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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한 설교
    2003-06-09 03:10:50   read : 4509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스코틀랜드 태생인 재임스 스튜아트 (James Stuart Stewart, 1986~?)는 1960년 공식적으로 은퇴하기까지 목회자와 교수와 강사로 봉사했다. 그의 설교는 복음적인 강조점과 윤리적인 강조점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그의 설교집이 여러권으로 출간되었으나. 설교에 가장 의미있는 공헌을 한 설교집은 [하나님의 전령들 (Heralds of God)] 이다. 그 책에 에딘버러대학에서 그가 행한 와락강좌 (Warrack Lectures)가 수록되었다. 여기에 소개되는 내용은 “설교자의 세계 (The preachers World)"라는 제목이 붙은 첫번째 강좌에서 뽑은 것이다. 거기에서 스튜아트의 설교 철학이 다루어졌다.

    다른 강좌의 제목들은 “설교자의 주제”. “설교자의 연구”. “설교자의 기술”. “설교자의 내면생활”등이다. 앞으로 이 난에서 “설교자의 기술(테크닉)”에 대한 강좌 일부를 소개할 예정이며 이 강좌에서는 명료한 언어사용 문제를 다루고 있다.

    사람의 본래 마음을 쏘아 반대와 모반감정을 불러 일으키게 하는 많은 말을 하지 않고서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전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서 자기는 하나님께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 주제넘고 기만적이라고 선언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거부감을 불러 일으키는 말이지요.

    아니면 하나님의 부성애 교리를 생각해 봅시다. 아직도. 그 교리를 받아들여 그 따스하고 위안어린 빛 가운데서 자신을 쏘이면서도 실제 형제애와 사회 윤리의 영역에서 그 교리를 적용해야 하는 당혹하고 냉혹한 현실은 거부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단순한 복음을 달라”고 울부짖습니다. 그러한 도피주의가 다시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있는 셉입니다.

    선교의 도전과. 보편 교회 개념을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날 초국가적(超國家的)인 시야를 자기의 생각에까지 진전시키지 않은 사람치고 진정으로 깨어있는 사람이 없듯이. 근본적으로 항상 세계선교를 지향하는 교회가 아니면 그 어느 교회도 애처로운 경건주의의 침체에 빠진 교회에 불과하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진리가 침투해 들어가야 하는 완고한 요새가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선교사업을 몇몇 열광주의자들의 몫이나. 지엽적이거나 여분으로 해야할 일로 계속 생각하는 마음을 가진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크리스챤마다 마음과 정성을 기울여 전념해야 하는 것이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아니면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행진하기 위하여 자기의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설교자는 사람들에게 호소하여 갈보리 언덕과 오순절에 시작된 위대한 십자군전쟁에 예수님과 합세하라고 촉구해야 합니다. 온 땅에 주님의 영광이 가득할 때까지는 십자군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좁은 소견이 판을 치는 곳에서 설교자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라도 그런 소견을 가지고 만족하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해 주어야 하며.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하면서 마지막 날 그리스도 앞에 서서 “주님의 세계선교에 저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였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면 어떤 느낌이 들지 반성해 보도록 촉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희석시키려는 모든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설교자의 임무는. 예배를 드리고 나서 사람들이 “참 멋진 설교야”. “참 놀라운 웅변적 호소야.”라고 말하면서 나가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들이 오늘 하나님을 만났느냐 그렇지 못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전혀 바라지 않는 사람들이 언제나 있기 마련입니다.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만나기보다는 체스터튼 (G. K. Chesterton)이 묘사한대로 “언제나 건전하고 세련된 수많은 단순함”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항상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듯이 사도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첫번째 설교를 마쳤을 때. “저희가 듣고 그 웅변에 사로잡혔다”라든지 “그의 논리와 그의 억양을 비평하였다”든지. “지루해 하고 무감동적이고 경멸조의 마음을 가졌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실상에 너무 가까이 있을 때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도피주의자의 간계의 전신갑주를 입습니다. 그러나 그 날 베드로의 설교주제―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가 여전히 설교자 여러분의 기본 메시지임을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오래 전 예루살렘에서 그 메시지가 선포될 때와 똑같이 지금도 그 메시지는 역동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여전히 그때와 같이 지금도 “강력을 파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감동을 주고 마음을 찌르는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그 문제에 또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현대인의 마음이 좌절과 희망 사이에서 팽팽한 긴장감에 얼마나 깊이 지배당하고 있는지를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이제 우리는 도피주의적인 자세를 극복하고 대처하여 그보다 더 큰 긴장을 구축하기 위하여 실상 (사실상)을 향한 이상한 열정이 존재함을 관찰해야 합니다.

    비논리적이라고요?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에 기독교 대다수 사람들의 관계를 지배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강압적인 힘을 가지고 끌며. 마음을 흔들어 놓고 당혹하게 하며.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무엇인가를 확신케 하는 것이 있습니다. 실상에서 도망쳐 나오는 바로 그 순간에 실상을 향하여 나아가고 싶은 충동이 느껴진다는 말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서이다”라고 말한 것이 “나의 하나님. 주께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가 된 것과 같습니다.

    실상에 대한 굶주린 갈망이 믿음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무언가 분명하지는 않지만 은근히 돌출되고 있음을 의식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사역에서 가장 힘있는 방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한 부르짖음은 모조품과 같은 것이나 사람이 손을 탄 인위적인 것은 무엇이든지 무색하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반드시 웅변적이거나 영리하거나 변증법적 논리에 능란할 필요는 없습니다. “반드시 진실하기는”해야 합니다. 거기서 실패하면 비극적인 심연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을 말할 수 없이 손상시키는 것입니다. 강단에서 진실이 아닌 냄새를 풍기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중으로 손해를 끼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두가지 사항을 생각해 보자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한편으로 생각할 때. 한 주간 내내 엄격한 실상과 씨름을 하던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게 될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인 회중은 무거운 근심과 극심한 유혹과 고독감과 영웅주의. 일을 너무 많이 하여 문제된 것과 일을 너무 많이 하지 않아서 문제된 것. 육신적인 긴장과 정신적인 고갈 등.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만일 설교자가 회중이 체험한 엄격한 사실들과 동떨어진 추상적인 복음을 설교한다면 그들에게 잘못을 행하거나 그들의 갈등을 조롱하는 셈입니다. 그러한 식으로 일하는 것의 허망성을 그들은 대번에 알아 낼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그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이론적으로 아는 체하면서 어둠 가운데 씨름하는 영혼들에게 별 의미가 없는 학문적인 것을 제공한다는 것은. 그들을 위하여 죽으시고 그들이 구속받기를 간절히 열망하고 계신 주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나 설교를 할 때 실상을 외면한 또 다른 잘못이 있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겪는 어려운 문제들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기 보다는―휘티어 (Whittier)는 그것을 “일을 미치도록 미궁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고 불렀다―오히려 단순히 크리스챤 신앙의 본질 자체에만 뿌리를 내린 것입니다.

