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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2007-11-02 10:34:28 read : 6553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박일민 교수(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장·조직신학)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라고 기도하셨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삶의 모습이다. 성도들은 누구나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고 있다. 또 일단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판단을 내렸을 때는, 모든 노력을 체념하고 거기에만 집착하고 매달리는 경우도 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해서 살펴보자.
1. “하나님의 뜻”의 의미
하나님의 뜻이란, 하나님이 마음이나 생각을 높여 부르는 말로, 특히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의미한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주의 뜻”,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원”이라고도 불렸다.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지음을 받아서 존재하고 움직인다(계 4:11). 사람의 생명과 땅의 경계(행 17:26,28), 국가의 흥망성쇄, 동식물의 생명 등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에 따라 움직인다. 하나님의 뜻이 없으면, 키가 한자도 자라지 못하고,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마 10:29). 이처럼 하나님의 뜻은 크고 넓기 때문에, 사람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다 헤아릴 수가 없다.
한편, 하나님의 뜻은 영원 전부터 정해져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은 그 무엇에 의해서도 변경되지 않는다. 성경에는 모세의 기도로 “하나님께서 그 뜻을 돌이키셨다”(출 32:14)는 말씀이 있다. 하지만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실제로 뜻을 바꾸셨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 편에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성경에는 이러한 표현들이 많다.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해가 떠서 지는 것이 아니다. 해는 가만히 있고 지구가 돌뿐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눈에 보이는 형체가 없는 분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눈동자와 발등상을 말한다. 모두가 하나님을 사람 편에서 이해하기 쉽도록 표현한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신인동성동형적(神人同性同形的) 표현 방법이라고 부른다.
2.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방법
우리는 다음의 방법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1) 계시, 특히 성경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알게 해주시면, 즉 계시를 해주시면, 그 계시의 범위 안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현상, 역사(歷史), 사람의 육체적 정신적 구조와 같은 일반계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심을 알게 하신다. 그러나 일반계시만으로는 사람들이 구원에 관한 진리를 알 수 없기 때문에, 특별계시를 통해서 구속주이신 하나님, 구원을 받는 방법, 구원받은 사람이 해야 할 일 등을 알게 해주신다. 그리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특별계시는 성경으로 기록을 해놓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경의 안내를 받는 것이다.(롬 2:18)
하지만 우리의 관심은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가, 어떤 배우자를 선택해야 할 것인가, 어느 지방으로 이사를 가야 할 것인가 하는 등에 관한 하나님의 뜻에 더 많이 쏠려 있다. 성경에 각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까지 다 밝혀져 있지는 않다. 이것은 성경에서 알려주신 기본적인 하나님의 뜻을 알아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표를 가지고 성경이 말씀하는 선한 방법에 따라서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을 때는 다음 몇 가지 방법들을 더 고려해 보는 것이 좋다.
2) 기도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은 주로 기도를 통해 알려진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하고 찾고 두드릴 것을 가르치셨다(마 7:7).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는 기도의 응답은 연관된 성경말씀을 읽고 듣는 중에 깨달아지는 형식으로 나타나거나, 구체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거나, 마음속에 느껴지는 감동 등으로 주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는 모든 응답이 기이한 현상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고, 무당들에게서나 보는 것 같은 건전치 못한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을 해야 한다.
3) 강한 의욕과 기쁨
사람을 인격체로 만드신 인격적인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인격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할 때, 그 사람에게서 강한 의욕을 불러일으켜 뜨거운 사명감이나 의무감을 가지게 하신다. 또 그 일을 통해서 큰 기쁨과 만족감을 느끼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서 어떤 강한 감정이 일어난다면, 먼저 인간적인 이기심에서 나온 느낌이 아닌지를 살펴본 후에, 하나님께서 주신 감정이라고 느껴진다면 그 감정을 통해서, 우리 안에서 선한 소원을 두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한다(빌 2:13).
4) 감당할만한 재능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자기에게 부여되어 있는 재능을 살피는 것도 중요하다. 축구선수나 가수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달리기나 노래를 못한다면, 그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말 잘하는 아론을 보내 모세를 돕게 하셨고(출 4:14), 수금을 잘 타는 다윗을 통해 악신이 물러가게 하셨고(삼상 16:23), 가말리엘 문하에서 많은 공부를 했던 바울을 사용해 복음의 도리를 기록하게 하셨다(행 22:3).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뜻은 악하고 게으른 종처럼 가진 재능을 감추어두는 것이 아니라,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도록 그 재능을 잘 활용하는 방법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자신의 재능을 살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유익한 방법이 될 수 있다.
3) 길이 열려짐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갈 때에는 그 길이 계속 열려지게 하시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그 길을 강제로라도 막으신다. 주인 아들의 아내를 구하러 갔던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 길이 순적하게 열리는 것을 체험했다(창 24:27). 사도 바울께서는 전도의 여행을 하면서도 늘 하나님께서 전도의 문을 열어 주시기를 기도하셨다(골 4:3).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발락을 찾아가던 발람이나,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던 요나의 길은 칼을 빼든 여호와의 사자와(민 22:23) 풍랑으로 가로막히고 말았다(욘 1:12).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는 지금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일시적인 성공이나 실패가 아닌 계속적인 성공과 실패의 과정을 주의 깊게 살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된다고 할 수 있다.
5) 다른 사람의 생각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참고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물속에 던져 넣으실 때나, 일곱 집사를 세우실 때, 제비(투표)를 통해 자신의 뜻을 알도록 하셨다. 그래서 성경은 제비는 사람이 뽑아도 그 일을 작정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했다(잠 16:33). 아무리 장로나 집사나 국회의원이 되고 싶어도 선거 때마다 실패를 한다면, 그 길을 가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이겠는지를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아는 것을 제비뽑기에만 국한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영적 분별력을 가진 사람들의 생각을 많이 듣는 것도 매우 주요한 일이다. 주변에 이런 사람을 많이 가진 사람은 참 행복한 사람이다.
