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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중한 내 인생 /신명기26:16-19/ 형님의 얼굴 /창세기33:1-11/ 김기석 목사
    2015-07-12 17:10:19   read : 2297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자만심과 자학 사이

    병원에 가보면 세상에 안 아픈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요. 꼭 몸이 아프지 않다 해도, '나는 건강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건강하다는 것은 몸의 각 부분들이, 그리고 마음이 균형을 잃지 않았다는 말인데 완벽한 균형은 없습니다.

    그리스말로 '병'은 '균형상실' 혹은 '치우침'이라는 뜻을 담고 있답니다. 몸이라는 유기체, 마음이라는 유기체의 균형을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요. 어느 부분에서는 넘치고, 또 어느 부분에서는 모자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인가요? 우리는 자만심과 자학 사이를 오갑니다. 어떤 때는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 콧노래를 부르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감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자만심도 병이지만 자학도 병입니다.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했으면서도 무엇이라도 된 것처럼 생각하는 것(갈6:3)을 바울은 자기 기만이라고 했습니다. 또 하나님이 우리 머리에 기름을 부으시고 귀한 손님으로 맞아주시는데(시23:5)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면서 함부로 사는 것은 죄입니다.

    남에 대한 실망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입니다. 그 결과가 자못 파괴적일 수 있거든요. 自暴自棄는 자기 스스로에게 가하는 폭력이고, 자기를 함부로 내던져버리는 행위입니다. 사람들이 자포자기에 빠지는 것은 대개 두 가지 때문입니다.

    첫째는 자기의 유한성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남의 떡이 더 커보인다는 말이 있지요? 이런 이들의 눈은 항상 다른 이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항상 남과 자기를 비교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사람들의 시선은 늘 자기보다 형편이 나은 사람을 바라보지요. 그러니 늘 불만족이지요.

    둘째로 사람들은 자기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자포자기에 빠집니다. 뭔가를 멋지게 해내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워합니다. 하지만 자기 속에 있는 가능성을 보고, 또 그것을 갈고 닦는 일에는 소홀합니다. "게으른 사람은 손 하나 까딱 않고 포부만 키우다가 죽는다"(잠21:25)지요?


    대체할 수 없는 존재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은 사람은 남을 부러워하느라 정신이 팔려 자기의 소중한 삶을 허비하는 사람이 아닐까요?
    영혼이 못생긴 사람들은 매일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이런대요. '내 얼굴이 장동건처럼만 생겼어도…', '내 키가 10㎝만 컸어도…', '내가 미국에서 태어났더라면…'.

    그래서 어쨌단 말이에요? 교회 살피 꽃밭에 하얀 접시꽃이 피었어요. 그리고 키 작은 채송화도 예쁘게 피었습니다. 봄꽃이 진 자리에 피어난 그 여름 꽃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시원해져요.
    채송화는 장미를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접시꽃은 백합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저마다 자기에게 주어진 본성에 따라 피어날 뿐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을 닮으려다보니 우리는 쉽게 지치고 실망하게 됩니다. 돈과 명예와 쾌락과 힘을 얻기 위해 쉴새 없이 달리다보면,
    어느 순간 내면의 공허함을 느끼게 되지요. 그러면 자기 자신이 낯설어지고, 자기와 대면하는 시간을 피하고 싶어서 사람들은 욕망이 잡아끄는 대로 이끌립니다.

    그러면 내면의 소리는 점점 들려오지 않고, 하나님의 질서에서 차츰 멀어지게 마련입니다. 이게 타락이에요. 잘 산다고 하는 것은 남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답게 사는 겁니다.

    봉화에 사시는 전우익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어요.

    "동리에 개가 몇 마리 있는데 한 놈은 지나가는 사람 보는 족족 짖어대요. 다른 한 놈께선 하루 종일 지그시 눈감으시고 편히 엎드려 있어요. 가는가 보다 오는가 보다, 나하고 무슨 상관이랴. 난 이렇게 게으름 피우며 살란다 하는 툽니다. 앞의 놈같이 살면 암 걸리기 십상이구요. 뒷놈같이 살고 싶어요."(『사람이 뭔데』중에서)


    앞의 놈처럼 사시겠어요, 뒷놈같이 사시겠어요? 유대인 철학자인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은 우리는 '복사판'이 아니라 '원판'으로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 말을 듣는 순간 뭔가 눈이 떠지는 느낌을 받았어요. '나'라고 하는 존재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어요.

