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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좋아해야 한다/ 믿음의 플라시보 효과? / 자살에 대하여
2003-08-09 08:59:39   read : 37509

사람을 좋아해야 한다 (딤전 3:2c)


조병수 교수/합신 신약신학


목회를 하면서 내게 가장 힘이 부쳤던 것은 주간 중에 쉴 새 없이 규칙적으
로 밀려오는 설교가 아니었다. 갑자기 병원에 입원한 교우를 심방하기 위하
여 새벽기도회를 마치자마자 부리나케 차를 몰기 시작해서 아침 성경공부,
오후 늦게까지 심방, 저녁기도회 그리고 자정을 훨씬 넘긴 야밤 강의준비로
하루종일 수많은 일에 시달리다가 그냥 넥타이를 맨 채 쓰러지는 것도 그렇
게 두려운 일은 아니었다. 가족과 함께 하는 즐거운 자리를 만들지 못한다거
나 여행할 여유가 없는 것, 무슨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에 참석하거나 하다 못
해 남이 다 보는 영화 한 편 제대로 감상하지 못하는 것 이 따위들은 그렇게
괴로운 일들이 아니었다.

목회하는 동안 정말로 내게 가장 힘들었던 것은 사람을 좋아하기 위하여 많
은 연습을 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성격이 까다로운 사람, 따지기를 좋아하
는 사람,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는 사람, 사소한 것에도 시비를 거는 사람,
잘 양보하지 않는 사람, 쏘아대는 말을 잘하는 사람, 제 맘에 들지 않으면
성을 내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주위에 어찌나 많은지 사람을 좋아하기 위하
여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야만 했다. 불쑥 찾아온 생면부지의 나그네를 맞이
할 때처럼 불편한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대하거나 전혀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을 가르칠 때처럼 긴장된 마음으로 만나야할 사람들이 적지 않
았던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이유 때문에 사도 바울은 느닷없이 교회의 지도자
가 되기를 희망하는 사람이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해야 한다고 부
연하였던 것임에 틀림없다. 나그네를 대접한다는 것은 친숙하지 않은 사람에
게도 편안한 마음으로 호의를 베풀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닌가? 가르치기를
잘 해야 한다는 것은 마이동풍 격으로 귀를 막고 있는 사람에게도 인내를 가
지고 사랑을 주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목회자는 여행하는 길에
잠시 스쳐 지나가는 잘 모르는 나그네에게도 반갑게 관용을 베풀어야 하며,
깨우치기를 거절하는 완악한 사람 뿐 아니라 들어도 금새 잊어버리는 미련한
사람에게도 싫어하는 기색이 없이 기꺼이 가르쳐야 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교회의 지도자는 사람을 좋아해야 한다.

사실상 나그네를 접대하는 것과 가르치기를 잘 하는 것은 초대교회에서 매
우 중요한 주제였다. 나그네 접대는 떠돌이를 맞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서 방랑선교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신자들이 신경을 써야할 일이었다. 나그
네 접대는 천사를 대접하는 것과 같은 일이라 (히 13:2) 천국을 상속받는 영
광을 보장하기도 하지만 (마 25:35) 잘못하면 교회가 산산조각으로 깨어지
는 불상사를 가져오기도 한다 (요삼 5-10). 잘 가르치는 것은 이미 예수 그
리스도께서 모범을 보이신 일이라 (마 4:23) 사도들을 비롯하여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전심전력으로 참여하였다 (행 5:42). 가르치는 일은 심지어 성령
의 은사로 이해되었다 (롬 12:7). 가르치는 일이 중요했던 이유는 참된 교
사는 교회를 견고하게 세우지만 (행 13:1이하) 거짓 교사는 교회를 엉망으
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벧후 2:1이하).

