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공모전’ 대상우승 , 송민혜씨/ 즐겁게 하는 것은 참된 예배가 아니다 2015-10-02 11:22:07 read : 4243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기감 ‘설교 공모전’ 대상 송민혜씨
“머릿속에 떠올리고 곱씹는 말씀 담긴 게 좋은 설교”
‘만남’ ‘시편 139편’ 주제로 작성
▲기독교대한감리회가 주최한 설교 공모전에서 1등을 차지한 송민혜씨가 지난 24일 서울 감리교 신학대 교정에서 우승 소감을 전하고 있다. 전호광 인턴기자
“재미있고 감동적인 내용을 전하는 것도 중요하겠죠. 하지만 성도들이 일상생활을 할 때 계속 머릿속에 떠올리고 곱씹는 말씀이 담긴 게 좋은 설교라고 생각해요. 그런 설교를 하려면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고군분투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야겠죠.”
지난 24일 서울 서대문구 감리교신학대에서 만난 송민혜(35·여)씨는 좋은 설교의 정의를 묻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그는 감신대 신학대학원생으로 최근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 교육국이 개최한 설교 공모전에서 대상을 거머쥐며 상금 100만원의 주인공이 됐다.
송씨는 미국 댈러스 밥티스트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귀국해 서울 종교교회에서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청년부 전도사로 일했다. 목회자의 꿈을 품은 건 3년 전부터다.
송씨는 “전도사로 사역하면서 목회자의 길을 걷는 게 가장 행복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 올해 초 감신대 신대원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이어 “큰 기대 없이 공모전에 참가했었다”면서 “1등을 차지해 기분이 좋지만 저의 부족한 능력을 알기에 민망한 마음도 크다”고 덧붙였다.
공모전은 기감 교육국이 기독교교육진흥주일(지난 20일)을 앞두고 감신대 협성대 목원대 등 감리교 계통 신학대에 다니는 학부생과 대학원생을 상대로 개최한 행사였다. 참가자들은 기감 교육국에 각각 ‘만남’과 ‘시편 139편’을 주제로 작성한 설교문 2편을 제출했다.
송씨는 ‘만남’을 주제로 작성한 원고에서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과 함께 세상을 만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과 사람들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처럼 사랑하고 대하는 것, 존중히 여기는 것, 소중하게 만나는 것이 그분과 동행하는 일입니다.’
송씨는 “세상에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는 목회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학생 신분이니 일단은 공부에 최선을 다할 겁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면서 살다 보면 언젠가 진정성과 실력을 갖춘 목회자가 될 수 있을 겁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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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인·실직 가장과 정겹게, 외국인 유학생과 흥겹게…
한가위, 교회·선교단체 나눔 행사
▲천안 나사렛대 외국인 유학생들이 24일 교내에서 열린 ‘추석맞이 어울림 행사’에 참가해 자신들이 만든 송편을 들어 보이며 환히 웃고 있다.
한국교회와 선교단체들이 추석 명절을 맞아 외로운 이웃들을 위한 풍성한 나눔의 잔치를 연다. 유학생 선교단체 자스타(JASTA)는 올해로 14회째 외국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가위 페스티벌을 개최한다.
민족사랑교회공동체는 노숙인·실직가장들을 초청해 25일부터 사랑나라 집회를 열고 있다. 자스타 대표 구드보라(66) 선교사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성경에 많이 나온다”며 “믿는 자들이 이 땅의 나그네인 유학생, 외국인 노동자들을 사랑으로 돌보고 섬겼으면 한다”고 말했다.
서울 용산구 온누리교회(이재훈 목사) 이주민사역공동체 온누리M미션은 26∼28일 경기도 용인 추계리 양지온누리교회 액츠29 비전빌리지에서 ‘하비스트 추석 이주민 연합수련회’를 개최한다. 서울과 경기도 안산·김포·의정부 등 20여곳에 있는 온누리교회 이주민사역공동체들이 모인다. 외국인 650여명과 봉사자 140여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몽골·러시아·네팔인 예배를 섬기는 나얀타이 아치트 전도사, 유 세르게이 목사, 데벤드라 니라우라 목사는 ‘나의 삶 세우기’ ‘나의 가정 세우기’ ‘나의 나라 세우기’에 대해 각각 간증한다. NGO ‘더 멋진 세상’ 사무총장 김창옥 전도사는 마지막 날 ‘그의 나라 세우기’를 주제로 설교한다. ‘국가별 모임’ 등을 열어 다양한 국가들의 음식과 문화를 체험하는 시간도 갖는다.
자스타는 26일 낮 12시부터 오후 4시까지 서울 서대문구청 대강당에서 ‘마이 프렌드 페스티벌 2015 유학생 한가위 큰잔치’를 연다. 유학생들은 국악·태권도·CCM·K팝 경연대회 등을 진행하고 송편 빚기, 전 부치기 등 한국음식 만들기에도 도전한다. 30개국에서 유학생 3000여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자스타는 2005년 일본인 유학생 복음화를 위해 설립됐다. 요리강습이나 한국어 성경공부교실 등을 열면서 더 많은 유학생을 섬기고 있다. 해마다 2월 말에는 유학생을 위한 선교집회도 개최한다. 서울 연세대 후문 쪽에 유학생 쉼터와 만나카페를 개설, 운영하고 있다.
서울 중구 나눔의교회(곽충환 목사)는 추석 당일인 27일 지역 노인 40여명을 초청해 죽을 대접하고 쌀을 선물한다. 지난 22∼23일에는 형편이 어려운 16가정에 쌀 20㎏을 배달하기도 했다. 19일에도 중구청과 함께 자선 바자를 열고 수익금을 어려운 이웃에게 전달했다.
