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설교는 크게 말해서 한 가지 주제 밖에 없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시는 놀라운 삶”이다. 그게 뭔지 모르고는 설교할 수 없다. 또한 그 지식이 짧으면 당연히 설교거리 때문에 고민할 수밖에 없다. 설교자 자신부터 믿어 별로 덕본 게 없는데 어떻게 예수가 좋다고 자랑할 수가 있겠는가! 혹시 한다면 거짓말이지.
바울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과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전했다.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했다. 이게 설교자 자신부터 이루어져야 전할 내용이 나온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에게 해 주신 일”은 무궁무진하지 않은가! 늘 그것을 연구한다면 설교거리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동시에 또 할 일이 있다. 그것을 잘 설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의 주제와 그것의 전달은 설교자가 평생을 통해 갈고 닦아야 할 요소이다.
측량할 수 없는 풍성
매 설교마다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새로운 각도로 조명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러니까 설교자들은 누구나 이러한 무게에 눌려서 고통하지 않을 수 없다. 주의 은헤는 무진장인데 설교 거리는 지극히 한정되다니. 그래서 목회자들은 설교에 눌려 평생을 보낸다.
회중들이 듣기 원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내용은 한계가 없다. 한계는 단지 설교자에게 있을 뿐이다. 설교자가 평신도들보다 신앙이 좋고 훈련을 받았다 해도 한계 속에 있다. 느끼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경험도 다 제한된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용량을 늘려야만 한다.
존 헨리 조웨트는 설교자의 입장을 말했다. 영국 북부에서 목회할 때 해변가에 사는 구두수선공을 심방했다. 작업실은 너무 좁았다. 목사는 물었다. 이렇게 좁은데 있으면 갇혀있는 느낌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답은 달랐다. “아닙니다. 절대로 그런 느낌을 받지 않고 일합니다.”
어떻게 그리 되는가? “이 앞의 창문을 열기만하면 한 없이 넓은 바다가 눈에 들어오지요.” 그러니까 하루 종일 그냥 앞의 바다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지내면 된다는 이야기다. “이게 바로 목회이다. 문제에 빠진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문을 열어 하나님의 영감을 넣어주는 것이다.”
참 좋은 이야기다. 그러나 그게 실제로 가능한가가 문제이다. 설교도 같은 조로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무한한 영감을 받으십시오.” 그러나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되는지를 말하지 않으면 그 말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설교자는 실제로 하나님의 영감을 만나고 날마다 그것을 누려야만 한다.
설교자료는 용수철 같다. 오래 사용하지 않으면 잘 튀지 않는다. 사용할수록 대단한 탄력을 제공한다. 설교자는 두 가지로 자신을 훈련시켜야 한다. 첫째 복음적으로 둘째 설교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많은 고참 설교자들은 설교적으로 매사를 본다. 하지만 그것을 복음적으로 풀지는 못한다.
설교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대화나 독서나 기도나 여행이나 모두 설교거리로 변한다. 심지어는 실수나 실패 그리고 수치스러운 일과 고통거리도 설교에 사용된다. 설교자는 항상 필기도구를 준비해야 한다. 어디서건 설교의 단서가 떠오르면 즉시 적어야 한다. 안 그러면 곧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그것이 복음적으로 풀어져야만 한다. 복음적이라는 게 다른 게 아니다. 그리스도가 내게 해주신 일을 통해 나 자신을 이해하고 그 힘으로 모든 걸 풀어나가는 것이다. 신자는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의 힘으로 살아야 한다. 설교자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사는 게 훈련 되어야 한다.
