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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me > 설교작성법(여기누르면 다나옴)(전체리스트)

    감동적인 설교 작성법
    2003-04-11 17:51:57   read : 5354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설교 전체를 한문장으로 써보라

    감동적인 설교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설교자의 특권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영혼과 전 인격을 변화시키는 설교를 할 수 있다면 무엇을 바랄 것인가! 설교자들은 감동적이고 영적인 설교를 위해서 기도하며 항상 연구해야 할 것이다.



    설교학 강의를 들으러 온 목사님들에게 필자가 언제나 요구하는 질문이 있다. "지난 주일에 하신 설교를 한 문장으로 말해 보십시오?" 이 질문을 드리면 거의 모든 목사님께서는 대답을 하지 못한다. 물론 별안간 들은 질문에 당황하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을 주고 기다려도 준비가 안된 이는 그냥 우물우물하고 있을 뿐이다.

    기껏 말한다는 것이 이런 식이다. "'사랑에 관해서' 했습니다." "'전도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기도에 간해서' 외쳤습니다." ".....에 관해서"는 문장이 아니다. 문장을 완성해야만 한다. 그래야 내용도 그 주제에 맞추어서 만들어진다. 그렇게 되면 설교 전체는 확실한 통일성을 지닌다. 문장이 되진 않으면 내용이 분명하지 않게 된다.

    칼빈 쿨리지는 미국의 대통령이었다. 그가 어떤 교회에서 설교를 듣고 오자 부인이 물었다. "설교자가 무슨 설교를 합디까?" 그는 한 참 생각하다 말했다. "죄에 대해서 하는 것 같던데......" 부인이 다시 물었다. "죄에 대해 뭐라고 합디까?" 그는 더 오래 생각하다가 말했다. "설교자가 죄를 아주 싫어하는 것 같더라구."

    설교가 한 문장으로 나오지 않는데 내용이 기억될 리 없다. "죄에 관해서" 말했다면 드는 이들도 "죄에 관해서" 말했다는 것만 기억한다. 설교자가 못 기억한 내용을 청중이 기억한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다. 그러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설교가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시루에 물이 다 빠져도 콩나물은 자란다고 자위할 것인가?

    설교가 기억되지 않는다면 신앙의 성장도 있을 수 없다. 그냥 가슴 뭉클한 종교심만 일으키려고 설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설교를 한다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는 영혼에 변화를 주지 못한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계심은 우리와 커뮤니케이션 하기 위함이다. 그 말씀이 가슴에 남아 있음으로 하나님의 생명과 권능도 그러하다.

    신학교 다닐 때 설교의 사표가 되시는 한 분이 계셨다. 지금은 타계하신 김이태 목사님이셨다. 그 분의 설교는 듣기도 좋았지만 그 내용이 오래 가슴에 남아 있었다. 그 분은 늘 우리에게 충고했다. "설교를 작성하기 전에 반드시 한 문장으로 써 놓으시오." 이 한 문장이 제대로 되지 않았으면 아직 설교를 쓸 준비가 안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한 문장이 확실해지면 설교의 대지들을 여기 맞추어 작성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모든 내용이 다 이 한 문장을 받치고 있는 것이다. 예화를 하든, 인용을 하든, 성경 구절을 주든 여하간에 이 한 문장을 설명하고 증명하고 기억시키기 위해서 전체의 내용들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한 문장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이 한 문장을 논지라고 한다. 주체라던가, 아이디어라든가 하는 말은 논지의 이전 단계이다. 설교뿐 아니고 논문이나 글이나 강의나 반드시 논지가 있게 마련이다. 논지가 없는 설교나 글은 방향 없이 없어진다. 설교나 글은 논지 하나를 전달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예수는 세상에 보내진 밝은 빛이시다." 이 한 문장을 쓰고 설교의 내용을 작성한다고 치자. 그러면 예수가 세상의 빛인 이유를 열심히 설명하게 될 것이다. 그로 인해서 나온 요지들은 다음과 같다.





    제목 : 예수는 세상의 빛

    본문 : 요 1:1-10

    논지 : 예수는 세상의 보내진 밝은 빛이다.

    요지 : 1. 어둠의 빛 되신 예수

    ① 예수는 생명의 빛이다.

    ② 예수는 계시의 빛이다.

    ③ 예수는 자연의 빛이다.

    2. 참 빛과 빛의 증거자

    3. 세상의 빛

    ① 예수는 세상에 오신 참빛이시다.

    ② 그는 복음으로 세상을 비추신다.

    ③ 그는 우리 심령에 빛을 주신다.



    앞의 요지는 학생이 작성한 것이다. 이 정도만 되도 대단히 통일성이 있는 셈이다. 하지만 전체 내용이 "예수는 세상에 보내진 밝은 빛이다"는 논지를 설명하고 증명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논지와 직접 연관이 되지 않는 내용은 도입부분이나 설교 도중에 잠깐 설명으로 첨부될 수는 있지만 뼈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글의 RMx 부분에 고친 예를 하나 더 실었으니 참조하기 바란다.)

    또한 논지와 요지가 통일성이 있다 해도 이 내용에 던져질 질문이 있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예수가 세상의 빛이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물론 논지의 내용을 복음적으로 하는 것과 그것을 삶에 적용시키는 과정이 대단히 중요하다. 하지만 순서상 그것은 다음으로 미루고 여기서는 조금만 맛을 보자.

