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베이징 출석성도 6천명 충원문교회 /중국 장백교회 한충렬 목사 사망 2016-05-12 16:36:32 read : 3839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충원문교회 건물 모습. 작아 보이지만 2천 명이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송경호 기자
신앙의 불모지, 중국 베이징에서 ‘복음’을 만나다
[중국 베이징 미션트립 (上)] ‘출석 성도 6천 명’ 규모 충원문교회
▲중국 하면 떠오르는 만리장성의 위용. 늘 관광객으로 가득해 ‘이런’ 사진을 찍기는 쉽지 않다.
"세계 문화 유산의 도시, 베이징(北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기내 방송이 목적지에 다다랐음을 알린다. 서울 김포공항에서 단 두 시간이면 중국의 심장부에 닿는다. 베이징은 오랜 역사를 거치며 명멸한 중국 왕조들의 '중심'이었기에, 자금성과 천안문 광장, 만리장성 등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적지와 관광지들이 즐비한, 그야말로 '세계 문화 유산의 도시'다.
중국은 공산당 정권이 건재하지만, 기독교인들의 숫자도 날이 갈수록 늘고 있다. 성도 수가 1억 명에 달한다는 통계도 있을 정도. 본지는 뉴차이나투어와 함께하는 '베이징 미션 트립'을 위해 지난 4월 20일부터 23일까지 베이징 곳곳을 답사했다.
◈우리나라보다 오래 된 중국의 기독교 역사
김수진 박사(한국교회역사연구원 원장)가 저술한 「중국개신교회사(홍성사)」에 따르면, 중국 기독교(개신교) 역사는 1807년 9월 런던선교회 소속 모리슨(Robert Morrison, 馬禮遜, 1782-1834) 선교사가 광저우에 입국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첫 선교사' 모리슨 이야기는 본지의 '광저우 선교 200년' 칼럼을 통해 자세하게 만날 수 있다.
▲중국 최초의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과 중국인 동역자들. ⓒ크리스천투데이 DB
중국 기독교 역사는 크게 네 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제1기는 모리슨 선교사의 입국 이후 1860년 청나라가 영국·프랑스·러시아 3개국과 체결한 '베이징조약' 체결까지로, '선교 준비기'라 할 수 있다. 이 1기는 1842년 아편전쟁 종결을 위해 영국과 체결한 '난징(南京)조약'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뉜다. 전기에는 동남아를 근거지로 삼고 중국 선교를 준비했고, 후기에는 난징조약 이후 개항된 상하이(上海) 등 5개 지역에서 선교를 시작했다.
이 시기는 청나라가 국내외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겪으면서 쇠퇴하던 때로, 베이징조약 체결을 통해 '선교의 자유'가 인정됐다. 제1기 끝 무렵은 유럽 지역에서 '선교'가 활발했던 때였던 만큼 중국에 교회를 설치했던 선교회가 22개, 선교사 수도 150여 명에 달했지만, 중국인 교인 수는 350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제2기는 1860년부터 1900년 '의화단운동(義和團運動)'까지를 이르며, '교회 건설의 시기'로 불린다. 구미 열강이 청나라를 점점 압박했던 것과 동시에, 만주족에게 점령당한 한족(漢族)들이 서양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근대화 바람이 불기도 했다. 그러나 천주교회에 대한 반기독교 운동도 거셌는데, 중국인들은 천주교회와 개신교회를 같은 곳으로 봤기에 의화단운동 당시 135명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죽임을 당했다.
이러한 박해와 환란을 통해 기독교는 오히려 성장한다. 제3기는 1900년부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까지 이르는 '교세 확장의 시기'로, 세례를 받은 신자 수만 1900년 112,808명, 1912년 235,303명, 1920년 366,524명에 달했다. 세례를 받고도 교회에 출석하지 않은 사람이나 세례를 받지 않고 교회에 출석한 사람까지 합하면, 1915년 526,108명, 1920년 806,926명이나 됐다.
이 시기 중국교회에는 선교회 50여 곳이 활동하고 있었기에, 부흥운동과 함께 교파 간 협력·연합운동이 활발했다. 또 이 시기에는 제2기에 많이 세워진 '미션스쿨'의 교육 결과 중국인 지도자들이 급부상했고, 해외 선교회들의 지배와 보호에서 벗어나 자립하고 자주적으로 전도 활동을 시작했다.
특히 1922-1927년에는 '기독교 중국화 운동'이 일어났다. 그 일환으로 1922년 여러 교파들은 연합하여 '중화기독교회(The Church of Christ of China)'를 설립하고, 현 삼자교회(三自)의 모토인 '자치(自治)·자양(自養)·자전(自傳)'을 내세웠다.
이는 중국 사회에서 제국주의·군벌 세력을 타도하고 자주독립 국가를 건설하자는 국민혁명이 주창한 '반기독교 운동' 여파이기도 했다. 이와 함께 '예수 가정(Family of Jesus)'이나 워치만 니(倪柝聲)의 '소그룹(敎會聚會所)' 등 독자 노선도 출범했다.
제4기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부터 현재까지로, 공산주의 국가로서 교회 조직을 만든 시기다. 삼자운동 조직이 교회를 대표하는 조직이 돼 현 '중국기독교 삼자애국운동위원회'로 이어졌고, 이를 거부하는 이들은 '가정교회'로 명맥을 이어 오다 개방화 이후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외부에서 바라본 충원문교회 입구. 보이는 입구는 담장 역할을 하고, 들어가면 내부 건물이 나온다.
사진처럼 자전거를 타고 오는 성도가 많다. ⓒ송경호 기자
◈베이징의 '대형교회', 충원문교회를 가다
베이징 도심에 자리한 충원문(崇文)교회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146년 전인 1870년, 미국 남감리교 출신인 애즈베리 선교사를 기념하기 위해 설립됐다. 1900년 반외세를 표방한 의화단운동 때 불에 탔으나 1904년 재건됐고, 현재는 유적으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 충원문교회는 '화북 지역'에서 가장 큰 예배당이기도 하다.
충원문교회는 매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성도가 6천여 명에 달해, 하루 세 차례 예배를 드리고 있다. 오후엔 조선족들을 중심으로 '조선어 예배'를 드린다. 베이징 주재 외국 대사와 직원들을 비롯해 외국인들도 많이 참석한다. 빌리 그래함 목사가 설교한 적도 있고, 1998년에는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 부부가 중국 방문 중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지난해 4월 12일에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목사가 주일예배에서 설교하기도 했다.
일행은 4월 20일, 베이징 도착 첫날부터 충원문교회를 찾았다. 수요예배가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설렘과 기대감을 안고 교회로 들어서니, 1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자리에 앉아 찬양을 드리고 있었다. 극심한 베이징의 퇴근길 교통 체증을 뚫어낸 사람들이 계속해서 예배당으로 들어왔고, 수요일임에도 250여 명이 함께 예배를 드렸다. 주일예배 때와는 달리, 거의 다 중국인들이었다.
