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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빡이가 목사처럼 삽니다” /선교사들이 한국 어린이 잡아 먹는다 2008-02-22 11:30:44 read : 6553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정종철 개그맨(소망교회)
양봉식 sunyang@amennews.com
개그맨은 어릴 적 꿈
-2007년 제19회 한국 방송프로듀서 상 코미디언 부문 출연자상을 받으셨는데, 축하드립니다. 언제부터 개그맨이 되겠다는 꿈을 키웠고 또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그리고 연예계 데뷔는 언제 하셨는지요? 개그맨이 되기 전에 냉면집 주방장을 지냈고 조리사 자격증까지 있다고 하던데.
어릴 때부터 개그맨이 저의 꿈이었습니다. 당시 어린아이들 사이에서 코미디언 심형래 씨의 인기는 폭발적이었습니다. 당연히 저도 그분을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꼭 개그맨이 돼서, 꼭 심형래 씨처럼 돼야지 그랬습니다. 그런 심형래 씨를 지금은 ‘형래 형’이라고 부를 수 있어서 너무 좋습니다. 연예계는 2000년도에 KBS 15기 공채로 데뷔했습니다. 7년 정도 되었네요. 그전부터 개그맨이 꿈이니까 계속 준비를 많이 했습니다. 냉면집에서 일한 것은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옥동자’로 2003년 'KBS 연예대상 코미디부문 최우수상'을 받았는데 그 이후로 별다른 인기를 얻지 못하고 있다가 2006년 ‘마빡이’란 캐릭터로 'KBS 연예대상 코미디부문 최우수상'을 받으셨는데 그 간에 다소간의 슬럼프랄까 초조한 기간이 있지 않았나요? 혹 있었다면 어떻게 극복하셨는지요?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원래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개그맨이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개그맨이 되고 인기를 얻고 그렇게 되니까 교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무명시절이 없이 바로 잘됐으니까요. 너무 잘 나가니까 교만이 몸에 들어오고 주일 안 지키게 되고 교회가기 싫어지고 말씀듣기 싫어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한 번에 모든 걸 다 가져가시더라구요. 물질로나 유명세로나 부족함이 없었는데 일이 한 3, 4개월 전혀 안 들어왔습니다. 그렇게 되고 나니까 너무너무 불안해지고 초조해지더라구요.
내가 너무 불안해하니까 지금의 아내가(당시는 결혼 전) '그러면 교회에 가보자'고 하더군요. 아내는 교회도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그런 사람이 저더러 '교회 가자'고 하고 저는 '싫다' 고 해서 승강이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교회에 갔습니다. 교회에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렸는데 발이 떨어지지 않는 거예요. 못 들어 가겠더라구요. 아내가 막 잡아끌어 당겨서 겨우 한 발자국씩 한 발자국씩 발을 옮겼는데 올라가는 계단이 그렇게 길게 느껴질 수가 없었어요.
겨우 교회에 들어가서 정면에 십자가가 딱 보이는데 눈물이 마구 떨어지는 거예요. 엄청 울었습니다. 제가 막 우니까 옆에 있던 아내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 때 하나님 음성이 들렸습니다. '종철아, 너 왜 이제 왔냐? 고향에 오니 좋지?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니?'하시는 겁니다. 그 말씀에 더 많이 울었어요. 회개하고 그때부터 열심히 교회 다니고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열심히 하나님 전하러 다니고 그렇게 된 거에요. 그 일이 있은 뒤에 거짓말처럼 하나님께서 막 채워 주셨습니다. 그 동안 하나도 없던 일들이 갑자기 일이 막 들어오는 거예요.
높여 주시는 분도, 떨어뜨리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 모든 것이 있다. 하나님 뜻을 거스리면 안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제가 교회 가서 사역하는 것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바쁘지 않냐? 나중에 한가해지면 해라. 왜 바쁜 시간을 쪼개서 그러냐?'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워주셨을 때 하나님 일을 하는 것이 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채워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리려 열심히 노력합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흥행 실패해도 어린이 영화할 것
▲ 아내와 함께
-영화 ‘챔피언 마빡이’를 만들었고 영화를 위해 삭발까지 하였는데 특별히 어린이 영화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동기나 이유가 있으신지요?
사람들은 돈도 안 되는 어린이 영화를 왜 만드느냐?고 묻습니다. 사업이란 것은 수익성이 있어야 투자도 받고 일을 할 수가 있는데 어린이 영화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도 어린아이였을 때 어린이 영화 보면서 자랐는데 사람들이 꺼리지만 나라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단순히 아이들이 좋아하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챔피언 마빡이>에서는 ‘유기농 음식’에 대한 메시지를 넣었습니다. 그 영화를 보고 한 어린이가 '나 이제 피자 안 먹어!'라고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처음에는 재미만을 생각하고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이제 앞으로는 어린이 영화 속에 그런 메시지를 넣을 생각입니다.
-어릴 적 꿈이 목사였다는 말을 들었는데 언제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하셨습니까? 또 특별히 좋아하는 성경 말씀은 무엇인지요?
교회는 5살 때부터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여름성경학교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모두에게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이 달란트다’라는 말씀을 전하는 전도사님이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되고 싶단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달란트가 사람을 웃기는 것이어서 개그맨이 되었나 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 말씀은 시편 1편 ‘복있는 사람’이에요. 간증 집회에서도 많이 이야기합니다. 그 말씀을 저는 참 좋아합니다.
어머니 기도로 멈춘 망나니 짓
-5살 때부터 교회를 다녔다고 했는데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신앙생활에 방황은 없었습니까?
저는 어렸을 때 ‘집, 학교, 학교, 집’ 밖에 몰랐던 착한 아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올라가서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게 되고 함께 놀러 다니고 술도 먹어보고 담배도 피워보고 오토바이도 타고, 그러니까 어머니가 잔소리를 하게 되시고, 친구 탓을 하시고. 그런 어머니가 미웠지요. 내겐 좋은 친구인데…. 그때는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를 못했으니까 삐딱선을 탄 거지요.
