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중이 달라지고 있다2: 포스트모던 상황1) 2015-12-17 10:26:52 read : 4591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김 운 용 (장신대 교수, 예배 설교학)
토대가 흔들리는 시대
우리 사회가 급격한 변화 가운데 있다는 사실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한 변화 속에서 기존의 것들을 세워왔던 토대들이 흔들리고 있는 현상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아직 심각하게 느끼지 못할 수 있지만 가정과 가족의 토대가 흔들리는 현상은 너무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다.
최근 통계청의 발표에 따르면 2001년 한해 이혼한 사람은 13만 5천쌍으로 1990년 4만 5천쌍에 비해 세배 이상 증가했다고 한다. 하루 평균 877쌍이 결혼하고 370쌍이 이혼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렇게 되면 전통적인 결혼관이나 가정의 개념이 달라질 수밖에 없게 된다.
그와 함께 “가정이 무너지고 있다”는 염려의 소리가 높아지며, 불안정한 가족관계는 사회 전반에 불신을 조장할 것이기에 ‘가정’의 해체를 염려한다. 얼마 전 자신이 동성연애자임을 공포하는 커밍아웃을 선언한 연애인의 이야기가 들려오더니 아무렇지 않게 다시 방송활동을 재개했다.
성전환 수술을 받은 미모의 트랜스 젠더 연예인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새로운 영웅이 도래하는데, 인기 연예인들이나 스포츠 스타들처럼 카메라의 조명을 받는 사람들이 과거의 위인들로 부터 눈길을 돌리게 한다. 놀라운 발전을 거듭한 정보화의 영향으로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바다에는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포르노 사이트가 도배하듯 널려 있다.
성담론의 자유화로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성도덕이나 윤리의 토대도 흔들리고 있다. 왜 선생들은 수학여행비를 내지 않고 자기들의 돈으로 공짜 수학여행을 하느냐는 학생들의 항의를 받고 수학여행에 동행하는 교사들이 자신의 수학여행비를 내고 가기로 했다는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얼마 전 스승의 날에 학교는 조용했으나 유명 사설 학원들에는 호화찬란한 스승의 날 행사가 열렸다고 한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까지 사설 학원은 성황을 이루는 반면 공교육은 휘청거리고 있다. 학교의 토대도 흔들리고 있고, 교사들의 권위의 토대도 흔들리고 있다.
오늘 우리 주변에는 익숙했던 시대의 토대가 무너지면서 전혀 다른 새로운 시대가 도래되고 있음을 예고하는 흐름들로 가득하다. 익숙했던 토대가 무너져 내리고,
다른 토대를 세우려는 노력이 계속되어 왔지만 어쩌면 무너져 내림의 증상은 더욱 심각해져가는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고 근본적인 토대가 이제는 아예 거부당하는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과거에는 낡은 것은 무너뜨리고 새로운 터를 구축하려고 하였는데, 이제는 아예 토대 자체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은 더해 간다.
‘포스트모던’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시대
물론 이러한 시대적인 흐름은 단지 우리 사회만이 경험하고 있는 현상은 아니다. 이것은 서구 사회에서는 20세기 중반부터 거대한 흐름으로 생성, 전개되고 있는 문화 사회의 변화에 있어 중심적인 흐름으로 자리 매김을 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반 토대적인 경향을 학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처음에 이것은 건축, 예술, 문학 분야의 한 흐름으로 이해되던 것이 이제는 “오늘날 문화 전체의 성격을 규정짓는 지시어”로 자리 매김을 해가고 있다.2)
서구사회는 300년이 넘는 긴 시간동안 모더니즘의 문화를 세우고 발전시켜 온 반면, 우리 사회는 모던 시대를 경험하지 불과 몇 십년도 되지 않고 그 뿌리가 내리기도 전에 우리는 후기 모더니즘 시대를 논하면서 그에 대한 혼란은 더욱 가중해 가고 있다.
작금에 우리 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문화 사회적인 변화를 가장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용어가 있다면 그렇게 익숙치 않는 “포스트모던”이라는 신종 용어를 통해서이다. 그러한 문화의 흐름 속에 서있는 오늘의 청중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설교자들에게는 필연적으로 이런 문화 사회적인 변화에 대한 민감해질 필요성을 강요받고 있다.