'수요 성경공부'에 앞서 40여 분간 찬양이 이어졌다. 찬양곡은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처럼 우리 찬송가에 있는 곡들도 있었지만, 반대로 잘 모르는 곡들도 있었다. 피아노 한 대에 여성 두 명이 마이크를 대고 인도와 노래를 겸한 것이 전부였지만, 사람들은 뜨겁게 함께 불렀다. 마치 1960-70년대 마룻바닥에서 무릎 꿇고 찬양하던, 우리 부흥기의 영성을 그대로 옮겨온 듯했다.
충원문교회 전도사가 맡은 '성경공부'는 시종 진지하고 열띤 가운데 진행됐다. 전도사는 1시간 가까이 '새 생명'이라는 교재를 바탕으로 성경을 가르쳤고, 교인들은 중간중간 손을 들어 질문을 하거나 전도사의 질문에 적극적으로 대답하면서 집중했다. 대부분 자발적으로 나온 이들이어서 졸거나 딴청을 부리는 경우도 없었다.
예배에 함께 참석한 한 한국인 성도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열심으로 예배하는 중국 교인들을 접하면서, 그간 타성에 젖어 나태하게 신앙생활하던 모습들을 많이 회개하게 됐다"며 "중국인들의 '뜨거운 신앙'을 가슴 깊이 새기고, 돌아가서 다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소감을 나눴다.
▲마룻바닥과 장의자 등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충원문교회 수요 성경공부 모습. 주일에는 왼쪽 가림막을 걷는다. ⓒ송경호 기자
현지 조선족 유덕 목사에 따르면, 현재 중국인들은 영혼에 '갈급함'이 많은 상태여서 스스로 교회를 찾아와 예배를 드리거나 성경공부에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이날만 처음 교회에 나왔다고 스스로 '밝힌' 이들이 10여 명이었다. 이들은 성경공부 후 따로 모여 현지 교역자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유덕 목사는 "조선족의 경우 몇 년 전만 해도 성도 수가 7-8백 명에 이르렀지만, 한국 등으로 이주하거나 집값 등의 문제로 베이징 근교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아 지금은 150여 명 정도 출석하고 있다"며 "'조선어 예배'를 주일 오후에 드리고, 현재 교역자는 저까지 3명이다. 조선어 예배는 한국 한 장로님 부부의 지원을 통해 처음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소개했다.
본지는 이 충원문교회 예배를 포함, 중국 베이징 내 여러 기독교 유적지들을 답사하고 만리장성 등 주요 명승지들을 둘러보는 '베이징 미션트립'에 참여할 성도들을 모집하고 있다(문의: 02-357-1004).
▲수요예배 후, 가림막을 걷어내고 본당에서 촬영한 모습. 수요예배는 사진 오른쪽 중앙에 보이는 곳에서 드린다. ⓒ송경호 기자
이영훈 목사가 한·중 기독교 협력과 복음화의 대물결이 나아갈 문을 더욱 활짝 열었다. 그는 11~14일 중국 북경·남경·상해 방문 일정을 통해 중국 기독교와의 우호와 협력을 증진시
▲지난해 이영훈 목사가 충원문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던 모습. ⓒ크리스천투데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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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장백교회 한충렬 목사 사망
30일, 인근 야산에서 시신으로 발견…중국 공안 당국 수사 착수
뉴스앤조이
기사 내용 중 한충렬 목사의 학력 부분이 사실과 달라 정정합니다. 사실 확인 과정에서 오류가 있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 편집자 주
▲ 중국 길림성 장백현에서 본 북한 양강도 혜산시 전경. (사진 제공 이원정)
[뉴스앤조이 취재팀] 중국 길림성 장백조선족자치현에 위치한 장백교회 한충렬 담임목사가 30일 오후 장백현 인근 야산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복수의 관계자 증언에 따르면, 한 목사는 30일 오후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집을 나섰다. 한 목사가 아무 연락 없이 돌아오지 않자 가족들이 중국 공안 당국에 신고했고, 오후 8시 즈음 목에 상처를 입고 본인 차에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휴대전화 등 소지품 일체가 사라진 상태였다고 한다.
일부 소식통은 평소 북한 구호 활동에 열심이던 한 목사를 북한 공작원이 살해한 것 아니냐는 주장을 내놓았다. 한 목사와 다투던 두 명의 남자가 북한 방향으로 사라졌다는 증언도 나왔지만,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중국 공안 당국은 한 목사의 시신을 인수하고, 수사에 착수했다.
주일예배를 하루 앞둔 4월 30일 저녁 비보를 접한 장백교회 성도들은 교회에 나와 기도하고 있다. 장백교회 교인 아무개 씨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이런저런 소문이 많지만 우리 교인들은 목사님과 가족을 위해 기도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장백교회가 위치한 장백조선족자치현은 강 하나를 사이로 북한 양강도 도청 소재지인 혜산시와 마주하고 있다. 강폭이 매우 좁고 혜산시 거주 인구가 적지 않아, 밀수와 탈북의 주요 루트로 이용되는 지역이다.
한충렬 목사는 1993년 장백교회를 설립한 이래로, 지금까지 이 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장백현의 지역적 특성상, 교인 상당수가 북한에 친척을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북한을 돕는 사역이 교회 안에서 활발히 진행된 배경이다.
90년대를 강타한 소위 '고난의 행군' 시기에는 장백교회 주변에 도움을 얻으려고 찾아온 탈북자가 상주할 정도였다. 하루에 탈북자가 10명 넘게 찾아오는 날도 많았다. 한 목사는 이들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고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을 주었다. 북한 주민을 돕는 활동이 중국 당국에 발각되어 조사를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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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이웃, 고 한충렬 목사
북한 동포 위해 헌신…"같은 민족이기에 도울 수밖에 없다"
▲ 고 한충렬 장백교회 담임목사 영정.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뉴스앤조이 취재팀] 4월 30일 피살된 고 한충렬 목사(장백교회)는 교회에 찾아오는 북한 주민 한 사람도 그냥 돌려보내지 않는 선한 이웃이었다.
그는 1967년 중국 길림성 장백조선족자치현 12도구에서 1남 4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1988년 투병 과정에서 하나님을 만나 1993년 책임집사 신분으로 장백교회를 세웠다. 1991년 길림공업대학을 졸업했고, 2001년 중국 호북성 무한시에 위치한 중남신학교를 졸업했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신학 공부를 마치고 2005년부터는 장백교회 담임목사로 고인이 될 때까지 시무했다. 한국에서도 신학을 공부했다. 장백교회를 시무하는 중에도 틈틈이 한국에 나와 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에서 목회학 과정을 수료했다.
고인은 다방면에 학식을 갖춘 교양인이었다. 무한시에서 신학을 공부했기에, 중국 동포 목회자 중에도 중국어 구사 능력이 우수한 편이었다. 1990년대 초반 중국의 개혁 개방 이후 안수받은 중국 동포 목회자 1세대 그룹 중에서 학문적, 신앙적 연륜으로 인정받는 위치였다. 그와 오랫동안 동역한 익명의 목회자는 "한 목사님은 신앙적으로 보나, 인품으로 보나, 목회로 보나, 주변 동료들에게 모범이 되는 분이셨다"고 회고했다.
