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강해설교 작성법/ 본론의 아웃라인 작성과 적용 2002-01-23 07:39:40 read : 4590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아웃라인의 작성
이제 본론 작성의 맨 마지막 단계로서 아웃라인을 작성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아웃라인은 건축에 있어서의 청사진과 같다. 건축가가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을 청사진으로 만들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설교에 있어서도 그렇다. 지금까지의 여러 단계는 사실상 아웃라인을 만들기 위한 준비 단계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논의한 다섯 가지 단계는 아웃라인으로 총결산을 하게 된다. 아름다운 건물이 좋은 청사진에서 나오듯이 훌륭한 설교는 훌륭한 아웃라인에서 나온다.
A. 아웃라인의 기본 형태
설교자마다 아웃라인의 형태에 차이가 있을 수 있는데, 필자는 다음과 같은 형태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본문.........................
제목.........................
중심내용...................
설교목적...................
서론
1. .........................
2. .........................
(경과구:.................)
I. 첫째대지
A. 첫째 소지
1. 소소지
2. 소소지
B. 둘째 소지
1. 소소지
2. 소소지
3. 소소지
(경과구:.................)
Ⅱ. 둘째 대지
A. 첫째 소지
B. 둘째 소지
1. 소소지
2. 소소지
(경과구:.................)
Ⅲ. 셋째 대지
A. 첫째 소지
B. 둘째 소지
1. 소소지
2. 소소지
C. 셋째 소지
1. 소소지
2. 소소지
(경과구:.................)
결론
1.
2.
B. 아웃라인의 목적
아웃라인은 왜 필요한가? 좋은 아웃라인은 어떤 가치가 있는가? 그 중요한 것 몇 가지를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첫째, 아웃라인은 설교에 통일성을 주어 설교자로 하여금 횡설수설하지 않게 한다.
둘째, 아웃라인은 설교를 명쾌하게 해주어 청중이 설교의 흐름을 잘 따를 수 있게 해 준다.
셋째, 아웃라인은 설교자에게 설교 각 부분 상호간의 관계를 한 눈에 보아 알 수 있게 해주며, 또한 중요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게 한다.
넷째, 아웃라인은 설교 준비 시 좀더 깊이 연구해야 될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쉽게 구별할 수 있게 해준다.
C. 아웃라인 작성의 원칙
좋은 아웃라인은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몇 가지 원칙이 있다. 2)
첫째, 각 대지나 소지, 소소지에는 반드시 하나의 내용만 포함해야 한다. 아웃라인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각 부분간의 상호 관계를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에 한 대지나 소지 안에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면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한 대지에는 하나의 내용만 포함시켜야 한다.
둘째, 한 대지는 다른 대지와, 한 소지는 다른 소지와 구별되어야 하며, 따라서 유사한 대지나 소지는 만들지 말아야 한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두 개의 대지가 어떤 설교에 포함되어 있다고 가정해 보자.
Ⅰ. 참된 사람은 지속적이다.
Ⅱ. 참된 사랑은 변함이 없다.
이 경우에 두 대지는 서로 내용이 유사해서 그 차이가 무엇인지 사실상 구별이 잘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식의 대지는 피해야만 된다.
셋째, 가능하면 같은 형태의 표현을 계속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할 때 청중이 기억하기 쉽고, 또 그 기억은 오래 지속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각 대지나 소지가 서술형이면 서술형으로, 의문형이면 의문형으로 해야지 여러 자지를 뒤섞어서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다음과 같은 대지를 한 번 보자.
Ⅰ.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Ⅱ. 당신은 참으로 헌신적인가?
Ⅲ. 서로 용서하라.
이 대지는 서술형, 의문형, 명령형 등 세 가지 다른 형태의 종지형(終止型)을 사용하고 있어서 좋지가 못하다.
넷째, 각 대지는 완전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소지도 가능하면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이 좋다. 단어나 구(句)만으로는 완전한 뜻을 전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각 대지나 소지는 독립적으로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문장의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다섯째, 번호는 일관성 있게 사용해야 한다. 모든 대지는 항상 같은 번호로, 또 소지는 대지와는 다르게, 그러면서 모든 소지는 똑같은 번호로 표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뒤범벅이 되어서 아웃라인은 그 존재 이유를 상실해 버리고 말 것이다.
여섯째, 설교에서 모든 부분이 다 동일하게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나 포괄적인 부분은 대지가 되고, 대지를 뒷받침 해주는 부분은 소지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표시할 수 있을 것이다.
Ⅰ. 첫째 대지: 중심 내용을 뒷받침한다.
A. 첫째 소지: 첫째 대지를 뒷받침한다.
B. 둘째 소지: 역시 첫째 대지를 다소 다른 각도에서 뒷받침한다.
Ⅱ. 둘째 대지: 중심 내용을 첫째 대지와는 다른 면에서 뒷받침한다.
A. 첫째 소지: 둘째 대지를 뒷받침한다.
1. 첫째 소소지: 첫째 소지를 뒷받침한다.
2. 둘째 소소지: 첫째 소지를 뒷받침한다.