3.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책임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들으면, 모든 노력을 포기하고 체념적인 생각을 가지기가 쉽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실 때, 강압적이고 일방적인 방법만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은 자연법칙이나 사람의 노력이라는 제이차적인 요인들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신다.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정해진 동안 살다가 죽는다. 그러나 그 생명은 부지런히 일하여 얻은 소득으로 음식을 먹음으로서 유지가 되게 하시고, 건강에 유의하지 못해 얻은 병이나 나쁜 음식으로 죽음을 맞게 하신다. 부자나 학자가 되게 하는 하나님의 뜻은 그에 합당한 사람의 피나는 노력을 통해 이루어지게 하신다. 음식을 먹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하지 못하고, 노력이 없으면 부자나 학자가 될 수 없게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원하는 사람은 자신의 노력을 체념하고 하나님만 쳐다보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맡기신 노력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체념적인 태도는 좋은 믿음의 자세라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게 만드는 악이 되기 쉽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려 하신다. 그러나 그 좋은 것은 구하는 과정을 통해 주어진다. 구하지 않으면 얻지 못한다(약 4:2).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복을 주고 큰 민족과 부자가 되도록 뜻하셨다. 그러나 그 뜻은 20년 동안에 걸친 야곱의 지혜롭고 근면한 수고를 통해 이루어졌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애굽에 보내 자기 민족을 구원하도록 뜻하셨다. 그러나 형제를 사랑해야 할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동생을 팔았던 형들은 죄책감 속에 살다가 마침내 동생 앞에서 큰 부끄러움을 느껴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제이차적인 요인들을 사용함 없이, 직접적인 개입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시는 경우도 있다. 엘리야에게는 직접 까마귀를 보내 음식을 먹이셨고(왕상 17:6), 빈들에 모여든 많은 사람들에게는 친히 적은 량의 떡과 물고기로 배불리 먹이셨다(마 14:20). 빌립 집사님은 수고하여 걷지 않고도 다른 곳으로 옮겨가게 하셨다(행 8:39). 그러나 우리들이 이적이라고 부르고 있는 이러한 경우들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상적인 형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실 때 사용하시는 예외인 사례이다. 하나님께서 예외적으로 사용하시는 이적을 우리 편에서 일상적으로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위치를 바꾸는 큰 잘못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할 필요가 있다. 우리 모두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성경말씀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에 익숙해야 한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서 성경만으로 만족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필요하다면, 간절한 기도, 그리고 자기의 마음에 일어나는 강한 의욕과 기쁨, 자기가 가진 재능,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 다른 사람의 생각 등을 종합해 보는 것도 유익하다. 이런 과정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다면,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의 가능성을 배재하지 않으면서도, 나의 노력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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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강단은 거룩한 권위를 갖고 있나
박일민 교수(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장·조직신학)
우리는 예배당에 들어 설 때마다 사뭇 다른 마음의 자세를 가진다. 예배당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행해지기 때문이다. 예배당 내부구조의 일부는 보통 설교를 위한 강단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런데 강단은 주로 설교자나 예배순서를 맡은 특정한 사람만 사용하는 곳이어서, 일반 평신도로서는 좀처럼 강단에 접근할 기회가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강단이나 설교자는 특별히 거룩하게 여겨지고, 신성시되는 일이 있다. 그래서 심지어는 청소를 하는 경우에도, 강단에서 반드시 신발을 벗지 않거나 정장을 갖추어 입지 않으면 큰 불경죄를 범하는 것으로 여기는가 하면, 설교자를 마치 하나님처럼 여기는 일까지 생겨나기도 한다.
설교자나 강단은 과연 거룩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 거룩한 권위란 어떤 뜻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 거룩의 의미
국어사전에서는 거룩을 ‘성스럽고 위대하고 훌륭한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구별된 것 또는 구별된 상태’를 가리켜서 거룩하다고 말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과 관련된 구별이란 두 가지의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다른 세속적인 것들과 구별된 경우이다. 우리는 이것을 존재론적 의미의 거룩이라고 부른다. 둘째는 어떤 행동이나 생각이 죄와 구별되는 경우이다. 우리는 이것을 윤리적 의미의 거룩이라고 부른다.
성경은 하나님을 거룩하신 분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은 존재론적으로 볼 때 모든 피조물들과 구별되어 계시는 분이실 뿐만 아니라(사 57:15), 생각이나 활동에서도 죄와는 전혀 상관도 없이 구별되어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사 5:16). 성경은 사람이나 피조물에 대해서도 거룩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명령하기도 한다(레 11:45). 사람이나 피조물이 세속적인 사람들이나 피조물들과 구별되어 하나님과 연관될 때에는, 그 구별된 사람이나 피조물이 존재론적 의미에서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다. 성도, 성물, 성구, 성전, 성직, 성가, 성일 등에 붙은 거룩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 그리고 윤리적인 의미에서는 죄와 구별된 상태나 생각이나 행동, 즉 하나님의 뜻에 합한 상태, 생각, 행동을 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거룩하다고 한다.
2. 설교자와 거룩한 권위
설교자는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하나님의 대언자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을 때에는, 설교자 개인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전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마땅히 설교자의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동안에는, 그 설교자가 비록 어린 아이나 인격적으로 결함이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대리자라고 여겨야 한다. 만일 설교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된다.
초대 교회의 성자 어거스틴은 어린 아이의 말을 통해 들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회심하여, 후에는 위대한 성품을 가진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 그리고 사도들의 가족이나 친구들은 인간적인 가족이나 친구 관계를 떠나,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설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순종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 만일 그들이 집안 사촌 동생이나 허물 많은 친구의 말로만 들어 넘겼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그들에게 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설교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깨달음과 감동을 주시려고 사용하시는 효과적인 전달수단이다. 설교를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거룩한 권위를 가지고 일방적으로 사람들에게 전해진다. 그래서 설교를 ‘말씀의 선포’라고도 한다. 선포란 권위를 가지고 일방적으로 외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설교에는 질문이나 반론이 있을 수 없다.
설교자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는 것은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 경우를 말한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없는 말을 할 때나, 하나님의 말씀을 그릇되게 전하는 경우에는, 이 말이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항상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바르게 전하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설교를 듣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만을 옳게 분별하여(딤후 2:15), 그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겠다는 자세를 가지고, 아멘으로 설교를 받아야 한다.
설교자는 설교를 하는 순간만이 아니라, 삶의 매 순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생활 속에 적용하려고 끊임없는 노력을 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설교자는 삶의 현장에서 순간순간 부딪치는 문제들에서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해 일반 평신도들보다 더 많은 임상적인 지혜와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또 설교자는 자기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설교를 듣는 각 사람들의 생활과 신앙의 수준 그리고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적 환경에 대한 객관적인 관찰에 온 정성을 다 기울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설교자가 강단에서 하는 설교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여 일러주는 진지한 충고와 권면에도 귀를 기울이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아무리 능력 있는 설교를 하는 사람이라도 역시 유한하고 허물이 없을 수 없는 사람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설교자 개인을 천사나 하나님처럼 여겨 떠받드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는 거룩한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신격화시키는 우상숭배의 위험에 빠지는 것임과 동시에, 그 설교자의 허물을 발견하게 될 때에는 크게 실망한 나머지 자신의 신앙에 큰 손해를 입힐 수도 있는 함정을 파는 것이다.
