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4: Out of range value for column 'readed' at row 1 update tb_news set readed=readed+1 where no='161529'
부활주일 준비, 먼저 은혜 받는 설교 4편 2011-04-21 23:09:32 read : 6553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 카라바죠 <엠마오에서의 저녁> 부분도
부활주일 준비, 먼저 은혜 받는 설교 4편
장운철 kofkings@amennews.com
① 제목: 부활하신 예수님
본문: 마가복음 16:1~20
오늘 영광스러운 부활주일에 여러분과 같이 은혜를 받기를 원하는 말씀의 제목은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1.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내력이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며 만유의 대왕이며 저와 여러분의 구주이신 예수님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실 때에 천군천사가 내려와 찬양을 드렸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누가 가라는 명령도 없었건만 머나먼 길을 찾아와 아기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하고, 준비해 온 황금과 유향과 몰약의 예물을 바쳤습니다.
이렇게 놀라우신 예수님이 30세가 되신 때부터 3년 반 동안 천국복음을 증거하실 때에 그의 말씀은 사람들의 고막만 울린 것이 아니라 심장까지 울렸습니다.
수천 명, 수만 명이 모여 그 설교를 듣습니다. 그러는 중에 병든 자에게 주님의 손길이 가면 병이 낫고, 앉은뱅이에게 주님의 손길이 가면 일어서고, 문둥이에게 주님의 손길이 가면 깨끗해집니다. 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부르도록 먹이고도 부스러기를 열두 광주리나 거두십니다.
간음한 여인을 죄인이라고 잡아다 죽이려고 덤빌 때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치라”하면서 죄인이 사는 길을 열어 주시고 “나도 노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범죄하지 말라”하시는 고마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과, 가르치시는 교훈들은 너무도 놀라와 천명, 만 명, 수없이 많은 생명이 예수님을 우러러 부며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무리도 생겨났으니, 저들은 외식하고 욕심에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자기들의 교권이 무너질까 열려했고 바리새인들은 회칠한 무돔 속의 썩은 송장 같은 죄가 드러날까 하여 예수님을 싫어했고 나라를 팔아먹은 헤롯당원들은 백성들에게 규탄을 받을까 두려워했고, 세속화되어 버린 사두개인들은 질리를 외치는 예수님의 음성 때문에 자기들의 교훈이 무너질까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덤벼들었습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책임을 못하면 가만있으면 좋겠건만 못된 짓을 하니 더 야단입니다. 자기의 책임을 못 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딴 짓을 하게끔 되어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저들은 선한 일에는 싸우느라고 의견을 합해 보지고 못하는 무리들입니다. 사두개파와 바리새파는 원수 사이입니다. 또 제사장파와 헤롯당도 원수지간입니다.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무리들인데 예수님을 죽이자고 하는 데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타락한 인생이 책임을 감당하는 일에는 무력하면서 악한 일을 하는 데는 왜 그렇게 힘이 많은지!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가운데는 이런 사람이 한 분도 없기를 바랍니다.
이제 이 무리들은 연합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죄목을 꾸며 빌라도에게 고소했습니다. 로마의 총독 빌라도는 인심을 얻어 자기의 정치 생명을 길게 누려보려고 예수님이 죄가 없는 분인 줄 알면서도 죽여달라는 무리들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죽이라고 내어 주었으니 이것이야말로 타락한 지도자입니다.
마침내 금요일 오전 8시경에 사형 언도를 받으신 예수님은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가죽 채찍을 맞으시며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빌라도 범정에서 골고다를 향해 가실 때에 힘들고 지쳐 전설에 의하면 일곱 번이나 쓰러지셨다고 합니다. 오전 9시 경이 되어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12시쯤 되어 구름이 떠오르고 바람이 부는데 땅이 흔들흔들 지진이 일어나고 해는 빛을 잃어 온 천지는 캄캄해졌습니다. 오후 3시쯤 될 때에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하고 운명하실 때에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쫙 찢어졌습니다.