그런데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과 가르치기를 잘하는 것은 사람을 좋아해야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사람을 좋아하는 이가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기를 희
망하는 이에게 느닷없이 이런 사항들을 요구하는 것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을 가진 자는 아예 처음부터 이런 희망을 포기하는 것이 낫다는 의미일
것이다. 가난한 사람이건 부유한 사람이건, 건강한 사람이건 병약한 사람이
건, 높은 사람이건 낮은 사람이건, 유식한 사람이건 무식한 사람이건 간에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목회자는 자타에 손해를 입히고 말 것이기 때문이
다.

사람을 좋아해서 받아들이기도 잘하고 내주기도 잘하는 것이 목회의 요령이
다. 내가 진작 이것을 깨달았더라면 목회가 크게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하
지만 사람을 좋아하는 일은 아직도 연습해야 할 것이기 때문에 후회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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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플라시보 효과?

성주진 교수/ 합신 구약신학


가짜 약도 환자가 믿고 복용하면 효과를 보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보
통 '플라시보(위약) 효과'라고 불리는 이 현상을 긍정적으로 해석하자면, 약
의 의학적 성분이나 객관적으로 입증된 효능 외에 환자의 심리적인 상태가 질
병의 치료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는 말일 것입니다. 물론 부정적인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 의학개념이 기독교 신앙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이
믿는 내용이 성경이 계시하는 진리가 아닐지라도 진지하게 믿기만 하면 나름
대로 '효과'를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믿음의 역사는 우리가 믿는 진리의 내
용보다는 우리가 믿는 믿음의 크기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만일 그렇다
면 기독교 신앙에도 일종의 플라시보 효과가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종교의 주관성을 강조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어떤 사람의 믿는 바가 진리
가 아니라 할지라도 진정으로 믿기만 하면 '효험'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들에게 중요한 것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크기입니다. 어떤 대상을
믿든 그 대상을 지성으로 섬기기만 하면 된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돌이나 나
무 앞에서 복을 빌더라도 전심으로 믿기만 하면 효과를 본다는 주장을 펴기
도 합니다. 가히 무속신앙의 수준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해할 수 있는 일화가 야곱의 이야기 가운데 두 번 나타납니
다. 한 번은 합환채의 경우입니다. 야곱의 아내 레아가 아들을 잉태하게 된
것을 합환채의 효험 때문이라고, 혹은 합환채 자체는 효험이 없을지라도 레
아가 그 효험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야곱이 버드나무
와 살구나무와 선풍나무를 사용하여 자기가 원하는 무늬의 새끼를 낳게 된 것
도 유감주술적인 효과 또는 이에 대한 야곱의 믿음 때문이라고 잘못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두 사람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것이지 그
들의 잘못 때문에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믿음과 신념의 차이입니다. 신념은 자기 주관을 자기 방식으로 밀
고 나가는 것인 반면, 믿음은 계시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신뢰하는 것
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아무리 진지하다고 하더라도 그 믿는 대상이 잘못되
었으면 그것은 잘못된 신념일 뿐입니다. 신앙의 대상이 잘못되었다면 그 믿
음은 진지한 만큼 잘못된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인식의 주관성과 한계를 겸손하게 인정할 필요가 있습
니다. 얼마 전 영국 스코틀란드에 위치한 네스호에는 네시가 없다는 것이 거
듭 확인되었습니다. 그동안 이 호수에 산다는 괴물에 대한 목격담이 많이 있
었습니다. 그 중에는 관광홍보차원에서 지어낸 것들도 있었지만, 경건한 사
람들의 목격담도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는 인간이 아무리 진실하다 하더
라도 믿고자 하는 것을 믿으며, 보고자 하는 것을 보려는 경향이 있음을 보
여줍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거나 성경을 읽을 때에도 내가 믿고자 하는 것을
믿으며 내가 보고자 하는 것을 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
고 성경이 계시하신 것을 볼 수 있도록 겸손히 성령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
다. 예레미야 시대에 활약했던 거짓선지자들도 나름대로 확신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전하는 평안의 메시지가 실제로 하나님
이 주신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이 거짓 영에 미혹되었다고
밝힘으로써 그들 나름대로의 신념이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의 진실성을 보장하
지 못함을 보여줍니다. 그들의 주관적인 진지함은 마침내 스스로를 망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회개할 기회를 빼앗았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버리고 가짜 진리를 믿는 것은 멸망의 지름길입니다.