    어느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어요. 이 말은 우리들 각자는 이 세상에 나눠줄 수 있는 고유한 선물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에요. 내가 아니면 줄 수 없는 선물 말입니다. 석가모니는 태어나면서 '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고 외쳤다지요?

    그 말은 자기가 제일 잘났다는 말이 아니라, 태어난 생명의 존귀함을 말하는 걸 거예요. 지금 우리 사는 꼴을 보면 기가 막히지요? 하나님이 우리들 각자에게 주신 밑천을 다 까먹고 껍데기만 남은 것 같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 속에는 하나님이 주신 가능성이 있어요. 비록 숨겨져 있다 해도 말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존경해야 해요. 제 잘난 맛에 살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 속에 하나님이 계심을 믿어야 한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실패할 수 없고 낙심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믿지 않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여쭙고 사는데 어떻게 실패할 수 있겠습니까?


    참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 살기 위해서 힘이 있어야 합니다. 힘이 없으면 자꾸 여기저기에 매이게 되니까요. 그런데 그 힘은 어디에서 생길까요? 오늘 본문은 그 답을 우리에게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규례와 법도를 행하라고 네게 명하시나니 그
    런즉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지켜 행하라(16)


    주님의 명령을 지켜 행하는 것이 곧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분이 하라시는 일은 별로 할 생각이 없는 사람들은 사실은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는 거 아닐까요?
    할끔할끔 눈치를 보면서 경우에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면 그는 참으로 믿는다고 할 수 없겠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명령을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지켜 행하라고 합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올인' 하라는 겁니다. 전적으로 자기를 그분의 마음에 던지라는 겁니다. 그래야 우리 속에 다소라도 남아있는 보화들이 역사의 용광로를 통해 드러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초본 식물인 대나무가 하늘 높이 오를 수 있는 것은 마디가 있기에 가능하다지요? 영적인 게으름뱅이에다가 아담의 후예인 우리가 더할 수 없이 지극한 것에 가닿으려면 하나님의 뜻에 대해 '아멘'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아멘' 하기 위해서는 조용히 앉아 그분의 마음의 바다에 우리를 던져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던가요? 모처럼 기도를 하려고 앉으면 온갖 잡념이 기다렸다는 듯이 떠오릅니다. 갑자기 처리하지 못한 일이 떠오르고, 해야 할 일이 떠오르고,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르고, 급기야는 피곤기가 몰려들어 기도를 포기하게 만듭니다. 어쩌면 이것은 당연합니다. 그렇다고 기도를 포기하지는 마십시오.

    기도에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몸이 편안해야 합니다. 뭔가를 향해 달려가는 데 익숙해진 몸은 가만히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뭔가를 보거나 듣거나 만지거나 말하거나 움직이지 않으면 불안해집니다. 이게 우리 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고요히 앉아서 자기 몸을 마음으로 쓰다듬고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참 수고했다', '이제는 긴장을 좀 풀어라' 하면서 몸과 대화를 하다보면 몸과 마음이 다 편안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바로 그 때야말로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 속에 스며드는 순간입니다.

    이럴 때면 '예수님' 하고 부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훌륭한 조력자가 옆에 계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께 우리 사정을 내놓고 '어떻게 할까요?' 하고 여쭈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원하시는 바를 우리가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받들면,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보배로운 백성으로 인정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사람은 '칭찬과 명예와 영광'을 덤으로 얻게 됩니다.

    하지만 덤으로 얻는 것보다는 우리가 대체할 수 없는 존재로서의 내 삶을 살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세상의 선물로 살게 된다는 사실이 너무나 좋지 않습니까? 여러분, 남이 누리는 것을 누리지 못하는 것을 속상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본래의 독자적인 생명을 살지 못함을 염려하십시오. 물론 오직 나만이 줄 수 있는 선물이 무엇인지는 스스로 알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아십니다. 우리가 몸과 마음을 주님께 들어바치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실 것입니다. 이 꿈으로 말미암아 날마다 생명의 기운에 넘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
    형님의 얼굴 /창33:1-11/ 김기석목사

    ● 얼굴

    얼굴을 '얼의 골짜기'라고 말한 분이 있습니다. 얼굴이야말로 우리 내면의 풍경을 드러내는 창이라는 뜻일 겁니다. 겉보기에는 매우 아름다운 데도 깊이가 드러나지 않는 얼굴도 있습니다.
    추한 듯 싶으면서도 형언하기 어려운 빛이 서려 있는 얼굴도 있습니다. 성형수술로 모양은 바꿀 수 있지만, 얼굴이 드러내는 깊이까지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참 고운 얼굴 하나 없다'고 탄식합니다. 수심에 찬 얼굴, 병색이 완연한 얼굴, 학대받아 쭈그러진 얼굴, 얼굴에 독살이 박힌 얼굴, 욕심에 잔주름 잡힌 얼굴…. 함선생님이 보고 싶은 얼굴은 예쁜 얼굴이 아닙니다.