서울 영등포산업선교회(총무 진방주 목사)는 26∼29일 노숙인 임시보호센터인 서울 영등포구 ‘햇살보금자리’에서 노숙인들에게 명절음식을 대접한다. 27일에는 세 끼를 모두 대접하고 ‘윷놀이대회’도 연다.
민족사랑교회공동체(유수영 목사)는 25∼28일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성실동산에서 노숙인·실직가장 초청 제48차 사랑나라 집회를 개최한다. ‘너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갈 3:8)’를 주제로 진행 중인 사랑나라 집회에는 실직가장 독거노인 장애인 등 150여명이 참석했다. 공동체는 첫날 목욕·이발 봉사를 했고 세면도구·의류 등을 제공했다. 미술치료, 웃음·건강 강좌, 영화상영, 워십공연, 경건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도 펼친다.
경기도 안산 탈북민정착지원연합센터는 오는 30일 경기도 안산시 상록수역 1층 광장에서 소외계층을 위한 문화행사 ‘다양성, 서민예술 축제’를 펼친다. 탈북민 장애인 노숙인 독거노인 등을 초청해 동요 부르기, 레크리에이션 등을 진행한다. 탈북민정착지원연합센터는 안산 크리스마스교회(김경훈 목사) 하나교회(김요한 목사) 등 7개 교회로 구성돼 있다.
밀알복지재단(이사장 홍정길 목사)은 한과 잡곡 고추장 멸치 식용유 등 16종류의 식료품, 생활필수품을 담은 ‘추석맞이 선물키트’를 제작해 소외 이웃들에게 전달했다.
나사렛대학교(총장 신민규)는 교내 유학생들을 초청해 명절의 기쁨을 나눴다. 지난 24일 충남 천안 학교 기숙사에서 외국인 유학생을 대상으로 ‘추석맞이 어울림 행사’를 열었다. 중국 아프리카 대만 베트남 등 외국인 유학생 50여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윷놀이 제기차기 씨름 팽이치기 등 한국의 전통놀이를 체험했다. 나사렛대에는 18개국에서 온 외국인 유학생 160여명이 재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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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테러 직전 울부짖는 10대 무슬림 영상 공개돼
▲자살폭탄테러를 감행하기 전 죽음에 대한 공포로 울부짖는 10대 무슬림.
10대 알카에다 대원이 자살폭탄테러를 감행하기 전 죽음의 공포로 인해 울부짖는 모습이 공개돼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전 세계 곳곳에서 자살폭탄테러 등 끔찍한 만행을 저질러 분노를 사고 있는 무슬림들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려 주는 것으로, 이들 또한 극단주의 무슬림 지도자에 의한 피해자요 희생자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23일(이하 현지시각) 영국 일간 더타임스에 따르면, 10대 무슬림 자파르 알 타이아르는 공개된 영상에서 자살폭탄테러를 감행하기 위해 시리아 정부군이 점령한 마을로 폭탄이 실린 장갑차를 타고 이동한다. 그는 처음에는 동료들의 격려와 포옹 등을 받으면서 밝은 모습으로 장갑차에 오르는 등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곧 불안감을 숨기지 못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울음을 터뜨린다.
그러자 타이아르를 둘러싼 남자들은 “자파르, 나의 형제, 두려워하지 마. 두려울 때 알라를 기억해”라고 위로했다. 이에 타이아르는 “내가 성공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요”라고 응답했다. 그리고 잠시 후 장갑차는 자살폭탄테러를 위해 떠나간다. 영상에는 잠시 후 타이아르가 탄 장갑차가 폭발하는 모습도 나온다.
알카에다 연계 세력인 알누스라 전선의 대원인 타이아르는 우즈베키스탄 출신으로, 지난 18일 시리아 북부 푸아 마을에서 자살폭탄테러를 감행했다. 당시 알누스라 전선은 시리아 정부군에 대항해 푸아 마을 인근에서 200여 발의 로켓포를 발사했고, 7건의 자살폭탄테러를 감행했다.
알누스라 전선은 드론을 활용해 타이아르의 자살폭탄테러 장면을 지난 18일 촬영했다. 타이아르가 울부짖는 영상은 지난 20일 유튜브에도 공개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삭제됐다. 그러나 아래의 링크를 통해서 볼 수 있다.
최근 미국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경찰이 순찰차 뒤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In God We Trust)’는 문구를 새기는 일이 늘고 있다고 미국 언론들이 30일(현지시간) 보도했다.
8월 말 텍사스 주 해리스 카운티 경찰국의 보안관 대런 고포스가 주유소에서 차에 기름을 넣던 중 생면부지의 한 흑인에게서 15발의 총탄을 맞고 사망한 사건이 발생한 뒤 텍사스, 아칸소, 플로리다, 켄터키, 버지니아 주 등의 경찰로 확산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미국의 국시(國是)다.
텍사스 주 차일드레스 시의 애드리안 가르시아 경찰서장은 미 폭스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동료 경찰관의 사망 후 경찰의 단합을 위한 강령과 같은 뜻으로 이 문구를 경찰차 뒤에 붙였다”면서 “경찰의 생명을 겨냥한 사건이 빈발하는 상황에서 국시만큼 우리를 잘 대변하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경찰이 국민의 안전을 도모하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므로 공권력의 상징이라는 뜻에서 국시를 순찰차에 달았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무신론자와 종교의 자유를 옹호하는 종교자유재단 같은 단체는 이 문구를 경찰차에서 떼어야 한다고 강하게 항의하고 있다.
가르시아 서장이 이들의 요청을 거절하고 ‘꺼지라’고 일갈하면서 논란이 증폭됐다.
미 언론에 따르면 논란은 크게 두 가지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국시를 폐지해야 한다는 것과 이를 순찰차에 붙인 경찰이 애국심과 경건함을 혼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신론자와 종교자유재단은 이 문구의 사용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 수정헌법 1조에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미국 건국 후 1864년 동전에 처음으로 등장한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문구는 1956년 의회 통과 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서명을 거쳐 미국의 공식 국시가 됐다.