오랫동안 지배해 왔던 가치와 시대 정신을 지배했던 터가 흔들리면서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대두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은 교회의 사역 전체에 있어서 큰 도전으로 다가오고 있다. 특별히 계몽주의 이후 합리성과 이성적인 특성에 근거한 형태를 유지해온 기독교의 설교3)에는 거대한 도전일 수밖에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절대 진리 혹은 권위를 해체하고 이성주의에 근거한 합리성의 터를 무너뜨리려는 경향은 과학적 합리주의를 내세운 모더니즘을 반대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기독교를 거부한다.
그래서 캐나다 리젠트 대학의 교수인 스탠리 그랜츠는 포스트모던 시대에로의 전환은 “다음 세대들에게 복음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교회의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거대하고 강력한 도전이 되고 있다”고 주장한다.4)
모든 토대가 버려지고 있는 이 시대에 유일하고 배타적인 토대를 가지고 있는 교회는 어떻게 본래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까? 과거에 사람들은 옳고 그른 것, 진리와 거짓에 대해 논쟁했지만 오늘날에는 사람들은 도덕성과 진리라는 개념 자체를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이 길만이 ‘옳은 길’이라고 선언할 수 있을까? 절대 진리 자체를 거부하고, 그러한 토대 자체를 거부하는 시대에 오늘의 설교자들은 어떻게 그리스도의 진리를 증언할 수 있는가?5) 절대적인 것이 없다고 믿는 시대 속에서 어떻게 절대적인 진리의 말씀을 전할 수 있을 것인가?
토대가 무너지는 시대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위임을 통해서 계속되어온 설교 사역은 결단코 중단될 수 없는 사역임을 감안할 때, 우리는 “이 시대의 징조”를 아는 지혜로움이 있어야 한다. 우리의 비판적 반성은 포스트모던 시대 사람들 마음에 전해질 복음의 윤곽을 결정하는데 반드시 도달해야 할 것이며, ‘이 시기를 아는’(롬 13:11) 과정에 있어야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이해
포스트모더니즘은 계몽주의 이후 나타난 모더니즘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나타나는 시대정신이요, 문화적인 현상(cultural phenomenon)이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는 주로 예술가들이나 건축가들에 의해서 오랫동안 지배적인 관점이었던 모더니즘에 대한 급진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1970년대에 들어서는 문화 전반에 걸쳐 확대되었고, 1980년대에는 문예 사조나 철학사상을 뛰어넘어서 대중 문화에까지 깊이 침투되었다.
이제 포스트모던 경향은 “선택 가능한 하나의 관점이라기 보다는 이 시대를 관통하고 있는 시대 흐름”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6)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을 전제한 말이며, 과학과 기술문명, 이성과 합리성을 근간으로 하는 근대를 떠나 새로운 시대로 접어든다는 의미를 가진다.
본래 ‘포스트’(post)라는 접두어는 “후기-” 혹은 “탈-”의 뜻을 가진 말이며, 이것이 모더니즘과 연결될 때, ‘후기 근대주의’ 혹은 ‘탈 근대주의’라는 뜻이 된다.7) ‘후기’라는 말로 규정하면 연속성을 내포하는 반면, ‘탈’이라는 말로 규정하면 이것은 단절과 비판, 극복이라는 주제가 강조된다.8)
이것은 두 가지로 다 해석이 가능하며, 실제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에는 이 두 가지 의미를 다 내포하고 있고, 사실 이러한 의미를 따라 논의가 계속되어 왔다.9) 그러나 대부분의 논의는 “탈” 또는 “반대”의 의미가 더 중심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포스트모던은 근대의 문제에 대한 반성과 해답을 촉구하며, 모더니즘 시대 동안에 “누적된 병적인 요소들이 초래한 문제와 위기에 대한 반발과 대응”으로 볼 수 있다.10)
이렇듯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 세계관과 그것에 통합되어 나타난 계몽주의에 반동으로서 시작되었고, 언제나 포스트모던은 모던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던의 내용과 주장(agenda)을 바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모던 사고 구조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근대 이전의 시대를 신화와 교권(敎權)의 시대로 규정할 수 있다면, 근대는 이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과학과 이성의 시대였다. 근대의 세계는 계몽주의와 함께 시작되었으며, 그 시대를 통과하면서 서구에서부터 그 모습을 드러내어 전 세계로 확장되었다. 이런 점에서 계몽주의는 근대의 정신세계와 포스트모더니즘을 이해하는 출발점이 된다.