그때 어머니께서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새벽기도도 시작하셨는데 지금까지 계속 열심히 하고 계시지요. 하루는 놀다가 밤늦게 집에 들어왔는데 어머니가 안 계셔서 찾아봤더니 안방에서 어머니가 '하나님, 우리 아들 종철이 붙잡아 주세요. 붙잡아 주세요' 반복해서 그 말만 하시면서 울며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망치로 ‘쾅’하고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머니를 붙잡고 '잘못했습니다'하고 함께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그 후로는 허튼 짓 안 해요.
- 바쁜 스케줄 속에서도 많은 간증집회에 참여하시고, 또 굿네이버스 홍보대사, 장애 어린이와 함께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출연 등 뜻있는 일을 많이 하고 계시는데 ‘신앙인 정종철’과 ‘개그맨 정종철’이 생활 속에서 어떻게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요?
목사님께서 ‘티내지 말라’고 하셨는데 너무 티내는 것 같네요. 저는 신앙인과 실제생활 사이에서 고민하고 싶지 않아요. 교회에서는 ‘권사님’ ‘집사님’하면서 세상 속에서 살 때는 사람들과 타협하고 그러고 싶지는 않아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을 살 때 오히려 간접적인 전도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말하기 뭐하지만 개그맨들이 저보고 ‘정목사’라고 불러요. 잔소리 많이 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정종철이 크리스천인 줄 아는데 제가 밖에서 허튼 짓 못하죠. 저도 사람이기에 실수할 수 있지요. 그래서 그렇지 않기를 위해 기도할 뿐입니다. 길가에 휴지를 버려도 사람들이 다 제가 크리스천인줄 아니까요.
잠언으로 자녀 양육
- 얼마 전에 득남을 하였는데 어떤 아빠가 되고 싶으신가요?
친구 같은 아빠, 잘 놀아주는 아빠가 되고 싶습니다. 자연 속에서 마음껏 놀리고 싶은데.. 그러다 꼴찌하면 마음이 안 좋겠지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겠지요. 지금은 잠언 말씀으로 키우고 있습니다. 태교도 잠언으로 했구요. 그래서 잠언은 거의 다 외웁니다.
▲ 정종철 집사와 아들 정시후
- 지난해에는 굶주린 아이들을 위해 사진전을 열기도 했고 모 사진동호회 사이트에서 선정한 국내 사진작가 40위 안에 들 정도로 쟁쟁한 실력을 갖고 계시는데 사진은 언제부터 시작하셨나요?
사진을 시작한 것은 한 10년 정도 되었습니다. 원래 기계 쪽에 관심이 많고 오디오, 카메라, 자동차 등 그런 것을 다루는 데 관심이 많습니다. 사진 관련 책도 곧 나올 예정입니다. 책보고 그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도록 아주 쉽게 되어 있습니다. 연예인들 사진을 예제로 사용했기 때문에 재미도 있을 겁니다.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일이나 하고 싶은 일은?
작년에 망했지만 ‘어린이 영화’ 계속 만들어야겠지요. 그건 저의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코미디, 버라이어티 쇼 등 방송 쪽의 일들로 좀 바쁠 것 같습니다. 올해의 경우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9, 10, 11월은 방송을 좀 자제하고 교회 일을 좀 많이 할 생각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받는 사례비를 따로 모으고 있습니다. 돈이 모아지면 나중에 수련원을 짓고 싶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작은 교회에 다녔는데 교회가 돈이 없어서 수련회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어려운 교회들이 무료로 수련회 장소로 사용할 수 있고 또 기도하는 장소로 쓰였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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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도 성폭행 혐의 정명석 씨 한국 송환
인천공항 개항 이래 최대 경찰병력 배치 … 검찰 곧 영장
전정희 gasuri48@amennews.com
여신도 강간, 준강제추행 등으로 지명수배가 내려지자 1999년 해외로 도피했던 기독교복음선교회(CGM) 설립자 정명석 씨(JMS, 64세)가 중국에서 체포돼 9년만인 2월 20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국내로 송환됐다.
99년 출국한 정씨는 대만, 홍콩, 일본 등지를 돌며 8년 동안 도피생활을 하다, 지난해 5월 성폭행 혐의로 중국 공안국에 체포됐었다. 정씨가 체포되자 한국 정부는 범죄인 인도 청구를 중국 정부에 요청했고, 중국 랴오닝(遼寧)성 고급인민법원은 같은 해 9월 28일 정씨의 신병을 한국에 인도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후 지난해 12월 베이징(北京) 최고인민법원과 국무원의 최종 승인에 따라 이날 정씨가 국내로 송환된 것이다.
정씨의 입국소식이 전해지자 공항 입국장에는 JMS신도 1천500여 명과 피해자 가족 등이 몰려와 정씨를 기다렸으나, 계류장을 통해 인천공항을 빠져나가도록 조치된 정씨를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다. 또, 경찰은 안티 JMS운동을 펼치는 엑소더스측(http://antijms.net)과 JMS신도들과의 충돌을 우려해 공항 개항 이래 가장 많은 경비병력 8개 중대, 7백여 명을 배치하는 등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으나, 다행히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한편, 정씨 관련 사건은 현재 서울중앙지검 형사4부(부장 정인창)에서 수사하고 있으며, 최근 피해자들을 불러 진술내용과 처벌의사를 다시 확인한 검찰은 곧 구속영장을 청구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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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단 둘이서 2년간 울 각오 했다”
장운철 목사의 개척교회 이야기
장운철 kofkings@amennews.com
오래 된 지인과의 만남은 언제나 즐겁다. 최근 한 후배와 만났다. 20여 년 전 같이 기도하고 찬양하고 울고 웃으며 청년의 시기를 같이 지냈던 그야말로 ‘형제’다. 지방에 사는 그에 대한 소식을 그동안 간간히 전해 듣고 있었다. 바로 그가 찾아왔다. 선배가 교회를 개척했다고 하니 겸사겸사 시간을 낸 모양이다.
“아, 그렇지. 맞아 맞아 그때 그랬어...”
시간이 20년 전으로 되돌아갔다. 여러 사람들의 이름과 사건들을 끄집어내며 당시의 기억 속으로 두 사람은 뛰어 들어갔다. 과거엔 그렇게 꼬였던 일들이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되돌아보니 별 문제들이 아니었다. 그게 세월의 힘인 모양이다.
“형, 어떻게 해서 교회를 개척하려고 했어요?”