    여기 내용은 논지를 제법 잘 증거하고 있다 해도 앞에서 말한 대로 그것을 삶에 적용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이 문장을 조금 손질해 보자. "예수는 세상에 보내진 빛이기에 누구든지 영접한 사람은 빛을 소유하게 된다." 논지를 복음적으로 고침으로 이 문장은 신자들의 삶과 연결이 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면 전체 요지도 다시 구성해 보자. 약간의 손질로 설교의 내용은 한 문장으로 연결되며 확실하게 부각이 될 것이다. 이것은 설교의 논리 진행을 위해서 필수적인 과정이다. 이것이 제대로 안 된다면 설교 작성의 시작부터 헤매게 마련이요, 듣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될 것이다.



    제목 : 예수는 세상의 빛

    논지 : 예수는 세상에 보내진 빛이기에 그를 영접한 사람은 그 빛을 소유한다.

    ① 예수는 생명의 빛이기에 영접한 사람은 생명을 얻는다.

    ② 예수는 계시의 빛이기에 영접한 사람은 계시를 얻는다.

    ③ 예수는 자연의 빛이기에 영접한 사람은 세상을 비칠 수 있다.



    ---------------------------------

    설교 제목과 논지





    많은 경우에 보면 제목과 논지가 전혀 연관되지 않는 것을 많이 본다. 제목과 논지, 요지, 그리고 전체 내용은 서로가 잘 연결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확실하게 마음에 남는 설교가 된다. 이번에는 제목과 논지가 서로 이어지게 하는 연습을 해 보자. 제목과 논지가 논리 있게 연관되지 않으면 기억하기가 어렵다.

    한 마디로 제목은 "내가 무엇을 말하려는가"이다. 논지는 이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제목과 논지는 바늘과 실처럼 연결된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피"란 설교 제목이 있다 치자. 그리스도의 피에 대해서 설교자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한 문장으로 쓰면 그것이 논지이다. 그래서 전체가 제목대로 통일된다.

    제목은 언제나 약속을 내포하고 있다. 제목에 대해 확실하게 말해 주겠다는 약속이다. 앞의 제목에서 설교자는 "그리스도의 피"가 주는 유익을 설명할 것이다. 다른 이야기는 나올 수 없음이 분명하다. 그러니 논지도 여기 맞추어서 작성이 되어야 한다. 유능한 설교자는 제목에 내포된 약속을 잘 이행할 것이다.

    한편 제목은 질문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피"라는 제목은 어떤 질문을 일으키는가? "그리스도의 피가 무엇인가?" 또는 "그리스도의 피의 유익이 무엇인가?" 등의 질문이다. 이 질문에 답을 해 보자. 그러면 분명한 논지가 만들어질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제목과 논지를 언제나 확실하게 연결시켜야 한다.

    이런 식으로 하면 제목에서 곧 논지가 떠오르고 결국 전체 내용이 다 기억될 것이다. 대지들은 논지를 좀 더 자세히 진행시켜가며 말한 내용이다. 대지 작성법은 뒤로 미루기로 하자. 사실상 제목을 잡으면 설교 작성은 이미 반쯤 한 것이 된다. 그만큼 제목 선정도 어렵다. 무엇을 말할지가 분명해야 한다.

    제목과 논지가 내용상 다르면 청중의 혼란은 커진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피"라는 제목을 잡고 나서 논지는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의지하자"는 식으로 해보자. 서로 연관이 잘 되는 것 같지만 바른 논리 진행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피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라 의지할 것에 대해서 말하기 때문에 제목은 잘못 되었다.

    이 논지에는 오히려 "의지할 것"이란 제목이 어울린다. 그러면 "의지할 것에 대해서" 말하겠다는 약속이 된다. 그러면 "우리가 반드시 의지해야 할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떠오르게 된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의지하자"는 식의 논지가 만들어질 수 있다. 복잡하다고 짜증내지 말고 훈련해 보자.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피"란 제목에는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확실한 표다"가 훨씬 연관되고 기억되는 논지인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피"에 내포된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항상 논리는 자연스런 진행을 따라야 한다. 부자연스러운 것은 절대로 기억이 되지 않는다. 내용도 잘 전개되지 않는다.

    제목을 문장형으로 쓰는 분들도 많이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미스바로 가자." 이런 식의 문장형 제목은 청중들의 흥미를 잃게 만든다. 이미 내용을 다 들은 셈이기 때문이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문장형의 제목은 피해야 할 것이다.

    제목은 여운을 많이 남기면서 호감을 주어야 한다. 그래야 청중이 기대하면서 설교를 들을 것이다. 또한 설교를 듣고 나면 그 제목에 이해가 한 문장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그렇게 되면 확실하게 기억되는 설교가 될 것이다. 또한 설교 자체가 통일성이 있기 때문에 재미있게 들을 것이다. 조금만 연습을 하면 된다.

    아래의 글이 어떻게 제목과 논지로 되는지 보라. 물론 여기서는 복음적인 내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단지 논리적으로 제목과 논지를 잡는 훈련을 하는 것일 뿐이다. 완전히 똑같을 필요는 없다. 이렇게 한다는 것만 알면 된다.



    내용 : 좋은 설교는 설교자가 나에 대해서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있을까하고 경탄할 느낌을 준다.

    제목 : 좋은 설교

    논지 : 좋은 설교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내 준다.



    내용 : 설교의 원천으로 성경을 무시하고 있기에 오늘의 강단은 그 권위를 잃고 있다.

