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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태론이 몰려오고 있다 / 사람은 어떠한 존재인가
    2008-12-02 10:06:58   read : 6385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양태론이 몰려오고 있다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이인규 권사가 최근 네이버의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http://cafe.naver.com/anyquestion.cafe) 카페에 ‘양태론이 쳐들어오고 있다’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습니다. 단 이틀만에 조회수 370여 건을 기록하고 댓글은 36건이 달리더군요. 회원들의 반응이 어땠는지 댓글을 살펴볼까요?

    “사람들이 가장 크게 착각하는 부분인거 같습니다. 저도 이 카페에 와서 양태론에 대한 글을 읽기 전까지 ‘양태론적 삼위일체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글을 읽고도 이해가 잘 가지 않아 여러 번 읽었죠. 이제 제대로 된 삼위일체에 대해 알겠는데 혹시나 해서 교회 사람들에게 삼위일체에 대해 물어보니 양태론적으로 대답하는 사람이 몇명 있더라구요”(킷팝).

    “저는 모 선교회에서 삼위일체에 대해 배웠는데 그게 양태론적인 내용이었습니다(나오고서야 알았죠...)”(나리). “그 동안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문제였는데 글을 읽고 나니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문제의식조차 없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네요”(사진작가).

    그만큼 많은 회원들이 신앙생활의 현장에서 양태론을 접하고 있었다는 방증입니다. 삼위일체에 대해 논하는 것은 ‘찻잔으로 바닷물을 측량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렵다고 회피하다보면 삼위일체가 점점 난해한 교리가 될 뿐입니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이단적인, 특히 한국교회에서 암암리에 묵인되고 있는 양태론적 삼위일체에 대해서는 선명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고 사려됩니다. 적어도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성도들이라면 말이죠.

    이인규 권사의 글은 양태론에 대한 정통신학의 견해와 그것이 기독교 역사에 어떻게 주장돼 왔는지, 또 최근에 어떤 단체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는지도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일독의 가치가 있다고 보여 본 사이트 교회와신앙(www.amennews.com)에 요약 정리해서 올립니다. 이인규 권사는 기독교대한감리회 대림교회를 섬기며, 한국장로교총연합회 협력상담위원, 네이버 카페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의 매니저입니다. 카페명처럼 신앙생활을 하면서 궁금한 내용에 대해 답해주는 카페입니다. <편집자주>

    이인규 권사
    한국장로교총연합회 협력상담위원
    네이버 카페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매니저

    삼위일체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삼위일체는 우리가 믿는 신앙의 대상인 신(神, God)에 대한 교리이다. 삼위일체는 인간의 이성적인 이해를 위한 교리가 아니라, 성경을 그대로 정리하고 요약한 교리다. 헤르만 바빙크는 삼위일체는 기독교의 심장이라고 말하고 있다.

    기독교 교회사를 통하여 이 삼위일체 교리는 소위 이단이라고 불리는 교회에 엄청난 공격을 받아왔다. 그러나 삼위일체는 언제나 정통신학에서 밀려나 본 적이 없으며, 이단들의 공격과 비난에서 단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 그 이유는 가장 성경적인 교리였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삼위일체적인 신앙고백은 이단을 구별하기 위한 시금석으로 사용돼 왔다.

    삼위일체 교리 중 이단교리를 크게 구별하자면 단일신론, 양태론, 삼신론, 다신론 등으로 볼 수 있다. 그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가장 착각하기 쉬운 교리가 바로 양태론이다. 이 양태론이 먼지 구름을 일으키며 오늘 한국교회로 몰려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양태론을 결코 용납하면 안 된다. 2000년 교회사가 이들과 싸워왔듯이 우리는 양태론과 싸워야만 한다.

    그렇다면 양태론이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부터 살펴보자....

    (1) 양태론의 정의
    양태론이란 결국 단일신론이다. 즉 성부 하나님이 직접 육신을 입고 예수로 와서, 그분이 죽고 부활하여 오순절에 성령으로 오셨다는 것을 말한다. 즉 동일한 한분의 인격(위격)의 하나님이 세 가지 양태로서 나타나 시간적인 차이를 두고 사역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정통 삼위일체가 세 인격(위격)과 한 본질(본체)을 말하는데 반하여, 양태론은 한 인격과 한 본질을 말하므로, 그들이 말하는 삼위일체는 사실 실제적인 삼위라고 볼 수 없다. 양태론적인 설명을 잘 표현하는 비유가 곧 “한 사람의 세가지 사역적 직분”과 “물과 얼음과 수증기”에 대한 비유가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어느 사람이 교회에서는 장로이며, 집에서는 아버지이고, 회사에서는 부장이라는 비유는 매우 적절한 양태론이다. 그것은 삼위를 단지 사역적으로 구별할 뿐, 인격적으로 구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동일한 물이 기후나 조건에 따라 수증기와 얼음으로 형태를 바꾸어 나타난다는 주장은 양태론적인 이해와 가깝다. 또 이러한 비유는 삼위일체를 알기 쉽게 설명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이러한 비유는 오히려 이단적인 양태론에 가까운 비유가 되므로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키는 결과가 되므로 가급적 사용하지 말아야만 한다.

    (2) 양태론의 오해
    많은 성도들과 심지어 목회자들까지도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양태론적인 오해를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것을 필자는 두 가지로 구별하고 싶다.
    ① 삼위일체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어서 양태론적으로 이해함
    ② 양태론에 대해서 정확한 지식이 있지만 고의적으로 양태론적인 주장을 함

    ①번의 경우 정확한 지식을 알려 줌으로서 그것을 수정하도록 가르쳐야만 한다. 평신도는 이렇게 이해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고 할지라도, 신학교육을 거친 목사가 이것을 착각한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것이 실수나 착각이라면 수정돼야만 한다. 그러나 ②번의 경우 우리는 이단이라고 불러야만 한다. 만약 ②번의 경우를 인정하거나 방치한다면, 기독교의 근본 교리가 모두 뒤바뀌게 되기 때문이다. 첫번째 단추를 잘못 꿰면, 마지막 단추를 채울 수가 없다.

    이 양태론은 숱한 성경적인 모순과 오류를 초래하며, 단 한번도 기독교 교회사에서 정통교리로 인정받았던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는 것을 기억하여야만 한다. 그렇다면 왜 양태론이 비성경적이며, 왜 성경적인 모순과 오류를 초래하는지를 살펴보자.

    (3) 양태론의 오류와 모순
    ① 예수님과 하나님의 인격이 동일하다면,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에게 기도한 것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에게 기도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기도는 단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기도였단 말인가?