    복음은 사실주의적인 복음의성질상 사실에 단호하게 맞서서 부수어 냅니다. 복음은 그 어느 것도 회피하지 않습니다. 결코 운명이나 좌절이나 죄나 사망같은 어둡고 복잡한 문제들을 대강 넘겨 버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또는 입에 맞지 않는 사실들을 경건한 체하는 투나 용이한 위안으로 얼버무리거나 감싸려 들지도 않습니다. 불쾌한 질문을 받고서. 섭리나 진행에 대한 고지식하거나 상투적인 표현으로 힘을 북돋아주는 척하면서 결코 회피하지도 않습니다.

    복음은 인생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위협적이고 잔혹한 처지를. 눈을 부릅뜨고 바라봅니다. 복음은 전적으로 용감한 힘을 가지고 일을 대처합니다. 복음의 힘은 유토피아적인 망상이 전혀 없다는데 있습니다. 사람의 비전 속에 골고다 언덕을 강력하게 투영시키고 그것을 바로 보도록 강권합니다. 복음에 맞서는 마지막 도전은 감상과 사실을 무시해 버리는 자세입니다. 복음은 진실성에 있어서 광대합니다. 복음의 사실주의는 소멸하는 불입니다.

    우리가 담당해야 하는 메시지는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손에서 복음이 사실 아닌 것으로 채색되는 것은 얼마나 심각한 실수입니까! 물론. 이는 온 교회와 관련된 이슈입니다. 개인 사역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조직적인 종교가 스스로 전하는 메시지를 실천하지 못한다고 의심받는 것같이 기독교의 증거를 심각하게 저해하는 것이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사실성을 향한 갈망을 대면하여 답변하여야 하는데 최소한 세 방향이 있습니다.

    첫번째는 예배에 관련된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 형식들이 모든 점에서 온전한 진지함과 진리가 울려 퍼지는 소리를 여지 없이 전하는 것입니까.

    두번째는 복음의 사회적 적용에 관련된 것입니다. 너그럽고 고상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은 사회의 그릇된 모습과 인간의 고통들을 보고는 “고통과 족쇄 속에서 신음하는” 형제들을 돕고자 하는 불타는 열망을 가집니다. 그런데 그들은 교회가 섬뜩할 정도로 무력에 빠져 행동하지 못하며. 움직이기 힘든 조직에 느긋한 마음으로 질질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고 역겨운 나머지 참지 못하고 결국 교회에서 뛰쳐 나가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한 일이 정말 너무 자주 일어나지 않던가요.

    세번째는 크리스챤의 연합에 관한 것입니다. 교회가 사람들에게 형제애를 가지고 결속해야 한다고 호소하면서도 교회 자체 속에 모든 사람이 알아 볼 만큼 망하게 하는 분쟁이 있다면. 그것이 합당하고 다른 사람들을 납득시킬 만한 일인가요.

    반(反)기독교세력들의 압박과 공격 때문에 모든 신자들이 서로 전열을 가다듬어 함께 진군해 나가지 않으면 안될 때가 오늘입니다. 더구나 과거의극단적인 개인주의에 대한 반감 때문에 은 세대들은 공동체의 영역에서 새로운 체험을 추구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런 시대 속에서 참된 교제를 어지럽히고 크리스챤들을 산산이 흩어지게 하는 파당적인 충성심을 고수하거나 영구화하는 것이 진실한 것입니까 “의사여 네 자신을 치료하라.” 이러한 방식들로 사실성에 대한 요구가 교회의 증거에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에게 주로 관련된 것은 보다 개인적인 이슈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지혜롭다면 사역을 시작하면서 아예 사실성을 자기의 부단한 요건으로 삼겠다는 공언을 할 것입니다. 성경의 정련된 언어로 말하자만. “이는 지혜를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희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삼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확실한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리챠드 박스터 (Richard Baxter)는 이 문제에 대해 평이한 몇마디 말을 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사람들의 영혼에 영구한 효력을 가진 메시지를 가진 우리가. 그렇게 연약하고 못나게 행하고 그다지 신중하게 행동하지 못하고 경박하게 처신함으로 말미암아 전체 일이 우리의 손에서 와전되고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고 망가뜨려지고 죄인들이 회개하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굳어지게 된다니 참으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대조적인 방식으로 가장 예리하고 분별력있는 당대의 두 사람에게 19세기의 한 설교자를 통하여 나타난 효력에 대한 의미있는 기록을 살펴 봅시다. 탈로취 (Tulloch) 학장은 자신과 훼리어 (Ferrier) 교수가 1858년 어느 주일 아침에 써레이 가든 음악당에 갔던 일을 묘사하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두 사람 모두 너무나 깊은 인상을 받은 나머지 생생하게 살아있을 동안에는 그 인상을 전하고 싶었다. 우리는 거기를 나오면서 이렇게 고백하였다. 그것에 대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지 그리고 나는 그 교수가 표현하는 주목할만한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러한 것을 듣는 것이 내게 유익할 것이라고 느꼈지.

    그것은 사실에 너무나 가까이 접근해 있었어 그 설교는 내가 오랫동안 접촉해 왔던 것 중에서 가장 사실적인 것에 관한 것이었다.” 이 기록은 참된 설교자의 능력에 있어서 기본적인 요소를 요점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에 너무나 가까이 접근해 있었다.” 이를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다음의 몇가지 교훈적인 사항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예배에서 실제적이 되라' 예배에서 다른 사람을 인도하려면. 여러분 스스로 예배 행위에 진실되게 참여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다른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자증적인 사항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강조할 필요가 있는 사항입니다. 예를 들어. 찬송을 부르는 시간인데 성경의 교훈을 슬쩍슬쩍 곁눈질 한다든지. 광고할 사항을 가지고 안절부절하지 못한다든지.