대체적으로 계몽주의는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에 걸쳐 유럽을 지배했던 사상 풍조를 가리키는 것”으로 르네상스의 인본주의 정신과 17세기 과학의 혁명적인 발달을 한데 묶어 근대세계를 출현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다.11)
중세를 지배하였던 교권(敎權)으로 벗어나 인간 이성의 우위를 발견하게 해 주었던 것이 바로 계몽주의와 르네상스였다. 르네상스는 근대 사고방식의 기초를 놓았지만 근대성(modernity)의 상부구조는 세우지 못했다. 그래서 그렌츠는 평가하기를 “르네상스가 근대성의 할머니였다면 계몽주의는 그것을 낳은 친 어머니였다”고 주장한다.12)
이렇게 르네상스와 계몽주의의 영향을 힘입어 변화를 주도한 것은 역시 17-18세기의 과학자들이었으며, 이제 고대로부터 중세에까지 이어져 내려왔던 과학의 원리들이 대부분 폐기되거나 근본적으로 바뀌었고, 중세의 세계관으로부터 철저하게 이탈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에는 신의 계시, 혹은 교권이 진리를 판정하는 최종적인 기준이었다면 계몽주의 영향과 함께 진리의 판정기준이 철저하게 인간의 이성과 과학적인 합리성에서 찾으려고 했다. 이성의 능력과 가능성에 의존하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믿으려고 했다.13)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계몽주의는 어떤 시대적인 역사적 의미보다는 지적 인식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인간 이성에 우위를 두는 지적인식의 변화로서 계몽주의와 함께 시작된 근대성은 이성에 신뢰성을 두고, 그것을 활용하여 세계를 파악하려 하였으며, 개인을 인식하는 주체로 삼았다. 여기에서 이성 중심의 문화와 사고가 형성되게 되었으며, 합리성과 개인을 중심으로 한 세계 가치관이 형성되게 된다.
이성과 합리성의 산물인 과학과 기술 문명은 이제 중세의 미신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인간이 주체가 되게 되었으며, 인류의 미래를 보다 풍요롭게 할 수 있는 낙관론이 지배적이었다. 근대에서 이성은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삶의 풍요와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으로 기대했다.
이성에 대한 신뢰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거부의 형태들이 근대 사회 속에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이 사회를 과학적, 기술적, 이성적 진리의 노정을 따라 재건하겠다고 나서는 움직임들이 나타나는데, 그 중에 하나가 “산업화 시대”(industrial age)를 구가하는 움직임들이었고, 변증법적 유물론을 통한 마르크스주의 고안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가장 야심적으로 뻗어 나갔다.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계몽주의의 이상을 사회주의 체제를 통해 러시아에서 펼쳐간다. 이렇게 모더니즘의 비전은 “인간의 자율적 이성에 입각한 유토피아”였으며, 과학의 기초 위에 기술이 서고, 그 위에 경제 발전이 추구된다는 관점으로 문화를 바라보는 “유토피아 프로젝트”였다.14) 그러나 이러한 모더니즘의 가정들은 산산조각이 났다.
물론 근대성과 함께 많은 사회적인 발전과 과학과 기술 문명이 이룩한 이기를 통해 인간 삶은 한결 풍요를 누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인간 이성을 중심으로 한 근대성이 이룩한 과학 기술문명의 결과를 히로시마에서 보았고, 이성을 중심 하여 세워진 사회 체제였던 유럽에서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Holocaust)을 통해 피폐해진 인간의 실존을 보게 된 것이다.
산업사회가 이룩한 지구 환경은 극심한 오염과 생태계의 파괴 등의 결실로 나타났고, 가장 이상적인 노동자의 천국이 되어야 할 러시아는 인류사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압제와 획일성은 결국 공산주의 종주국으로서의 깃발을 내리고 말았다.