그는 여전히 ‘형’이라고 필자를 불렀다. 그렇다. ‘형’이 좋다. ‘형’을 잃고, ‘친구’도 잃고 심지어 ‘남편’도 잃어버린 목사들이 주변에 많다. 그들은 자신의 모든 호칭이 ‘목사’이기를 원하고 있다. 가족들은 언제나 목사와 밥을 먹는다. 더욱 웃긴 것은 아내가 목사와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남편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개척교회 이야기를 다시 줄줄 읊기 시작했다. 그 동안 수 차례 말했던 이야기지만 그래도 질리지 않는다. 그 후배를 위해 다시 작년 이맘 때로 시간을 되돌렸다. 20년 전에서 작년까지 온 것이다.
▲ 은혜로 뭉친 성도들
“아내와 단 둘이서 2년간 울 각오를 했다”
교회를 개척하겠다고 뜻을 세운 후 곧바로 닥친 문제는 금전적인 것이었다. 어느 정도 자금이 있어야 예배 장소를 얻을 게 아니냐는 것이다. 굳이 누구의 의견을 듣지 않아도 그것은 ‘뻔~’한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내에게 처음 ‘개척’이야기를 했더니, 돌아오는 피드백은 ‘한숨’과 ‘금전문제’였다.
‘교회는 돈으로 세우는 것이 아니다’는 것이 필자가 세운 깃발이었다. 좋게 표현하면 믿음이었지만, 필자만의 ‘깡’이기도 했다. 아니, 그 논리는 다가오게 될 ‘돈 한 푼도 없이 어떻게 교회를 세우느냐’는 폭우를 피하게 하는 우산이었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는 ‘아내와 단 둘이서 2년간 울 각오’를 준비하고 있었다. 물론 아내가 동의해주면 말이다. 2년이란 기준은 가족을 위해서다. 10년, 20년 또는 그 이상으로 계속해서 굶어가며 아직도 개척교회를 섬기고 있는 목회자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일지 모르지만, 목회를 한다면서 가족을 굶기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도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내와 자녀들도 또 하나의 목회 대상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목회가 중단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한 교회의 목사로 적을 두고 있건 없건 복음을 전하고 양육하는 일은 변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기대했던 사람들
‘돈이 없으면, 사람은 있는가?’라는 게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돈 말고 사람에 초점을 맞추니 그나마 약간 희망이 있어 보였다. ‘그래도 이제껏 쌓아온 인격이 있는데...’라는 막연하지만 기대감이 없던 게 아니었다. 지난 해 4월, 교회 개척 7개월 전에 필자가 부친 상을 당했을 때, 보여준 지인들의 방문이 위로는 물론 큰 도전을 준 게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사람의 마음’에 자신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검증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개척 멤버로 기대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시작’하며 교회가 달려갈 때 처음부터 당연히 함께 뛰어갈 줄로 여겼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같이 교회의 문을 열어보자’고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런 요구조차 한 바가 없었다. “그렇다고 너무 기대하지 말아요. 사람의 마음은 그렇지 않을 수 있어요”라고 말하는 아내에게 “무슨 소리야, 사람이 왜 그런라며 오히려 면박을 주기까지 했었다. 물론 아내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은 필자와 같았다.
맘속에 품었던 위와 같은 ‘개척멤버’(?)는 다음과 같은 말과 행동을 필자의 마음에 심었다. 핸드폰 문자를 주고받을 때마다 ‘함께하겠다’, ‘나는 동역자다’ 등의 말을 수시로 남겼던 이가 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이지만, 특별히 이 친구에 대한 기대는 각별했다. 믿음이었다. 또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필자를 찾아와 고민을 털어놓고 대화하고 함께 기도했던 이들도 있다. ‘목사님께 계속 지도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등의 말을 해왔다. 이렇게 저렇게도 해석될 수 있는 말들이긴 하지만, 필자의 마음판에는 소중하게 기록되고 말았다. 항상 친동생처럼 여겼던 이도 있다. 개척 결정을 한 후, 아내를 제외하고 제일 처음 그 뜻을 전달했던 이다. 당연히 함께할 줄 알았기 때문에 아내와 함께 값비싼 식사도 대접해가며 계획을 설명한 바 있다.
신앙이 좋은 청년도 있었다. 목회자라고 불러도 될만큼 신실한 이다. 만약 그가 함께한다면 천군만마를 얻는 것과 같을 것으로 생각하고 적지 않은 기대를 갖기도 했다. 그 때문에 그에게는 필자가 직접 지원 요청을 하기도 했다. 80-90%에 해당하는 긍정적인 대답을 받았다. 아무리 깎아도 60%이상을 되리라고 확신했다. 필자의 입으로 ‘부탁’을 한 경우는 두 번 더 있다. 너무 소극적인 자세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두 3명에게 도움의 손길을 직접 내민 것이다. 물론 모두 ‘yes’라는 대답이 나오기를 기대한 곳을 향해서 말이다.
‘오! 드디어 개척하는 군요. 제가 돕겠습니다’, ‘당연하죠. 뭐든지 시키세요’ 등의 반응을 기대했었다. 확신도 있었고, 믿음도 있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어쩌면 모두 다 그렇게 한결같이 침묵을 보이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나의 인간관계가 이것뿐인갗, ‘이런 게 인생인갗 등의 여러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기도하겠습니다’라는 대답은 이제 더 이상 위로가 아니다. 화가 난다.
한 동안 20여 명의 동역자를 머릿속에 품으며 즐거워했었다. 기대했던 이들의 전체 인원수가 그러했다. 그러나 모든 게 ‘나만의 착각’으로 끝나고 말았다.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들
문을 열기 한 달 전 아내와 함께 매일 저녁 8시부터 1시간 동안 ‘준비 기도회’ 시간을 갖은 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적지 않은 도움이 됐다. 불필요한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한 맘으로 ‘오픈’을 준비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준비 기도회 시간에 이런 저런 지인들이 찾아와 같이 개척을 위해 기도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아내와 단 둘이 기도회 시간을 가졌다. 기도하면서 아내는 눈물을 자주 흘렸다. 감사하기도 하고 솔직히 걱정도 된다는 게 그의 말이었다. 필자도 사실 그랬다. 20여 명의 든든한 지원군을 머릿속에 그리고는 있었지만, ‘2년간 아내와 단 둘이 눈물 흘릴 각오’도 그때 했다.