     강단 주위를 쉬임없이 움직인다든지. 누가 나오지 않았나를 알아볼 양으로 회중석을 두리번 거리는 등의 불필요한 행동으로 채우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마음을 주께 향하라고 해놓고 다 함께 찬미하는 일에 자기 목소리를 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합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더구나. 여러분 자신의 심령 속에서 예배의 자세를 실현함으로써만 섣부른 매너리즘과 자의식의 광채 속에서와 더 나아가 사람을 죽일 정도로 역겨운 “강단에서 내는 상투적인 목소리”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가장 잘 발견할 것입니다. 바로 강단에서 내기 쉬운 상투적인 목소리야말로 진실한 분위기를 깨는데 있어서 그 어떤 것도 따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설교 자체가 예배의 한 행위임을 기억하고. 그리스도를 선양하는 성례가 그러하다면. 그러한 것이 여러분을 그 허다한 함정에서 건져내지 않겠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진실로 예수님을 향하고 있고 다른 사람들을 도와 예수님을 알게 하고 있다면. 거드름을 피우거나 위선적인 자세를 취하거나 독단적인 교만의태도를 취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입술을 통하여 나올 때 호통을 치거나 욕설을 퍼붓거나 잔소리를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콜릿지 (Coleridge)는 어느날 찰스 램 (Charles Lamb)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내가 설교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램은 “나는 당신이 다른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중심에 계실 때를 일러주는 침묵을 창출하는 설교는 다른 설교입니다. 예배가 진실할 때. 사람이 자신을 중요하게 여기는 어떤 조짐이나 부수러기를 부수는 데는 이와같이 좋은 것이 없습니다. 자신의 중요성을 의식하면서 강단에 올라가는 하나님의 사역자는 정말 보기에도 애처롭고 두려운 정경입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용모가 괴어 있는 연못같이 짐짓 고요한 체하여 지혜있고 비중있고 심오한 착상의 견해를 취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보이는 유의 사람들이 있다. 이런 이들은 “나는 신탁 (神託)경이니 내가 입을 열면 아무 개도 짖지 못하게 하라.”는 식이다.

    경직되고 가식적인 형식을 교정하는 것은 단정치 못하고 임시적인 방식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캠브리지의 버나드 매닝 (Bernard Manning)은 이렇게 선언하였습니다. “강단에서 형식 없이 제멋대로 구는 것이 진지함과 순전함에 대한 믿음을 유발시킨다고 상상한다. 하지만 그것은 설교자들에게 나쁜 취향을 유발시킬 뿐 아니라 청중들에게 의자 밑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을 일으킨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같이. 또는 젊잖은 사람들이 거기에 하나도 없는 것같이 하찮게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행동하지 말라.” 자기가 처한 위치에서 쉽게 만나는 많은 위험에서 설교자를 건져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심령으로 하여금 예배 분위기에 젖어들게 하고. 그리스도께서 아주 가까이 계시다는 외경심으로 압도당하고 감격적이 되는 것입니다.

    비평적인 데이비드 흄 (David Hume)이 하딩톤의 브라운 (John Brown)에게 한 대단한 찬사의 말이 생각납니다. “나는 바로 이런 사람을 원한다. 어떤 사람이냐 하면 자기가 말하는 바로 그대로를 믿는 사람이다. 그는 마치 예수님이 바로 옆에 계신 것같이 말한다.”

    '어투에 있어서 진실하라'

    과장된 것이나 허풍어린 것. 싱거운 것이나 아는 체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피해야 합니다. 어느 시골 교회에서 설교를 하면서 학식있다는 설교자가 한 말이 기억나는데 그런 식으로 하지 마십시오. “아마 지금 여러분 중에 어떤 이들은 날 보고 유드고주의자 (Eutychianism, 설교를 길게 하여 졸리게 하는 사람이라는 뜻―역자 주) 는 아닌가 하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여러분이 기독교를 20세기 회중들의 필요와 여려운 문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하려고 할 때. 니케아의 언어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하던 사람들의 언어를 사용하면 도움을 주기는 커녕 방해거리를 제공하는 셈이겠지요. 여러분이 회중을 향하여 과거의 유산인 부드럽지 못한 종교 술어를 마구 쏘아대고는 그 술어를 그들의 체험 용어로 다시 번역하는 일을 그들에게 맡겨버리는 것은 순전히 태만 때문입니다.

    그러한 일은 그들의 일이 아니라 여러분 설교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을 평이한 단조로움과 지루하고 하잘것없는 것으로 조잡하게 만들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참된 것이 진실되게 들리지 아니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제거하여 버리십시오.

    웅변술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십시오. 스펄전은 말했습니다. “학식있는 형제가 장엄한 웅변술로 회중들의 머리 위에 불을 퍼붓고 있다면. 그는 자기의 웅변을 키케로와 데모스데네스의 덕택으로 돌릴 수도 있습니다. 그가 좋아한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그의 웅변술을 성령에 기인한 것으로 말하지는 않아야 합니다.”

     저속한 표현에 마음이 가거든 그것을 단호하게 억누르십시오. 의회나 신문에서나 공중 연단에서 쓰이는 높은 소리를 내는 웅변어투를 신뢰하지 않고 참아내지 못하는 세대가 강단에서 그러한 어투를 들으면 깊은 감동을 받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의식적인 인위적인 투에 젖어 있다는 느낌을 일단 사람들에게 주면. 그들이 여러분이 말하는 것들이 사실적인 것들을 장악하고 있다고 믿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넘치는 은혜 (Grace abounding)] 라는 책을 쓴 존 번연(John Bunyan)은 첫머리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나는 이 책에 나타난 것보다는 훨씬 더 고상한 데까지 올라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세련되게 꾸며보려는 술책을 거부한데 대한 솔직한 이유를 이렇게 제시합니다. “나는 감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 하나님은 나를 시험하여 가지고 노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리고 지옥의 번민이 나를 사로잡고 있을 때 나는 재미있게 장난을 치지도 않았다. 이러므로 나는 그러한 것들을 다루면서 '말 놀이'를 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평이하고 단순하게 있는 그대로를 표현할 뿐이다.” 여러분은 설교를 통해서 사실적인 것들을 다루어야 합니다. 시험과 짓누르는 슬픔. 죽음의 두려움. 그리스도의 은혜 등을 다루어야 합니다. 그 주제들을 다룰 때 사실성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화려한 문체나 조숙한 체하는 자세에 빠질 수는 도저히 없는 것입니다.