계몽주의이래 형성된 인간 이성을 중심으로 한 근대성은 신뢰를 상실하게 되었고, 이성은 학문의 전당에서 점점 퇴위를 당하게 되었다. 사고의 기본 범주들이 변화를 겪으면서 이제 세계를 보는 새로운 방식이 출현하게 되었다.15)
이와 같이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 세계관과 계몽주의 프로젝트, 근대의 기술 과학의 이상, 그리고 근대주의가 수립했던 철학적인 가설들에 대한 반작용 혹은 거부 현상으로 등장하게 된다. 근대성(modernity)이 수립했던 문명의 열매들, 즉 과학기술, 사회 통제, 합리적 계획화에 대한 반발로서 형성되는 지적, 문화적, 사회적, 철학적인 일련의 흐름이었다.
대부분의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지식이란 발견되는 객관적인 진리가 아니라 사회적 담론에 의해 구성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지식의 진위보다는 그것을 사용하는 용도와 그에 대한 결과적 효용을 훨씬 중요한 개념으로 본다.
여기에서 영원하고 보편 타당한 거대한 지식 체계, 즉 메타 내러티브(metanarrative) 보다는 당장 특정한 효과를 볼 수 있는 실용적 정보 취득과 활용이 앎의 목표요 목적인 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지식의 위상은 흔들리고, 정보화로 파편화된 세상에서 보편적인 진리체계가 흔들리게 된다.
포스트모던 상황은 이와 같이 “보편 타당한 지식체계 또는 진리의 틀이 소멸된 것이 문화적 특징”이다. 어느 누구도 인류를 하나로 묶는 공통적인 메타내러티브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 대신 작은 담론들만 존재하게 된다.16) 여기에서 소위 다원주의가 나오게 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단순히 철학 운동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광범위한 문화 현상으로서 등장하기 때문에 우리는 문화의 흐름 속에서 나타나는 포스트모던 경향을 살펴보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포스트모던 경향 가운데 서있는 문화 창출자들은 삶의 양식이나 가치관, 그들의 문화 표현에 있어서 기존의 권위나 보편적인 기준을 따르려고 하지 않는다. 결국 “권위의 표준과 중심의 상실은 다원성과 다양성의 추구”로 표출된다.17)
그래서 포스트모던 문화는 세계화의 결과로 등장하는 다중문화와 “파편화와 지역화(localization)"의 현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결과로서 포스트모던 사회는 권위 체계가 무너진 대중사회가 된다. 고전적 문화 개념이 쇠퇴하고, 문화의 가치 기준이 다원화되면서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경계선이 사라지면서 집단의 정신에서 나온 대중문화가 강력한 주도하는 시대가 된다.18)
포스트모던 시대의 건축도 판이한 다름을 추구한다. 모던 시대에 건축의 목표는 합리성을 바탕으로 인간에게 가장 이상적인 삶의 장소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각 건축물들은 서로 통일성을 가지며, 효율성에 강조점을 두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모던 건축이 추구한 단일한 가치 대신에 다양한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며, 통일성 대신에 불일치를 드러내고 표현하려고 한다. 즉 기능 위주였던 모던 건축과는 달리 포스트모던 건축은 상징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19)
모더니즘에 대한 반발은 예술 세계에서도 강하게 나타난다. 예술의 순수성 추구하는 단일가치를 추구하던 근대 예술에 비해 포스트모던 예술은 표현양식의 다양화와 다양한 가치를 추구한다. 즉 통일된 단일양식 추구를 거부하고, 다양한 양식의 콜라주이며, 퓨전 예술 형태를 겨냥한다. 여기에서는 예술 창작자보다는 예술 수용자의 입장이 더 고려된다.
이상의 논의들을 통해서 볼 때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의 세계관의 결정주의를 깨뜨리고 나와 과학적인 근대주의를 넘어서려는 일종의 지적, 문화 사회적인 운동이다. 이것은 철학뿐만 아니라 문학, 예술, 건축, 신학, 대중문화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일종의 지적이며 문화 사회적인 현상이다.