하나님의 손길은 언제나 은혜다. 하나님께서는 필자가 기대했던 이들이 아닌 개척멤버를 따로 준비시켜 놓으셨다. 지금 같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을 향해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미안하기도 하지만, 당시 필자의 마음은 그러했다. 이전 아내를 통해 그들이 약간의 뜻을 보내왔을 때, 필자는 오히려 ‘기대하지 마라. 또 요구의 손짓도 하지 마라’고 주의를 주었다. 일부러 기대하지 않으려고 했고 또 그렇게 마음을 먹고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위의 기대했던 이들이 필자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불편함을 감수하고 동참했다.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인도하셨다.
어느 날 한 청년이 찾아왔다. ‘선교’의 길을 걸어가려고 하는데 필자에게 자신의 인생길을 안내해 주는 ‘멘토’가 되어 달라는 것이었다. 주변에 선배들이 많이 있지만 그는 필자를 찾아온 것이다. 무엇인가 이미 마음에 작정을 한 듯했다.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그는 집이 멀리 떨어져 있고 더욱이 그 동안 깊이 있게 교제를 나눈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몇 가지 강도 있는 다짐을 요구했다. 조금이라도 부담스러워하면 되돌려 보낼 생각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의 적극성은 변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YES’라고 대답했다. 그가 지금은 필자의 가장 큰 동역자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식구들에게도 감사하다. 특히 ‘난 무조건 동참할거야’라며 말한 그대로 적극적으로 뛰어들은 처제가 고마웠다. 예전 지인 중에 그와 같은 처제를 둔 이를 매우 부러워 한 적이 있었다. ‘나에게도 그럴까’하는 생각이 있었는데 그 의문은 기우에 불과했다. 또한 장모님과 처형 가족의 동참도 큰 힘이 되었다.
외곽지원군도 생겼다. 교회에 필요한 문서들을 언제든지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고, 또 가장 필요할 때 시간을 내어 사진촬영을 해준 이도 있다. ‘언제든지 부탁하세요’라는 그의 말에 고마움을 넘어 미안할 뿐이다. 레크레이션 인도로 동참해 준 이도 있다. 자신의 주머니까지 털어가며 힘을 쏟았다. 그 덕에 일일수련회 등을 통한 교인 연합에 큰 도움이 되었다. 얼마 전 방문한 후배는 동참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면서 헌금을 하고 갔다. 또 이런저런 감사한 마음으로 헌금을 한 이들이 적지 않다. 함께한다는 기쁨이 과연 이런 것임을 발견했다.
교회의 문을 연지 4개월째다. 주일예배 출석인원이 평균 20명을 웃돈다. 처음 기대했던 사람들의 수보다도 많다. 아무리 생각해도 ‘할렐루야’라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 하나님은 필자의 생각대로가 아닌 하나님 자신의 계획대로 개척교회를 인도하신다. 그렇다고 필자의 기대와 꿈을 짓밟지도 않으신다. 정말 오묘하다.
설립예배는 이웃과 함께
‘사람들’에 대한 마음을 한 번 정리하려고 한다. 아직도 사실 여운이 남아 있는 기대했던 사람들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으려고 하는 것이다. 진작 그렇게 했어야 했는데 말이다. 더 이상 그들을 향한 마음은 지금의 성도들에 대한 배려가 아니다. 이제 만나교회는 이렇게 출발하는 것이다. 아니 벌써 출발해서 달리고 있다.
설립예배를 그 계기로 삼으려고 한다. 이번 2월 말에 가지려는 이유도 그래서다. 공식적으로 선을 그으려는 의도다. 처음에는 1년 뒤, 1주년 겸 설립예배를 가지려고 했다. 교회가 여러모로 안정된 후에 행사를 치르려고 했다. ‘샴페인만 터뜨리는 식’ 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물론 함께하는 성도들의 마음도 공식적으로 정리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교회의 설립은 그 지역의 기쁨이 되어야 한다는 게 또 하나의 지론이다. 요즘처럼 교회가 ‘욕’먹고 있는 때도 없을 것이다. 교회의 부정직한 모습이 연일 언론의 도마 위에 오르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바라보는 교회의 모습이 진실이건 아니건 차치하고, 오늘의 교회 이미지 중 부정적인 면이 점점 더 많아지는 형국이다. 한 지인은 필자의 개척교회 소식을 듣더니 무조건 박수를 보내겠다고 했다. 그는 요즘 교회를 개척하면 대부분 망한다고 단언하는 이다. 그에게는 그렇게 ‘뻔-’한 길인데 사명을 붙잡고 뛰어가는 필자의 모습이 놀랍기도 하고 또 다른 한 편으로는 부럽기도 한 모양이다. 그를 실제로 그렇다고 했다.
그래서 설립예배 때 지역 주민들을 가능한 대로 초청하려고 한다. 같이 떡을 떼고 웃고 친해지는 기회로 삼고자 하려는 것이다.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교회의 기본적인 역할이지 않을까? 복음 전파를 목적으로 삼지만 최소한 교회의 선한 이미지만이라도 더 이상 추락시켜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아내가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필자의 뜻을 따라 2년 동안 굶을 생각하고 따르겠지만 그 후에도 상황이 변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만큼 열심히 해 보겠다는 각오의 표현이었는데 아내는 내심 걱정도 됐던 모양이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가족을 위해서 직장엘 가야지”라고 대답했다. 혹자는 ‘목회자는 죽어도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것을 먹고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까마귀(후원자)를 무작정 기다리며 살아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가 된다. 그렇다면 동의할 수 없다. 필자는 직장 속에서 땀을 흘려 먹는 것이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때의 직장도 또 하나의 목회지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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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에 나타난 교회 지도자들의 실수
한복협 세미나…"구약의 모든 선지자들 정치권력에 비판적"
전정희 gasuri48@amennews.com
“위대한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사람이었고 훌륭한 일들을 하였다. 그러나 그들도 인간이었고 ‘그 시대’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벗어나지 못한 편견과 한계가 있었다. 이들도 자신도 모르게 실수를 한 것이다”(김영한·한복협신학위원장).
