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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무엇이 문제인가
    2014-06-05 22:39:34   read : 3504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설교, 무엇이 문제인가/ 알리스테어 벡
    알리스테어 벡| 미국 파크사이드 교회 담임목사

    이 글은 알리스테어 벡 목사님의 설교 세미나 내용 중 일부로 허락을 받아 번역, 게재하였습니다.

    오늘날 수 많은 교회에서 강해설교가 사라진 이유가 무엇인가? 많은 설교자들이 부르심의 뜻을 저버리고 오늘날의 문화가 요구하는 대로 설교의 방향을 전환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성경에 대한 확신도 없고 엉뚱한 문제들에 골몰해 있는 데다가 불행히도 모범으로 삼을 만한 뛰어난 강해 설교를 들은 적도 없기 때문이다.

    강해설교의 부재는 성경의 권위와 완전성에 대한 확신이 침식당하고 있는 현실과 직결되어 있다. 19세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자유주의 세력과 복음주의 세력 사이에 전선이 형성되었다. 자유주의자들은 기적을 논박하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했으며 신약 문헌들의 역사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복음주의는 이 폭풍우를 뚫고 나왔다. 그 결과 텅 비어버린 자유주의 계열의 교회들은 비신화화된 그리스도(demythologized Christ)를 찾으려던 자유주의자들의 노력이 헛된 것이었음을 증거해 주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전선은 보다 불분명하다. 오늘날 사람들은 성경을 무시하며 폄하하고 있으며 본래 성경의 뜻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온갖 ‘이야기’(talk)를 하기 위한 도입부로만 성경을 이용하고 있다.

    [ 성경에 대한 확신의 결여 ]

    복음주의적이라고 자처하는 교회들에 가서 예배를 드려 보면, 설교 시간에 성경을 읽거나 성경에 대해 언급하기는 해도(그나마 다 그런 것도 아니다) 그 뜻을 잘못 말하거나 엉뚱한 부분을 강조하기 때문에 결국 설교 안에서 성경의 영향력이란 미미한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설교자나 회중들이나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God’s written Word)의 엄숙한 권위 앞에 경배하려는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우리는 불확실하고 불분명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유행인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확신을 주거나 권위가 있는 사람이나 그러한 대상에 대해서는 오히려 불신하는 경향이 있다. 특별히 젊은 목회자들은 이러한 문화적인 환경에 대해 압박감을 느낀 나머지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명하신 메시지보다는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설교하게 될 수도 있다.

    런던에 위치한 성 헬렌스 비숍스게이트 교회의 딕 루카스(Dick Lucas) 목사는 어느 목회자 세미나에서 이같은 설교 방법론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한 일이 있다. 루카스 목사는 “회중들이 강단을 좌지우지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성도들의 요구에 따라 메시지를 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복음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성경 강해를 방해하는 또 다른 요소는 소위 ‘예언의 말’(prophetic word)이라는 사역형태이다. 성경 강해를 주로 하다가 ‘예언의 말’ 선포로 사역의 방향을 전환한 영국의 저명한 성경 교사가 있었다. 그는 이렇게 방향을 전환한 다음부터는 본문만 낭독하고 바로 성경을 덮은 후,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예언을 시작하곤 했다. 예언 설교는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경우는 아니더라도 성도들이 성경 자체의 완전성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작용을 할 수도 있다.

    싱클레어 B. 퍼거슨(Sinclair B. Ferguson)은 예언 설교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예언 설교를 하는 이들은 예언이 성경 정경(canon of Scripture)에 무언가를 따로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예언 행위 자체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표준에 무언가 덧붙일 것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성경을 해석하고 그것을 적용하는 지혜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The Holy Spirit [Downers Grove, III.: InterVarsity Press, 1996], p. 231).

    심리학 이론에 집착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성경에 대한 확신을 약화시키는 경우가 많다. 인간이 처한 근본적인 곤경을 자존심 부족의 문제로 규정해 버리면 사람들은 구세주를 만나기 위해 십자가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심리학자를 만나기 위해 상담실 의자에 앉을 것이다.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알려면 심리학과 혼합된 신학들이 하는 온갖 말들을 들어보면 된다. 심지어는 강해 설교에서도 이런 심리학적 신학을 말하는 설교자들이 있다!

