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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聖愛 정경옥 목사/신자의 즐거움 김익두목사/
2002-04-13 12:16:15   read : 27107

그리스도의 성애(聖愛) (요일 3:16) ㅁ 정경옥 목사



그리스도의 성애(聖愛)


내가 일생동안에 꼭 한번만 전도할 기회가 온다면, 나는 서슴치 않고 요한 1서 3장 16절을 택하여 말할 것이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아니,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의 사자(使者)가 되어, 일생동안 전도를 계속한다 할찌라도 나의 전도하려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 성구(聖句)를 중심할 것이 확실하다.

이 성구는 두 가지 부분으로 되었으니, 첫째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의 사실에 대한 말씀이요, 둘째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유(赦宥)함을 받은 우리들이, 서로 사랑하여야 할 의무에 대한 말씀이다. 첫째 것은 기독교 신학의 중심이요, 둘째 것은 기독교 윤리의 기초가 된다. <구속(救贖)과 생활> 이 두 가지는, 우리가 소유한 가장 귀한 주창이요, 또 능력이다. 다만 여기서 먼저 주의를 요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은총에 의한 구속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은총에 의한 생활이 나중에 있다는 점이다. 이 순서를 뒤집거나 바르게 가지는 것이, 우리에게 큰 관계가 된다. 구속이 근본이 되고, 생활은 구속의 사실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결과라고 보는 것이, 기독교 사상으로 보아서 정당한 순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정당한 순서가 그리스도의 성애(聖愛)와 일반적인 박애(博愛)와를 구별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Ⅰ. 그러면 먼저 기독교의 중심 과제(課題)가 되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여 보기로 하자.

본문에는 먼저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라고 하였다. 「그가」라고 한 것은 물론 예수를 가리킨 말씀이다. 예수는 하늘로부터 우리를 위하여 내려오신 독생자이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하셨다. 예수의 사실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크고 넓고, 깊으신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는 것을, 우리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알 수 있다. 높은 산, 아름다운 꽃, 어여쁜 새, 참다운 친구, 이러한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다. 그렇다. 세상에는 고악(苦惡)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 주관적인 감응(感應)에 격분(激奮)되지 아니하고, 좀 더 넓게 보자면, 이 세상은 너무나 확실하고, 너무나 믿음직하여서, 여기에 있는 위대한 자애(慈愛)를 의심할 여지가 없다. 세상에는 이 자애(慈愛)가 절대로 요구된다. 절대로 요구되기 때문에, 이는 이 세상에 있고, 또 이 세상을 움직이게 하는 원리(原理)인 생명이 되어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자애(慈愛)의 완전한 계시(啓示)를 보았다. 예수 안에는 진리와 영광이 가득하였다.

예수 당시의 사람들이 그렇게 보았다. 지금은 역사 가운데서 그 진리와 그 영광이 더욱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우리는 인간 생활에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진리와 영광을 보았다. 이 진리, 이 영광을, 우리는 우연한 일이라고 보지 아니한다. 원자(原子)의 합작(合作)에 의한 부산(副産)이라고도 할 수 없다. 이 진리와 영광이 가득찬 예수를 볼 때에,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별을 반짝이게 하고, 꽃이 피게 하며, 사랑을 인하여 가슴이 뛰게 하는 하나님의 자애(慈愛)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가장 완전한 형상으로 계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독생자가 되시는 예수를, 우리의 종교의 중심을 삼는다. 누구든지 부모나, 형제나, 처자나, 돈이나, 지위를, 예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기독교에서는 합당치 아니하다고, 담대히 주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오셨다고 하였다. 예수가 하나님의 독생자인 것이 확실하다면, 「우리」를 먼저 죄인이라고 규정(規定) 지을 수 있는 것도 확실하다. 만일 죄인이 아니라면, 적어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약하고 무지하며 부족한 인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우리를」이라고 한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현실이 대립적 관계 내지(乃至) 심하여서는 충돌(衝突)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암시한다.