    조셉 파커 (Joseph Parker)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우리는 지금 세련되고 완전하고 우아하고 예술적인 작은 손질을 많이 가한 완성된 설교를 하고 있다. 주님은 그러한 잡동사니들을 그것들의 하얀 재가 더 이상 발견되지 않을 때까지 불태워 버린다.” 그렇다고 설교에서 정서를 없애버리자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충고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는 것이 무엇인지―인간 곤경의 깊이와 하나님 처방의 기이함―아는 사람치고 진정한 느낌을 가지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라코데어 (Lacordaire)는 설교자는 호렙산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치기 전에 그는 메마른 반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만지자 마자. 사막을 흠뻑 적시는 물줄기가 쏟아져 나온다.” 내가 여러분에게 경계시키고 싶은 것은 날개를 단 것같이 설교자의 말을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날라다 주는 순전한 감정의 조짐이 아닙니다. 소피스트(Sophist)들의 학교에서 합법적인 효과를 내려고 자의적으로 애쓰는 것은 하나님의 시은좌(施恩座)와는 전적으로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헨리 와드 비쳐(Henry Ward Beecher)는 “위대한 설교는 사람들에게 불쾌한 것이고. 과시적인 설교는 마귀의 시험이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교할 때는 여러분의 입에 생명과 죽음의 이슈가 달려 있습니다. 설교를 웅변투의 불을 질러대는 과시로 만들거나 수사술의 흐름을 과시하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정말 비극적이며 경박한 소치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이 언어를 경제적으로 쓰는 모습에 놀란 적이 있습니까. 룻과 나오미 이야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문학적인 효과를 내려고 애쓴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짧고 조용하고 거의 짤막하게 끊어진 문장들로 전체 이야기가 묘사됩니다. 한마디도 쓸데없이 낭비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얼마나 놀라운 정서를 담고 있으며. 얼마나 진정하고 심오한 감동을 줍니까!

    다윗이 방심했을 때 자신의 영혼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어떻게 깨뜨렸는지 묘사하는 장(章)을생각해 보십시오. 표현이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라는 그 장 마지막. 아주 조용한 말이 주는 압도적인 효과에 필적할만한 다른 웅변적인 현란한 표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고사하고 복음서에 나오는 주님의 고난에 대한 기사들을 보십시오. 그 기사들의 신중한 표현이 우리의 허망한 수식을 얼마나 책망합니까. 하나님 말씀의 빛에 비추어보기 시작하면. 흩날리는 듯이 조야한 선정적 표현이 얼마나 버릇없고 조잡한 것인지요.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깨뜨리고 치료하기에 능한 말씀으로 무장하여 파견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리차드 백스터가 그 시대의 설교자들에게 한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번드르한 웅변적인 수사로 임시 땜질하는 것으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깨뜨릴 수 없다.” 여러분의 언어에 있어서 진실하십시오.

    끝으로 나는 이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메시지에 대한 여러분의 전체 태도에 진실하라' 만일 세상에서 가장 큰 소식을 전해야 할 사람이 냉담하고 냉정하고 무책임하고 둔할 수 있다면 무언가 잘못된 것입니다. 또한 설교자가 전하는 소식이 아무런 기백이나 열정이나 강함으로 전달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 세상의 다른 어느 것보다 정말 중요한 문제라고 믿을 사람이 누구겠으며. 설교자 자신이 무감동하며 아무런 마음의 느낌을 가지지 않고. 영적인 눈이 멀게 되어 고통을 당하며. 자기 말을 자신의 태도로 묵살시켜. 버린다면. 그가 전하는 소식을 누가 믿겠습니까?

    챨스 웨슬레의 찬송시만큼 여러분의 입술에서 부단히 나와야 하는 기도는 없습니다. 이는 분명히 그가 쓴 찬송시 가운데 가장 특징있는 것입니다.

    순전한 하늘의 부를 나누어 주어 거룩한 사랑의 화염을 내 작은 마음의 제단 위에 일으키기 위하여 위로부터 오신 주여.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그 불길이 타오르게 하소서

    여러분이 세움받아 선포하게 될 소식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능력과 위대한 영광으로 역사 속에 침투하신 소식. 사람이 지독한 곤경에 빠져 있는데 두번째 아담이 싸우러 오셔서 구출하셨다는 소식. 노골적인 악이 최대로 승리를 거두는가 했더니 십자가로 말미암아 단번에 다시는 회복될 수 없는 패배를 하였다는 소식.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살아계시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임재하신다는 소식.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세력이 세상에 들어 왔다는 소식.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입술로 말할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획기적인 메시지입니다.

    그것은 다른 모든 진리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돌려 버리고 맙니다. 그것은 힘에 있어서 전율적이며. 기이함에 있어서 현란할 정도입니다. 분명하게 말하여 판에 박힌 목소리로 이러한 주제들을 말한다는 것은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누구나 너무 익숙하여 준비없이 무감정한 자세로 말한다는 것은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다. 교회 예배를 인도하면서 아무런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고 있으며 어떤 중요한 일도 하고 있지 않다는 식으로 예배를 인도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어야 합니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Robert Louis Stevenson)은 그의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오늘 교회에 갔었다. 크게 침체되지 않았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 고작 이것 뿐이라면. 과연 이것이 가치있는 것이겠습니까? 필립 시드니 (Philips Sidney)는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나는 퍼시 (Percy)와 더글러스 (Douglas)의 옛 노래를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트럼펫으로 감동받는 것 이상으로 감동받은 적이 없다.” 체스터튼(G.K. Ghesterton) 멎설교자 여러분에게 맡겨진 것으로서 더욱 무한히 마음을 감동시키는. 말씀이 육신이 된 이야기를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역사의 척추에 가해진 강한 타격과 같은 믿기지 아니하는 간섭이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선언하였습니다.

     “그렇게 혼란스런 주장이 오가는 범신론적인 그럴듯한 분위기에서 어리석게 논란하고 서 있느니. 차라리 법정에서의 가야바와 같이. 하나님 모독에 대항해 고함을 지르며 우리의 옷을 찢는 편이 훨씬 낫다.” 신약의 설교자들에 관하여 강하게 부딪혀 오는 요점은 그들이 위대한 계시의 영광에 강한 충동을 느끼고 사로잡혀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정말 죄지은 사람들에게 무섭게 외쳤습니다. “들으라. 우리는 너희에게 화해와 새로운 시작에 대하여 말할 수 있다.” 또한 종교를 위한 가장 희미한 운명주의 밖에 가지지 않은 다른 사람들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성부 하나님의 사랑을 뛰어나게 선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황폐하고 약하고 고독한 영혼들에게 가서 확신넘치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너희의 머리를 들라. 너희는 너희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죽음이 무정하게 어김없이 다가온다는 생각으로 무서워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서는 “기뻐하라. 그리스도께서 이기셨도다. 사망이 죽어 일어나지 못한다.”라고 외쳤습니다.