    [ 잘못된 싸움 ]

    목회자들이 정치적인 문제나 심리학적인 문제를 신학적인 문제보다도 더 교회의 중심 안건으로 생각하는 한, 강해 설교는 목회자의 정치 연설이나 ‘국가의 혼’(the soul of the nation)을 위해 투쟁하자는 외침에 밀려 잊혀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교회는 성도들에게 기도를 권면하기보다는 투표를 강조하는 형국이 되어버린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강령에 힘입어 움직이게 된다.

    20세기의 설교자 중에서 이 문제를 가장 명확하게 간파한 사람이 마틴 로이드 죤스(D. Martyn LloydJones)였다. 로이드죤스 목사는 캐나다에서 데살로니가전서 1장 5절에 대해 설교를 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기독교의 설교가 복음일 수 있는 것은 좋은 소식을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신문을 뒤덮고 있는 최근의 스캔들이라든가 최신 뉴스에 대해 논평을 하는 것은 설교가 아닙니다. 왕이나 왕자, 대통령, 수상 같은 사람들에게 나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며 국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를 말해주라고 우리에게 설교 시간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말을 할 만한 실력도 없습니다.

    … 사도 바울은 무엇에 대해 선포했습니까? 바울이 사람들에게 정치 문제에 대해 선포했습니까? 바울이 그들에게 서로 단결해서 로마 제국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을 가져다 줄 군대를 조직하라고 했습니까? 바울이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저항한 일이 있습니까? 바울의 메시지는 전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Tony Sargent, The Sacred Anointing [Wheaton, Ill.: Crossway, 1994], p. 254, 267에서 인용)

    바울이 선포한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바울은 어디에서부터 그의 선포를 시작했는가? 그의 선포에서 가장 우선적인 강조점은 무엇이었는가? 이에 대해 로이드 죤스는 “하나님이었다!”라고 대답한다.

    사역을 시작하는 젊은 목회자는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보다는 인간과 인간의 필요에 대한 설교를 해달라고 요구하는 회중들에게 둘러싸이게 된다. 새로운 천년에 대한 편집증적인 집착이 만연하고 있는 것도 오류가 없는 성경의 진리를 겸손하게 의지하기보다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필요에 대해서만 집착하는 데서 오는 현상이다. 이것은 독과 같은 질병이며, 이에 대한 해독제는 오직 성경적인 설교뿐이다. 성경적인 설교는 성경으로 하여금 우리의 나아갈 바를 제시하도록 한다.

    [ 훌륭한 모범이 없는 현실 ]

    물론 모범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매우 드물며 그나마도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 신학대학을 나와서 이제 막 목회 현장에 뛰어든 젊은 목회자들은 대부분 사도적인 방법이나 생각보다는 마케팅을 활용한 극적인 성공담에 더 매료되고 있는 것 같다. 그 결과 이런 마케팅적인 목회가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러한 성공담의 주인공들 중에서 성경에 대해 강해적인 접근을 하는 목회자들은 매우 드물다.

    사실 그런 목회자들은 설교에서 오늘날의 문화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대단히 필요한 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출발점을 그렇게 잡으면 성경이 아니라 문화가 우리의 설교를 좌지우지하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이 어려운 점이다.

    로이 클레멘츠(Roy Clements)는 “만약 우리가 계속적으로 세상 문제에서부터 설교를 풀어나가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하기 원하시는 중요한 것들을 많이 놓치게 될 것이다”(The Cambridge Papers, September 1998)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와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는 설교자들로서, 자신들이 더 낫다고 주장하면서도 똑같이 오류를 범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성경 강해에 착실하게 전념하고 있기는 하지만 본문 속에 너무 깊이 파묻혀 버린 나머지 자신이 복음을 선포할 사역지로 부르심을 받은 이 시대의 문화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 설교자들이 그들이다.

    죤 스토트(John Stott)는 성경 본문이라는 섬에서 화살을 쏘기는 하지만 현대 문화라는 또 다른 섬을 적중시키지는 못하는 사람들을 비유로 든 일이 있는데, 이런 설교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그들이 쏜 화살은 곧바로 하늘로 올라가서 다시 그들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한 마음으로 신실하게 공부하면서도 자신들의 ‘체계’(system)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성서 신학과 현대 문화라는 두 가지 지평을 융합하기 위해 합리적으로 노력을 할 때 어떤 효과를 거둘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다.