「그」와 「우리」는 간단(間斷)없이 충돌되고 있다. 그리고 성절상으로 대립되어 있다. 실로 우리는 죄인이다. 사람은 선을 행하여 보려고 한다. 좋은 사람이 되려고도 노력한다. 그러나 사람은 여전히 죄인이다. 이러한 깨끗한 노력 자체가, 오히려 자기를 죄인된 의식(意識)에 더욱 깊이 들어가게 하고야 만다. 사람 중 참으로 의인이 있는가? 사람이 참으로 선을 행할 수 있는가? 나중에는 이러한 것까지도 의심하게 된다. 바울도 이것을 느꼈고, 루터도 이것을 깨달았으며, 다른 성자(聖子)들도 다 여기에 이르렀다. 실로 우리가 성자라고 부르는 것은, 자기가 할 수 없는 죄인인 것을 더욱 심각하게 깨달은 사람을 지칭(指稱)하는 말에 지나지 아니한다. 사람은 이렇게 자기가 죄인인 것을 의식할 때에, 인간으로서의 위기에 절박(切迫)한 것을 깨닫게 된다. 죄인이 아니어야할 자기가 죄인일 수 밖에 없는 궁경(窮境)에서 고민을 느끼는 일이 이것이다. 「그가 우리를」이라는, 이 영원한 대립을 극복하는 방법은 「생명을 버리셨다」는 것이었다. 물론 예수께서 생명을 버리셨다는 것을, 순전히 방법으로만 생각하기 어려운 점도 없지 아니하다. 그러나 예수께서 생명을 버리심으로 말미암아 「그」와 「우리」와의 대립 내지 충돌의 관계가 화해될 수 있는 처지에 이르렀다. 이는 신(神)의 은총과 죄악된 인간과의 정당한 관계를 회복하게 하는 최고 사실이었다. 이는 자기의 생명을 던져서 다른 생명을 이해하고, 마음을 주어서 다른 마음을 얻는다는 원칙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하였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2-24)」고, 예수의 십자가는 생(生)의 현실(現實)에 근거하여, 생명으로 생명을 제도(濟度)하는 방법이다. 내가 죄인으로 규정되어 있을 때, 그리고 이 규정이 나를 절박된 의식 가운데로 몰아 넣었을 때,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생명을 버리셨다는 것이다. 「생명을 버리셨다」는 것보다 「던지셨다」는 것이 더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예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6-9)」고 하였다. 이와 같이 자기의 귀한 몸을 아끼지 아니하고, 이 생명 전체를 그대로 우리를 위해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이 생명의 제공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그 생명의 제공이 고통과 사망을 자취하는 일이 될 때에 더욱 그러하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수치와 고통을 자진하여 받으셨다. 이렇게 사망을 무릎 쓰신 것은, 곧 우리의 생명을 얻기 위함이다. 우리는 예수와 같이 자기를 잊어버리고, 인류를 사랑한 사람을 별로 보지 못하였다. 그렇게 가식이 없는 순결한 형상(形象)을 보지 못하였다. 그렇게 도량(度量)과 선견(先見)이 큰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그의 사랑, 그의 순결, 그의 이상(理想)이 모두 우리는 건져내려고 하는, 한 가지 일에 중심하여 있었다.

기독교의 신앙은 두말할 것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자기의 가장 좋은 것을 주시고, 또 자기를 잊고, 자기의 생명이 어떠한 고통일찌라도 상대(相對)를 대하여서 쓰여 지기를 원하는 마음을 이해하고, 여기에 감격하는데 기초하여 있는 것이다. 오, 주님이여! 우리로 하여금 주님안에 나타난 그 사랑의 넓이와 깊이를 이해하게 하소서. 주님의 사랑에 너무나 둔감이 되지 않게 하소서. 감히 주님의 사랑을 입을 수 있게 하소서. 나로 하여금 주님의 사랑을 노래하게 하시고, 주님의 사랑을 널리 전파할 수 있게 하소서.

Ⅱ. 둘째로 기독교인의 생활은,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의뢰하여, 그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얻은 이 사랑이, 너무나 고마워서 자기의 몸이 자기의 몸이 아니요, 예수의 사랑으로 사신 몸인 것을 깨닫고, 형제를 위하여 감히 생명을 버리는 것이다. ,

기독교의 사랑은 이렇게 구속애(救贖愛)에 근원하였고, 또 이 구속에서 파생(派生)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는, 참된 기독교의 형제애를 이해할 수 없다. 이 의미에 있어서 기독교의 형제애는 통속(通俗)으로 말하는 박애 사상과는 같은 것이 아니다. 전자(前者)는 고난을 통하여 죄인되었던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한 결과요, 후자(後者)는 사회적 이상주의(理想主義)에 의한 도덕적 의무이다. 전자는 종교적인 사랑이요, 후자는 윤리적인 사랑이다. 종교적인 사랑이란 말은, 은총에 의한 사랑이란 말이다.