3. 강단과 거룩한 권위
예배당의 강단은 설교를 위해 구별해 놓은 장소이다. 그러므로 예배당의 강단은 강의나 교육을 위한 교단이나 제사를 위한 제단과 확실하게 구별이 된다. 설교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감동을 받도록 권면을 하는 것을 말한다. 설교는 주로 말로서 행해지지만, 때에 따라서는 동작이나 영상 등으로도 설교가 행해지기도 한다. 이 때문에 설교를 위한 강단은 많은 사람들이 보고 듣기에 편하도록 위치나 높이를 조절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때로는 이러한 의도가 지나쳐서 인위적인 권위주의적 인상을 풍기는 구조나 장치를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설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어떤 위치에서 어떤 형식으로 행해지는 설교이든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엄격하게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하지 않는 설교는 사실상 설교라고 할 수 없다.
성경이 말하는 거룩함의 의미에서 볼 때, 거룩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당이나 구별된 말씀인 성경을 전하는 강단은 분명히 거룩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구약시대의 성전에서는 이러한 사상이 매우 강조되었다. 지금의 예배당이나 강단에 비교되는 성전이나 지성소는 아무나 출입할 수 없도록 엄격하게 구별되어 있었고, 이를 어기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다(레 16:2). 그러나 지금의 예배당이나 강단이 가지는 거룩한 권위는 구약에서와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예배당이나 강단이 거룩하다는 것은 그 재료나 공간 자체가 특별해서가 아니다. 예배당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를 위해 구별해 놓은 장소이고, 강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구별해 놓은 공간이기 때문에 거룩한 곳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당이나 강단에서는 결코 세속적인 것과 똑같은 일들이 행해져서는 안 된다. 오직 하나님을 향해 구별된 일들만이 행해야 한다. 말을 해도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말과 구별된 하나님의 말씀을 해야 하고, 노래를 해도 세속적인 것과 구별된 거룩한 노래를 불러야 한다. 만일 이러한 조건들이 파괴된다면, 그 예배당이나 강단은 더 이상 거룩한 곳이 될 수 없는 공회당이나 공연무대에 불과한 공간이 되고 만다.
이 사실은 우리가 야외 공간을 예배나 설교를 위한 장소로 사용했을 때 더욱 분명하게 느껴 볼 수 있다. 성도들이 예배를 위해 모인 일정한 공간은 비록 야외 공간이라 하더라도, 그곳이 본래 어떤 곳이었는가 하는 것과는 관계없이 그 시간만큼은 거룩한 장소로 구별이 된다. 그래서 산(요 6:3), 강가(행 16:13), 외딴 섬(계 1:8), 사자굴(단 6:22), 다락방(행 1:13), 감옥(행 16:24,25) 등을 막론하고 그곳에 하나님이 함께하셨고,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예배가 끝나고 성도들이 흩어진 이후에는 잠시 전에 가졌던 거룩한 장소로서의 의미는 다 사라지고, 그곳은 이전과 동일한 공간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정한 장소나 공간을 지나치게 신성시 하는 것은 피조물을 하나님 대신으로 삼는 잘못된 길에 빠지기가 쉽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하나님께 영구적으로 구별하여 바쳐진 예배당이나 강단은 그곳이 하나님께 영구적으로 구별된 공간이라는 점에서, 임시적으로 구별하여 사용했던 야외 공간의 경우와는 달리, 어느 정도의 성별 의식을 가지고 대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신기하고도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였던 야외 공간을 대할 때의 우리의 자세와 별다르게 특별한 하나님의 임재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봉헌된 예배당을 대할 때의 우리의 자세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특정 공간을 신격화하는 정도에까지 이르러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놓쳐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시다. 사람이나 피조물의 거룩한 권위는 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설교자나 예배당이나 강단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연관이 되어있을 때에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권위 때문에 설교자나 강단 또한 상당한 수준의 거룩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신격화에 이르지 않는 범위 안에서 마땅히 그 거룩한 권위에 어울리는 적절한 예를 갖추고, 설교자나 예배당이나 강단을 대해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거룩한 권위는 단지 위선에 불과하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 그리고 우리들의 관계 가운데서 위선이 아닌 거룩한 권위나 그 권위에 대한 존경이 내면에서부터 자연스럽게 묻어나도록 정성을 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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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복음서의 시놉시스 - 균형목회
류영모 ryuym@amennews.com
신약성경에는 네 개의 복음서가 있다. 네 복음서는 모두 한 인물을 조명하고 있다. 그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마치 4개의 카메라가 주인공을 촬영하고 있는 듯하다. 4개의 카메라 중 3개는 지상에서의 공생애를 마치고 마침내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을 찍고 있고 나머지 1개의 카메라는 헬기에 실려 하늘에서 세상으로 내려와 땅에서 활동하시는 예수님을 촬영한다고 할 수 있다. 처음 세 복음서는 각기 조금씩 다른 각도에서, 그러나 서로 비슷한 관점에서 예수님을 촬영하기 때문에 시놉틱(Synoptic: 공관복음)이라고 부른다.
예수님의 출생으로부터 부활까지를 다루고 있는 공관복음의 기독론을 신학용어로 “하등기독론”(Low Christology)이라고 하는 반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하셨던 ‘로고스’가 성육신하여 지상에 오신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요한복음의 기독론은 “고등 기독론”(High Christology)라고 부른다. 이처럼 공관복음(Synoptic)과 제4복음서의 관점은 서로 다르다. 그러면서도 균형 잡힌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사역을 낱낱이 소개하자면 이 세상에 그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하다고 성경은 말한다(요 21:25).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복음서의 시놉시스(synopsis: 줄거리)를 간추려 말하라고 하면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까?
마태복음 9장35절은 예수님의 활동을 단 한 마디로 간추려 이렇게 증언한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이 말씀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하나는 예수께서 활동하신 시공(時空)에 대한 언급이고 다른 한 부분은 그 활동의 내역서라 할 수 있다.