중간에 막혔던 죄의 담을 헐고 하나님 앞에 직통으로 가는 길을 열어놓으시고 “다 이루었다” 선언한 후에 예수님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장례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공회의원인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라는 훌륭한 사람들이 나타나 예수님을 장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의 괴수처럼 죽으셨지만 부자처럼 장례되었습니다. 장례가 끝난 후에 죽인 악한 무리들이 큰 돌을 가져다 무덤 어귀를 막아놓았습니다. 그리고 도장을 꽉꽉 눌러 인친 후에 “누구라도 우리의 허락이 없이 이것을 뜯으면 알지”하며 무기를 든 군인들로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한편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예수님을 잘 섬기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통곡하며 울고 있던 갈릴리의 여성도들은 예수님을 장례하는 모습을 다 본 후에 집으로 돌아가 향유를 준비했습니다. ‘예수님의 시체에라도 우리의 정성의 기름을 한 번 더 바라드리자’ 그리고 안식 후 첫날(부활주일)새벽에 그들은 향유를 들고 무덤을 향하여 갑니다.
가까이 가서 무덤을 들여다보니 시체가 없습니다. 예수님 죽으셔서 가슴이 아팠는데 이제는 그 시체조차 없어졌으니 더 기가 막히고 가슴이 아픕니다. 이 여성들이 무덤에 들어가 보니 분명히 시체는 없는데, 갑자기 흰옷을 입은 젊은이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전에 말씀하신대로 갈릴리로 가셨다. 너희가 거기서 예수님을 뵈올 것이다”
갈릴리는 2백리가 넘습니다. 피 한 방울 남김없이 쏟으시고 죽으셨던 예수님께서 살아나셔서 2백리가 넘는 갈릴리로 가셨답니다.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40일 동안 열한 번이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위로와 권면과 부탁을 주시고 여러 가지 일을 하시다가 40일 되는 날에 구름을 타고 승천하셨습니다.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면서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해 주시고 성령님을 통하여 도와주시다가 멀지 않은 장래에 우리를 데리러 재림하십니다.
2.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사람의 모습은 너무도 변하기를 잘 합니다. 기분이 좋을 때는 웃고, 기분이 나쁠 때는 눈에 가시가 돋고, 욕심이 생기면 침을 질질 흘리고, 조금 아프면 ‘아이고 머리야’하고 엄상을 부리느 인간의 모습은 한심합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1) 신령한 모습입니다.
신령한 모습이란 인간이 해석할 수 없는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죽인 그 무리들이 올까봐 겁이 나서 문을 꼭 닫고 단단히 잠궜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문 두드리는 소리없이 제자들이 있는 방에 들어오셨습니다.
“너희는 왜 나를 의심하느냐, 내가 영으로 보이느냐?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나는 있느니라 손을 내밀어 나를 만져 보아라”
그 손을 만져보니 못 박히시어 구멍이 뚫린 손입니다.
“내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아라”
그 옆구리에도 손을 넣어 보니 창에 찔린 자리가 그냥 있습니다. 예수님은 식사도 하셨습니다. 생선 한 토막을 받아 그 앞에서 잘 잡수시는 것을 보니 혀도 있고 위도 있고 창자도 있는 우리와 꼭 같은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 열어라”하지도 않고 예수님이 방에 들어오셨으니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겠습니까? 인생은 시공의 제한을 받으므로 한 곳밖에는 있을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주에 마음대로 계실 수 있으신 분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시공의 제한이 없으신 신령한 모습으로 부활하셨습니다.
2) 영광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구름을 타고 승천하셨습니다. 영광의 주님이십니다.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재림의 약속까지 하시며 가신 영광의 주님입니다.
3.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 무엇입니까?
나뭇가지를 좋은 나무에 접붙이면 새 기운이 돋습니다. 사망과 악마와 지옥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내게로 오라, 나와 연합하자’하시며 인류 역사에 최대의 행복과 선물을 주십니다.
1)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죄를 해결하니 사망의 공포가 없어집니다. 죄가 있기 때문에 죽음이 무서웠으나, 죄가 없어지니 죽음의 공포가 사라집니다. 또 죄가 있기 때문에 지옥에 가는데 죄 문제가 해결되니 지옥과는 상관이 없어집니다.
2) 하나님의 아들 딸로 등록해 주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 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전권대사인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님은 전권대사로 세상에 오시어서 ‘이 사람들은 내 백성이니 다치지 마라’ 성도들을 보호하여 주시고 ‘이리로 가라’ 인도해 주시고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 내가 안다 이것이 필요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준비하셨다가 공급하여 주십니다.
3) 천국의 영생을 주십니다.