한국정치사에서 기독교의 장로가 대통령이 되기는 이번이 세 번째. 과거 이승만, 김영삼 장로의 정부 시절 한국은 어떤 정신적 변화가 생겨났는가? 그리고 그것은 비슷한 과정이 생길 수도 있는 오늘날에 어떤 교훈을 줄 것인가? 격랑을 헤치고 역사를 바꾸는 일을 위해 기독교 지도자들이 해야 할 일은 과연 무엇인가?
한국복음주의협의회(한복협, 회장 김명혁 목사)가 2월 15일 새문안교회(이수영 목사)에서 개최한 월례기도회 및 세미나 ‘교회사에 나타난 교회 지도자들이 범한 실수’는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세미나에서는 박종화(경동교회) 목사가 중세기독교 지도자들이 범한 실수를, 김영한(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장) 교수가 유럽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범한 실수를, 그리고 이만열(숙명여대 명예교수) 박사가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범한 실수를 각각 발표했다. 참석자들은 과거를 교훈삼아 한국 교회 지도자들이 새롭게 출범하는 이명박 정부와 거리를 두면서 비판적으로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옳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첫 번째 발제자로 나선 박종화 목사는 “중세시대나 종교개혁 이후의 유럽교회는 공히 ‘현실도피’와 ‘현실안주’라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로마제국의 기독교 국교화 이후 교회의 정치적 힘과 재력은 강화됐으나 오히려 영적인 힘은 저하되었던 현상이 종교개혁 이후에도 변형된 형태로나마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박 목사는 “과거나 지금이나 똑같다”며 “교회가 사회나 국가 체제의 모든 것을 정당화해주고 복 빌어주는 시민종교로 전락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목사는 그 예로 국교시절의 어거스틴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의로운 전쟁론’을 소개하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국가의 세계지배 전쟁의 핵심논리에 이 ‘의로운 전쟁론’이 악용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독일과 유럽교회 지도자들의 실수를 맡은 김영한 교수는 “루터나 칼빈도 인간이었고 그 시대의 사회적 문화적 제약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편견과 아집과 잘못을 범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루터가 △1524년 독일 농민전쟁에서 권력자의 편에 섰던 점 △지나친 반유대교사상으로 유대인과의 교제도 금지한 점 △교황주의를 적그리스도로 간주한 점 등을 그의 과오로 지적했다.
김 교수는 “그 결과 루터는 자신을 신뢰하고 따랐던 농민들로부터 ‘군주들의 아첨꾼’이란 비아냥을 들어야 했으며, 반유대교사상으로 인해 ‘히틀러의 아버지’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또한 칼빈을 ‘개신교의 교황’이라 부르며 예정론을 반대했던 스페인 출신 세르베투스가 처형된 것과 관련해 “칼빈이 그를 ‘미친개’라고 칭하면서 정치적 적대자처럼 처형에 동의한 것은 그의 실수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 교수는 “한국 교회가 이번 세 번째 장로 대통령의 기회를 단지 교회의 영향력 증대의 기회로만 여기고 정치권에 줄서기를 시도한다면 엄청난 과오를 범하게 되는 것”이라며 “비판적인 명철과 소신을 갖고 대통령에게 바른 방향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한국 교회 지도자들의 실수를 발표한 이만열 박사는 한국 교회가 정치에 개입한 사례들을 열거하며 “기독교가 해방 직후부터 반공이데올로기에 편승해서 지속적으로 사회 보수층의 입장을 대변해 왔다”고 분석했다.
이 박사는 “교계 지도자들이 주도해 만든 정당에 기독교사회민주당, 기독교자유당, 조선민주당(이상 북한), 사회민주당, 그리스도교연맹, 기독교민주동맹(이상 남한)이 있었다”고 밝히고 “교회지도자들이 공개적으로 편들어준 결과 그 불의한 정권은 때때로 위기를 극복하고 인권과 민주화 운동, 산업 선교마저 용공적인 것으로 매도 할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이 박사는 과거 국가조찬기도회를 예로 들어 “80년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롯데호텔에서 나라를 위한 조찬기도회가 열렸는데, 그 자리는 전두환 장로를 축복해 주는 자리였다”고 꼬집었다. 다시 말해 독재정권의 출현에 협조하며 가장먼저 앞장서서 지지하고 옹호한 종교가 바로 기독교였다는 설명이다. 그러면서 이 박사는 “기독교가 정부를 비판할 때는 ‘정교분리’를 외치다가도 조찬기도회에서 박수칠 때에는 ‘정교분리’를 말 안하는 이중적 태도를 취해왔다”고 비판했다.
이 박사는 또 2007년 12월 대선과 관련해서도 교계가 앞장서서 이명박 장로를 지지해 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경고를 받았던 사례를 조목조목 따지며 비판했다. 이 박사는 그 중 한 목회자를 예로 들어 “그는 아예 선거운동원이었다”고 소개했다. 이런 현상과 설교를 보다 못한 참석자 중 한사람이 “목사나 잘해라 이놈들아”라고 비난하고 자리를 박차고 떠났다는 일화도 언급했다. 그러면서 이 박사는 “우리 목사님들이 언론의 자유가 없을 때는 왜 침묵하고 있다가 일반시민들에 의해 언론의 자유가 주어진 다음에 왜 떠들어 대는지 안타깝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이 박사는 결론적으로 “기독교 지성인들이 항상 교회와 권력의 긴장을 요구해야 사회도 발전한다”며 “후보가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지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성속(聖俗) 구별의식을 강조했다. 이만열 교수는 이 자리에서 미국처럼 정치에 참여해 목회를 하지 않는 목사와 목회하는 목사를 구분해서 부르는 호칭을 만들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세 발제자의 발표에 대한 응답으로 응답에 나선 손봉호(숙명여대 명예교수) 교수는 “교회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면서 “그동안 한국 교회가 이명박 장로를 지지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오늘부터 기독교는 비판적인 자세로 돌아서야 한다”고 말했다.
손 교수는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은 정치권력에 비판적이었다”며 “그 힘을 이용해 덕을 보고 아첨하는 것은 교회도 죽이고 그분도 죽이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어 손 교수는 “정치권력은 감시와 비판이 없으면 반드시 부패한다”면서 “한국 교회는 교인들이 비판적인 시민운동을 통해 정치를 감시하도록 하고 교회는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발언을 정리했다.