먼저 시공의 언급인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라는 말씀에는 예수님의 3년의 공생애의 전체 시간과 그분의 발길이 닿았던 공간 모두를 언급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한편, 그분의 사역 내역서에 해당하는 후반부 말씀, 곧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는 예수의 사역을 매우 균형 감각 있게 세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그것은 곧 가르치심(teaching)과 전파하심(preaching) 그리고 치유(healing) 사역이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다 보면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기록이 균형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다시 말해, 전도자로서의 모습과 교사로서의 모습 그리고 치유자로서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사실 기록에 있어서 균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균형 목회를 하셨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오늘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목회의 전범(典範)이라 할 수 있다.
전도자(preacher)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마가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첫 육성은 “때가 찾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4-15)는 전도자의 외침이다. 그는 또 12제자를 뽑아 세우시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권세를 맡기시며 제자들을 각 고을로 보내셨다(마 10:1-15). 부활 후, 승천하시기 전에도 제자들에게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고 분부하셨다.
전도자(preacher)는 케리그마, 곧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전도하는 것이다. 나는 내가 담임하고 있는 한소망교회가 불신자를 전도하는 데 교회 역량의 1/3을 사용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성장에는 이동성장, 출생에 의한 성장, 회심에 의한 성장 등 3가지가 있다. 이 세 가지 중 이동성장을 위한 의도적 몸부림을 그쳐야 한다.
800여 년 전, 칭기스칸은 부족간의 내분을 그치게 하고 몽골족 모두의 생존을 위해 눈을 몽골 고원 밖으로 돌렸다. 내분은 제로섬 게임일 뿐이고 제 살 먹는 카니발(carnival)일 뿐이다. 하나님은 이동성장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문화명령을 통해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지시하셨다. 출생에 의한 성장을 실천하기 위해서 출산 운동을 전개하고, 회심에 의한 성장을 이루기 위해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나서야 한다. 한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는 어떤 대가라도 지불할 각오를 하여야 한다. 지금 이 땅의 온 기독교회가 일심으로 소망하는 평양대부흥 100주년 기념 “Again 1907년”을 이루기 위해서는 불신자의 회심을 최고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
교사(teacher)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전도자인 예수는 교사의 모습도 지니고 있다. 그분은 권세 있는 선생이었다(막 1:27). 그는 모든 선생 위에 우뚝 뛰어난 군계일학과 같은 선생이었다. 마태는 예수께서 산상에서 가르치는 교사로 묘사하고 있고, 마가는 예수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권세 있는 새 교훈”이라고 하였다고 했다(막 1:27).
당대의 율법사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와 “랍비여 우리가 당신을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님인줄 아나이다”(요 3:2)라고 말하였다.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랍오니여”(요 20:16)라고 자연스럽게 외쳤다. 랍비라는 말은 당시 유명한 율법 선생에 대한 존칭으로 “내가 존경하는 선생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 예수의 가르침의 내용과 핵심을 무엇이었는가?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은 율법도 아니고 사회 개혁 프로그램도 아니라 바로 하나님 나라의 약속이었다.
가르침(teaching)이란 이미 교인이 된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가르치는 것, 그들을 잘 양육하고 제자화하여 리더로 세우는 일일 것이다. 이를 위해 한소망교회는 교인들을 더 잘 교육시켜 세상에 내놓는 일에 교회의 역량의 1/3을 사용하려고 한다. 한소망교회에는 한 사람의 불신자가 리더가 되기까지 아주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양육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성공의 사다리”(The Ladder of Success)라 부른다. 4단계의 성공의 사다리는 첫째 불신자 구원의 단계인 "Win"(구원) 전략, 두 번째 단계인 “Consolidate”(강화) 전략, 세 번째 단계인 “Disciple"(제자화) 전략, 마지막 네 번째 단계인 ”Send"(파송) 전략이 있다. 알파와 인카운터, 포스트 인타운터, 셀리더십학교, G12 셀컨퍼런스 등이 이에 해당한다.
치유자(healer)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의 초기 사역은 병 고치는 일에 집중되어 있다. 마태는 치유자로서의 예수를 증명하기 위해 구약 성경 이사야 53장을 인용하고 있다. 이사야 53장은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우리의 연약함과 병을 짊어지시기 위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예수님은 또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라고 질문한 데 대해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병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난다”(마 11:4-5)고 대답하였다.
치유자로서의 예수님은 내가 채찍에 맞을테니 너는 나음을 얻으라고 하시고, 내가 죽을테니 너는 생명을 얻으라고 말씀하신다. 그분의 치유는 전인적이다. 영혼의 치유뿐만 아니라 육신의 치유, 삶의 회복까지도 이루어주신다. 너의 부요를 위해 내가 가난해지겠다고 말씀하시고 네 병을 고쳐줄테니 제사장에게 가서 확인을 받고 너의 공동체로 복귀하라고 말씀하신다.
치유(healing)란 영적으로 깨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일을 말한다. 치유에는 내적 치유와 육체적 치유가 있다. 예수님은 육체적 치유도 중요하게 생각하셨다. 이외에 귀신추방과 관계치유가 있다. 관계치유는 목회자와 성도, 교인과 교인의 어긋난 관계를 치유하는 것이다. 이런 일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 한소망교회는 치유를 위해서도 교회 역량의 1/3을 사용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물론 각 교회마다 강조하는 면이 다를 수 있다. 그렇지만 한 쪽을 강조하다가 다른 쪽의 약화를 가져오면 안 된다. 아버지 하나님에 집중하면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위축시켜서도 안 되고, 반대로 성령을 강조하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를 약화시켜서도 안 된다.
오순절 및 은사주의 운동이 활발하기 전에 성령 하나님이 경시되었던 것처럼, 은사운동을 위해 성부 하나님이 잊혀져서도 안 된다. 건강한 신학과 신앙생활이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균형 잡힌 지식을 가질 때 가능하다. 성부만, 성자만, 성령만 강조하는 신학과 신앙은 병든 신학이요 신앙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전통에만 매달리는 것도, 반대로 시류만 따르는 것도 치우쳐 균형을 잃는 일이다.