무신론자 등은 이를 폐지해달라고 줄기차게 요청했으나, 미국 상원(2006년)과 하원(2011년)은 국시를 재확인했다.
또 다른 논란은 경찰의 국시 사용이 여론의 비판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행동이라는 주장이다.
종교자유재단의 공동 설립자인 애니 로리 게일러는 “작년부터 경찰이 비무장 흑인을 무참히 살해한 사건으로 국가적으로 충격에 빠진 상황에서 경찰이 남들의 비판을 막을 목적에서 경건함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있다”며 “경찰은 애국심과 독실함을 혼동하지 않기를 바란다. 신은 정부 바깥에 계신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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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자를 즐겁게 하는 것은 참된 예배가 아니다
존 맥아더의 <예배: 우리는 예배드리기 위해 구원받았다> (아가페북스)
▲ <예배: 우리는 예배드리기 위하여 구원받았다> / 존 맥아더 지음 / 유정희 옮김 / 아가페북스 펴냄 / 320 쪽 / 1만 4,000원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중심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은 철저하게 이 모든 것의 중심은 하나님이라고 가르친다. 지구가 온 우주의 중심이며 태양이 그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존재 안에서만 우리의 존재가 가능하다. 인간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사 43:21).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원한 찬양과 영광을 돌려야 한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를 소홀히 해왔다는 것을 반성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존 맥아더의 <예배>가 반갑다.
<예배>(존 맥아더, 아가페북스)는 바로 이 중요한 예배에 관한 성경적 고찰이다. 먼저 맥아더는 아무리 순수하고 선한 의도가 있더라도 하나님의 명령대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면 축복된 예배가 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잘못된 예배를 받지 않으셨고 여기에는 아무런 유익도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해로웠다는 이야기가 많이 기록되어 있다.
잘못된 예배란 무엇일까? 존 맥아더는 잘못된 대상에게 드리는 예배, 잘못된 형식으로 드리는 예배, 자신의 방법대로 드리는 예배, 그리고 잘못된 태도로 드리는 예배를 꼽는다.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예배는 말씀이 전해져야 하고, 성도를 바로 세워야 한다. 하나님을 높여야 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고 제시한다.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말은 할례처럼 단순히 의식이나 의례가 예배의 중요 요소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존 맥아더는 우리가 예배를 드려야 하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에 대해서 4장에 걸쳐 설명한다. 참된 예배는 예배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히 예배에 관련된 담론을 넘어서 신론의 영역을 다룬다. 변하지 않으시고 편재하시며 모든 것을 아시는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설명한다. 이와 관련해 오해하기 쉬운 점들을 명쾌하게 설명해, 이 책의 5장에서부터 8장까지는 쉽게 설명한 신론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책의 후반부는 사마리아 여인과 나누었던 예수님의 대화 속에서 참된 예배의 본질을 분석하고 있다. 참된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요 4:24)라고 할 수 있다.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의 예배는 이 점에서 부족했다는 것이 맥아더의 생각이다. 사마리아인들은 모세오경만을 인정하고 다른 성경은 거부했기에, 적절한 진리가 빠진 예배였다. 반대로 유대인들은 진리를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그 안에 마음이 없는 영적이지 못한 예배였다. 이러한 분석은 주경학적으로 볼 때 문제가 좀 있지만, 맥아더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바른 예배이어야 하고 진정한 마음으로 드려지는 예배여야 한다.
맥아더는 영으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성령께 복종해야 하며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께 집중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마음이 나누어지지 않아야 하며, 회개하는 가운데 드리는 예배여야 한다고 제안한다. 또한 진리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온전한 말씀의 선포가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한다. 오늘날의 예배가 예배를 참석하는 자들을 감성적으로 충족시키기 위해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을 반성해 보아야 할 점이다.
“당신이 이기적으로 복을 구하기 위해 교회에 간다면 예배의 핵심을 놓친 것이다. 우리는 복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광을 돌리기 위해 교회에 간다. 그것을 이해하면 교회에서 하는 모든 것에 대한 생각이 바뀔 것이다. 문제는 무엇을 얻었느냐가 아니라, 내 마음으로부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렸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 따라서 당신이 복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대개 음악이나 설교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때로는 그것이 넘을 수 없는 장애물이 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이기적인 마음 때문이다.”(209쪽)
맥아더는 3장에서 예배가 단순히 일주일에 한 번 드리는 것만으로 축소될 수 없으며 일주일 내내 삶 전체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에 대한 분량이 적다는 것이 아쉽다. 그냥 그렇게 주장만 할 뿐 다른 곳에서처럼 보다 더 설득력 있는 내용 전개가 부족하다.
우리 한국 성도들에게 있어서 예배가 삶이라는 인식이 가장 빈약하다. 심지어 목회자들마저도 삶으로의 예배는 관심이 부족하고 단지 교회 내에서의 예배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목회자들은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단위로서의 교회)의 성공에 목숨을 건다. 하지만 정작 교회 당사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성도들의 일상에서의 예배가 성공하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이 교회 내에서의 예배가 참된 예배가 되지 못하고 그저 감성적 터치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예배로 만드는 근본적인 이유이다.
이 책은 우리의 인생의 목적을 제대로 실천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책이다. 성경은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에 대해서 우리는 반드시 배워야 한다.