메타내러티브(거대 담론 혹은 절대 정신)가 거부되고 이질성과 다양성이 강조되며, 근대주의가 표방하였던 인간 이성의 합리성, 과학의 신뢰성, 진리의 객관성과 보편성에 대해 해체, 혹은 넘어서려고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계몽주의 이후 형성된 근대성(modernity)을 통해 이룩된 것들을 붕괴 혹은 해체시키려는 지적, 문화적 운동이다.
설교 사역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
근대주의가 발원되었을 때, 그러한 흐름은 기독교 전체를 흔들어 놓을 만큼의 충격이었고, 적잖은 위협이었다. 포스트모던은 어떤 의미에서는 근대와는 아주 다른 문제와 도전을 기독교 전반에 가져온다. 포스트모더니즘을 기독교의 토대 자체를 흔들어놓는 위협적인 도전으로 이해하는 경향도 있고, 새로운 기회와 가능성으로 이해하는 경향도 있다.20)
기독교의 초자연성에 큰 도전이 되었던 근대주의의 실패는 초자연적인 기독교 신앙에 대한 세속적인 비판들이 그 힘을 잃었음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측면을 무시할 수는 없겠으나 계몽주의 실패에 대응하는 입장을 취하기 때문에 이것은 특별히 기독교의 설교에 대해 기회와 위험이 공존하는 기로에 서있게 한다.
절대 진리는 해체되고 다원주의가 논의되며, 의지가 지성의 자리를 차지하고, 이성은 정서에 자리를 내어주고, 상대주의가 도덕성을 대체해 가는 문화 사회적인 경향은 이제 전혀 다른 방식으로 기독교에 도전한다.21) 이러한 점에서 포스트모던 시대가 설교 사역에 가져오는 도전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해체주의의 경향을 들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해체주의이다. 해체주의의 선구자는 역시 철학자 니체인데, 그는 신 죽음을 외치면서 절대정신의 종언과 이성이 지배하는 근대성의 죽음을 선언한다. 즉 근대주의 사상의 기초인 이성을 통한 진리의 접근에 대해 해체를 주장한다.
니체의 충실한 제자였던 프랑스의 탈구조주의자인 자끄 데리다 역시 근대주의 전통과 주장들을 파괴하는 것을 그의 목표로 삼고 있다. 근대의 관념을 철거하고, 지금까지 지배해 왔던 문화 사회적인 통념들을 거부하기 위해 “해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근대성이 철학적 기초로 삼고 있는 모든 것과 전통적인 가치관을 거부하고 파괴한다. 여기에서는 기존의 신념은 붕괴하고, 보편적인 합의 자체를 해체하려고 한다.
설교 사역과 관련하여 볼 때 무엇보다도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 진리 혹은 메타내러티브의 해체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커다란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삶의 토대라고 믿어온 것들에 대해 비판 또는 해체를 그 핵심으로 삼는다.
여기에서 “공통적 토대의 상실”이라는 결과에 사로잡히게 된다. 마치 아방가르드의 주장과 같이 “파괴하는 것이 창조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기존의 모든 체계를 파괴하고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전복 세력의 이미지를 갖게 된다.22) 여기에서 기독교의 설교의 토대가 흔들릴 수밖에 없고 무기력해 질 수밖에 없다.
둘째는 다원주의의 흐름이다. 이렇게 절대적인 진리와 가치의 해체를 주장하는 포스트모던 시대는 모두가 자신의 법칙을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시대다. 세계화의 영향과 함께 다양성은 중요한 덕목이 되었으며, 예전에는 누구나 존중하고 그에 의해 삶이 조성되던 법칙들은 사라지고 있다.
포스트모던 시대는 이제껏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던 절대적인 것들이 무너진 시대가 되고 있다. “객관성을 토대로 하여 통일성의 기초를 마련했던 철학과 과학이 흔들림으로 인해 대두된 다원주의와 상대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대표적인 특성”이 되었다.
이성주의에 입각해 문화와 사회를 획일화하는 세계관이 인간의 삶을 억압하고 비인간화하는데서 비롯된다고 주장하면서 이에 대한 해체 작업을 시도하며 그 결과로 말미암은 다원성에 대한 강조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23)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다원성이 공인되고 절대적으로 신봉되는 것은 환영한다.