    그 얼굴만 보면 세상을 잊고,
    그 얼굴만 보면 나를 잊고,
    시간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고,
    밥을 먹었는지 아니 먹었는지 모르는 얼굴,
    그 얼굴만 대하면 키가 하늘에 닿는 듯하고,

    그 얼굴만 대하면 가슴이 큰 바다 같애,
    남을 위해 주고 싶은 맘 파도처럼 일어나고,
    가슴이 그저 시원한,
    그저 마주앉아 바라만 보고 싶은,
    참 아름다운 얼굴은 없단 말이냐?"

    함석헌 선생님은 예수님이야말로 참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분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본 적은 없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수님의 얼굴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그의 존재가 곧 그의 얼굴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웃고 때로는 울기도 한 얼굴, 분노로 창백해지기도 하고, 고통으로 일그러지기도 한 얼굴이지만 그 얼굴은 고스란히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남김없이 드러낸 얼굴이었습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 교인들은 예수를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얼굴은 누구를 닮았습니까? 갓 태어난 아기를 보면 사람들은 아기의 얼굴에서 아빠나 엄마의 모습을 찾습니다. 그리고 마치 그래야 한다는 듯이 아빠를 닮았다고도 하고, 엄마를 닮아 예쁘다고도 합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 부모는 뿌듯해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우리의 얼굴은 과연 누구를 닮았나요? 가끔 거울을 보다가 퀭한 눈을 한 어떤 사내가 저를 바라보고 있어 놀랄 때가 있습니다. 권태롭고 진부하고 지루한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 에서의 길과 야곱의 길

    오늘 본문에서 야곱은 형 에서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다'고 말합니다. 어찌 보면 속보이는 말처럼도 들리지만, 꼭 그렇게만 볼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 대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형제간의 반목의 역사를 잠시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에서와 야곱은 쌍동이 형제입니다. 그들은 태중에 있을 때부터 싸움질을 해댔습니다. 그들이 태어났을 때 먼저 나온 아이는 살결이 붉은데다가 온몸이 털투성이어서 그 이름을 에서라고 했고, 나중에 나온 아이는 형의 발뒤꿈치를 잡고 있어서 이름을 '야곱'이라고 지었습니다.

    우리말에도 발목을 잡는다는 말이 있는데, 그다지 좋은 뜻으로 사용되지는 않습니다. 두 아이는 한 배에서 났으면서도 기질은 영 딴판이었습니다.

    에서는 호방한 성품인데다가, 성격상 복잡하게 얽힌 데가 없는 자연인이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동생인 야곱이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넘겨달라고 말했을 때에도 야곱의 계책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동생 야곱이 눈먼 아버지를 속여서 축복을 가로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동생을 죽이리라고 다짐하지만 그 분을 오래 품지는 않았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야곱은 정말 비열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직분을 가로챈 것도 문제지만, 아버지를 속이기 위해 몸에 털을 붙이고 음성까지 변조하면서 에서의 흉내를 내는 모습은 그리 좋아 보이질 않습니다. 요즘 말로 야곱은 개인기를 부린 것인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야곱을 자기들의 선조로 내세우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호방하고 털털한 자연인 에서가 오히려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데도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히브리인들의 탁월한 현실인식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강대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생존을 모색해야 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멋스러움이 아닙니다. 살아남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정의는 살아남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생래의 기득권을 쉽게 포기하는 에서는 그들의 삶의 이상이 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에게 주어져 있는 생의 가능성을 가볍게 보는 에서의 휴머니즘보다는, 오히려 경솔하게 다루어진 남의 생득권을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야곱의 비정함에 손을 들어줍니다. 삶을 대하는 야곱의 태도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을 모색해야 하는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 환도뼈가 부러지고 나서야

    물론 히브리인들은 야곱의 행동을 무조건 긍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장자의 명분을 탈취하고,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챈 야곱의 삶을 돌아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것은 평안이 아니라 고생이었습니다.