B. 둘째 소지: 역시 둘째 대지를 다소 다른 측면에서 뒷받침한다.
일곱째, 연구하고 묵상하여 수집해 놓은 자료 가운데 설교에 포함시키기에 부적당한 것이나 설교의 흐름을 방해하는 것은 과감히 잘라 버리고, 이런 것은 아웃라인에 아예 포함시키지도 말고 설교할 때 언급하지도 말아야 한다. 어떤 구절은 해석상의 어려움으로 서너 가지 견해가 있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 설교자가 개인적으로 연구할 때는 각 견해를 다 검토해야 되겠지만 아웃라인을 작성하기 전까지는 어느 견해가 가장 타당한지 결정을 내리고, 아웃라인에서나 실제 설교에서는 이 견해만 언급해야 할 것이다. 설교는 학교 강의가 아니기 때문에 설교자의 연구 과정이나 결론 도출 과정을 실제 설교할 때 다 언급할 필요가 없고, 오직 그 결과만 체계적으로 제시하면 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본문 중 어느 한 절 또는 한두 절이 전체 주제와 방향이 다소 다를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차피 설교자는 자신의 본문 한 절 한 절에 똑 같은 비중을 둘 수 없다. 아무래도 어떤 구절에는 좀더 큰 비중을 둘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가 택한 본문 전체를 관통하는 분명한 주제가 있으면서도 일부 구절이 다소 이질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면 그런 구절은 다소 가볍게 취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덟째, 각 대지와 소지는 가능하면 간단 명료해야 한다. 길고 복잡한 문장보다는 간단한 것이 기억하기에 쉽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그 대지를 중문(重文)이나 복문(複文)으로 표현하기보다는 단문(單文)으로 표현하는 것이 좋다.
아홉째, 한 대지에서 다음 대지로 넘어갈 때, 그리고 때로는 한 소지에서 다음 소지로 넘어갈 때, 경과구(經過句)를 사용해야 하고, 또 경과구는 아웃라인에서 괄호 안에 묶어서 표시해야 한다.
여기서 경과구(transition)에 관해서 좀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3) 한 대지에서 다른 대지로, 때로는 한 소지에서 다른 소지로 넘어간다는 것을 청중으로 하여금 알게 하고, 또 그 과정을 부드럽고 무리 없이 처리하기 위해서 경과구를 반드시 사용해야 한다. 설교자는 눈앞에 아웃라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각 부분 상호 간의 관계를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지만, 청중은 그렇지가 못하다. 설교자가 아무리 준비를 많이 하고 좋은 아웃라인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청중이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면 효과는 반감되지 말 것이다. 청중이 설교의 흐름이나 각 부분 상호간의 관계를 잘 이해하여 설교자가 가지고 있는 설교의 구조를 그대로 따라올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경과구가 필요한 것이다.
경과구는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지만, 이것을 대별(大別)하면 세 가지 유형이 될 것이다.
첫째는 부가적(附加的) 형태이다. 이것은 앞에서 이미 말한 것에다 새로운 것을 덧붙이는 형태이다. 예를 들면, "지금까지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이 하나님 보실 때에 어떤 가치가 있나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제 둘째로 이 보혈이 어떤 효능을 갖는지, 우리 개개인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와 같은 것이 부가적 형태가 되겠다.
둘째는 추론적 형태이다. 이것은 앞에서 취급한 내용이나 주장으로부터 어떤 논리적 결과나 원리 같은 것을 추출해 낼 때 사용하는 형태이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 피 값으로 우리를 사셨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것이고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같은 것이 추론적 형태에 속한다고 하겠다.
셋째는 대립적 형태이다. 이는 앞에서 취급한 내용과 반대되는 것을 도입할 때 사용하는 형태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1절로부터 3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할 때 어떻게 되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제 두 번째로 4절부터 6절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할 때 어떻게 되는지를 함께 생각하고자 합니다."가 대립적 형태에 속한다고 보겠다.
위의 세 가지 유형을 설명할 때 든 예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설교자가 앞에서 취급한 내용을 한두 문장으로 간단히 요약한 후 이것을 새로 도입할 부분과 연관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요약 - 예고'(summary-preview) 방식이 가장 일반적이고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에 어떤 설교자라도 조금만 유의하면 사용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앞에서 취급한 내용을 간단히 복습해 청중의 기억을 새롭게 함과 동시에 다음 부분과의 자연스런 연결을 가능케 한다는 이중적 목적을 성취할 수 있게 될 것이다.
D. 아웃라인의 전달
설교자가 설교의 아웃라인을 단순하고 명쾌하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만든 아웃라인을 청중에게 잘 전달하는 것도 똑같이 중요하다. 설교자는 자신의 아웃라인을 직접 보고 있기 때문에 어느 것이 대지인지, 어느 것이 소지인지, 그리고 대지와 소지가 어떻게 연관되고 있는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청중은 오직 귀만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설교자의 아웃라인을 볼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아웃라인을 명쾌하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만든 아웃라인을 청중에게 잘 전달하는 것도 똑같이 중요하다. 그러면 아웃라인을 제대로 전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경과구를 잘 사용하면 대지와 소지의 변화를 청중에게 어렵지 않게 보여줄 수 있다. 예를 들면, '믿음의 경주'라는 설교의 대지는 다음과 같다(본 연재의 맨 마지막 부록에 실릴 예정).
1대지: 우리는 모든 방해물을 제거하고 경주해야 한다(v. 1 b).
1 소지: 무거운 것을 벗어야 한다.
2 소지: 죄를 벗어야 한다.
2대지: 우리는 인내로써 경주해야 한다(v.1 c).
3대지: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경주해야 한다(v.2).
위의 설교에서 1대지와 2대지 사이에 다음과 같은 경과구를 넣어보자: "우리는 어떠한 태도로 믿음의 경주를 해야 합니까? 모든 방해물을 제거하고 경주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되지 않습니다. 본문 1절 하반 절에 보면 또 하나의 자세가 필요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경과구는 1대지에서 2대로 바뀐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호가 되기 때문에 청중이 아웃라인을 아는 데 도움이 된다.