신약성경에 네 개의 복음서가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왜 하나의 복음서로는 예수님을 말할 수 없을까? 하나의 카메라로도 예수님의 행적을 담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4개의 카메라를 가지고 지상과 공중에서 보여주는 예수님의 모습은 한 쪽에 치우치기 쉬운 우리의 눈과 생각을 방지하기 위함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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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각오” 주기철 목사의 신앙유산
류영모 ryuym@amennews.com
올해는 주기철 목사 순교 63주년을 맞는 해이다. 특히 오는 11월은 국가가 정한 “주기철선생의 달”이기도 하다. 국가보훈처가 주기철 목사를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 것이다. 참과 거짓이 싸울 때, 주목사님은 거짓의 창에 찔려 죽었다. 그가 살았던 조국을 위해 죽었고, 목숨보다 더 사랑했던 주님을 위해 죽었다. 마땅히 거짓을 이겨야 할 진리가 마치 힘이 달리는 듯 죽었다. 그러나 결국 진리가 승리한다는 믿음으로 죽었다. 넘실대는 거짓의 바다 위에 독야청청(獨也靑靑)하는 소나무의 기개로 죽었다.
1944년 4월21일 그는 순교했다. 모질고 독한 일경의 고문 끝에 평양형무소 병감에서 오정모 사모를 마지막으로 면회하고 난 5시간만인 오후 9시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주님의 곁으로 갔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시퍼렇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에 드려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순교 전 주목사님의 “일사각오”의 종언이다. 그는 그의 호 “소양(蘇羊)”이 의미하는 대로 “예수님의 어린 양”이 되어 죽었다. 죽음으로 진리를 지켰던 그의 높고 푸른 기상이 너무 쉽게 거짓의 편에 서버리는 오늘 우리 후학들에게 실로 통렬하다.
진리는 나이를 먹지 않는다(Truth is ageless.) 세월의 먼지 속에 영원히 파묻히지도 않는다. 거짓의 휘장에 그 빛이 완전히 가리지도 않는다. T.S Eliot의 <황무지>의 이미지를 닮은 황폐한 정신적 카오스(chaos) 속에서 神(신)과 진리가 거부되는 “잔인한” 세월을 살아가는 이 세대에게 주목사님이 흘린 순교의 피는 나를 각성시키고 교회를 각성시키는 각성제이다. 진리는 숨지 않고, 녹슬지 않고 나이를 먹지 않는다. 따라서 진리를 위해 우리 모두 죽을 가치가 있는 것이다. 주목사님의 거짓을 맞선 투쟁이 그것을 말해준다.
주목사님은 우리가 걸어야할 신앙의 길의 모범을 보이셨다. 그는 아브라함의 길을 갔고 예수님의 길을 따라 갔다.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리기 위해 모리아 산을 향하던 아브라함이 사환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창 22:5 개역개정).
십자가형의 잔을 받게 되실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이르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마 26:36).
키엘케고르는 일찍이 말했다. 아브라함에 의한 이삭의 헌납을 조용히 읽고 침묵하라. 여기서는 인간의 말이 필요하지 않다. 말을 하는 것은 오히려 아브라함에게 누를 끼치는 행위이다.
아브라함이 간 “저기”, 예수께서 간 “저기” - 그곳엔 아무나 갈 수 없다. 그래서 사환과 제자들에게 “여기” 있으라고 했다. “저기”는 아들을 잡아 바치는 곳이다. “저기”는 십자가에 달려 죽는 곳이다. “저기”는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모진 고문을 당하고 죽는 곳이다.
“저기”는 누구나 오르기 어려운 산의 정상이다. 그러나 “여기”는 산의 8부 능선 쯤 되는 곳이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코 앞의 정상을 누구나 가지 못한다.
그렇다고 “저기”는 우리가 가지 않고 바라만 볼 곳이 아니다. 당장 엄두가 나지 않아 가지 못하더라도 우리도 가야할 곳이다. 갈 수 있는 곳이다. 한 대의 매 앞에 아군의 비밀을 폭로하고 모두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 인간이며 반면 고춧가루 물이 코에 부어지고, 주리가 틀리고 온 몸이 난타당하여 살점이 뜯겨 나가는 고통을 참을 수 있는 것 또한 인간이다.
작은 세균에 쓰러지는 것도 인간이요, 그렇지만 달나라를 정복하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인간이다. “여기”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저기”로도 가는 것이 신앙인이다. 진리를 위해서는 “저기”까지 가야 하는 것이 신앙인이다.
주목사님은 경남 창원 웅천면 출신이다. 1919년 3ㆍ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웅천에서 독립만세 시위에 적극 가담하였다가 두 달간 옥살이를 하기도 하였다. 목사님에게는 출생지 땅이 주는 항일정신이 배태되어 있었다. 원래 웅천에는 주(朱)씨 마을이 있었는데 조선시대부터 왜구의 출몰이 잦았던 곳이었다. 그래서 늘 왜구와의 싸움이 있었고 왜구 칩임을 막기 위해 ‘웅천성’이 있었다. 목사님의 손자인 주승중 목사(장신대 실천신학 교수)는 말한다. “일부 교회사가들은 할아버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순전히 신앙만으로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순교하셨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할아버지는 신앙 외에 어려서부터 투철한 항일 정신을 지니셨다고 생각해요.”
이러한 태생적 항일 정신에 더하여 주목사님은 이승훈이 세운 오산학교에 진학하여 조만식 장로 등으로부터 민족교육을 받아 어릴 적부터 민족정신에 더욱 투철하였다. 그런 그가 고향에서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서 은혜를 체험한 뒤, 1922년 평양신학교에 입학, 목사가 되어 1925년부터 부산 초량교회에서 시무하게 된다. 주목사님이 초량교회 시무시에 24-25회 경남노회 부노회장을 역임하였는데 이때 주목사님의 주도로 신사참배반대 결의를 하게 된다.
“이때부터 아버님의 항일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 같습니다. 아버님은 목사이셨기 때문에 항일투쟁이 신사참배반대 운동으로 나타난 것이지요.” 주목사님의 4남 주광조(光朝) 장로는 이렇게 회고한다. “아버님이 마산 문창교회로 옮겨오신 1931년 이듬해 제가 태어났어요. 아버님은 제 이름을 ‘광조’라고 지으셨어요. ‘조선아 빛나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제 형님들이 계셨는데 그분들의 이름은 영진, 영만, 영해로 모두 ‘영’자 돌림이었는데 유독 저만 ‘광조’로 지으셨어요. 그래서 형님들은 저를 주워 온 아이라고 놀려대곤 했어지요. 아버님의 항일 투쟁의 결의가 제 이름에 있어요.”