    그는 형의 분노를 피하여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도 종살이와 같은 세월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날이 갈수록 험해지는 외삼촌과 외사촌들의 안색에 쫓기듯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지만, 고향도 그에게는 편안한 곳이 아닙니다. 분노로 떨던 형 에서를 피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고향가는 길목에 있던 얍복강 나루에서 또 다른 시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모순과 과오로 얼룩진 자기의 과거와 진지하게 맞서기 위해서 가족들을 먼저 강 건너로 보내놓고 한밤중에 홀로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그가 살아온 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을 겁니다. 자기가 이루었다고 생각했던 재산과 가족이라는 것도 더 허망해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영혼의 사투를 벌렸습니다. 성경에서는 그것이 하나님의 사자와의 씨름으로 형상화되고 있습니다.

    그 씨름으로 그의 환도뼈가 부러졌습니다. 환도뼈는 남자의 힘의 근원을 가리키는 말이니까, 지금까지 그를 지탱해왔던 삶의 방식이 무너졌다는 말입니다. 환도뼈가 부러지는 아픔이 있었지만, 그 밤이 그에게 비극의 밤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밤에 그는 야곱이라는 부끄러운 이름 대신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야곱으로 태어난 이스라엘로 환골탈태한 것입니다. 시련을 통해 그는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 브니엘을 지나

    그가 아픈 다리를 끌며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습니다. 브니엘은 '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지난밤에 그는 소중한 것을 잃었지만,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것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번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으셨던 하나님, 그 하나님의 다정한 얼굴이 그를 비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형을 만날 일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는 몸을 일곱 번씩이나 굽히면서 형을 향해 나아갑니다.

    꿈속에서라도 만날세라 두려워했던 에서의 얼굴이 눈앞에 있습니다. 늘 분노로 일그러진 모습으로 그려지던 그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습니다. 돌아온 동생이 그저 대견한 듯 싱글벙글하는 웃으면서, 한편으로는 재회의 눈물을 흘리는 형이 그곳에 있었던 것입니다.

    에서는 달려와 동생의 목을 끌어안고 웁니다. 체면과 예법을 파탈하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합니다. 과연 에서답습니다.

    옛날의 서운했던 감정의 찌끼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야곱은 목이 메었지만 차분하게 자기 가족들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형에게 솔직한 자기 심정을 말합니다.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형님의 얼굴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놀라운 고백입니다. 지난날에 매이지 않고 흔쾌히 형제를 받아들이는 에서의 모습도 아름답지만, 그런 형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야곱의 모습도 아름답습니다.

    저는 이 두 형제의 화해사건을 돌아보면서 해방된 지 59년이 지나도록 남과 북으로 갈라져 반목하고 전쟁까지 치른 우리가 언제쯤이나 서로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경제력이 생기면서 패권주의 정책으로 선회한 중국과 오만한 초강대국인 미국의 틈바구니에서 우리 강토에는 짙은 먹장구름이 드리워 있습니다. 이 먹장구름이 언제쯤 걷힐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길은 하나뿐입니다.

    분단이 극복되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한 변방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얍복강의 어둔 밤에 처하여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둠을 통해 우리가 새로워지면 새로운 태양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분단으로 찢기웠던 이 한반도가 새로운 브니엘, 곧 하나님의 얼굴이 될 것입니다.

    분단의 세월로 인해 남과 북의 형제자매들이 서로의 가슴에 입힌 상처가 여전히 아물지 않아 통일을 향한 우리의 발걸음이 온전치 못하지만, 피차 서로에게 행했던 잘못을 고백하고, 서로를 다시금 형제자매로 받아들이면,

    그래서 서로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아낸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오늘 성경은 그 비전을 우리에게 새롭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꿈을 잃지 않는 한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되게 하실 것입니다. 이 광복절 기념 절기에 하나님의 온유한 빛이 우리 강토의 구석구석에 비쳐들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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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뿌리와 결실 /잠12:10-17/ 김기석목사

    어떤 아버지가 밥상 앞에서 아들이 밥알을 흘리는 것을 보고 점잖게 타일렀습니다.
    "얘야, 쌀 한 톨을 거두기 위해 농부들은 일년 동안 땀 흘려야 한단다."
    그러자 아들이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럼, 백 톨을 거두자면 백년이 걸리겠네."
    이야기 속의 아들처럼 현대인들은 어른들의 훈계쯤은 코웃음으로 흘려버리고 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말도 도무지 귀담아 듣지를 않습니다. 다들 자기 생각에 골똘해서, 또 자기 삶의 습성에 매여서 스스로를 바꿀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도 비슷한 운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답답해집니다. 말씀은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때 살아있는 말씀이 됩니다.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은 말씀을 거울로 삼아 자기를 비추어보고, 그 말씀에 따라 자기 삶을 바꿔나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의인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김재흥 목사님이 그랬지요?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You are right!' 하시면 의인이라고요. 간명하지만 옳은 말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의인과 악인의 특성을 간략하게 대조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 생명에 대한 경외