이제 세상을 떠나는 날에 죽음이 무섭지 않습니다. 천군천사가 마중 나오고 악마는 우리에게 손을 못댑니다. 내가 세상을 떠날 때에 예수님이 죽음 정거장에 마중 나오시어 ‘이제 오냐’ 하시며 반가이 맞이하여 주시고 ‘이것이 네가 살 집이다’ 천국을 안겨주십니다.
4.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하며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내가 잘났다며 하나님의 영광을 중간에서 가로채지 맙시다. 내가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아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게 있는 건강, 내게 있는 재산, 내게 있는 지위 전부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2) 성령님의 권능을 받아서 일해야 합니다.
언제 우리가 세상을 떠날런지, 언제 예수님이 오실런지 모르지만 나 혼자의 결심과 노력으로는 안 됩니다. 허락하신 성령님을 받아야 합니다. 죄를 회개하고 결심하고 선한 목적을 정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여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아 선한 일에 전진하자는 말입니다.
우물쭈물 하지 말고 성전 짓는 일과 북한선교하는 일과 천국일군으로 키우는 일과 세계 선교를 하고 민족복음화하는 일에 전진합시다. 초대교회의 열두 제자가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성령충만함을 받은 다음에 전진했던 것처럼 부활절을 지키는 저와 여러분은 오늘부터는 일어나서 예수님만 따라갑시다.
* 김창인, <절기설교집>, 충현교회출판부, 1986, pp.128~140
② 제목: 생명의 역사
본문: 출애굽기 14:15~31, 요한계시록 1:10~18, 누가복음 23:50~24:12
출애굽기 본문은 팔만 내밀면 드러나는 하나님의 능력과 이스라엘의 승리를 증언한다. 하나님의 능력은 크시다. 이 크신 능력으로 백성을 늘 이끄신다. 모세와 백성들은 그들의 행진을 가로막는 홍해 앞에서 떨어서는 안 된다. 다만 팔만 내밀면 홍해가 잘라지고 적들은 망하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누가는 확인만 해보면 알 수 있는 주님의 부활 사건을 증언한다. 여인들이 주님의 시신에 향료를 발라드리려고 무덤으로 갔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신은 없고 천사 둘이 나타나 주님의 부활을 증언한다. 특히,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반드시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신다고 한 말씀을 기억해보라고 한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일으키는 사건이다. 다만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확인만 하면 주께서 부활하신 놀라운 사건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는 부활하신 영광의 주께서 크신 권세를 가지고 교회들에게 권면의 말씀을 주신다. 박해이 때에 교회들이 구원과 승리를 얻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 부활의 아침에 고난 가운데 있는 세상을 향해 틀림없는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증거하도록 하자.
1. 순종하는 신앙
부활신앙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밑바탕이다. 부활신앙은 교회의 기초요, 교회의 서 있는 자리이다. 이러한 부활 신앙과 함께 그리스도교 신앙에는 또 하나의 축을 이루고 있는 신앙이 있다. 그것은 출애굽의 신앙이다.
성서 전체를 통해 흐르고 있는 출애굽의 신앙은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이며, 해방자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이다. 이 출애굽 신앙은 부활과 의미적으로 같다. 곧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노예상태로 죽음의 상황에 빠져 있을 때, 출애굽으로 해방과 구원을 이룬 것이 죄와 죽음의 사슬을 끊고 승리하는 부활신앙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출애굽의 사건은 하나님 자신이 직접 일으키신 사건이다. 오늘 출애굽기 14장의 본문이 이것을 증언해 준다. 이집트를 떠나온 이스라엘 백성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혀 있고 뒤에는 이집트 군대가 쫓아오는 진퇴양난의 상황이 벌어졌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 군대를 두려워하여 모세에게 항변한다.
“어찌하여 우리를 이끌어내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몰려들어 불평하고 아우성치며 두려워하는 배성들에게 모세가 대답한다. “너희는 두려워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생하시는 구원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 지니라” 해방자 하나님이 이끌어내셨으니 하나님을 믿고 나갈 것을 권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말씀하신다. “너희는 앞으로 나아가라. 지팡이를 들고 손을(팔을) 바다 위로 내밀어라.”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바다 위로 팔을 내밀자 놀라운 능력의 사건이 일어난다. 하나님께서 큰 동풍으로 바닷물을 물러나게 하시어 홍해가 갈라져 마른 땅이 드러나게 하셨던 것이다.