    ② 예수님과 하나님의 인격이 동일하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누구에게 바쳐진 제물이란 말인가?

    ③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에게 부탁하나이다"는 이 말씀은 누구에게 자기 영혼을 부탁한다는 것인가?

    ④ 다윗이 기록한 시편 110:1의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시110:1)에서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되···"라는 구절은 신약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을 구별하는 의미로 재조명 된다(마22:43). 다윗이 본, 구별된 예수와 하나님은 무엇인가?

    이 시편의 기록은 신약의 여러 곳에서 예수님이 직접 인용하셨으며, 다윗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구별하였다(동시대에 공존하셨다)는 것을 유대인들에게 직접 말씀하신 구절이다. 예를 들자면, 신약에서 마 22:43을 보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라고 기록하고 있다.

    ⑤ 보혜사이신 예수께서 다른 보혜사를 보내준다는 성경말씀은, 다른 보혜사가 곧 동일한 보혜사라는 것을 말하는가? 아니면 문자 그대로 구별된 인격으로 다른 보혜사를 말하는가?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시면서 왜 “다른 보혜사”라고 말하셨으며, 3인칭 대명사 “그”라고 하셨는가?

    ⑥ 사람과 한 분 하나님 사이의 또 다른 한분이신 중보자 예수가 있다는 성경말씀(딤전 2:5)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동일한 인격이라는 것을 말하는가? 아니면 하나님 아버지와 구별되는 인격으로서의 예수님이 중보자로서 한 분이라는 것을 가리키는가?

    ⑦ 성자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였으며, 성부 하나님은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 이 세 인격이 모두 구별되지 않는 동일한 인격인가? 또 요한복음 12:28의 예수님의 지상간구와 하나님의 하늘로부터의 소리는 무엇인가? 또 변화산에서 하늘로부터 들려오던 하나님의 소리는 예수님 자신의 소리인가?

    ⑧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은 "예수님"을 보았다. 이 삼위는 모두 구별되지 않는 동일한 하나의 인격인가? 스데반은 삼신론자였는가?

    ⑨ 예수님은 자신이 곧 하나님이라면, 주기도문에서 왜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셨으며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는가?

    ⑩ 사도행전 10:37-38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며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10:37-38).

    "하나님"이 "예수"에게 "성령"을 부어주셨다···. 하나님과 예수와 성령이 동일한 한 실체라면 성경본문은 무엇인가?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안에 있는 예수에게, 자신의 안에 있는 성령을 부어주셨는가?

    ⑪ 재림예수에 관한 중대한 오류:
    예수님이 성령이 되어 버리셨다고 한다면, 종말적으로 예수의 재림은 누가 오느냐는 심각한 오류가 나타난다. 즉 양태론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인격적이며 가시적, 신체적인 재림을 부정하여야만 하며, 예수님이 이미 성령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영적 재림을 주장하게 된다.

    과연 양태론자들은 예수의 재림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을 할 것인가? 구약의 하나님 아버지가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예수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오순절 이후에 성령으로 오셨는데, 또 다시 신체적으로 변화하여 재림하시는가?

    아니면 영적으로 재림하신다고 주장할 것인가? 혹은 이미 예수님이 성령으로 재림하셨다고 주장할 것인가? 이와 같이 삼위일체에 대해 양태론으로 첫단추를 꿰게 되면 마지막 단추인 종말론까지 잘못 꿰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더욱이 십자가에서 자신을 제물로 바치신 예수와 그 제물을 온전하게 제물로 받아주신 하나님의 구별조차 못하므로 대속적인 개념마저 달라진다.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로 바쳐졌으며,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제물을 온전히 받아들이심으로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로 하셨다는 성경의 기록을 부정할 것인가?

    과연 누가 십자가에서 죽었는가?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하시는 불사의 성부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자신이 스스로 죽었던 적이 있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 희생제물은 누구에게 바쳐진 것이었는가?

    (4) 누가 양태론자인가?
    양태론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은 초대교회의 사벨리우스라는 사람이었다. 그 외에도 프락세아스, 노예투스라는 자들이 있었으며, 칼빈과 토론을 하였던 세르투스도 양태론자였고 스웨덴보그도 양태론자였다. 특히 지방교회의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도 양태론자이다.

    특히 사벨리우스의 양태론은 성부수난설이라고 불렸는데, 결국 십자가에서 죽은 자가 성부하나님이 되기 때문이다. 사벨리우스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유일성을 구속사 가운데 계시하는 세 얼굴 또는 세 역할로 표현했다. 인간이 육과 혼과 영으로 구성되듯, 신의 본질이 가지는 세가지 면도 이와 같다고 말하였으며, 태양과 열과 광선은 신의 본질을 설명할 수 있는 적절한 비유라고 하였다.

    정통신학이 말하는 양태론적인 정의를 살펴보자.
    “이 사실은 성경에서 명백히 가르쳐주고 있고 또 일반적으로 합의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부인하고 있는 사벨리안 체제는 결코 어떤 보편적인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성부에 의해서 보냄을 받고, 그에게서 오며, 그에게로 돌아가고, 그의 명령을 받고, 그의 뜻을 행하고, 그를 사랑하고, 그에 의해서 사랑받고, 그에게 기도를 하며, 당신이란 대명사를 사용하고 또한 그에 대해 언급할 때 그라는 대명사를 사용하신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상대적인 칭호를, 아버지와 아들에 역시 포함되어있다”(하지 조직신학, 262쪽).

    “사벨리우스파는 삼위를 단순히 신적 행위, 혹은 신적 현현의 많은 형태로 보고 하나님은 창조와 율법의 수여자로, 성육신에서는 성자로, 중생과 성화에서는 성령으로 각각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다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삼위는 한위로 축소되어 버렸다”(루이스벌콥, 기독교 신학개론 87쪽).

    “시대에 따라 사람들은 하나님이 세 위가 아니라 다만 다른 때에 다른 형태로 나타나시는 한 위라고 가르쳐왔다. 예를 들면,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아버지로 나타나시고, 복음서를 통해서는 같은 분이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을 통해, 보는대로 아들로 나타나시고, 오순절 이후에는 같은 분이 교회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이다”(웨인그루뎀 조직신학, 상권 347쪽)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정한 둘째 이단은 제 4세기에 나타난 사벨리우스파(Sabellians) 혹은 양식적 단일신론 이단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단순히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신 한 형태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단일성을 주장하는데 관심이 있었으나, 그 기본적인 관심은 기독론, 즉 그리스도의 충분한 신성을 주장하는 데 있었다.