이 시대는 참된 사랑을 구하고 있다. 모두가 사랑에 주려 있다. 상점에도, 거리에도, 학교에도, 공장에도, 사랑이 없다. 응당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밖에 없는 교회에도, 어느 때는 있어야 할 사랑이 없는 때가 있다. 나는 가가와 도요히꼬 씨가 빈민굴에 들어가서 왜 일할 생각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그 동기를 간증하는 말을 들었다. 세계적으로 위대한 인물인 그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어머니의 사랑이 그리웠으며, 아버지의 사랑이 받고 싶어서, 날마다 눈물로 지내다가 기독교적 사랑에 감격하여, 이 사랑을 자기와 같이 불쌍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 분기하였다고 하는 말을 듣고 참으로 놀랬다.

이 세상은 사랑을 구하고 있다. 자기를 동정하고, 이해하여 주는 사랑,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생명을 나누어 주는 사랑, 이러한 사랑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기독교적 생활의 전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혹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말할 때에, 그릇된 판단을 지을른지도 모른다. 혹 우리의 아는 것이 천박하고, 모자랄 수도 있다. 혹은 우리의 성격이나 행실이 완전치 못하기도 하다. 혹 큰 죄를 저질를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하나님께서 어디까지나 용서하실 줄 믿는다. 우리에게 언제나 떠나서는 아니될 것은, 사랑이다. 네게 참된 사랑이 있느냐, 그것으로 족하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나니라」고 하였다.

그러면 우리의 사랑은 어떠한 사랑이라야 할까? 물론 예수의 사랑을 닮아야 할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예수의 사랑은 어떠한 사랑이었던가? 나는 최근에 이르러 예수의 사랑에 대한 두 가지 주요한 득점(得點)에 대하여 더욱더 심각한 깨달음을 갖게 되었다. 첫째는 우리의 사랑을 요구하는 대상(對象)의 발견이다. 예수께서는 추상적으로 광막(廣漠)하게 인류를 사랑한다거나, 동족을 사랑한다든가 하는 개념적(槪念的)인 대상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어떠한 구체적인 대상을 구하였다. 우리는 인류를 한꺼번에 사랑한다고 말하기는 쉬우나, 한 사람을 사랑하기는 어렵다. 더욱이 그 한 사람이 나를 대적하고, 나를 이유없이 괴롭게 할 때에, 그 한 사람을 사랑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우리의 사랑은 결코 개념에 그쳐서는 안된다. 내가 생명을 쏟아서, 나를 버리고, 사랑할만한, 구체적인 대상을 발견하지 아니하면 안된다. 그런데 그 구체적인 대상은 예수의 방법에 의하면, 그 사회에서 제일 뒤떨어지고, 천대를 당하며, 비참한 생활을 하는 사람을 찾은 것이었다. 예수께서 사랑을 주려고 하신 대상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이었다. 그는 말씀하였다. 「성한 사람은 의사가 소용이 없고 병든 사람이라야 의원을 요구한다」고. 예수님은 한번은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의 글을 읽으시고, 그 때 사람을 놀라게 한 일이 있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케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기독교적인 사랑의 기교(奇巧)라고 생각한다. 즉 우리는 우리가 처하여 있는 사회에서 제일 불쌍하고, 제일 타락한 계단을 발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현존한 세계 3대 종교적 위인을, 일본의 기가와 도요히꼬 씨, 인도(印度)의 간디(Gandhi, Mahatma), 유럽의 슈바이처라고 한다면, 그들은 모두가 그리스도 애(愛)의 기교를 배운 사람들이다. 가가와씨는 빈민굴, 간디는 천민계급(賤民階級), 슈바이쳐는 야만족, 이렇게 「잃어버린 양」을 발견한 것이었다. 둘째로 예수의 사랑은 「자발적 수난(自發的受難)」의 사랑이었다. 예수는 우리의 병을 짊어지시고, 우리의 약한 것을 담당하셨다고 하였다. 세상은 평안을 구했으나, 그는 홀로 눈물지었고, 향락의 거리는 주연(酒宴)에 잠겼으나, 그는 홀로 굶주리셨다. 이는 우리 약한 것을 짊어지시려 함이었다.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도다」 목숨을 버리는 일, 자아(自我)를 방기(放棄)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이란 언제든지 한번은 자아를 방기할 수 밖에 없는 시기가 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의식적으로 자아(自我)를 버리는 일, 사선(死線)을 넘는 일을 감히 하기는 어렵다. 「나」라는 이것이, 「나」를 위하여 있는 「나」가 아니라, 전부가 남을 위하여서 있는 「나」라는 실감이 될 때에만, 참된 자아(自我)의 방기가 가능하다. 이는 누가 말한바와 같이 인생 최대의 전략적 퇴각(戰略的退却)으로써, 여기에 있어서만, 사람은 자아(自我)의 최고 형상(最高形象)을 찾을 수 있다. 더욱이 이 자아의 방기가 자기를 잊어버리고 되는대로 내어 맡기는 일이 아니요, 오히려 고통과 고독과 고난을 가져오는 일일 때에, 인간적 외축(畏縮)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사랑이란 다른 사람의 고난을 대신하여, 자취(自取)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이야말로, 구속의 종교를 구성하는 원칙이 될 뿐 아니라, 넓은 의미에 있어서 인간적 생명의 원칙이 된다고 할 것이다.