절대적인 것을 거부하는 경향은 단순히 철학이나 학문적인 흐름 속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라기 보다는 사람들의 의식과 문화 표현 속에서 나타나는 내용이다. 정형이나 믿음의 체계는 더 이상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상대주의, 다원주의 세계로 나아가는 문화 이데올로기를 가진다.
이러한 흐름의 반영인 종교다원주의도 종교들간의 차이가 “진리와 거짓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다른 인식의 문제”라고 믿게 한다.24) 즉 어떤 것이 옳고 그르다고 말할 수 없으며 이것은 모두 다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라는 것이다.
월터 앤더슨은 설명하기를 이러한 다원주의 경향은 세상은 “단일한 상징적인 세계가 아니고 여러 현실들로 이루어진 광대한 세계”라고 이해한다. 왜냐하면 “다양한 사람들의 집단이 다양한 이야기를 구성하고, 다양한 언어들이 삶 속에서 경험하는 다양한 방식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25)
사회적으로는 주변에 있던 것이 중심으로 이동하며, 기존적으로 받아들이던 중심과 서열이 무너지고 주변부가 중심으로 진입하는 현상”이 삶의 각 영역에서 나타난다.26) 통일성이나 객관성을 외면하고 무조건적인 다원성만을 강조하는 곳에서는 상대주의가 형성되어 절대 진리에 대해서는 편견과 독선으로 몰아가기 때문에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은 기독교의 설교사역에 있어 커다란 도전으로 와 닿을 수밖에 없다.
셋째는 감성을 중심한 문화이다. 이성을 중심한 합리성이 기초가 되어 발달한 근대의 문화들은 이제 그 영향력을 상실해 가면서 감성중심의 문화가 형성되고 있다. 감성문화는 이성이나 논리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느낌”과 “이미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논지는 감성문화에서는 고루한 주장이며, 느낌으로 존재하는 문화이다. 모던 사회에서는 IQ가 강조되었으나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EQ가 중요시된다. 이성 중심의 교육을 벗어나 감성을 중요시하는 교육체계로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감성문화를 가장 잘 활용하는 것이 광고산업이다.
광고에서 상품에 대한 정보나 논리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이테크 기재들을 동원하여 감성과 이미지를 중심으로 한 광고 기재들을 더 중요시한다. 기존 광고의 서술구조를 해체하여 수용자의 호기심을 자아내고 해석에 끌어들이는 기법을 사용한다.
이미지를 모호하게 열거하거나 무엇을 광고하는지 잘 알지 못할 정도로 파편화한 것도 있다. 즉 객관적이고 합리성을 바탕으로 한 서술 구조를 해체하고 열린 메시지를 소비자의 해석에 맡기는 방식이다.
또한 물건의 용도나 품질을 선전하기 보다 분위기를 조성해 구매 충동을 일으키는 감성적 광고도 있고, 제품과는 관계없는 모델을 등장시키기도 하고 성역 없이 모든 것을 활용하는 것도 포스트모던의 경향을 가진다.27)
이러한 문화 사회적인 흐름과 함께 현대설교학에서도 이미지와 감성, 상상력 등을 적극 활용하는 설교 기재들이 논의되고 있지만 계몽주의 이후 형성된 이성과 합리성, 논리의 전달과 논증을 중심으로 한 설교 기재들은 고루하고 비효과적인 방법으로 인식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셋째는 정보화 시대이다. 정보화 시대는 포스트모던 사회의 또 하나의 특징이다. 리요타르는 정보화야 말로 포스트모던 세계의 첫째 조건이라고 했다. 무엇보다도 정보화 시대는 지금까지 사회의 토대역할을 해 온 지식체계와 성격이 완전히 달라지게 한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던적이다.
컴퓨터와 같은 매체의 발달로 인간의 인식체계를 달라지게 했을 뿐만 아니라 지평의 확대가 지성 세계의 틀을 파괴하고 보편가치로 인정되던 기존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달라지게 했다. 정보화는 인간에게 가상 현실을 제공하며 시간과 공간의 틀에 의존하던 근대와는 전혀 다른 개념을 갖게 한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 따르면 “모든 현실은 가상 현실”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개별적이고 작은 세계를 투사하는 헬멧을 쓰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세계를 경험하고 그 속에 몰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가 아니다.