    "의인은 그 육축의 생명을 돌아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10)

    표준새번역은 이 대목을 "의인은 집짐승의 생명도 돌보아 주지만, 악인은 자비를 베푼다고 하여도 잔인하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한 마디로 생명을 아끼고, 소중히 돌보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생명이 소중한 것과 마찬가지로 무릇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이 다 소중합니다. 그것은 그 모든 것들 속에 하나님의 숨결이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생명의 주인으로 고백한다면, 온 세상에 있는 뭇 생명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잘 돌보는 사람을 보고 '옳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명에 대한 감수성이 많이 무뎌졌습니다. 날마다 생명에 대한 폭력이 자행되는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모든 생명이 '살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존재'임을 망각하고 살아갑니다. 옛 사람들은 수령이 오래된 나무 한 그루를 벨 때도 죄스러워 했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다른 생명을 취하면서도 그 생명과 하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먹는다는 행위는 하늘을 모시는 행위(以天食天)였습니다. 하지만 물건이 넘쳐나는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잊고 삽니다.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방식이 반생명적으로 변해버린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가축을 사육하고 도축하는 방식은 잔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라는 잠언의 경고가 우리 시대처럼 들어맞는 때는 없는 것 같습니다.

    불교에서는 승려들이 여름 동안 한곳에 머물면서 수행에 전념하는 것을 가리켜 하안거(夏安居)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하안거의 유래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석가모니 당시 인도에는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니는 출가 수행자가 많았는데,

    비가 많이 내리는 우기가 되면 땅 속에서 기어나오는 작은 동물들을 밟지 않기 위해 하안거의 전통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생명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다른 생명에 대해서 잔인할 수 없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자기 마음속의 날카로운 것들을 녹여낸 사람들이 아닐까요? 광주의 시인인 김준태는 자기도 모르게 무심코 어린 생명들을 짓눌러 죽일까봐서 날마다 손톱을 깎으며 더욱 사람이 되자고 마음속으로 외친다고 말합니다. <감꽃>이라는 시는 우리 현대사에 대한 기가 막힌 요약입니다.

    어릴 적엔 떨어지는 감꽃을 셌지
    전쟁통엔 죽은 병사들의 머리를 세고
    지금은 엄지에 침 발라 돈을 세지
    그런데 먼 훗날엔 무엇을 셀까 몰라.

    전쟁과 근대화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풍요로움이지만, 빼앗아간 것은 순박하고 평화로운 마음입니다. 생명에 대한 감수성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소중한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뿌리로 열매 맺음

    "악인은 불의의 이를 탐하나 의인은 그 뿌리로 말미암아 결실하느니라."(12)

    악인은 자기가 뿌리지도 않은 것을 거두려고 합니다. 그의 관심은 당장의 이익입니다. '이익'이야말로 그의 삶을 이끌고 가는 열쇠어입니다. 하지만 의인은 뿌리로 말미암아 열매를 맺습니다.

    악인의 관심이 결실에 집중되어 있는 반면에 의인은 뿌리의 견실함을 소중히 여깁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뿌리'는 '本'이고 '열매'는 '末'이다. 글자의 자형을 생각해보아도 그렇습니다. '본'이라는 글자는 나무 木의 아래에 가로획이 그어져 있어 뿌리를 가리킵니다.

    '말'이라는 글자는 나무 木의 위에 가로획이 길게 그어져 형성된 단어로 가지를 가리킵니다. 세상 이치가 다 그런 것처럼 本이 末을 살리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닙니다.

    뿌리가 가지를 살리고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지, 가지나 열매가 뿌리를 살리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뿌리가 썩으면 나무는 살 수 없습니다. 충북 보은에 있는 천연기념물 104호인 白松이 고사했다지요? 뿌리가 썩어서 생육이 멈추었기 때문이랍니다.

