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나라현에 가면 토다이지(東大寺)라는 절이 있습니다. 764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1633년을 비롯하여 여러 번 소실되었다가 1894년에 오늘의 모습으로 완전히 복원되었다고 합니다. 본래의 크기보다는 33% 정도로 축소된 건물이지만 세계에서 제일 큰 목조 건물로 일본 사람들이 자랑하는 국보입니다.
그런데 이 절 안에는 동으로 만든 불상이 있습니다. 앉아 있는 불상의 높이만 14.98미터에 달하여 건물로 따져도 4층 정도의 높이입니다. 부처의 머리만 5.41미터, 눈의 길이가 1.02미터, 귀의 길이는 2.54미터입니다. 손바닥의 넓이가 얼마나 큰지 장정 16명이 올라가 설 수 있을 정도로 크다고 합니다.
부처의 자비가 해처럼 온 세상에 비치게 된다는 상징으로 이 절을 만들었고 부처상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평화와 풍요로운 삶을 기원하기 위하여 부처에게 기도한다고 합니다. 수많은 관광객과 아울러 오늘도 이 절에는 이렇게 기원하기 위하여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일본인들이 향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부처상 뒤에 있는 절의 기둥 가운데 하나에 부처의 코구멍 크기의 구멍이 있는 기둥이 있었습니다. 그 구멍을 잘 통과하는 사람은 운수가 대통한다는 속설이 있어 사람들이 그곳을 통과하기 위하여 애쓰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통과했는지 반질반질하게 윤이 났습니다. 마침 한 외국인이 그곳을 통과하려고 애를 쓰다 결국은 하지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놋으로 만든 물건이 하나 등장합니다. 가나안을 향하여 가는 길목에 있는 에돔 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이 에돔땅을 통과하여 가나안에 이를 수 있도록 부탁하였습니다. 그런데 에돔 왕은 박절하게(기분 나쁘게) 거절하였습니다(민20:14-21). 백성은 할 수 없이 홍해 길로 내려가 에돔 땅을 돌아가야 했습니다(민21:4). 험난하고 더 먼 거리를 돌아가야 하는 백성들은 또다시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공격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진노하셨습니다. 그래서 불뱀을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게 하였습니다. 얼마나 맹독을 품고 있었는지 물리는 사람들은 죽었습니다. 화급한 백성들은 모세에게 자신들의 잘못을 시인하면서 뱀을 물리쳐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불뱀을 본뜬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어 달고 그것을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나 모세가 전혀 예기치 못한 일로서 매우 어리석은 방법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것을 바라봄으로써 병이 나을 것이라고 믿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믿고 바라본 자는 다 살아났습니다. 이것은 어리석음 속에 숨어 빛나는 '하나님의 지혜'의 한 전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으로서는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매우 단순한 방법으로 구원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럼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도록 섭리하시고, 진정 당신께 순종하는가를 시험하신 것입니다.
좀더 자세한 내용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으로 가기 위하여 에돔 땅 통과 요청을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에돔 왕이 단호히 거절하여 홍해를 향해 나가는 광야의 길로 우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마음이 상하였습니다. 그들이 가야 할 길은 '홍해 길'로 사해 남부에서 '아라바 광야'(수 11:2)로 거쳐 홍해의 동쪽에 위치한 '에시온게벨'(왕상 9:26)에 이르는 길이었습니다. 그 대부분이 사막지대인 아라바 광야를 거쳐야 했기 때문에 매우 거칠고 여행하기 힘든 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1세대 역시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가데스에서 다시 돌이켜 '홍해 길로 하여 광야로' 들어갔었던 적이 있었습니다(민 14:25). 그 길은 가나안에서 점차 멀어질 뿐만 아니라 매우 험한 길을 가게 되었으므로 백성들의 마음은 크게 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음이 상했다'는 말은 '마음이 짧아졌다', '안목이 좁아졌다'라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크신 경륜과 그들을 향하신 뜻을 바라보지 못하고 당장 눈앞에 나타나는 고통을 인하여 근시안이 되었습니다. 지리적 조건이 어렵다는 것을 이유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무시하고 소망과 믿음이 짧아지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불신을 들어내는 큰 잘못입니다. 바로 눈앞에 시련이 있어도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자 하며 순종하는 성도가 지혜로운 것입니다. 환경과 조건을 이유로 마음이 옹색해진 이스라엘은 불평과 원망으로 인하여 결국은 더 큰 실패의 고통을 얻게 된 것입니다.
마음이 상하여 있으니 순종할 리가 없고 감사가 나올 리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눈은 더욱 큰 것은 보지 못하고 당장 보이는 것에만 집착해 있었습니다. 눈앞의 현실이 자기들에게 유리하다고 하여 감사하고 기뻐하다가 그렇지 못할 때에 마음이 상하고 불평하는 것은 잘못된 신앙의 태도입니다. 그러한 신앙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들도 생활 가운데 어려움을 만날 수 있습니다. 또한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려울 때일수록 당장 보이는 것으로 인하여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신실한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지해야 그것인 건강하고 바른 믿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고생하는 것이 애굽에서 나왔기 때문이라고 단정하고 그들을 나오게 한 모세와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이러한 백성의 원망은 여정 가운데서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불평이었습니다. 또한 이것은 죽음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크신 경륜을 멸시하는 죄악이었습니다. 성도는 어려움을 당할 때 진실한 신앙여부를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 자체를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태도는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박한 식물을 인해서도 원망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박한'이라 단어는 '악한', 또는 '무시할 만한'이란 뜻으로서,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만나'를 멸시한 백성들의 완악함을 나타내 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의 마음이 비뚤어져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만나'를 몹시 지겨워하였습니다. 단순히 싫어하는 정도를 넘어서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며 나아가서는 그 '만나'가 없어지고 끊어지기를 바라는 감정적 반응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사는 육의 사람들이 되어 하나님을 거스르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기 때문입니다(롬 8:6).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 백성에게 진노하셔서 불뱀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큰 희생을 치르게 하신 것입니다.