기도 할 때 자의 공로 즉 많이 오래 금식한 것 보다는 하나님의 자비와 얼마든지 들어주신다는 은혜로운 약속과 예수 이름을 의지하고 한다면 확신과 평안을 갖는다. 장사를 하건 작품 만들건 하나님 자녀의 능력이 내 속에 움직이고 있음을 믿음으로 확인하면서 한다. 복음적 삶의 단면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삶”이란 오직 한 주제는 모든 설교에 적용된다. 절대로 여기서 벗어나지 말라. 거기 관심을 쏟고 있다면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에 대해 적합한 설교 자료를 제공할 것이다. 신자는 삶의 모든 분야를 이 주제로 풀어야만 한다.
그것들은 항상 설교할 내용을 준다. 그 내용들은 설교자가 그때그때 신중하게 생각해 선택해야 한다. 절기도 있고 특별한 경우도 있다. 강해나 시리즈로 연속해서 설교할 할 경우도 있다. 여하간 정해진 경우를 제외한다면 설교자가 다음의 세 가지 방법으로 자신의 주제를 선택하면 된다.
설교자 자신이 좋아하는 주제를 선택하라.
하고 싶은 말을 하라. 그것이 주제를 택하는 가장 쉽고 필요한 방법이다. 말하고 싶은 것이 솟아오르게 하라. 문제 해답이건 좋은 소식이건 교훈의 말씀이건 상관없다. 하지만 그것을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에 근거해서 말하도록 하라. 그렇게만 된다면 복음적인 설교가 된다.
설교자가 가장 잘 말할 수 있는 내용은 역시 제일 흥미가 많거나 가장 자신 있는 분야이다. 모든 면에서 다 잘 할 수 있는 설교자는 없다. 한 분야가 다른 분야보다 더 뛰어나게 마련이다. 흥미도 늘 같을 수 없다. 관심사도 바뀌게 마련이다. 누구나 관심 있고 잘 아는 부분을 말할 때 신이난다.
어떤 경우에는 설교자가 구원에 관심이 많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사회정화에 신경이 집중될 것이다. 다른 데는 관심이 별로 없어진다. 어떤 경우에는 사랑에 대해 또는 교회봉사에 대해 많이 말하고 싶어질 것이다. 하고 싶은 부분을 말할 때 자연히 힘이 생기고 자신이 있게 마련이다.
필립 부룩스의 말이다. “청중의 입장을 생각해 보라. 말하는 내용이 설교자 스스로 관심 없고 말하고 싶지 않은 내용인 줄 알고 있다고 치자. 그런데도 말할 내용이고 말할 때가 되어 할 수 없이 한다면 기쁜 마음으로 즐겁게 듣겠는가?” 그럴 수 없다. 청중도 단지 의무적으로 들어줄 뿐이다.
최고의 설교 논지는 설교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뭘 말할까 고민하는 게 아니다. 너무 할 말이 많아 무엇을 빼야할지 걱정할 정도이다. 그런 설교는 쉽게 만들어지고 힘차게 전달될 것이다. 혹시 다른 교회 헌신예배에 초청되거나 특별집회를 나갈 때는 그런 경우가 많이 있음을 경험한다.
하지만 모든 설교가 다 그럴 수는 없다. 모든 주제가 다 그런 것도 아니다. 사람마다 매일매일의 문제가 기다리고 그에 대한 도움도 필요하다. 그런데도 목사가 자신이 관심 있는 내용 잘 할 수 있는 것만 말한다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자연히 교인들은 갈증을 느낀다.
그러니 필요 때문에 힘들게 설교를 준비해야 한다. 말하고 싶고 마음에 불이 붙어서가 아니다.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절기가 되면 하기 싫어도 거기에 맞는 설교를 해야 한다. 그것도 여러 해 하다보면 짜내기도 힘들어진다. 이래저래 의무로 준비해야 하는 설교는 힘들기만 하다.
그러나 아주 유용하고 강력한 설교가 여기서 나온다. 때때로 이 고생스러운 일을 하다보면 새로운 감동이 솟아오른다. 그러므로 필립스 부룩스의 말을 따르면 “설교는 펌프질을 해서 파내는 게 아니고 샘물이 터져 나오는 것 같아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 설교자가 성장하는 것이다.