    설교자들이 강해 설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는 강해 설교를 하려다 보면 설교가 시들하고 밋밋하고 지루하게 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삶을 바꾸어 놓을 만한 능력이 있는 성경 말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화번호부를 불러주는 사람 정도의 열정도 없이 설교를 하는 이들을 보면 참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칼빈(Calvin)은 설교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사람의 입과 혀를 정결케 하셔서 당신을 섬기도록 하시고 그것을 통해 당신의 음성을 들려주신다. 하나님이 그들의 수고를 축복하기 원하실 때면 언제든지 거기서 나오는 가르침들이 효력을 발휘하도록 성령의 능력을 베풀어 주신다. 죽음을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영원한 생명을 전달하는 도구가 된다” (Pulpit and People).

    이것을 통해 우리는 설교자의 사명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그리고 설교자가 자만에 빠지지 말아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된다. 성경을 강해하는 설교자는 성경 본문에 복종하고 그 말씀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종이다. “본문 자체가 하나님의 음성이며 하나님의 말씀이다. 설교자는 입과 입술이며, 회중은…그 음성을 듣는 귀이다”(Gustaf Wingren, The Living Word [London: SCM, 1960], p. 201).

    강해 설교자는 운율이나 심상을 이용해서 청중들을 감동시키는 시인도 아니요 아직 발표되지 않은 원고를 가져와서 읽는 작가도 아니다. 그는 천국의 능력과 권위에 힘입어 말씀을 선포하는 전달자(herald)이다. 50년 전에 제임스 S. 스튜어트(James S. Stewart)는 “인기를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현대 설교자들의 병폐이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강해 설교는 성경 본문의 의미를 드러내어 그 의미가 청중의 세계와 만나지도록 하고, 그리스도를 높이며 청중에게 실천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이다. 이 고귀한 일을 하고자 하는 우리에게는 보고 따라할 만한 모범이 필요하다.

    나의 경우에 지침이 되어준 설교자들은 에릭 알렉산더(Eric Alexander), 로이 클레멘츠(Roy Clements), 딕 루카스(Dick Lucas), 데렉 프라임(Derek Prime), 마틴 로이드 죤스(D. Martyn Lloyd Jones) 등이었다(공교롭게도 이들 모두가 영국 설교자들이다). 여러분이 모범으로 삼고 있는 설교자는 누구인가?

    [ 강해 설교의 부재, 그리고 그 결과들 ]

    강해 설교가 행해지지 않고 있는 것은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거기에는 값비싼 대가가 따르기 때문이다. 이 짧은 글에서 너무 부정적인 이야기만 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렇게 된 것은 이 일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1. 혼란

    바울은 디도에게(그리고 우리에게) “복종치 아니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들의 입을 막으라”고 경고하였다(딛 1:10~11). 그리고 이 일은 장로들의 책임 하에 맡겨졌다. 장로들은 이 책임을 무엇으로 감당해냈을까? 성경과 복음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을 가지고 감당했다. 바울은 장로는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9절)고 말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문제를 탐구하고 해결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들을 가르치고 책망하고 바로 잡아주고 훈련시켜주는 것이 바로 말씀의 역사이다. 성경을 조직적으로 설명해주지 않으면 성도들은 성경의 부분 부분들에 대해서 조금씩 알 수는 있어도 성경 전체가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는 알지 못하게 된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마치 자신이 맡은 부품 조립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나머지 공정이 어떻게 서로 연결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자동차 조립 공장 노동자 같은 처지가 되는 것이다. 성경 전체의 구조에 대해서 무지한 성도들은 지나가는 온갖 유행들을 쉽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데, 우리의 교회 안에서 이런 성도들만큼 위험한 사람들도 없다. 그들은 자신도 어려움을 겪고 다른 성도들도 어렵게 할 수 있다.

    바울이 도덕적으로나 교리적으로 극심한 혼란기에 사역을 하면서도 디모데에게 어리석은 질문에 지혜롭게 답하기 위해 시간을 들이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 시간과 역량을 투입하라고 한 권면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딤후 4:2~5).

    2. 영양실조
    월터 카이저(Walter C. Kaise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그리 건강하지 못한 상태라는 것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교회가 이렇게 허약해지고 있는 것은 요즘 말로 “정크 푸드”(junk food; 햄버거 등 영양가는 없고 칼로리만 높은 인스턴트 음식 - 역주)를 너무 많이 먹어왔기 때문이다. 교회는 방부제가 가득 든 온갖 가공 식품에 길들여졌다.

