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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바르게 알고 누리자, 엡2:1-10 / 교통 법규부터 지키시오, 아멘 2010-04-01 22:28:49 read : 6553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박창진
복음이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사람들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복음입니다. 교회는 복음을 받아 복음으로 새롭게 된 사람들입니다. 복음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교회의 지체인 신자는 복음을 받아 복음으로 새롭게 된 사람입니다. 복음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으로 부르신 사람들 곧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복음을 맡기셨습니다. 예수님께 복음을 위탁받은 사람들인 교회는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복음을 듣고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로서 교회에 접붙여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복음으로 부르셨다는 것은 교회로 부르셨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교회 됨'과 신자의 '신자 됨'은 복음에 의해 결정됩니다. 복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소화하여 스스로에게 적용하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신이 존재하는구나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한다면 사람들은 하나님 믿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 존재를 증명할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 존재를 증명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신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도 없습니다. 신이 있다 또는 없다를 증명하는 것은 인간의 이해 능력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개연성으로 '신이 존재하는구나'라고 인식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신이 있구나, 신이 있는 것 같다' 정도로 말할 수는 있습니다.
설명의 한 예를 들면 우주의 존재입니다. 신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먼지, 먼지의 결집, 압축과 팽창, 폭발이라는 방식으로 저절로 생겨났다고 말하게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태양계를 생각해 봅시다. 먼지가 모여 압축되고 압축되다가 팽창하여 폭발하여 태양이 생겨나려면 폭발하기 전에 얼마나 커야 할까요? 그 중심이 팽창으로 더 이상 그대로 존재하기 힘들게 되면 중심에서부터 폭발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 중심에서부터 폭발하였는데, 태양과 같은 크기의 항성이 생겨났다는 말입니다. 상식적으로 말이 될까요?
지구의 경우는 지구 크기의 행성 대여섯 개가 충돌하여서 생겨났다고 말합니다. 70년 만에 한 번씩 지구로 다가오는 헬리 혜성이 있습니다. 그 혜성이 지구로 다가올 때에 지구는 긴장합니다. 부딪치게 되면 지구가 어떻게 되는가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구 크기의 행성이 충돌하였는데, 지금의 지구가 생겨났다고 합니다. 수긍이 되십니까?
태양 주위를 지구가 자전하면서 공전하고 지구 주위를 달이 공전하는 것은 오늘날의 과학으로도 모방하기 힘듭니다. 지금 지구와 태양과의 거리나 지구와 달과의 거리가 현재보다 더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면 지구는 재앙을 맞게 됩니다. 생각을 해 보십시다. 사람들이 최고의 기술로 가장 정교하게 만든 시계라도 100년이 넘으면 그 기능에 이상이 생깁니다. 그런데 태양과 지구와 달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최고의 시계보다 훨씬 정교함이 요구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정교함이 저절로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상식적으로 수긍할 수 있습니까?
지구가 비슷한 크기의 행성들이 충돌하여 생겨났다면 그때까지는 만유인력이 작용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만유인력이 작용했다면 그런 충돌 자체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태양 주위를 공전하지도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 지구는 태양 주위를 공전하면서 자전하고 달이 지구 주위를 공전하는 질서가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저절로. 상식적으로 수긍이 되십니까? 별들 간에 의사소통이 이루어져서 "이제 지구가 생겼으니 더 이상 부딪치지 않도록 우리가 질서를 만들자, 서로 부딪치지 않도록 하자" 한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과학자들은 지금도 태양계와 같은 은하계가 생겨나고 있다고 합니다. 진화론에 따르면 우리 사람이 존재하게 된 것은 백만 년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의 은하계가 생기는 것은 몇 십억 년이 걸리는 일입니다. 이 말은 진화에 의하면 인간이 존재하게 된 이후의 기간 동안에 하나의 은하계가 생겨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현재에도 은하계가 생겨나고 있다는 말은 먼지, 먼지의 결집, 팽창과 폭발이라는 방식으로 우주가 생성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우주의 현재 모습과 상태는 결코 저절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외부적인 힘의 개입으로 가능하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큰 능력을 가지신 분 곧 하나님을 말씀하면서 그분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조 때의 정하신 원리와 그 능력의 손으로 지금도 우주를 유지하고 계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우주의 한 행성인 지구에 살면서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역사 때문입니다. 저절로 된 것이라면 언제 그것이 깨어질지 알 수 없어서 불안에 떨 수밖에 없습니다.
신의 존재는 개인적인 경험에 의해 수용과 수용하지 않음이 결정됩니다. 이론적인 설명이 아니라 그 인격과 삶에서의 체험이 신 존재에 대한 수용을 결정합니다. 그 체험이 있는 사람은 신 존재를 증명할 수는 없지만 자신에게는 그 존재하심이 아주 명확합니다. 그 체험이 없는 사람은 '신이 있구나, 신이 있는 것 같다'는 설명을 아무리 잘해도 수용하기 힘듭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수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는 없지만 이 우주 자체가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증거하는 가장 확실한 현장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
먼지에서 출발하여 어쩌다 보니 생명체가 생겨났고 그 생명체가 세월이 흐르면서 진화하여 사람이 생겨났다. 어떤 생물이 사람으로 진화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사람은 그렇게 생겨났다. 이 말은 앞으로 세월이 흐르면 언젠가는 사람에서 더 나은 생물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현재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면서 다른 모든 생물들을 지배하는 것과 같이 이후에 나타나는 더 진화한 생물은 사람을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원숭이를 동물원의 우리에 가두고 구경하는 것과 같이 사람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자손 중에서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될 것입니다.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성경은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생물들과는 달리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서로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사람들 간에도 서로 사랑하며 다른 피조물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는 존재로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언어로 하나님과 대화하며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도 사람을 즐거워하시며 서로 사랑하는 관계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간에 사랑하여 함께 있는 것이 기쁘고 행복하게 됩니다. 자연의 모든 것도 잘 선용하여서 더 나은 세계를 만들어 가도록 합니다.