    잘 산다는 것은 본을 세워 말을 거두는 것입니다. 이익을 따라 살다보면 정신은 물크러질 수밖에 없다. 뿌리를 견실히 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땅 속에 있는 뿌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에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

    허영심이 많은 이들은 겉꾸미는 일에 온통 마음을 쏟느라 자기 뿌리가 병들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당장의 이익보다는 의를 추구하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는 사람이야말로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예수님도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의인은 뿌리로 말미암아 생의 열매를 거두는 사람입니다. 병든 뿌리를 살리기 위해서는 가지치기를 해야 합니다. 믿는 사람은 삶에 불필요한 곁가지들을 쳐냄으로써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살아야 신앙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 多言數窮

    "악인은 입술의 허물을 인하여 그물에 걸려도 의인은 환난에서 벗어나느니라."(13)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렵습니다. 남의 말에 사사건건 토를 달고, 한 마디 하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은 덫이 되어 발설자를 포박하는 일을 우리는 자주 목격합니다. 말이라는 게 서로 통하기 위해서 있는 것인데, 말 때문에 사람 사이가 막혀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악인은 말을 절제하지 못합니다. 의인은 말을 절제합니다. 옛 글에도 다언삭궁多言數窮이니 불여수중不如守中이라(도덕경 5장)는 말이 있습니다. 말이 많으면 자주 막히니 그 中을 지킴만 같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무조건 말없이 과묵하게 살라는 말이 아니라, 편벽된 마음이나 사사로운 뜻을 앞세우거나, 어떤 의도를 밑바닥에 깔고서 말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말이 많은 것은 대개 어딘가 모르게 자연스럽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부자연스러운 것을 굳이 설명하려니 말이 자연 많아지고, 그럴수록 복잡하게 엉켜들게 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행실만을 옳다고 여기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남의 충고에 귀를 기울입니다. 줏대가 없어서가 아니라, 자기가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한 점 흔들림 없이 자기 편견을 진리인양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답답해집니다.

    사람은 서있는 자리에 따라서 사물이나 사태를 전혀 다르게 보게 됩니다. 운전자의 입장에서 보면 보행자가 얄밉고, 보행자의 입장에서 보면 운전자가 무례합니다. 그래서 입장의 동일함을 전제로 하지 않은 진정한 이해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易地思之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남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고, 말을 절제하는 것은 진정한 이해에 이르기 위함입니다. 그는 또 하나님의 뜻을 향해 마음의 안테나를 높게 세우고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그는 재난을 모면할 수 있습니다.

    ● 모욕을 참음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16)

    화는 불(火)입니다. 그래서 화가 나면 얼굴이 붉어지는 것인가요? 그런데 화는 또한 화근(禍根), 즉 재앙의 뿌리입니다. 화 잘 내는 사람은 남의 가슴에도 상처를 입히지만, 자기 자신에게도 고통을 가합니다. 그가 있는 곳에는 평화가 자취를 감추고, 불화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합니다.

    자기 속에 여백이 없는 사람일수록 화를 잘 냅니다. 티벳의 고원지대에 살고 있는 라다크인들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심한 모욕은 '화 잘 내는 사람'이라는 말이랍니다. 살다보면 사람들 사이에 왜 갈등이 없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은 그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을 아는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의견이 갈리면 논쟁을 하지 않고 의논을 합니다.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화를 돋우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그런 관용이 낯선 외지인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한결같이 "어쨌든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해요"라는 대답을 듣게 됩니다. 이웃을 함께 살아가야 할 파트너로 생각하는 사람은 분노를 당장에 표현하지 않습니다.

    모욕을 참아내는 사람은 비굴해 보일 수도 있고, 무력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적인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는 것은 용기입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무력해서가 아니라, 불필요하기 때문에 남과 다투거나 변명을 하지 않습니다.

    화 잘 내는 사람, 작은 모욕도 참지 못하고 발끈하는 사람은 겸손을 배우지 못합니다. 정신이 자랄 틈이 없습니다. 뿌리로 사는 사람은 어떠한 모욕도 뿌리를 키우는 거름으로 삼을 줄 압니다.

    나는 우리가 근대 이후의 삶을 살면서 잃어버린 생태학적 감수성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시급한 일이라도 생각합니다. 일주일에 다만 몇 시간이라도 자연 가운데로 들어가고, 하루 중 다만 몇 분만이라도 나무와 풀 앞에 멈추어 설 수 있다면 우리 삶의 질은 달라질 것입니다.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경험하는 사람은 '말'에 치중하는 삶에서 벗어나 '본'을 바로 세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있는 곳에는 평화가 깃들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들이 머무는 곳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참된 평화가 뿌리를 내리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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