둘째, 열거를 제대로 하면 대지의 변화를 어렵지 않게 전달할 수 있다.
위에서 예로 든 '믿음의 경주'라는 설교에서 전달해야 될 최소한의 아웃라인은 3개의 대지와 1대지에 속한 2개의 소지이다. 여기에서 '첫째, 둘째'라는 말을 마구 써 버리면 그 '첫째'가 1대지를 가리키는지, 1대지의 1소지를 가리키는지 구별이 안 되어 청중을 혼란 속으로 몰아 넣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첫째, 둘째'라는 표현을 사용하려면 요령이 있게 사용하여야 한다. 가령 '첫째, 둘째'라는 표현은 대지를 나열할 때 사용하고, 1대지에 속한 2개의 소지는 '첫째, 둘째'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열거하는 것이다. "우리가 벗어야 할 방해물 가운데 한 가지는 무거운 것입니다. … 우리가 벗어야 할 또 다른 한 가지의 방해물은 죄입니다"라는 식으로 하면 '첫째, 둘째'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1대지에 속한 두 개의 소지를 열거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셋째, 대지나 소지의 숫자를 예고하는 것이다.
위에서 예로 든 '믿음의 경주'라는 설교의 서론이 끝날 무렵에 "… 오늘 우리는 방금 읽은 히브리서 12:1-2에서 신앙의 경주를 하는 자는 어떤 자세로 해야 하는지를 세 가지로 정리해서 상고하고자 합니다"라고 하면 오늘 설교는 대지가 셋인 것을 청중에게 미리 알려주기 때문에 청중이 아웃라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E. 아웃라인 작성 연습
이제 위에서 언급한 아웃라인 작성의 원리를 실제에 적용시키는 연습을 한 번 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각 항을 BOX처리 -- 장운철
<연습 1> 다음 각 항을 아웃라인 형식으로 빈칸에 채워라.
제목: 퓨리태니아의 최근의 상황
I. .................
1. 매년 평균 학교 선생의 수가 2,000명의 증가되었다. A. ............
2. 퓨리태니아는 동 그라우스타크와 대사를 교환했다. B. ............
3. 민주적 제도가 도입되었다. C. ............
4. 국영 오케스트라가 명성을 떨쳤다. II. .................
5. 동 그라우스타크와 평화 조약을 맺었다. A. ............
6. 양원제 의회가 활동을 개시했다. B. ............
7. 대외 관계가 향상되었다. 1. ........
8. 작년 1억 3천만 불이 학교 건물 신축을 위해 사용되었다. 2. .......
9. 퓨리태니아는 범 보스포러스 상호협력 기구에 가입했다. III. ...............
10. 6년간의 의무교육이 제도화되었다. A. ...........
11. 보통선거가 성공적으로 실시되었다. B. ............
12. 교육 및 문화의 수준이 향상되었다. C. ............
13. 퓨리태니아와 동 그라우스타크와의 국경분쟁이 해결되었다. D. ...........
14. 새로 발족된 문화공보부의 주관 하에 많은 진보가 이루어 1. ......
지고 있다. 2. ......
15. 혁명 후의 독재정치는 10년전에 붕괴되었다.
16. 예술 및 음악을 위한 특별 기금이 조성되었다.
* 퓨리태니아와 그라우스타크는 가상적인 나라이고, 보스포러스는 가상적인 국제 기구임
<연습 2> 다음 각 항을 서론, 본론, 결론의 형식으로 배열하라.
제목: 매연 방지책
1. 경제적이고도 효과적인 매연 방지책이 고안되었다.
2. 극심한 매연은 태양 빛을 흐리게 한다.
3. 매연은 대중에서 해를 끼친다.
4. 매연으로 인해 야기되는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많은 대도시에는 매연 방지책이 강구되었다.
5. 가정에서는 석탄 대신 가스나 전기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6. 매연은 해롭지만 방지가 가능하기 때문에 매연 문제에 대한 긴급한 해결책이 필요하다.
7. 매연의 해독을 바로 인식하고 그 방지를 위해 노력하면 매연방지는 효과를 거둔다.
8. 매연은 통풍을 방해한다.
9. 대도시에서의 매연방지는 의무적으로 시행되어야 한다.
10. 전기 기관차가 중기 기관차 대신으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11. 석탄은 허파를 오염시킨다.
<연습 3> 다음의 성경 본문을 사용해 위에 나타난 형태대로 설교의 아웃라인을 만들어 보라.
1. 출애굽기 15:22-27
2. 여호수아 1:1-9
3. 아모스 5:18-24
4. 마태복음 6:19-24
5. 누가복음 1:5-25.
6. 누가복음 2:13-35
7. 요한복음 6:1-13
8. 요한복음 6:39-45
9. 고린도전서 1:4-17
10. 히브리서 12:1-8.