목사 신분으로 장백에서 본격적으로 목회를 시작한 후에는 정부 관련 요직도 맡았다. 주로 종교 관련 조직이었다. 1998년부터 장백현 삼자애국운동위원회 주석을 맡았고, 2012년부터는 기독교 양회 부주석으로 일했다. 삼자애국운동위원회는 중국 정부와 교회를 연결하는 조직이다. 양회는 중국기독교협회와 삼자애국위원회를 포괄하는 통칭이다.
▲ 고 한충렬 목사 생전의 모습.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한 목사는 일부 언론이 제기하는 것처럼 북한에 지하 교회를 세우는 일에 적극 나서기보다 교회에 찾아오는 탈북자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는 활동에 주력했다. 2012년 중국 안전국에 체포, 중국 길림성 장춘시에 압송되었을 때도 한 목사와 장백교회의 활동이 '인도적인 차원에서 같은 민족을 돕는 행위'로 인정되어 장백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탈북자를 돕는 일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중국 정부는 '비법 월경자'와 접촉하지 말라고 계속해서 압박을 가했다. 신축된 장백교회 예배당 입구에 기둥을 세우고 CCTV를 높이 달았다. 교회에 드나드는 사람을 수시로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탈북자들이 교회에서 도움을 받다가 결국 한국이나 3국으로 다시 탈출할 것을 우려했다.
북한도 한 목사를 끊임없이 위협했다. 자국민을 꼬셔 내 '자본주의의 나쁜 물'을 들이는 악당으로 묘사했다. 음성적인 통로로, 때로는 대담하게 한 목사에게 경고 메시지를 날렸다. 올해 초 한 목사를 만난 익명의 소식통도, 지난해 11월 교회 신축 이후 신변 위협이 증가했다는 증언을 한 목사에게 직접 들었다고 밝혔다.
안팎에서 탈북자 지원을 중단하라는 목소리가 거셌지만 한 목사는 꿋꿋하고 조용하게 사역을 이어 나갔다. 한 목사에게 탈북자는 같은 민족 동포일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해야 할 대상이었다. 교회와 연결된 탈북자들에게 음식, 의복, 의약품을 지원했지만 한국이나 3국으로 탈출하는 것을 돕는 일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오히려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것을 주문했다.
익명을 요구한 중국 소식통은 한 목사가 탈북이나 북한의 지하 교회 재건에 관여했다는 일부 언론 보도는 터무니없는 것이라며, 장백현은 그런 활동을 할 수 없는 곳이라고 못 박았다. 지역이 협소하고 북한과 거리가 매우 가까워, 양국 정부가 모두 엄중하게 금지하는 행위를 교회를 책임진 한 목사가 나서서 할 리 만무하다는 것이다.
한 목사의 장례식에 참가한 장백교회 성도들은 그의 영정 사진 앞에서 오열했다. 예식은 중국 공안 당국의 철저한 감시 아래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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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당면 과제, 안티 기독교의 공격!
소강석 목사 예장합동 목장기도회 설교…"동성애·이슬람·이단·안티 세력 다 연결"
이은혜 기자
▲ 설교를 마친 소강석 목사는 모두 함께 '십자가 군병들아'를 부르자고 제안했다. 참석자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맞잡고 큰 목소리로 찬송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전국 각지에서 온 목사·장로의 목소리가 예배당 안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참석자들은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 인도에 따라 손을 맞잡고 힘차게 찬송가 '십자가 군병들아'를 불렀다. 소 목사의 말처럼 십자가 군사가 되어 한국교회를 무너뜨리는 이슬람·동성애와 맞서 싸우겠다고 다짐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예장합동·박무용 총회장) 53회 전국 목사 장로회 기도회 첫째 날 저녁 집회는 소강석 목사가 설교를 맡았다. 소 목사는 '교회 생태계를 복원하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전문 보기). 시종일관 한국교회가 반기독교 세력의 공격을 막아 내지 못하면 영국교회처럼 공멸할 것이라 주장했다.
▲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는 '교회 생태계를 회복하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그는 교회 생태계 회복을 위해 반기독교 세력의 공격을 막아야 한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소 목사는 반기독교 세력이 한국 사회에 만연한 안티 크리스천 사상을 통해 기독교를 공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네오마르크시즘이라는 신좌파 사상이 한국에 들어오고 있는데 이것은 무신론적 사회주의와 휴머니즘이 절묘하게 결합된 사상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네오마르크시즘이 한국에서 사회운동을 하는 여러 계층과 섞이면서 새로운 얼굴로 우리 곁에 존재한다고 했다. 평등·인권·박애·나눔·섬김·정의·공동체와 소수자 권익 보호를 추구한다고 하면서 동시에 반정부 운동과 기존 체제를 전복하려는 운동을 한다고 했다. 그뿐 아니라 대형교회를 타도하고 작은 공동체를 만들려 한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 평등과 성 정치를 이용한 동성애 합리화라고 했다. 소 목사는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는 것만큼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나라에서 차별금지법 통과하면 전도 함부로 못 한다. 이거 알아야 된다. 지금은 오직 예수, 오직 성경, 오직 개혁신학 이야기하는데, 차별금지법 통과한 후에는 누가 고발하면 조사당한다. 이런 세상이 오게 된다면, 한 번 생각해 보라. 지금 정신차리고 우리가 교회 생태계를 복원해야 한다. 이게 통과되면 지금처럼 목회 못 한다."
서로 연결된 동성애·이슬람·이단·안티와 싸우기 위해 타 교단과 정책적 연합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군소 교단에 연합 주도권을 뺏기고 있다고도 했다. 소 목사는 예장합동이 한국교회 장자 교단이기 때문에 한국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외부 공격을 주도적으로 막자고 외쳤다.
말씀을 마친 후 소 목사는 순서에 없던 통성 기도회를 인도했다. 그는 "사랑하는 목사·장로님들 우리 모두 일어나 한국교회를 지킵시다. 교단을 지킵시다. 반기독교적인 정서와 공격을 차단합시다. 주님의 십자가 군사가 되어서 교단을 지키고 한국교회를 지켜 냅시다"고 제안했다.
예배는 길자연 목사(왕성교회 원로)의 축도로 마무리됐다. 목장기도회는 5월 11일까지 계속된다. 세 명의 설교자와 세 명의 기도자가 나와 번갈아 가며 기도하고 설교 듣는 100분 기도회와 주제별 특별 강의가 준비돼 있다. 둘째 날 저녁 집회 강사는 김남준 목사(열린교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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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공항 6개월 구금 시리아 난민 입국 허가하라"
송환 대기실서 치킨버거와 콜라로 연명…인권·노동 단체 규탄 성명
구권효 기자
4월 25일, 한 일간지 보도로 인천공항 내 시리아 난민들의 처지가 알려졌다. 현재 인천공항 내에 전쟁을 피해 시리아에서 온 남자 28명이 6개월째 송환 대기실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들은 삼시 세끼 치킨버거와 콜라만 먹고 있으며, 기본적인 생활필수품도 잘 지급되지 않는 상태였다.