이국진 / 대구 남부교회 목사. 저서로 <예수는 있다>, <사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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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는 철밥통인가, 순례자인가 교회 분쟁을 내부에서 해결하려면
대표자 갱신 절차가 마련되어야
모든 교회에는 목사가 있다. 그 때문인지 대부분의 교회 분쟁의 중심에는 목사가 자리 잡고 있다. 목사가 모든 분쟁의 원인 제공자라는 말은 아니다. 목사가 가만히 있거나, 개혁적인데도 교인이 부당한 요구나 문제를 제기하여 분쟁이 발생하기도 한다. 따라서 위의 말은 목사가 분쟁의 축이 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목사가 문제든 교인이 문제든 교회 분쟁의 대부분은 목사를 둘러싸고 전개된다. 물론 목사와 무관한 분쟁도 많다. 그러나 그런 문제들은 사적인 차원에 국한되거나 자연스럽게 해소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분쟁을 '교회 분쟁'으로 취급하지는 않는다. 그냥 인간사 갈등의 한 단면으로 취급할 뿐이다. 교회 내 분쟁이 심각하다고들 한다. 이는 곧 교회 내에서 목사를 둘러싼 갈등이 첨예하다는 것이다.
목사가 분쟁의 축이라고 할 때, 이를 해소하는 방법으로 두 가지 정도가 있다. 하나는 임기제를 채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불신임제를 채택하는 것이다. 물론 둘 다를 채택할 수도 있다. 어느 단체나 대표자가 분쟁의 축인 경우가 많다. 동창회도 그렇고 기업도 그렇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정치는 또 어떤가. 결국 대통령을 둘러싼 갈등의 전개 과정이 곧 정치 아닌가? 그래서 동창회의 회장, 기업의 대표이사, 대통령 모두 임기가 있다. 동창회 회장의 경우에는 채택하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기업의 대표이사와 대통령의 경우에는 불신임제가 채택되어 있다.
즉, 임기가 보장되어 있는 대표이사와 대통령이라고 해도 기업과 국가는 일정한 절차와 사유하에 이들을 불신임할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그렇게 탄핵당했고, 매일매일 수많은 기업의 대표이사가 그런 식으로 해임당하고 있다. 대표자인데도 임기가 없고 탄핵을 당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왕과 교황이다. 결국 근대화한 모든 단체는 대표자에 대해 임기제나 불신임제를 채택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목사를 제사장이라고 한다면 그에 대해 임기나 불신임을 논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목사는 제사장이 아니다. 간혹 목사를 제사장에 비유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 역할과 지위를 존중해서 그러는 것이다. 목사를 제사장이라고 한다면, '프로테스탄트'가 아니다.
그런데 한국의 교단 대부분은 '위임목사'에 대한 임기제를 인정하지 않는다. 부목사나 임시목사에 대해서만 임기를 인정한다. 불신임제도 제한적으로만 채택하고 있다. 즉, 교인들이 노회에 목사의 사임을 건의하는 '권고 사임' 혹은 '권고 사면'까지만 인정하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예장통합) 교단은 헌법 시행 규정에 대놓고 목사를 "신임투표로 사임시킬 수 없다"고 규정한다(제26조 제7항). '위임목사'는 임기도 없고 불신임도 당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위임목사'가 왕과 교황에 준하는 지위에 있는지 묻게 된다. 그러나 그 대답은 자명하다. 결코 그렇게 볼 수 없다. 상식적으로도 그렇고, 신앙적으로도 그렇다. 교회법에는 목사에 대한 권징 절차와 위에서 살펴본 '권고 사임' 제도가 마련되어 있다. 이는 교회법적으로도 목사가 통제 불가능한 지위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그 정도만 문제가 될 뿐이다. 목사는 교회 내에서 교인들에 대해 어느 정도로 통제되어야 하는가? 다른 단체의 대표들처럼 임기를 설정하거나 신임 여부를 물을 수 없는 것인가?
최근 전국 여러 법원에서 잇따라 목사에 대한 불신임 절차가 가능하다는 취지의 판결이나 결정을 내놓고 있다. 부산의 A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와 경주의 B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의 교인들은 담임목사(위임목사)와 갈등을 빚던 중(두 교회 모두 예배를 따로 드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목사를 불신임하기 위해 공동의회를 소집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공동의회는 당회장이 소집해야 하는데 목사님이 당회장이어서 공동의회를 소집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이에 위 두 교회는 민법상의 임시총회 소집 허가 절차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이 절차는 원래 사단법인의 이사가 임시총회를 소집하지 않을 경우 그 구성원의 5분의 1 이상이 목적 사항을 제시해 이사에게 임시총회를 소집할 것을 청구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사가 2주 내에 그 절차를 밟지 않을 때, 법원에 그 소집 허가를 신청하는 것이다(민법 제70조 제2항, 제3항).
이 절차는 비법인사단에 해당하는 교회도 활용할 수 있다. 교회의 경우에는 대부분의 교단 헌법에 교인의 3분의 1 이상이 공동의회를 소집할 것을 요구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따라서 그 신청 요건은 교인의 3분의 1 이상이다. 즉, 교인의 3분의 1 이상이 당회장인 목사에게 공동의회의 소집을 요구했는데도 목사가 2주 내에 그에 응하지 않으면 교인들은 법원에 '공동의회 소집 허가 신청'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이다.
위 두 교회가 이런 신청을 하자, 목사 측은 공히 우리 교단 헌법상 목사 불신임 제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으므로 위와 같은 공동의회 소집 허가 신청이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에 대해 법원은 위임목사의 해임을 위한 안건이 공동의회의 의결 사항에 해당할 수 있다고 전제하고, 목사의 해임을 회의 목적 사항으로 하는 공동의회를 소집하는 것을 허가한다는 결정을 했다(부산지방법원 2015. 9. 3. 자 2015비합41 결정, 대구지방법원 경주지원 2015. 9. 21. 자 2015비합3000 결정). 그중 예장통합 교단에 속한 교회에 대해 법원이 내린 결정의 주요한 논거는 다음과 같다.