적 용
(Application)
적용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청중 개개인에게 초점을 맞추어 그가 메시지에 긍정적 반응을 보이도록 하는 것이다. 적용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에 대한 답변이라고 할 수 있다. 오순절에 베드로가 외친 설교를 듣고 3천여 명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하고 부르짖었을 때(행 2:37),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라고 답변했다. 베드로의 적용은 아주 명백했고 또 구체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설교를 듣고 3,000여 명이 회개하고 거듭나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던가? 적용은 청중이 진리를 체험할 수 있는 순간이요, 또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 있는 순간이기도 하다. 적용에 관해서 위어스비(Warren Wiersbe)가 상당히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적용이란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가 되게 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진리를 마음(heart)으로 느끼게 하고, 머리(mind)로 그 진리를 이해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들은 바 진리에 근거해 의지적인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이다."4)
디모데후서 3:16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 말씀을 설교의 적용과 연관하여 설명하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5)
교훈--옳은 것이 무엇이냐? (what is right)
책망--옳지 않은 것이 무엇이냐? (what is not right)
바르게 함--어떻게 하면 옳게 될 수 있느냐? (how to get right)
의로 교육--어떻게 하면 옳은 데 머물러 있느냐? (how to stay right)
적용이란 위의 네 가지를 수행하는 것이라고 말해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적용이 없는 설교는 강연이나 연설이나 석의(釋義)는 될지언정 설교는 될 수 없다. 설교에서 적용이 없으면 그 설교는 청중과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된다. 설교에 적용이 없을 때 청중은 "내가 왜 저 설교를 들어야 하는가?”라는 회의를 마음에 품게 된다. 그래서 스펄전(C. H. Spurgeon)은 "적용이 시작될 때 설교가 시작된다"고 했고,6) 이터(J. W. Etter)는 "적용이 없는 설교를 하는 설교자는 마치 그의 환자에게 일반적인 건강에 관해 강의만 하고는 처방전을 지어주기를 잊어버린 의사와 같다”고 했다.7) 적용의 중요성에 관해서 보먼(Daniel Baumann)은 이렇게 갈파한다: "설교는 적용과 흥망을 같이 한다. 사실상, 모종(某種)의 적용을 전혀 포함하지 않은 설교가 참으로 설교인지조차도 의심스럽다. 혹자(或者)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필자도 이 주장이 옳다고 믿는다) 어떤 담화(discourse)가 적용을 포함하지 않으면 그것은 연설(declamation)이나 독백(monologue)이지 설교는 아니다."8)
리차드 (Ramesh Richard)는 적용에 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적용이 없는 성경 강해는 영적 변비증을 낳는다. 설교자가 학문적으로 아무리 정확해도 그 정보(information)가 당신의 청중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설교자가 청중을 움직여서 청중이 단순히 계시를 받아들이는 데서 하나님의 진리를 수행(implementation)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갈 때 비로소 적용이라고 할 수 있다."9)
학교 강의나 세미나를 통해서 신학생들과 목사들의 설교를 들어보면 석의 쪽에는 엄청난 비중을 두면서 적용 쪽은 너무나 가볍게 다루고 지나가는 것을 많이 본다. 많은 설교자들이 석의만 제대로 하면 설교자의 의무를 다 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같이 보일 때가 비일비재하다는 말이다. 이것은 설교의 근본적인 목적 자체를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석의는 과거 지향적이나, 적용은 현재 지향적이다. 석의는 머리를 향하여 말하는 것이지만, 적용은 가슴을 향하여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석의 쪽에 지나치게 비중을 두는 설교는 지식 제공이나 정보 제공에 치우치는 설교이고, 따라서 이런 설교는 청중을 제대로 변화시키지 못한다. 지식은 오히려 사람을 교만케 한다. 효과적인 적용이 있어야 설교의 목적인 삶의 변화가 성취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설교가 끝났을 경우에 청중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질문에 대해 명쾌하게 답변할 수 있게 해야 한다. 10)
첫째, 설교자가 무엇에 관해서 말했는가(What did the preacher speak about)?
이 부분은 성경의 권위에 근거하고 있다. 설교자가 중심 내용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선포하면 첫 번째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둘째, 설교자가 한 말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So what difference does or should it make)?
이 부분은 설교자가 가지고 있는 설교 목적과 연관이 있다. 본문 석의와 청중 분석을 통해서 설교의 목적을 제대로 설정하고 그것을 제대로 전하면 이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변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셋째, 그러면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Now what do I do with God's claims in this sermon)?
이 부분은 설교자의 권위와 연관이 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전하고자 하는 바를 설교자가 현대의 청중에게 제대로 전달하면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I. 적용의 영역
설교가 우리의 삶에 적용되어야 할 영역은 크게 다섯 분야이다. 이것은 청중도 인식하고 있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설교자 자신이 명쾌한 인식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설교할 때마다 다섯 가지 영역 중에 어느 부분에 초점을 맞출 것인지 분명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11)
1. 개인적 삶(Personal Life)
이 영역에 포함되는 것으로는 영적인 면과 육체적-정신적인 면이 있을 것이다. 영적인 면에 있어서 적용해야 될 부분에는 크게 구원 부분과 성장 부분이 있다. 구원의 부분은 너무나 자명하다. 성장의 부분에 있어서는 성경 읽기나 암송을 규칙적으로 하는지, 성경 공부에는 어느 정도 시간을 투자하는지, 기도 생활이나 전도 생활은 어떤지, 경건 서적은 얼마나 읽는지, 주재권(Lordship)은 어느 정도로 확립되어 있는지, 삶이 다른 사람에게 본이 되는지 아니면 지탄을 받는지,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서 얼마나 애쓰는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지 등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육체적-정신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적당한 운동을 하는지, 식사나 휴식을 적절하게 하는지, 화를 잘 내는지, 성적으로 방종하지 않은지, 인내심을 제대로 발휘하는지 등의 면에서 설교를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2. 가정생활(Family Life)
이 영역에 포함되는 것으로는 일정한 귀가 시간이 있는지, 배우자와 가끔씩 외출해 단 둘만의 시간을 갖는지, 직장에서 안 좋았던 일을 가정에 가져와서 아내나 자녀에게 쏟아놓는지, 가정에 대한 책임을 다 하는지, 가정에서 본이 되는 삶을 사는지, 부모를 잘 봉양하는지, 가정에 예산이 있으며, 그 예산의 범위 내에서 생활을 하는지, 가장인 경우에는 가정 예배를 정기적으로 인도하며, 아이들과 시간을 갖는지 등이 있다.