한 사람의 세계는 다른 사람의 세계와 똑같지 않다. 우리는 자신의 현실을 창조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만든 현실을 받아들인다. 가상 현실 기술 프로그램을 만드는 회사처럼 사실상 큰 규모의 비개인적 사회제도들이 그 환상, 즉 우리가 경험하는 소위 객관적 세계를 프로그램화한다.
우리가 환상의 세계에 열광하고 있지만...사실상 우리는 수동적이며 프로그래머들의 손아래 있다.28) 또한 정보화는 다원화를 부추긴다. 리요따르가 주장한 것처럼 정보화는 메타내러티브를 해체하는 것과 관련이 있으며, 다원화의 사회가 되게 한다. 사회를 통일적으로 지배하는 메타내러티브의 불신과 해체는 다원주의 혹은 상대주의로 귀결되게 한다.
이렇게 몇 가지로 정리해 볼 때 포스트모던 상황은 설교 사역에 있어서 본질과 토대를 흔들어놓을 만한 강력한 지진과 같이 와 닿기도 하고, 어떤 점에서는 그 나름대로의 가능성과 새로운 장을 열어주는 문화 상황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기독교의 설교의 형태는 그 형태적인 측면에서 볼 때 계몽주의 이후 합리성에 근거하여 형성되었다. 금속활자의 발명과 함께 다량의 서적들을 출판, 보급할 수 있게 된 이후, 문자시대는 이성주의의 영향을 받아 명제와 논리, 논증(argument)이 주종을 이루는 형태가 되었다.
이러한 형태를 따라 형성된 설교에 대해서 “구텐베르그 겔럭시”(Gutenberg Galaxy)라고 하는 이유는 이것이 지난 서구 사회 설교의 중심을 이루면서 300여 년 동안 지속되어 왔기 때문이다. 인간 이성이 우위를 차지하던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야 하는 설교자들은 그들이 듣는 방식을 중심 메시지 전달의 형식으로 채택한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서는 인간의 이성적인 측면에 호소하는 형식의 설교 형태가 가장 유효한 방법으로 채택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상의 문화 사회적인 경향을 고려해 볼 때, 이러한 특성을 가진 기독교의 설교는 포스트모던 상황에서는 구조상으로 커다란 도전으로 와 닿을 수밖에 없게 된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설교
기독교의 설교는 사회적인 행동(social act)이며, 오늘의 삶의 자리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긴밀하게 사회적인 변화와 관련이 지어질 수밖에 없다. 만약 삶의 자리를 무시한다면 기독교의 설교 사역은 고립될 수밖에 없을 것이며, 그 효과성(effectiveness)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조오지 헌스버거(George Hunsberger)는 ‘복음’(gospel)과 ‘교회’(church), ‘문화’(culture) 사이에 존재하는 “세 축으로 이루어진 관계성의 패턴”에 대해 요긴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는 설명하기를 ‘복음’의 축과 문화와의 축은 회심과 만남의 축이며, ‘문화’와 ‘교회’의 선교적인 대화의 축이고, ‘복음’과 ‘교회’의 축은 상호 호혜적인 축을 형성한다.
‘복음’은 ‘문화’ 안에서 “도전적인 관련성”을 가지며, 교회와는 “해석학적 궤도”를 가진다. 반면 문화는 복음과 관련하여서 급진적인 불연속성을 취하며, 교회에 대해서는 급진적인 독립을 추구한다. 또한 교회는 주어진 전통에 고착되는 경향을 가지며, 다양한 문화와는 대화의 자세를 갖는다.29)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회가 세상(문화) 가운데 복음을 증거하는 선교적인 사명을 감당하려 함에 있어서 단순히 복음과의 관계성 속에서 단순히 서지 못한다는 점이다. 오히려 복음이 교회와 문화의 축과 함께 동시적으로 대화하도록 초청하고 있다.
그러므로 삶의 자리로서의 문화와 사회는 효과적인 복음 전달을 위해서는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요소이다. 만약 적절히 고려되지 못할 때 설교 사역은 자연히 무기력해지고 둔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교자가 성경본문으로부터 어떻게 설교를 작성하느냐는 교회가 그 시대의 문화에 대한 관계와 관련하여 전적으로 교회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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