처음 사람의 모습은 이러했습니다. 그런데 현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아무렇지도 않게 조롱하기도 합니다. 함께 있음이 기쁘고 즐거우며 행복한 것이 아니라 고통인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가장 가까운 관계인 부부도 서로 원수입니다. 원수, 평생 원수라고 이야기하는 형편입니다. 자연을 잘 다스리는 선용이 아니라 인간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파괴하고 신음하게 합니다. 그 결과 재해로 되돌아오게 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고 목숨까지 잃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계속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복음은 이에 대한 대답입니다.
죄와 그 결과
성경은 "모든 사람이 허물과 죄로 죽었다"(엡 2:1)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죽었다고 선언하게 만든 허물과 죄란 창조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태어난 생명이 "나는 부모를 모르고 사랑할 이유도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배은망덕입니다.
이러한 죄의 근원에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있습니다. 이 세상의 임금이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귀라고 불립니다. 그는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천사이었으나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나님을 반역한 존재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을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고 유혹하여 자신과 같이 하나님을 반역하게 만들고는 자신의 지배하에 두었습니다.
마귀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의 삶의 원리를 따르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욕구를 채우기 위한 나름대로의 삶의 양식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돈을 많이 벌어야 행복하다'는 원리를 따라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기 위하여 열심히 사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잘 살기 위한 방식으로 인식된 길을 열심히 따르는 것입니다. 세상 풍조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당연하다는 듯이 다른 사람을 짓밟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고 합니다. 내가 잘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행하는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마귀의 지배 방식은 '인간의 삶의 주인은 바로 그 인간이다. 인간은 자신의 생각과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외치며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자신이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유인이라고 생각하는데, 실상은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의 지배 아래에서 사람은 자신의 마음의 원하는 대로 행합니다. 자기중심의 삶을 추구합니다. 생각과 행동의 기준이 '나'입니다. 이기주의입니다. 그들은 '공부해서 남 주나, 돈 벌어서 남 주나'라고 외칩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은 모습을 볼 수도 있지만 근원적으로는 동일합니다. 오십보백보인 것입니다. 이기주의는 결국 사람들을 삭막하게 만들고 갈등과 다툼, 나아가서 전쟁 등과 같은 고통을 겪게 합니다. 결국은 '인생은 고해다'라고 토로하게 됩니다. 어쩔 수 없어서, 마지못해서, 죽지 못해서 산다고 말하게 됩니다.
사람에 대한 마귀의 지배 목표는 최종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할 때에 선하게 여겨지는 종교와 철학도 모두 그의 지배 도구입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종교와 철학은 그 내용이 어떠하든지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마귀의 지배 아래 있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으로 오십보백보입니다. 참된 구원이 없습니다. 생명이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집행되면 일반적으로 지옥이라고 불리는 영원한 불 못에 던져지게 됩니다. 현대인들은 이 말을 아주 싫어합니다. 지옥이라는 단어를 너무나 싫어합니다. 교회에서도 그 단어는 금기시되는 실정입니다.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기에 말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갈수록 사람 중심으로 사람의 기분에 맞추려고 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이는 아주 위험한 모습입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맞추며 타협하고 훼손하는 잘못된 모습입니다. 지금과 같은 시대라도 사람 본연의 모습과 필요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1000년 전이나 2000년 전의 사람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 시대의 사람들이 들어야 했던 말을 지금의 사람도 들어야 합니다. 과학이 좀 더 발달한 시대에 산다고 해서 그 근원적인 사람됨이나 필요는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죽었다'는 표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얼마의 기간이 지나면 이 땅에서의 생명이 끝나고 최종적으로 영원한 불 못에 던져지는 것입니다. 죄의 결과, 죄의 삯으로서 사망입니다. 이는 마치 나무에서 한 가지가 꺾여져서 뿌리로부터 영양분(생명)을 공급받지 못하고 얼마의 기간이 지나면 마르고 그 후에 불쏘시개로 던져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 세계가 영적 세계를 보는 주는 방편이 되도록 동일한 원리의 역사를 행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허물과 죄로 죽었으므로 인하여 그 원리를 발견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허물과 죄로 인하여 죽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고 이 땅에서의 생명이 끝나게 되면 영원한 불 못에 가게 됩니다. 누군가가 스스로에 대해 자신은 아니라고 말한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여기에서 예외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죄와 허물로 죽게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죄와 허물로 인해 영원한 멸망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사람이 죽음에서 건짐을 받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위하여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역사적 실제 인물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실제 인물인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특별한 생애를 사셨습니다. 약한 사람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변호하시며 보호하셨습니다. 불의에 대항하시고 회개를 요청하셨습니다. 물질을 많이 더 많이 소유하려고 하지 말고 주위를 둘러보고 나누며 살아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 당시에 십자가는 로마에 반역하는 사람들과 가장 극악한 죄인들에게 집행되는 사형 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만 하는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만약 그가 자신의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다면 그분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서라도 세계 4대 성인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지는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달려 죽어야 할 사람들을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으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받아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세상의 죄 값을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세상의 죄를 속하기 위한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진 것입니다. 죄인들을 살리기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 십자가의 죽음이 결정되어 있던 바라바라는 한 강도가 풀려났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처럼 죽음이 결정되어 있던 사람을 살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시는 동안에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죄를 사해 주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그 말이 진실하든가 아니면 미치광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다른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성인의 한 사람으로 이야기하는 현실을 생각할 때에 미치광이는 아닙니다. 남는 경우의 수는 그 말이 진실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죄의 삯인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부활은 그분의 삶이 진실이었다는 선언입니다. 