3. 교회생활(Church Life)
이 영역에 포함되는 것으로는 설교대로 살아보려고 얼마나 애를 쓰는지, 십일조, 감사헌금, 선교헌금, 구제헌금 등의 헌금생활을 제대로 하는지, 교회 예배나 교회의 여러 가지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지, 목사나 다른 성도를 위한 중보 기도를 규칙적으로 하는지, 자신의 영적 은사를 알고 그 은사를 따라 교회에서 적극적으로 봉사하는지 등이 있다.
4. 직장생활(Work)
이 영역에 포함되는 것으로는 직장에서 충실하게 일을 해서 남에게 인정을 받는지, 자기 전공 분야에서 끊임없는 진보를 보이는지, 직장을 너무 자주 옮기지 않는지 등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
5. 지역사회(Community)
이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는 세금을 제대로 내는지, 시민으로서의 각종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는지, 지역사회에서 좋은 평판을 받는지, 어려운 이웃을 조금이나마 돕고 있는지 등이 있다.
II. 적용의 원리
훌륭한 적용은 저절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몇 가지 원리를 잘 준수할 경우에만 훌륭한 적용은 가능하게 될 것이다.
첫째, 적용은 어떠한 경우에든 간에 항상 본문의 가르침과 일치해야 한다.
흔히들 말하기를 "해석은 하나이나 적용은 여럿이다”고 한다. 최소한 그 원리상으로 볼 때 한 본문에 대한 해석은 하나여야 하나, 거기에서 나올 수 있는 적용은 여럿일 수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적용은 아무런 제한을 받지 않고 설교자가 원하는 대로, 다시 말하면 이현령비현령 식으로 할 수 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적용은 여럿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본문의 가르침을 떠나서는 안 된다. 예를 들면, 고린도후서 6:14-18을 본문으로 해서 설교할 경우, 이를 기도나 사랑 같은데 적용시켜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본문은 성별(聖別)된 생활, 또는 분리된 생활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성별된 생활이라는 원리에서 일탈(逸脫)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적용은 여럿일 수가 있다. 성별된 생활을 목사에게 적용시킬 수도 있고, 사업가에게 적용시킬 수도 있고, 일반 성도에게 적용시킬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각 경우에 성별된 생활이라는 교리가 주는 중요성(signficance)이 다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원리, 즉 성별된 생활이라는 데서 나왔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둘째, 적용은 구체적이어야 한다.
어떤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각자의 심령 속에 적용시키시기 바랍니다.”라고 하고서 전혀 적용을 하지 않든지, 또는 적용을 하더라고 아주 일반적이고 애매하고 추상적으로 한다. 이러한 적용은 설득력이 없다. 추상적이고 막연한 진리는 힘이 없다. 그러한 경우 청중은 말씀을 구체적으로 스스로에게 적용하지 않는다. 그 한 가지 이유는 그들은 말씀을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거나 약하기 때문이요, 그 다른 이유는 마음 속에 있는 죄 때문이다. 신앙이 아무리 성장해도 그 마음 속에는 여전히 죄가 잔존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말씀이 그 자신의 죄 문제와 관련되어 있을 경우, 일반적으로 청중은 그것을 스스로에게 적용시키기보다는 빨리 그 말씀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예를 들면, "성도들이여,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라고 할 경우, 말씀 자체는 나무랄 데가 없다. 성도들이 서로 사랑해야 된다는 데에는 이의(異議)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식의 적용은 아무런 힘도 없고, 설득력도 없다. 그냥 "서로 사랑하자.”고 하는 대신에 사랑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러면 "서로 사랑하자.”는 진리를 어떻게 하면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한 번 생각해 보자. 막연하고 추상적인 진리를 구체적인 진리로 변화시키는 최상의 방법은 구체적인 예화를 사용하는 것이다.
필자가 시무하는 교회에 C라는 형제가 있다. 이 형제는 북한에서 귀순한 형제이다. 그의 아내는 분명히 거듭난 자매로서, 그 아내 때문에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지만, 김일성 유일사상에서 벗어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남한 사회에 충분히 적응하기도 전에 사업을 하려고 하다가 아내와 갈등도 많이 겪었다.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부려서 다른 사람과 함께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 먼 곳으로 이사를 했고, 약 2년간은 교회에 거의 출석도 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서도 우리 교회의 W집사 부부는 그 부부에 대한 관심과 접촉을 포기하지 않고 수시로 전화도 하고 가끔 찾아가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 형제는 경험부족으로 결국 사업이 망하게 되어 버렸다. 집도 다 날아가 버리고 당장 현금 100만원이 없으면 구속될 지경까지 되어 버렸다. 이것을 알고 W집사와 몇몇 형제들이 십시일반으로 갹출을 하고 또 교회에서도 일부를 보태서 100만원을 만들어 주고, 또 W집사와 다른 형제가 신원 보증까지 서 주었다. 그의 주위에서 사업을 함께했던 사람들은 다 그를 속이고 이용해 먹고 그를 감옥에까지 보내려고 했지만 교회 형제들은 진정한 관심과 사랑으로 그를 도우려 한다는 것을 깨달은 C형제는 그 사랑의 빚 때문에 다시 교회에 나오게 되었고, 그러나가 1998년 4월 춘계 부흥사경회 기간 중에 거듭나는 감격을 맛보게 되었다. 지금 이 형제는 신실하게 직장 생활을 하면서 교회에서도 열심히 제자훈련을 받고 있는 중이며, 그 아내는 결혼 후 지금같이 행복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냥 "서로 사랑하자."는 것보다도 구체적인 예화를 들려주는 것이 훨씬 더 감명 깊은 것이다. 사랑은 진정한 관심이며, 사랑은 주는 것이라는 진리를 조금만 시간을 들여 생각하면 실감나게 증명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적용은 청중의 필요에 부응해야 한다.