설교자 자신이 자기가 약한 부분에 관해서 가장 많이 설교를 들어야 한다. 또한 자기 설교를 가장 열심히 들어야 할 사람도 자기 자신이다. 준비한 설교로 가장 도움을 받는 사람은 설교자 자신이다. 약한 부분이라고 피하지 말고 연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에게 설교해야 한다.
포인트는 이것이다. 설교는 그 설교를 하려는 설교자 자신부터 좋아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성공할 수 없다. 설교자는 자기가 좋아하는 주제를 택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더라도 그 주제를 좋아하기로 결심하고 좋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좋아하는 내용으로 설교해야 한다.
청중이 기뻐하는 주제를 택하라
청중을 기쁘게 해주라니! 잘못된 충고처럼 들린다. 사람을 즐겁게 하려는 선지자들에 대해서 성경은 대단히 비판적이다. 참된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돌에 맞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이 박혔다. 백성들이 듣고 싶어하는 예언을 일삼는 선지자들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대상이었다.
청중을 즐겁게 하려는 설교자는 무엇인가 잘못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기 쉽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한다. 청중을 기쁘게 하는 게 반드시 하나님의 일에 역행하는 것은 아니다. 예레미야는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긴다고 했다. 거짓이 잘못된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의 원리를 보자. 청중은 관심 없는 내용을 듣지 않는다. 듣다가도 청취를 중단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청중과 관련을 시켜 주어야 한다. 자신의 설교를 듣는 청중 입장이 되어보라. 그리고 그 설교가 청중인 자신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를 확인해 보라. 반드시 관련을 시켜야 한다.
정말로 복된 소식을 전한다면 청중들은 좋아한다. 잘 모르는 것을 말 하는게 아니다. 그냥 듣기 좋은 말이 아니다. 돈 많고 유명한 몇 사람 좋아하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한다고 청중이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게 정말 유익이 된다면 싫어할 사람이 없다. 반드시 좋아한다.
미국 사람들에게 설교 하면 한국 사람들처럼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말한다. "I enjoyed your sermon." 처음에 들으면 이상한 느낌이다. “당신의 설교를 즐겼습니다.” 즐기다니! 하나님의 말씀이 즐기는 것인가? 그렇다 그것은 즐거워해야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소요리문답 제 일조 “사람의 제일되는 복적이 무엇이냐”는 질문의 대답은 이것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니라.” 전에는 잘못 번역해서 “하나님을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이라고 했었다.” 그렇지 않다. 즐거워하는 건 우리 사람들이다.
하나님 속에 우리가 즐길 모든 게 있다는 가르침이다. 또한 하나님을 즐거워해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말도 된다. 설교자의 하는 일이 무엇인가? 청중들에게 하나님을 어떻게 즐길 수 있는지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설교를 즐겼습니다”와 “하나님을 즐기고 있습니다”는 같은 내용이어야 한다.
설교자는 자신이 누구에게 설교하는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주의 종으로 죄인들을 꾸짖고 바른 길을 가르치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설교 대상은 먼저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 동료 신자들과 함께 그 설교를 듣고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도 청중 속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청중이 기뻐하는 것은 자신도 기쁜 경우가 대부분이다. 악행을 꾸짖을 때는 자신이 먼저 꾸짖음을 당하는 마음으로 하라. 청중은 그 꾸짖음을 달게 받을 것이다. 또한 자기 자신이나 가족을 격려하듯 복음의 말씀으로 청중을 일으키라. 그들도 나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원하고 있음을 알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주제를 택하라.
종교개혁 당시 휴 레티머는 왕실 교회에서 설교할 때 들었다. “조심해 설교하시요. 오늘 당신은 영국 왕 앞에서 설교합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들었다. “조심해 설교하시요. 오늘 당신은 왕들의 왕 앞에서 설교합니다.” 이 뒤의 말이 모든 설교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적용될 것이다.