    세상이 아직도 굶주릴 정도로 갈망하고 있는 엄청난 소식은 바로 그것입니다. 백번 지고 나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출발이 아직도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 기도하지 않은 채 일생의 절반을 살며 하나님을 불신하다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과 하나님의 마음을 얻는 길이 아직도 열려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인생의 여러 요구들 때문에 전혀 부당하다는 느낌을 가지고 염려와 곤고함과 눈물의 세월을 보낸 다음 아직도 활용하기 위하여 비축된 능력이 헤아릴 수 없이 크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가장 문제되는 결박을 물어 뜯는 것 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바랄 것이 없었다가 승리와 불멸은 사랑에 속하기 때문에 죽음은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음을 발견하는 것. 바로 그것이 영광스런 소식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 영광스런 소식이 너무나 섣부른 우리의 방식으로. 둔하고 평범한 것이 되어버리는 일이 잦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둔함과 어리석음으로 말미암아 영광스러운 소식이 초자연성을 잃게 되다니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설교하는 사실들의 기이함을 언제나 의식하고 있고 여러분이 다루는 이슈의 긴박성을 언제나 생각하고 있다면. 여러분 사역의 정도대로 눈에 보이는 열매를 얻지 못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주일 아침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오늘 나를 통하여 이 사람들을 위하여 역사하고 계신다. 예수님이 보실 때 이 날은 어떤 사람들의 영혼을 추수하는데 있어서 중차대하고 예배는 결정적일지 모른다”는 외경심에 젖어 있고 늘 감격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앞에 있는 모든 영혼마다 나름대로의 절박한 필요를 가지고 있음과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러한 필요를 만족시키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전혀 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열매를 목표하십시오. 능한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대하십시오. 비록 여러분의 회중이 적다 할지라도 영혼마다 굉장히 고귀하다는 것을 인식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친히 당신의 약속대로 거기 회중 가운데 계시며 가장 평범하고 가장 보통의 교회를 하나님의 집으로. 하늘 문으로 세우고 계심을 잊지 마십시오. “이 날은 너희의 귀를 통하여 성경이 응하는 날이다. 이 날은 구원이 이 집에 이른 날이다”라고 하시는 주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럴 때에. 죽은 형식과 판에 박힌 상투적인 설교. 그 자체의 높은 요구를 은근히 부인하는 것이 되었을 설교가 능력과 열정을 가진 설교로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강하고 결정적인 사실의 요점이 나팔처럼 사람들의 영혼들을 깨우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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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리와 인격-

    설교에 대해 가장 간명한 정의를 내린 사람 가운데 필립스 브룩스가 있다.

    “설교는 한 사람이 여러 사람에게 진리를 전달하는 것이다. 설교는 본질적으로 두 요소를 가지고 있다. 진리와 인격성이다. 이 둘 중 하나를 결하면 설교하고 할 수 없다.” 브룩스는 이 정의를. 1877년 예일대학에서 'Lyman Beecher Lectures on Preaching(라이만 비처의 설교학 강론)' 강좌를 담당하는 동안에 내렸다. 이 강좌는 후에 “Lectures on Preaching (설교학 강론)"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브룩스는 키가 크고 건장한 사람으로서 따스한 마음을 소유한 자였다. 그의 설교의 목적은 하나님과 관계하는 법을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그 사람들을 고양시키려는 것이었다. 브룩스는 하나님의 말씀의 영원한 진리가 사람에게 어떻게 관계하는 지를 지적하려고 애썼다. 브룩스는 필라델피아와 보스톤의 여러 교회를 섬긴 감독파 목사였다. 설교자로서의 그의 명성은 1869년에서 1891년 동안 보스톤의 트리니티 교회의 설교 목사로 봉사하던 때에 절정에 이르렀다.

    여기에 게재되는 발췌문은 그 설교학 강론의 제1 강좌분이며 (그책의 5―8 14―28면에서 발췌했음) 이 내용은 설교에 대한 보편적인 접근방식을 제시했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설교란 무엇입니까. 그것을 정의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설교란 한 사람이 여러 사람들을 향하여 진리를 전달해 주는 것입니다. 설교에는 본질적으로 두 요소가 있습니다. 진리와 인격성입니다.

    그 둘 중 어느 하나만 결하더라도 설교는 존재 할 수 없습니다. 가장 진실한 진리. 하나님의 뜻에 대한 가장 권위있는 진술이라 할지라도. 진리를 전달하는 사람과 그 진리를 전달받는 사람 사이의 인격적 관계를 통하지 않고 다른 어떤 방법으로 전달되었다면. 그것은 선포된 진리가 아닙니다.

     그 진리가 하늘에 씌어져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는 말씀과 같은 것으로 오랫동안 추앙을 받던 한 책에 그 진리가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으나 그 책을 쓴 사람들의 생생한 인격성이 그 책에서 거의 사라져 버렸다고 합시다. 이 두 경우 중 어느 경우에도 설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만일 사람들이 진리라고 주장하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했거나. 자기들의 설득력이나 자기 말을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의 사변을 청종하도록 하는 기술을 사용하여 자기들의 뜻을 행하거나 자기들의 영리함을 크게 드러내고 있다면. 그것도 설교는 아닙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인격성이 무시되었고. 후자의 경우는 진리가 없습니다. 설교는 인격을 통한 진리의 전달입니다.

     설교는 두 요소를 함께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두 요소가 어떠한 비율로 섞여졌느냐에 따라서 설교 내용 (sermon)과 설교 행위 (preaching)의 두 큰 등급 사이의 차이가 결정됩니다. 모든 설교와 설교자가 완벽한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그 두 요소 중 어느 하나에 결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가 되지 못하고 강론이 되고. 설교자가 되지 못하고 그저 하나의 사람에 불과한 채 머무르는 것은 그 두 요소 중 어느 하나를 결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초대 기독교회의 사역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아는 지식을 전 세계에 유포시킬 때에 얼마나 뚜렷하고 의도적으로 이 방식을 쓰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예수님께서는 다른 방식들도 다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그분은 이 방식을 채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진리를 몇 사람에게 가르치시면서. “자. 가서 그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길을 예비했던 세례 요한과. 예수님께서 앞서 파송하셨던 70인 전도대와. 오순절 다락방에서 새로운 구원의 소식을 온 세계에 전파하기 시작했던 적은 무리들 속에서 그 두 요소들이 발견됩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는 권능을 그들에게 주셨다 할지라도 그 이적 자체가 그 권능을 주신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말하자면 이적의 권능은 사도의 존재 속으로 파고들어 사도의 개성을 온전히 노출시킨 신적 (神的) 부류였습니다. 사도의 존재가 경외로운 특권을 가졌다는 의식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더 열려지고. 그 사도의 개별적 인격을 싸고 있던 감동과 유용성을 통해서 사람을 향하여 그 개성이 더 열려지게 했던 신적 부류였습니다.