    그 결과 그런 음식을 먹어도 건강에 이상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그 길을 걸어갔던 세대들이 이제 신학과 성경에 대한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다. 또한 대부분의 교회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의 부재(암 8:11)가 계속 심해지고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영적인 기근이 계속되고 있다. (Toward an Exegetical Theology [Grand Rapids, Mich.: Baker, 1981], pp. 7~8)

    바울은 히브리서 5장 12절부터 13절 말씀에서 ‘아기 음식’만 먹느라고 성장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해딩턴의 죤 브라운(John Brown)은 이런 사람들의 상태에 대해 “그들은 적절한 영양 섭취의 중요성을 무시하고 있으므로 영적인 식욕과 소화력을 잃어버리고 제2의 유아기로 퇴보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Hebrews [Banner of Truth, 1994], p. 269). 사도 바울이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는 어린 아이”(엡 4:14)에 대해 말한 것이 바로 이런 사람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이런 병을 예방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성숙하게 만드시기 위해서 주신 성경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사역에 우리의 관심과 열정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알리스테어 벡 목사와의 질의응답

    설교와 가르침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설교는 가르침 이상의 것입니다. 설교에는 가르침과 아울러, 손을 뻗어 그들 편에 서는 것, 또는 간곡한 권유가 내포됩니다. 어떤 이가 뛰어난 설교자일 때, 그 사실이 그를 탁월한 교사로 만들어준다고 하는 견해를 이해는 하지만, 나는 그 생각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왜냐하면, 가르치지 않는 설교자는 결코 훌륭한 설교를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간곡한 권유를 할 수 있는 능력, 말씀을 적용시키는 능력, 또는 손을 뻗는 능력 그리고 강하게 밀어붙이는 능력 등은 가르침이라는 토대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효과적인 설교의 토대는 성경을 가르치는 사역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훌륭한 교사지만 설교하지 않는다면, 이는 예를 들어, 어느 대학 교수가 이런 저런 것들을 아주 훌륭하게 설명하고, 듣는 학생은 그 설명을 잘 이해하고 나서, 고맙다고 인사하고 헤어지는 것과 유사합니다.

    반대로 어떤 이가 일어나서 “자 이 점에 관해 설명되어 있는 이 부분을 보십시오. 이제 여러분에게 지금 들은 진리의 의미를 자신의 삶에 적용해서 고려해볼 때, 자신이 앉아 있는 자리, 자신이 처한 위치가 정확히 어디인지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에게 향한 그 질문을 마음에 담고 이 자리를 떠나시게 될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그것에서 떨어질 수 없는 어떤 약속을 부여받았다는 사실, 그리고 여러분이 머지않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리라는 사실을 알기 원합니다. 자,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그 만남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설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예수님과 언약 관계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만날 것입니다. 이미 그 길에 들어서 있지요. 그 사실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는 데요. 알고 있습니까? 이해가 되십니까? 됐습니다. 고맙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만날 것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가르침입니다. 지식을 제공하고, 예수님과의 언약이라는 진리를 설명합니다. 그런데 설교자는 “여러분은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제 그것을 여러분에게 요청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간곡한 권유의 행위는 그런 모든 말을 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가 훌륭한 설교자다, 또는 교사다 하는 것의 척도는 주제에 맞게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기술에 달려 있습니다. “이 점에 관해 어떻게 할 겁니까?”, “그 문제에 관해서 어떻게 할 겁니까?”라는 식으로 밀어붙이면, “아직 실질적인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날보고 어쩌라는 것인가?”라는 반응을 불러오게 됩니다.

    어떤 이는 아주 따분한 레위기를 가지고 설교한 뒤, 요한복음 3장 16절의 내용을 끝에 달아서, “나는 여러분과 헤어지기 전, 여러분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제까지 한 말과 다른 저 이야기는 도대체 뭐야?”라고 묻게 되지요. 그러면 “난 복음을 전하기 원하는 것이죠. 단지 레위기만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요.”라고 응대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앞뒤가 안 맞는 것입니다. 물론 좋은 설교가 될 수 없지요.