「누구든지 생명을 얻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생명을 잃어버리는 사람은 장치 찾을 것이다」. 우리는 곤고가 많은 사회에 태어났다. 우리의 심정이 비뚤어지지 아니했다면, 우리는 인생의 곤고가 참으로 무엇이며, 어떠한 것인지를 알아야만 할 처지에 있는 것이다. 보라! 얼마나 많은 무리가 헐벗고, 배고파서 애달파하고 있는가? 얼마나 많은 무리가 병들고, 고통하며, 의약(醫藥) 없는 격지(隔地)에서 신음하고 있는가? 의지할 곳 없는 어린 아이들이 길가에서 방황하고 있지 아니한가? 마음의 눈이 멀고, 귀가 막힌 무리들이 갈길 몰라 울고 있지 아니한가? 하루 종일토록 일자리를 찾으나, 얻지 못하고, 시름없이 돌아가고 있지 아니한가? 이 백성은 아직도 기독교인이 지불하여야 할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 이 희생은 결코 상사로운 희생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 자기를 잊어버리고, 이 백성을 위하여 곤고를 짊어져야 할 사람이 기다려진다. 주여! 우리에게 민중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그들의 요구를 읽을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몸을 던져서 고통을 자취(自取)할 수 있게 하소서. 감히 주님의 십자가를 그 만분의 하나라도 본 받을 수 있게 하소서.

정경옥(鄭景玉 : 전 협성 신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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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의 즐거움 (빌 4:4) ㅁ 김익두



신자의 즐거움


동양 성현의 말씀에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고 했으니, 위로 하나님을 섬겨 두려워 아니하고, 아래로 사람에게 부끄러움 없음이 첫째 즐거움이요, 부모와 형제가 구비(具備)하여 있음이 다른 하나의 즐거움이요, 천하의 영재(英才)를 많이 교양하는 것이 또 다른 하나의 즐거움이라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믿는 자에게는, 믿지 않는 자가 깨닫지 못하는 즐거움이 여덟가지가 있다.