이미 앞에서 설교의 목적과의 관련 하에서 청중의 필요에 관해서 언급했지만, 설교의 목적은 결국 적용을 통해서 성취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의 목적이 잘 성취되려면, 적용이 적절해야 되고, 적용이 적절하기(relevant) 위해서는 청중의 필요에 부응해야 되는 것이다. 청중의 필요가 제대로 고려되지 않을 때 설교는 허공을 치게 된다. 청중을 염두에 두지 않을 때, 설교자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파한다든지, 청중이 이미 익히 알고 있는 진리를 가르친다든지, 묻지도 않거나 관심도 없는 문제를 열심히 논의한다든지 하는 식의 설교를 하게 된다. 그러한 설교는 청중이 가려워하는 부분은 다 피해 버리고 가렵지 않은 부분만 열심히 긁어주는 결과가 되고 만다.12) 그렇기 때문에 청중의 필요에 둔감한 설교자는 효과적인 설교를 할 수 없다.
넷째, 적용할 때 사용하는 용어에 주의해야 한다.
'그들, 사람들, 누군가'와 같은 3인칭 복수나 부정(不定) 대명사는 가능하면 적게 쓰거나 쓰지 않는 것이 좋다.13) 그러한 용어는 청중으로 하여금 "나에게 말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으니 나와는 별 상관이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일반적으로는 적용할 때 설교자 자신까지도 포함시키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성도 여러분들! 열심히 기도하십시오.”라는 표현보다는 "우리 모두가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라든지 "저와 여러분(또는 "강단에 서 있는 목사로부터 성도 한 분 한 분에 이르기까지 이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모두 열심히 기도하는 일에 매진합시다."라고 하는 것이 더 좋다. 왜냐 하면 기도는 성도들만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목사 자신도 열심히 기도해야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청중이나 설교자가 다 함께 말씀의 가르침에 순종해야 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적용 시에 설교자가 자기 자신은 제외해야 될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구세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난 후에, "여러분들은 이 예수를 어떻게 할 것입니까?"라고 해야지 "우리가 이 예수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것은 적합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경우에 설교자는 이미 구원받아 구세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은 사람이기 때문이다(물론 구원받지 못한 채 목사가 된 사람도 많이 있다).
다섯째, 적용은 청중 전체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적용은 어느 개인이나 어느 그룹만을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되고 청중 전체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만(예, 목사 안수 예배), 청중 가운데 일부만을 대상으로 해야 하는 경우는 그리 빈번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그러면 헌신 예배의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자기 교회의 헌신 예배나 다른 교회의 헌신 예배에 특별 강사로 초청 받았을 경우, 그 그룹(예, 여전도회 헌신 예배의 경우는 여전도 회원이 여기에 해당됨)을 위해서만 설교해야 하나? 헌신 예배는 예배의 목적 자체가 어느 특정 그룹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 그룹만을 위해서 설교한다 하더라도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볼 때 더 바람직한 방법은 그 특정 그룹에는 물론 전체 성도들에게 다 해당될 수 있는 설교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충성이나 헌신이나 기도에 관해서 설교한다면 어느 특정 그룹에는 물론 모든 성도들에게 다 같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적용의 원리와 관련시켜서 적용 시에 흔히 저지르기 쉬운 실수 몇 가지를 지적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어떤 적용은 상상력 결여로 인해 아무런 재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청중이 그 설교를 다 듣지 않아도 어떤 식으로 적용되어 나갈는지 미리 다 짐작해 버리는 경우가 있다. 적용이 이런 식으로 되어 버리면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떤 경우에는 적용이 청중에 대한 모독으로 변할 수도 있다. 이것은 청중이 뻔히 다 알 정도로 명백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는 경우에 일어날 수 있다. 청중을 너무 무시하거나 얕잡아 보아서도 안 되고, 청중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청중의 수준에 맞게 적용해야 할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적용만 잘하면 모든 것이 다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설교자가 최선을 다해 준비한 후 하나님에게 온전히 맡겨야 한다. 준비할 때에는 설교자가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다 하는 것 같이 해야 되고, 강단에 올라가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하시는 것 같이 맡겨야 한다. 그러할 때 사람을 변화시키는 설교가 될 수 있다. 인간적인 감동은 설교자 자신의 힘으로도 가능할는지 모르겠지만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워커(Daniel D. Walker)의 말은 새겨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다: "평신도가 주일 아침에 교회를 떠날 때, 예배하는 동안에 무엇이 일어났는가가 아니라, 예배하느라고 보낸 시간 때문에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에 감명을 받고 가야 한다."14)
III. 적용의 시기
설교에서 적용은 언제 하는 것이 가장 좋은가? 적용의 시기는 물론 메시지의 내용이나 설교의 구성 방법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대체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방법은 설교자가 기억해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첫째, 일반적으로 말하면, 적용은 영적 진리가 선포될 때마다 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설교자가 설교를 해 나가면서 수시로 적용을 하기 때문에 청중이 큰 관심을 가지고 계속 말씀을 듣게 된다는 큰 잇점이 있다.