    이 견해는 양식적 단일신론(樣式的單一新論)이라 불리워졌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3위를 하나님의 현현의 세 양식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에 의하면 성부, 성자, 성령이란 명칭은 단순히 한 신적 본체가 자신을 나타낼 때의 세 형상(形象)을 가리키는 것이라 하였다”(<교회와신앙> 1994년 1월호, 기독교 2천년 교리 속에 나타난 이단 사상-기독론, 신복윤 교수)

    “프락세아스(Praxeas)는 알려지지 않은 이단으로서 어떤 학자들은 그를 사벨리우스(Sabellius)라고 보기도 하지만, 프락세아스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서머나의 노예투스(Noetus of Smyma. 150년경에 활동)의 가르침에 훨씬 가깝다. 프락세아스는 삼위일체의 위격 사이의 구별은 진짜 구별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하나님의 세 이름은 구속의 형태를 설명하는데는 약간의 가치가 있지만,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구별이 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성부라는 이름은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강조하며, 성자라는 이름은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그리고 성령이라는 이름은 성화자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이 모든 작용의 역사자는 유대인의 성경에 나오는 그 한분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성육했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일어나셨다는 것이다”(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153-154쪽).

    “이 형태의 군주신론은 사벨리우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인데, 그는 하나님 안에 세 인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 세 개의 양식이나 형태로 자신을 현현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아버지로서 하나님은 창조자이며, 똑같은 아들로서 하나님은 구속자로 성육신하여 자신을 드러내었다. 한편 성령은 똑같은 하나님인데 교회의 영적인 삶 속에 드러났다. 이것은 인격의 삼위일체가 아니라 단지 현현의 삼위일체임을 쉽사리 알 수 있다. 이 이론은 기본적으로 단일론이지 삼위일체론이 아니다”(웨슬리안 조직신학, 149쪽).

    즉 정통삼위일체에서는 성부도 하나님이고, 성자도 하나님이며, 성령도 하나님이지만, 성부는 성자가 아니고, 성자는 성령이 아니며, 성령은 성부가 아니어야만 한다. 본질로서는 한분 하나님이지만, 인격으로는 서로 구별되며 상호관계가 가질 수 있는 셋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현재는 배타적인 형제교회의 한 분파, 지방교회, 뉴예루살렘교회 등이 양태론을 주장하는데, 그들로부터 배웠던 구원파(이요한, 권신찬), 베뢰아 계열도 역시 양태론을 주장하고 있으며, 특히 베뢰아 김기동 목사로부터 양태론을 배운 목사들이 지금도 그러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매우 많다. 또한 국내에서 이름만 대면 알만한 유명하다는 목사들이 양태론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어서 문제가 되고 있다. 특히 각 교단의 유명한 부흥강사들이 양태론을 주장하는 경우도 많은데, 특히 베뢰아아카데미 출신이라고 불리는 목사들이 이런 경우가 많다.

    이러한 양태론은 그대로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과연 자신이 신학적인 지식이 부족하여 몰라서 그러한 주장을 하였는지, 아니면 자신이 배웠던 양태론이 옳다고 생각하여 그런 주장을 하였는지 분명히 밝혀야만 한다. 과거에 양태론적인 주장을 한 적이 있다고 비난을 받은 목회자는 반드시 자기의 현재 견해를 정확히 밝히고, 과거 양태론을 주장한 적이 있다면 사과하고 수정하여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2000년 교회사가 정통신학으로 인정해왔던 삼위일체가 틀렸다고 선포함으로서 정식으로 공청회를 가질 용의가 있어야할 것이 아닌가? 이러한 양태론은 여러가지 다양한 주장으로 변형되기도 하여 알려져 있지만, 결국 “한 위격의 시간적 차이를 둔 세 가지 양태”라는 방식은 동일하다.

    그렇다면 누가 양태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인지 그 증거와 함께 살펴보자.

    (5) 양태론적인 주장들
    대표적인 양태론자로서 지방교회의 위트니스 리의 주장을 살펴보자
    “그러므로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은혜와 성령의 교통은 세 개의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고 누리기 위한 ‘한가지의 세 단계’이다. 마찬가지로 아버지, 아들, 성령은 세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고 누리기 위한 ‘한 하나님의 세 방면’이다. 예를 들어 얼음은 물이 되고 물은 수증기가 된다. 즉 ‘한 실체가 세 가지 형태’를 띠고 있다. 그 실체가 수증기의 상태에 이를 때에 우리가 호흡하는 데 유용하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소유하신 모든 것은 성령이 받으며, 성령은 우리가 누릴 수 있도록 그분을 우리 안으로 가져다 준다. 하나님은 그분의 삼일성 안에서 설명하고 묘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많은 예들이 있다”(위트니스 리, 하나님, 297쪽).

    “하나님으로서 그분은 처녀의 태 속에 들어가서 그 속에서 아홉달 동안을 머무셨다. 이렇게 해서 그분은 인성을 그분의 피난처와 거처로 취하셨다. 분명히 그분의 성육신은 그분의 과정이었다. 두 번째로 그분은 삼십삼년 반이라는 인생의 긴 터널을 통과하면서 이 땅에서 생활하셨다. 이것 또한 하나의 과정이었다. 세 번째로 그분은 죽음 안에 들어가서 무덤과 음부를 포함한 죽음을 통과하셨다. 네 번째로 그분은 삼일 후에 사망과 음부를 걸어 나오셔서 부활 안으로 들어가셨다. 그 분의 죽음과 부활 또한 하나의 과정이었다”(위트니스 리, 세부분인 사람의 생명되시는 삼일하나님, 52-53쪽).

    “그러므로 요한복음 3장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을 주셨다. 이 아들이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다고 여기지 말라. 우리에게 주신 바 된 이 아들이 바로 다름 아닌 그 ‘하나님 자신’이다. 당신이 아들을 영접할 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당신의 기도에서 당신은 그분을 아들이라 부르지 않고 아버지라 부른다”(위트니스 리,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두가지 큰 비밀. 18-19쪽).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아들이 아버지이고 주님이 그 영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그들이 충고할수록 나에게는 성경이 말하는 것을 말할 힘이 더 생긴다. 나는 성경에 따라 아들이시고, 사람이 되셨고,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우리 그리스도가 오늘 아들일 뿐 아니라, 아버지와 그 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위트니스 리, 성령, 42쪽)

    그렇다면 베뢰아 김기동 목사의 주장을 살펴보자.
    “비록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사역에 시간적인 차이는 있으나 그리스도가 영광을 받으시기 전에는 성령이 오시지 않았고 또 아버지의 뜻이 없었다면 아들이 이 땅에 오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중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김기동, 성령을 알자, 46-47쪽).