첫째는 감응의 낙(感應之樂)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이시는 즐거움이다. 어느 나라 백성이든지, 그 백성이 임금에게 상소하여, 그 상소에 응답해 주시면, 그 백성의 즐거움은 비할 수 없을 것이다. 하물며 천지의 대주재가 되신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사 응답해 주시면, 그 즐거움이야 무엇으로 비교할 수 있겠는가? 옛날에 어떤 임금이 7년 동안 비가 오지 않으므로, 자기를 낮추어 하나님께 잘못된 것을 자복하고 구했다. 이에 응답 있어서 비가 나려올 때, 그 임금은 비 오는 것보다도 자기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는 것을 얼마나 즐거워 했겠는가! 임금으로서 자기의 기도 들어 주신 것을 즐거워 했다면, 하물며 우리들의 기도를 믿는다는 그것으로 들어 주실 때에 그 즐거움을 다 말할 수 있으랴! 이엣 더 크고, 영광스럽고, 즐거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실로 이것은 신자의 가장 즐거워할 일이요, 권위가 되는 일이다. 성경을 보면, 히스기야 왕이 성전에서 밤이 맞도록 눈물을 흘리며 기도한 결과, 앗수르 대왕의 수모를 면했을 뿐 아니라, 변하여 즐거움이 되었으니, 이는 감응의 즐거움이다. 모르드개와 에스더도 기도하여 하만의 화를 면하고, 슬픔이 되려 즐거움이 되었으며, 근심이 변하여 즐거움이 되었으니, 이것도 감응의 즐거움이다. 우리도 어려운 일 당할 때에 기도함으로써 어려운 일이 변하여 즐거움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둘째는 도미(道味)의 즐거움이다.
유치한 교인은 성경의 맛을 몰라, 권면에 이기지 못하여 몇장 보는 것도 무슨 말인지 모르고 보지만, 성경의 그 보는 이치를 성령의 감화로 깨달을 때에, 그 말씀은 꿀송이보다 더 달고, 정금보다 더 귀한 것이다(시 19편). 실로 우리에게 영화를 받게 하고, 윤택하게 하며, 힘을 주시고, 장성케 하며, 영생케 하는 것이 곧 이 성경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성경을 알게 되면, 하나님의 경륜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게 되며, 하나님의 지혜를 배우게 된다. 이것이 곧 성경이다. 사람들은 지혜가 높고 학문이 높은 사람에게서 그 말하는 바를 듣고자 한다. 들을 때에 유쾌함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물며 지혜가 우주에 충만하고, 무소부지하신 하나님의 교훈이 어찌 인간의 즐거움을 이루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성경에 취미를 붙이지 못한 이는 맛이 없다고 한다. 이것은 비컨대 앓고 있을 때는, 단 꿀이 입에 쓴 것과도 같다. 그 꿀이 쓴 것이 아니라, 입맛이 없는 연고이다. 이와 같이 성경 말씀 자체가 재미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믿음이 병들어서 재미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재미가 없다는 사람은 반성하여, 다시 도미(渡美)의 맛을 얻기 바란다.

셋째는 극기(克己)의 낙이다.
혹은 풍금을 치며 즐겁다 하고, 혹은 아름다운 여자를 즐겁다 하며, 혹은 이기고 즐겁다 하지만, 오직 신자는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원수를 이기는 즐거움이 가장 큰 즐거움인 것이다. 원수가 무엇인가? 곧 교만이다. 이 교만은 자기를 지옥으로 이끌고 뭇 사람에게 미움을 받게 하는 것이다. 교만으로 사람을 업수히 여기면, 업수히 여기는 대로 몇배를 거둘 것은, 그것을 심었기 때문이다. 이 교만을 이기고 겸손한 자리에 앉게 되면 나보다 나은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배워 지혜있는 자가 되고, 나보다 못한 자에 대하여는 불쌍히 여기며, 위로하고, 도와주게 되니, 하나님 앞에 가도 설만하며, 뭇 사람에게도 대접을 받을만한 것을 이루었으므로,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또 자기에게 있는 음욕을 이기는 즐거움이 있다. 뭇 사람이 음란한 바다에 빠져서 눈은 여자로 더불어 노는 것으로 범죄하고, 귀는 더러운 소리를 듣는 것으로 영혼을 더럽게 하며, 정신과 마음과 생각과 뜻이 음란한 일에 빠져 쉬지 않고 죄를 짓는 것이, 마치 구더기가 더러운 속에서 춤추며 즐거워 하는 것과 같이 행동하는데, 이 일을 분토같이 여기고, 그들을 불쌍히 여겨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면, 비록 땅에서 먹고 입지만, 이는 하나님 나라에 있는 천사와 같이 거룩한 삶이며, 할렐루야 찬송할 즐거움인 것이다.