    제목 : 강단 권위 상실의 이유

    논지 : 오늘날 강단의 권위 상실은 성경을 무시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내용 : 60년대 대중화된 점성술에 대해서 최근 미국정부는 크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점성술협회 회원 수가 지난 5년동안 4천명으로 갑절 증가했고 고대 바벨론에서와 같은 신비종교가 수도 워싱톤과 같은 곳에서 침투해서 활동하고 있다.

    제목 : 오늘날 점성술의 영향

    논지 : 오늘날 점성술의 영향은 신비 종교의 형태로 수도에까지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내용 :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저를 칭송할지어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고 진실하심이 영원하심이로다(시 117)

    제목 : 여호와 찬양의 이유

    논지 : 여호와 찬양의 이유는 우리를 향한 그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이다.



    내용 :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제목 : 화평의 근거

    논지 :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음은 그리스도를 통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용 :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빛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4∼5)

    제목 : 믿음으로 얻는 의

    논지 : 믿음으로 얻는 의는 일한 삯이 아니라 거저 주는 선물이다.



    내용 : 좋은 이름은 큰 부보다 더 바랄만한 것이다.(잠 22:1)

    제목 : 재물보다 좋은 것

    논지 : 재물보다 좋은 것은 명성이다.



    자 이제 제목과 논지 잡는 요령이 어느 정도 이해되었을 것이다. 성경이나 글을 보면 항상 이렇게 제목과 논지를 잡는 훈련을 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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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논지 훈련





    더 나아가기 전에 논지 훈련을 좀 더 해보자. 논지는 논문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어떤 글이건 어떤 설교이건 반드시 논지가 필요하다. 논지의 훈련을 위해서는 필자의 "논문 작성 이렇게 하라"(성광문화사)를 참조하기 바란다. 하나의 훌륭한 논지를 만드는 것이 설교 작성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임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그 논지를 증명하는 것이 설교의 전체 내용이다. 그러므로 논지와 증명은 밀접하게 연결이 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서 "석탄은 날이 갈수록 덜 사용된다"는 논지를 세웠다고 하자. 그 논지를 증명하는 요지를 보자.



    논지 : 석탄은 날이 갈수록 덜 사용된다.

    ① 가정에서 기름을 때는 집이 많아졌다.

    ② 기관차도 더 이상 석탄을 쓰지 않는다.

    ③ 공장에서도 석탄 때는 곳이 없어져 간다.

    결론 : 고로 석탄은 날이 갈수록 덜 사용되는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논리의 진행 방법이다. 논지에 관한 이러한 증명을 설교에 적용해 보자. 예를 들어, "새벽 기도는 영적 생활에 큰 도움이 된다"는 논지를 증명해 보자. 여기 쓴 논지나 요지보다 더 좋고 다채로운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논지 : 새벽 기도는 영적 생활에 큰 도움이다.

    ① 첫 시간에 하나님과 대화한다.

    ② 첫 시간에 말씀을 듣는다.

    ③ 첫 시간에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

    결론 : 고로 새벽 기도는 영적 생활에 큰 힘을 준다.



    이런 식으로 논지를 쓰고 요지를 써 나간다면 절대로 설교가 옆으로 흐른다든지 통일성을 잃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훈련을 더욱 열심히 해야 한다. 논지의 요소들을 먼저 살펴 보자. 논지는 그냥 쓰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간단하기는 하지만 논리 훈련이 안된 사람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논지가 좋으면 내용도 좋아진다.

    예를 들어서 "남자는 여자보다 완력이 세다"는 논지가 있다고 치자. 이런 것은 증명할 필요가 없다. 그런 이야기를 시간을 허비해서 들을 사람도 없다. 그러므로 좋은 논지가 아니다. 그러나 "남자가 여자보다 힘이 세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고 한다면 앞의 논지보다 훨씬 재미있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들으려는 사람이 생긴다.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논지는 진리 중에 진리이다. 하지만 예수를 수십년 믿은 사람에게는 더 이상 들을 만한 말은 아니다. 너무 뻔한 말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너무도 뻔한 설교가 얼마나 많은가! 전체를 대표하는 한 문장이 너무도 뻔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이다. 그러니 한 문장을 쓴 뒤에 물어보자. 뻔하지 않은가?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인지,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 것이 무엇인지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 남들이 말하는 내용보다 한 걸음만 더 들어간다면 관심을 일으킬 수 있다. "예수가 나의 죄를 짊어진 것을 믿으면 죄로부터 오는 저주에서 구원받는다." "예수의 생명을 의지하면 영원히 산다." 즉 평범한 앞의 논지를 조금만 더 설명하면 된다.

    첫째, 논지는 범위가 분명하고 명확해야 한다. 너무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으면 무엇을 주장하는지 모르게 된다. 그리고 논지가 애매하면 더욱 더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다. 설교의 논지는 설교자의 마음을 꿰뚫는 선명한 것이어야 한다. 설교자는 "내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에 확실한 대답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둘째, 논지는 그 스스로 퍼져 나갈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확장되거나 발전하거나 밝혀 나갈 내용적인 요소가 있어야 한다. 스스로 질문해 보라. 이게 무슨 소리인가? 이것이 꼭 말해야 할 내용인가? 그리고 진실인가? 이러한 질문에 긍정적인 대답이 나온다면 인 논지는 스스로 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셋째, 설교 논지는 반드시 인간의 삶과 연관되어져야 한다. 그 내용이 인간이 경험하는 심각한 문제들에 해답을 주는 것이다. 삶과 죽음, 용기와 두려움, 고통, 외로움, 약함, 병, 기쁨, 후회, 사랑, 희망 등등이다. 이 설교를 듣고 나서 어떤 변화가 있다는 말인가? 이 논지가 나의 삶과 무슨 상관 있는가?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넷째,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논지가 복음의 한 면을 말하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그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해 주신 일을 말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저 도덕적이고 인간적인 교훈으로 설교가 만들어질 것이다. 우리는 주위에서 그러한 설교를 너무도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이것은 시정되어야 한다.