세미나 후에 김명혁 목사(한복협 회장)는 3월에는 ‘생태계의 위기와 한국교회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월례회를 준비하고 있고, 4월에는 아시아(인도, 태국, 필리핀 등) 교회 지도자를 초청해 한국 교회의 해외선교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가질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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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만드셨는가
성경은 하나님은 과거나 현재의 일들 뿐만 아니라, 미래의 일들까지도 모르는 것이 없이 다 알고 계시는 전지전능(全知全能)한 분이시라고 말한다(롬 11:33). 그러기에 사람이 아무도 모르게 자기 혼자 마음 속 깊은 곳에 품었던 생각까지도 하나님 앞에서는 조금도 숨길 수 없게 된다고 한다(왕상 8:39, 시 139:1~4). 하나님이 전지하신 분이시라면,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려고 하셨을 때 사람의 불완전함과 연약함도 아셨을 것이다. 그리고 장차 사람이 선악과를 따먹게 될 것이라는 것도 아셨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차라리 선악과를 만들지 말았어야 하든지, 아니면 선악과를 따먹는 실수를 범하지 말도록 조치를 하셨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기 쉽다.
이제 그 선악과는 무엇이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만드셨는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1. 선악과는 실제로 존재 했는가
성경에는 선악과라는 명칭이 등장하지 않는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창 2:17),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창 3:3), “그 실과”(창 3:6), “그 나무 실과”(창 3:11, 12, 17)라는 말들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그 나무의 실과를 흔히 선악과라고 불러왔다.
선악과에 관한 이야기는 창세기 2장, 3장에 등장한다. 그런데 그 안에는 하와를 유혹하는 뱀의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오늘날의 자연 현상이나 구체적인 증거를 우선으로 한 과학적 판단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로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어떻게 뱀이 간교한 생각을 가질 수가 있으며, 사람과 말을 할 수가 있는가. 그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선악과 이야기가 고대의 신화나 설화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다음 사실들을 고려해보면, 선악과는 실제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온 인류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부패가 만연해 있는 역사적 현실 속에 살고 있다(롬 3:10~18). 그런데 성경은 그 원인을 아담과 하와의 타락,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결과로 설명한다(롬 5:16~18). 그러므로 우리의 부패한 현실이 사실이라면 그 원인이 되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도 사실이어야 하고, 그 사실 속에 한 부분으로 등장하는 선악과도 당연히 실제 존재로 받아들여야 한다. 또 성경은 아담의 죄가 후손에게 전가되는 것과 그리스도의 의가 믿는 자에게 전가되는 것을 동일한 원리로 설명한다(롬 5:18, 19). 우리가 경험하는 것처럼 믿는 자 안에서는 그리스도 의가 역사적인 현실로 전가되고 있다. 그러므로 의의 전가와 대비되는 죄의 전가 역시 실제 사실이었음을 보여준다고 여겨야 한다. 사도 바울께서는 성도들 안에서 실제로 이루어지는 타락을 경계할 때, 하와의 선악과 범죄를 들어 설명했다(고후 11:3). 이 설명은 선악과가 실제로 있었음을 전제해야만 가능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이 땅에서 사탄의 시험을 받으셨던 사실 또한 선악과 범죄가 실제 사건이었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사례이다.
하나님께서는 필요에 따라서 하시려고 하시기만 하면 나귀가 말을 하게 하거나(민 22:28), 돼지 떼를 물에 빠지도록 하는(마 8:32) 등.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을 얼마든지 현실적으로 일어나게 하실 수 있다. 마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마귀는 영원히 무저갱에 갇히기 전까지 그 활동과 능력의 활용을 허용받고 있기 때문에, 애굽의 술객들이나 거라사 땅의 귀신들렸던 사람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일상적 이해를 뛰어넘는 일을 생겨나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뱀이 사람을 유혹하고 말을 하는 일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2. 선악과는 어떤 과일이었는가
선악과가 실제로 있었다면, 그것은 어떤 모양이었을까. 지금의 대추야자나 사과의 모양이었을까. 성경에는 선악과가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러웠다고 했다(창 3:6). 그러나 그 이상은 아무런 언급이 없어, 우리로서는 그 모양이 지금의 어떤 과일과 같았을런지에 대해 전혀 알 수가 없다.
뱀은 하와를 유혹하기를,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될 것이라고 했고(창 3:5),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정말 눈이 밝아져 자기의 벗은 것을 알게 되었다(창 3:7). 그렇다면 선악과 속에는 사람의 눈을 밝혀주는 특별한 효과를 가진 신기한 물질이 들어 있었을까.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들은 선하신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므로 다 선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과일이든 가릴 것 없이 감사함으로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과일이 존재론적으로 선함을 의미하는 것이지, 도덕적, 영적인 의미에서 선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존재론적 의미의 선·악과 도덕적, 영적 의미의 선·악에는 분명한 구별이 있다. 선악과를 먹음으로 알게 된 선과 악은 도덕적이고 영적인 영역에 속하는 문제이다. 따라서 우리는 선악과 속에 도덕적, 영적 의미의 선과 악을 알게 만들어주는 신기한 약효의 존재가 들어 있었다고 하는 무리한 생각을 가질 필요가 없다.