인권·노동 단체들은 5월 9일 성명서를 발표해, 시리아 난민들의 입국을 허가하고 난민 심사 기회를 부여하라고 촉구했다. 이들은 "한국 정부도 시리아 난민들에 대한 인도적 지원의 필요성과 책임 동참 의지를 대외적으로 선언한 바 있으며, 유엔난민기구 집행위원회(EXCOM)의 의장국 자리를 역임하고, 올해 UN 인권이사회 의장국도 맡게 되어 난민 인권 보호에 선도적인 역할을 이행해야 할 책임을 대외적으로 표명해 왔다"고 했다.
또 이들은 난민이 명백한 시리아 사람들을 난민으로 인정하지 않고 반년간 공항에 구금하는 한국 정부가 어떻게 국제사회에서 난민 보호를 운운할 수 있겠느냐고 규탄했다. 이미 미국과 캐나다, 유럽 선진국에서는 시리아 사람을 99% 난민으로 인정하고 있다고 했다. 시리아 난민들을 송환하지 말고 난민 심사 기회를 주라고 요구했다.
시리아는 5년째 내전 중이다. 4월 23일 바샤르 알 아사드 정부는 반정부군을 소탕한다는 목적으로 알레포(Aleppo), 락까(Raqqa), 비니시(Binnish) 등에 대한 폭격을 재개했다. 아사드 정부가 알레포 병원까지 공습을 가하면서, 어린이와 의사 등 민간인 피해자가 속출하고 있다.
다음은 성명서 전문.
[성명] 한국 정부는 반년째 인천공항에 구금 중인 28명의 무고한 시리아 난민들의 입국을 즉시 허가하고 난민 심사의 기회를 부여하라
한국 정부는 작년 11월 말부터 인천공항에 도착한 시리아 국적 일부 난민들에 대해 난민이 아니라며, 난민 심사 기회를 부여하지 않고 있다. 전쟁터를 떠나 한국에 피난처를 찾기 위해 도착하였으나, 인천공항 2층 송환 대기실에 구금되어 있는 그들은 현재 28명에 이르고 그 기간도 벌써 반년이 되었다. 그들은 치킨버거와 콜라만 끼니로 지급받는 상태에서, 햇빛도 보지 못하는 폐쇄된 송환 대기실에, 직원들의 폭언과 협박 속에 정상적인 의료 진료도 받지 못한 채 위법하게 장기 구금되어 있다.
오랫동안 당국의 자정적 문제 해결을 기대하며 수차례 이들의 입국을 허가할 것을 촉구하였지만, 이미 당국이 손을 놓아 버린 공간에서 시민단체들이 이들을 상담하고, 의료 접근을 돕고, 세면도구 등을 지급하고 도와 온 반년의 기간 동안 난민들의 건강은 점차 악화되고 정신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극한의 상황으로 몰려가고 있다. 이미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도 잠정 처분을 한국 정부에게 발령하여 공항에 구금된 시리아 난민들에 대해 송환을 하지 말고 인도적 처우를 할 것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시리아는 벌써 5년째 전쟁으로 접어들고 있고, 지난주에도 아사드 정부에 의한 알레포의 공습재개로 어린이 병원이 파괴되는 등 끊임없는 희생자들이 발생하고 있다. 미국, 캐나다, 유럽 등 선진국에서는 시리아 출신 비호신청자들을 99% 난민으로 인정하고 이들의 보호를 위해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 정부 역시 박근혜 대통령의 지난해 유엔 총회에서의 연설을 통해 시리아 난민들에 대한 인도적 지원의 필요성과 책임 동참 의지를 대외적으로 선언한 바 있으며, 유엔난민기구 집행위원회(EXCOM)의 의장국 자리를 역임하고, 올해 UN 인권이사회 의장국도 맡게 되어, 난민 인권 보호에 선도적인 역할을 이행해야 할 책임을 대외적으로 표명해 왔다.
그럼에도 대한민국 정부가 난민임이 명백한 시리아 난민들에게 난민 심사의 기회조차 부여하지 않고, 이들이 난민이 아니라며 공항에 장기간 구금하면서 과연 어떻게 앞으로 국제사회에 난민 보호를 감히 운운할 수 있단 말인가.
한국 정부는 시리아 난민들을 전쟁터로 돌려보내겠다는 것인가. 아니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시설로 자랑하곤 하는 인천공항 한 켠에 마련된 송환 대기실에서 그들을 계속해서 구금하겠다는 것인가. 법적 근거 없이 구금하고 있던 이들의 반년을 누가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우리와 동일한 인간이며, 전쟁터의 참화에서 가족과 함께 떨어져 구금되어 있는 난민들과 연대하는 우리들은, 한국 정부가 조속히 28명의 입국을 신속히 허가하고 난민 심사를 받을 기회를 부여하여 난민의 지위가 명백한 이들을 공항이란 경계 속에 더 이상 구금하지 않을 것을, 그리고 향후 국제사회에 확립된 리스크 프로파일(Risk Profile)과 무관한 기준으로 불회부 결정을 내려 국경에서 난민을 거부하는 일이 없도록 제도를 개선할 것을 촉구한다.
2016.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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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왜 김조광수를 껴안았나
[인터뷰] 캐나다 파송 캐서린 목사 "한국만의 방법으로 동성애 문제 해법 찾길"
이은혜 기자
[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푸른 눈의 선교사는 지금도 우리 곁에 살고 있다. 지난 4월 28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김영주 총무)는 김조광수 감독 간담회를 열었다. 행사 시작 전부터 동성애에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이 강연장에 자리를 잡았다. 김조광수 감독의 안전을 우려한 교회협은 장소를 바꿔 비공개로 간담회를 진행했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됐다. 비공개 간담회 진행 사실을 안 일부 기독교인들이 간담회 장소로 난입한 것이다. 이들은 통성기도를 하며 간담회를 중단시켰다. 김조광수 감독 바로 앞에 서 있는 기독교인들이 큰 소리로 방언 기도를 하는 동영상은 <뉴스앤조이> 페이스북 페이지를 타고 온라인에 퍼져 나갔다.
동영상은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시청했다. 대부분 충격적이라는 반응이었다. 동성애에 반대하긴 하지만, 이런 방법에 문제가 있다는 기독교인도 있었다. 영상이 끝날 무렵, 김조광수 감독을 말없이 안아 주는 백인 할머니가 등장한다. 영상을 본 이들 중 많은 사람이 이 장면에서 감명받았다고 표현했다.
▲ 지난 4월 28일, 김조광수 감독의 간담회 당시 캐서린 크리스티(Catherine Christie) 목사는 김조광수 감독을 꼭 안아 주었다. 그는 동성애 반대 세력의 방언 기도가 시작된 이후 정신이 없었지만 김조광수 감독에게 '당신을 지지하고, 걱정한다'는 마음을 꼭 전달하고 싶었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캐서린 크리스티(Catherine Christie) 목사는 캐나다연합교단(UCC·United church of Canada)에서 파송된 선교사다. 그는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기장·최부옥 총회장) 국제협력선교부에서 일하고 있다. 캐서린 목사는 '고애린'이라는 한국 이름도 갖고 있다. '좋은 이웃'이라는 뜻이다.