△이 사건 교회와 같은 지교회는 교단과 분리된 별도의 비법인사단에 해당하고, 비법인사단은 관련 법령 또는 규약에 따라 대표자의 선임 및 해임을 할 수 있다. △특히 이 사건 교회와 같은 지교회는 지교회의 독립성이나 종교적 자유의 본질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교단 헌법에 구속된다(대법원 2006. 4. 20. 선고 2004다37775 전원 합의체 판결 등 참조). 비법인사단의 대표자인 목사의 청빙 내지 불신임에 관한 사항은 교회의 독립성 및 종교적 자유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목사를 신임투표로 사임시킬 수 없다는 이 사건 헌법 시행 규정 제26조 제4항은 사건 교회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 △비법인사단의 대표자를 둘러싼 내부 갈등이 심화되고 있고 그 대표자와 구성원들 사이의 신뢰 관계가 파탄에까지 이르고 있다면, 그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이를 해결할 수 있도록 비법인사단 총회인 공동의회의 소집을 허가해 충분한 논의를 통하여 해결 방법 등을 모색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하는 것이 비법인사단의 성격에 부합한다. 이처럼 법원은 교단 헌법에 목사 불신임 제도가 명시적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고, 나아가 그것을 금하는 취지의 규정이 있다고 해도 교회 내에서 교인들이 목사 불신임 안건을 처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명시적으로 판단한 것이다.
성남의 다른 한 교회. 이 교회도 예장통합 교단에 속해 있다. 이 교회의 교인들은 작년에 위와 같은 '임시 공동의회 소집 허가 신청' 절차를 통해(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 2014. 10. 27. 자 2014비합40) 임시 공동의회를 소집하여 위임목사인 담임목사를 불신임했다. 그러자 담임목사는 교회를 상대로 '공동의회 결의 무효 확인의 소'를 제기했다. 자신을 불신임한 공동의회에서의 결의가 무효라는 것이다. 그 논거는 위와 같았다. 즉, 우리 교단 헌법상 목사를 불신임하는 제도는 없다는 것이다. 그에 대해 법원은 다음과 같이 판단했다.
"비법인사단인 피고 교회는 사원총회에 해당하는 공동의회의 결의로서 그 대표자인 위임목사를 해임할 수 있고, 이 사건 헌법 정치편 제28조 제2항이 이 사건 교단 소속 교회의 목사는 당회의 결의와 교회 공동의회의 출석 회원 3분의 2 이상의 청빙 찬성투표를 받아 취임한다고 규정하고 있을 뿐, 비록 교회 구성원의 결의로써 위임목사를 불신임할 수 있는지에 관하여 근거규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목사의 청빙을 결의한 교회의 공동의회는 당초 이루어진 목사 청빙 결의를 철회하는 불신임 결의를 할 수 있다고 봄이 상당하다."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 2015. 9. 21. 선고 2015가합966 판결)
수원지방법원 역시 명시적으로 목사에 대한 불신임 결의가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필자는 위 판결과 결정이 우리 교회와 교단에 던지는 메시지가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현재 교회 내 분쟁은 심각한 수준이고 그 대부분이 목사와 관련한 것이다. 문제를 교회 내에서 자주적이고 민주적으로 해결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교회가 우리 사회에서 어떤 모습으로 존립하는지가 결정된다. 교회에서 생긴 문제를 내부에서 해결하려면 대표자의 갱신 절차가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대표자에 대한 임기를 설정하든지 대표자를 불신임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갈등의 끝에서는 이 절차에 따라 해결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목사에게 결코 불리하지 않다. 목사를 불신임하려면 출석 교인의 2/3의 찬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한국교회는 이런 제도를 마련하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 한번 위임목사가 되면 정년 퇴임할 때까지 그 지위가 무조건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도대체 어느 단체의 대표가 그런 지위를 누리고 있는가? 대표자에게 막강한 권한과 권위를 누리게 하면서도 그 지위를 정년까지 보장하고 있는 단체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교단은 권징 절차가 마련되어 있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는데, 교단이 주관하는 사법 제도인 권징 절차와 교인들이 주도하는 민주적 제도인 불신임 절차는 엄연히 구분된다.
그리고 교단이 목사에 대해 행하는 권징을 객관적이고 공평하게 시행한다고 믿기도 어려운 지경에 이르러 있다. 근로자의 경우 고용을 보장하는 정규직이 올바른 대안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종속노동에 대한 최소한의 안전판이다. 그러나 대표이사는 결코 정규직이 될 수 없다. 대표자는 책임지는 사람이지 안정을 누리는 사람이 아니다. 책임을 묻는 방식이 거칠고 인과적으로 정확하지 않다고 해도 그걸 감내하는 것이 대표의 숙명이다.
목사가 지금처럼 위임목사의 지위만 내세운다면 곧 '철밥통'으로 불릴 것이다. 그러나 목사는 마땅히 '순례자'로 불려야 한다. '부르심을 입은 자'와 철밥통은 어울리지 않는다. 본토 아비 집을 언제든 떠나는 것이 목사의 자세여야 한다.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움막 셋을 짓고 여기에 머물겠다고 말해서는 결코 안 된다.
그곳이 교회라 해도 말이다. 그런 식으로 순례를 해서 얻는 대가가 이 땅에서는 사회적 존경이고 나중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다. 교회에서 자주 고백하는 대로 하면, 위 판결은 하나님께서 법원을 이용해 목사를 선교 현장으로 내모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교회 갱신의 불 폭탄을 터뜨린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법원의 입장은 이제 확고해졌다. 전국 각지의 법원에서 동일한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이 그 단적인 예이다. 이런 상황인데도 위임목사의 지위만 내세운다면, 아, 정말 답이 없게 된다. 조금 더 시련이 필요한 것으로 믿는 수밖에는.
강문대 / 변호사, 강문대법률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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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을 배우다
히5:7-10/ 김기석
[예수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경외심을 보시어서, 그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에게서 멜리세덱의 계통을 따라 대제사장으로 임명을 받으셨습니다.]