    삼위가 시간적인 차이를 두고 사역을 하였다면, 구약의 하나님과 공존하였던 하나님의 신, 여호와의 신은 무엇인가? 김기동 목사는 구약의 성령의 임재와 사역 자체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신을 천사라고 주장하게 된다.

    “구약에서 아브라함이나 모세에게 나타난 여호와가 천사였던 것처럼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시느니라고 한 말은 하나님이 그의 천사들로 지키게 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의 하나님의 사자(신)는 그의 천사를 말합니다”(위의 책, 65페이지).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예수 안에 계신 성령은 어느 장소에도 어느 사람속에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과거 선지자들도 성령을 힘입었고 요한도 ‘모태로부터 성령충만함을 입어’라고 했으나 그들은 성령의 권위로 외투를 입고 있듯 힘입었던 것이지 내주하여 임하신 것은 아닙니다”(김기동, 성령을 알자, 76쪽).

    “그 하나님은 본질을 말하는 것이기에 아버지이시며, 이 분이 나타났을 때는 본체이시며 영으로 오셨을 때에는 본영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나 영들이 많기에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실 때는 성령이십니다”(김기동, 성령을 알자, 74쪽).

    우리 나라의 양태론은 주로 지방교회가 전파하였다고 보이는데, 지방교회의 양태론은 구원파와 베뢰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또 우리나라에는 베뢰아에서 베뢰아 아카데미를 수료한 출신의 목사들이 많다. 그들 많은 목사들이 또한 양태론적인 사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렇다면 구원파의 권신찬과 이요한 계열의 양태론을 확인하여보자.
    (이요한 목사의 동영상 자료 요약)
    1. 아버지가 어떻게 아들이라고 불리는가?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 자신인데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이다(이요한 목사는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라고 반복하여 강조한다).
    2. 하나님과 동일하신 예수님은 원래 기도를 하실 필요가 없는데, 우리를 위해 기도를 하신 것이라고 주장한다,
    3. 예수님은 구약에서 하나님으로 나타나셨고, 33년은 말씀으로 오셨으며, 죽고 부활하여 성령으로 오신 것이다.
    4. 나(이요한)는 사람은 하나인데 세 역할을 한다. 교회에서는 목사이고, 집에 가면 여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고 아버지도 된다. 이렇게 목사도 되고, 남편도 되고, 아버지도 되지만 사람은 몇사람인가? 한 사람인 것이다. 이런 것은 잘 모르면 그냥 놔두자···(이요한 목사의 동영상, 왜 예수님이 하나님이신가요?
    http://www.jbch.org/newhome/guide/faq/faq_view.php?f_id=20021016163700&target_1=category:중분류검색&FindButton=카테고리검색&Page=2&skeyword=10200&flag=0)

    말할 필요도 없는 명백한 양태론이다.
    ···
    그렇다면 이요한 목사가 교리를 공부하고 배웠던 권신찬 목사의 삼위일체론은 무엇일까? ···



    ▲ 권신찬 씨측 공식 카페에 올라간 삼위일체론

    이 자료도 권신찬 목사의 교회(기독교복음침례회)의 홈페이지에서 발췌한 것이다.

    “물론 삼위일체(三位一體)라는 단어는 성경에 없다. 그러나 요한복음 10장 30절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했고, 이사야 9장 6절의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는 말씀, 또 요한일서 5장 20절 하반절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고 했고, 사도행전 20장 28절에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고 했으니, 예수님과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하나님과 성령과 예수님은 하시는 역할로는 세 분(三位)이지만 근본은 한 분(一體)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기독교복음침례회 홈페이지,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2. 삼위일체 하나님).

    삼위는 역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삼위는 인격적으로 구별되어야만 한다. 권신찬 목사와 같이 한분의 세 역할을 주장하면 그것은 양태론이 된다. 삼위를 역할로 표현하는 것을 사역적 삼위일체(경륜적삼위일체)라고 말하는데, 곧 양태론을 뜻한다.

    이요한 목사도 역시 자기가 교회에서는 목사, 부인에게는 남편, 자녀에게는 아버지라고 삼위일체를 사역적으로 설명하며 물과 얼음과 수증기, 빛과 열과 해로 비유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사역적인 삼위일체는 한 인격의 세 양태이므로 양태론이다.

    ···소위 베뢰아계열이라고 밝혀진 이단교회 외에 베뢰아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한 목사로 알려진 기침교단의 A목사, 예장합동의 B목사, 너무나 유명한 부흥목사 C목사, 대형교회의 D목사에게도 양태론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한때 이단성의 문제로 말이 많았던 침례교단의 A목사의 주장을 확인하여보자.

    “성령과 예수와 아버지는 동일한 1위이십니다. 오해하면 안돼요. 자 ···아버지가 영으로 계실 때가 뭐요? 예 성령이요 아들이 영으로 계실 때가 뭐요? 성령이요. 성령은 성령으로 계실 때를 거룩한 영 성령이라고 말 한다, 이 말여. 육신을 입고 왔을 때는 아들이요 육신을 벗고 영으로 계실 때는 성령이라, 이 말이여. 내가 너희 안에 있겠음이라 - 세상 끝 날까지 너희 안에 있겠음이라(아멘)”

    “어떻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삼위일체라고 말하면서 성령은 그렇게 무시합니까? 이 분이 한 분이신데 이 분이 영으로 계실 때는 아버지요 육신을 입었을 때는 아들이시오 또 육신을 벗고 부활하시고 영혼일 때는 또 근본이 성령이신데 어찌 이분을 이렇게 무시하냐 이 말여.”

    A목사는 몇몇 장로교단에서 이단성의 문제가 있다고 발표되었다가 해제되었으며, 현재 한 장로교단에서만 아직도 문제가 있다고 발표하고 있는데, 그는 최근에도 양태론을 설교하고 있다.

