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대학생 8000명 평창 집결 / 남대문교회는 정말 130년 전에 세워졌을까 2015-08-28 07:43:03 read : 5183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기독대학생 8000명 평창 집결 ‘뜨거운 찬양’
CCC 여름수련회 현장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소속 8000여명의 대학생들이 25일 강원도 평창 휘닉스파크에서 개최된여름수련회에서 뜨겁게 찬양하고 있다. 한국CCC 제공
“씽씽씽 천국에 울리는 노래∼.”
25일 태풍 고니의 영향권에 속한 강원도 평창 휘닉스파크에는 많은 비가 내렸다. 하지만 전국에서 모인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소속 8000명의 대학생들은 쏟아지는 빗줄기에 아랑곳 않고 두 손 들고 펄쩍펄쩍 뛰며 하나님을 찬양했다. 우비를 입었지만 땀과 섞인 빗물은 옷과 신발 안으로 금세 스며들었다. 인생의 AD와 BC가 갈라지는 역사적인 마당에 옷이 젖는 불편함은 사소한 것이었다.
무대에 오른 박성민 CCC 대표는 절대자 하나님의 섭리를 강조했다. 박 목사는 “우리는 우주보다 더 놀랍고 특별한 존재”라면서 “세상 어느 것보다 위대한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겠다고 여러분을 지금 초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인생에서 의미 있는 선택, 의미 있는 가치관의 변화를 지금 이 자리에서 경험하자”고 강조했다. 태풍의 영향으로 빗발이 굵어지고 바람이 거세졌지만 참가자들의 기도는 점점 더 뜨거워졌다.
대구에서 온 천성화(20·여)씨는 “여기에 모인 청년들과 뜨겁게 찬양하고 기도하면서 ‘대한민국 기독 청년들이 아직 안 죽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며 “남은 시간도 무척 기대가 된다”고 말했다.
충북 충주 한국교통대에 재학중인 이대현(25)씨는 “대학 4학년인데 앞으로의 진로를 기도로 준비하기 위해 왔다”면서 “수련회 첫날부터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았는데, 앞으로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한국CCC는 국내 최대의 대학생 선교단체다. 고 김준곤 목사가 1958년 설립한 한국CCC는 ‘민족의 가슴마다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는 구호 아래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의 정예요원을 길러냈다. 전도용 소책자 ‘사영리’, 지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는 ‘거지순례전도’, 해외선교의 장을 연 ‘단기선교’는 CCC가 원조라고 할 수 있다.
77년 충북 영동 심천 미루나무섬에서 시작된 CCC 여름수련회는 학생선교 사역의 정점에 있다. CCC 회원들은 그동안 수련회 현장에서 목 놓아 기도하며 눈물로 헌신을 다짐해왔다. “인류의 진정한 소망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누가 캠퍼스와 이 민족을 살릴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수련회 때마다 김 목사가 외쳤던 백문일답(百問一答)은 CCC 여름수련회의 트레이드마크다.
이번 수련회는 원래 6월에 예정돼 있었지만 메르스(중동호흡기 증후군) 여파로 2개월가량 연기됐다. CCC는 여름수련회에서 새친구반이라는 모임도 운영한다. 예수를 모르는 500여명이 수련회 현장에 와 있는데 이들에게 구원과 인생의 의미를 알려줘 예수를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토록 한다.
정희수(39) CCC 간사는 “민족의 입체적 구원을 위해 전국 40여개 지부에서 모인 청년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고 있으며, 예수를 모르던 청년들이 주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는 역사가 지금 일어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여름수련회는 28일까지 이어진다.
========================================================
뇌성마비 장애 송명희 시인 밀알복지재단 홍보대사 위촉
밀알복지재단(이사장 홍정길 목사)은 지난 21일 ‘나’ ‘그 이름’ 등 찬양시로 유명한 송명희(사진 오른쪽) 시인을 홍보대사로 위촉했다.
뇌성마비 장애를 갖고 태어난 송 시인은 장애를 원망하기보단 글쓰기에 재능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따뜻한 글을 써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저서로는 시집 ‘공평하신 하나님’, 자전 에세이 ‘내가 너를 들어 쓰리라’, 소설 ‘표’ 등이 있다.
송 시인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과 같이 밀알복지재단의 홍보대사로서 한 알의 밀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소감을 전했다. 정형석 밀알복지재단 상임대표는 “송 시인과 함께 희망찬 메시지를 전할 것”이라고 밝혔다.
▲힐송교회 바비 휴스턴 목사가 2014년 뉴욕 콘퍼런스 당시 메시지를 전하던 모습. ⓒ힐송교회 제공
이슬람국가(IS)가 꾸란(코란)을 이용해 여성들을 상대로 한 조직적 성폭행을 정당화하고 있다는 사실이 보도된 가운데, 힐송교회 바비 휴스턴(Bobbie Houston) 목사는 최근 “이러한 충격적이고 끔찍한 상황에 대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휴스턴 목사는 “ISIS가 성폭행을 교리적으로 보장하고 있다(ISIS Enshrines a Theology of Rape)”는 제목의 8월 13일(이하 현지시각)자 뉴욕타임스 기사를 읽고 난 후, 자신의 SNS에 긴급 기도제목을 올리고 약 10만 명과 해당 내용을 공유했다.
루크미니 칼리마치 기자가 쓴 이 기사는 IS가 이라크와 시리아의 점령 지역에서 어떻게 성노예들을 전당화하고 있는지를 집중적으로 파헤치고 있다. 이들은 성노예를 두는 것을 꾸란으로 뒷받침할 뿐 아니라, 대원들을 늘리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수천 명의 야지디족 성인 여성들과 소녀들은 인신매매의 표적이 되어 왔다. 이들은 강제로 결혼이나 반복적인 성폭행을 당했다. 칼리마치 기자는 “한 12세 소녀는 입에 재갈을 문 채 묶여서 IS 대원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그 대원은 성폭행 전후로 기도를 했다. 성폭행을 종교적인 행위처럼 한 것”이라고 폭로했다.
UN, 휴먼라이츠와치, 국제사면위원회 등이 발표한 보고서에도 이와 비슷한 수많은 사례들을 찾아 볼 수 있다고 그녀는 덧붙였다.
휴스턴 목사는 자신의 팔로워들과 힐송교회 여성 사역부인 ‘칼라 시스터후드’(Colour Sisterhood) 관계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기도를 요청했다. “시스터후드와, 스스로 시스터후드라고 생각하는 모든 여성들에게, 이 글을 읽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이 극악한 실상에 대해 간절한 기도를 요청한다. 매일 정오 기도하라.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모른다면, 시편 10편을 놓고 기도하라. 영으로 기도하라. 이해를 가지고 기도하라. 권위를 가지고 기도하라. 희생자들을 위해 기도하라. 핍박자들을 위해 기도하라.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 난 기도가 길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러분의 알람을 정오 12시에 맞추어 두고, 하늘에 기도를 올리라.”
휴스턴 목사는 지난 20일 SNS에 “반인신매매 활동가들인 A21의 크리스틴 케인 목사, 리자 비비어 등과 대화 중”이라면서 “우리는 기도가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확신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시길 기대하고 기다리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기도할 것”이라고 했다.
최근 T.D 제이크스 목사의 ‘메가페스트 2015’ 행사에 참석한 비비어는, 그녀의 남편 존 비비어와 함께 국제 사역인 ‘메신저 인터내셔널’을 이끌고 있다. 이 사역의 모토는 ‘가르치고, 나아가서, (인신매매에서) 구출해 내는 것’이다.