홍해를 가로질러 생긴 그 길로 이스라엘 백성이 지나간 후에, 쫓아오던 이집트의 병거와 군대는 되덮여진 바닷물로 몰살을 당하게 된다. 그제서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하심과 사랑을 확인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며 찬양하게 된다.
이 출애굽 사건, 홍해의 기적은 하나님께서 직접 일으키신 사건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미고 그것을 확인만 하면 되었다. 말씀에 순종하여 팔을 내밀어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 구원의 사건을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하게 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될 때 놀라우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 출애굽의 기적을 이룬 사건 밑바닥에 순종의 신앙이 있다는 것은 부활 신앙의 밑바닥에도 순종하는 신앙이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하나님 뜻에 순종하시는 결단이 부활의 은총으로 이어졌음을 이 부활의 아침에 깨닫게 되는 것이다.
2. 주님의 말씀을 확인할 때
부활의 믿음을 가진 신앙은 주저 없이 발을 내디디어 홍해를 건넜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를 직접 인도하시는 주님의 은총을 경험한다. 예수님의 부활도 하나님께서 직접 일으키신 사건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경험했던 사도들은 한결 같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셨다고 증언한다.
베드르는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고 했다. 우리의 믿음 때문에 부활이 확실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크신 능력으로 일으키시는 사건이기에 확실한 것이다. 그리고 부활 사건이 이처럼 확실하기에 우리는 어둠과 절망의 한복판에서도 소망을 가지고 살게 되는 것이다.
누가복음 24장에서 여인들은 빈무덤을 확인한다. 빈무덤에서 천사 둘과 여인들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하셨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수난을 예고하시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시리라는 것을 말씀하셨다.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 그대로 예수님께서 사흘만에 부활하신 것을 여인들이 확인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팔을 내밀었을 때 홍해를 가르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던 것처럼, 빈무덤을 찾은 여인들은 빈무덤을 통해 예수님을 부활하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확인할 때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을 경험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다. 백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더 낫다는 뜻이다. 사실 우리는 어떤 일을 듣는 것보다 그 일을 직접 보아야 믿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넓은 세상의 여러 가지 일을 위리는 다 볼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보지 못했다고 해서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듣거나 보지 못하였어도 이 세상에는 신비롭고 놀라운 일들이 많이 있었다. 부활 사건도 하나님께서 이루신 사건으로서 우리의 이성적인 인식의 한계를 뛰어넘는 사건이다. 이 부활의 사건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길은 여인들이 빈무덤을 확인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알게 된 것처럼, 주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확인하는 신앙을 통하여 알게 된다.
3. 생명의 역사를 증거하는 일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받은 계시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바른 믿음으로 살도록 하기 위한 책이다. 복음서가 십자가 고난을 통한 사랑의 예수님을 증거하였다면, 요한계시록은 심판과 승리의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이 묘사하는 교회는 지독한 수난과 박해을 당하고 있는 교회이다.
이들에게 사도 요한은 죽음의 세력, 악의 세력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시는 예수님을 증거함으로 고난 속에서 있는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면 승리와 영광을 얻는다는 믿음과 소망을 심어주고 지키도록 한 책이다.
본문 1:10~18에서 사도요한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어린양 예수님의 모습을 증거하고 있다. 그 예수님께로부터 고난 가운데 있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계시를 기록하여 편지를 보내라는 명령을 받는다. 일곱교회는 황제숭배와 우상숭배로 가득 찬 일곱 도시에 있는 교회들이다.
교회들에게 편지를 쓴 목적은 그들에게 부활하신 승리의 주님을 증거함으로써 신앙의 투쟁에서 최후의 승리는 교회들이 얻게 됨을 확신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 고난 속에 있지만 흔들림 없는 소망으로 살게 하려는 것이다. 교회가 시련의 때에 흔들림 없이 믿음을 지킴으로써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이 세상에 증거되게 된다. 이 사실은 우리들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에 대하여 매우 중요한 역할이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시대의 시련 속에서 좌절하거나 절망하거나 자포자기하고 실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하나님의 최후의 승리를 확신하는 사람으로서의 의연함과 굳건함을 보여야 한다는 뜻이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증거하는 사람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앞에는 홍해가, 뒤에는 이집트 군대가 쫓아오는 것과 같은 긴박한 상황이다. 또한 박해의 때를 살고 있던 요한계시록의 일곱교회처럼 고난 속에서 힘들어 하는 사람이 많은 때이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 부활의 사건은 구원의 소식이다. 죽음의 사슬을 끊고 부활로 승리하신 주님을 영접하는 부활의 아침에, 고난 가운데서 흔들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증거하여, 그들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란다. 이 아침 주님께서는 그렇게 살려고 힘쓰는 이들을 성만찬의 잔치 자리로 초대하신다.