    또 B목사는 베뢰아 계열로 분류되어 한때 교단에서 제명을 당하였다가, 공개 사과를 하고 다시 회복되었는데, 최근에 그가 이름을 개명하고 기독교 방송국에서 요한복음을 가르치는 동영상에서 요한복음의 말씀이 예수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가 물의를 일으켜 도중하차를 한 적이 있었다.
    ···
    물론 누구든지 실수를 할 수 있으며, 신학적인 뿌리가 얕아서 잘못 착각할 수도 있다. 평상시에는 그러한 양태론이 나타나지 않는데, 어쩌다가 표현적인 실수를 할 수도 있다고 본다. 필자는 그러한 트집을 잡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다. 그러나 명백한 양태론을 계속적으로 설교한다면 이것은 정말 문제이며, 많은 교인을 양육하는 영향력이 큰 목사가 이러한 주장을 계속한다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최근에 유명한 대형교회의 D목사, 같은 교회의 장로로서 신유집회를 인도하는 F장로에게도 양태론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충격이다. 그런데 베뢰아 김기동 목사측은 이 D목사가 베뢰아 교육을 받았다고 주장한 적이 있었다.

    필자는 D 목사의 동영상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바로 그 분이 성령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나타날 때에는 성령님으로 오셨습니다”(D 목사).

    너무나 명백한 양태론이 아닌가?

    더욱이 그 교회 장로는 그 교회 목사에게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쉽게 추정할 수 있다. 그 장로는 동영상에서 이렇게 말한다.

    “왜냐하면 그 말씀이 하나님이시고, 말씀이 예수님이시고, 말씀이 성령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집회를 하고 수많은 설교를 함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느냐? 믿지 않기 때문엘··. 말씀과 성령님을 나눌 수 없습니다. 십자가와 성령님을 나눌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예수와 성령님을 나눌 수가 있습니까? 성령님은 예수그리스도이시고 성령님은 하나님 아버지십니다”(F 장로).

    그 외에도 유명한 목사인 C목사, 장로교회의 유명한 G목사, 감리교의 부흥목사인 H목사도 공공연하게 양태론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통교단의 이단대책위원회는 이것을 철두철미하게 조사하여 그 이단성을 경고하고, 그래도 그것에 대해서 사과를 하지 않는다면 그 이단성을 공식으로 발표하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2000년 기독교 교회사에서 언제나 이단으로 분별되었던 양태론이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이렇게 공공연하고 무분별하게 설교되고 있어도 상관이 없는가?

    정통교단의 이단대책위원회는 이러한 목회자를 제명을 시키거나, 차후로는 이러한 설교를 하지 말라고 강하게 경고를 주어 공개사과문이라도 받는 것이 옳지 않는가? 아니면 앞으로는 한국교회에서 양태론을 인정하거나 주장하여도 아무 상관이 없는지 정확히 발표를 하여주어야만 할 것이 아닌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혹시 정통교단의 이대위가 양태론을 옳다고 인정하는 단체가 아닌가? 그렇다면 차라리 정통 조직신학책을 모두 수정을 하여 삼위일체를 양태론으로 바꾸어 주든지 정확한 신론의 정체성을 발표하여 목회자나 평신도에게 더이상 혼선을 주지 말아야할 것이 아닌가?

    혹시 교단에서 높은 위치를 갖는 목사들이기에 정치적으로 눈감아 주기로 한 것인가? 이미 수많은 교회에서 배포되어지는 초신자의 양육교재자료들에도 이미 양태론이 침투해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이미 수십만명이 그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모 훈련프로그램 교재에는 성령을 ‘예수의 다른 자기’라고 표현하였고, 성령이 ‘예수와 같다’고 말하고 있으며, 강사들은 교인들에게 “한 인격의 세 사역적 양태”를 설파하고 있다.

    더욱이 모 선교단체 교재에서도 명백한 양태론이 등장하고 있다. 또한 수백 수천명의 교인들을 모아 놓은 부흥회에서 유명하다고 하는 부흥강사들이 양태론을 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필자에게는 양태론이 먼 지평선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한국교회에 쳐들어오고 있다고 보이는데 정통교회는 언제까지 양태론에 대해서 강 건너 불구경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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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어떠한 존재인가

    박일민 칼빈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올바른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것은 사람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이 된다. 사람의 나약함과 죄악함을 바로 알 때라야, 강하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성경은 사람을 세 유형으로 나누어서 말한다. 첫째는 처음 지음받은 상태의 무죄한 사람이다. 둘째는 죄 아래 있는 사람, 즉 죄인이다. 셋째는 죄에서 해방된 사람, 즉 중생인이다. 이 중에서 처음 지음받은 상태의 사람을 살피는 것은 가장 우선되어야 할 과제이다. 그래야 그것을 근거로 하여서 지금 우리의 죄인된 모습을 진단할 수 있고, 바람직한 내일의 중생인의 모습을 그려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처음 지음받은 사람의 모습에서 우리는 다음 몇 가지 점들을 유의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서 천지를 창조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목적이 있었음을 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그래서 그 특별한 계획에 어울리도록 사람을 독특하게 지으셨다. 그 독특함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음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고 하신 것은 이 때문이다(창 1:26).

    이 말씀에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 이외에도 모양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그러나 형상과 모양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형체가 없으시다. 따라서 하나님의 모양을 어떤 외형적인 것과 연관하여 생각할 수가 없다. 형상과 모양은 때때로 구분이 없이, 서로 교대적으로 사용되어진다. 창세기 1:26절에는 형상과 모양이 동시에 등장한다. 그러나 1:27은 형상만을 말하고, 5:1은 모양만을 말한다.

    하지만 5:3은 또다시 둘 다를 사용한다. 히브리식 표현에는 강조를 위하여 비슷한 의미를 가지면서도 각기 다른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신 6:5에 기록된 "너는 마음을 다하여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말씀의 경우를 보자(예수님께서는 마 22:37에서 이 말씀을 인용하여 이르시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다). 여기서 마음과 성품과 힘, 또는 마음과 목숨과 뜻은 각각 별개의 것을 가리키는말이 아니다. 반복을 통해서 강조를 하려고 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우리는 다른 피조물과 달리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것들 중에서 그 내용을 찾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께서는 새 사람을 가리켜서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은 자니라"(골 3:10)고 하셨고, 또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고 하셨다. 이 말씀을 보면 참지식, 의, 거룩함이 각각 하나님의 형상으로 표현되고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하나님처럼 참지식과 의와 거룩함을 지닌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

    그러나 사람은 범죄로 말미암아서 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참 지시과 의와 거룩이 아닌 단지 거짓된 지식과 왜곡된 의와 거룩함의 모양들만 가지게 되었다. 참지식과 의와 거룩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된 자들에게만 회복이 되어진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식으로 전략되어 버렸기 때문이다(엡 2:3).