    성경적으로 그리고 교회사적으로 볼 때 영혼이 변화하려면 반드시 복음이 들려졌다. 어떤 사람이 복음을 듣지 않고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수 있다. 악한 습관을 버리고 선한 행동을 하는 사람으로 바뀔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적인 변화는 좀 더 근본적인 것이다. 죽었던 영혼이 일어나는 것은 반드시 복음을 들어야 한다.

    이 점은 아무리 강조를 해도 부족하지만 다음 기회에 복음적인 논지에 대해서 공부하기로 하자. 여기서는 단지 논지는 반드시 복음의 한 면을 설명해야 한다는 것만을 강조하는 것으로 그치자. 하나님의 복음이 아니면 율법이거나 그냥 일반 도덕적인 논지일 것이다. 또 많은 경우에 그저 자기의 생각으로 그치는 경우도 많다.

    한 마디로 논지의 요소를 요약해 보자. 논지를 쓴 다음에 질문을 던져 보라.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이 논지가 어떤 변화를 주고 어떤 힘을 준다면 한 마디로 훌륭한 논지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그 논지가 신자의 삶에 아니 말하는 사람의 삶에 아무런 힘도 변화도 도움도 주지 못한다면 논지를 다시 써야 할 것이다.



    아래의 예를 통해서 설교의 요지 만드는 법을 살펴 보라.



    제목 : 다 이루었다

    본문 : 요 19:28-30

    논지 : 그리스도의 "다 이루었다"는 신자의 구원이 완성되었음을 선포한다.

    ① 구원에 대한 예언이 다 이루었다.

    ② 형벌의 지불을 다 이루었다.

    ③ 의와 능력의 수여가 다 이루었다.

    ④ 장래 문제 해결까지 다 이루었다.



    제목 : 그리스도의 피

    본문 : 롬 3:23-26

    논지 : 그리스도가 쏟은 피는 구원의 확실한 증거이다.

    ① 내게 주어진 죄용서의 표이다.

    ② 하나님과 화목 되었다는 표이다.

    ③ 내게 주어진 생명의 표이다.

    ④ 내게 주어진 능력의 표이다.



    제목 : 불멸의 지체

    본문 : 요 15:5

    논지 : 불멸의 지체는 그리스도와 한 몸된 나와 교회이다.

    ① 그리스도가 돌보신다.

    ② 그리스도의 경험이 나의 경험이다.

    ③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의 능력이다.

    ④ 그리스도처럼 절대로 망하지 않고 불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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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논지에서 설교까지(1)





    이제 논지에서 설교까지 작성해 보자. 창 22:6∼14를 가지고 두 개의 설교를 만들어 보았다. 하나는 예배에 집중하였고 또 하나는 사랑에 초점을 맞추었다.



    첫 번째 설교



    사도바울이 늘 하신 말씀대로 산제사를 드리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바쳐졌으나 살아서 제단을 내려온 이삭에서부터 유래된다. 그는 하나님께 드려졌다. 그러나 살아 있었다. 그래서 산제물이 되었고 평생 산제사로 삶을 보냈다.



    1단계

    제목 : 산제물

    논지 : 예배에서 자신이 산제물임을 확인한다.

    1) 제사는 죽음으로 시작된다.

    2) 가장 귀한 것을 제물로 드린다.

    3) 예수는 우리의 양이다.



    2단계

    제목 : 산제물

    논지 : 예배에서 자신이 산제물임을 확인한다.

    도입부분 :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죽는 심정으로 자신을 드리는 것

    1) 제사는 죽음으로 시작된다 : 모든 종교가 제물은 죽인다. 아벨도 죽음으로 제사. 하나님은 이삭을 제물로 원하신다. 그는 죽어야 한다.

    2) 가장 귀한 것을 제물로 드린다 :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가? 목숨이다. 자신이다. 아들이다. 그것을 하나님께 드린다. 하나님은 이삭을 받고 양을 대신 죽인다. 이삭은 살아서 내려온다.

    3) 예수는 우리의 양이다 : 양이 대신 죽음으로 이삭은 살았고 산제물이 되었다. 그는 평생을 통해서 산제사를 드린다. 예수를 양으로 대신 드렸다면 우리도 이삭이다. 산제물이다.



    3단계



    산제물



    예배하면 생각하는 것이 설교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신자들은 예배하러 가는 것이 곧 설교 들으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늦게라도 와서 설교만 듣고 나면 예배에 참석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설교가 감동적이면 예배를 한 느낌이 있고 그렇지 않으면 예배에 참석한 것 같지도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크나큰 오해이다.

    예배는 신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신학교 다닐 때 너무나 반복되는 예배에 싫증을 느낀 나머지 기숙사에 그냥 앉아 있으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영어 단어라도 더 외우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자 선배 한 사람이 방에 들어왔다. "예배하러 가지." 안가겠다고 하자, "무슨 소리야 목사 되겠다는 사람이. 어서 가자고."