5월 2일 기장 총회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김조광수 간담회에서 느꼈던 점, 한국에 살고 있는 캐나다 목사로 느끼는 점 등을 들었다. 다음은 그와의 대화를 일문일답 형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들에게서 증오감 느꼈다"
- 무슨 생각으로 김조광수 감독을 안아 주었는지 궁금하다.
사실 그날 분위기는 끔찍했다. 사람들의 기도 속에서 증오감(hatred)을 느낄 수 있었다. 김조광수 감독의 간담회 동안 우리는 그의 인생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매우 좋았다. 그러다 갑자기 그 사람들이 간담회장에 들어왔다. 정신이 없어 '이 자리를 빠져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떠날 수 없었다. 김조 감독에게 감사하는 마음과 그를 지지한다는 표현을 하고 싶었다. 그는 앞으로 평생 그날의 기억을 갖고 살아갈 수밖에 없을 테니까.
뒤에서는 방언 기도가 들렸다.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있다가 눈을 뜨고 앞에 서 있는 김조광수 감독을 봤다. 꼭 그에게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어로는 표현하지 못해도 안아 주는 것으로 내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겠다 싶었다. '나는 당신을 지지해요. 당신을 걱정하고 있어요'라는 마음을 담아 안아 줬다. 내 뒤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 싫어 빨리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그럼에도 그에게 다가간 이유는 그것이었다.
한국에서는 성적 지향이 다른 누군가를 안는 행위 자체가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에 주목받은 것이 아닐까.
- 인터넷에 올라온 비디오를 보고,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많은 한국인이 충격받았다. 그 자리에 있는 기독교인들은 '우리는 그냥 기도만 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사람들은 그 안에서 증오를 봤다. 어떻게 생각하나.
기도를 하던 사람들은 잘못 이해하고 있다. '우리는 순수하게 기도한 것'이라고 얘기하겠지만 그들은 모든 걸 방해하고 무례(disruptive and rude)했다. 그들이 기도해야만 했다면 그냥 잠깐 동안 기도하고 멈출 수도 있었다. 그 후 대화를 이어 가면 됐다. 하지만 그들은 기도로 모든 대화를 차단했다. 김조광수 감독이 말하는 상황 자체를 원하지 않았다.
▲ 캐서린 목사는 캐나다연합교회(United Church of Canada)에서 파송된 선교사다. 그는 캐나다 교회들이 동성애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설명해 줬다. UCC는 1988년부터 성 소수자를 교인으로 인정하고 목사 안수도 주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교단도 있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 많은 기독교인이 '우리는 동성애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죄에서 돌이킬 수 있도록 돕고 싶은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캐나다 교회는 어떤가.
캐나다 기독교도 다양하다. LGBT(성 소수자)를 받아들이는 그룹이 있는가 하면, 동성애를 그만 두고 치료(heal)받아야 한다는 그룹도 있다. 기도하면 성적 지향을 전환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내가 속한 UCC가 LGBT를 받아들이는 유일한 교단은 아니다. 하지만 UCC는 캐나다에서 가장 크고 LGBT를 제일 먼저 교인으로 받아들였다. 성적 지향을 이유로 교인 자격 제한을 두지 않는다고 1988년에 결정했다. 누구나 교인이 될 수 있고 어떤 교인이라도 목사가 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았다. LGBT라 하더라도 목사가 될 수 있다는 걸 명문화했다.
- 동성애를 바라보는 전혀 다른 두 시각을 절충(compromise)하기까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성경에 죄라고 쓰여 있으니 죄'라고 이야기하는 기독교인이 더 많다.
UCC가 성적 지향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을 때 인구의 약 10%를 LGBT라고 봤다. 모든 사회에 LGBT가 존재한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맞다, 그들은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을 치료할 수 있다'고 얘기했고, 다른 기독교인은 '맞다, 그들은 존재한다. 그러니 어떻게 우리가 그들을 교인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이야기했다. 우리 교단은 후자였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수많은 죄를 본다. 예수님은 개인의 성적 지향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경제 정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 서로 사랑하는 것,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말씀하셨다. 우리가 성경에서 중요하게 본 율법이기도 하다. 구약에서 언급한 '다른 남자와 누우면 안 된다'는 율법은 더 이상 현대 사회에서 적용하지 않는 다른 율법들과 같다. 왜 이것만 콕 집어서 정죄하려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왜 이 죄만 우리를 위협한다고 생각하는가.
- 이미 동성애를 받아들이는 서구 기독교인으로서 한국교회가 동성애를 어떻게 받아들여아 한다고 보는가.
서구 기독교인으로서 우리 방법이 옳으니 우리처럼 하라고 말하기는 싫다. 2015년 퀴어 문화 축제에 여러 나라 대사들이 왔었다. 나는 그 행동이 '우리나라가 더 열린 나라'라고 말하는 것 같아 보기에 좋지 않았다. 물론 LGBT를 지지하는 차원에서 좋게 볼 수 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면 '너희 나라는 잘못 하고 있어. 우리처럼 해야 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한국은 다른 나라와 '똑같이' 할 필요는 없다. 그런 것은 좋지 않다. 교회가 지금 하고 있는 반동성애 정책에 '너네는 잘못하고 있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할 일은 동성애 이슈를 놓고 내가 속해 있는 기장 교단 또는 교회협이 어떤 일을 진행하려고 하면 그것을 지지하는 것에 한정돼 있다. 한국이 한국만의 방법으로 이 문제의 해법을 찾았으면 좋겠다.
- 퀴어 문화 축제에 가 본 적 있다고 했는데, 기독교인들은 게이 프라이드(Gay Pride)가 청소년에 미치는 영향을 걱정한다. 동성애를 지지·옹호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동성애를 조장한다고 주장한다. 반나체로 다니는 사람들이 불편하다고도 하는데, 당신은 어땠나.
나도 불편하다. 캐나다에서도 반쯤 벗은 사람들이 나오면 나도 무턱대고 반갑지만은 않다. 하지만 그날 하루 게이 프라이드를 겪었다고 해서 동성애자가 된다(become a gay)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날만큼은 그들이 사는 방식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겠지만 그렇게 사는 삶을 '선택(choose)'하는 건 힘들다.
생각해 봐라. 동성애자가 된다고 결정하는 순간 당신을 적대시하는 사람들도 많고 억압받기 시작한다. 한국에서 LGBT는 아직 아무런 법적 권리도 없다. 나는 누군가가 자기 스스로 원해서 동성애자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 퀴어 문화 축제에서 반대하는 수많은 기독교인을 만났을 때도 크게 충격받지 않았다. 하지만 국회가 차별금지법을 철회하도록 기독교인들이 압력을 행사한 것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캐서린 목사는 우리 사회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 함께 살아가야 하는 곳이라고 했다. 따라고 믿지 않는 사람들의 평등한 권리를 보장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봤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 기독교인들은 LGBT의 인권을 보장하는 것을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2013년 일부 국회의원이 차별금지법을 국회에 상정했으나 기독교계 반대로 무산됐을 때 크게 충격받았다. 서구에서 인권은 굉장히 큰 문제다. 교회가 아무리 동성애는 권리를 말하는 분야가 아니라 생각하더라도, 우리 사회는 비기독교인도 함께 살아가는 곳이고 그들도 동등한 권리를 누려야 한다. 그게 사회가 가야 할 방향이다.