    설교 시에 두 가지의 복합적인 동기, 곧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는 소명감과 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욕구가 동시적으로 우리 내부에서 분출될 수 있는데, 그것을 지혜롭게 다룰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이겠습니까?

    기도와, 그 마음에 대해 자백하고 회개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성결케 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 외에 또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저도 오늘 아침에 여기에 오기 전 기도했습니다. 이 곳에서 오늘 저의 세미나 강의를 통해 하나님이 그분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내 안의 또 다른 목소리가 “하나님이 너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시기를 요청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확실한가?”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생각이나 소원을 가장 잘 아는 분은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시지요. 그러니까 내 마음에 오셔서 불필요한 요소들을 제거해 주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이루어가옵소서. 나는 당신의 무익한 종입니다. 내 안에 있는 모든 죄의 근원들을 깨달아 알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나는 자동차 안에서도 크게 소리내어 기도하려고 노력합니다. 마치 옆에 있는 동승자에게 말하듯이 소리내어 기도합니다. “주님, 지금 목회자 회의에 강의하려고 차를 운전하며 가고 있습니다.그들 앞에서 말해야 한다는 것이 두렵습니다.

    이 일을 피하고 싶습니다. 나를 이 일에 연루시킨 친구들에게 한 방 먹이고 싶은 기분입니다. ... “(웃음) 이런 식으로 자동차 안에서 주님과 대화하듯 내 마음의 생각들을 털어놓습니다.과연 다른 어떤 방법으로 아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아십니다. 우리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지요.그래서 크게 소리내어 주님께 털어놓습니다.

    설교를 듣는 이들의 마음을 설교 내용에 집중시키는 비결에 관해 목사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자기 자신이나 듣는 이들의 관심이 분산되지 않는 한에서, 설교 자료를 재량껏 활용하는 것은, 신학적 문제가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이번 주말 설교대 양편에 두 대씩의 대형 스크린이 켜져 있을 때, 그 화면에 설교자의 얼굴이 비춰지면 설교를 듣는 이들은 다섯 군데에 나타나는 설교자의 얼굴을 보게 되는데, 이것은 마음이 분산되는 요인이 되지요. 그러므로 그 스크린에 설교자의 얼굴이 투사되지 않게 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나는 또한 설교 때, 설교자 뒤에 사람들이 앉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조는 이가 있어도 내가 모를 것이기 때문이고(웃음), 두 번째 이유는 그것이 마음이 분산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지금의 방식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개성과도 관계된 일이지요. 모든 사람들이 사도 바울이 사역한 방식대로 따라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닙니까?

    설교 내용을 전달하는 여러분 각자의 개성이나 특성에 달린 것입니다. 제게 있어서는 내가 열심히 앞으로 나아가면서, 설교의 주제 쪽으로 몰고 가려는 중인데, 스크린 화면이 어른거리면, 그것은 완전히 주의를 산만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나는 어떤 특정한 경우에는 그러한 방법이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다니엘서의 한 부분을 설교한다고 해 봅시다.

    느부갓네살이 자신의 궁전 지붕 위에 올라가 ‘나의 크나큰 능력으로 건설된 이 바벨론이여, 그대는 얼마나 웅대한가’라고 외치는 장면이 본문 중에 나온다고 할 때 이 경우 가수 프랭크 시나트라를 등장시켜 노래하게 한다면 효과적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제 설교 중간에 그가 갑자기 나와서, 제가 인용하려는 본문을 노래로 표현한다면 어떨까요? 제 경우, 그것은 안 될 일입니다. 토요일 전도 대회의 설교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일 설교 때에는 그것이 마음을 분산시키는 일이 되기 때문에 고려하고 싶지 않습니다.

    설교의 모든 문장들을 완벽하게 작성한 원고를 가지고 설교에 임해야만 할까요?

    많은 이들이 묻는 중요한 질문입니다. 완벽하게 작성된 설교문을 가지고 설교에 임하느냐, 아니면 축약된 설교문을 가지고 임하느냐는, 각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 문제지요. 나는 완벽하게 작성된 설교문을 가지고, 그것이 나의 일부분이 될 때까지 거듭 거듭 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가 작성한 설교문과 긴밀하게 밀착됩니다. 내가 설교하는 것을 듣고 보는 이들은 내가 이렇다하게 작성한 내용 없이 설교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내가 아무런 작성된 원고 없이 설교한다고 확신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나는 완벽하게 작성된 원고를 앞에 놓고 설교합니다. 단지 그 내용을 완전하게 소화하고 있기 때문에, 원고를 자주 보면서 때마다 페이지를 넘길 필요가 없을 뿐입니다.