    그러면 범죄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전혀 없는 것인가? 그래서 범죄한 사람은 다른 피조물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것인가? 사람은 범죄한 이후에도 여전히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친히 코에 불어 넣어 주셨던 생기는 범죄한 이후에도 여전히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다른 피조물들을 지배하고 다스리게 하자는 하나님의 계획대로, 사람은 여전히 피조물들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리고 있다. 이 때문에 사람은 범죄한 이후에도 만물의 영장일 수가 있다. 이렇게 볼 때, 사람이 다스려야 할 피조물을 숭배하거나 그 앞에서 두려워하는 것은 우상숭배일 뿐만 아니라 창조질서를 위반하는 죄가 된다.

    그러므로 참지식, 의, 거룩은 범죄로 말미암아 상실해버린 하나님의 형상이지만, 사람이 지니고 있는 영성(靈性)과 피조물에 대한 지배권은 범죄와 관계없이 지니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들이 영적 진리를 분별하게하거나 하나님 앞에서의 공로를 이룰 수 있게 하는 것은 아니다.

    2. 육체와 영혼

    사람은 육체와 영혼을 가진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 육체는 흙으로 빚어졌다. 영혼은 하나님께서 불어 넣으신 생기로 말미암았다. 우리는 육체와 영혼이 결합되어 있는 상태를 가리켜서 살아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죽음은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육체와 영혼은 각기 그 왔던 곳으로 되돌아간다.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나님께로 되돌아간다.

    육체와 영혼은 각기 그 근원이 다른 것처럼, 그 특성도 다르다. 그래서 서로 갈 등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마음은 원하지만 육체가 연약해서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는 때가 있다. 때로는 육체의 욕망이 영혼의 탄식을 자아내는 때도 있다. 또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루기 위하여서는 육체의 요구를 억제해야 할 때도 많다. 그래서 사도 바울께서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하고 탄식하였다. 경건한 사람일수록 이러한 육체와 영혼의 갈등은 더욱 심해진다.

    사람은 한 그루의 나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육체는 나뭇잎에 해당하고, 영혼은 열매에 해당한다.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나무는 찍혀 불에던지운다. 따라서 사람은 영혼에 더 치중해야 한다. 그러나 나무를 아름답게 단장하고, 알찬 열매를 가능하게 하는 나뭇잎 즉 육체도 적절하게 보살펴야 한다. 육체는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것이다. 그러기에 육체는 선하고 존귀하다.

    육체를 죄악시 하거나 천시하는 것은 옳치 못하다. 더욱이 우리의 육체는 장차 부활하여 영혼과 더불어서 영원히 조화를 이루며 지내게 될 것이다. 육체와 영혼의 갈등은 육체 자체가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은 결과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육체를 적절히 관리해야 한다. 육체가 죄의 악한 영향에서 벗어나게 되기를 힘써야 한다. 그리하여 의의 병기를 삼아야 한다. 그리고 육체를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영혼에는 두 가지의 기능이 있다. 하나는 사리를 분별하고 판단하는 이지적인 기능이다. 다른 하나는 선악을 구별하여 행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기능이다. 이것은 하나의 영혼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의 기능이다. 사람에게 이 기능을 담당하는 기관이 각각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지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혼이 따로 있고, 종교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영이 따로 있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성경에는 영(spirit)과 혼(soul)이 별개인 것처럼 구별되어지게 사용된 경우가 없지 않다. 사도 바울께서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편지하시기를,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존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고 하셨다. 또 히브리서의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히 4:12)고 하셨다.

    그러나 성경은 더 많은 곳에서는 영과 혼이 특별한 구분없이 서로 교대적으로 사용되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영혼의 상태를 가리켜서 지금 내 마음(soul)이 민망하다고 하셨다(요 12:27).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심령(spirit)에 민망히 여기셨다고 했다(요 13:21). 민망히 여기는 것이 영이기도 하고 혼이기도 하다. 또 예수님께서는 그의 목숨(soul)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셨다고 했다 (마 20:28).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크게 소리를 지르시고 그 영혼(spirit)이 떠나 가셨다고 했다(마 27:50). 하나의 생명이 영으로도 표현되고 혼으로도 표현되었다. 이러한 사례는 다른 여러 곳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므로 영과 혼이 각기 다른 두 개의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영혼이 지닌 두 기능이라고 보는 것이 좋다.

    3. 복된 환경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복되게 창조하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창조한 사람을 보시고 심히 좋아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명은 복된 것이다. 아무리 하찮게 여겨지는 생명이라 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복된 것이다. 이 세상에 우연하게 또는 재수없게 태어났다고 여겨질 만한 생명은 있을 수 없다. 여기에 모든 사람의 생명과 인권을 존중하게 여겨야 할 이유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에, 독생자까지 희생시켜서 그 생명을 값주고사신다. 혹 표범이 그 얼룩점을 바꾸는 일이 일어날 수 있을런지는 몰라도, 생명을 복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변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생명을 소홀히 하거나 헤치는 것은 크나큰 죄악이다.

    사람의 생명뿐만 아니라, 삶도 역시 복된 것이다. 아무리 고달픈 삶이라고 하더라도 삶이란 복된 것이다. 삶에 고통이 들어온 것은 죄로 인하여 생겨난 결과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항상 감사함으로 활기찬 삶을 살아야 한다. 어떤 종교에서처럼, 사람과 인생 그 자체를 고통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삶이 고달플수록 그 원인이 되는 죄를 찾아서 회개하고 바르게 하기를 힘써야 한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연단으로 주시는 삶의 고통은 예외이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삶은 더 없이 복된 상태로 변화되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에덴 동산에서 살게 하셨다. 거기에는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각종 나무들이 있었다. 저 솔로몬의 옷보다 더 고운 백합화가 있었다. 아름답게 지저귀는 새소리가 있었다. 또 한 강이 발원하여 동산을 적셨다. 그 강은 다시 아름다운 네 개의 강으로 나뉘어 흘렀다. 부패와 오염이 전혀 없는 복된 환경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죄는 복된 환경을 무질서와 혼란으로 바뀌어 놓았다. 땅은 박토로 변했다. 엉겅퀴와 가시가 생겨났다. 수고의 땀을 흘려도 그 댓가를 얻기가 힘들 정도의 악한 환경이 되고 말았다.

    환경의 오염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에 대한 도전으로 이해될 수 있다. 기독교인들은 최근 전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환경보호 운동에 적극 앞장설 필요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되고 아름다운 창조에 대한 보존 또는 회복을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 환경론자들의 경우처럼, 우리는 자연 그 자체를 하나님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자연은 우리가 다스리고 지배하여서, 더 큰 아름다움으로 가꾸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도구로 삼아야 할 대상일 따름이다.