둘째, 때로는 각 소지 끝이나 대지 끝마다 적용을 하는 것도 좋다. 이 방법도 앞의 방법과 같이 처음부터 끝가지 계속 청중들의 주의를 끌게 되기 때문에 사용하기에 좋은 방법이라고 하겠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겠다.
서론
Ⅰ. 대지
A. 과거 - 본문 자체의 해석
B. 현재 - 현대 청중에 대한 적용
Ⅱ. 대지
A. 과거
B. 현재
Ⅲ. 대지
A. 과거
B. 현재
결론
셋째, 어떤 경우에는 적용을 유보(留保)시켜 두었다가 설교의 맨 마지막에 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설교를 귀납적으로나 연역적으로 구성할 경우에는 적용이 설교의 맨 마지막 부분에 오기 때문에 그때 가서 적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외의 다른 형태의 설교에서도 설교 중간에 적용을 하기가 곤란한 경우에는 하는 수 없이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가능하면 적용은 수시로 하는 것이 좋다. 가령 30분 설교 가운데 마지막 10분이 적용이라면 처음 20분은 지리하고 무의미한 시간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수시로 적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적용이 설교의 맨 마지막 부분에 올 경우 한 가지 기억해야 될 것은 적용을 위해서 충분한 시간을 할애할 수 있도록 시간 배정을 잘 하라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30분의 설교 시간이 주어졌는데도 27-8분은 다른 얘기를 하다가 나머지 2-3분 동안에 허둥지둥 적용을 하려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어느 것인지를 망각하기 때문에 그렇다. 30여 분의 설교 시간이 주어졌다면 최소한 10분 이상은 적용을 위해서 사용해야 할 것이다.
IV. 적용의 형태
적용은 여러 가지 형태가 있겠지만 이를 크게 나누면 직접 적용과 간접 적용의 두 가지가 있겠다.15)
A. 직접 적용
직접 적용은 청중이 필요로 하는 것(또는 설교자 생각할 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이제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십시오."라든지 "직분을 맡은 사람들은 일사(一死)각오 하고 자기 직분에 충성해야 합니다." 같은 것이 다. 직접 적용에 속한다. 직접 적용에도 여러 가지 형태가 있을 수 있다.
첫째는 권고(admonition 또는 exhortation)가 있다.
이것은 청중이 해야 할 일을 명쾌하게 밝혀서 청중이 메시지에 대해 긍정적 반응을 보이게 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방식이다. 이 경우 설교자는 이슈(issue)가 무엇인지 분명히 해야 청중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애매함이나 혼란 같은 것이 일어나지 않도록 배려해야 한다.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의 전도 집회에서의 적용은 대체로 직접적인 권고의 형태에 속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권고형의 적용에서 특별히 설교자가 청중들로 하여금 어떤 죄를 버리라고 할 경우 담력과 함께 지혜와 연민의 정(compassion)이 필요하다. 죄를 지적할 때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거나 그들의 인기 같은 것을 의식하지 않고 말씀을 말씀 그대로 증거하는 담력도 있어야 하지만, 죄를 짓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연민의 정도 반드시 필요하다. 주님은 죄를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주님의 종인 설교자도 주님과 마찬가지로 죄는 증오해야 하나 죄인은 증오해도 안 되고 멸시해도 안 될 것이다. 그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는 연민의 정이 함께 있을 때 설교자의 권고는 설교자의 권고로 끝나지 않고 죄인의 변화로 끝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는 질문의 형태로 직접 적용을 할 수 있다.
적용을 할 때 질문을 던짐으로써 잠자던 영혼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기도 하고, 제대로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문제를 깊이 의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러할 때 청중은 설교자의 질문으로 인해 어떤 결심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주님께서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일꾼을 찾고 계십니다. 누가 주님의 부르심에 응하겠습니까?"라든지 "베뢰아 사람들은 말씀을 상고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라는 것이 모두 질문식 적용에 속한다고 하겠다.
셋째는 과장법을 사용함으로 직접 적용을 할 수도 있다.
과장법을 너무 자주 사용하게 되면 청중들의 감성(感性)이 너무 무디어지게 되어 더 이상 반응을 보이지 않게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이것을 남용하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때때로 과장법을 적절하게 사용하면 몽롱한 상태에 있던 사람들의 정신을 바싹 차리게 할 수도 있다.
예수님도 이 방법을 종종 사용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마가복음 9:43이하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주님께서 문자 그대로 손을 찍어 버리고 발을 찍어 버리고 눈을 빼어 버리라는 의미가 아님은 명백하다. 주님께서 의미하시는 바는, 지옥은 참으로 끔찍한 곳이기 때문에 어떠한 희생을 치루더라도 절대로 지옥에만은 들어가지 말라는 것을 강조하시기 위해서 이러한 과장법을 쓰신 것이다. 때때로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상당히 좋은 효과를 가져 올 수 있을 것이다.
B. 간접 적용
직접 적용은 청중이 해야 할 일을 명명백백하게 하나씩 제시해 나가는 방법이다. 그러나 간접 적용은 청중이 할 일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은근히 암시적으로 제시하여 청중 스스로가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메시지를 자기 자신에게 적용시키도록 하는 방법이다. 설교자는 흔히 직접 적용만이 효과가 있고 간접적이고 암시적인 적용은 별로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간접 적용이 직접 적용보다 휠씬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어느 방법을 사용하느냐 하는 것보다도 어떤 방법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간접 적용의 중요 형태로는 세 가지를 들 수 있겠다.
첫째는 예화의 형태가 있다.