    세 페이지에 달하는 내용을 원고를 보지 않고, 원고의 페이지를 기계적으로 넘기면서 설교를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없는 어떤 이들은, 완전한 원고와 요약 노트를 함께 앞에 놓고 설교하면서, 인용 구절이나 정의하는 내용들을 바로 전하기 위해, 원고를 보면서 읽기도 합니다.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피하고자 하는 것은 서투른 태도나 모습의 표출입니다. 즉 준비하는 과정에서는 우리 마음속에 내용이 명료하게 정리되었다고 여겼는데, 정작 설교단에 서서 말로 표출할 때, 그 내용이 명료하게 떠오지 않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각자의 설교 스타일이 다르다 할지라도, 피해야 하는 것이 바로 그 점입니다. 나는 완벽한 설교문의 원고 없이 나아가 설교하는 것을 가장 피해야 할 일로 여깁니다. 왜냐하면 설교 중 말할 내용이 갑자기 기억이 안 나는 따위의 곤경에 처하게 될 때, 나는 내가 작성한 설교문이 내 앞에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당황하지 않고, 그 내용을 자신에게 상기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곧 말하고자 하던 내용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예배 중의 공적인 결신의 촉구와 초대에 관해 말씀해 주십시오.

    그 점에 관한 나의 입장은 먼저 그저 관심만 갖고 떠나게 되지 않도록 결심을 촉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대면해야 하는 문제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도 과거에 공적인 결신의 초대에 응했었고, 그때가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고 나에게 직접 말씀하신 시점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곳 파크사이드 교회 사역에서는 약간 특이한 방법으로, 사람들이 공적인 분위기에서 하나님께 반응하도록 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그리스도인으로 예정되어 있는 이들의 초대”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합니다. 그 설교를 준비할 때, 나는 사람들이 설교를 듣고, 복음에 대한 공적인 반응을 하지 않은 채 떠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내가 가끔 그 반응의 기회를 사람들에게 제공할 때, 그들이 너무나 감동적인 반응을 해오기 때문에, 나는 “자, 잠깐만요. 내가 원하는 바를 확실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이 사건을 미리 예정하신 것이 확실합니다. 지금 이 시간이 여러분이 하나님께 나아올 아주 좋은, 적확한 때입니다.” 이런 식으로 진행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가 평소에 습관적으로 행하는 일은 아닙니다. 나는 영적으로 감화를 받은 이들을 예배 후의 기도 모임에 초대하여, 영적인 문제에 관해 함께 이야기하도록 하는 편을 더 선호합니다. 나는 매주일 설교마다 초청의 시간을 갖도록 하는 일을 그다지 원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사역자들이 있는 것도 알고, 그들의 그런 선택을 존중하고, 때로는 그들에게서 배우는 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일과 전혀 유사하지 않은 사역에 연루되어 있다고 느낍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나를 찾아와서, “목사님, 복음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에 초청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합니다”라고 말합니다. 나는 그런 어리석은 신학적 태도를 고무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말씀을 부단히 전하면, 사람들은 구원의 길로 나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가장 기쁜 일들 중 하나가 세례식을 거행할 때입니다. 왜냐하면 그 때 사람들은 세례 간증을 하는데, 우리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 기이한 모양으로 각 곳에서 구원을 받은 사실을 세례를 베푸는 물 속에서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주일 저녁 예배 때 옆에 앉은 한 성도가, 자신이 4년 전 크리스마스 때인가, 아니면 부활절 때, 내가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설교를 들었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가기 전, 주님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고, 죄를 회개하고, 그분을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했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일을 알지 못했었고, 게시판에 적어놓지도 않았고, 그의 가까운 친구 외에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지만, 그의 세례식 장소에서 나는 그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세례가 베풀어지는 장소는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고백하여 모든 성도들에게 자신의 신앙을 알리기에 아주 좋은 기회가 장소입니다. 여러분과 같이 저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진리 가운데 거하는 것보다 기쁜 일은 없습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들었던 것 생각나십니까?여러 종류의 땅들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씨가 뿌려진 여러 종류의 땅들에게, “자, 내가 씨를 뿌렸지요? 여러분 중에 몇 분이 내 행위에 반응을 보였나요?”라고 묻는다고 합시다.