이것은 같은 에덴동산에 있었던 생명나무의 경우와도 같다. 생명나무의 실과는 사람의 영적 생명을 살게 할 만한 신기한 약효가 들어있었기에 생명나무이었던 것이 아니다. 영적 생명은 어떤 실과를 먹는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얻어진다(엡 2:8,9). 생명나무의 실과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될 영생의 언약을 표하고 인쳐 주는 과실이었다. 그래서 그 나무가 생명나무라고 불렸다. 선악과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 과실 속에 어떤 신기한 약효가 있어서가 아니라, 사람에게 도덕적이고 영적인 의미의 선과 악이 무엇인지를 알게 할 만한 하나님의 특별한 언약의 인침이 있었기 때문에 선악과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보자. 선악과는 그것을 먹었을 때, 즉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겼을 때, 그 행위가 바로 악이고 언약을 지키는 것은 선이었음을 확인시켜 주는 실과, 또는 장차 사람에게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알게 해 줄 역할을 하게 될 언약적 증거가 되는 실과이었기에 선악과로 불렸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악과를 생각할 때, 그 속에 어떤 특별한 약효가 들어 있었는지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아와 맺어주셨던 하나님의 언약에 모든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
3. 선악과는 왜 만들었는가
선악과가 하나님의 언약을 표하는 증거이었다는 사실 속에는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셨던 이유가 잘 드러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악과를 만드신 이유에 앞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이유를 먼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기 위하여 사람을 만드셨다(사 43:7, 60:21). 그리고 다른 어떤 피조물들보다도 우월한 위치에서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 사람에게는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 즉 인격성을 더하여 주셨다(창 1:26,27). 이 인격은 지·정·의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자유의지를 포함한다. 따라서 사람은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자신의 자유로운 판단과 선택에 따라 행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을 찾아 오셔서 선악과를 증거의 표로 삼아 언약을 맺으셨다(히 옛 언약). 이 언약은 사람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찾아 오셔서 맺으셨던 참으로 은혜로운 성격의 언약이었다. 그러므로 선악과는 하나님의 은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웅장하고 섬세하게 연주된 음반을 통해 많은 감동을 받는다. 그러나 어린 자녀가 처음 배운 노래를, 비록 서툴지만 잘 연습을 하여 부모에게 선물할 때에는 완벽에 가까운 연주 음반을 감상할 때보다도 더 큰 감동을 부모들이 받는다. 어떤 부모들은 그것을 즐기기 위해서 아이들에게 노래를 강요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아이가 스스로의 생각으로 부모를 즐겁게 하기 위해 정성을 기울인다면 부모는 훨씬 더 큰 행복감과 보람을 느낀다. 그리고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칭찬과 상을 아끼려 하지 않는다. 자발적인(자유의지에 따른) 행동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신 이유도 사람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켜 순종을 함으로 하나님께 최상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이었다. 동시에 언약을 지킴으로 영생을 상급으로 받게 하기 위함이었다.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는 말씀 속에는 당연히 ‘먹지 않으면 살리라’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순종하면 ‘산다’는 의미에서의 ‘산다’는 것은 육체적 생명이 아니라 그보다는 한 차원 높은 의미의 생명, 즉 영원한 생명이 주어질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아담은 언약이 주어지던 당시에도 육체적인 생명을 가지고 있었음으로 단지 육체적 생명으로만 사는 것은 언약에 대한 상급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선악과는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실수케 하려고 만든 부당한 도구이었거나, 사람의 실수를 예상치 못하고 만든 실패작이 아니다. 선악과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창조의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도구, 그리고 언약을 지킨 사람에게 영원한 상급을 주시기 위한 선한 도구로 만드신 실과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의도와는 달리 그 실과를 먹음으로 언약을 파기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문제는 선을 위한 도구로 선악과를 만드신 하나님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잘못 사용한 사람에게 있었다.
지금도 이러한 현상은 우리 주변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다. 요셉의 형들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악행까지도 때론 묵인하시고 그것을 이용하여 선을 이루려 하시지만(창 45:8,9), 사람은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의 뒤에 남겨졌던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처럼(출 32장), 하나님의 선하심과 오래 참으심마저도 악용을 하여 범죄의 계기를 삼으려 드는 일이 허다하지 않은가.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를 가리켜서,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면서 동시에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말씀했다(고전 1:18). 동일한 하나의 십자가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가에 따라서는 전혀 다른 결과가 생겨나게 함을 가르쳐주는 말씀이다. 선악과의 경우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의 편에서 선악과를 이해하게 되면, 하나님의 능력을 찬송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으로 오해를 하거나 믿음에 방해를 받게 된다면, 선악과는 단지 거추장스럽고 미련스럽게 보이는 방해물에 불과하게 여겨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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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들이 한국 어린이 잡아 먹는다"
초기 선교사역에 큰 상처 준 영아 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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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 / 고신대학교 역사신학, 신학박사
1888년 6월 10일경부터 서울 장안에는 괴이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 소문은 이러했다. 서양 선교사들이 한국인 어린 아이를 몰래 데려다가 삶아 먹기도 하고, 간은 약으로 쓰고, 눈알을 사진 자료로 쓴다는 것이었다. 이 허황된 소문은 외국 공관과 함께 서양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정동, 연짓골 등지를 시원으로 서울 거리에 유포되기 시작했다.
이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면서 확대 재생산되기 시작했다. 어린아이를 납치해 간다느니, 아이의 간을 항아리에 담아 보관하고 약용으로 사용한다느니, 심지에는 아이들을 잡아다가 외국의 노예로 팔아먹는다는 등 소문도 다양했다. 이런 유언비어는 순식간에 한국인과 서양인들 간의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었다.
부모들은 아이들을 단속하기 시작했고, 서양 선교사들을 의심의 눈으로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때는 첫 거주선교사인 알렌이 입국한 지 4년이 지났을 때였고, 서울 장안에는 병원이 설립되고 학교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알렌의 제중원도 있었고, 감리교선교사들이 설립한 시(施)병원도 있었고, 여성과 어린이들을 위한 보구여관(報救女館)도 있었다. 학교로는 이화학당, 배제, 경신 등이 이미 설립되어 있었고 고아들을 위한 사역도 진행되고 있었다.
▲ 미국인 선교의사 호레이스 알렌이 한국 최초의 서양의학 병원 광혜원(廣惠院)을 세운 게 1885년이다. 광혜원은 1885년 4월 10일 설립되었고 4월 23일 그 이름을 제중원(濟衆院)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뉴세브란스로 그 이름이 바뀌어 연세대 옆에 현대식 병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런 기관들을 통해 한국인들과의 접촉이 시작되고 한국인들에게 새로운 변화를 재촉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유언비어는 선교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을 뿐 아니라, 선교사들의 선한 사역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병원에 갔다가는 병을 고치기는커녕 무슨 일을 당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학교에 잘못 보내면 자식을 잃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하고 부모들은 아예 자식을 선교사들의 학교에 보내려고 하지 않았다. 이렇게 시작된 서울 장안의 소동을 흔히 영아 소동(Baby riots)이라고 부른다. 이 소동이 아이들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이었다.