문창교회에서 5년을 시무한 후, 주목사님은 길선주 목사 후임으로 평양산정현교회에 부임, 1938년부터 본격적인 신사참배반대 운동에 투신한다. 이후 그는 일경에 의해 5차례에 걸친 검속과 구금, 고문, 목사직에서의 파면, 교회 목사관에서의 가족 추방 등 극한 핍박을 당한 후 해방을 1년 4개월 앞 둔 1944년 4월 마침내 순교한다. 주목사님의 시신은 평양 돌박산 기독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나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고 가묘를 동작동 애국지사묘소에 모셔 주목사님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이번 11월 정부의 “주기철선생의 달” 지정에 발맞추어 ‘주기철 목사 기념사업회’(회장 김상복 목사)에서도 전국적인 추모 이벤트를 계획 중이다. 그 중 하나로 11월 “일사각오 칸타타” 순회공연을 가질 예정이다. 공연은 우선 할렐루야교회(11월 7일 저녁 7:30), 소망교회(11월 14일 저녁 7:30), 영락교회(11월 21일 오전 10:30)에서 릴레이 콘서트로 열리게 된다. 기념음악회는 SBS 예술단장 김정택 장로(높은 뜻 숭의교회)와 SBS의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국내 유명 성악가들과 각 교회의 찬양대의 협연이 있을 예정이다.
원래 기념사업회에서는 좀더 전국적이고 큰 행사를 계획했으나 무엇보다 예산부족으로 엄두를 못내 몇몇 자원하는 교회에서 칸타타를 공연하는 선으로 후퇴하였다고 한다.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정신문화 유산에 대한 빈곤한 관심에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주기철 목사의 달’을 맞아 주목사님이 피흘려 후대에 남긴 영성과 정신문화의 깊이를 들여다보고 그것을 길어 올려 이 민족의 자산으로 삼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주목사님의 항일투쟁과 순교에는 이 민족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있고 또한 교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있다.
주승중 교수는 말한다. “지금 우리는 희생과 헌신을 싫어하는 풍조 가운데 있습니다. 이러한 풍조 속에 할아버지께서 가족과 모든 것을 다 포기하셨던 희생정신, 그리고 죽음으로 항일하는 구국 정신을 본받아 주었으면 합니다.”
이어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향해 던지는 주교수의 바람은 듣는 이를 숙연하게 한다. “작년 여름 1주일 동안 중국을 방문하여 지하신학교에서 강의도 하고 지하교회 지도자들을 만나고 온 적이 있는데 핍박이 지금도 진행 중이어서 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끌려가 죽고 있어요. 반면 우리 한국교회를 생각해보면 교회가 세속화되고 너무 부자가 되었어요. 교인들이 조금 어려우면 곧 교회를 떠나버려요. 한국교회가 정신 차리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위기의식마저 느껴질 정도지요.”
그는 머뭇거리듯 말을 이어갔다. “기도하며 하나님이 한국교회에 무얼 원하실까 생각했는데 지금은 부흥이 문제가 아니라 교회의 본질과 거룩을 회복할 때라는 음성이 자꾸 들리는 듯 했지요. 거룩이란 결국 구별됨을 말하는데 교회 안에서는 성도이지만 교회 밖에서는 구분이 안 돼 누가 성도이고 누가 성도가 아닌지 모를 지경이 되었어요. 싸우고, 거짓말 하고 사건 터지면 교인들이 끼어 있고…. 교회의 추한 면을 들춰내는 언론 방송을 보면 얼마나 부끄러운지 말할 수가 없어요.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맛을 잃어버린 교회가 세상과 같이 썩어가요. 냄새나는 교회가 부흥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닌가요? 교회는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생각하여 부흥보다 본질을 먼저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말이 가슴에 아프게 꽂혀 더 물을 수가 없다.
초대교회 시절, 베드로와 요한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하는 참 신앙인의 당당함이 있었다. 그러나 부자가 된 중세 교회를 자랑하는 교황에게 토마스 아퀴나스는 뼈아픈 통회를 말한다.
“이제 은과 금은 우리에게 있는데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명할 능력은 없습니다.”
땅의 혼돈(창 1:2)과도 같은 정신적 카오스를 겪는 우리 세대는 정신적 고아와 같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세기말의 데까당(decadent)들에게는 허무나 불안이라는 장식품이라도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그러한 것도 없는 정신 황폐만 있다고 혹평하는 이들도 있다. 그리하여 팔아 먹을 예수조차 없는 우리는 예수를 팔아먹은 가룟유다가 부럽다는, 참으로 민망스러운 얘기도 들어야 한다.
미국 갑부이자 자선가였던 앤드루 카네기는 일찍이 “부자가 되는 것만큼 힘든 것은 돈을 벌고 쓰는 것에 대한 철학을 가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부에 관한 철학뿐만 아니다. 역사를 보면 역사를 선도하는 사상이 있었다. 사상 없는 경제성장, 과학발전, 정치발전은 없다.
이렇듯 사상적, 영성적 불모가 주목사님이 남긴 신앙유산, 정신유산에 대해 미약한 호응을 부른다면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그리스도인이여! 교회여! 우리의 신앙유산을 소중히 여기자. 그가 남긴 정신 유산을 대대로 물려주는 일에 힘을 모으자!
진리는 나이를 먹지 않는다. 그래서 독야청청 푸르른 소나무처럼 푸른 기상으로 죽을 수 있기를 기도하며 살아야 할 것 같다.
릭 워렌 목사의 <새들백교회 이야기>란 책 맨 앞에 파도타기 이야기가 나온다. 파도타기는 미국 해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이다. 파도가 몰려올 때 서핑이란 널빤지에 올라서서 함께 흘러간다. 대단히 신나는 운동이다. 파도는 하나님이 만드신다. 우리는 단지 그 파도를 탄다. 누구도 파도를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은 파도타기와 같다. 하나님은 축복의 물결을 높여주신다. 그러면 우리는 그 위에서 즐긴다. 우리가 축복을 만들 수는 없다. 하나님이 물결을 높이실 때 함께 일어나면 된다. 그때 다른 짓만 하고 있다면 삶의 즐거움은 누리지 못한다. 파도는 계속 밀려온다. 거기 제대로 반응만 하면 축복은 내 것이다.
사도들은 복음전파의 엄청난 물결에 헌신했다. 파도타기 방법이다. 물결은 하나님이 일으키신다. 문제는 “어떻게 그 능력의 물결을 이용하느냐” 이다. 바울은 전도의 문이 열리도록 기도하라고 한다. 전도도 물결을 타야한다. 그냥 기도만 하면 되는가? 아니다. 세 부분으로 나누어 파도타기를 살펴보자.