비영리단체인 A21 캠페인을 이끌고 있는 케인 목사는, 인신매매에서 탈출한 이들을 보호·구조·회복하는 사역을 통해 국제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그녀도 60만 팔로워들에게 칼리마치 기자의 기사를 공유하면서 이들의 실상을 알렸다.
==========================================
남대문교회는 정말 130년 전에 세워졌을까
1885년에 첫 공식 주일예배 드렸다고 주장…사료로 볼 때 1909년이 정확
옥성득
▲ 남대문교회 130주년 행사 초대문, 2015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의 남대문교회는 1885년 6월 21일 알렌의 집에서 드린 '공식' 주일예배로부터 시작되었다고 7년 전부터 주장해 왔으며, 올해 6월 130주년 기념식을 했다. 기념 예배에 앞서 열린 "첫 공식 주일예배 130주년 기념 역사 포럼"에서도 몇몇 교수들이 그것을 지지했다. ("제중원, 한국교회 태동의 요람" <뉴스파워>, 2015년 6월 22일자)
이 글은 그 주장을 다섯 가지 주제로 나누어 반박하려고 한다. 역사가의 1차 임무는 관련 사료를 발굴하고 정리해 사료 스스로 말하게 하는 실증적 연구를 하는 것이다. 2차적 임무는 자료의 해석인데, 이때 사료를 억지로 해석하지 않고 사건을 당대의 상황과 맥락 속에 놓고 다양한 사실들의 관계망과 상호 연결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삶의 정황과 시대의 흐름 속에서 큰 그림을 보면서 세세한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갈 때 재미와 교훈이 나온다. 남대문교회 창립 역사는 1차 사료의 제한적 사용과 사료의 억지 해석, 두 가지 면에서 문제가 있다.
▲ 남대문교회 130주년 행사 안내문, 2015년. 그 근거가 되는 1885년 6월 21일자 알렌의 일기를 "Our first State Sunday service"(첫 공식 주일예배)로 읽고 있다.
좌측 초대문의 소제목과 그 아래 내용은 남대문교회의 역사관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보여 준다.
1)한국교회 130년의 역사가 제중원에서 시작되었는가? 1885년이나 1886년에 제중원 남대문교회라는 것이 존재했는가? 한국 최초의 공식적인 주일예배가 제중원에서 혹은 알렌의 집에서 1885년 6월 21일에 시작되었는가?
2)남대문교회 역사가 한국교회의 역사인가? 1886년에 '제중원 신앙공동체'가 존재했는가?
3)2015년이 한국교회 130주년이라고 할 때 그것이 제중원의 첫 공식주일예배를 기점으로 하는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해서 나는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그 반론을 하나씩 이야기하려고 한다.
1. 1885년 6월 21일 알렌의 집에서 드린 주일 저녁 예배의 성격
이는 한국인 개교회의 출발이나 한국인 신자들을 위한 예배와 아무 상관이 없으며, 서울에 있던 장로회와 감리회 선교사들이 정기 주일예배로 드린 첫 예배로서 서울유니언교회의 출발점이 되었다. 남대문교회와 상관이 없는 예배였다.
▲ 2008년에 출판된 <남대문교회사> 표지에서 알렌과 제동 제중원 사진을 넣고 교회 기년을 1885년으로 잡았다.
2008년 12월 <남대문교회사>가 출판된 후 집필자의 대담 기사가 실렸다. 최근 130주년 행사도 이 책을 근거로 했으므로, 출간 당시 저자의 생각을 드러내는 인터뷰를 보자.
지난달 15일 출판된 <남대문교회사: 1885~2008>는 남대문교회 창립일에 대한 오랜 논의에 마침표를 찍었다. 120년이 넘은 남대문교회는 왜 지금에 와서야 창립일이 확정되었을까? 그 배경에 대해서 살폈다. 집필을 맡은 영남신대 정성한 교수는 "이번 역사 서술을 통해 남대문교회의 시작을 확실히 규정하게 된 것을 큰 보람으로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남대문교회는 창립 12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남대문교회사: 1885~2008>를 발간하면서, 1885년 6월 21일 알렌 선교사가 제중원에서 드린 예배를 교회의 창립일로 확정지은 것이다. 알렌은 그의 일기에서 당시를 "우리나라 안에서 드린 첫 공식 주일예배"라고 기록하였다. 이 자리에는 언더우드·아펜젤러 목사, 포크 대리공사도 함께 했다. 첫 공식 주일예배 이후에도 예배는 계속 되었고, 성찬식과 세례까지 베풀었다. 1886년 7월 18일 알렌 의사의 어학 선생인 한국인 노춘경은 제중원 중심의 '선교사 공동체'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중략] 이를 <남대문교회사: 1885~2008>는 "노춘경이 받은 세례는 한국인 '자생적 신앙공동체'와 서양인 '선교사 공동체'의 만남으로 이루어진 '제중원신앙공동체'의 시작이었다"고 기록했다. (사진과 인용문은 이범진, "잇따른 개교회사 편찬, 빛 보는 역사들" <뉴스파워>, 2009년 1월 14일자. 밑줄은 필자)
이 글에서 필자가 밑줄을 친 부분은 본문에 없거나 오역이거나 잘못 해석한 것이다.
1-1. 그것은 한국에서 드린 개신교의 첫 공식 주일예배가 아니라 장감선교회의 첫 연합 주일예배였다. 원문을 보면 "우리나라 안에서"란 말은 없다. 원문은 "Held our first stated Sunday service this eve. after dinner 8 pm. Dr. and Mrs. Heron, elder Mrs. Scranton, and myself and wife present."이다. "our"를 '우리나라 안에서'로 오역했다. 여기서 '우리'란 서울에 거주하는 장로회와 감리회 선교사들을 지칭하며, 그 예배는 장감 연합 예배였다. 따라서 한국인 교회의 출발이 아니라 선교사와 외국인 교회인 서울유니언교회의 출발이었다.
1-2. 남대문교회는 120년사나 최근 130주년 행사 안내문에서 알렌의 1885년 6월 21일 일기를 영문은 김원모의 읽기를 인용하고, 번역은 백낙준의 번역을 인용했다. (아마도 백낙준의 영어 책은 보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선교사들만의 예배였다는 백낙준의 해석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 백낙준의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 1832-1910 (Pyongyang: Soongsil College Press, 1929), p. 134는 알렌의 일기를 정확히 읽고 선교사들의 예배라고 규정했다.
▲ 그러나 김원모, <알렌의 일기>(1991), 474는 "Held our first State Sunday service"라고 잘못 독해하였으며, 한글 번역문에서는 "우리의 첫 일요 예배를 보았다"(p. 89)고 번역했다. "State Sunday service"란 말이 없기에 번역문에서는 "State"를 생략하고 그냥 일요 예배라고 옮겼다.
1-3. 1885년 6월 21일 알렌 의사의 집에서 드린 주일 저녁 예배는 첫 공식 주일예배가 아니라 첫 정기 주일예배였다. "첫 공식 주일예배"의 원문은 "our first stated Sunday service"로 "우리의 첫 정기 주일예배"로 번역해야 한다. 즉 1884년 9월 말 서울에 온 알렌 의사나 1885년 4월 5일 서울에 온 언더우드 목사, 5월 6일에 입경한 스크랜턴 의사는 이미 각각 가정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6월 21일 헤론 의사와 스크랜턴 가족이 온 날을 기점으로 장로회·감리회 선교사들이 다 함께 앞으로는 정규적인 예배를 드리자고 합의하고 첫 정기 주일예배를 정동에 있던 알렌의 집에서 드렸다. (스크랜턴 부인과 세 자녀는 도착한 날이라 여장을 풀고 정리하느라 스크랜턴 의사까지 예배에 참석하지 못했다.) 정 교수는 김원모, <알렌의 일기>(단국대학교출판부, 1991), 474쪽에 있는 영문 본문인 "our first State Sunday service"를 가지고 와서 'State'를 '공식' 예배로 번역했다. (정성한과 남대문교회는 "130주년 행사" 안내문까지 백 박사의 영문 서적을 확인하지도 않았고, 알렌의 원문을 제대로 읽지도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State'로 읽었다.)
