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신 몸에 남은 고난의 흔적 2002-03-11 10:39:21 read : 3492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20: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요20:20)
오늘 이 장면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두 번째 나타나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모습을 처음 본 사람은 이상하게도 예수님의 사랑을 받던 제자들이 아니라 여인들이었습니다. 특별히 막달라 마리아와 두 여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달려와서 그 사실을 확인하고 돌아갔지만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신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 때문에 그들의 의견은 분분했습니다.
때는 안식 후 첫날이었으니 지금 우리의 주력으로 말하면 주일날 아침이 되는 것입니다. 무덤으로 갔던 여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발견한 것이 환하게 밝아오는 새벽이었다고 한다면 오늘 이 장면은 저녁때입니다.
앞절에서 제자들이 모여서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였다고 했는데 그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 평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고 시체가 그 무덤에서 사라진 것은 틀림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그 가르침을 합리화하려는 제자들의 소행이라고 오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일차적으로 수배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고 시체를 본 적도 없는 이 제자들은 예수님의 시체를 감추고 허망한 풍설을 세상에 퍼트리는 종교적인 이단자들로 낙인이 찍힐 판이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사실을 제자들 자신도 반신반의하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두려움에 가득 차서 문을 굳게 잠그고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스스로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포와 침묵만 가득한 그곳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많은 제자들은 이것이 상상일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문은 굳게 닫혔고, 어디로도 들어올 수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갑자기 자기들 한가운데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부활체의 신비입니다. 부활이 때는 단순히 영혼의 부활만이 아니라 육체의 부활도 함께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그 육체가 지금 우리들이 숨쉬고 먹고 마시는 이 육체와 다릅니다. 지금의 이 육체 안에 있는 동안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가 없지만 부활체는 육신의 몸을 가지고 있지만 공간에 매이지 않습니다.
문을 열고 나갈 수도 있고 벽을 통과할 수도 있습니다. 교리적으로 이런 부활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일어나게 됩니다. 그때에 구원받은 성도들은 낙원에서, 불신자들은 음부에서 모두 나와 부활한 몸을 입고 그 부활한 몸으로 불신자들은 지옥에 가서 영원한 형벌에 떨어지고, 신자들은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그 이후에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행동과 말씀입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그들에게 평강이 있기를 비신 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못 박힌 속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놀라운 마음의 변화를 경험하고 기쁨과 소망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아마 우리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한 영광의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이전에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섬기시던 모습과는 완전히 대조되었을 것이고 어떤 바하된 모습도 읽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찬란한 영광 가운데 계신 분이 옆구리를 열어 창에 찔린 자국울 보이시고 손을 내밀어 못 박힌 자국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찬란하게 눈부신 영광의 광채에 제자들이 압도당하고 있을 때에 인간에게 찔린 부끄러운 그 창 자국과 그 못 자국을 보여주신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이것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고난 후의 부활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지금은 찬란한 하늘의 영광으로 변화되시고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이 차마 마주 대할 수 없는 지존하신 모습으로 나타나셨지만 그 화려하고 영광스런 부활은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 이후에 나타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한가지 사명을 지향하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화목 제물이 되어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용서의 길을 열어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그분이 자기에게 주어진 결정적인 사명, 즉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자기를 제물로 바침으로 화목의 길을 여시는 이 사명을 감당해나가시지 않았더라면 예수 그리스께서는 부활하실 수가 없었을 것이며 부활하셨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별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도 많고 자랑할 것도 많고 귀하게 여기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도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언젠가는 죽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반드시 다시 살아나서 우리 주님과 같은 찬란한 형상을 입고 그분 앞에 설 것입니다. 신자들에게는 한없는 부끄러움과 견디기 힘든 고통을 안겨주는 벌의 심판은 없을지 모르나 성경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주님을 위해 어떻게 인생을 사용하였는지를 검사 받는 날이 올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행했던지 선악간에 우리 모두 주님을 위해서 사는 날들을 두 손에 들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회계하시는 그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의 자랑이 무엇일까요? 찬란한 영광 가운데 부활하신 그 주님이 우리들에게 그 찔리신 옆구리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못 박히신 손을 보여주실 때에 우리는 주님 앞에 무엇을 보여드릴 수가 있을까요?