1. 모든 일에 먼저 기도하라
신자는 하나님의 물결과 함께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먼저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게 맞추시는 게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 맞춘다. 하나님은 계속 물결을 일으키신다. 그래서 거기 맞추기 위해 우리는 늘 기도한다. 무슨 일 하기 전에 기도한다. 하나님이 물결을 일으켜 주시고 거기 민감하게 해 달라고.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도다.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허사로다.” 무조건 죽도록 일하면 잘 사는 게 아니다. 하나님이 먼저 앞서 가시며 길을 열고 복을 부어주셔야 한다.
세상과 삶은 변수가 많다. 영적 세계까지 생각하면 너무 복잡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슨 힘으로 다 극복하면서 살 수 있겠는가? 누가 가장 복 받은 사람인가? 머리 좋고 인물 좋고 의지 강하고 힘센 사람인가? 부모와 친구들이 막 밀어주는 사람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그러면 오히려 교만하고 제 힘으로 살다가 망한다.
여러 변수에 휘둘리는 것은 영적원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모두가 바뀌어도 하나님을 잡으면 모든 것을 잡는다. 그러기에 일하기 전에 하나님께 부탁해야 한다. 아주 유명한 기도 이야기가 있다.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공세로 35만명의 영국군이 됭케르크 반도에서 포위된다. 그때 영국왕 조지 6세는 “기도의 날”을 선포한다.
각료들과 전 공무원, 회사원들, 공원들 온 국민이 간절히 기도했다. 독일군 총공격 개시 전날 밤에 독일군 주둔지에 강한 바람과 함께 폭우가 쏟아진다. 독일군 탱크는 움직일 수 없었고 폭격기도 뜰 수 없었다. 그러나 됭케르크 반도와 도버해협 상공에는 별들이 반짝였다. 그날 밤 영국은 군함으로 35만 명을 탈출시킨다.
우리나라도 그런 경험이 있다. 6.25때 실력으로 낙동강까지 밀렸다. 유엔군이 반격을 하려는 데 장마가 그치지 않는다. 비행기가 뜰 수가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피난 온 목사들을 다 불러 기도하라고 했다. 그들이 모여 기도하자 억수같이 퍼붓던 비가 그친다. 공격이 시작되면서 완전히 망하는 걸 피했다.
하나님이 바람을 일으키고 물결을 일으키셔야 한다. 아무리 좋은 자리라도 하나님이 사람을 보내주셔야 장사가 된다. 아무리 몫이 좋은 곳에 건물을 지어도 하나님이 살 사람을 보내주셔야 한다. 사업도 이사도 인간관계도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를 돕고 싶어 하신다. 바람과 물결을 일으키기 원하신다. 우리는 기도로 부탁한다.
교회가 채워지는 것, 하나님이 하셔야 한다. 계획 세우고 구호 제창하고 교인들 닦달하면 다 되는 게 아니다. 함께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이 물결을 일으켜 사람을 보내고 일을 만들어주셔야 한다. 제대로 되는 교회는 교인전체가 이것을 함께 경험한다. 하나님이 장소도 건물도 자금도 주신다. 사람도 그렇다.
2. 기도하며 일하라
성경 전체가 두 가지를 확실하게 지적한다. 하나는 우리가 비참한 죄인이요 말할 수 없이 무능하다는 사실이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만이 구원이시요, 그에게 기도하면 모든 구원을 내려주신다는 사실이다. 상황이 어떠하든 상관없다. 하나님은 다 할 수 있다. 이 사실을 믿으면 언제나 기도한다. 그렇다. 하나님은 다 가능하시다.
시내산 가기 전에 르비딤 골짜기가 있다. 근처에 골짜기 전체가 다 보이는 언덕이 있다.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힘든 전투를 했다. 모세가 그 언덕에 올라가 전투할 동안 계속 양손 들고 기도한다. 인생은 계속되는 전투이다. 하나님 실력이 없어서 신자가 지는 게 아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기에 그 힘을 못 누리는 것뿐이다.
신자의 삶은 자신의 죄와 연약을 깨닫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남보다 얼마간 선하거나 정직할 수 있다. 남보다 머리 좋고 의지도 강할 수 있다. 그러나 운명 앞에, 더욱이 하나님 앞에서 그렇다 할 수 있는가? 실제로는 다른 사람들보다 선하지도 똑똑하지도 않다. 그저 다 죄인이요 다 연약하다. 이걸 알아야 하나님을 의지한다.
우리를 너무 잘 아시는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너희는 혼자 힘으로 절대로 바로 살 수 없다. 내가 도와야만 제대로 산다. 그러니 내 자녀가 되어라. 나를 의지하고 내가 주는 힘으로 살라. 그러면 몸은 너희 것이요 영광도 너희 것이지만 내가 너희 속에서 하나님의 삶을 살리라. 너희를 통해 영적 물질적 세계를 지배하리라.”
옛날 이야기다. 시골 사는 노인이 서울 아들 집에 와서 전깃불을 처음 본다. 밝기가 대낮 같다. 잘 살펴보니 전구, 소켓, 전선이 전부이다. 돌아가는 길에 전부 장만했다. 동네 사람들에게 햇빛 불 사왔다고 자랑한다. 노인은 전선을 마당에 친 빨래줄에 연결하고 빨리 저녁 되기를 기다린다. 밤이 되자, 전등의 스위치를 켠다.
모양은 서울 것과 같아도 불은 안 들어온다. 전선이 발전소에까지 연결되어야 불이 들어온다. 우리의 모든 일이 다 그렇다. 외형적으로 다 되어도 불이 안 들어온다. 장소도 좋고 자금도 충분하고 사람도 다 있어도 발전소인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 불이 온다. 처음에는 부족해도 하나님이 세우시면 모든 게 밝아지고 잘 된다.
그래서 성경의 인물들은 항상 일하면서도 기도했다. 야베스는 태어날 때부터 약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그리고 항상 기도했다. “나는 어린애입니다. 제 힘으로는 아무 것도 제대로 할 수 없어요. 그러니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어떻게 되었는가? 하나님이 그 구하는 대로 넘치게 해주셨다. 잘 되고 존귀한 사람으로 이름을 떨친다. 하나님은 누구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어떤 실력자보다 능력이 많다. 동시에 나는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살 수 있는 존재이다. 꾸준히 야베스처럼 하나님께서 물결을 일으켜 달라 기도하라.