그러나 이것은 '공식' 주일예배가 아니었다. 그 이유는 1)그 날 서울에 있던 두 목회 선교사(목사)인 언더우드와 스크랜턴이 참석하지 않은 채 의사 두 명과 부인들, 스크랜턴 여사만 참석했기 때문이다. 2)아직 종교의 자유는 물론 공개적으로 예배를 드릴 자유도 없었기 때문에 공식적인 예배가 될 수 없었다. 따라서 'stated Sunday service'는 '정기적인 주일예배'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1-4. 예배드린 장소는 제동의 제중원이 아니라 정동의 알렌 사택이었다. 첫 제중원은 경복궁 부근 제동에 있는 홍영식의 집을 개조한 것이었다. 1886년 구리개(동현)로 이전했으며, 1904년 남대문 밖 세브란스병원으로 발전했다. 알렌의 집은 정동의 미국공사관 옆에 있었는데, 언더우드와 헤론의 사택이 인접해 있었다.
1-5. 이 예배에 언더우드·아펜젤러·포크는 참석하지 않았다. 정성한은 당시 아펜젤러가 제물포에서 서울 입경을 기다리고 있었고, 아펜젤러 부부가 7월 29일이 되어서야 서울에 올 수 있었던 사실을 몰랐다. 그날 언더우드도 참석하지 않았으며 포크 공사가 올 이유도 없었다. 이런 기초적인 역사적 사실도 검토하지 않고 마치 장감 선교사 전체와 외교관까지 참석한 것처럼 하여 '공식적인' 예배로 조작했다.
1-6. 노춘경은 1887년 조직되는 정동장로교회의 교인이었다. 이 연재 3회에서 토론한 서울에서 처음 세례를 받은 한국인 노춘경은 언더우드에게서 교리와 성경을 더 배우고 1886년 7월 18일 정동 헤론의 사택에서 장감 선교사들이 경계를 선 가운데 비밀스럽게 언더우드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선교사 공동체'나 '구리개 제중원 신앙 공동체'의 일원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장로회 목사 언더우드로부터 세례를 받고 장로교인 되었다.
1-7. 장로교회는 '정동 신앙 공동체'를 형성했다. 노춘경은 실체가 없었던 '제중원 신앙 공동체'와 상관이 없었고, 곧 정동교회(나중에 새문안교회)로 발전한 장로회의 '정동 신앙 공동체'의 일원이었다.
2. 서울의 첫 개신교회인 유니언교회의 발전, 1885~1887
2-1. 위의 1-1항에서 언급한 유니언교회의 발전을 좀 더 살펴보자. 선교사와 외국인을 위한 서울유니언교회는, 1886년부터 한국인 개종자가 나오면서 1887년에 조직되고 출범하는 한국인 교회와는 다른 별도의 교회였다. 그동안 역사가나 개교회 역사위원회가 이 둘의 차이점을 잘 알지 못하거나 혼동했다. 선교사와 외국인들이 만나 예배하고 성찬을 베풀고 세례식을 거행한 것이 마치 서울에 있는 장로교회나 감리교회의 발전으로 연결되는 것처럼 오해했다. 서울의 첫 개신교회는 선교사와 외국인으로 구성된 서울유니언교회였다.
2-2. 유니언교회는 서울에서 가정 예배를 드리던 알렌 의사 부부, 언더우드 목사, 스크랜턴 의사가 헤론 부부와 스크랜턴 가족이 1885년 6월 21일 서울에 오자 그날 밤 알렌 의사 집에서 첫 연합 주일예배를 드리면서 시작되었다. 7월 말 아펜젤러 부부가 서울로 오면서 더욱 활기를 띈 주일 오후 연합 예배는 10월 11일 미국성서공회 일본 지부 총무 루미스 목사가 참석한 가운데 첫 성찬식을 가졌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집례한 이 성찬식에는 당시 제물포에 정박하고 있던 미 해군 군함 마리온 호의 장교 두 명도 참석했다.
2-3. 1886년에는 정규적인 주일 오후 예배에 일본인 감리교인이 세 명 참석하여 아펜젤러와 함께 성경 공부를 했다. 4월 25일 부활절에는 유니언교회의 첫 세례식이 거행되어 스크랜턴의 딸 마리온과 아펜젤러의 딸 엘리스가 유아세례를, 일본인 하야카와가 성인 세례를 받았다. 5월에 정동 언더우드고아원을 개원하고, 6월에 배재학당이 개학하고, 7월에 노춘경이 세례를 받으면서 한국인 선교사업이 시작되자, 7월에 선교사들과 외국인을 위한 유니언교회를 건축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정동에 별도의 예배처소를 마련한 후 11월에 아펜젤러를 첫 담임목사로 임명했다. 이로써 서울유니언교회가 공식 출범했다.
2-4. 1887년에는 아펜젤러 목사의 지도 아래 유니언교회가 정상 궤도에 올랐다. 4월 유니언교회 부활절 세례식 때에는 일본영사관 순사인 수기바시가 세례를 받았으며, 선교사와 외국인으로 성가대가 조직되어 있었다. 이 예배에 데니 판사가 처음으로 참석하기도 했다.
2-5. 남대문교회가 말하는 '제중원 신앙 공동체'라는 것은 1886-87년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정동 신앙 공동체가 1886년에 외국인의 유니언교회와 한국인의 정동장로교회와 정동제일감리교회로 분리 발전하였다. 곧 1887년 말 서울에는 3개의 개교회인 유니언교회, 정동장로교회(새문안교회로 발전)와 벧엘감리교회(정동제일교회)가 설립되어 있었다.
2-6. 또한 남대문교회는 1886~87년에 선교사역이 모두 제중원의 사역이었고 따라서 정동에서 이루어진 사역도 모두 '제중원 신앙 공동체'의 사역이었다고 강변하지만, 이미 1886년에 별도의 교육 기관, 의료 기관이 제중원과 독립하여 운영되고 있었다.
2-7. 제중원은 정부병원이라 병원 안에서는 어떤 종류의 종교 활동이나 전도가 불가능했다. 1886년까지 알렌이나 헤론은 전도할 수 있는 한국어 실력이 없었다. 그러나 그곳에 선교사 의사와 간호원이 사역함으로써, 복음전도가 없었더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의 실천으로서의 선교, 의료 사업 자체가 선교라는 넒은 의미에서의 선교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1894년까지 병원 안에서 한국인에게 복음을 전하거나 예배를 드릴 수는 없었다. 따라서 제중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제중원 신앙공동체'라는 말은 성립될 수 없었다. 1894년 에비슨 원장 이후 종교 활동이 가능했던 시기의 제중원 신앙공동체를 그 이전 시기에 적용할 수 없다.
