 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긴급히 외쳐져야 할 구원의 메시지인 것이다. 따라서 성육신의 복음이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이루어 가시는 종말론적 사건이라고 볼 때 그 메시지의 핵심은 평화를 주제로 삼게 되는 것이다.
3. 예수 탄생의 교육적 의미
이상의 고찰에서 성탄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성육신의 사건으로서, 그 사건은 하나님께서 인간 구원 행위의 작업을 위해서 한 첫 단계요, 첫 출발점이요, 시작으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성탄절의 사건은 하나님의 인간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선교 행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그 주권이 있게 된다.
그러면 성탄절의 기독교 교육적 의미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여기서 기독교교육의 목적이 분명하게 설정된다. 즉 타락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비인간화의 현장에 오신 예수 그리그도의 성육신은 바로 그곳이 곧 교육의 현장이 될 수밖에 없다. 비인간화의 현장은 바로 우리들의 가정이며, 학교이며, 교회이며, 또한 사회가 된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타락한 비인간화의 역사적 현장에 오셔서 참여하여 사시고 그들의 행위를 위해 함께 대화하시는 곳에서 소외되었던 인간들은 예시 삶의 가치관을 버리고 새로운 백성으로서 삶의 새로운 스타일을 형성시켜가며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곧 우리로 하여금 이 메시야가 건설해 가시는 새 시대 속에 살도록 하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백성을 통해 완성해 가시는 세계 구속의 사업을 위해 모든 사람들에게 자유와 해방과 참 인간성 회복을 통한 평화를 성취시켜 가도록 참여시키는 데 교육의 목적을 두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이미 설정된 교육의 목적에 따라 교육의 내용과 교사의 역할 그리고 교육환경을 통한 교육의 새로운 교육방법으로 교회 공동체의 새로운 역군들이 그들의 맡은 바 책임을 감당해 갈 수 있는 공통의 학습 과정을 꾸준히 실천해 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성탄절을 통하여 비인간화의 역사적 현장에 노출된 소외층 사람들에게 참 인간성 회복의 작업과 삶의 올바른 가치관 형성을 위해 오늘도 계속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육신을 통해 참 사람이 되시고 모범이 되신 그의 뒤를 따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으로 나아가 비인간화의 현장인 세상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구체적으로 대화하며 구원의 작업을 끊임없이 진행시켜 가야 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선교’ 현장인 절망과 곤경의 비인간화 작업장에서 민중의 괴로움과 아픔을 함께 나누시며 새 백성을 형성시켰고 또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도록 교회공동체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만드시고 또다시 새 인류의 새싹을 만들어가는 데 도움을 주신다. 이러한 희망의 공동체 형성은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선교’ 활동에 참여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 교회절기프로그램, 한국기독교장로회출판사, 1994, pp.382-388
③ 제목: 그분이 오신다
성구: 이사야 60:1-14, 갈라디아서 4:1-7, 마태복음 2:1-12
오늘날은 교회에서 성탄을 이야기하기도 전에 캐럴과 성탄 장식들이 먼저 등장한다. 교회는 그렇게 요란한 프로그램을 갖지 않을 때에, 매스컴에서는 각종 행사들과 프로그램들이 방영된다. 그러한 것이 고마울 때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이 온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러 오신 이 귀한 성탄에 예수를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 함께 즐거워한다는 사실이 고마운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성탄에 대한 위험한 도전 앞에 서 있다. 그것은 ‘상업주의’의 도전이다. 상업주의의 도전 앞에서 성탄의 의미가 전도되고 있다. 예수 탄생은 별로 중요한 사실이 아니며, 한 몫 보는 때이고 즐기는 연휴일 뿐이다. 상업주의의 도전 앞에서 무너지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성탄의 복음이다. 또한 그것은 성탄의 복음을 들은 사람들의 경배이다.
그분이 탄생하시는 때를 그렇게 표현한다. “헤롯 왕 때엽. 성탄의 복음을 전하면서 성스럽고 거룩한 복음의 말씀과는 도무지 조화되지 않는 사람의 이름을 거론한다. 예수님이 태어나던 당시의 왕이었던 헤롯은 유대인이 아니었으면서도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탁월한 지략과 모략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로마 황제의 인정을 받아 유대 나라를 다스리는 분봉왕이 되었다. 예수님이 탄생하시던 때까지 약 50년을 권좌에 앉아 유대 나라를 다스렸는데 굉장한 정치적 역량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면서도 정신병적인 질환을 가지고 있었고, 성격도 또한 아주 포악한 왕이었다. 그의 아내와 장모, 장남과 두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였던 사람이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암울하고 사회적으로 가장 어둡던 때에 주님은 이 땅에 오셨다. 그 어렵고 암울하던 때에 임마누엘 하시기 위해서 그분이 오고 계신다는 것이다. 삶의 어려움 속에 계시는 분이 있는가? 건강의 어려움, 사업의 어려움, 가정의 어려움, 자녀의 어려움, 인생의 어려움... . 인생의 캄캄한 밤을 지내고 계시는 분들이 있는가? 올해도 주님은 그 어려움의 현장에 오신다는 것이다.