속죄 사역이 온전하여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 구원자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세상을 사랑하시는가에 대한 증거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 땅에 남아 있는 제자들을 준비시켰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되자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하려던 제자들입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의 서슬에 눌려서는 살기 위해 도망하려던 이들입니다. 그들이 며칠 지나자 도망자가 아니라 당당하게 예수님이 구원자라고 증거하였습니다. 그런 변화에 대한 유일한 설명을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되찾으시고 온 우주의 통치자로 등극하셨습니다.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서 온 우주를 통치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참사람이셨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선언합니다. 죄인은 스스로 죄를 속죄하지 못합니다. 죄의 값인 사망을 경험하고 살아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독생자 하나님이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일반 사람들과 달리 죄가 없으십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이 땅에 사실 때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속죄의 방식은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피는 생명입니다. 죄에 대한 대가는 생명을 내어놓는 것 곧 죽음입니다. 피를 흘린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여 피를 흘리면 죽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끝입니다. 자기 죄로 인하여 죽는 것으로 끝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의 현주소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 어떤 사람도 그 자신이 스스로의 죄를 용서받을 수가 없습니다. 피를 흘리면 죽고 그것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결국 누군가가 그 대가를 지불하여야 합니다. 자기 죄에 대한 대가로 자기 피를 흘려야 하는 존재는 그 누구도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죄 없는 존재가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사람 중에서는 죄 없는 존재가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죄가 없으십니다. 그분이 하나님으로 하늘에 계실 때에는 피를 흘리실 수가 없습니다. 피는 몸 안에 존재하는데, 하나님은 피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죄를 속하는 피를 흘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입니다.
구원
이제 허물과 죄로 인하여 죽은 사람에게 생명이 주어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우리의 죄 값을 받으셨다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그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죽은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한 인정이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임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 믿음은 회개와 함께 움직입니다. 회개에는 이전과 같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생활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고백, 마귀의 지배를 벗어나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겠다는 고백, 자기 욕심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겠다는 고백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회개는 생각의 문제가 아니라 전인격적인 문제이며 회개가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이 일은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여시고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역사하셨기에 가능하였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사람이 스스로 그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인식하지 못하지만 성령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열어 복음을 받아들이고 따르도록 하는 역사를 행하십니다. 그 역사 안에서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의지로 복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죄 값을 예수님에게서 대신 받으신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죄 값인 사망에서 자유하게 됩니다.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동일하게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됩니다. 신분의 변화입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박혀서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도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였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지 않았음에도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놀라운 은혜의 역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는 하나님 아버지의 판결이 주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에 대하여 살아났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아났습니다. 부활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이는 미래에 있을 일에 대한 진술이 아닙니다. 과거에 이미 이루어진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과 동일한 원리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지금 하늘에 앉은 존재입니다. 이는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지만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산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미 하나님나라의 시민으로 이 땅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세상에 속하여 세상 풍조를 따랐음과 비교하여 위치의 변화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셔서 그의 자녀들을 품으시고 돌보시며 지켜 주시고 자라도록 도우십니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의 아버지의 지혜와 능력을 얻어 살게 되었습니다.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의 수준에서 살지 않고 하늘의 수준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원의 변화입니다. 자신의 자원의 한계에서 머물러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자원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는 성령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당사자에게 부어지시고 성령님을 받은 자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을 선물로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소유(?)한 자로서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온 우주를 다 합친 것과 더 크고 좋은 것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온 우주에서 가장 강하고 부유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서너 살의 아이에게 어머니가 함께 있지 않는다면 그 아이는 자신의 수준에서만 생활하게 되어 오줌과 똥으로 그의 옷과 몸은 더러워집니다. 그의 인격은 해를 입고 비뚤어집니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함께 있고 어머니에게 자신의 필요가 제대로 알리기만 하면 어머니의 수준에서 생활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이들은 하나님의 돌보심과 인도하심을 받아 하늘의 지혜를 얻고 하늘의 자원을 사용하며 능력 있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면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풍성한 인생을 살 수가 있습니다. 삶의 지표가 '공부해서 남 주나, 돈 벌어서 남 주나'가 아니라 '공부해서 남 주자, 돈 벌어서 남 주자'로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나의 상처가 치유되고 잘못된 생각과 행동이 변화됩니다. 나를 통하여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즐거움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이는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삶의 주인이신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구원입니다. 현재적인 구원입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른 관계를 맺는 삶으로서의 영생입니다. 현재적인 영생입니다. 현재적인 구원, 현재적인 영생은 영원한 구원, 영원한 영생과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결단
어느 목사님이 교회의 집사님과 함께 동네의 한 집에 전도하러 갔답니다. 그들은 한 아주머니의 인도로 방에 앉게 되었는데, 대뜸 묻는 것입니다. "목사님, 예수 믿으면 남편 사업이 잘되고 자식들은 공부를 잘하게 됩니까?" 목사님은 순간적으로 당황하였지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아주머니는 냉랭하게 등을 돌리며 "그럼 볼 일이 없으니 그만 돌아가세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 후에 지혜를 얻고 말하였습니다.