    이 사람들을 다루시는 그리스도의 방식에 있어서 독특한 모든 것은 주께서 그 말씀을 전달하는 합당한 매개체로서의 그들의 인격을 준비하는 과정의 일부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완벽하게 처리 하셨을 때. 그들은 녹아서 유리처럼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하나님의 진리를 완벽하게 받아들여 그들의 투명한 성질을 통해서 다른 편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완벽하게 투과 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복음을 전세계에 파급되게 하기 위해서 바로 이 방식을 택하신 것입니다. 이 방식은 어떤 진리를 유포시키려는 데 적용될 수 있는 한 방식이었고 어째서 그것이 기독교의 진리를 위해서 특별하게 채용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정말 탁월하게 인격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교의적인 형태로 진술될 수 있다 할지라도. 복음의 가장 진솔한 교훈은 교의를 통해서라기 보다는 인격적 삶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진리에 대해서 말하기를 “나는 진리요”라고 말할 정도로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진리라면. 인격을 통해서 언제나 가장 잘 전달되고. 가장 완벽하게 전달될 수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그러한 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 속에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파급시키고 반포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설교 형태를 띄는 것이 진수적으로 중요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낸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와 같은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영향을 끼치는 새로운 세계의 가장 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성육신 자체가 관계하는 인격적 방식의 연장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목회 사역을 위한 준비에 관한 원리들은 진리가 확정짓고 있습니다. 인격을 통한 진리라고 말하는 것이 참된 설교 사역에 대한 우리의 묘사입니다. 진리는 진정으로 인격을 통해서 나가기 마련입니다. 입술이나 이해. 글을 통해서만 나가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성품. 정서. 전체적 지성. 도덕적 존재 전체를 통해서 나가야 합니다. 진리는 순결하게 그 사역자를 통해서 나가야 합니다.

    똑같은 이지적 능력과 연구를 했다 할지라도 말씀을 전하는 두 설교자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복음이 한 사람에게는 건성으로 임하여. 피상적인 부분에만 엷은 색조를 띠게 하고. 결국 그의 왜소함과 함께 복음도 왜소해집니다. 또 다른 설교자에게는 복음이 인격 속으로 침투하여 들어가고 복음은 깊은 인상을 띄고 모든 열심과 능력을 다해서 그 속에서 날개를 단 것같은 느낌을 줍니다. 첫번째 경우의 사람은 나팔이나 인쇄 기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두번째의 경우는 진정한 사람이고. 하나님의 진정한 사신이었습니다.

    신학자들이 성경 기자들의 역할에 대해 가진 관점들이 바로 여기에서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압니다. 성경 기자들을 단순한 수동적인 도구로 만드는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정신은 성경기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능동적으로 전했던 사신들로 생각하게끔 더욱 더 부추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감에 대한 더 높은 사상입니다. 기독교 설교 정신에 대한 참된 사상은 바로 그것 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잠시 동안 설교의 두 요소인 진리와 인격성을 살펴봅시다.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인격성은 특별한 것이고 언제나 달라집니다. 각 요소에 대하여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싶은 몇가지 사항이 있습니다.

    불변하는 진리

    먼저 진리에 대한 것입니다. 진리를 따로 떼어 그 자체만을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지요. 진리에는 언제나 인격이 붙어 다닙니다. 사실상 이 두 국면은 두 어휘 속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됩니다. 그 중 하나는 메시지요 또 하나는 증진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루살렘 공회 앞에서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이 두 말씀을 종합해 보면 모든 기독교 설교의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개념을 갖추게 됩니다. 메시지는 전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메시지가 우리 자신의 체험 속에 들어와서 그 메시지의 영적 능력을 우리 자신이 간증할 수 있기까지는 전달해 줄 수 없는 메세지이어야 합니다. 서재에서 설교를 준비하거나 강단에서 설교를 실제로 할 때에 언제나 메세지라는 말을 자기 앞에 써 넣는 사역자는 허망하거나 세속적인 사변에 빠져드는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되고. 단순히 지어낸 열정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증인이라는 말을 항상 잊지 아니하는 사람은 정통으로 배운 단순한 형태의 진술을 기계적으로 암송하면서도 사실은 그 진술의 진정한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는 비현실적인 태도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만일 여러분과 내가 언제나 이 두가지 측면을 항상 인식하고 있으면 즉 우리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이요 증인이라는 사실을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있으면. 우리가 설교할 때에 확증된 진리의 권위와 독립성을 온전히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개인적으로 믿음의 호소력과 확신감에 넘치는 모습을 갖게 될 것입니다.

    우리 속에서 말하는 이는 직접 말하는 우리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의 성령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의 자녀이므로 우리가 하는 말 속에 아버지의 음성이 담기게 해주실 것이고 아버지의 다른 자녀들에게 설명해주게 될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 있어서 설교행위에 나타나는 독특한 악행을 수정하기 위해서. 설교자들이 메시지로 말해야 하는 진리에 대한 개념을 설교자들에게 새롭게 인식시키는 것보다 더 필요한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들었던 많은 설교 중에서 언제나 기억하고 있는 한 설교가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특성이 그 설교에 놀라운 방식으로 배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설교는 영국의 작가인 죠지 맥도날드 (George Macdonald)한 설교였습니다. 그의 흥미있는 문체에는 좋은 특징도 많았고 나쁜 특징도 많았습니다.그 문체는 대담했고 주로 정직했습니다. 또한 감상에 빠지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설교 전편에 이러한 특징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곧 하나님께로부터 온 메시지를 이 사람들에게 전해 준다는 인상을 가지는 특성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어린 아이가 아직 서툴게 배운 말을 하느라 혀와 씨름을 하듯이. 자기가 받아 마음 속에는 있는데 그 뜻을 다 드러내어 표현하지 못하여 언어와 씨름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 설교를 들으면서. 다른 설교자들이 저를 사로잡아 자기들의 이지의 작용을 감탄스럽게 드러내던 모습과 비교해 볼 때 맥도날드의 방식은 얼마나 연약한 지를 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여기에 하나의 복음이 있었고 진정한 소식이 있었습니다. 설교자는 망각되었습니다.