    이 말은 내 마음에 깊이 박혔다. 그렇다. 예배는 목사 지망생이 아니더라도 신자로서 가장 열심히 해야할 일이 아니었던가. 이스라엘인들은 예배를 목숨처럼 생각했다. 어떤 때는 적군이 안식일에 쳐들어 왔다. 적이 공격하는데도 그들은 대항하지 않았고 몰살되기까지 예배는 계속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특별한 백성들이었다.



    1) 제사는 죽음으로 시작된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예배를 목숨 걸고 하였다. 박해시에 신자들은 경찰이 예배 장소를 알고 있으며 잠복하고 있다는 정보를 듣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예배를 중단하지 않고 약속한 장소에 나타났다. 이제 이 예배는 세상에서 마지막 드리는 것이다. 그들은 순교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 예배는 참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예배의 의미이다.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곧 목숨을 바치는 것이었다. 하나님 앞에서는 반드시 생명이 끝나야 했다. 죄악된 인간의 모든 것은 거기서 그친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께 돌아간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이들의 생명을 거두신다. 본래 주셨던 모든 것도 거기서 거두신다.

    이 예배는 창세기부터 시작되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의 아들인 아벨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렸다. 양을 잡아서 그의 피를 드린 것이다. 그러나 곧 그의 제사는 죽음과 연결되었다. 질투한 형 가인은 그를 들로 유혹해서 돌로 쳐서 죽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피는 제물이 되어 소리쳤고 하나님께 상달되어서 받아들여졌다.

    이방의 종교에서도 예배는 가장 거룩한 것이었다. 언제나 무슨 일을 할 때 제사를 드렸다. 제물이 없는 제사는 없었다. 가장 좋은 제물은 인간이었다. 아름다운 처녀나 총각이 드려졌다. 그들은 죽어야만 했다. 칼로 그들의 심장을 도려내어 신에게 드려졌다. 신은 그들의 피를 받고 만족해하면서 예배하는 이들에게 복을 내린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듯 인간을 제물로 원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아무 것도 받을 것이 없었다. 인간의 것을 원하지도 않았다. 단지 인간의 상한 심령을 받기를 원하셨다. 인간이 죄악에서 돌이켜서 하나님의 도움을 원하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죄악에 대한 형벌은 반드시 주어져야만 했다. 세상 신과 다른 점이 여기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무엇을 원하지 않는다. 아무리 좋은 부분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은 죄악에 물들어 있을 뿐이다. 처녀고 선한 사람이고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받을 것이 없었다. 근본적으로 저주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 인간은 죽어야만 했다. 그것이 그치고 다시 만들어져야만 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물을 죽이신다.



    2) 가장 귀한 것을 제물로 드린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셨다. 아들을 낳을 수 없는 그에게 그것도 백살이나 되었을 때 귀한 아들을 주신 것이다. 그 아들은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백성들의 조상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역시 그 아들도 죄악의 사람이었다. 그대로는 하나님이 사용할 수 없었다. 누구나 한 번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허물로 죽어야만 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잡아서 제물로 드리라는 명령을 듣는다. 이미 아브라함은 살만큼 다 살았다. 이제 그 아들과 함께 아브라함의 생명도 그치는 것이었다. 하루 밤 사이에 아브라함은 완전히 죽음을 문턱에 둔 사람처럼 변해 버렸다. 이렇게 잔인한 하나님을 계속 하나님으로 경배해야 할까? 아니면 그만두고 세상으로 돌아가 버릴까?

    여기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질문이 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칠 줄 하나님이 모르셨던가? 아니면 아셨던가? 만약 몰랐다면 신이 아니다. 점쟁이만큼도 못한 신이다. 분명히 아셨다. 알면서 왜 그렇게 시험하는가? 고통을 주기 위해서인가? 아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과 아들은 이 과정을 통과해야 성장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함께 산으로 올라갔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순종했다. 아버지는 아들을 결박하고 칼을 목에 댔다. 이제 그들은 죽는 것이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중단될 것이었다. 이제 아브라함은 무엇보다도 존귀한 하나님께 순종해서 가장 귀한 보물을 바친다. 축복보다 축복의 근원을 선택한 것이다. 모든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이었다.

    이렇게 해서 이삭은 죽은 사람이 되었다. 그의 죽음과 함께 그의 모든 것은 그쳤다. 죄악도 옛 사람도. 인간 누구나 가진 악하고 간교한 성품도 그쳤다. 병이 있었다면 병이 그쳤고 슬픈 문제나 고통의 문제가 있었다면 그것도 끝났다. 모든 인간적인 한계는 여기서 그치고 있었다. 이삭은 푸른 하늘을 보면서 하나님께 드려졌음을 믿었다.

    이 때 하나님은 그들을 중지시켰다. "그만! 그것이면 족하다. 내 앞에서 자신을 바치는 그 마음이면 된 것이다." 그리고는 스스로 자신에게 드릴 제물을 주셨다. 멋진 양 한 마리였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양의 목을 따고 피를 쏟으면서 자신들이 죽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 양의 몸을 태우면서 자신들이 태워지고 없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하나님의 제단에 올라갔다가 살아서 내려온 것은 아브라함의 아들밖에 없다. 이들은 남은 여생을 산제물로 살았다. 그들은 때때로 양을 잡아서 같은 의식을 반복해 예배했다. 이들은 모든 신자의 모습이다. 신자들은 이들과 경험을 함께 한다. 우리는 이삭처럼 죽으러 여기 나온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 옛 것이 다 함께 죽는 것이다.