청중이 공감할 수 있는 훌륭한 예화는 청중이 해야 할 일을 구체적이고도 명백하게 제시하지는 않지만, 청중이 그 스스로 예화 중의 어떤 인물과 동일시하게 되므로 "나도 저 사람과 같이 되어야 되겠다."든지 "나는 저 사람 같이는 하지 않겠다."는 식으로 결심을 할 수 있게 만든다. 이 경우 적용의 효과는 사실 예화의 내용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예화가 참으로 감동적이고 적절하면서도 청중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일 경우 어느 직접 적용보다 더 좋은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
둘째는 선다형(選多型)이 있다.
이 형태는 설교자가 선택 가능한 몇 가지 경우를 제시한 후 청중으로 하여금 스스로 어느 한가지를 선택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면, 갈멜산 위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엘리야는 이렇게 외쳤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 지니라"(왕상 18:21). 여호수아 24장에서 여호수아도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여호와나 "너희 열조가 강 저 편에서 섬기던 신"이나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고 함으로 선다형의 방식을 택하고 있다(수 24:15).
엘리야나 여호수아가 사용했던 선다형의 적용 방식을 오늘날의 설교자도 사용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이 방법을 효과적으로 잘 사용하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 하는 것은 엘리야와 여호수아를 통해서 잘 증명이 되고 있지 않는가? 청중이 무엇을 해야 할는지를 직접 보여주지 않으면서도 설교자가 원하는 것을 청중이 결정하도록 하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테크닉이라고 할 수 있겠다.
셋째는 간증의 형태가 있다.
이것은 설교자가 자기 자신의 어떤 체험이나 결정을 청중들에게 말함으로 청중이 스스로 올바른 신앙의 결단을 내리도록 촉구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예화와 유사하지만, 예화는 주로 타인의 경험을 말하는 것임에 반해 간증은 설교자 자신의 경험이라는 면에서 상이하다. 설교자 자신의 영적 성공담을 청중에게 들려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패담을 솔직히 드러내 놓는 것은 더 중요하다. 설교자도 청중과 꼭 같이 영적으로 실패할 수 있고 또 실패한다는 것을 청중에게 들려줌으로 청중은 설교자와 동일시할 수 있게 될 것이고, 설교자를 통해서 나오는 메시지는 더 감동적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성공을 통해서도 많이 배우지만, 다른 사람의 실패를 통해서 더 많이 배운다. 실패가 실패 그것으로만 끝날 때 그것을 청중에게 얘기한다는 것은 창피스러운 일이지만, 실패를 통해서 뼈저린 교훈을 배우고 그것을 거울 삼아 진일보하게 되었다면, 그러한 실패담은 청중에게 격려와 축복은 될지언정 설교자의 치욕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직접 적용과 간접 적용 두 가지 방법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좋은가? 어느 것이 좋다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힘들 것 같다. 어떤 방법이든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역량에 따라 효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때 그때의 형편에 따라 직접 적용의 형태도 사용하고 간접 적용의 형태도 사용하여 양자가 균형을 취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하면 청중의 지적 수준에 따라 방법을 달리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청중의 지적인 수준이 전반적으로 낮을 경우에는 간접 적용보다 직접 적용을 더 많이 사용하고, 청중의 지적인 수준이 대체로 높은 경우에는 직접 적용보다는 간접 적용을 더 많이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블런드(Carl Hovland)와 재니스 (Irving Janis)와 켈리 (Harold Kelley)는 그들의 공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고도(高度)로 지적인 개인들로 구성된 청중의 경우에는 어떤 전제(premises)의 함축적 의미 (implications)를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줄어들게 되고 또 전달자 자신이 추출해 낸 결론이 청중에게 큰 유익이 되지 않는다. 반대로, 덜 지적인 개인들의 경우에는 전제만 가지고 스스로의 힘으로 올바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작은 것이다.16)
그래서 설교자는 그의 청중이 어떤 수준인지 잘 알아야 되고, 그것을 감안해서 어느 방법을 더 많이 쓰는 것이 효과적일는지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주(註)
1) George E. Sweazy, Preaching the Good News, pp.72-73; Braga, pp.137-38; Robinson, p.128.
2) Baumann, pp.150-52; Braga, pp.139-47; Charles Gruner, C. M. Logue, D. L. Freshley and R. C. Huseman, Speech Communication in Society, pp.131-35; Litfin, pp. 176-88;
3) Braga, pp.147-49; Broadus, pp.120-24; Karen Calson and Alan Meyers, Speaking with Confidence, pp.170-71; Donald E. Demaray, Proclaiming the Truth, pp. 62-64; Fluharty and Ross, pp.104-105 ; Gruner, Logue, Freshley and Huseman, p.130 ; Litfin, pp.189-90; Perry, pp.48-53.
4) Warren W. Wiersbe, Preaching and Teaching with Imagination, p.217
5) Ibid., p.218.
6) John A. Broadus, On the Preparation and Delivery of Sermons, p. 165.
7) John W. Etter, The Preacher and His Sermon, p.372.
8) J. Daniel Baumann, An Introduction to Contemporary Preaching, p.243.
9) Ramesh Richard, Scripture Sculpture, p.116.
10) Ibid., pp.119-20
11) 다섯 가지 영역과 그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을 보려면, Howard & William Hendricks, Living by the Book, pp.295-96을 참고할 것.
12) Baumann, p. 246.
13) Woodrow M. Kroll, Prescription for Preaching, p.178.
14) Daniel D. Walker, Enemy in the Pew?, p.94.
15) Baumann, pp. 247-51; Roy Taylor, "So What?" Journal of Pastoral Practice 4:4(1980): 109-14.
16) Carl Hovaland, I.L Janis, and H. H. Kelly, Communication and Persuasion,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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