3. 1885~87년 정동에서 발생한 한국인 개종자의 성격
알렌과 헤론이 선교사로 활동한 이 시기에 정동에 한국인을 위한 '제중원 신앙 공동체'는 없었다. 따라서 알렌 의사나 헤론 의사와 남대문교회는 상관이 없다. 남대문교회 측은 제중원을 지리적 의미로 보지 말고, 1885-86년에는 모든 선교 사역이 제중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서울 사역 전체가 제중원 사역이고 선교사 공동체도 '제중원 신앙공동체'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억지 주장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3-1. 장로회의 경우: 1886년 5월 11일 언더우드가 정동 고아원을 개원했다. 그것은 제동의 정부 병원 제중원에서는 전도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동에 작은 집을 구해 고아원을 시작하면서 소년들을 통해 그 부모나 친척에게 복음을 전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따라서 언더우드는 이를 첫 선교 기관으로 불렀다. 곧 5월 중순에는 정동에 정식 선교 기관(고아원)이 설립되어 있었고 이를 중심으로 정동의 한인신앙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발전하여 정동(새문안)교회가 되었다. 첫 개종자 노춘경도 제중원과 상관없이 개종하고 1886년 7월 18일 세례를 받았다. 따라서 1886년 후반 서울에는 ‘자생적인 한국인 신앙공동체’는 없었고, 선교사들과의 개별 접촉을 통해 개종자와 초신자가 발생하면서 정동에 한국인 신앙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정동장로교회와 벧엘감리교회로 발전했다.
1887년 9월 27일 조직된 정동장로교회는 한국 전체의 장로교인을 포괄하는 조직이었기 때문에 서울의 유일한 세례교인 노춘경을 비롯하여 소래에 있던 '자생적' 교인인 서상륜, 서경조, 최명오, 정공빈과 의주의 백홍준 등 14명의 세례교인이 참석하였고, 그 자리에 만주의 로스 목사도 참관했다. 일부 학자들이 1887년 조직된 정동장로교회 교인 14명이 대부분 제중원을 통해 개종한 서울이나 서울 인근 사람이라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서울에는 노춘경만 수세자로 참여했고, 나머지는 소래나 의주 등지에서 온 자들이었다.
3-2. 감리회의 경우: 6월 21일 헤론 의사가 서울에 도착하자 제중원에 임시로 있던 스크랜턴 의사는 제중원을 사임하고 자신의 정동 사택에서 선교 병원인 시병원(施病院)을 시작했다. 그는 정부병원인 제중원에서는 전도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있을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고 선교 병원을 시작해기 위해서 사직했다. 1886년 7월부터 제중원과 감리회는 상관이 없었다. 따라서 1886년 6월은 물론 7월 이후 장감 선교사 연합 예배를 ‘제중원신앙공동체’로 볼 수 없다.
3-3. 1886년 제중원이 구리개(동현)로 이전했으나 여전히 정동과 멀었다. 그래서 감리회는 한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남대문시장 부근에 상동교회를 세우게 된다. 1887~90년 헤론 부부가 정동에서 행한 전도 사업(성경공부 등)은 1887년 9월 27일 조직된 정동장로교회와 연계된 전도활동이었다. 헤론의 구리개 제중원 의료 활동은 환자를 치료하는 선에서 머물렀지, 그곳에 '제중원 신앙공동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미 정동에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설립되었고 그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고 전도가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대문교회는 역사적 사실을 억지로 연결시키지 말고 1894년 제중원이 에비슨 의사에 의해 선교병원으로 재편되면서 병원 안에서 전도와 예배가 시작되고 개종자가 나오면서 교회가 출발하던 시점을 찾아 교회의 전사(前史)로 삼아야 한다. 그것이 남대문교회 자체는 아니었으나, 이후 발전하고 연결되는 출발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894~1904년 구리개 제중원에서 형성된 '제중원 신앙공동체'가 1907~08년 남대문 밖으로 나와서 남대문밖교회를 세웠다. 1894~1904년 제중원 신앙 공동체가 마치 1885~1893년에도 존재한 것으로 오해하면서 남대문교회의 기원과 설립 연도에 오류가 발생했다.
3-5. 남대문교회가 발행한 130주년 순서지에 보면 <독립신문> 1897년 1월 21일자에 나오는 '조선 서울 장로교회 제중원' 구절을 제중원이 교회 기능까지 가진 것으로 해석했는데, 이 구절은 그저 장로교회 소속 병원인 제중원을 언급한 것뿐이다. '교회 제중원'이 아니라 '장로교회의 제중원'이라는 뜻이다. 곧 1894년 이후 정부 병원의 성격보다 선교 병원의 성격이 강했던 구리개 제중원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 제중원 간호원 제이컵슨 사망 기사, <독립신문>, 1897년 1월 21일
4. 남대문교회는 1909년 11월 21일에 창립되었다
그러면 세브란스병원 부근 남대문교회는 언제 조직 교회로 설립되었나? 결론부터 먼저 말하면 창립일은 1909년 11월 21일이다.
4-1. <남대문교회사, 1885-200>』이 나오기 전까지 교회는 오랫동안 1909년 11월 27일을 창립일로 지켜왔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를 수정하고 연도를 앞당기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4-2. 1979년 이전에는 1909년 11월 21일을 창립일로 알고 기념했다. 그 근거는 "Notes from the Stations," Korea Mission Field (January 1910): 7페이지였다. 본문을 번역하면 "11월 21일 남대문 회중이 교회로 조직되었다. 이 날 20명의 교우가 세례를 받고 입교인이 되었으며, 15명이 학습교인으로 등록했고, 13명이 다른 교회로부터 이명해 왔다." 명백한 기록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수용했다. 다른 교회로부터 13명이 이명해 왔다는 말은 이들이 홍문동교회 등록교인으로 적을 두고 있다가 남대문교회가 조직되자 교적을 옮긴 것으로 보인다.
이 기록과 동일한 내용이 1910년 1월 6일자 언더우드가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에 나온다. 언더우드가 남대문교회 당회장이었으므로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이제 정규 교회로 조직된 남대문교회에서는 36명이 신청하여 20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15명 학습교인으로 들어왔고, 현재까지 17명이 다른 교회에서 이적해 왔습니다." [옥성득·이만열 편역, <언더우드 자료집 제4권> (연세대 국학연구원, 2009), 24쪽.]
4-3. 그런데 1979년에 창립 날짜는 그대로 두고 연도를 1909년에서 1887년으로 수정하는 과감한 시도가 이루어졌다. 무려 22년이나 끌어올린 것이다. 새문안교회(1887년 9월 27일)나 정동제일교회(1887년 10월 9일)보다는 앞설 수 없기 때문에 최대한 연도를 올려 1887년으로 하고 날짜는 11월 21일로 해서 서울에서 세 번째로 설립된 교회로 만들었다. 이는 한국교회 사상 최초로 역사 끌어올리기 작업을 한 경우였다.
그 근거는 1887년에 헤론 의사 사택에서 한국인들의 성경 공부가 열린 사실이었다. 남대문교회는 이를 제중원교회와 연결되는 제중원 신앙 공동체로 보고 그 연도를 가져오되, 창립일은 전통적으로 지켜오던 11월 21일로 수용했다. 창립 일자와 연도를 섞은 일종의 혼종 창립일이었다. 이런 역사 왜곡이 교회 안에 잠재되어 있다가 2000년대에 다시 2년 더 끌어올리는 작업으로 분출되었다.