설교 작성하며 스스로 물어본다. “조직 잘 되었는가?” “예화가 괜찮은가?” “청중이 좋아할까?” 그러나 정작 물어보아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이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기 원하시는 내용인가?” 하나님의 기쁨이 최대 관심사요 최대 목표라고 한다면 작성하며 내리는 결단이 다 옳을 것이다.
때때로 양심에 걸리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설교인가 아니면 내 자신의 설교인가?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주제인가 아니면 내 목적을 위해서 또는 교인들을 조정하기 위해서 하는 설교인가? 이것이 복음적인 말씀인가 아니면 설교자 자신도 완전하게 하지 못할 율법인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주제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해 주신 일이다. 또한 지금 해주시며 앞으로도 해 주실 일이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존재로 바뀌었는지 하나님은 설교를 통해 말하고 싶어하신다. 다시 말해 한 가지 주제 곧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시는 놀라운 삶”이다. 이 한 주제, 바로 복된 소식이다.
그 대주제를 놓고 여러 작은 주제들이 만들어진다. 그때 설교자 자신이 좋아하는 주제를 택하라. 그러나 항상 그러지는 말자. 또한 청중이 좋아하는 주제를 택하라. 물론 그것도 언제나 그러면 안 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주제를 택하라. 이것만은 항상 그래야 한다.
여러 가능한 주제들과 설교자
구원의 주제는 크게 나누어서 중생과 성화이다. 이것을 좀 더 세분하면 중생에 관련된 하나님, 죄와 회개, 그리스도, 성령 같은 부분과 성화와 관련된 개인적 또는 사회적 윤리, 개인이 가진 문제, 신앙훈련 등을 주제로 삼을 수 있다. 중생과 성화로만 집중시키는 이유는 그렇게 복음과 연관되어 풀어지기 때문이다.
이것들을 가지고 여러 방향으로 나갈 수 있다. 때때로 주제를 하나씩 잡지 않고 조직신학적 순서로 할 수 있다. 인물중심으로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십자가 주위의 얼굴들”, “구약의 어머니들”, “사도행전의 영웅들” 같은 제목이 나올 수 있다. 예수의 칭호, 비유, 기적, 팔복, 사도신경, 주기도문 등의 시리즈를 다룰 수 있다.
어떤 내용을 하던 간에 설교자는 청중이 균형 잡힌 양식을 먹도록 심사숙고하고 기도로 준비해야 한다. 특히 주제의 선택은 중요하다. 그러므로 장기간의 설교 계획을 세워두어야 한다. 빠진 것이 없는지 교회력을 읽어보고 조직신학의 여러 주제들을 살펴보라. 신구약의 배합도 생각해 본다.
하지만 순발력도 잃지 않아야 한다. 세상적으로 떠들석한 일이 생겼는데도 전혀 무관심한 채로 설교할 수 없다. 교회행사나 교회목표도 무시할 수 없다. 가능하면 설교자도 청중도 다 마음에 드는 주제를 택하라. 그러나 항상 그럴 수는 없음도 인식하라.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주제는 꼭해야 한다.
성경은 설교자의 일이 측량할 수 없이 풍성하고 다양한 것을 증거하고 있다. 설교자들의 할일은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직이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고 하신대로이다. 또한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전하는”(행 20:27)것이다. 이대로 하면 설교자의 일은 즐거우리라.
바울은 설교자의 일을 묘사한다.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전하여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시며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가 어떠함을 깨달아”(엡3:8, 18) 알게 하려는 것이다.
스펄전은 그의 3500 설교가 출판된 뒤에 말했다. “35년간 일한 뒤에 발견한 것은 성경의 보석들이 무진장이라는 점이다. 아직 나는 이 일에 초보 단계에도 이르지 못했다.” 여기서 설교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꾸준한 노력이다. 계속적으로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찾아 누리고 그것을 전파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