"아주머니, 예수님을 믿으면 아주머니가 원하는 대로 된다는 보장도 없고 안 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습니다. 남편의 사업이 망하더라도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격려하고 남편을 일으킬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식이 공부를 못하더라도 낙망하지 않고 자녀를 용납하며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남편과 자녀에게 힘이 되어 주며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복음의 능력이며 복음 안에서 얻는 복입니다."
그러자 돌아앉은 아주머니의 어깨가 들썩이더니 되돌아 앉아 눈에는 눈물을 글썽이며 "그런 예수님이라면 나도 믿겠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누구라도 복음을 받아들이면 동일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 용서를 얻고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받는 그분의 자녀가 되어 복된 생애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영원한 불 못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에서 영생을 소유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전인격으로 복음을 받아들였습니까?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지만 허물과 죄로 죽었던 존재임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하셨습니까? 그분의 인격과 사역이 구원자로서 나를 향한 사랑이었음을 받아들이고 고백하십니까? 그렇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한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이전부터 감사하며 살았다면 그 감사를 새롭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반면에 그렇지 않다면 전인격으로 복음을 받아들이시기를 권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도 가능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다른 십자가에 달려 죽기 직전에 있었던 한 사람도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영접하여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갈 수 있었습니다. 지난날에 어떻게 살았는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은 삶에서 돌이키면 됩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하고 새로운 삶을 사시면 됩니다. 그 삶은 과거에 자신의 잘못으로 고통당하는 이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용서를 구하여야 합니다.
신앙생활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과거에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었다면 구원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 안에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 누구도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구원받을 만한 어떤 모습이 그 자신에게 있었기에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누구도 스스로 자랑할 것이라는 건 없습니다.
마귀는 자신이 지배하던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못하도록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이킨 이가 다시 하나님을 떠나도록 아주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일들을 사용하여 유혹합니다. 때로 아주 특별한 일들을 일으켜서 넘어지게 하려고 합니다. 마귀의 방해 공작인데,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분명한 표입니다. 잘 분별하시고 꾸준히 믿음의 길을 걸으셔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대원칙은 내면적으로 갈등이 있고 그 갈등 가운데 선택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선물로 주어진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원하심과 자기 욕심, 세상 풍조, 마귀의 지배를 받음으로 원하는 바 사이의 갈등입니다. 우리는 둘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하며 살게 됩니다. 성령님의 원하심을 선택하여 따르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모든 좋은 것들을 누리게 됩니다. 자신의 인간적인 욕심을 선택하여 따르면 땅에 속한 것들을 거두게 됩니다.
우리는 성령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선택하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되는 것입니다. 환경에 상관없이 성숙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환경적으로 최악인 상황이라도 기뻐하며 감사하고 찬양하는 생활이 가능케 됩니다.
반면에 인간적인 욕심을 선택하면 성숙이 중단됩니다. 환경에 의해 흔들립니다. 의와 평강과 희락과는 무관하게 생활합니다. 불평, 불만, 근심, 걱정 등 허물과 죄로 죽었던 때와 같이 살게 됩니다. 서너 살의 아이가 어머니와 함께 있더라도 어머니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어머니의 수준에서 생활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지 않으면 하늘의 수준에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어떤 집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노트북을 선물하였습니다. 아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고 여겨져서 인터넷도 연결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게임하며 적절한 시간 이상을 보내지 않도록 당부합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인터넷을 취소하여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노트북도 도로 가져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아들에게 필요하면서 유익하고 좋은 여러 사이트를 안내하며 바르게 잘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노트북은 아들 소유이고 동시에 아들은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바르게 사용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든지 아니면 게임에 빠져 시간을 보내어서 나중에 노트북을 빼앗기든지. 당사자의 선택입니다. 노트북을 바르게 사용하여 유익을 얻도록 하려는 아버지의 마음과 배려와는 별도로 당사자의 선택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구원을 얻은 사람들은 하나님에 의해 다시 창조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만드신 바입니다.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선한 일이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예수님이 사람들을 사랑하신 것과 같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삶의 목적입니다. 삶의 목표입니다. 동시에 이루어야 할 과업입니다. 선한 일의 최종적인 모습은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닮아 가는 과정을 밟아야 합니다. 인격이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삶의 방식과 태도가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과 같은 수준이 아니더라도 조금씩 더 닮아 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닮아 감에 있어서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십니다. 우리 자신들만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을 통하여서 가능합니다. 내 마음대로 살면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면 가능합니다.
복음을 바르게 알고 수용하며 예수님을 인격과 삶의 주인으로 받으면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됩니다. 사람다운 사람이 됩니다. 모든 선한 일을 행함에 있어서 온전하게 됩니다. 사람다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과 함께하며 그 생명으로 살아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현실에서 사는 존재는 나이지만 그 '나'가 예수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여서 예수님이 살아가는 것과 같이 됩니다.
모든 성도는 마지막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데, 심판의 기준은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자 힘쓰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나름대로 열매를 맺었다면 영생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음에도 그 사랑을 무시하고 멸시하며 자기 욕심을 따라 살았다면 영원한 멸망이 주어집니다. 이는 단순히 무서움을 일으키는 사안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토록 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잘못된 삶에 대한 심판을 단순히 저주가 아니라 은혜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신뢰함이 바른 신앙의 길로 계속 나아갈 수 있는 한 방편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욕심에 이끌리어 살아가지 않도록 해 주는 경계선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친근히 하며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며 친근히 하는 경외함이 믿음입니다.