이 소동이 일어난 기간을 약 보름 정도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게 싶게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 후에도 서양인이 지나가면 어머니는 어린아이를 치마폭에 숨기는 일이 있었다는 기록은 아마도 이 영아소동의 여진이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계속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든 영아소동은 서양인들에게는 위협적인 것이었다. 이미 한국에서 일하고 있던 천주교 선교사들에게도 동일한 위협이었다.
외교관들이나 선교사들은 신변의 안전을 걱정하게 되었고, 미국과 프랑스는 자국 군대를 동원하여 신변 보호에 나서기도 했다. 러시아는 제물포에 주둔하고 있던 해군 함정 병력을 서울로 급파하여 공사관을 경비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혈사태를 막지는 못했다.
첫 표적은 이화학당이었다. 여성교육에 대한 몰이해도 부가적 이유였다. 성난 군중들은 이화학당에 난입하는 과정에서 이를 막고자 했던 경비원이 피살되기도 했다. 성난 군중들은 정동 일대의 외국인 기관이나 거리에서 행진하며 폭력을 행사했다. 한국정부는 이 유언비어는 허무맹랑한 거짓임을 확신하고 신속한 대처를 시도하지만 군중들의 마음을 다스리지는 못했다. 한국정부는 포고문을 발표하고, 이런 헛 소문을 유포하거나 발설한 자에 대해서는 내외국인을 무론하고 엄중히 다스릴 것임을 천명했다.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영국, 그리고 일본 공사는 포고문에는 일부 외국인을 의심하는 듯한 표현이 있다며 항의하기도 했다. 유려했던 외국인에 대한 폭력적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고, 점차 이 소동이 수그러졌지만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외국인 선교사들에 대한 의심을 심어준 것은 선교에 영향을 준 아픈 상처였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허무맹랑한 유언비어가 일어나게 되었을까? 로버트 네프(Robert Neff)는 두 가지로 해석하고 있다. 첫째는 한국에 소개된 사진이 가져온 오해였다고 한다. 한국인이 사진(寫眞)을 처음 대하게 된 것은 1863년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 중국에 있던 두 한국인 외교관리가 처음 사진을 찍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한국이 개항한 이래 사진이 한국에도 소개되기 시작하는데, 서울에 첫 사진관이 세워졌을 때는 1883년이었다. 곧 여러 사진관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유교적 관습에 젖어 있던 조선 사람들은 이 사진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사진이 찍혀 나온다는 것은 사진기에 눈이 있어야 하는데 그 눈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아마도 어린아이의 눈을 빼다가 사진을 찍는 도구로 사용하지 않는가라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런 의심의 발단이 된 것은 서울의 미공사관 서기였던 챠일스-롱(Challes-Long)이 서울에서 찍은 한국인 어린 아이의 사진 필름(photograph negatives)을 도둑맞는 일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이 사진에 찍혀 있던 아이가 발견되었는데, 처참하게 죽어 있었고 팔 다리가 떨어져 나가 있었다. 또 다른 아이도 동일한 상태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사실 이 어린아이 피살사건 자체도 그 사실 여부가 분명치 않다. 그러나 이런 소문이 회자되기 시작했다. 즉 외국인들이 아이들을 데려다가 삶아서 죽이고 눈을 빼어 사진 찍은 도구나 약으로 사용한다는 소문이었다.
다른 한 가지는 서양인들이 마시는 우유였다. 서양인들이 조선에서 젖소를 키우지도 않는데 매일 우유를 마시는 것을 보면 필경 사연이 있다고 보았다. 당시 한국인들은 분유(canned milk)를 알지 못했다. 선교사들이 한국의 여인들을 납치해서 가슴을 도려내고 거기서 우유를 채취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소문과 함께 한국 아이를 삶아 먹는 다는 소문으로 발전했고, 심지어는 언더우드(Underwood)의 고아원의 아이들이 다른 목적으로 이용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당시 와싱톤 주제 한국 공사관 서기로 일했던 알렌(H. Allen)은 “어떤 한국인 아버지가 그의 아이를 죽여서 이용하도록 일본인에게 팔아넘기는” 것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소동을 일으킨 것이라는 보고서를 보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언더우드의 고아원의 아이들을 데려다가 종들과 성적인 일(男色)을 하게 한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그래서 알렌은 후일 이런 불필요한 소문을 막기 위해서라도 선교사들은 내한하기 전에 결혼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대수롭지 않는 일이었으나 유언비어는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갖가지 추측이 난무하면서 그것이 진실인양 전파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서양인들이 아이를 헤치거나 삶아먹거나 약용으로 사용한다는 등의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는 고종의 포고문으로 소동은 일단락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허황된 이야기가 진실인양 격한 소동을 불러 일으켰을까?
여기에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챠일스-롱은 고종의 아버지 대원군이 그 배후라고 지목한다. 실제로 어린아이를 살해하고, 사지를 절단하여 문제를 야기한 것이 대원군이라고 했다. 이렇게 함으로서 서구인들에 대한 미움을 야기하여 사회를 불안하게 하여 고종을 몰아내기 위한 술책이었다고 주장한다. 당시 주한 청국공사관(Yuan Shih-kai)이 고종의 통치를 불안하게 하기 위해 한국인과 중국인을 채용하여 서양인들이 어린아이를 죽인다는 소문을 퍼트렸다고 주장한다.
그런가 하면 당시 보수 세력이 외세와 모의하여 한국의 문호개방을 적극적으로 주도하던 개화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헛소문을 유포시킨 계획적인 음모라고 보기도 한다. 그 전례를 중국의 경우에서 찾기도 했다. 또 한 가지 해석은 언더우드 부인의 의견인데, 이 당시 실제로 어린이 유괴사건이 있었고, 그 배후에는 한국인들이 서양인들과 가까워지고, 그 결과 개화되는 것을 막고자 했던 일본인들의 음모가 있었다고 말한다.
종합적으로 관찰해 보건데, 보수 세력이 개화 세력을 견제하고, 한국인과 서양인들을 이간시키기 위한 모략이었을 것이다. 쇄국의 빗장을 열고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일하기 시작한 첫 10년은 시련과 도전의 날들이었음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