    말씀 사역에 있어서 여러분 자신을 어떠한 식으로 평가하든지 간에. 여러분 자신이 메신저라는 이 근본적인 개념을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기독교 설교자는 먼저 크리스챤이어야 한다는 필연적인 제1원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권위와 그리스도의 진리의 절대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이 강론을 시작하면서 제가 제시하고 싶은 제1원리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처럼 광범한 문제로 들어가지 않고. 제게 부단한 인상을 끼치는 메시지를 말하는 것으로써의 설교의 개념에 대해서 한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토요일에 큰 도시의 목회자들은 그 다음날 설교할 주제들의 목록을 뽑아 보십시오. 그러면 그 설교들중 얼마나 많은 설교들이 그 설교 제목을 위해서 성경의 이상한 구석을 이리저리 뒤졌던 것같은 느낌을 주는 지를 알게 될 것이고. 그 설교자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세워야 하는 진리가 얼마나 작고 보잘것없는 부스러기인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설교자가 하나의 메시지로서의 설교의 개념에 대하여 충분하게 인식하면 인식할수록. 거스러미들을 떼어 냅니다. 그는 넓은 땅으로 뛰어 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그의 사역은 더 자유로와지게 되고 더 담대해지며 더 광범해집니다. 그리고 설교자가 가장 단순한 본문들을 사랑하게 되며 인생 전체를 통해서 강물처럼 관통하여 흐르는 위대한 진리들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주권. 그리스도의 구속.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의 소망. 의무의 특권. 구세주 안에서 사람을 사랑하는 것 등의 주제가 그 설교자의 영혼이 포착하려고 애를 쓰는 강한 율조가 됩니다.

    설교를 하나의 메시지를 말하는 것으로 보는 이 개념의 또 다른 열매는 그것이 모든 역사적인 기독교와 바른 관계를 가진다는 데 있습니다. 그 메시지를 우리가 처음 말하는 것처럼 들려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교회가 모든 세대에 걸쳐서 바로 그 동일한 메시지를 전파했습니다.

    오늘날 그 메시지를 말하는 설교자는 과거에 그 메시지를 말한 그 수많은 설교자들의 대열에 서있는 셈입니다. 또 지금 그 메시지를 말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부류 속에 그가 들어 있습니다. 그 메시지는 그의 증거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 메시지를 받을 때 가진 확신의 일부는 처음부터 그 메시지가 전수되어 내려 온 것이라는 사실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사람들은 크리스챤 삶의 협력적인 개념과 개별적인 개념 사이를 진정 균형있게 유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양편 모두에서 발견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어느 누구라도 그 양편 모두가 다 필요함을 인정할 것입니다.

    어느 시대을 막론하고 교회의 동질성은 주님께로부터 받아 사람들에게 항상 전달해 주어야 하는 메시지의 동질성을 내용으로 합니다. 교회의 영구한 동질성을 밖으로 표명하고자 할 때. 이 진정한 동질성을 역설할 때만 가치가 있습니다. 옛 의식의 영속성과 고대 공예배 의식서를 사용한 것 그리고 사도의 치리 형태로 보이는 것을 고수하는 데는 진정한 의미가 있습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이단들은 그렇게 실수 투성이의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고집대로 행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판단이 옳든 그르든 그들은 자기 주장을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밀턴 (Milton) 은“어느 사람이든지 진리에 있어서 이단일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메시지가 아닌 자기 자신의 독창적인 생각으로 아이디어를 취하고 있는 사람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모든 세대 교회로부터 자신을 격리시켰습니다. 설교 사역이 한 메세지를 말하는 것으로 여기는 면에서 더 철저하게 되면 될수록 교회가 설교자에게 더욱 가치있고 절실한 것이 될 것이며. 의복이나 방언은 다르더라도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모든 메신저들에 대하여 더욱 더 진실한 형제애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비평주의와 구조주의

    저는 설교자가 전파해야 하는 진리를 언급하면서 우리 시대에 매우 특징적인 것으로 보이는 두 가지 경향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비평주의 성향이고 또 하나는 구조주의 (mechanism) 성향입니다. 그러나 두 경향 모두 나쁩니다. 비평주의 경향이란. 어느 곳에나 편만해 있습니다. 사물을 외향으로부터 다루어 나가고 그 사울의 관계들을 논의하고 그 사물의 본질을 시험해 보는 것 뿐이지 우리 자신이 그것들의 용도를 실제로 맛보지 않는 성향을 말합니다.

    어느 시대고 설교가 모든 문학이나 삶 속에 찾아온 변화를 어느 정도 따라갑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이상하게도 비평을 좋아합니다. 그러한 비평정신은 사물들의 성질을 시험해 보는 단순한 즐거움에서 모든 사물들을 조각냅니다. 어떤 세력을 연구할 때에 그것들에 복종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그것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연구합니다.

     순전히 토론의 즐거움을 위해서 어떤 사물들에 대해서 말합니다. 자연과 그 자연의 기이함에 대해 쓰여진 많은 시나 산문들. 나라의 천재들과 그 여러 제도에 대한 많은 탐사. 인간 성질을 섬세하게 분석한 많은 시도들이 바로 이러한 유에 속합니다. 그것이 모두 다 훌륭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력들의 즐거운 신봉자가 되려는 충성스러운 마음을 가지는 것이나. 진정으로 자연을 사랑하는 것이나. 신실한 시민이나 참된 친구가 되려는 마음에서 가지는 신실한 동정심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비평적인 성향이 그 시대의 설교에 영향을 전혀 미치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일을 해나가면서 아이디어를 주시하고. 그 아이디어들의 관계와 그들이 서로간에 미치는 영향들을 단순한 문제로 취급하여 이지적인 즐거움을 발견할 따름이지. 그 아이디어들 자체 속으로 영혼을 들여보내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비평적인 성향입니다. 그것이 강단에 침투하고. 그 결과로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과는 구별되는 이른바 그리스도에 .관해서. 설교한다고 말해야 하는 유의 설교 사역들이 대단히 많아지게 됩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기독교를. 하나의 메시지로 공표하거나 그리스도를 구주로 선포하는 대신. 하나의 난제로서의 기독교를 항상 논의하고만 있는것 같습니다. 그들의 논의를 낮게 평가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그러한 논의가 설교의 이상형이나 설교의 전형은 아니라고 느껴야 마땅합니다. 그러한 논의들이 시대적으로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사도시대의 설교자들은 그런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참된 설교자가 항상 그러한 일을 가장 바란 것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믿음을 규정하고 믿음을 변호하는 자들이 언제나 필요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사역자가 복음을 전하는 대신 믿음을 정의하고 변증하는 것을 자기들의 참된 사역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교회를 위해서 불행한 일입니다. 기독교에 관해서 설교하려는 성향을 조심하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를 전파하려고 애쓰십시오. 기독교와 과학의 관계. 기독교와 사회의 관계. 기독교와 정치의 관계 등을 논의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알고 감사와 사랑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도록 그리스도를 내세우는 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

    태양을 설명하는 허쉴 (Herschel) (1781년 독일에서 태어나 천왕성을 발견한 영국 천문학자―역자주)보다 태양의 열기를 땅으로 끌어오는 프로메디우스 (Prometheus, 헬라 신화중에 나오는 신으로 하늘에서 불을 훔쳐 인류에게 주었기 때문에 제우스신의 분노를 사서 카오카서스산의 바위에 묶인채 독수리에게 간을 먹혔다는 신―역자주)가 되는 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

    저는 또한 구조주의 (Mechansim) 의경향을 경계시키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일차적으로 각 개인들에게 전파되어야 하고 그리스도 복음의 궁극적인 목적은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임을 설교자들이 잊는 경향이 있습니다.