    3) 예수는 우리의 양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보면서 함께 그를 죽이는 경험을 한다. 그는 우리 대신 제물이 되었다. 그는 완전한 제물이었다. 진실로 그는 우리의 모든 죄와 저주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서 형벌을 받는다. 그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과 동일시된다. 죽음으로 우리의 모든 저주도 함께 죽는다. 미움과 한과 근심과 걱정과 고통거리도.

    그리스도 곧 우리 양의 죽음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이들은 그의 살아나심과 자신을 역시 동일시한다. 그리스도 우리를 대신해 제물 되신 이 그는 영광의 몸으로 다시 살아나셨다. 여기서 우리는 이 부활이 우리 속에서 시작되었음을 믿음으로 안다. 새 생명이 솟아오르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믿는다. 안 느껴져도 그렇게 행동한다.

    예배는 이러한 경험을 재현한다. 이사야가 본 하나님의 환상은 무서운 것이었다. 성전 안에는 거룩한 연기로 가득 차고 여호와의 옷자락은 그 안을 덮었다. 천사들의 찬송가는 성전 문지방을 흔들리게 하였다. 그 광경은 너무도 무서워 감당할 수 없었다. 그는 즉시 죽은 자처럼 되었다. 그 이후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일어났다.

    이것은 단순히 죽고 사는 경험이 아니다. 이렇게 영원한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죽었다가 다시 산다. 죽어야만 다시 사는 것이다. 성품을 고치고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에 대해서 죽어 모든 것은 그쳤다. 이제 전혀 새로운 삶을 받은 것이다. 차츰 강해지고 귀해지는 게 아니다. 이미 부자요 왕이다.

    그리고 살아있는 제물로 새 사람으로 다시 살아서 나가는 것이다. 새 생명의 사람이다. 하나님께 바쳐진 모든 것은 거룩해진다. 하나님께 바쳐진 우리도 거룩해진다. 이 경험은 예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예배 의식을 통해서 죽고 다시 산다. 예배의 모든 순서는 우리를 죽이고 살린다. 기도도 찬송도 헌금도 사도신경도…….

    산제물이라는 신앙 고백은 반복되어야 한다. 산제물이 악하고 더러운 일에 참여할 수 있는가? 속이고 거짓말하겠는가? 그는 죄를 향해 죽고 축복을 향해 일어난다. "내가 네게 큰복을 주고 너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가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너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

    스스로를 설득하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설득하라. 이삭의 경험이 곧 내 경험이다. 나는 하나님의 제단에서 살아 내려온 존재이다. 나는 하나님께 드려진 산제물이다. 나는 하나님의 것이다. 내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도 제단에서 죽었다. 나의 죄와 병과 모든 악한 것들은 다 그쳤다. 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다. 하나님의 축복 그 자체이다.

    이제 우리도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사야처럼 하나님 앞에 오는데 우리는 마음과 몸을 정돈해야 한다. 시간을 지켜야 한다. 의복을 잘 고르고 엄숙한 마음을 가지라. 모든 예배 순서를 죽고 사는 문제로 대해야 한다. 예배는 신자들에게 가장 우선할 일이요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예배를 기뻐하라.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새로운 존재로 다시 살아난다. 그리고 이러한 죽음과 부활의 훈련은 온 정성과 뜻을 다해 반복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명령하신다. "매 월삭과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이르러 내 앞에 경배하리라."(사 66:23) 우리는 정한 시간에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에 의해 죽고 다시 사는 훈련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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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논지에서 설교까지(2)





    두 번째 설교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사람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 그가 받은 사랑은 표현되어야 한다. 그것이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시험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하는가? 그래서 너무도 소중한 아들을 바칠 정도로 사랑하는가? 아브라함은 아들을 바치면서 자신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경험하게 된다.



    1단계

    제목 : 산제물

    논지 : 받은 사랑으로 살라.

    1)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2) 사랑은 희생과 드림으로 확인된다.

    3) 사랑은 희생과 드림으로 성장한다.



    2단계

    제목 : 산제물

    논지 : 받은 사랑으로 살라.

    사랑은 모든 것을 바꾸어놓는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다. 그러한 사랑이 우리에게는 없는 것일까? 아니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기에게만 있는 생명을 주셨다. 그것이 사랑이다.

    1)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 필레오, 에로스, 아가페 등 여러 말을 하지만 사랑은 하나뿐이다. 나머지는 다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가장 가까운 것은 어머니의 사랑이다.

    2) 사랑은 희생과 드림으로 증명된다 :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사람은 거기 반응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그 사랑이 자기 속에 있음이 증명된다. 이 결단을 통해 사랑은 자란다.

    3) 사랑은 희생과 드림으로 성장한다 : 사랑은 드림으로 산다. 그것이 본질이다. 이삭은 드림으로 사랑을 확인하고 다시 그 사랑으로 인해 산다. 그래서 산제물이 된다.



    3단계



    산제물



    가정을 가장 가정되게 만드는 것은 사랑이다. 이것이 가정을 작은 천국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사랑, 이것은 어느 모임이나 가정처럼 만들고 천국처럼 만들어준다. 특별히 영적인 가정, 교회라면 이 사랑이 반드시 요구된다. 사랑이 없다면 교회는 교회의 일을 하지 못한다. 만약 가정에서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면 교회에서라도 찾아야 한다.