잠자고 일어나서 다시 잠들기까지의 모든 생활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잠이 들고 잠에서 깰 때까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 온전해지면 온전해질수록 그 인격은 온전해집니다. 하나님을 의지함인 믿음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 삶은 풍성해집니다. 큰 사람이 되어 온전한 인격을 이루어 풍성한 삶을 사는 큰 사람이 됩니다. 큰 사람이 되면 큰 사람이 될수록 삶은 부요해지고 다른 이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어느 자리에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예외는 없습니다.
의료인으로 살면서 큰 사람이 되어 온전한 인격으로 풍성하게 생활하면서 만나는 분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환자로서 생활하지만 큰 사람이 되어 온전한 인격으로 풍성하게 생활하면서 주위 분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건물을 청소하는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큰 사람이 되어 온전한 인격과 풍성한 삶 가운데 이웃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의지하면, 곧 믿으면 누리게 되는 복입니다. 복음을 바르게 알고 누리게 되는 복입니다.
우리의 형편이나 상황은 많은 경우에 나의 생각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집니다. 원하지 않았지만 다치고 병에 들어 병원 신세를 집니다. 원하지 않았지만 나를 사랑해 주지 않는 남편을 만나 힘겨운 상황을 맞이합니다. 원하지 않았지만 나를 존경해 주지 않는 아내를 만나 괴로운 형편에 처합니다. 원하는 바와는 너무 다른 부모이어서 괴롭습니다. 원하는 바와는 너무 다른 자식이어서 고통스럽습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나 어떤 상황은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바뀌기를 바라지만 원하는 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더 힘들어 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다른 사람이나 어떤 상황을 바꾸려고 하지 말고 자신이 큰 사람이 되면 됩니다.
매우 넓다고 생각하였던 어릴 때에 뛰어놀던 고향 길을 어른이 되어 찾아가면 왜 그렇게 좁아 보이는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분명히 길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데 어릴 때와는 다르게 보입니다. 자신이 어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나 어떤 상황은 변하지 않더라도 스스로가 크면 달라집니다. 상대방이 그대로이고 어떤 상황이 변하지 않더라도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됩니다. 여유가 생겨나고 품을 수 있습니다. 어렵지 않게 넘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변하고 상황이 바뀌는 것도 경험하게 됩니다. 넉넉하고 여유롭게 품어 주었음에 감사하며 함께 온전한 인격과 풍성한 삶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렵던 상황은 더 성숙하고 큰 사람으로 변하는 발판이 됩니다. 화가 변하여 복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진정으로 바르게 알고 누리는 사람이 얻게 되는 복입니다.
교회 생활은 필수적입니다. 함께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이들과 함께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세워 가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자신과 생활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기를 힘쓰십시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좋았던 면과 은혜에도 불구하고 실패하였던 면을 있는 그대로 말하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더 풍성히 체험하며 성숙해 가는 자신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자신 안에서 소화하는 과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마귀와 세상 그리고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넘어지지 않을 수 있는 중요한 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닫게 된 내용이 생활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도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기도는 생명의 호흡이며 하나님께 대화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는 통로입니다. 말씀과 기도는 이 세상에서 더욱 복된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영양분으로 삼아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됩시다. 어떤 형편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집을 짓고 풍성한 생애, 승리하는 삶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교통 법규부터 지키시오, 아멘! 한국의 교회가 구원과 복음을 전하기에 앞서 교통 법규를 지키고 공중 도덕을 지키라고 호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해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앞장서서 질서를 지키면 머지않아 한국은 '하느님의 역사(役事)'와도 같은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한국 사람들에게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부족하다는 점, 질서와 공중 도덕을 지켜야 한다는 관념이 없다는 점은 스스로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서구(유럽)처럼 오랜 세월을 두고 시민 각자의 필요성 때문에 서서히 민주주의가 발달한 곳이라면 문제가 다르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오늘부터 민주주의 합시다!" 하는 식으로
외래제도가 도입된 사회에서는 한동안 혼란이 빚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한 혼란을 바로잡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국가가 강력하게 법을 집행함으로써 질서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되도록 강제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교육을 통해 국민 스스로
도덕과 질서를 지키도록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것이다.
지나치게 강제에만 의존하면 오히려 반발이 일어나거나 인권이 침해되는 등 부작용이 일어날 수 있다. 그렇다고 자발적으로 시민의식이 성숙되기를 기다린다면 오랜 세월 동안 무질서 상태를 감수해야 한다. 따라서 이 두 가지를 적절하게 조화시키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대한민국은 정부 자신부터 법과 질서를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
법과 질서를 지키지 않고 철새처럼 시류에 따라 여기저기 떠다니는 사람일수록 높은 지위를 차지할 가능성이 많아진다.
그런 정부라면 국민에게 법과 질서를 지키라는 말을 할 자격이 없다. 그런 소리를 백날 해 봐야 아무도 듣지 않는다.
교육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대학 입시에만 매달려 있다. 가르치는 선생 자신부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학생들을 명문대학에 집어넣는 것을 지상 과제로 삼고 있다.
심지어 교사라는 자리를 이용해서 학부모에게 돈을 뜯어내는 데 혈안이 된 선생이 있다는 소문도 들린다. 사회환경이 이러니 질서 교육, 도덕 교육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내가 보기에 마지막으로 기대를 걸 곳은 종교밖에 없다. 다행히 한국에는 종교를 믿는 사람이 대단히 많다. 밤에 좀 높은 곳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면 거짓말 조금 보태서 한집 건너 하나씩 빨갛게 불을 밝힌 교회의 십자가가 보인다.
성남시로 들어가다 보면 집 없는 빈민이 모여 사는 비닐 하우스 촌이 있는데, 거기에도 어김없이 교회가 있다.