그 어둠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이름이 들려진다.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저가 저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임이라” 성탄은 어둠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놀라운 이름이 선포되는 복된 절기이다. 이 이름이 불리는 곳에 오늘도 하나님의복 주심은 시작된다. 구원의 역사가, 치유의 역사가, 희망의 역사가, 놀라운 위로의 역사가 시작된다.
이사야 본문은 이런 역사들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미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한다. “일어나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화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잘 생각해 보자. 우리가 예순의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었다. 우리는 어둠에 속해 있었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믿고, 의지하기 전 우리는 율법 아래 놓인 죄악의 종들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갈 4:1-7). 성탄은 복음이 전해지는 때다. 이 복음을 경험하는 사람에게만 이 성탄은 복일 수 있다. 예수, 그분이 오신다는 성탄의 복음을 새롭게 듣게 되고, 경험하게 될 때에 ‘Merry Christmas!’가 되는 것이고 ‘Happy Season’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이 놀라운 은혜, 우리의 영혼을 살리며 우리의 생명을 건지실 하나님의 독생자와 무엇을 비교나 할 수 있겠는가? 성탄은 우리가 다시 살아나게 된 은혜의 순간이다. 성탄은 하늘의 생명이 사망의 세상에 접목되던 때이다. 지옥의 백성이던 우리에게 최초로 하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복음이 전해지던 때이다. 그러므로 성탄의 복음의 깊은 의미를 깨달은 사람들은 성탄의 복음을 듣고 감격한다. 가슴이 떨린다.
오늘날 예수가 성탄에서 빠지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한다면 첫 번 성탄절에도 그랬다. 오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었다. 고향에 호적을 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로 인해 조용한 산골 마을이 소란해졌을 때, 한몫 잡으려는 사람들의 눈이 번득인다. 출산이 임박한 임산부라 할지라도 사람들의 이기심은 조그만 처소 하나 내놓지 못한다. 그래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오시는 예수님은 마구간에서 나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별빛은 아름다움을 더하듯, 놀랍게 성탄을 맞은 사람들을 대할 수 있게 된다. 나신 아기께 경배하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강생하신 하나님의 독생자를 예배하기 위해서 산을 넘고 물을 건너온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성서는 이 아름다운 신앙의 사람들에 대한 이름도 배경도 정확히 밝히지 않고 있다. 다만 우리는 전설이나 문학을 통해서나 그들의 이름에 대해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성서는 그들에 대해서 그렇게 소상히 소개하지 않는다.
그들은 별을 연구하는 천문학자들이었다. 별을 연구하는 일을 하면서도 그들은 언제나 마음속에 메시아가 오실 날을 기다리며 사는 신실한 신앙인이었다. 일상의 일을 하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나라를 꿈꾸며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러한 그들은 희미하지만 한 메시지를 듣게 된다. 그들은 일어선다. 메시아의 탄생을 알리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들은 것이다. 어떤 사건, 어떤 상징을 보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얼마나 불쌍한 사람들인가. 우리 삶의 사건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지 못하고 산다면 영적으로 어두운 세계를 사는 사람이다.
그들은 별의 메시지를 알았다. 별의 메시지를 이해했다. 그 놀라운 소식을 대하자 그대로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이 탄생하신 자리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단숨에 달려갈 수 있는 그런 거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느냐 하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는 일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영혼을 구원해 주신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보내실 메시야로 인해서 가슴이 뜨거워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멀고 가까운 것,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주님을 섬기는 데에는 시간이 있고 없고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없고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주님으로 가슴이 뜨거워진 사람들이냐가 문제일 뿐이다. 오늘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가슴이 뜨거워진 사람이냐가 문제일 뿐이다. 나의 가장 귀한 것을 드리고 싶은 사랑으로 얼굴이 붉어진 사람이냐가 문제일 뿐이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는 거리 같은 것은 초월되기 때문이다.
동방박사들은 성탄의 복음이 들려왔을 때, 일어났다. 가장 소중한 것을 들고 그것들보다 더 소중한 아기 예수를 찾아 물을 건너고 산을 넘었다. 경배하기 위해서다. 그들은 온전히 주님을 영접했고, 경배했으며 예물을 드렸고 다시 임마누엘 되시는 주님을 가슴에 품고 삶의 자리로 돌아갔다. 금년에도 주님은 다시 탄생하신다.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그분이 오신다. 성탄의 복음을 듣고 감격하는 그 자리에 서 있는가?
** 생명을 빚어가는 해-2001년도 교회력에 따른 예배와 설교 자료, 대한기독교서회, 2000, pp. 90-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