    4. 사회적 존재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혼자가 아닌 더불어 사는 존재로 만드신 것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는 가정을 이룬다. 가정은 사회의 최소단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사람을 사회적인 존재로 창조하셨다. 사람이 필요에 따라서 때때로 골방과 산을 찾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예수님과 사도들께서도 그렇게 하셨다. 그러나 고립주의적인 수도원 생활이나 독불장군식의 삶을 계속하는 것은 재고해 보아야 한다. 산 위에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던 제자들은 거기에다 초막들을 짖고 살 것을 원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많은 문제들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던 산 아래로 주님과 함께 내려갈 것을 명하셨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은 머리에서부터 보배로운 기름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여호와께서는 거기에서 복을 명하신다(시 133:1~3). 그리고 주님께서 명령하신 빛과 소금의 역할도 사회 안에서라야 이루어질 수 있다.

    최근에는 독신생활이 늘어나고 있다. 독신생활이 사도 바울의 경우처럼 주님을 향한 최대 희생의 표시일 경우는 예외를 인정할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편의만을 위한 독신생활은 많은 죄악의 온상이 된다. 또 하나님의 창조에 비추어 볼 때도 문제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독처하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로 이루어져야 한다.

    한 아내가 여러 남편을 갖는 것이나, 한 남편이 여러 아내를 갖는 것은 옳치 못하다. 사실 족장들을 위시한 성경의 많은 인물들은 여러 아내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근거로 일부다처제를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속단이다. 그것은 사람이 범죄한 이후에 끌어들인 악한 행위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에 주셨던 본래의 제도는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는"(창 2:24)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동일한 재료로 만드셨다. 또 남자의 머리뼈와 발목뼈가 아닌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다. 이것은 남녀의 동등성을 의미한다. 남녀의 인격에는 우열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남녀의 관계를 종속적인 관계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남녀의 인격은 똑같이 존중시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역할에는 서로 구분이 있다.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에 역할의 구분이 있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 역할의 구분이 무너지면 가정의 조화가 깨어지고 만다.

    부부의 관계, 즉 가정은 사회의 최소 단위이다. 그러므로 부부의 관계는 사회의 여러 관계들에도 확대 적용될 수 있다.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인격적으로 동등하다. 그러나 그 역할에는 서로 구분이 있다. 다스리는 자가 있고 섬기는 자가 있다. 가르치는 자가 있고 배우는 자가 있다. 다섯을 맡은 자가 있고 하나를 맡은 자가 있다. 그러나 무엇을 맡았는가 또는 얼마나 맡았는가와 관계없이, 각자가 자기의 역할을 잘 감당할 때 사회는 조화로운 상태를 이룬다. 그리고 그 안에 주님이 계시게 되면, 그 곳은 바로 천국이 되어진다.

    5. 노동하는 존재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피조물들을 다스리게 하셨다(창 1:26). 또 땅을 경작하게 하셨다(창 2:5). 다스림과 경작은 노동을 의미한다. 노동은 사람이 범죄하기 이전에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이자 축복이었다. 노동은 사람에게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시려는 하나님의 배려이었다. 그러므로 노동을 천시하거나 죄악시하는 것은 잘못이다. 노동은 신성한 것이다. 범죄의 결과는 노동 그 자체가 아니라, 노동의 수고와 고통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지금까지 일하고 계신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편하고 배부르게 먹고 사는 것을 축복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아야 한다.

    우리는 사람이 노동을 통해서 얻어낸 결과를 가리켜서 문화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사람이 노동하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음은 문화적 존재로 지음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에게는 문화를 적극적으로 만들어 내고 발전시켜야 할 문화적 사명이 주어져 있다. 이 문화적인 사명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잘 조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이 범죄한 이후에는 문화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대적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바벨탑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리고 사람의 말초적인 향락을 추구하는 방향으로만 나아갔다. 소돔과 고모라의 경우가 그러했다. 오늘날의 세속문화는 바벨탑이나 소돔 고모라의 타락상보다 더 심각하다. 그래서 성도들은 문화를 불신자들에게만 내맡기고, 외면을 해 버리는 일까지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이다. 성도라면 적극적으로 문화에 참여하여 타락한 문화의 변혁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문화를 창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는 아름다운 찬송이 되게 하고, 사람에게는 큰 기쁨이 되게 해야 한다.

    노아의 방주는 노동없이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성전의 건축에는 온갖 아름답게 다듬어진 재료와 각종 기술들이 총동원되었었다. 하나님을 찬양함에는 각종 악기와 공교한 연주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함에는 놀라우리만치 정확한 문법과 단어들이 사용되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문화를 개발하고 발전시켜야 할 책임이 있다.

    노동에는 정신노동, 육체노동, 가사노동 등 여러 유형이 있다. 그러나 어떤 노동이든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일을 이루는 것이라면, 귀천이 따로 있을 수 없다. 노동에 귀천이 없음은 직업에 귀천이 있을 수 없음을 뜻한다. 우리는 노동을 할 때,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도록 우리를 부르셨다는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자기에게는 어떤 노동을 할 만한 은사가 부여되어 있는지, 또 얼마만큼 부여되어 있는지를 고려해야 한다. 그래야 보람을 느끼면서 효과적인 노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떠한 존재인가. 어떠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처음 지음받은 사람의 모습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서 영혼과 육체를 가진 존재로 지음을 받은 만물의 영장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모든 죄악을 벗어버리고, 서로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아름답고 복된 피조물을 잘 다스리고 관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요구하는 바람직한 인간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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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주의의 위대한 유산 존 스토트Ⅰ

    영혼을 살린 설교자



    권영삼 032kwon@naver.com
    존 스토트(John Robert Walmsley Stott)는 현존하는 탁월한 설교가이자, 복음 전도자이며, 기독교 학자이고, 저술가다. 그는 20세기 후 반에 기독교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세계 복음주의 신앙의 대표적인 목회자로 평가받고 있다. 영국 복음주의 신앙 운동을 주도했으며, 세계복음주의협회(World Evangelical Fellowship)를 창설하여 그 시대를 이끈 장본인이다.

    그는 평생을 영국 런던의 한 복판에 자리한 올소울스 교회 (All Souls Church)의 설교자로 사역했다. 특히, UCCF(한국의 IVF)와 국제복음주의연맹(IFES․International Fellowship of Evangelical Student)을 중심으로 전 세계적인 복음주의 학생에 깊이 관여했으며, 세계복음화를 위한 복음주의 선교 운동 로잔회의(Lausanne Congress, 1974)의 산파역을 맡아 ‘로잔언약’(The Lausanne Covenant)을 입안했다. 존 스토트는 설교와 강연을 통해 복음에 대한 충실한 증거를 하였으며, 무엇보다 여러 기독교 교리에 대한 도전에 대해 올바른 응전을 하도록 애썼다.