• 구리 거울 속의 나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청명하기 이를 데 없는 맑은 하늘을 보면 마음이 시원해지다가도 괜히 서러워집니다. 그 맑은 하늘과 대조되는 땅의 음습함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비루한 욕망에 휘둘리는 인간의 현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늘은 그저 맑기만 합니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그러한 맑음을 되찾기 위한 여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고 말합니다. 우리 속에는 적어도 하나님을 반영하는 뭔가가 있다는 말입니다. 정교회의 이콘을 보면 악인이나 사탄까지도 흉칙하게 그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타고난 악인이 아니라 빛을 잃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이 정교회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윤동주는 1942년 1월 말 경에 <참회록>이라는 시를 썼습니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이다지도 욕될까". 겨우 스물 네 살에 불과했던 시인은 왜 이런 자괴감에 사로잡힌 것일까요? 그때 그는 일본 유학을 앞두고 있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사실이 이 예민한 젊은이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탄식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어 보자"고 다짐합니다. 여기서 '거울'은 마음을 이르는 은유일 것입니다. '닦어 보자'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본바탕이 맑음임을 잊지 말자는 다짐일 것입니다. 자칫하면 수치와 부끄러움에 떠밀려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수치와 부끄러움을 자기 삶으로 수용하면서도 자기 마음의 본바탕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 하고 있습니다.
윤동주의 거울만 흐린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거울도 흐리지 않은가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본래의 모습을 잃은 채, 파란 녹이 낀 모습을 그냥 우리 현실로 수용한 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 눈길을 사로잡는 것들을 따라가느라 숨이 가빠서 우리가 본래 가야 할 곳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요? 겉사람을 가꾸는데 진력할 뿐 속사람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요? 자신에게 몰두하느라 함께 살라 하신 이웃들의 고통을 모른 체 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덧거친 세상사에 시달리는 동안 입은 마음의 상처 때문에 온통 자기 연민에 사로잡힌 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마음을 자꾸만 본래의 자리에 되돌려놓기 위해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우리는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에 속절없이 끌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순간순간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여쭙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지 않는 한 우리는 결핍과 욕망, 아픔과 자기 연민에 사로잡힌 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부자유한 삶이고 타락한 삶입니다.
• 하나님의 뜻을 연주하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은 참을 찾아가는 이들이 어떤 마음과 자세를 갖고 살아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5:7a)
이 구절을 볼 때 우리는 즉시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떠올립니다.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이라는 표현 때문입니다. 하지만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기록하고 있는 복음서 어디에서도 주님이 그렇게 기도했다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고뇌에 차서 간절히 기도하셨다(누가)든지 괴로워하셨다(마가)는 표현만 나올 뿐입니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을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와 연결시키는 까닭은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라는 표현 때문일 것입니다.
죽음이 예기되는 상황에서 예수님이 그렇게 기도하셨을 것만 같은 것이지요. 하지만 이 구절을 그렇게만 한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일생 자체가 기도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죄와 어둠과 슬픔을 보고 아파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바치신 '기도와 탄원'은 당신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히브리서는 주님의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경외심을 보시어서, 그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5:7b)
'예수의 경외심'이란 어떤 것일까요? 저는 이것을 하나님의 뜻에 대한 '아멘'이 되기 위하여 자기를 온전히 내려놓은 삶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합니다. 성공회의 수장인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로완 윌리엄스는 예수님의 삶을 연주자들에 빗대어 설명했습니다. 가수나 연주자들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다른 이들의 작품과 비전에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연주가 이어지는 동안 작곡가의 상상과 비전은 연주자의 존재를 '가득 채우며'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감동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목적을 쉼 없이, 음정을 놓치거나 박자를 틀리는 일이 없이 온전히 표현해내셨습니다. "그의 삶의 모든 면모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 펼쳐 내는 하나의 연주"(로완 윌리엄스, <신뢰하는 삶>, 김병준·민경찬 옮김, 비아, 2015년 7월 7일, p.107-109 참고)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예수님의 삶을 보시고 세상을 위해 바치신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바치는 기도에 응답이 없다면 우리 삶이 하나님의 선율을 혼신의 힘으로 연주하는 삶인지 먼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아픔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아픔 때문에 우는 사람, 자기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서 간구하는 분의 기도를 하나님이 어찌 외면하실 수 있겠습니까? 불의한 세상에서 부르짖는 의인들의 기도가 마치 허공을 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방법을 신뢰해야 합니다. 진실한 기도는 헛되이 흩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기도를 드린 후에는 그 기도가 응답된 줄로 믿고 살아야 합니다. 기도는 바라는 바를 아뢰는 것(祈禱)이기도 하지만 바라는 바를 기획하고 도모하는 일(企圖)이기도 합니다. 영국교회의 아침 기도문에는 "오늘 하루, 나의 삶이 누군가가 주님께 바친 기도의 응답이 되게 해달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런 진실한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 순종을 배우심
8절을 보겠습니다. "그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이 구절은 평범하게 보이지만 평범하지 않습니다. 복음서에서 우리가 만나는 예수님은 늘 가르치는 분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시고, 제자의 도리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는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심으로 순종을 배우셨다고 말합니다. 신약성경에서 단 한 번 나오는 말입니다.
'배움'은 본래 자신의 무지 혹은 무능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즉 완전한 인간으로 보기에 '배우셨다'는 말에 당황합니다. 하지만 배움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의 아픔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익혔고, 고통 받는 이들 곁으로 다가섬을 통해 사랑을 배우셨습니다.