    복음이 처음 한 사람의 영혼을 향하여 말하는 때로부터 시작하여 그 사람의 영혼이 구속받은 전체 무리와 함께 하늘로 올리워지는 때까지. 복음은 그를 위해 다소 비인격적인 대단히 많은 기계적 방편들을 사용합니다. 많은 기구들을 가진 교회가 들어오게 됩니다. 설교자는 그러한 기구들을 통해서 사역합니다.

    그러나 설교자가 잠시라도 그러한 것들을 자기사역의 목적으로 삼는다든지. 아니면 자기가 얻으려는 상급인 개개 영혼에서 눈을 뗀다면. 그 설교자는 자기의 가장 높은 역할을 벗어나서 자기의 가장 좋은 힘을 상실하는 셈입니다. 갈수록 제자 확신하게 되는 것은 모든 성공적인 설교는 개인들을 향하여 말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영혼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저는 지금 이것을 말하면서 제가 사역하는 크리스챤의 한 모임이나 다른 사람이 사역하는 그리스도인의 다른 모임들의 흠이나 위험을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목적 대신 방편을 위해서 일할 성향이 어느 곳에서나 존재합니다.

    동역자들이여. 여러분이 목회의 사역을 시작하는 순간에 이 점을 배워야 합니다. 어떤 유의 흠이나 위험이 여러분 자신에게보다 다른 체계에 전적으로 속해 있다고 생각한다든지. 여러분 자신은 그러한 위험에 노출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여러분 자신의 삶 속에서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그러한 실수와 위험을 재산출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는 확실히 말해서 훌륭한 법칙입니다. 다른 어떤 사람에게서. 또는 어떤 다른 교회에서 실수를 발견할 때마다 여러분 자신이나 여러분 자신의 교회에 그러한 것이 없는지 살펴 보아야 합니다. 교회의 구조적인 방편을 교회의 목적보다 더 가치있게 여기는 데로 빠져들지 않는 교회. 사람들과 사람들의 고귀한 영혼을 위해 설교하기 보다는 교단과 그 교단의 고귀한 특징들을 위해서 설교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 사역자들이 없는. 그런 교회가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각 개인들을 바라보고 설교하시고. 개인들을 위해서 살아있고 개개 영혼들로 이루어진 교회를 향해서 언제나 설교 하도록 하십시오.

    자라나는 인격

    설교에 있어서 두번째 요소인 설교자의 인격성 문제에 대해서 할 말이 대단히 많을 것입니다. 여기에 세가지 기본 사항들이 있다.

    ① 전에 인증된 인격성의 원리는 개개 모든 설교자 개인의 인격을 수반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허공에다가 쓰거나. 아니면 단순히 복음을 거의 비인격적인 책에 맡겨 버려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훌륭하게 돋보이는 생각입니다. 그 생각은 모든 설교자가 자신의 방식이나 자기 자신의 성질에 따라서 진리를 선포해야 한다는 것을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게 할 것입니다.

     진리가 한 사람을 통해서만 나오지 않고 여러 사람들을 통해서 나와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여러 사람들을 획일화 시킨다면 그들이 가진 인간의 힘을 크게 상실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획일화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할 수 있다면.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함께 싣고 지구가 움직여도 모든 것이 여전히 조용해 보이듯이. 어느 사람도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것같이 보이게 될 것입니다.

    목회자의 사역이 엄숙하다는 깊은 의식을 한 나머지 설교자의 자유로운 개성을 억압하려는 경향이 흔히 나타나며 다른 설교자의 개성에 대해 용납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게 됩니다. 개인적인 특징들이 그러한 엄숙한 일에 침입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가장 성공적인 말씀 설교자들이 취했던 일의 방식에 묶어 놓으려고 애를 씁니다.

    저는 두 종류의 사역자들을 다 보았습니다. 양심 때문에 완고하게 된 사람들과. 양심 때문에 오히려 느슨하게 된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또 양심으로 굳어져 강철처럼 된 사람도 있고. 양심으로 말미암아 부드러워져 왁스처럼 된 사람들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되었든 간에. 틀림없이 설교자의 개성을 억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소한 일들이나 커다란 문제들에서 드러나 보입니다.

    우리는 지혜롭고 진지하게 생각하여 이러한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합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을 겸손하게 설교하라고 사람들을 보내셨는데. 그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사람이 가진 개인의 개성 속에서 그 복음을 전하라고 독특하게 각 사람을 보내신 것입니다.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여러분답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단순히 피상적인 특징들이나 괴상한 요소들을 개발함으로써 좋은 결과를 얻으려는 생각은 버리십시오. 여러분 자신의 믿음과 사랑이 충만한 가운데서 참된 자아를 얻으므로 그런 결과를 내도록 하십시오. 깊이 있는 원색은 고상하나. 피상적인 원색은 비참해 보입니다. 광야와 낙타 털옷과 메뚜기와 석청이 있다는 면에서 세례 요한같이 되는 일은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조건에서 온전히 헌신적인 마음을 가지고 불같은 말을 한다는 것은 그와 다른 문제입니다.

    ② 다시 설교자의 인격성을 생각하면서 잊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설교자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낮설거나 간헐적으로 부딪치는 생각들이나 말들에 끊임없는 친근성을 지니고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생각들이나 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희귀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주로 그런 차원에서 거룩성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어떤 체험을 부단히 말하면서 그 체험을 해보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종용하는 사람은 때가 되면 그러한 체험들을 묘사하는 바로 그 힘 때문에 자기가 바로 그 체험들을 직접 겪어 보는 것같이 생각하는 시점에 이르게 됩니다. 여러분이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간청합니다. 회개의 이론에 대해서 갈수록 훤히 알게 되어 자신이 회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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