기독교인이라면 정부가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힘을 실어 줘야 하는데 오히려 기독교인들이 세력을 형성해서 정부가 법안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은 정말 충격적(shocked)이다. 퀴어 문화 축제에 온 기독교인들 보면서도 별로 충격받지 않았는데 법안을 철회하도록 실력을 행사한 것은 정말 큰 쇼크였다.
- '개독교'라는 말 알고 있는가. 기독교가 이제 '개독교'라고 욕먹는 시대다.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이기적이고 무례하다는 것과 동의어가 돼 가고 있다. 그런 말 들을 때 어떤 생각이 드나.
'개독교'라는 단어를 이미 알고 있다. 지난 목요일 밤 간담회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을 목격한 뒤 왜 그렇게 말하는지 알게 됐다. 그런 경우를 봐서 유감이지만 사실인 걸 어쩌겠나.
- 김조광수 감독의 간담회가 끝난 이후 어떤 생각을 주로 했나.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정말 도전적인 메시지다. '그들이야말로 네가 정말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야, 캐서린'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LGBT를 사랑하는 것은 오히려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무례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나는 더 힘들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 또한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처럼 모든 지식과 비밀을 다 안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 캐나다는 우리나라보다 더 많은 동성 커플이 커밍아웃하고 살고 있다. 한국 일부 기독교인은 LGBT의 끝은 비참하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동성 커플의 말로가 비참하다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지 않을까. 물론 내가 캐나다에서 만난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우리 마을에도 같은 성을 가진 두 사람이 오래 함께 사는 경우가 있었다.
결혼하지 않고 서로 의지하면서 나이가 들 때까지 친구 사이로 지내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동성 결혼이 합법화된 이후에 알고 보니 이들이 커플이라고 밝힌 적이 있었다. 내가 다니던 교회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그 전에는 드러내 놓고 말할 기회가 없었을 뿐이지 우리 주변에 충분히 있을 수 있다.
▲ 캐서린 목사는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 건설 반대 운동에 참여했다. 한국에서 첫 사회참여 활동이었다. 그는 '작은 자 중에 작은 자'와 함께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억압받고 있는 이들 곁으로 가는 것이라고 했다. (사진 제공 캐서린 크리스티)
기독교인이라면 억압받는 자들과 함께 해야
- 2010년에 한국에 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한국에서 무슨 일을 하는가?
기장 총회와 교회협에서 영어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성명서를 발표한 뒤 영어로 문서를 만들면 최종 교정을 보거나 해외 교회들과 소통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 강정마을, 밀양 송전탑 투쟁 현장, 광화문광장에서 목사님을 자주 목격했다. 어떤 기독교인은 투쟁 현장에 가는 걸 탐탁지 않게 본다.
맞다. 그렇게 보는 경향도 있다. 두 가지 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시대를 지킨 양심>(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이라는 책에 보면 나보다 먼저 한국에 온 캐나다·미국 선교사들이 박정희·전두환 정권에 싸워 민주화를 이룩하는 데 기여한 내용이 담겨 있다. 그 책을 읽으면서 일제강점기 때도 지금 내가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캐나다 선교사들이 일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나에게 좋은 예가 됐다. 책을 읽으면서 그들의 삶을 따르고 싶었다.
책에서 말하기를, 그들과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선교사들도 많았다고 한다. '우리는 이 나라에서 이방인이다. 우리는 단지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보여 주기 위해서 온 건데 이렇게 사회참여할 필요가 있느냐'고 보는 선교사들도 상당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지 않는 이상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 준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고통받고 있는 자들, 아프고 힘든 상황에 놓인 사람들, 정부로부터 억압받는 사람들과 함께하지 않는데 어떻게 예수님의 사랑을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거기서 내 역할을 본다. 정치적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잘못된 관점(wrong view)이다. 기독교인은 고통받는 자들과 함께해야 한다.
- 한국에 와서 처음 참여한 투쟁 현장은 어디였나.
강정마을이었다. 2011년에 교회협이 강정마을을 지원하는 두 개의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국제 교회가 강정마을을 방문하는 프로그램을 했는데 영어 지원 업무를 맡아서 갔다. 그때 처음 현장에 나갔던 것 같다. 강정마을 상황을 알게 됐고 그 이후로도 앰네스티인터내셔널 같은 국제 시민단체와 함께 계속 갔다.
- 강정마을에서 많은 사람이 저항했지만 결국 해군기지는 건설됐다. 그런 행동들이 꼭 원하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 세월호 참사를 놓고 유가족과 지지자들이 열심히 싸우고 있지만 원하는 대로 안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 저항해야 하는가.
구럼비 바위가 폭파되고 결국 해군기지가 들어왔을 때 우리는 슬픔에 가득 찼다.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노력해서 마을에 살던 사람을 억압하는 정부에 맞서 싸웠다. 해군 기지가 만들어진 이후에도 마을 주민들이 박해받는 모습을 봤다. 박해받는 이를 위해 뭔가 하는 것은 여전히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바꿀 수 있는 것이 많이 없겠지만 그래도 해야 할 일이다.
- 그런 일을 하는 데 기독교인으로서 정체성이 중요하게 작용하는가.
물론이다. 예수님은 '작은 자 중에 작은 자와 함께하라'고 내게 말씀하신다. 작은 자, 주변에 있는 형제자매와 함께하라. 그들을 먹이고 사랑을 나누며 지지하라고 말씀하신다. 김조광수 감독에게 간 이유도 그것이다. 내가 느끼기에 김조 감독은 그날 분명히 기도하던 사람들에게 박해받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곁에 서고 싶었다.
- 언제까지 한국에 머무를 계획인가.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1년 정도 더 생각하고 있는데 아직 잘 모르겠다. 한국 기독교인들이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상대방 이야기를 들었으면 좋겠다.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라 할지라도, 다른 점을 인정하고 그들이 뭘 주장하는지 우선 듣는 자리라도 마련하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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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 출신 신임 런던시장 선출 계기
英 런던 시내버스 수백 대에 ‘알라에게 영광을’ 광고 부착한다
▲‘알라에게 영광을’이라는 문구가 적힌 런던 시내버스. ⓒ이슬라믹릴리프 페이스북
영국 대도시 5곳의 빨간 2층 버스 수백 대에 알라를 찬양하는 광고를 선보인다고 8일(이하 현지시각)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가 전했다.
보도에 따르면, 7일 런던에서 최초로 무슬림 시장이 탄생한 가운데, 영국에서는 오는 23일부터 버스 640대에 알라를 찬양하는 광고를 부착할 예정이다.
이는 영국 최대 규모의 무슬림 자선단체 ‘이슬라믹 릴리프(Islamic Relief)가 시리아 내전 희생자 지원을 위해 벌이는 캠페인의 일환이기도 하다.