우리가 경건의 내용과 믿음의 대상을 늘 성경에 비추어 점검해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과 경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른 대상을 바른 방법
으로 믿는 것이지 얼마나 '쎄게' 믿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제
1계명이 강조하는 믿음의 바른 대상과 방법으로써, 십계명과 주기도문, 그리
고 사도신경의 기초가 됩니다.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시대
에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믿는 내용과 대상이라는 신앙의 첫 단추가 바
로 끼어져 있는지 확인함으로써 주관성의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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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에 대하여

상한 자존심이 자살 동기일까, 세상의 자존심은 헛될 뿐


대그룹 회장이 투신자살을 하였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위치에 올라 선 줄로 알았지만 그에게도 고민과 삶의 고통은 존재한 것이었다. 사람의 마음 속은 끝없는 욕망이 언제나 또아리를 틀고 있으면서 이루어진 꿈 위에 다시 자극을 가하여 더 큰 욕망을 이루도록 독촉하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에 의해 이 세상은 멸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거기에 나 또한 동조하는 일원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남들에게 존경받고 추앙받으면서 살고 싶은 인간이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애를 쓰고 노력하면서 일생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 타인에게 인정받고 사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힘과 권력이 없으면 거의 성립이 되지 되지 않는다. 권세를 발휘하지 못하는 힘과 권력은 종이호랑이밖에 되지 않는다. 사람은 자존심으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티코를 타던 사람이 에쿠스를 타면 기뻐 날뛰지만, 에쿠스를 타던 사람이 티코를 타면 자존심 때문에 도저히 견디지 못해 울그락 불그락 속이 상하는 것이다.

사실 에쿠스를 타던 사람이 티코를 타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남에게 잘보이기 위해 일시적 행동은 할 수 있으나 일상적인 일은 될 수 없다. 바로 이 상태, 즉 자신의 위치가 와르르 무너져 내림을 느끼고 도저히 자존심을 회복할 길 없는 보잘것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인간은 죽음을 생각하고 자살을 결심하는 것이다.

남들에게 조롱받고 천대받는 존재로 전락했다고 느끼는 상태가 되었을 때, 자신의 힘과 권력이 모두 박탈 당하여 타인에게 인정받고 존경받던 자세를 견지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인간은 더 이상 살 가치를 상실하는 것이다.

나는 어릴 때에 무척 기고만장하면서 살았다. 친구들 중에서 가장 잘 나가는(?) 사람으로 자부하며 살았다. 나의 말 한 마디에 모두가 복종하는 상태를 보며 내 어깨는 언제나 당당하였었다.

그런데 어느날 나는 내가 우습게 여기고 하찮게 여기던 친구들에게 집단 린치를 당했다. 친구이면서도 막무가내로 대해도 아무 말도 못하던 친구들이 집단으로 술에 잔뜩 취해 비몽사몽 상태였던 나를 공격한 것이다. 몇 시간을 맞았는지 모른다. 나는 이제는 죽는구나 하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다. 그리고는 깨어나 보니 대학병원 중환자실이었다. 생명이 질긴 탓에 살아있던 것이었다.

그런데 살아있다는 것이 기뻤을까? 결코 아니었다.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이 떠나지를 아니했다. 자존심이 무너진 것이다. 이를 악다물고 복수의 칼날을 갈았지만 실행은 쉽지가 아니했다. 목욕탕에서 그들 중 한 명을 만났다. 내 주머니에는 그를 죽일 수 있는 비수가 있었다. 진땀 나는 갈등이 계속되었다. 주머니 속의 칼을 만지작거리면서 번민은 계속되었다. 그 친구는 창문으로 나를 힐끔힐끔 보면서 불안해 하는 눈치였다. 그가 도망가려는 눈치를 보였다면 나는 그를 난도질 했을 지도 모른다.