넷째는 교인을 양성하는 즐거움이다.
신자가 다른 사람을 주께로 인도하고, 가르치는 것이 사람 보기에는 쉽고 아무 재미가 없는 것 같으나, 그 중에는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비유하면, 부인이 애기를 많이 나서 기르는 수고가 많으나, 그 즐거움은 날로 더하여, 그 어린이의 자라는 것을 볼 때, 수고를 모두 잊어버리는 것이다. 남을 인도하는 자도 그 교인이 어린이의 상태에서 변하여, 장성하여 가는 것을 볼 때, 그 재미는 자녀를 키우는 부인의 즐거움과 같은 것이다. 얼마전에 찬미를 못하던 교인이 찬미를 하게 되는 것을 볼 때, 기도를 못하던 교인이 기도하게 되는 때, 성경으로 남을 가르치게도 되고, 직분이 무엇인지 모르던 교인이, 믿어 중한 직분을 받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볼 때,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즐거움은, 가히 비할 것 없이 큰 것이다.

다섯째는 환난 안위의 낙(患難安慰之樂)이다.
신자가 주를 위하여 환난을 받게 될 때에, 사람들은 보고 환난을 받는 줄 아나, 신자는 그 중에서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즐거움을 맛보는 것이다. 바울이 옥에 갇혔을 때에 즐거워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다른 죄인들은 죄를 인하여 갇혔지만, 자기는 주의 도리를 위하여 갇혔으므로, 그 욕이 도리어 상이 될 것을 즐거워 했으며, 그 고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낳아 소망이 부끄럽지 아니할 것을 즐거워 했으며, 그 고난으로 복음이 더욱 증거됨을 인하여 즐거워 했으며, 그 고난으로 인하여 남이 고난 당할 때에 속히 위로할 만한 자가 될 것이므로 즐거워 했던 것이다. 우리도 환난 중에 즐거움이 있음을 깨달을 것이다.

여섯째, 영생의 낙(永生之樂)이다.
사람들이 가장 슬퍼하며,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다. 이 죽음은, 죽은 후에는 영영 없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두려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믿는 자는 요한복음 3장 16일의 말씀을 믿고, 믿음으로 세상을 떠나면, 이 세상보다 억만배나 나은 영생이 있음을 알아 즐거워 하는 것이다. 이 영생은 이 몸을 벗은 후에, 영혼 곧 속사람, 다시 말하면 정신과 마음과 생각과 뜻과 성품이, 이 몸을 벗어나서 하나님 계신 곳에 가서, 괴로움 없이 평안함이요, 슬픔이 없이 즐거워하는 것이며, 욕 없고, 영화가 있으며, 병 없고, 건강하며, 죽음이 없고, 영영사는 것이다. 또 밤이 없고, 낮 뿐이며, 원수가 없고, 사랑만 있는 곳에서 무궁토록 그 영화를 누리는 것으로, 이 어찌 즐겁다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신자는, 죽는 것을 마치 배를 타고 먼 바다를 건너가, 고향에 내리는 것 같이 생각하는 것으로, 즐거움인 것이다.

일곱째, 주님과 동행하는 낙(與主同行之樂)이다.
천한 사람이 귀한 사람과 같이 있는 것을 즐겁다 하며, 어진 친구를 만나 같이 있는 것을 즐겁다 한다면, 신자가 하나님의 아들과 같이 있게 되는 즐거움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다니엘이 사자굴에 갇혔을찌라도, 주께서 사자의 입을 봉하여 해롭게 못한 때, 비록 사자굴에 있었지만, 그 즐거움은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니엘의 친구 세 사람이 비록 불 화로 가운데 던진바 되었을찌라도, 주님이 같이 하셔서, 불이 그들을 해하지 못할 때, 그 즐거움은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요한이 밧모섬에 정배 갔을찌라도, 주께서 같이 하시고, 계시(啓示)를 보여주시는 때, 그 즐거움은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어떠한 때를 물론하고, 주님께서 같이 하셔서, 혹 암시(暗示)로 성경의 교묘한 이치를 알게도 하시고, 말할 수 없는 깊은 이치를 보여주시기도 하시며, 강론할 좋은 제목을 알려 주시기도 하고, 실수할 것을 붙들어 실수 못하게도 하시며, 잘못하면 통회하는 마음도 주시고, 우리 소망되는 하늘 나라를 보여 알게도 하시는 때, 그 즐거움이야말로 어떠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주와 같이 하면, 무엇이 두려우며, 무엇이 부족하겠는가? 신자에게는 이에서 더한 즐거움이 없는 것이다