    뉴욕 데일리 뉴스는 예방 의학 전문가 피터 한센 박사의 연구를 보도했다. 건강을 위해서는 건강 음식, 규칙적 운동, 나쁜 습관 버리기 등을 50점으로 보고 남은 50점은 "사랑"에다 주었다. 사랑은 사람을 건강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웃 사랑은 도덕이 아니라 건강의 문제이다." 성경은 사랑을 그 이상의 영적인 건강과 번영으로 본다.

    사랑을 간단히 말할 수는 없다. 오늘은 그 중에 한 요소만을 찾아 함께 느껴보려고 한다. 사랑은 표현된다. 빛이 감추일 수 있는가? 소금이 그 맛을 감출 수 있는가? 미움은 아무리 사랑으로 가장해도 그 빛깔이 나오기 마련이다. 사랑은 아무리 감추어도 나타난다. 눈빛이 분위기가 말을 한다. 행동으로 나타난다. 상대를 유익하게 하려 한다.

    사랑은 무엇인가 주지 않고는 배기지 못한다. 그리고 희생한다. 자기를 불태우는 촛불이 사랑의 속성을 말해준다. 자신은 사라지고 없더라도 사랑하는 대상이 조금이라도 밝게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교회는 사랑의 힘을 주고 그 사랑을 행동할 수 있도록 훈련시켜야 한다. 사랑의 힘과 행동, 그것은 교회의 구성원들이 서로 주고 받아야 할 보물이다.



    1)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만 온다.



    아가페니 필레오니 단어로 사랑을 말하지 말라.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이 있다.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농도가 짙은 사랑이다. 2년 간 안암동의 10층 아파트에서 불이 났다. 어머니와 두 아들이 창틀에 매달렸다. 이미 복도와 집안까지 불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고등학생과 대학생 아들들은 화분 놓는 곳에 섰다. 어머니는 그 밑에 매달렸다.

    고가 사다리가 다가가자 어머니는 떨어졌다. 다행히 밑에 천막이 있어서 부상은 당했지만 목숨은 건졌다. 기자가 인터뷰한 것을 들었다. 화분 놓는 곳에 서면 쉽지만 자식들을 위해서 양보하고 밑으로 내려간다. 고가 사다리가 다가오자 자식들을 먼저 구하라고 손을 놓고 떨어진다. 말도 안 되는 이 행동이 왜 나오는가? 사랑이요 희생이다.

    사랑은 자신을 유익하게 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대상만을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을 소모품처럼 버리고 만다. 그 어머니는 허리와 다리를 다치고 평생을 고생하리라. 하지만 아픔이 일어날 때마다 더욱 자식들을 위해서 축복하고 감사하리라. 이것이 사랑이다. 자기의 손해와 부끄러움을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을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희생한다.

    상대를 향해 사랑이 없다고 불평하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교회나 목사가 사랑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본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다. 주는 것이다. 해주어도 모른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하지 않고 있다. 사랑에 무슨 불평이 있으랴. 사랑 받음으로만 기쁨을 느끼는 사람은 사랑을 모른다. 주고 또 주면서 기쁨을 느끼는 것이 사랑이다.

    우리 모두 이러한 사랑을 가정에서 기대한다. 그리고 영적 가정인 교회에서 기대한다. 사랑은 주는 것이다. 얼마나 우리 속에 사랑이 결핍되었던가! 우리 속의 사랑은 흔적뿐이다. 본래 우리에게는 그 힘이 있었다. 인격도 완전하였고 지혜도 충만하였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교제하여 그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 하나님처럼 사랑할 수 있었다.

    이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모두가 한계 속에서 힘들어한다. 사랑을 주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건 조금이라도 받아보려고 한다. 그래서 애인을 찾고 가정을 찾으며 사람들 틈에 끼어서 한 통속이 되어보려고 한다. 하지만 모두가 다 비슷한 상황인데 어찌 사랑할 힘이 있겠는가. 북한 사람들처럼 아무 것도 없는데 어찌 남에게 베풀 수 있는가.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신다. 내게로 와서 받으라. 그러면 산다. 여러 천년 전에 아브라함도 그리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그의 백성이 되었다. 하나님은 결핍된 그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이미 늙은 그에게 아들을 주었다. 더 많은 것도 약속하였다. 하나님의 사랑에 쪼이면서 결핍은 치료된다. 처음에는 받는 사랑의 단계이다.

    사랑을 받으며 아브라함의 삶은 퍼져 나간다. 풍족한 삶이 펼쳐진다. 재산은 많아진다. 빈손으로 고향을 떠난 그였다. 생활도 안정되고 늙은 몸이 아들도 낳았다. 이제 앞으로 모든 것이 더 좋아질 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음 단계로 그를 올리시기를 원했다. 지금까지의 축복은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 주는 사랑의 단계로 나가야 했다.



    2) 사랑은 희생과 드림으로 증명된다



    어느날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잡아 내게 제사를 지내라." 지금까지의 축복은 모두 취소되는가? 그는 살만큼 살았다. 차라리 그 자신이 죽고 말지 어떻게 자기 아들을 죽여 제사를 지내라는 것인가! 하루 밤사이에 아브라함은 죽음을 문턱에 둔 사람처럼 변해 버렸다.