그를 죽이고 사형수로 일생을 마쳐야 하나 하는 생각이 교차하면서 내 몸은 부들부들 떨렸다. 더구나 그들 모두를 죽이지 못하고 겨우 단 한 명만을 죽이는 것이 나의 한 풀이를 제대로 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결국은 나는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밖에 나와서도 몇 번을 다시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결국 내 몸은 술집에 들어와 있었다. 술에 취하여 엉엉 울었다. 죽이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었지만, 그들을 모두 몰살시킬 방법이 없다는 것이 나를 절망으로 내몰았다.

몇 년동안 내 머리 속은 복수의 집념만이 가득 했었다. 그러나 나는 결국은 그들을 모두 죽일 수 없으며 내 복수는 실행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자존심을 회복시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자살을 결심하게 되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보란듯이 과시하는 것으로 복수를 해보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것도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이 들었다. 나의 자존심이 상처를 입은 것은 나 스스로도 용서를 못하는 것이었다. 남들의 조롱과 비난이 내 귀에 수근수근 대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은 술에 잔뜩 취하여 두 번의 자살을 시도했다. 그런데 나는 죽지 않았다. 나는 이제 그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이 세상의 삶이 얼마나 욕심 가득한 삶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자각했기 때문이다. 다 부질없는 것이요, 의미를 부여해 보았자 결국은 헛되고 헛된 것임을 알았다. 수많은 벌레들이 내 육신을 다 파먹고 결국엔 한줌 흙으로 돌아갈 육신을 위해 공들이고 노력하는 것이 얼마나 수치스런 일인지 느끼는 것이다. 허무를 위해 땀을 흘리는 일이 얼마나 한심한 인생인가?

정몽헌 회장이 자살을 한 것은 바로 자존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존심을 잃는 일은 남자로서 견디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의미를 두지 않고 사는 인생이라면 자존심은 불필요할 것이다(물론 육의 몸을 가진 자가 모욕과 창피를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자존심은 느끼지만 주님의 은혜 안에서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요, 죄악인지를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허무주의로 살아가라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인생의 값어치는 오직 한 분 주님의 은혜 속에서만이 발현되고 주입된다는 것이다. 세상 것에서 눈길을 제어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주님의 은혜가 임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주님의 은혜가 없다면 인간은 누구나 가룟 유다와 다름없으며, 고 정몽헌 회장처럼 자살적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의 자존심을 완전히 뭉개버린 친구들을 살아 숨쉬다 보니 종종 얼굴을 부딪칠 때가 있다. 적극적으로 내가 다가서 보지만 그들은 나를 기피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아무래도 내가 부담이 되나보다. 세상에 미련을 두는 것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인지를 느끼고 사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산다면 부담없는 교제가 될 수 있으련만...

자존심은 나의 모든 것을 버리고 살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을 내 몸처럼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나보다. 주님의 은혜외에 무엇을 더 바라리요.

사나이라고 자부하던 일본의 무사들이 모욕을 당하면 자결로써 생을 마감하는 것처럼, 남에게 인정받던 자가 그 명예를 잃게되면 수치에 못 이겨 자살을 생각하는 것이다. 사나이에게 자존심을 잃는 것보다 더 큰 모욕은 없다.

그리스도인은 죽음의 끝자락에서 기적적으로 주님의 은혜로 다시 사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 안에서 지켜지는 십자가의 자랑이라는 자존심외에 의미 있는 것이 어디 있으랴?' 하는 고백 속에서 사는 자들이다. 세상에서의 자존심이란 헛되고 헛된 욕망일 뿐임을 깨닫고 살아가는 자들이다.
김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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