* 예배와 설교자료 편집위원회, <해 뜨는 언덕에 올라>, 대한기독교서회, 1998, pp.169~173
세상이 봄기운으로 가득하다. 곳곳에서 생명들이 꿈틀거린다. 이런 절기에 부활절을 맞이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봄소식과 꽃소식처럼 부활의 소식은 우리에게 희망과 기쁨을 선사한다. 오늘, 구약본문은 죽음의 바다를 건너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복음서 본문은 무덤을 여시고 부활의 승리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한다. 그러나 인간의 의심은 어제나 오늘이나 여전하다. 요한계시록을 통하여 우리가 두려움이나 의심에서 벗어나도록 성령께서 큰 음성으로 말씀하신다.
1. 예수가 무덤을 여셨다.
요셉이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신을 내어달라고 청한다. 그는 시신을 내려다가 모시로 싸서, 바위를 파 만든 무덤에 안장한다. 갈릴리 여자들은 그의 시신이 안장된 것을 확인한다. 그리고 갈릴리 여자들은 돌아와 향료와 향유를 마련한다. 그들은 모두 분명한 죽음을 보았다. 이 사건은 제자들에게 좌절과 절망을 안겨주었다.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죽은 자를 위하여 향유와 향료를 준비하는 일뿐이었다(눅 23:50~56).
안식일 첫날 이른 새벽, 여자들이 향료와 향유를 가지고 무덤에 갔다. 무덤 어귀를 막은 돌이 무덤에서 굴러져 있었고, 주 예수의 시신이 없었다. 그들은 눈부신 옷을 입은 남자 둘이 자신들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이 두려워 떨고 있을 때, 그 남자들의 입을 통하여 놀라운 말씀을 듣는다. “어찌하여 부인들은 살아계신 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고 있습니까? … ‘인자는 반드시 죄인의 손에 넘어가서, 십자가에 처형되고,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눅 24:5b~7)
여자들은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였다. 그래서 이 일을 사도들에게 말하였다. 사도들에겐 여자들의 말이 어처구니없는 말로 들렸다.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베드로는 무덤으로 달려갔다. 그는 무덤에서 모시옷만 보고 이상이 여기며 돌아왔다. 이처럼 부활사건은 제자들에게나, 우리들에게 놀라운 사건, 어처구니없는 사건, 이상한 사건,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다. 정말 그렇게 놀라운 사건, 이상한 사건,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일까? 출애굽기 본문을 북상하면 부활사건의 실마리가 풀릴 것이다.
2. 하나님과 함께 바다를 건너다.
노예의 삶은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이집트에서 노예로 사는 히브리들의 삶이 그러했다. 그들에게는 이집트가 무덤과 같았다. 누가 이스라엘이 무덤과 같은 노예살이에서 해방되리라 믿었는가? 그러나 하나님이 그 일을 행하신다. 해방과 자유를 약속받고 출애굽한 이스라엘이었지만, 그 길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그들의 앞길에 장애물이 나타난 것이다. 홍해 바다가 그것이다. 죽음의 바다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말하고 후회하고 있을 때, 자신들의 생명을 노리며 달려오는 이집트의 기병대를 보며 놀란다. 이제 이스라엘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홍해 바다에 빠져 죽든지, 이집트의 기병대 창에 찔려 죽든지 둘 중 하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는 묘 자리가 없어서, 우리를 이 광야에다 끌어내어 죽이려는 것이냐? 우리를 이집트에서 끌어내어 여기서 이런 일을 당하게 하다니, 왜 우리를 이렇게 만드느냐?”(출 14:11)하면서 모세에게 몰려들어 불평하고 아우성을 친다. 두려워 불평하는 백성들에게 모세가 대답한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는 가만히 서서, 주께서 오늘 너희를 어떻게 구원하시는지 지켜보기만 하여라”(출 14:13) 해방자 하나님이 노예이던 그들을 해방시켜 이끌어내셨으니 하나님만을 굳게 믿고 나아갈 것을 모세는 간곳하게 권면한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라는 말씀이다. 그 사이에 하나님은 밤새도록 구름기둥으로 이집트의 군대를 가로막아 이스라엘을 죽음에서 건지셨다.