    지난 1999년, 필자는 존 스토트를 만난 기회가 있었다. 동양권에서 최초로 열리게 된 IFES 의 세계총회인 ‘World Assembly 99’ 주강사로 선정돼 내한한 그를 취재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이 대회에서 한국의 영적 성장과 부흥을 격려하며, 지나간 역사와 다가오는 새 천년을 앞두고 이 시대야말로 복음을 바로 이해하고 가장 확고한 복음정신으로 무장할 것을 거듭 강조했다.

    아직도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한 가지 있다. 그가 새를 좋아한다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새를 좋아하는 특별한 이유가 무엇인가를 물었다.

    “나는 단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평서문이 아닌 강한 명령문으로 ‘새를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아버지의 영향도 큽니다.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시골의 숲으로 가서 ‘입은 다물고 귀를 크게 열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명령과 아버지의 훈련으로 나는 어릴 때부터 새를 관찰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전 세계로 다니면서 각 나라의 새를 관찰하고 배웁니다.”

    필자가 그를 주목하는 것은 비단 그의 사역 때문만이 아니다. 그의 저서『현대 교회와 설교』에서 제시한 ‘다리 놓기’ 설교 이론을 통해 신학도와 목회자들에게 많은 영감과 도전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평생을 그의 사역지에서 성경적인 설교에 헌신해온 설교가이기 때문이다.

    존 스토트, 전 세계의 격변기에 태어나다
    존 스토트의 아버지 아놀드 스토트(Arnold Stott)는 명성이 높은 의사였다. 영국의 전문 의료진이 모여 있는 할리(Harley Street) 가에 진찰실을 두고 있었다. 아놀드 스토트는 교육과 계몽주의 신봉자였으며 인도주의자였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만한 신랄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언어 사용도 매우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과학적 세속주의자요, 세심한 자연주의자였으며, 전문적인 식물학자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이런 영향을 받아 어린 존 스토트는 어린 시절부터 나비 수집에 관심을 가졌고, 조류 관찰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Timothy Dulley Smith, John R. W. Stott, p.47). 아놀드는 의사로서의 특전을 행사하면서도, 기독교 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가끔씩 교회에 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어머니 릴리 홀랜드(Lily Holland)는 정기적으로 자녀들과 함께 교회에 갔다. 그녀는 성실하고 상냥하고 이타적인 사람이었다. 특히, 남편과 잘 조화를 이룬 사람이었다. 이 부부는 서로에게 헌신했고 자녀들에게도 헌신했다. 그녀도 역시도 남편처럼 강한 성품을 가진 여인이었으며 원칙에 충실했다. 하지만 쉽게 흐트러지지 않는 고요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홀랜드 여사는 매우 창의적이었으며 자녀들에게 손수 물건을 만들도록 가르쳤다. 그녀는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여인이었으며, 그 목소리는 존 스토트에게도 그대로 전달되었다. 그녀는 존 스토트를 데리고 여러 강연에 참석했고, 자녀가 잠자리에 들 때 기도를 가르쳤다. 존 스토트는 10대 중반까지 어머니에 의해 신앙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스토트의 부모가 결혼 초 웨스트 캔팅턴 에디슨 가에 살 당시인 1921년 4월, 존 스토트가 태어났다. 그의 위로는 조안, 로즈메리, 조이 등 세 누이들이 있었다. 그는 외아들로서 어머니와 아버지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았고 반면, 그의 바로 위 누나는 상대적으로 설움을 받고 자랐다. 존 스토트는 태어 난지 한 달 후에 할리가로 이사했다.

    존 스토트가 태어난 1921년 전후의 10년은 세계사적으로 상당히 격변기였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75년에 걸친 자유민주주의가 무너지면서 소련이 생겨났다. 1918년 제1차 대전이 종결되었고, 1919년에는 무솔리니가 이탈리아 파시스트 당을 만들었다. 1920년에는 미국 주도의 국제연맹이 창설되었고, 1921년에는 아돌프 히틀러가 나치당 당수로 선출되었다.

    영국 역시도 많은 격변을 겪는데, 1920 영국 공산당이 창당되고, 1924년에는 노동당 정부가 세워졌다. 전후 경제 불황이 닥치고 26년 총파업이 일어났다. 조금씩 종교적 세속화의 과정이 일어나면서 자유주의 사상을 필두로 전통적인 종교 관념을 침식해 들어갔다. 1930년대는 독립된 교회들이 모여 현대적 의미에서의 영국 국교회가 생겨났다. 결론적으로, 1920년대는 현대로 들어서는 하나의 출발점이었는데 그 중요한 시기에 존 스토트는 안정되고 행복한 가정에서 아동기를 보냈다.

    새를 관찰한 오클레이 홀 시절
    존 스토트는 어린 시절부터 소아과 의사가 되고 싶어 했지만, 아버지가 반대했다. 존 스토트는 1929년 만 여덟 살 반이 되던 해 글로스터셔에 있는 오클레이 홀에 진학했다. 이 과정은 그의 아버지가 다닌 사립학교 럭비에 가기 위한 예비과정이었다. 이 학교는 런던에서 160km 떨어져 있었고, 따라서 그는 어린 시절을 예비학교 때부터 기숙사 생활을 했다.

    어린 시절의 기숙사 생활은 다소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잘 적응했고,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했다. 오클레이 홀은 특히 기독교적인 기초 위에 세워진 학교였다. 학교 예배당에서 들리는 예배 외에도, 하루 일과는 빅 스쿨에서의 아침 기도로 시작해서 저녁기도로 끝이 났다.

    존 스토트가 기독교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친구 제라드 어빈을 통해서다. 제라드 어빈은 학교에서 30km 떨어진 곳에 살았는데, 그의 아버지는 아일랜드계로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존 스토트는 주말에 친구 집을 방문하기 좋아했고, 어빈에게서 기도와 무릎 꿇는 방법 등 신앙의 행위들을 배웠다.

    오클레이 홀에서 존 스토트는 새의 관찰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는 새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졌고, 노트를 기록했으며 글과 책을 남겼다. 이 습관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오클레이 홀 학교 주위는 전원적인 곳이어서 자연과 새들을 관찰하기에 적절했다. 존 스토트는 1930년 8-9월 사이에 40개 정도의 새 관찰 목록을 기록했다.

    럭비-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신한 장소
    그 후, 존 스토트는 럭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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