여덟째는 만물을 관찰하는 낙(萬物觀察之樂)이다.
사람들이 만물을 볼 때에, 꽃이나 초목이 무성하고 만발할 때에, 그 나타나는 빛을 보고 좋다고 하지만은, 그 보다도 더 오묘 막칙한 것은 모든 꽃이 땅에 올라오는 것으로, 각각 그 유를 따라 빛이 다르며, 나무는 각각 유를 따라 별스럽게 된 것과, 모든 실과는 그 유를 따라 각각 맛이 다른 것이다. 짐승은 그 유를 따라 모양이 다르며, 바다에서 물을 끓어 올려 구름을 제작하고, 비를 주시는데 폭포와 같이 하지 않으시고, 방울 방울이 내려 초목에 해(害) 주는 일 없이, 유익하도록 한 것이며, 추운 때는 얼음장으로 내리지 않고 백화모양의 눈을 내려 상치 않도록 하심이다. 또 일월 성신을 궤도를 따라 운행하시며, 인생에게 가장 특별한 지혜를 주시어 만물의 영장이 되도록 하신 것으로, 이것이 어디서 온 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무미하게 보지만, 오직 신자는 대주재 되시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주장이심을 깨닫는 동시에, 물건마다 볼 때에 찬송치 아니할 것이 없고, 그 지혜와 공의와 능력과 절제를 배우지 않을 것이 없으며, 감사함이 심중에 솟아나는 즐거움이 가득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즐거움은 수고가 지나간 후에 오는 즐거움이다.
기도하는 수고가 없이는 응답의 즐거움이 없을 것이고, 성경을 상고하는 수고 없이는, 도미는 낙이 없을 것이고, 자기를 이기려고 하나님 앞에 직고하는 수고가 없이는 극기의 낙이 없을 것이고, 순복하는 수고가 없이는 동행의 낙이 없을 것이고, 주를 위하여 핍박 받는 수고가 없이는 환난 안위의 낙이 없을 것이고, 성령의 감동시키심을 따라 수고함이 없이는 영생하는 즐거움을 깨닫지 못할 것이고, 만물을 연구하는 수고 없이는, 관할의 낙도 없을 것이다. 이 즐거움을 보고자 할진대 수고를 아끼지 말고, 다 이 즐거움으로 지내시기를 바란다.

기도는 신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위로 받는 기관이다. 동정하는 기관이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관이다. 교제가 끊어지면 좋은 사람이다.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지면 죽은 사람이다. 전등이 전기줄과 교제가 끊어지면 캄캄해진다. 기도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관이다. - 김익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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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신(謹愼) (행 20:27-35) ㅁ 김익두



근신(謹愼)


날센 칼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총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나(自己)라는 것이 무서운 존재다. 우리는 나를 조심해야 되겠다. 나(自己)라는 것 가운데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다.

먼저 우리는 속 사람을 조심해야 되겠다.
자! 우리 한번 생각해 보자. 나의 속 사람이 남에게 해를 끼치기 쉬운가, 유익을 끼치기 쉬운가를. 우리 속 사람은 처음에는 거룩하게 지은 바 되었으나, 죄를 지은 후에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성경에 「만물보다 약하다」한 것은 과연 합당한 말이다. 사람은 첫째 교만하기 쉽다. 돈이 많거나, 지식이 많거나, 권세가 있으면 교만하기 쉽다. 그러므로 교만을 조심해야 되겠다. 그 다음에는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나기 쉽다. 사랑하는 것은 오래오래 알아보고, 지내보고서야 사랑하게 되지만, 미워하는 마음은 잠시 동안에 일어나기 쉽다. 그 다음에는 사람은 시기하기 쉽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좀 낳으면, 찬성하며 받들어 섬기기는 어렵지만, 시기하기는 쉽다. 그러므로 교만한 마음, 미워하는 마음, 시기하는 마음을 조심해야 되겠다. 성경 말씀에도 「입을 먹는 것은 사람을 해롭게 하지 못하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사람을 해롭게 하기 쉽다」고 하셨다. 자기를 조심 못하고 되는 대로 하는 사람은 대단히 위태하고, 소망 없는 사람이다. 나도 구원하고, 남도 구원하려면, 속 사람을 조심하여야 될 것이다.