4-4. 남대문교회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신재의 장로)는 2007-08년 <남대문교회사>를 만들면서 문제의 1885년 6월 21일자 알렌의 일기를 재해석하여 이를 제중원 신앙 공동체의 출발로 보고, 그것을 남대문교회의 설립일로 만들었다. 2년을 끌어올리기 위해 개발한 논리 두 가지였다. 첫째 논리 A는 1885년 제중원이 선교의 중심이었고, 제중원의 의료나 교육 부분은 세브란스병원→연세대로 연결되지만, 신앙적 측면은 결국 남대문교회로 연결되므로, 1885년 알렌 의사의 집에서 열린 예배는 제중원교회→남대문교회로 연결된다고 보았다. 논리 B는 남대문교회 설립이 새문안교회와 정동감리교회보다 앞설 수 없다는 생각은 아직도 남아있는 목사나 선교사 중심의 편협한 생각으로, 의료선교사(의사)나 평신도들도 얼마든지 교회(하나님의 백성)를 세울 수 있다는 새로운 교회론이었다. 이런 이론은 아마도 1990년대 해외 선교에 나선 많은 의료선교사들이 병원에 신앙 공동체를 세우면서 생긴 듯하다.
4-5. 논리 A는 이 글 첫 부분에서 반박했다. 1-4~7을 보라.
4-6. 논리 B는 초기 한국교회사에서 지방에 교회가 세워질 때, 초기엔 목사나 장로 없이 세례 받은 몇 사람을 중심으로 신자 공동체가 형성되어 예배당을 구입하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때를 교회 설립일로 보았으므로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경우도 목사가 가서 학습 교인을 등록시키고, 세례 문답 후 세례를 주고, 이어서 영수(안수 받지 않은 장로)를 임명해 교회 예배를 인도하며 교인들을 관리하게 하고, 순회하는 조사(안수받지 않은 목회자)나 목사가 교회를 방문하여 지도하고 일년에 한 차례 이상 사경회를 통해 지도자 훈련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곧 목사(선교사)나 한국인 조사의 목회가 있었기에 회중교회 형태의 지방 개교회가 설립될 수 있었다. 서울에서도 장로교회는 목사가 목회하고 세례 교인들로 조직되어 나갔다.
4-7. 1897년 발행되기 시작한 <그리스도신문>을 보면 교회 이름, 예배 시간, 설교자 등을 안내하는 부분이 있다. 1907년까지 서울 지역 장로교회 주일예배 안내에 남대문교회는 등장하지 않는다. 조직 교회가 아니라도 독립문과 인성부재(지금의 인현동)에는 예배처소가 있어 예배를 드렸으나, 남대문에는 1907년 이전에는 병원 밖에 별도의 예배처소가 없었다.
4-8. 1905년 남대문 밖의 세브란스병원이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주일에 병원 안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면서, 1907년부터 별도의 예배 처소에서 예배를 드렸거나, 1908년에는 병원 밖에 예배당이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 이어 교인이 늘어나면서 집사·장로를 세우고 교회를 조직한 것이 1909년 11월 21일이었다.
4-9. 선교 잡지와 편지에 명백하게 교회 조직일이 명시되어 있는데 왜 남대문교회는 그 창립일을 끌어올리려고 1979년 이후 지난 36년간 노력해 왔을까? 그 이유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일부 장로나 집사 중에 세브란스병원 관련자들이 제중원-세브란스병원 역사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남대문교회사를 제중원 역사와 연결시키면서 1894년 이전의 제중원 역사까지 남대문교회로 연결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해 본다.
5. 1920년대 남대문교회 창립 멤버들은 창립연도를 1907년으로 보았다
1907년 설립설은 위에서 토론한 1909년 설립설과 모순되지 않는다. 1928년 9월에 발간된 <朝鮮예수敎長老會 史記>(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는 초기 각 장로교회의 설립 역사와 연도를 밝혀주고 있다. 선천의 양전백 목사가 초대교회의 산 증인으로 초고를 정리했으며, 서울 새문안교회의 차재명 목사가 여러 교인들과 대화하고 자료를 보완하여 최종 원고를 작성했다. 이 책은 1920년대 남대문교회 창립 교인들이 생존해 있을 때 서울에서 작성된 것이므로 당시 남대문교회 초창기 멤버들이 기억하고 수용하던 역사를 담고 있다.
이 史記(사기)의 187~188쪽에 나오는 정미년(1907년) 남대문외교회 설립의 역사는 어떠한가?
5-1. 장로교회 공식 역사서인 史記(사기)에 나오는 내용을 정리해 보자.
5-1-1. 남대문외교회는 1907년 세브란스병원 내에 설립되었다. 1907~1911년 독노회 시절로, 서울 경기 충청도 지역 교회가 '京忠代理會'(경충대리회)로 있을 때였다.
5-1-2. 그 병원(제중원)이 동현(구리개)에 있을 때 병원 안에서 모여 예배하던 신자 일부분과 홍문동교회의 신자 일부분이 함께 모여 설립했다.
5-1-3. 홍문동교회가 황모와 배모의 철도 부설 관계로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고 반선교사 독립교회를 세우려고 하자, 마침내 해산되고, 대부분의 교인은 승동교회로 가고, 그 일부가 남대문외교회를 설립했다.
5-1-4. 초대 당회장은 언더우드 목사요 장로는 에비슨 의사였다. 교회가 점차 발전하면서 최용호가 첫 조사로 시무했다.
1907년 설립은 남대문 제중원(세브란스병원)이 1904년 설립된 후 1907년 별도의 예배당을 병원 구내에 마련하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시점이다. 이 글 언더우드의 편지(1910년 1월 6일자)나 Korea Mission Field (Jan. 1910)에 나오는 1909년 11월 21일 교회 조직은 정식으로 남대문외교회 당회를 구성하고 세례식을 베풀고 교인 명부를 작성하고 공식적으로 교회를 조직한 날이다. 따라서 이 기록과 사기의 기록이 서로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5-2. 사기의 경우 지방의 개교회의 설립연도는 대개 그 마을에 세례교인들이 가정예배를 드리다가 함께 예배당을 사거나 지어서 좀 더 공식적인 예배를 드렸을 때를 잡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남대문외교회는 동현 제중원에서 예배드리던 일부 신자들과 홍문동교회 일부 신자들이 남대문 밖으로 나와서 1907년에 작은 예배당(장소는 조사 요)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으므로, 교인들과 사기 편집자(차재명 목사)는 1907년을 설립연도로 보았다.
5-3. 남대문교회는 두 개의 연원을 가지고 있다. 구리개 제중원채플(제중원이 아니라 제중원채플이다!)과 홍문동교회이다. 그런데 홍문동교회 유래설은 별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1909년 조직될 때 최소한 10명 정도는 홍문동교회에서 교적을 이명해 왔다. 그러나 사익 추구, 반선교사 독립교회 운동의 어두운 치부가 그 교회에 있었기 때문일까? 제중원의 역사는 밝기 때문일까? 알렌-헤론-에비슨 쪽의 의료선교사들에게 의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홍문동교회 교인(무어 목사와 밀러 목사 치리)과 병원 교인들(에비슨 장로 관리)이 함께 모여 교회를 설립할 때는 언더우드 목사의 치리를 받았다. 의료선교사보다 목회선교사들과의 관계를 바로 밝혀야 한다.
5-4. 남대문교회는 1907년에 임시로 설립되었고, 1909년 11월 21일에 정식으로 장로교회로 조직되어 당회장 언더우드 목사와 장로 에비슨이 당회를 구성하여 교회를 관리했다. 이 무렵 교회 조직 직후에 예배당도 다음 사진에 나오는 건물을 마련하여 입당했을 것이다.