루소는 인간의 본래적 허약성을 인지하는 것만이 우리를 사회적 존재로 만들고 인간다움의 가치로 향하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자신의 그 '부적합성'이야말로 공동체다운 공동체에 대한 희망의 기초가 될 수 있다고도 말했습니다(마사 누스바움, <공부를 넘어 교육으로>, 우석영 옮김, 궁리, 2012년 4월 5일, p.72 요약). 자신의 한계를 알 때 사람은 비로소 다른 이들의 아픔 또한 알게 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된다는 말일 겁니다.
주님이 겪으셨던 고난은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에서 겪은 아픔이 아닙니다. 악한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겪을 수 밖에 없었던 아픔입니다. 고통을 겪을 때 사람들은 대개 의기소침해지거나 이기적이 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얼이 살아있는 사람은 고난을 통해 더욱 맑아지고 단단해집니다.
오산학교를 세우신 남강 이승훈 선생은 105인 사건으로 감옥에 갇혀다가 1915년에 출옥하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감옥이란 이상한 곳이야. 강철같이 굳어져서 나오는 사람도 있고, 썩은 겨릅대처럼 흐느러져서 나오는 사람도 있거든." '겨릅대'는 껍질을 벗긴 삼대를 이르는 말입니다. 겨릅대는 똑똑 부러집니다. 하지만 고난을 통해 강철같이 단련되는 이들도 있습니다.
바울 사도의 말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누가 감히 고발하겠습니까? 의롭다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누가 감히 그들을 정죄하겠습니까?"(롬8:31, 33-34a). 주님은 제자들에게 "몸은 죽일지라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이를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도 몸도 둘 다 지옥에 던져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10:28) 이르셨습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당국의 명령을 어기고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쳤다며 위협하는 대제사장에게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행5:29) 하고 응대했습니다. 고난을 통해 자유에 이른 사람의 말입니다. 이런 이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도 자발적으로 고난 속으로 걸어들어가심을 통해 하나님의 뜻 안에 확고히 거할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신 예수님은 마침내 완전하게 되셨다고 말합니다. 완전이란 하나님과의 틈 없는 일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주님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요14:11)는 말을 여러 차례 하셨습니다. 하지만 본문의 맥락에서 완전하게 되심은 부활 혹은 하나님께로 올리우심을 이르는 말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다음 대목과 연결이 됩니다.
• 다리 놓는 사람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시고 마침내 완전하게 되신 예수님은,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 순종한다는 말은 주님의 길을 자기 길로 삼는다는 말입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사람은 모두 자기 중심적입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우리를 자기 중심성의 덫에서 풀려나 이웃들 곁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이익에 발밭은 사람들이 보기에 십자가의 길은 어리석기 이를 데 없는 길입니다. 하지만 오직 그 길만이 세상에 평화와 생명을 가져오는 길입니다.
자기를 누군가에게 선물로 주는 행위가 아니고는 평화를 만드는 방법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불화를 일으키는 이들을 제거하면 평화가 정착되리라 생각하지만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숙대 교수인 김응교 선생은 "어떤 여행이든 그 종착점이 새로운 중심, 곧 설움 '곁으로' 향하는 여행이라면, 그 길은 순례의 길이요, 축복의 길이 될 것"(김응교, <곁으로>, 새물결플러스, 2015년 8월 31일, p.48)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오늘 고통받는 이들 곁으로 다가설 수 있는 것은 우리 곁으로 다가오시는 주님과 만난 그 감격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대제사장이라고 말하기에 주저함이 없습니다. 레위 가문에 속한 제사장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르는 대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멜기세덱 이야기는 창세기 14장에 나옵니다. 아브람은 여러 부족들이 벌인 전쟁의 와중에 사로잡혀간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집에서 낳아 훈련시킨 사병 삼백 열여덟 명을 데리고 단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는 치열한 전투 끝에 적들을 물리쳤고 롯은 물론 빼앗겼던 재물까지 다 되찾아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소돔 왕은 사웨 벌판 곧 왕의 벌판까지 나와 아브람을 영접했습니다. 그때 살렘 왕인 멜기세덱 또한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는 가장 높으신 하나님, 곧 엘 엘리욘의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아브람에게 복을 빌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람에게 원수들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신 가장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요구합니다. 아브람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에서 열의 하나를 멜기세덱에게 주었습니다(창14:17-20).
히브리서 기자는 멜기세덱을 통해 예수의 대제사장직을 설명합니다. 멜기세덱은 정의의 왕, 평화의 왕으로 소개됩니다. 그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생애의 시작도 생명의 끝도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는 아브라함을 축복했는데, 축복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서 받는 법이라면서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더 소중한 존재임을 부각시킵니다. 성전 체제를 떠받들고 있던 레위 계통 제사장들을 통해서는 더 이상 구원을 이룰 수 없었기에 하나님은 새로운 계통의 제사장을 보내주셨습니다. 그가 바로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르는 대제사장 예수입니다. 그는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대신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침으로 단번에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대제사장 혹은 교황을 이르는 말이 폰티프(pontiff)인데 이 말은 로마의 대신관을 가리키는 pontifex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폰티펙스는 본래 '다리를 놓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대제사장 예수라는 말이 어색하거든 다리를 놓는 사람 예수라고 바꿔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은 하늘과 땅 사이에 다리를 놓으셨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사이, 남자와 여자 사이에 다리를 놓아 서로 소통하게 하셨습니다. 에베소서는 예수님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심으로써 모두가 한 가족이 되어 살도록 하셨다고 말합니다(엡2:11-22).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있는 곳에서 이러한 사건이 자꾸 일어나야 합니다. 주님이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신 것처럼 우리도 화해의 사절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삶으로 익혀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삶으로 연주해야 할 하늘의 선율은 평화와 생명이어야 합니다. 이 아름다운 가을날 이런 소명을 이루는 기쁨으로 우리 삶이 아름답게 무르익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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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에 중독된 교회
진짜 은혜가 그립다
최태선 | tschoi45@hanmail.net
젊은 부부가 귀농을 하였습니다. 농사를 지어 그것을 가공하여 부가가치를 높이기로 하였습니다. 그들이 선택한 작물은 참깨였습니다. 신통치는 않았지만 마침내 참깨를 수확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참깨로 100% 진짜 참기름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진짜 참기름을 만들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부부는 그 참기름이 그렇게 계속 잘 팔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얼마 후에 손님이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유인즉슨, 그 참기름이 진짜 참기름이라는 걸 믿지만 그 참기름 맛이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가짜 참기름 맛에 길들여진 입맛 탓에 정작 진짜 참기름이 맛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참깨 농사를 직접 지어 진짜 참기름을 만들어 팔겠다는 부부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착향제와 조미료를 가미한 강력한 가짜 참기름의 강력한 맛은 본래 참기름의 맛을 잠식하였습니다. 사람들의 입맛이 가짜에 중독된 것입니다.