미리 밝혀 두지만 나는 종교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무릇 종교라면 세파에 지친 힘없는 인간들을 따뜻이 위로해 주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사람들이 종교에 의지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급속한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면, 한국 사람들이 무엇엔가 의지하고 싶은 갈망이 그만큼 크다는 쪽으로 해석해도 큰 무리가 아닐 것이다.
일본에 기독교가 들어온 지 300년이 넘었지만 교인은 겨우 300만 명이 될까말 까다.
다른 종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여기에는 국민성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일본 사람들이 종교에서 도피처를 찾아야 할만큼 삶이 어렵고 힘들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일본과 달리 한국 사람들은 끝없이 이어지는 고난과 시련의 세월을 살아왔다. 그러므로 어디엔가 심신을 기댈 언덕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불행하게도 나라는 기댈 언덕이 되어 주지 못했다. 무슨 일만 터지면 자기 먼저 도망갈 궁리부터 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지연이다, 학연이다 혈연이다. 따질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따져서 상대방하고 연결되는 공통점을 발견해야 한다.
거기에라도 의지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한국 사람들에게 지금은 힘들고 괴롭지만 천국에 가면 편안하고 풍요롭게 살 수 있다는 희망은 말 그대로 '복음'이 아닐 수 없다.
내 생각이 맞는지 틀리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나는 한국이 이토록 교회가 많은 이유를 그렇게 풀이하고 있다.
한데 그토록 기독교 신자가 많은 나라가 왜 나 같은 외국인한테서 '무법 천지'라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진실로 납득할 수 없다. 나는 교회에 다니지 않기 때문에 한국의 목사들이 신자들에게 어떻게 설교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많은 교회에서 원수를 사랑하고, 오른쪽 뺨을 맞으면 왼쪽 뺨을 내밀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제대로 전파하고 있다면 한국사회가 지금 같지는 않을 것이다." - 이하 생략 - 1998년 12월 이케하라 마모루
한국교회를 향해 던진 그의 충고에서 받은 역설적인 생각은 이렇다.
- 기도하기 전에, 설교 준비하기 전에 먼저 이 글을 읽었으면 좋겠다.
-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서 그리고 '할렐루야 아멘! 아멘!'하기 전에
새벽기도회에 나가기 전에 이 글을 먼저 읽으라고.
비록 이 글을 읽으면서 '망발(nonsense)한다'고 비난을 해도 그의 충고는 '한국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심지어 '일본 과거사(日本 過去史) 청산위원회'에서 나를 '매국노 명단에 올리겠다'고 협박을 해도 일본인의 충고는 옳기 때문에 전적으로 받아들여야 한국교회는 '교회다운 교회'로 소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거나 자존심을 지나치게 내세우는 것은 자기 발전에 득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 사람들이 1백 달러 시절의 사고 방식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것'은 더욱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우리의 교회생활 수준 역시도 "백 달라 이하"(以下)는 아닌지 모른다. 그는 또한 한국 어린이들을 보고 '온상 속에서만 자라는 '떡잎'으로 비유했다. 즉, 한국 어머니들의 자녀 애정은 확실히 남다르고 그것은 '애정'이라기보다 '집착'이라는 표현했다.
글쎄 '미국 명문대에 입학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한다’는 학부모의 비뚤어진 이기심은 'SAT 문제'를 빼돌린 비리 강사까지 쟁탈하는 부모들인 것을 보면, 그런 부모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 '질서의식'을 가질 순 없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충고에서 한국 교회의 생리까지도 짐작할 수 있다. 솔직히 '하나님의 교회'라고 말들은 하지만 사실 '하나님의 교회'인가 아니면 '십자가의 예수'를 싹 빼버린 "내 교회"들이니까(?)
즉, 그는 한국을 가르쳐 '총체적 무질서의 나라'라고 했고 교통사고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라고 했다.
이 글 제목 "교통 법규부터 지키시오! 아멘!"은 일본인 '이케하라 마모루'의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한국인 비판>을 간추리고, 맞장구 친 것이다.
때문에 간혹 독자들 중에는 "인용할 나라가 없어서 하필이면 일본이냐고 나무랄지도 모른다.
맞다. 정말 맞다. 일본에 대한 우리들의 정서로는 개똥까지도 주기 싫은 관계이니까. 그리고 일본을 선교하는 한국교회의 자부심에서도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일본인의 비판 앞에서도 우리는 오기를 부릴 수가 없다. 그리고 그가 "맞아 죽을 각오로 한국'을 비판했는데도 그가 맞아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은 한국인들의 생활패턴이 그 일본인에게 돌을 던질 자신이 없다는 것 아닐까.
심지어 그의 글이 아직도 한국에서 폐기 처분되지 않은 것을 보면, 그러면 우리는 어째서 '질서 없는 나라'가 되어 이런 부끄럼을 당하고 있는 것인가.
또 이런 신문기사는 어떤가. '운전 문화는 사회의 얼굴. 난폭·무질서 운전, 책임·배려·준법 의식은 품격운전의 지름길'이고 특히 교통문화는 사회의 다른 예절보다 더 중요하다. 인명 피해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교통사고는 대부분 안전 규정이나 질서를 지키지 않아 발생하는 인재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한국은 아직 선진국 대열에 낄 수가 없다.
바로 이것은 '이웃을 배려하지 못하는 곧 자신만 생각하는 우리네 정서'가 아닌가. 물론 우리네들처럼 인정(人情) 많은 나라가 어디에도 또 있겠는가. '나라 살림'이 어려울 때는 우리는 장롱에 숨겨 두었던 자식들의 돌 반지 팔아서 나라를 건졌고, 또 늦은 밤에도 시루떡 접시 돌리는 민족 아닌가.