▲ 신축한 남대문교회, 1911년 경
6. 결론
새문안장로교회는 1887년 9월 27일 세례교인 14명, 장로 2인, 목사 1인(언더우드)으로 정식 조직되었고, 이 날을 교회 설립일 혹은 창립일로 잡는다. 이 선례를 따르자면 남대문(외)교회는 1909년 11월 21일 조직‧설립되었다. 1885년 6월 21일 알렌의 집에서 드린 장로회와 감리회 선교사들의 첫 정기 연합 주일예배는 유니언교회의 출발이지 남대문교회의 출발과 상관이 없다. 그러나 구리개 제중원이 선교병원이 된 1894년부터 홍문동교회와 제중원 중앙교회가 성장하던 시절(1894~1904년)은 모판에서 싹이 자라던 발아기로 볼 수 있다. 즉 곧 그 두 곳에서 개종하고 신앙생활을 하던 이들이 1907부터 남대문교회로 이명했기 때문이다. 1907~09년 3년간에 걸쳐 이들이 이명하던 시기는 모종을 옮겨 심은 이양기로 볼 수 있으며, 1909년 말 교회가 공식 조직되었다.
남대문교회는 창립 정신인 '성문 밖' 정신, 곧 소외된 약자와 소수자를 섬기는 종의 정신, 낮아지는 십자가의 정신을 회복하고 원래 지키던 창립일로 돌아갈 때 교회의 정체성이 회복되고 많은 이의 박수를 받을 것이다. 그러면 사료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을 통해 창립일을 끌어올려서 첫째가 되려고 노력해 온 여러 교회들도 부끄러움을 느끼고 한국 사회를 섬기는 종의 정신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옥성득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UCLA) 아시아언어문화학과 임동순·임미자 석좌 부교수(한국기독교)이다. 서울대학교 영문학과와 국사학과를 졸업한 후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과 대학원을 거쳐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와 보스턴대학교에서 기독교 역사를 공부했다. 2002년부터 UCLA에서 한국근대사와 한국종교사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 <한반도 대부흥> 등이 있다.
===========================================
금융 범죄로 억대 돈 빼먹은 간 큰 목사들
수익률 속여 보험 팔아 수억 원 이득…주식 부정 거래로 200억 챙겨
이은혜 기자
돈 때문에 감옥 가는 목사들이 있다. 교회 헌금을 사적으로 유용하거나 횡령하는 정도가 아니다. 전문 금융 사기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수법도 다양하다.
8월 19일 미국 미주리(Missouri) 주에 사는 짐 스테일리(Jim Staley) 목사는 투자 사기 혐의가 인정돼 7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연방 검사는 스테일리가 주 정부의 허가 없이 투자 상품을 팔아 57만 달러(한화 약 6억 8,000만 원)의 부당 이득을 취했다고 주장했다.
▲ 짐 스테일리(Jim Staley) 목사는 2007년 캘리포니아의 투자 회사에 근무하면서 미주리 주에서 교회를 시작했다. 그는 높은 수익률을 보장한다며 노인들을 꼬드겨 수익형 보험 상품에 투자하게 했다. 그 대가로 자신은 약 6억 8,000만 원의 부당 이득을 챙겼다. 재판부는 사기 혐의를 인정해 7년형을 선고했다. (짐 스테일리 목사 설교 동영상 갈무리)
스테일리는 2007년부터 캘리포니아 주의 투자 회사 'B&B'의 에이전트로, 주로 나이든 사람들에게 수익형 생명 보험을 팔았다. 그는 같은 해, 미주리 주에서 '진실한목회를향한열정(Passion for Truth Ministries)'이라는 교회를 시작했다. 그는 매해 교회에서 사례비로 약 1억 5,000만 원을 받고, 수십억 원짜리 사택에서 살았다. 2007년부터 지금까지 사택에 사는 동안 낸 돈은 지난 5월에 낸 관리비 50달러(약 6만 원)를 포함해 1,950 달러(약 230만 원)뿐이다.
스테일리는 미주리 주에서 투자 상품을 팔 자격이 없는 에이전트였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투자자들을 속였다는 것이다. 그는 투자금의 손실이 거의 없고 오히려 투자금의 30~40%에 달하는 수익을 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투자자들을 꼬드겼다. 하지만 실제로 돌아온 수익금은 쥐꼬리만한 돈이었다. 한 피해자는 60만 달러(한화 약 7억 1,000원)를 투자했지만 수익금 명목으로 받은 것은 407달러(한화 약 50만 원)가 전부라고 증언했다. 그는 이 정도의 수익률이면 5,800세나 되어야 투자액 전부를 돌려받을 수 있다고 했다. 피해자들은 하나같이 스테일리가 좋은 목사고 기독교 신앙인이었기 때문에 믿고 투자한 것이라고 했다.
스테일리처럼 일대일로 사람들을 속이는 목사가 있는가 하면, 거대 사기극에 가담하는 대범한 목사도 있다. 비탈리 고르쉐프스키(Vitaly Korchevsky) 목사는 구소련 출신이다. 그는 1981년 회심하고 1990년 미국으로 이민했다.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 주 브룩헤이븐(Brookhaven) 시 슬라브복음주의침례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러시아계 사람들이 모이는 이민 교회로 교인들의 신망이 두텁고 존경받는 목사였다.
그랬던 그가 지난 8월 12일 FBI에 체포됐다. 단순히 절도나 상해였으면 경찰에 체포됐겠지만 그는 국제적인 금융 사기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었다. FBI는 통신·보안 사기에 얽힌 9명을 체포했는데 고르쉐프스키는 그중 우두머리로 해커를 섭외하고 수익금의 돈세탁까지 총괄했다.
▲ 비탈리 고르쉐프스키(Vitaly Korchevsky) 목사는 구소련 출신이다. 그는 1990년 미국으로 건너온 후 경영학을 공부했다.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러시아계 이민자들이 모이는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는 고르쉐프스키는 지난 8월 12일 주식 부당 거래 혐의로 FBI에 체포됐다. (비탈리 고르쉐프스키 목사 페이스북 갈무리)
그의 잦은 해외 여행 경력도 알고 보니 범죄를 위해서였다. 구소련 출신이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우크라이나·러시아 등을 한 해에도 수십 차례 오갔다고 했다. 하지만 FBI의 수사 결과는 달랐다. 자신의 조직이 필요한 전문 해커를 물색하기 위해 여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고르쉐프스키 외에 8명으로 구성된 팀은 전문적으로 주식을 매매하는 팀이었다. 이들은 우크라이나에서 포섭한 해커들에게 미국 주식 거래소에 뜨는 기업의 공시 정보를 미리 빼내 달라고 부탁했다.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기업들이었다. 공시 정보에는 기업 주가에 영향을 미칠 정보들이 기록돼 있었다. 이들은 미리 캐낸 정보를 활용해 저가에 주식을 매입한 후, 공시가 뜬 후 주식이 오르면 고가에 매도하는 작업을 지속하다 덜미를 잡혔다.
예를 들면 이렇다. 2011년, 해커들은 시애틀에 있는 바이오테크 회사 덴드리온의 공시 정보를 미리 빼 냈다. 이 정보를 받은 고르쉐프스키의 매매팀은 공시 정보가 뜨기 27분 전 이 기업의 주식을 사들였다. 이후 23만 달러(한화 약 27억 원)의 이득을 남기고 되팔았다.