누가 그 일을 하셨는가? 주님께서 끝내 홍해를 갈라 그 절망의 바다를 건너게 하셨다. 바로 이 죽음의 마다에서 당신의 권능과 영광을 드러내셨던 하나님께서 로마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무덤에 안장되신 예수님을 살리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사도요한이 유배지 밧모섬에서 본 환상과 그 음성을 들어보자.
3. 그리스도의 명령
사도 요한이 밧모라는 섬에 유배된다. 그의 삶의 자리는 인간적으로 볼 때 절망스럽다. 그런데 요한은 그 절망의 자리에서 하늘의 음성을 듣고 사명을 받는다.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일곱교회, 곧 에베소와 서머나와 버가모와 두아디라와 사데와 빌라델비아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교회로 보내어라”는 음성을 듣는다(계1:11).
일곱교회는 황제숭배와 우상숭배로 가득 찬 일곱 도시에 있는 교회들이다. 교회들에게 이 편지를 쓰게 하신 목적은 그들에게 부활하신 승리의 주님을 증거함으로써, 신앙의 투쟁에서 최후의 승리를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비록 고난이 심하여 죽음에 이르렀다고 하여도 흔들림 없는 소망 가운데 살기를 바란 것이다.
사도 요한이 그 음성을 알아보려고 돌아섰다. 그가 보니 일곱 촛대 한 가운데 인자와 같은 이가 계셨다.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돌아가신 주님, 그 모습이 마치 도살장에서 죽은 어린 양 같았는데, 지금 요한이 본 모습은 참으로 권세와 영광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요한이 그 모습에 놀라 그의 발 앞에 엎어져서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다. 그때 그가 사도 요한에게 오른손을 얹고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살아있는 자다. 나는 한 번은 죽었으나, 보아라, 영원무궁하도록 살아 있어서,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계 1:17~18)
우리는 부활의 아침에 사도요한의 음성을 듣는다. “두려워 말아라” 무덤이라는 죽음도, 바다라는 절망도, 절해고도에 유폐되어도, 하나님께서는 무덤을 여시고, 바다를 가르셔서 생명으로, 희망으로 바꾸어 버리신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두려워 말라고 격려하여 주신다. 밧모섬에서 환상을 보는 사도 요한에게 두려워 말라고 격려하신다.
이 부활의 아침에 주님께서는 여러분들의 성만찬의 잔치자리로 초대하셨다. 이 부활의 아침에 주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성만찬 상에 나와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자. 떡과 잔에서 우리를 위해 내 놓으신 주님의 생명을 맛보고 힘을 얻자.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그리스도가 주신 떡과 잔을 마신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죽음의 바다라도 건널 수 있다. 무덤이라도 뚫고 나올 수 있다.
* 박근원, <하늘에서 부는 바람>, 대한기독교서회, 2001, pp.178~181
④ 제목: 부활의 확실성과 우리의 소망
본문: 고린도전서 15:1~11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욥 14:14)라는 욥의 질문 이후 계속된 의문과 질문은 부활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복음의 결론이었고 교회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너무나 믿기지 않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많은 반론과 의심이 반복된 논쟁의 중심이었다. 부활에 대한 반론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개 다음의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도난설이다. 예수의 시체를 제자들이 훔쳐간 뒤 그가 부활했다는 주장을 유포한 것이라는 가설이다. 그러나 무덤은 혼자서는 열 수 없는 돌문으로 닫혀 있고, 당시에 세계 최강이라고 자처하던 로마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제자들이 훔쳐갔다면 이것이야말로 기적이다.
둘째는 환상설이다. 마리아 등이 예수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부활을 열망하였기 때문에 환상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반기독자 르낭은 “부활은 히스테리증이 있는 보잘것없는 여자의 말에 기초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500명이 한꺼번에 부활을 목격하였다고 하는데 500명이 한꺼번에 환상을 보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셋째는 가사설 혹은 기절설이라는 것이다. 이 설은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라 잠시 기절했다가 깨어났다는 것이다. 사실도 아닌 거짓을 사도들이 생명을 걸고 선포했다면 이것 또한 우스운 일이다.