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성도가 그 은혜의 감격을 유지하면서 일평생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 보답하며 하늘의 신령한 것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을 얻고 쓸모 없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고귀하신 몸으로 자기를 제물 삼아 이루신 그 구원을 우리의 영광을 취하는 기회로 삼으면서 살아갈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몰랐을 때에는 몰랐으니까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인생의 진실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셨고 주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그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하게끔 만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자기의 옆구리에 창 자국과 못 자국을 보여주심으로 자신이 환상이 아니라 정말 부활하신 그 예수 그리스도시며 이 찬란한 부활은 바로 육체의 부활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러나 동시에 그 육체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도 찬란한 부활의 영광에 이르기까지 참고 기다리며 감당해나가야 할 우리 나름대로의 고유한 사명이 있다는 사실과 그것을 위해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 때에 부활의 찬란한 영광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6:17)고 절규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나타날 부활의 영광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고난과 핍박을 통해 간직하게 된 그리스도 예수의 흔적이라고 하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를 위해서 살고 주를 위해 충성스러운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찬란한 부활의 날에 자기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이 못 자국과 창 자국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의 흔적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를 위해서 드린 고난의 흔적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생을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 예수처럼 부활의 몸으로 다시 살아난 후에는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은 것도 우리의 자랑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그 날에 우리의 자랑거리는 주님께서 주신 그 은혜를 사용해서 일생동안 주님 한 분만을 사랑하고 나에게 주신 독특한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충성된 삶을 살며 시련의 파도를 헤치고 살아온 흔적, 그리고 사명을 이루기 위해 가시밭길을 걸어오는 가운데 난 수많은 상처 자국, 진리를 따라 살기 위해서 박해 받고 고난 당한 그 흔적들이 될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의 현장, 자기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영광 가운데 옷섶을 열어서 뚫어진 창 자국을 보여주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의 현장을 대하며 우리는 내 몸에는 무엇이 있는가, 나는 정말 부인할 수 없는 예수의 흔적을 내 몸에 지니고 있는가, 이렇게 겉으로는 주님을 위해서 산다고 하지만 많은 날들을 주님의 일과 사역을 빙자해서 자신의 영광을 취하며 안일하게 살아온 날들을 모두 제하고 나면 정말 순수한 가슴, 타는 듯한 열망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그렇게 하나님 아버지만 사랑하고 그분의 영광만을 위해 살고, 자신에게 맡겨준 사명 하나에 인생의 가치를 걸면서 살아온 날들이 얼마나 될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 영광의 부활이 내 부활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의 그 고난도 나의 고난이 되어야 합니다. 그분만이 자신의 전부인줄 알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은 수치, 그분의 나라를 위해서 받는 능욕이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보화보다도 더 크고 영원하다는 사실을 믿으며 산 사람들은 그 부활의 날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유일한 목표이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대면하여 볼 것이며 복음과 함께 살아온 날들 동안에 받은 수많은 상처와 못 자국을 주님께 보여드리며 제자로서 충성스럽게 살았던 지난날들에 대해서 합당한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사랑,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주님이 베푸셨던 그 크신 은혜를 생각해보십시오. 한번만 우리를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알려주신 것이 아니라 오늘도 뉘우치고 참회하는 우리의 마음에 오셔서 구원의 사랑이 무엇인지, 하나님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으로 자기를 화목 제물로 삼으셔서 쓸모 없는 인생들을 위해 아버지가 되시고 싶어 하셨는지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살아온 인생의 많은 날들은 오히료 두 마음을 품은 날들이 아니었을까요?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알면서도 주님만을 위해서 살수는 없었던 많은 날들이 오늘 우리에게는 한없이 무거운 부끄러움이 되고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을 때에 오직 한마음을 품고 우리를 위해 자기를 모두 드리셨던 것처럼 우리도 또한 그 영광스러운 부활을 사모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에 감화를 입은 주님의 자녀들로 살아서 인생에 어느 땐가 한번쯤은 그렇게 우리의 온 마음과 생각 속에 예수밖에 없다고 고백할 수 있는 날들을 주님께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이 세상에서 가장 부끄러운 사람들은 자기의 영광만을 위해 살고 주께서 구속의 은혜로 주신 보석과 같이 소중한 날들을 육체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사람, 이 세상에서 가장 우리들이 사모해야 할 사람은 주께서 주신 날 동안에 한 점의 부끄러움이 없이 오로지 인생 전체를 드려서 주님을 위해서 능욕을 받으며 영문 밖에까지 그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거룩한 은혜에 넘치는 교회 생활을 가슴에 간직하고 영문 밖에 있는 이 세상을 향해 걸어가는 그 사람들, 그래서 살아온 인생의 모든 날들이 눈물과 피로 얼룩진 날들이었지만 그 모든 날들을 통해 사명을 감당하고 마지막에는 주와 함께 그 사랑이신 주님 때문에 죽는 그 사람들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렇게 자기의 옆구리를 보여주시면서 당신이 살아나신 사실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단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사실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여러분들이 저의 설교를 통해 듣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체에 새겨진 그 창 자국과 못 자국의 신비한 비밀들에 대해서 이 제자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기뻐할 수 있다면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찬란한 그 부활에 몸에 어찌하여 부끄러운 고난의 흔적을 간직하고 우리에게 보여주셨는지를 알게 된 우리들은 이 제자들보다 더 기뻐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부활의 놀라운 영광에 참예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을 위해 살았던 수치의 날들이 영광으로 변했으니 오늘 우리들도 주의 사랑을 간직하고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사는 날 동안 받는 모든 능력과 부끄러움이 언젠가는 그 찬란한 영광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하는 것을 믿으면서 단지 우리들이 부활할 것을 인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주를 위해서 고통과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의 사명을 감당해 나가기 위해서 흘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눈물이 언젠가는 알알이 보석이 되고 주를 위해서 당하는 이 고난이 우리에게는 영광스러운 상처가 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면서 이렇게 사명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살아서 우리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에 시련도 많고 부끄러움도 많고 심지어는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박해를 받으며 사는 날들도 많지만 영광스러운 부활의 날에는 우리 모두 일생동안 주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간직하고 피나도록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살았기에 그분 앞에서 영광의 상급을 받고 주와 함께 섬기며 사는 날들을 기쁘게 회상하는 그런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