고르쉐프스키는 원래 주식 매매에 밝은 사람이었다. 그는 미국으로 이민 온 후 리젠트대학에서 MBA 학위를 받았다. 이후 매릴랜드 주에 있는 투자 전문 회사의 카운슬러나 금융 분석가로 활동했다. 이런 경력을 활용해 2011년 직접 헤지펀드를 세우고 해커들과 협력해 5월까지 총 170만 달러(한화 약 202억 원)의 수익을 올렸다.
재판은 현재 진행 중이다. 연방 법원은 도주 우려가 있기 때문에 고르쉐프스키를 구속한 상태에서 재판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부인과 교인들의 강력한 요청으로 10만 달러(한화 약 1억 2,000만 원)의 보석금을 내고 풀려난 상태다. 그는 앞으로 주식 거래 시장이 있는 뉴욕에서 재판받을 예정이다.
================================================
"예수에게는 '모든' 생명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기독교인이 사회정의 추구해야 하는 이유…정치·이념 문제 아닌 기독교의 오랜 전통
최봉실
스티븐 맷슨(Stephen Mattson)이 8월 11일 <소저너스(Sojourners)>에 기고한 글입니다. 그는 무디성서연구소(Moody Bible Institute)를 졸업하고 개인 블로그를 운영하며 기독교 매체 <레드레터크리스천> 등에 기고하는 작가입니다. 원작자의 허락을 받아 "사회정의, 진보 의제 아닌 기독 전통"이라는 글의 번역 전문을 싣습니다. (원문 바로 가기) - 편집자 주.
많은 기독교인들이 사회정의 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한다. '자유주의자'라거나 '진보적'이니 혹은 '세속적'이라는 꼬리표가 붙을 것에 대한 뿌리 깊은 두려움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세속적인 운동'에 연관되고 싶어 하지 않으며,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영역을 벗어난 사안을 파고들 때 불편해 한다.
하지만 성경은 예수 자신도 살고 있던 사회의 대의명분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고 말한다. 예수는 '모든' 생명이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고 '사마리아인'의 생명이 중요하다고 말했으며, '어린아이들'의 생명이 중요하다고 했다. 예수는 '모든' 생명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대신 '이방인'의 생명이 중요하다고 말했으며, '여성'의 생명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예수는 '모든' 생명이 중요하다고 말하기보다 '문둥병자들'의 생명이 중요하다고 했다.
▲ 스티븐 맷슨(Stephen Mattson)은 8월 11일 <소저너스>에 기독교인이 사회정의를 추구해야 하는 이유를 담은 글을 기고했습니다. 이 기사는 그의 글 전문을 번역한 글입니다. (<소저너스> 갈무리)
이렇듯 예수는 타인의 죄를 위해서 죽기까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유독 소외되고 학대받거나 불의에 직면한 자들과 같이 특정 집단의 사람들을 돕기 위해 더 노력했다. 따라서 "흑인의 생명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정의와 긍정적인 개혁, 힘의 분배를 요구하는 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예수다운 일에 속한다.
기독교인들은 구조적 억압에 직면한 무수한 집단과 공동체가 우리 사회에 있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한 후, 행동해야만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불공평한 문제를 유발하는 복합적인 현실이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고 그 현주소를 짚는 데 주저해서는 안 된다. 또 우리가 포괄적인 변명과 해결책에만 의존하도록 유혹하는 영적 게으름을 물리칠 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사역할 당시 문화적 정황을 제거하고 그의 메시지를 한낱 판에 박힌 종교 이야기로 희석시킴으로써 복음의 메시지를 위험에 빠트린다. 우리는 종종 예수의 말씀을 일반화하고 그의 삶을 모든 인류에 적용할 수 있는 하나의 편리한 모범으로 변형시키곤 한다.
그러나 신약성서 전체에 걸쳐 볼 때 예수는 우리가 믿는 것 이상으로 복잡한 측면을 보였다. 그는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구체적인 대의를 설파했다. 그 시대의 다양하고 복잡한 갈등 양상을 급진적으로 다루었고 고질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현상을 산산이 부쉈다. 예수는 세상을 위한 보편적인 구원의 메시지만 설파한 것이 아니라 특수한 정치·사회·인종 문제도 다뤘다. 학대당하고 침해받고 탄압받는 이들을 도왔던 것이다.
이런 사안들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 즉 정의가 필요한 사람을 섬기는 일은 예수를 따르는 전형적인 본보기로,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이 고수해야 하는 자세다. 전 세계에 걸쳐 고통당하는 수백만 명의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기독교인은 그저 이런 사실에 냉담하고 무관심하며, 때로는 문제가 있다는 것조차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들은 인종·민족·역사·문화를 둘러싸고 있는 복잡하고 논쟁적인 사안들과 마주하는 것을 불편해 한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평등·정의라는 것이 특정한 문화와 민족, 구별할 수 있는 정체성과 관계가 없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들은 사람을 규정하는 꼬리표나 다양성을 대체하는 것은 '인간' 자체라고 믿는다.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만 중요할 뿐 피부 색깔이나 민족의 유산, 문화적 특이성과 같은 '외견상의' 특징은 생각조차 할 필요 없는 것이라 믿어 버린다.
또한 갈라디아 3장 28절에서 "유대인도 이방인도 아니요, 노예도 자유자도 아니요, 남자도 여자도 아니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는 모두 하나라"고 한 구절을 가리켜, 인종·신분 등은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넘어설 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구절은 반어적이다. 인종·민족성·문화와 같은 특징이 하나님에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위에 언급한 특징과 관련해 다양한 법·관습·견해가 존재하는 보편적 사실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유대인·이방인, 노예·자유자, 남자·여자에 관한 모든 문화적 사안들을 무시하기보다 오히려 타당하게 여기고 있다. 바울은 예수가 당시 사람들이 매일매일 직면하고 있었던 독특한 찬반의 사안들인 특권과 불이익, 고정관념, 추정, 대우, 권리, 사회적 가치, 기대 따위의 문제를 이해하고 인정하면서 그들의 삶 전체에 걸쳐 일하고 계시다고 말한다.
사회정의에 참여하는 것은 예수에 의해 고무된 기독교 전통이자 깊은 영적 관습이다. 그것은 진보적 대의나 대중적 의제, 매체의 여론 형성 또는 법안 입안자들, 시대의 유행으로 촉발된 것이 아니다. 정치적 제휴나 금전 획득, 권력·자랑·통제 또는 세속적 동기에 선동되어서가 아니라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 사회정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이는 정의와 힘의 분배, 사랑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존재다. 따라서 우리는 희생당하고 있는 자들이 누구인지 분명히 해야 할 책임 있으며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면 안 된다. 신약성서가 이방인·노예·여성에게 부여된 새로운 가치를 그토록 세밀하게 다루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믿는 이들을 향한 이러한 반문화적 가르침은 급진적이고 진보적인 것이었다. 복음서 저자들은 새로 형성된 교회 안에 예수의 가르침이 실행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복음서에 이런 내용을 썼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며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다. 하지만 이 말은 우리가 특정한 문화 정체성을 가지고 자랐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소외받은 자와 압제 당하는 자들을 도우며 그들의 정체성을 부인하거나 고난을 무시하라고 하는 말도 아니다.
'흑인의 생명이 중요하다 운동(blacklivesmatter movement)'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 즉 인종과 이주민 문제, 성평등과 기타 다른 문제를 다루고 해결해 나감으로써 당신은 예수의 걸음을 진정 따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반하는 사회적 대의들을 설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대의들이 실제로 복음에서 중요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길이다.