    여기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질문이 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칠 줄 하나님이 모르셨던가 아셨던가? 몰랐다면 전능의 신이 아니다. 점쟁이만큼도 못한 신이다. 분명히 아셨다. 그러면 알면서 왜 그렇게 시험하는가? 고통을 주기 위해서인가? 아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과 아들은 이 과정을 통과해야 성장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확실히 해야 한다. 모든 역경은 이유가 있다.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신 것이 확실한가? 그러면 그의 손에 자신을 맡기고 시험을 통과하라. 절대로 그는 우리를 망하게 하지 않으신다. 힘든 과정은 다 필요한 것이다. 단지 우리는 우리의 일만 하면 된다. 바로 하라. 가장 제대로 하는 것은 의무보다 사랑으로 하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함께 산으로 올라갔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물었다. "재물은 어디 있나요?" 아버지는 아프게 말한다. "사랑하는 아들아.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 제단에 도달했다. 그러자 아들은 깨달았다. 자신이 바로 제물이었던 것이다. 이제 나이는 십여 세 밖에 되지 않았다. 이제 하나님은 자신을 원하고 계셨던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순종했다. 말없이 아들은 결박을 받았다.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의 목에 칼을 댄다. 이제 그들은 죽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 단계에서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렇다. 자기 목숨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했다. 의무나 계명은 여기까지 올 수 없다. 의무 때문에 어머니가 10층에서 떨어져 죽지 않는다.

    이삭은 자기의 목숨과 구 만리 같은 자기의 여생을 바쳤다. 아브라함은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한 외아들을 바쳤다. 그들은 바치면서 느끼게 된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내 목숨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나님을 위해서 이렇게 바치게 됨을 감사한다. 이렇게 두 사람은 생명을 드리면서 가장 고상한 신앙의 단계로 도약하는 것이다.

    10층에서 손을 놓는 것은 무서운 용기이다. 사랑은 용감하다. 사랑은 알아달라고 하지 않는다. 사랑은 상대방의 반응을 보거나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사랑은 말없이 그냥 드린다. 그러면서 아깝거나 억울하지 않다. 그냥 일어나는 사랑으로 인해서 감사할 뿐이다. 아무런 후회가 없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강하다. 영적 진리이다.



    3) 사랑은 희생과 드림으로 성장한다.



    이 때 하나님은 그들을 중지시켰다. "그만! 그것이면 족하다. 자신을 바치는 그 마음이면 신적인 사랑이다." 그리고는 스스로 바칠 제물을 주셨다. 멋진 수양 한 마리였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양의 목을 따고 피를 쏟으며 양이 자신들 대신 죽음을 본다. 하나님은 그들의 사랑을 다시 더 큰사랑으로 반응하신다. 그들을 크게 하신다.

    제단에 바쳐진 제물은 반드시 죽어야 했다. 하나님 자신까지도 아들의 목숨을 제단에서 끊었다. 하지만 이삭만은 유일하게 살아 내려왔다. 살았지만 죽은 것이요, 죽었지만 산 사람이 되었다. 세상 사람으로서는 죽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는 살았다. 하나님께 바쳐졌기에 그들은 거룩한 존재가 되었다. 동시에 사랑의 존재가 되었다.

    이 이야기가 무엇을 가르치는가?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았다. 교회에 출석해 하늘의 복을 받는다. 그러나 자신의 전체를 하나님께 드려야 참 가족으로 인정받는다. 부분이 아니다. 얼마의 돈이나 시간이 아니다. 나 전체를 다 죽여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그렇게 그의 제단에서 죽고 다시 살아야 한다. 그러면 사랑의 존재가 된다.

    인간적인 욕심과 미움과 한계는 죽는다. 병도 가난도 문제도 자신을 바치는 사람에게는 힘을 쓰지 못한다. 죽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나게 된다. 자녀 낳기만 하면 어머니가 아니다. 사랑함으로 어머니가 된다. 자기의 전체를 준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향해 전체를 드림으로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남은 여생을 살아있는 제물로 보냈다. 자신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았다. 때때로 양을 잡아서 같은 의식을 반복하며 사랑을 확인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한없이 받고 있으면서도 아무 것도 드리지 못한다면 받은 것이 없는 사랑이다. 사랑은 반응한다. 하나님이 나오도록 주고 또 준다. 이것이 산제물의 모습이다.

    대만의 한 청년이 연모하는 처녀에게 2년간 매일 연애 편지를 썼다. 세계 기록이다. 처녀는 결혼했다. 우편 배달부와 글보다는 직접 접촉이 더 강한 것이다. 가정을 향해서도 그렇고 하나님을 향해서도 그렇다. 아무리 사랑해도 만나고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교회를 위해 일하고 봉사하고 교제하는 것이다. 바치는 훈련이다.

    많은 분들이 이 성전을 위해서 수고했다. 재산과 물품을 바쳤다. 매일 와 청소하였다.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경험하는 것이다. 바친 사람은 그 마음을 유지하라. 아까워 말고 더욱 헌신하라. 하나님은 이미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 세상을 주시고 아들을 주시고 자신의 영을 주셨다. 사랑으로 화답하기만 하면 된다.

    그를 사랑해서 자신을 바치는 것이 바로 가족이 되는 증거이다. 나는 날마다 시간마다 외친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세상의 무엇보다도 내 생명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나이다." 외쳐보라. 그러면 나의 가슴이 터지게 넘치는 것을 경험한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가족이 되고 그는 우리 아버지가 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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