3. 감사로 깨어있으라
이제 더욱 중요한 부분을 보자. 영적 원리이다.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있으라.” 꾸준히 기도하되 감사함으로 깨어있어야 한다. 축복의 물결을 타는 비결이다. 기도행위는 영적활동을 위한 그릇이다. 거기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열매는 크게 달라진다. 기도하다 낙심하지 않아야 한다. 믿고 감사를 담아야 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기도 앞에 있는 게 기뻐하는 일이요 기도 뒤에 있는 게 감사이다. 이것들이 있어야 기도가 제대로 된다. 하나님을 믿기에 기뻐하며 기도한다. 그리고 기도가 이루어질 줄 믿기에 감사한다. 이 마음의 물결을 유지해야 하나님의 물결을 탈 수 있다. 항상 마음의 성소를 밝히라.
파도 잘 탔던 다윗의 경우를 보라. 그는 작은 물결들을 즐겼다. 그는 말째 아들이었다. 혜택은 모두 형들에게 가고 자신은 광야에서 양이나 먹여야 했다.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추웠다. 때로는 사자나 곰이 양들을 물어갔다. 장래가 보이지 않는 생활이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국민적인 영웅으로 일어난다. 어떻게 그리 되었는가?
매일 하나님을 찬송하며 즐거울 수 없는 광야의 목동생활을 즐겁게 보낸다. 앞날을 대비한다. 지략을 연구하고 전투능력을 키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날마다 사자와 곰 잡는 훈련을 한다. 고독한 광야에서 누구보다 하나님과 가까워진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가 적용되는 삶의 물결이었다.
드디어 하나님이 큰 물결을 일으키셨다. 전쟁이 일어나자 다윗은 파도를 탄다. 사자를 문제없이 죽이는 사람이 골리앗쯤이야! 그러나 별안간 유명해진 다음 왕에게 쫒기는 신세가 된다. 오랜 세월을 통한 도망자의 물결도 잘 탄다. 그 기간에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는 경험을 한다. 어떤 상황이건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그가 어떻게 되었는가? 결국 왕의 자리에 오른다. 그리고는 제 멋대로 살았는가? 거의 대부분을 하나님과 함께 보냈다. 어떻게 깨어있는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감사하면서 행하면 그것이 깨어있는 삶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물결이다. 기도하면서 기쁘게 타면 점점 높아진다.
우리는 약하고 하나님은 강하다. 우리는 부족하고 하나님은 풍족하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변화시킨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물결을 일으키고 싶어 하신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모든 것을 맡기라. 시작부터 기도하고, 일하면서 기도하고, 감사함으로 기도를 기억하고 거기 마음 두라. 하나님은 계속 삶을 열어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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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발하라
김기홍 kimkh@amennews.com
우리에게는 수많은 소원이 있다. 그래서 기도한다. 늘 마음에 가지고 다니는 간절한 소원이 무엇인가? 사업 일어나고 장사 잘되는 건가? 아이가 대학 들어가는 건가? 아니다. 그것이 최우선의 기도제목이 될 수 없다. 그렇게 해서 좋을지 나쁠지 알 수가 없다. 오히려 그 때문에 삶이 나빠질 수도 있다.
소원의 시작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도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완전하고도 의로운 뜻은 나를 통해 세상에 펼쳐진다니 감격스럽지 않은가! 나의 자잘한 소원들은 거기에 준해서 나온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업도 하고 아이도 기른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고로 나의 소원도 반드시 이루어진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며 그분의 뜻을 이루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은 없다. 티끌에 지나지 않는 나, 세상 사람들과 함께 망해갈 내가 영광 속에 하나님의 일을 한다. 하나님 수준으로 올려진다. 우리의 운명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일어나든지 그 반대로 그냥 진흙에 묻혀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명령하신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신자는 빛이다
주위에서 빛이 되라는 말을 듣는다. 빛이 되게 해 달라는 기도도 듣는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빛이 되려고 노력했던가? 그러나 빛은 되는 것이 아니고 되어가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빛이 아니다. 어두움이다. 사람은 본래 어두움에 있다. 그러니까 늘 우울하고 불안하고 걱정한다. 어둠이 스스로 빛이 되려하면 헛수고일 뿐이다.
오직 한 가지 길밖에 없다. 사람들 마음에는 아무도 채울 수 없는 공간이 있다. 우주공간과 같다. 그냥 두면 너무 허전해서 무엇으론가 채우려고 한다. 사랑으로 돈으로 명예로 권력으로 채우려고 한다. 그러나 왕의 힘으로도 채울 수 없다. 그 공간은 오직 빛으로만 채울 수 있다. 태양이 빛날 때 모든 것은 생명을 얻는다.
예수가 바로 그 빛이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를 믿고 받아들인 사람은 하나님 자녀가 되고 하늘에서 온 영원한 생명이신 빛을 소유하게 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 5:14). “빛이 되라”가 아니다. “앞으로 빛이 된다”도 아니다. 현재 빛이라는 말이다. 너무 엄청나서 공감이 안 온다. 주몽이란 사극에서 보면 거지처럼 살던 유리가 주몽을 만난다. 그때 듣는 말과 같다. “너는 내 아들이다.” 이 말과 함께 즉시 새로운 신분이 된다. 놀라운 권세가 주어진다.
유리는 왕궁과 경호원이 부담스럽다. 화려한 의복과 대우가 어색하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 왕자요 고귀한 신분이다. 거기 걸 맞는 옷을 입고 행동을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왕자노릇을 하지 못한다. 사도세자는 그래서 왕이 되지 못하고 뒤주에서 죽었다. 왕이 되든가 죽든가, 권력싸움 속에 들어간 유리의 운명이다.
비슷한 상황이 우리에게도 펼쳐진다. 세상을 지배하든지 아니면 눌리든지 둘 중 하나이다. 하나님은 명령하신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오래된 병자가 일어나라는 말을 듣는다. 일어나면 산다. 하지만 그 말대로 하지 않으면 계속 병자로 남는다. 아니 전보다 더 비참해질 수도 있다. 오늘날 그런 병자가 교회 안에 많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전에는,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어두움이다. 거기 생명이 들어가야 빛이 된다. 그러나 신자는 빛이다. 빛이신 성령이 들어와 계신다. 놀라운 존재이다. 지금 문제가 있는가? 돈이 없는가? 빛을 비추라. 밝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