이슬라믹 릴리프는 “아랍어로 ‘알라에게 영광을’(Subhan Allah)이란 글귀를 담은 버스 광고가, 이슬람과 국제 구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변화시키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이슬람법에 의하면 무슬림들은 소득의 2.5%를 가난한 이들에게 기부하게 되어 있는데, 이를 ‘자캇’이라고 한다. 이는 이슬람교의 5개 교리 중 하나이며, 금식기간인 ‘라마단’에 자캇을 행하고 있다.
한편 사디크 칸(Sadiq Khan) 신임 런던시장은 지난 5일 치른 선거에서 약 57%인 130만 표를 얻어 보수당 자크 골드스미스 후보를 꺾었다. 그는 파키스탄 버스기사 출신 아버지를 둔, 이민자 가정에서 자란 인권 변호사다.
그는 취임 연설에서 “모든 런던 시민을 대표하는 시장으로서, 런던에서 예전에 보지 못했던 가장 투명하고 부지런하며 소통하는 시정을 펼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나와 우리 가족이 얻었던 기회를 모든 런던 시민들도 누릴 수 있게 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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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애 / 목사 아내 칼럼 ] 목사 아내와 반창고
▲ 장경애 사모
가정에 대한 생각을 할라치면 언제나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다.
내가 잘 아는 남편 친구 목사 부부의 이야기다. 그 목사님도 다른 목사님들처럼 교회와 목회에만 지나치게 열중하시는 분이셨다. 그렇기에 사모님은 목사님을 늘 갈구하며 힘들어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더 이상 견딜힘이 없게 된 사모님은 사생결단을 해야겠다고 굳은 결심을 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얼굴 그것도 이마 한 가운데 대형 반창고를 붙이고 귀가하는 남편 목사님에게 얼굴을 디밀어, 그 모습을 보고 남편이 놀라거나 ‘무슨 일이냐’고 최소한의 관심이라도 가지면 살고 그렇지 않으면 살지 않기로 굳은 결심을 한 것이다.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귀가하신 목사님은 꼬리치며 나타나는 개를 위해서는 어디에서 먹다 남은 고기를 가지고와 던져주면서도 정작 사모님 이마에 붙은 반창고에 대하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사모님은 맥이 다 빠져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고, 자신은 집에 있는 개만도 못한 존재처럼 느껴졌다는 것이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5월이 왔다. 언제부터인가 ‘5월하면 가정’이 떠오른다. 어린이날엔 자녀가, 어버이날엔 부모가 떠오른다. 이제는 부부의 날까지 생겼다. 그래서 5월을 ‘가정의 달’이라 칭하고 가정과 연관되는 다양한 행사가 여기저기서 펼쳐진다. 동시에 가정에 대해 다시 한 번 조명해 보고 건강한 가정을 이루게 하는데 관심을 유도한다. 이렇게 여러 종류의 날들을 만들어 자극하는 것은 일 년 열두 달 중에 이 5월 한 달에만 가정을 생각하고 나머지 열한 달에는 가정을 소홀이 여겨도 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일 년 내내 가정은 소중하지만 소중한 만큼 소중히 여기지 못하기에 이 달을 기해 더 생각하라고 정한 것일 것이다.
교회 역시 가정의 달 행사에 대하여는 일반 사회보다 더 앞장서고 있다. 주일마다 쏟아지는 가정에 대한 목사님들의 설교, 가정문제 전문가들의 초청 강의, 그 밖에 여러 종류의 이벤트 등을 통하여 인류에게 교회보다 먼저 주신 최초의 공동체인 가정을 행복한 가정으로 만들기 위한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렇다면 그것을 주도하고 또 가르치는 목회자의 가정이 가장 건강해야 함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어김없이 찾아오는 이 가정의 달에 목회자 가정은 어떠한지 생각해 보고 싶다.
가정이 건강해야 교회가 건강하고 교회가 건강해야 이 사회가 건강하게 된다는 것을 부인할 성도나 목사는 없을 것이다. 건강한 가정이 되려면 가정 구성원 하나하나의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해야 하며, 그러할 때 건강한 가정이 이루어진다. 나는 행복한데 네가 불행하다면 건강한 가정이라 할 수 없으며, 반대로도 마찬가지다.
모든 목사님들은 건강한 교회를 원한다. 동시에 성도들의 가정이 건강하기를 원한다. 여기에는 목회자 가정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목회자 가정도 일반 성도들의 가정과 같이 건강해야 할 의무와 권리가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목사님은 무엇에서든지 성도들의 귀감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최고의 신경정신과 전문의가 자신이 신경쇠약에 걸려 고생하기도 하고 자궁암 전문의의 아내가 자궁암으로 죽기도하는 것처럼 성도들의 가정을 건강하게 만들기 원하면서 자신의 가정은 건강하게 만들지 못하고 또 만들려는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는 목사님들이 있다.
물론 목사님들이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고 충성하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왕성하게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렇기에 목사님들은 언제나 바쁘다. 바쁘니까 자신의 가정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또한 교회 일에만 전념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거라고 착각하는 목사님들도 계신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목사님들이 말씀하시듯 ‘가정과 교회는 두 개의 수레바퀴가 조화 있게 잘 굴러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목사님들은 교회를 우선으로 살아간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목회자는 하루 24시간이 모두 긴장된 시간이다. 목회자 가족도, 특히 목사의 아내 또한 그에 못지않게 긴장된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 목회자 자녀 역시 사방에서 들여다보이는 어항 속에 살기에 잠재된 불안과 함께 성도들의 자세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성도들은 그것을 아주 당연하게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해야만 훌륭한 목사이며 교회가 부흥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잘 아는 목사님은 자신의 삶 전부를 오로지 교회만을 위해 살아오셨다. 그런데 교회에 큰 위기가 닥쳐와 교회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때, 그 목사님은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고 자투리의 관심이 아닌 참된 관심을 가족에게 기울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한 남편을 본 사모님은 목회지를 잃은 위기에 대한 불안과 아픔보다는 남편을 찾은 기쁨으로 행복해 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정말 가슴 아팠다. 그리고 그 사모님이 이해가 되었다.
어떤 한 목사님의 글이 생각난다.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엄마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아빠는 언제까지 목사할 거야?” 그리고는 “아빠가 목사님을 그만 두고 그냥 자기 아빠만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아내로부터 들은 목사님은 하나님 앞에서 통곡을 했다고 한다. 자신이 목사로서의 자격이 없음과 아빠로서의 자식이 흡족할 만큼의 역할과 본을 보이지 못한 것에 대해 회개하고 동시에 성도들에게 자신의 가족을 위해, 가정 사역에 성공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기도 부탁을 했다는 글이다.
그 글을 읽으면서 나도 마음이 저렸다. 그리고 그 목사님이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얼마든지 자녀의 이런 생각에 화를 낼 수도 있고, 그 말을 묵살시켜버릴 수도 있는데 아들의 말을 깊이 생각하시고 가정 사역을 위해 성도들에게 기도 부탁까지 하신 것을 보니 훌륭한 목회자요, 남편이요, 아버지임에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성도들의 사정은 너무도 잘 알고 잴 챙기는데 정작 알아야 할 목사님 자신의 가족의 일들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목사님도 종종 본다. 이럴 때 목사님의 가족은 소외감에 상처를 입는다. 가정을 잘 돌보는 것은 목사님도 여느 아버지(남편)과 다르지 않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비춰 보면 목사님의 가장 가까운 이웃은 목사님 가족이다. 아니 목사님께서 돌보아 주어야 할 강도만나 피 흘리는 그 이웃이 먼저는 목회자의 가족이라는 점을 명심해 주시기를 목사의 아내로 감히 주문한다.