======================================================
한 목회자의 치열한 성찰의 기록이 시대의 예언이 되었다
이정만의 <기독교의 본류를 찾아서 - 예수가 들려주는 사랑 이야기
(한들출판사) 김진호 kjh55940@hanmail.net
그를 마지막 본 지 족히 20년은 넘었다. 그가 내게 전화를 했다. 잠시 신학대학원을 같이 다녔지만 거의 마주치지 못했고, 얼마간 같은 교회를 다녔음에도 연배가 한참 위인 그와 깊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안경점을 운영하고 있었다는 것과, 신앙심이 돈독했지만 나와는 달리 복음주의적이었다는 것, 그럼에도 민중신학자인 안병무·박성준 선생을 존경해서 그분들의 가르침에 꽤 경청하고 있었다는 것이 내가 기억하는 그에 관한 전부다. 물론 피상적이지만 그의 부인도 알고 있고 아들도 안다. 그의 집도 여러 차례 갔었고 그가 경영하는 안경점에 간 적도 있다. 또 내게 꽤 값비싼 안경을 선물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는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 교회를 떠났고 어디선가 목회자로 사역하고 있다는 얘길 들었다. 나는 그가 떠난 지 몇 년 후에 그 교회의 전임사역사가 되었지만, 교계와는 발을 끊고 지내다시피 했다. 그는 민중신학 관련 활동을 하지 않았고, 나는 기독교권 밖에서 민중신학 연구자로만 활동했다. 그러니 그와 마주칠 일이란 거의 없었다.
20여 년 만의 만남이 어색할 것 같았다. 아니 실은 그의 얼굴을 알아볼지조차 걱정스러웠다. 안면 인식 장애가 있어, 한때 절친했던 이조차 못 알아본 일이 허다했다. 다행히도 실수하지 않았다.
▲ <기독교의 본류를 찾아서 - 예수가 들려주는 사랑 이야기> / 이정만 지음 / 한들출판사 펴냄 / 462쪽 / 2만 2,000원
그리고 어색해할 틈도 없이 밀도 깊은 이야기를 오랫동안 나누었다. 그와는 처음 나누는 깊은 대화다. 살아온 이야기, 아들 이야기, 그리고 교회 사역 이야기 등등. 그중 가장 흥미로웠던 건 그가 썼다는 두툼한 원고 뭉치에 관한 것이다. 아마도 책이 된다면 거의 1,000 쪽에 달할 만큼 엄청난 분량이다. 한 주제로 이만큼 분량의 글을 밀어붙일 수 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른바 대가들에게서는 흔한 일이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정말로 큰 노력이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하다. 아니 실은 노력만으로 되는 건 아니다. 긴 호흡의 글을 쓸 수 있는 탤런트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다지 좋은 글쟁이도 아니고 능력도 많지 않지만, 나름 여러 권의 책을 썼고 글쟁이로 20여 년간 살아온 짬밥으로 이야기한 몇 가지 조언 가운데 첫째는 분량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은 그렇게 말하고도 책으로 출간되기는 쉽지 않다고 보았다. 요즘처럼 출판계의 불황이 깊을 때 지명도도 스펙도 없는, 더구나 트랜디한 주제도 아닌 책을 내겠다고 할 출판사가 어디 있을까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얼마 후 그로부터 책을 출간하게 되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의 이야기로부터 저간의 사정을 추정해 보면 출판사 대표가 그의 원고에 설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내 조언대로 분량을 거의 절반으로 축약했다. 책을 받은 뒤에 검토해 보니, 원래의 원고가 다 수록되지 못한 것이 안타깝지만, 글의 집중성이나 구성상의 짜임새가 좀 더 탄탄해진 느낌이다. 하여 감히 내가 판단해 보건대 글의 분량을 축약하기 위해 심사숙고하면서 책의 완성도가 한결 높아진 것으로 보인다.
자, 이제 그가 말한 내용에 대해 얘기해야겠다. 우선 이런 내용은 나의 취향이 아니다. 그럼에도 내게 흥미로웠고, 무엇보다도 책을 출간하기 위해 적지 않은 비용을 지출해야 하는 출판사 대표에게 가능성을 보게 했던 그의 유일한 무기인 내용의 힘은 무엇일까?
저자가 이야기하는 핵심 논지는, 책의 제목이 말하고 있듯이, 기독교의 본류는 '사랑'에 있다는 것이다. 역사학을 연구하는 내게 '본류'라는 말은 거슬리는 표현이다. 어떤 종교든 어떤 국가든 그 체제가 담고 있는 핵심적 진리는 처음부터 그랬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체제의 형성 과정에서 발견되고 발전된 결과다. 그런데 '본류'라는 말은 착시를 일으킨다. 마치 처음에는 그랬는데, 전개 과정에서 왜곡되었기에 처음에 대한 새삼스런 탐구가 필요하다는 어법이다. 하여 그는 이 새삼스런 탐구를 예수로부터 시작한다. 그의 책 부제가 '예수가 들려주는 사랑 이야기'인 것처럼. 또한 이 책의 후속편으로 그가 기획하고 있는 것이 '바울이 들려주는 사랑 이야기'인 것처럼. 하여 그의 주장에 따르면 기독교의 '본류'인 예수와 바울 메시지의 핵심은 사랑에 있음을 이야기하겠다는 것이다.
반면 '본류'라는 표현에 거리낌이 있는 나의 방식대로 이야기하면, 예수와 바울은 기독교의 본류가 아니라 기독교의 가장 중심이 되는 원자료다. 이 원자료는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여지를 담고 있는데, 그중 저자가 포착한 것은 사랑이다. 요컨대 그가 이 책에서 제안하는 예수에 대한 해석학적 코드는 사랑인 것이다. 이 사랑을 키워드로 해서 1,000쪽에 달하는 원고를 썼고, 그것을 축약해서 500쪽에 달하는 책을 펴냈다. 그리고 바울에 관해서도 사랑을 키워드로 하는 그만큼의 책을 쓰겠다는 것이다.
내가 이 책의 독서를 시작하기 전부터, 그리고 책을 읽는 내내 궁금했던 것의 하나는 그가 주장하는 '사랑'이 도대체 무엇인가이다. 사랑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렜던 시절에도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다'라는 말에 나는 가슴이 설레 본 적이 없다. 그만큼 기독교 신앙에서 사랑은 입에 발린 상투적인 말에 지나지 않다. 역사를 훑어보면 더욱 그렇다. 기독교만큼 피에 굶주린 독선의 역사를 가진 종교를 찾아보기 힘들다. 사랑하기 때문에 폭력을 휘두르는 어떤 이들처럼 신께서 그대들을 그토록 사랑하는데도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완악함 때문에 이른바 땅 밟기가 필요했다고 말하는 어느 목사의 주장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그 사랑의 정체란 도대체 무엇일까? 하여 나는 '사랑'이라는 말을 쓰는 책을 보면 비판적 선입견이 생기고, 자연 까다로운 눈알을 휘날리며 다소간 전의에 불탄 채 책을 살핀다.
생트집의 전문가인 나를 그는 과연 설득할 수 있을까? 그런 나의 귀를 솔깃하게 했던 것은 그가 사랑을 설명하면서 강조해 마지않는 것이 기독교의 사랑을 도덕주의와 대립하여 말하고 있는 대목이다. 아니 실은, 내가 보기엔, 이 주장은 몇몇 대목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책 전체를 꿰뚫는 저자의 주요 논지다. 그것은 오랜 동안 기독교가 사랑을 도덕주의와 혼돈했고 심지어 도덕주의를 사랑이라고 생각하기까지 했다는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하여 수많은 논증을 다양하게 펴면서 끝내 그가 강조하는 핵심 논지는 바로 이것이다. 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