사람은 또 겉 사람을 조심해야 되겠다.
옛날 다윗왕은 눈을 잘못 굴리다가 큰 죄를 지었다. 그러므로 눈을 조심해야 되겠다. 귀도 조심해야 되겠다. 귀가 유익한 것이지만, 잘못 들으면 크게 위태하다. 함부로 듣고, 듣는대로 전하면, 또한 위태하다. 세상이 다 떠들어도 안 들어야 할 것은 안 듣고, 다 안 듣는대도 들어야 할 것은 들어야 할 것이다. 그 다음에는 발을 조심해야 되겠다. 나는 얼마전에 어떤 상가에 갔다가, 밤중 세시쯤에 돌아오는데, 인력거나 자동차를 몰고 가는 것이라든지, 비틀거리며 가는 신사, 학생들의 모양을 가만히 보니, 꼭 「이것이 소돔 고모라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났다. 오늘날 학생들의 발이 스스로 망치는 길로 가는 길이, 흔히 있는 것은 기막히는 일이다. 또 입을 조심해야 한다. 성경 말씀에 모든 것을 제어하기 어렵지 않으나, 입은 제어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마귀는 말 한 마디, 즉 「아니다. 죽지 아니한다. 그 실과를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도리어 하나님과 같아져 능히 선악을 알줄 하나님이 아심이라」라는 말로, 태평복락(泰平福樂)의 세상을 변하여 질병, 환난, 사망의 세상을 만들어 놓았다. 우리는 자기의 말 한 마디로, 여러 사람을 거리끼게 하지나 아니할까 하는 일을, 극히 조심해야 하겠다. 사람의 독한 혀는 칼을 가진 사람보다 더 위태하다.

다음으로 우리는 뭇 사람을 조심하여야 하겠다.

첫째 동무를 조심해야 하겠다. 사람은 끼리끼리 모이며 사귀는 것인데, 악한 동무를 사귀면 크게 위태하다. 잘 믿는 청년이 악한 친구를 사귀어서 산보를 다니다가 소리를 배우고, 담배를 배우고, 요리집에 출입하여 술을 배워 그만 타락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처음에는 그럴 수가 없다고 거절한다. 그러나 악한 친구가 여러번 꾀이고, 강권하면 그만 따라가게 된다. 그러다가 한번 사람들에게 들킨 다음에는 「이왕 다 알았으니 되는대로 하자」하고, 그 다음에 막 나가는 것이다.

다음에는 거짓 스승을 삼가야 하겠다.
영어를 알고, 헬라어, 라틴어를 아는 사람 중,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 아니라고 부인하는 이가 있다. 그런 사람을 조심해야 되겠다. 어제 목사요, 장로이던 사람이 오늘 술을 먹고 계집질을 하니, 거짓 스승이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선 사람이니, 어찌 항상 조심하지 않을 수 있는가? 예수 믿는 사람은, 혼자 있을 때 조심하고, 밤에 조심해야 한다. 감옥에 가는 사람, 지옥에 가는 사람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조심하지 못한 까닭이다. 서양 속담에 한푼동안에 잃어버린 명예를, 백년 걸려도 회복하기 어렵다고 한 말은, 과연 옳은 말이다. 그릇을 한번 깨뜨려 놓은 다음에는 다시 붙이기는 어렵다. 한번 실수하여 죄를 범한 다음에는 회복하기란 실로 어려운 것이다. 십년을 믿고, 20년, 30년을 믿다가도 한번 죄를 지으면, 그만 결단이다. 사람마다 불을 조심하고, 도적을 조심할 생각은 하나, 자기 자신을 조심할 생각은 아니한다. 위험한 것은 나(自己, 自身)이다. 깊이 조심하자.

김익두(金益斗 : 장로교 부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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