때문에 우리가 '질서 없는 나라'가 된 것은 우리의 정서가 각박해서가 아니고 바로 '우리들의 욕심이 지나쳐서'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즉, '남 잘되는 꼴'못 보고, 나보다 앞서 가는 꼴을 못 보는 그 잘난 특성들 때문에 속없이 떵떵거리기 좋아하고, 남을 의식하며 사는 습성.
그뿐인가. 얼어 죽어도 체념 때문에 곁불에 몸 녹이지 않는다는 우리들의 잘난체하는 우리들에게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이 싹틀 수가 없는 것이다. 특히 한국 교회가 '교통질서가 없다'는 비평을 듣는 것은 바로 복음에 성실하지 못하고 교회생활을 열심 하면서도 모두가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인들의 질서 의식은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때문에 열심히 믿는다는 것이 다는 아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의 질서가 올바로 세워질 때, 사회의 질서는 물론 도덕치(置)(value)도 높아지는 것이다. 특히 기복신앙으로 교회부흥의 수단으로 삼는 한국 교회의 정체성까지도 "교통 법규부터 지키시오! 아멘! "이라고 충고는 한국교회의 정체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질서 없는 한국사회에 대한 책임을 한국교회는 통감해야 한다. 복음이란 바로 '이웃 배려' 아닌가! 그러니까 우리들의 신앙심도 질서 없는 이기심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즉 '행동하는 양심이 아니라 '내 축복만을 달라'고 조르는 탐욕적인 믿음이란 말이다.
자, 한번 더 생각해 보자. 하나님께서는 어째서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우리가 그렇게도 싫어하는 이방(異邦)이고 우리가 선교하는 일본인을 통해서 이런 부끄러운 '충고'를 듣게 하는 것일까. 예수님의 말씀이다.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고(눅 19:40)
- 조선과 동아 일보 사설
1. '거짓말 天國'에서 벗어나려면 사법방해죄 도입해야 -- 조선일보 사설/2010/1/2/
법무부와 검찰이 수사 과정에서 참고인이 거짓 진술을 하면 처벌할 수 있게 하는 사법방해(司法妨害)죄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참고인이란 경찰이나 검찰 같은 수사기관이 범죄를 수사할 때 제3자의 입장에서 범죄 피의자의 혐의 유무(有無)를 증언해 주는 사람 을 말한다. 재판 과정에서 법정에 나온 증인과 비슷하다.
국회는 2월 임시국회에서 사법방해죄 도입을 비롯한 사법 개혁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한국은 법정에서 거짓말을 하는 위증이나, 남을 거짓으로 고소·고발하는 무고 사건 숫자가 세계 최고 수준이다.
2007년 일본은 위증죄로 138명이 입건돼 9명이 기소됐으나 우리는 3533명이 입건돼 1544명이 기소됐다.
무고죄도 일본은 133명이 입건돼 10명이 기소된 데 비해 우리는 입건이 4580명에 기소가 2171명이나 된다.
기소된 숫자를 기준으로 위증죄는 일본의 171배, 무고죄는 217배다. 일본 인구가 우리나라의 대략 2.5배인 점을 감안하면 실제로는 위증죄는 857배, 무고죄는 1085배인 셈이다. 우리 나라에서 위증 관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도 2006년 1066명, 2007년 1451명, 2008년 1792명으로 계속 늘고 있다.
증인이 법정에서 위증을 하면 5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게 된다.
그런데도 이렇게 법정에서 거짓말하는 사람이 많으니, 어떤 거짓말을 해도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는 수사 단계의 참고인 중에 거짓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대구지검이 2006년 적발한 위증 사범(事犯)을 대상으로 그 동기를 분석한 결과 '친분관계 때문'이 52.9%로 가장 많았고, '금전적 대가(代價)를 약속해서'가 26.5%로 두 번째였다.
혈연·지연·학연으로 엮인 연고주의·온정주의와 돈만 받으면 뭐든 다 해줄 수 있다는 생각이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사회 풍토를 만드는 것이다.
법정에서든 수사 단계에서든 위증이나 무고는 범죄의 진실 규명을 방해해 반드시 처벌돼야 할 범죄자가 교묘히 법망을 빠져나가고 엉뚱한 사람이 억울하게 처벌을 받는 일이 생기게 한다.
미국에서 클린턴과 닉슨이란 현직 대통령이 탄핵 위기에까지 몰렸던 것도 위증과 사법방해죄 때문이었다. 대한민국 국민이 세계에서 가장 거짓말을 잘한다는 더러운 이름을 벗어나기 위해서도 사법방해죄 도입이 필요하다.
2. 선진화 깃발 아래서 벌어지는 ‘전방위 부패’ - -동아일보 사설 -2010/2/2 -
조현오 서울경찰청장이 성매매업소 및 도박장과 경찰관의 유착비리를 끊기 위해 휴대전화 통화기록과 은행계좌 명세를 영장 없이 볼 수 있게 사전 동의서를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일선 경찰관들 사이에서는 “사생활의 과도한 침해” 라는 반발이 나오는 모양이다. 김준규 검찰총장도 “숨은 비리인 교육비리 척결에 전념하라” 고 지시하고 인사 청탁, 공사비와 교비(校費) 횡령 근절을 위한 수사에 나섰다.
잇단 교육계 뇌물 사건으로 망신살이 뻗친 서울시교육청은 비리 고발자에게 최고 1억 원의 포상금을 내걸었다.