    “나는 반응을 해서 받아들였습니다.” “나도 반응을 했습니다.” “나도요.” 그들 중 한 종류의 땅에서는 씨앗이 떨어져 곧 죽습니다. 그리고 어떤 땅에서는 즉시 꽃이 피지만, 곧 시들어 버립니다. 또 다른 땅은 세상의 부요함에 정신이 팔려 곧 질식해 죽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하나의 땅만 좋은 토양으로 판명됩니다. 그런데 내가 그 네 토양에게 초청을 할 때, 그들 모두를 앞으로 나오게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일에 초청을 할 때, 모든 모인 사람들 앞에서, 그들을 대상으로 하게 되고, 그런 경우, 앉아있는 많은 이들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라고 자문하게 됩니다. “상관 마세요. 우리를 1%의 영접 대상자를 위해 초청하는 것입니다. 1%라도 초청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라고 우리가 말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정말 1%도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요? 특별히나머지 99%의 사람들의 마음을 혼란에 빠뜨려도 될 만한 일입니까? 이전에 이미 복음을 들었던 어떤 이는 그 시간에 “아니 나도 과거에 했던 일이지.저 목사님이 하라고 요청했던 그대로 했었지.앞으로 나오라고 해서 나갔고.그러나 나는 이전과 똑같이 악한 자가 아닌가?그러니까 이제는 나가지 않을 것이다.”라고스스로에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구원이라는 것을, 앞으로 나오고, 손을 들고, 일어나고, 글로 쓰고 하는 등의 일이라고 생각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그래서 그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지금 하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적 성숙도가 천차만별인 교인들을 대상으로 어떻게 모두를 포용하는 설교를 할 수 있을까요?

    좋은 질문입니다. 누군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설교하는 것은 죄인데, 그들에게 적용이 안 되는 설교를 하는 것은 더 나쁜 죄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나는 먼저 말씀 본문을 선택하고, 설교를 하는 데 있어 신앙 상태나 성숙도가 다양한 사람들이 들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말씀을 전할 목표물이 될 대상으로 정해놓은 바는 없습니다. 나는 내가 특별히 머리가 뛰어난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아주 머리가 둔한 사람도 아니고, 그저 보통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택한 성경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내 영혼에 교훈하신다고 느껴질 때, 곧 이해가 되고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다고 믿어질 때는, 그 말씀을 전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거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합니다. 한두 사람 정도는 나의 말을 이해하고자 열심히 애를 쓰며 좇아와야 할 수도 있지요. 나는 때로 설교 중 “이제 내가 아주 어려운 내용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학교에서 고급 과정을 듣지 않겠다고 할 수 있는 것처럼, 그 어려운 내용을 듣고 싶지 않은 사람은 잠깐 휴식을 취하면, 곧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고 다시 여러분이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해 줍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아니, 나는 지금 고급 과정 수업에 임하고 있는데, 뭐라고 하는지 정확하게 들어봐야지”라고 말합니다.

    나는 “여러분 중에는 불가지론자와 유사한 이들이 있을 것이고, 그런 분들에게는 지금 내가 하는 이야기가 좀 특이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중 불가지론을 견지하는 이들, 곧 복음을 믿지 않고, 의문을 갖는 이들을 대상으로 잠깐 이야기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몇 안 되는 그들의 편이 되어 3~4분 정도 그들을 대상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그들의 부류에 들지 않는 나머지 대부분의 신도들은 그냥 앉아 듣습니다.

    그들도 그 내용을 들을 필요가 있기도 하지요. 어쨌든 나로서는 그 곳에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흩어져 앉아, 나의 말을 듣고 있다는 사실을 수용해야 함을 이해합니다. “복음 전도 설교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이 담론에 적용될 수 있겠습니다.

    알리스테어 벡(Alistaur Begg)/ 고향인 스코틀랜드에서 두 교회를 섬기다가 1983년에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이후 현재까지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 교외에 위치한 파크사이드 교회를 담임하고 잇다. 벡 목사는 전국 라디오 방송망을 통한 사역에도 참여하고 있으며, The Hand of God 외 여러 권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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