어김없이 찾아온 2016년 5월, 가정의 달에 이마에 반창고 붙이는 목사 아내가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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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내한 선교사 알렌은 실패한 선교사였나
외교관, 세속주의자로 변신한 그의 삶이 주는 교훈…교회는 이익집단 아닌 대안 공동체
옥성득
▲ 알렌 의사(1887년경)
상주할 목적으로 파송된 첫 개신교 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 1858~1932)은 1884년 9월 서울에 도착하여 첫 3년간 의료 선교사로 지냈고, 이어서 1년 반 동안 워싱턴 D.C에서 한국공사관 설치를 도왔으며, 1890년 7월부터 1905년 6월까지 서울 미국공사관의 서기관과 공사로 활동했다. 하나님을 섬기는 선교사로서 4년, 제국을 섬기는 외교관으로 17년, 이 둘 사이에서 그는 어떻게 살았을까?
제중원 원장 되다(1885년 4월)
1884년 12월 4일 발생한 갑신정변은 서울의 유일한 서양 의사 알렌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중상을 입은 민영익을 치료하자 '하늘에서 내려온 의사'로 알려졌고, 1885년 4월 설립된 첫 근대 왕립 병원인 제중원(첫 이름은 광혜원)의 책임자 겸 고종의 시의로 임명받았다.
알렌이 남긴 편지와 일기를 토대로 1944년 해링턴(Fred Harvey Harrington)이 저술한 <하나님, 물신, 일본인: 알렌과 한미 관계, 1884~1905>를 보면 알렌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다. 이 저서에 의하면 알렌은 제중원과 제중원의학교를 설립하여 개신교 선교의 기초를 마련한 개척 선교사였으며, 1890년 미국공사관 서기관이 된 이후에는 선교 사업을 도와주는 한편 한국에 진출한 미국 자본가들의 이익을 옹호한 외교관이자 일본의 한국 침략과 미국의 친일 정책에 반대하다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소환된 친한 인사로 소개되어 있다. 해링턴은 미국의 루즈벨트 정권이 1905년 러일전쟁 후 알렌을 파면하고,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넘겨준 실수가 일본의 야망을 키워 급기야 1940년대의 태평양전쟁으로 발전되었다고 암시했다.
▲ 해링턴이 쓴 <알렌과 한미 관계>(1944)
그러나 알렌의 이면을 들추어낸 이 책으로 알렌은 하나님, 재물, 일본인이라는 세 주인을 섬기려고 했지만 결국 어느 하나도 제대로 섬기지 못한 인물이라는 비판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교회사학계는 알렌을 개신교 선교를 개척한 은인으로 칭송해 왔지만, 일반 학계는 운산금광 채굴권을 미국 자본가에게 넘겨주는 등 미국의 이권 추구에 철저했던 외교관이자 한국 문화와 종교를 무시한 오리엔탈리스트로 비판하고 있다.
개종 없는 의료 선교는 정당한가?
선교사로서 알렌은 사실 한 명의 한국인도 개종시키지 못했다. 정부 고관으로서 왕실의 총애를 유지하고 외국인 진료에 주력하여 다른 선교사들로부터 세속적 야심가로 비난받았다. 알렌은 일 때문에 한국어를 제대로 익히지 못해 한국어로 전도할 수 없었다. 감리교의 첫 의료 선교사 스크랜턴 의사는 제중원에 잠깐 고용되었으나 선교 병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제중원을 떠나 1885년 9월 사립 시 병원을 개설했다.
알렌은 까다로운 성격 때문에 동료 선교사들과 갈등하다가 선교사직을 버렸다. 알렌보다 한국 선교사로 먼저 임명되었지만 나중에 도착한 경건한 헤론 의사가 알렌보다 의료 기술이 더 좋았는데, 포도주와 파티를 즐기는 알렌을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원장인 알렌의 권세와 전횡을 질투하고 비판하다가 1890년 임종하면서도 알렌과 화해하지 않았다. 선교사로서 알렌은 실패한 것일까?
하지만 해링턴이 인용한 대로 의료 행위 자체가 기독교 사랑의 표시요, 선교의 핵심이라고 본 1930년대 선교신학으로 볼 때 알렌은 그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했다. 제중원은 첫 해에 1만 명 이상의 환자를 치료했으며, 콜레라 유행 때 많은 생명을 구했다. 교육, 전도, 의료는 하나님나라를 위한 사역이다(마태복음 9:35).
알렌은 현실론자였지만 의료 자체가 기독교 사랑을 실천하는 선교라고 본 점에서는 시대를 앞서 갔다. 타 문화권 개척 선교에서 정부와의 우호적 관계, 현지 문화와의 소통 작업은 선교의 중요한 부분이다. 알렌은 후자에는 약했지만 전자에는 공헌했다.
▲ 제동 제중원 진료실(1885년)
'위로부터 아래로'의 선교 방법은 타당한가?
1885~1890년 알렌 대 헤론·언더우드, 이어서 헤론 대 언더우드의 치열한 감정 대립과 헤론의 죽음, 그리고 알렌의 선교사직 사임이라는 극단적 결말은 선교 경험이 없고 자기 확신이 강한 20대 청년 선교사들이 낯선 선교지에서 벌인 한 편의 드라마였다. 물론 이는 상이한 선교 방법론 사이의 갈등이기도 했다.
알렌은 정부 병원인 제중원 원장으로서 종교의 자유가 없는 상황에서 왕실의 호의는 선교의 필수 조건이요, 수도 서울에서 선교 기반을 확보하는 것은 미래 선교를 위한 포석이며, 씨뿌리기 전에 밭을 고르듯이 병원을 통해 직접 전도를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알렌의 기독교 문명을 통한 한국의 기독교화라는 선교 방법은 합법적인 범위 안에서 장기전으로 가자는 신중론이었다.
이에 반대하던 헤론 의사도 1887년 말 제중원 책임자가 되면서 알렌의 방법을 수용했고, 불법적이더라도 직접 전도를 통해 개종자를 만들어야 한다는 열정주의자 언더우드와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언더우드와 다른 목회 선교사들은 1888년부터 노동자 계층을 전도의 주 대상으로 삼는다는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는'(bottom-up) 네비어스 정책을 채택하고, 알렌-헤론의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top-down) 방법을 견제했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의사들과의 교류와 의료 선교에 대한 재인식-호튼 여의사와의 결혼, 헤론 의사의 노선 수정과 죽음, 신임 빈튼 의사의 전도 지상주의에 따른 제중원 사직, 친구가 된 에비슨 의사의 폭넓은 의료 선교론-을 통해 1895년 전후로 '위로부터 아래로'의 방법인 기독교 문명과 민주주의를 통한 한국 전체의 기독교화와 근대화라는 비전에 동의했다. 언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