이외에도 부활의 상징이나 의미는 인정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합리적인 사고를 가지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바울은 부활을 논하면서 고린도 전서 15:14에서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의 믿음도 헛것이니”라고 하였다. 부활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믿음의 기초요 죽음과 영생에 대한 해답이다. 그래서 불트만은 “기독교는 십자가에서가 아니라 부활에서 시작하였다”라고 하였다.
1. 부활은 성경의 성취
성경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언한다. 일반적으로 죽은 자는 살지 못한다고 하지만 성경은 죽음 자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다. 더구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는 성경이 이미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호세아 6:2, 시편 16:10~11, 17:15~24, 이사야 53:10, 요나 2:10 등이 부활을 증거하고 있다.
또한 복음서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사흘 후에 부활할 것을 예언하시고 부활하셔서 말씀대로 성취됨을 증거하고 있다. 부활장인 이 장에서도 그리스도가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믿음도 헛것이고 여전히 죄 가운데 있으리라(16절)고 하였다. 성경은 분명히 죽은 자의 부활을 증거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경의 예언을 성취시킨 것이다.
2. 부활은 역사적 사건
성경은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말한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부정하여,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의 아내를 취하는 풍습을 들어 형제들이 모두 다시 살게 되면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고 질문하였다. 헬라철학은 영혼의 불멸은 인정하지만 부활은 부정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부활을 부정하려는 여러 가지 학설들과 비판들이 있었지만, 부활은 확실한 역사적 사실이다. 성경이 그 역사를 확인하고 있고 당시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 그 역사를 증거하고 있고 꾸며낸 이야기가 아닌 사실이기에 지금도 우리의 마음에 믿어지고 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부활에 대한 믿음을 방해하려던 공작들이 오히려 부활을 확증하는 것이 되었다. 막달라 마리아와 베드로가 무덤에 갔을 때에 그 무덤이 비어있었던 것은 가장 확실한 부활의 역사적 사실이다. 그래서 로마서 1:4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고 우리의 메시아가 되셨고 교회의 기초가 되신 것이다.
뉴비긴은 “만일 첫 번째 부활절 아침에 그 무덤이 비어 있을 수 없었다면 교회가 생길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부활은 지나간 한 과거적 역사가 아니라 지금도 모든 기독교인들 나아가서 모든 인류에게 필요한 현재적 사건이며 그리고 우리의 죽음 후에 다시 부활할 것을 확인하는 미래적 사건이다.
3. 부활은 은혜의 근거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의 사도된 은혜를 조화시킨다. 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사도가 되었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확증을 그리스도께 직접 받아(3절)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에게 있어 사도된 은혜다. 바울에게 부활은 사도됨의 은혜이듯이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모두에게 은혜의 근거가 된다. 그리스도가 부활함으로 우리에게 교회가 주어졌고,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고, 소망이 주어졌다.
사도들의 선포의 내용은 부활이었다. 예수님의 죽음 후에 그들은 용기 없는 무기력한 사람들이었지만 부활 후에 다시 용기를 회복하고 부활을 선포할 만큼 힘 있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러므로 부활은 교회의 선포의 내용이었고 모든 기독교인들의 소망의 핵심이었으며 기쁨의 근원이었다.
사람이 자신의 죽을 날과 어떻게 죽는 것을 아는 것은 고통이지만 그리스도는 이 계획된 고통의 죽음을 죽으셨다. 그러나 사람이 다시 산다는 것을 알면 죽음은 고통만이 아닐 것이다. 그리스도는 부활을 전제로 한 죽음을 죽으시고 죽음을 전제로 한 부활을 하신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우리도 이 땅에서 인간으로서 계획된 고통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부활을 전제로 한 죽음을 우리 모두가 죽게 될 것이고 죽어야 사는 죽음을 전제로 한 부활을 모두가 영광 중에 맛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신 것이 은혜요, 이것을 아는 것이 은혜이다.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이다.
* 김종렬, <1998년도 교회력에 따른 예배와 강단>, 대한기독교서회, 1997, pp. 170~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