작년 말 공무원의 16%가 지난 5년 동안 예산 7억 원을 빼돌린 충남 홍성군 비리가 드러난 뒤 이명박 대통령은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과 결탁한 토착비리 척결을 지시했다. 산업화 민주화의 과제를 달성하고 선진화를 향해 달려가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후진국형 비리가 끊이지 않는 것은 국격(國格)을 훼손하는 일이다.
과거 박봉에 시달리던 시대와 달리 요즘 공무원들은 실직 걱정도 없고, 대우는 국민이 부러워할 정도다. 그럼에도 시민과 일상적으로 접하는 일부 공무원들이 민원인을 ‘봐주고 챙기는’ 행태는 여전하다.
교육계에도 경제수준이 높은 지역의 교장직이나 승진의 지름길인 교육청 장학사 자리를 놓고 상납이 끊이지 않는다.
돈을 주고 승진한 사람들은 '투자 원금’을 건지려고 다시 뇌물을 받는 악순환 구조다. 이런 교육비리가 강성 전교조에 투쟁의 명분을 제공하고 있다.
서울경찰청에서 경찰관의 개인 휴대전화 기록을 조사하겠다는 다소 극단적인 조치가 나온 것도 경찰관과 유해업소의 유착이 방치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통화나 계좌 명세에 대한 영장 없는 조사는 아무리 목적이 정당하더라도 지나친 수단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공직자 임명 때도 계좌추적 동의서를 받아 검증을 한다. 대민(對民) 현장의 경찰과 세무, 교육 공무원들이 받는 유착과 부패의 유혹은 고위 공직자 못지않다.
국민과 사정기관이 주시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경각심을 일깨우는 효과는 있겠지만 실효성은 의심스럽다. 휴대전화가 아니더라도 업주와 접촉할 방법은 많다. 감사관실에서 들여다보는 줄 알면서 예금계좌로 뇌물을 받는 경찰관도 없을 것이다. 국민의 질타를 모면하기 위해 충격요법을 내놓고 어물쩍 넘어가려는 조치가 아니길 바란다.
무엇보다 일선 경찰과 교사, 공무원들의 투철한 공복(公僕)의식이 선행돼야 한다.
“우리 아빠는 경찰이다” , “우리 엄마는 교사다” 라고 자녀들이 자랑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려면 치열한 자정(自淨)이 요구된다.
경찰관이 아침에 떳떳하게 정복을 입고 출근하는 운동도 필요하다. 공무원에게 돈을 주고 일을 해결하려는 민원인과 학부모도 사라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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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를 넘어 사랑으로
<무소유>를 회상하며
정용균
법정의 <무소유>는 1976년 4월에 처음 세상에 나왔다고 합니다. 그때는 유신 정권의 '잘살아 보세' 구호 속에 너나없이 앞으로 앞으로만 내닫던 시절입니다. 양(量)과 속도가 모든 가치의 척도처럼 여겨지던 메마른 성장주의 시대. 그 극점에서 그는 참된 삶의 가치는 거기에 있지 않다고 설파하면서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무소유>, 그것은 작은 수필집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그 시절엔 개념조차 낯설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에 감동하였고, 그 가르침을 따라 살기를 결심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세대와 세대를 이어 사람들의 가슴에 잔잔한 울림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시절 그만큼 사람들의 삶과 정신이 피폐해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메마른 성장주의 속에서 주변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끊임없이 자신을 내몰아야 했습니다. '잘살아 보세' 구호 속에 하루를 시작했고, 하루를 마감했습니다. 그 구호 속에 상처를 받는 우리 이웃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오로지 지긋지긋한 가난 속에서 벗어나는 것이 지상 과제였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입는 자그만 희생은 감내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열심히 일하여 우리가 가진 빵조각이 커지는 날, 서로서로 나눌 수 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런 날이 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성장주의, 그것은 그 시대 최고 가치이자 이념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삶을 지탱하는 큰 기둥과도 같았습니다. 그것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교회조차 그 시대 이념(성장주의)에 편승해 기복주의를 가르치고 있었고, 그 가운데 교회는 엄청난 속도로 성장을 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것을 자랑으로 삼았습니다.
그 속에서 법정은 우리가 사는 이유는 그게 아니다, 삶의 가치는 거기에 있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성장주의 속에서 함몰되어 가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었고, 시대를 향해서는 반기를 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법정의 가르침은 신도와 비신도를 불문하고 많은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인들에게도 예외는 아닌 듯싶습니다. 다른 사람은 차치하고라도 제가 그랬으니까요. 처음 그 책을 읽었을 때 받은 느낌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현실과 대비되어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몇 년 전, 이곳(뉴스앤조이)에서 청부론과 청빈론을 두고 뭐가 옳고 그른가, 한참 공방(攻防)을 할 때에 가끔 글을 남기는 사람 가운데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은 무소유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성경에서 말하는 가난(헬라어로는 '프토코스')을 '무소유'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러고는 예수님이 무소유의 삶을 사셨듯이 우리도 무소유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를 집착케 하는 것은 모두 버려야 우리가 예수의 참제자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는 모든 가짐을 죄악으로 봅니다. 심지어 결혼조차 그렇게 보았습니다. 그의 주장에는 문제가 많지만, 그것은 또한 법정의 '무소유' 사상이 얼마나 그에게 영향을 끼쳤는가를 엿보게 하는 좋은 예라고 하겠습니다.
법정은 '무소유'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들이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것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만큼 많이 얽히어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너무나 훌륭한 지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다음과 같은 말은 오로지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국제 정세를 해석하는 좋은 열쇠가 되기도 합니다.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所有史)처럼 느껴진다. 보다 많은 자기네 몫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는 것 같다. 소유욕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