불뱀이라 함은 뱀에서 불이 나왔다는 뜻이 아닙니다. 생긴 모양이 붉은 색을 띠어 불처럼 보였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뱀의 맹독성 때문에 물린 사람들이 불덩이처럼 열이 오르게 되어 생명을 잃게 되는 현상 때문에 붇쳐진 이름이라 생각합니다. 뱀에 물려 고통을 당하거나 생명을 잃으면서 그제야 백성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우매함을 깨달은 백성들이 모세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며 살길을 찾았습니다. 백성을 위해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놋으로 불뱀의 형상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장대'에 해당하는 '네쓰'라는 히브리 말은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라는 의미의 '여호와 닛시'(출 17:15)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장대'는 중요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세운 기(旗 렘 50:2, 사 11:2)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 표식은 바로 '불뱀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놋뱀'이었고, 그 정보는 '그것을 보면 살리라'는 것입니다. 즉 치명적인 독을 가진 불뱀을 놋뱀으로 극복한 하나의 승리의 소식, 즉 복음이었던 것입니다.
독뱀에 물려 소망이 없이 죽어야 하는 사람들이 그냥 놋뱀을 바라봄으로써 얻는 구원이 선포된 것입니다.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아 죽어가고 있는 그들에게 구원은 값없이 주어졌습니다. 그들의 어떤 공로나 그들의 어떤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바라보기만 하면 구원이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그들이 하늘 높이 들린 놋뱀을 단순히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아무런 조건 없이 바라만 보면 해결된 것입니다. 단순하면서도 전적인 신뢰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생사가 달린 죽음 앞에서 살 길이 어디 있는 지를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구리로 만든 뱀을 처다 보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고 구원의 길이 있다는 말은 믿음이 없이는 결코 받아 드릴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믿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서 유일한 구원의 길은 하나님 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다른 방법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구리뱀을 처다 본 것입니다. 분명 성경은 놋뱀을 처다 본 사람은 누구든지 다 구원을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구원은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4장 5절에서는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말씀 대로입니다.
뱀은 여느 짐승과는 달리 이방 세계에서 이방신들의 능력에 의한 풍부와 치유의 상징이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사람을 영원으로 인도하는 인도자로 상징하였습니다. 놋뱀을 만들어 그것을 처다 봄으로 죽음에서 살게 하신 것은 뱀 숭배를 인정한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그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으로 놋뱀을 사용한 것뿐입니다.
그래서 놋뱀을 우상으로 섬기는 이스라엘의 우매함을 없애기 위하여 히스기야가 종교 개혁을 하면서 열왕기 하 18장 4절에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고 하였습니다. 느후스단이란 말은 그들이 신성시 하고 무슨 능력이라도 있는 것처럼 섬기는 놋뱀이 단순한 놋 조각에 불과하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것은 놋뱀이 아니라 그것을 처다 보면 죽음에서 벗어나게 됨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과 그 능력입니다. 아무리 웅장하고 장엄한 놋 주조물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그냥 놋 조각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놋뱀을 쳐다봄으로써 산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뢰해야 구원받을 수 있음을 상징한 것입니다. '바라보다'가 '하나님을 바라보다'는 뜻으로 쓰일 때는 '여호와께만 눈을 고정시키고 유일한 도움이신 여호와의 뜻을 따라 살아가다'란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시 34:5; 사 51:1; 22:11). 본문 역시 온전한 믿음과 신앙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놋뱀을 달아 놓은 장대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불뱀에게 물린 상처와 모든 증상이 말끔히 낫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그들의 '쳐다보는' 행위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이었으며 이것을 통해 구원의 기쁨을 맛볼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요 3:16).
어느 목사님의 경험담입니다. 어느 날 한전에서 어떤 사람이 찾아 왔습니다. 검침하러 온 줄 알았는데 두 달 분 전기세를 내지 않았다고 하면서 과태료까지 붙은 청구서를 제시하였습니다. 분명 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냈다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러자 영수증을 보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분명히 냈다고 하여도 영수증을 보여 달라고 막무가내였습니다. 직원은 과태료까지 포함된 고지서를 놓고 가려고 하였습니다. 영수증을 찾아보았더니 마침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수증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말하기를 '목사는 안 믿고 영수증만 믿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막무가내였던 사람이 영수증을 보더니 기가 꺾였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기가 살아 분명히 낸 것을 왜 이중으로 내라고 하느냐고 따졌습니다. 조금 전 까지만 하더라도 그렇게 당당하던 사람이 영수증 앞에서는 꼼짝하지 못했습니다. 영수증이 그렇게 센 힘을 가졌으리라 생각지 못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