이와 똑같은 일이 교회 안에서도 발생했습니다. 언제나 가시적이고 강력한 것을 원하기 마련인 인간의 종교적인 심성은 기독교 복음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의미를 왜곡하여 종교적 카타르시스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체험이라는 단어로 각색하여 그런 체험이 없거나 그런 체험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압박하게 되었습니다
.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들이 은혜를 받아 불같은 체험을 했다고 주장하는 자신에 넘치는 그 사람들을 설득시킬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큰 믿음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사납고 거칠어진 그 사람들에게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설명해줄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그런 그들의 강압적인 주장에 설득되어 합류함에 따라 그런 사람들이 큰 무리를 이루게 되고 그것을 성령의 역사라고 주장하기 시작하면 기독교는 정말 대책이 없는 사이비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김 정주라는 분이 쓴 "교회에선 '주여, 주여' 교회 문 밖에선 '죽여, 죽여'"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거기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찬송도 불이 꼭 들어간 찬송이어야 하고, 말씀도 불같은 말씀이어야 하고, 기도도 불이 임하는 기도이어야 하고, 무엇보다 부흥회의 열매는 불 받은 사람들이 나타나야 했다. 그렇게 불같은 부흥회가 잘 마쳐지면 그 부흥 강사 목사님에게는 불의 종이라는 칭호가 하사된다. 그분들을 보면서 나도 언젠가 그런 불의 종 명예의 전당에 오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신기한 현상을 보았다. 이러한 부흥회의 불이 지나가고 나면, 사람들의 겉은 엄청나게 뜨거워진 것 같고 당장 오대양 육대주라도 복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달려갈 것 같은 기세를 보이는데, 교회 주차장에서는 겉이 노릇노릇 익은 얼굴로 서로 먼저 나가겠다고 다투기 시작한다. 주차 안내를 하는 나는 내 말을 듣지 않는다고 열불을 낸다. 여전히 같은 교회 안에서 형제자매들을 이간질하고 미워한다. 이간질하는 모습을 보는 나는 그들을 판단하고 정죄한다. 세상이 아닌 가정에 돌아가서 불(?)을 쏟는다. 교회에서 사람들이 볼 때는 “주여 주여” 하는데 교회 밖에서 사람들이 안 볼 때는 “죽여 죽여” 한다.
강력한 종교적 카타르시스에 중독되어 복음으로부터 벗어난 사람들의 모습을 잘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필자만의 특별하거나 개인적인 경험이 아니라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 리얼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가짜 은혜의 맛에 길들여진 사람들의 열매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그런 분들은 진짜 은혜의 맛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가짜 참기름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진짜 참기름이 안 팔렸던 것처럼, 이제는 진짜 은혜가 외면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모두 은혜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요 1:12)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분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그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해줍니다.
"우리는 모두 그의 충만함에서 선물을 받되, 은혜에 은혜를 더하여 받았다." (14)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 바라본다면, 우리는 은혜를 볼 수 있고, 그 은혜는 우리에게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울고 웃게 만들 수 있습니다. 때론 실망을 시키거나 담대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또 그것은 우리의 믿음에 도전하여 믿음을 풍성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은혜는 우리의 일상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주어지면 무엇보다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보게 됩니다. 원래 의도된 본연의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대로, 거룩하고, 평화롭고, 너그롭고, 친절하고, 온유하고, 그리고 있는 그대로 은혜롭게 보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그분으로부터 받고 또 받았다는 은혜라는 이 말은 추상적이어서 감을 잡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은혜란 무엇일까요?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리스어로 '카리스'인 은혜는 감사와 관계가 있습니다. 은혜란 감사하는 마음에서 드러납니다. 감사는 내 능력과 상관없이 내게 주어진 것에 대해 우러나는 마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러난다는 말에 조금 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은혜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또 그렇기 때문에 은밀합니다. 때론 강력한 쓰나미와 같이 밀려들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잔잔한 파문으로 마음속에 전해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생명이 그분으로부터 받은 은혜라는 것을 인식할 때, 우리는 마리아처럼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눅 1:38)라고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주어진 삶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우리의 존재 전체를 그분에게 돌려 맡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세리처럼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 내고, 가슴을 치며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눅18:13)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고해(苦海)같은 인생이 선물이고, 주님의 은혜라는 것, 못난 자신이 은혜 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 책의 글들은 바로 그런 깨달음의 글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은혜에 항복한 사람들의 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글을 번역하며 때때로 그들이 느꼈던 은혜가 제게도 전달되어 혼자서 눈시울을 붉히곤 했습니다. 보지 못했던 제 삶 속의 은혜가 오버랩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을 통해 제게도 은혜를 전해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책의 글 가운데 한 저자는 “인생은 폭풍우가 지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빗속에서 춤추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또 다른 이는 자신의 인생을 은혜의 "수증기"로 가득 찬 인생이라고 말합니다.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감격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진짜 은혜를 맛보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진짜 은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진짜 은혜는 교회의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진짜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꼭 전달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