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 파괴가 부른 자살의 증가/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가? 2016-04-27 16:26:31 read : 4075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공동체 파괴가 부른 자살의 증가
미 자살률 15년간 24% 증가, 경제 위기와 기독교 중심 미국 인간관계 약화가 이유로 꼽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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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편집부] 미국인 자살률이 급격히 늘고 있다. 미국 질병예방통제센터(CDC)는 1999년 자살률 조사 실시 이후, 2014년까지 매년 1~2%씩 자살자가 늘었다고 22일 보고서를 통해 밝혔다. 안타깝게도 자살 원인으로 교회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공동체성을 주로 했던 관계가 깨어진 것이 경제 문제와 함께 꼽혔다.
미국인의 자살률은 15년간 24%가량 올랐다. 1999년부터 2006년까지는 매년 1%가량 증가했지만,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일어난 2007년부터 2014년까지는 2%씩 자살자가 늘었다. 퍼센트를 실제 인구 비율로 환산하면 매년 8000명 정도가 자살로 더 사망한다는 의미다.
75세 이상 남녀를 뺀 모든 연령대에서 자살률은 증가세를 보였다. 75세 이상 미국인의 자살률은 2014년보다 1999년이 더 높다. 남성은 총기를 가장 많이 사용했고, 여성은 독극물 등 약물을 자살 도구로 주로 선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불어 남성이 여성보다 더 많이 자살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2014년의 경우, 남성은 인구 10만 명당 20.7명이 자살했고, 여성은 5.8명이 자살했다.
자살 원인은 경제적 위기감과 사회 환경의 급격한 변화 등이 꼽혔다. 경제적 위기감은 세계 경제 위기와 장기적 경기 침체가 2007년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함께 주요한 원인이었다. 사회적 변화는 공동체성 파괴로 인한 멀어진 인간관계인 것으로 조사됐다. 교회를 중심으로 한 미국의 지역사회 유대가 약해진 것을 이유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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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결혼 합법화 반대하는 엄마의 간절한 마음…“짠하네요”
▲독자 제공
22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상에서는 사진 한 장이 화제가 되고 있다. 제목은 ‘동성결혼 반대 - 가정을 지키고 싶은 엄마의 간절한 마음’이다.
이 사진은 지난해 6월 김조광수씨가 서울 서부지법에 진행 중인 동성결혼 합법화 소송을 막기 위해 한 학부모가 전단지를 돌리고 있는 장면이다. 엄마 옆에는 여자 아이가 보도 위에 자리를 깔고 앉아 혼자 놀고 있다.
사진 아래에는 “동성결혼은 막아야겠고 애는 맡길 데가 없고 어쩔 수 없이 법원까지 아이를 데리고 왔네요. 감동적이라고 말하기엔 언어 표현력이 부족함을 느낍니다” 라는 글이 달려 있다.
이 사진을 접한 네티즌들은 “눈물이 앞을 가린다” “주여 이 도성을 살려주시고 이 나라를 살려주소서”라는 글이 달고 있다.
SNS에 사진을 올린 서모(43)씨는 “지금 충북은 동성애를 차별금지 사유에 포함시킨 충북교육공동체 권리헌장 때문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면서 “만약 지난해 서울 서부지법에서 동성결혼을 인정했다면 초·중·고등학교에서 동성애와 동성결혼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야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씨는 “이런 분들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동성애 관련 악법과 조례 헌장 등을 막을 수 있는 것”이라고 귀띔했다.
한편 김씨가 서울 서대문구청을 상대로 서울 서부지법에 제출한 가족관계등록 비송사건은 아직 진행 중이다. 김씨는 2013년 12월, 19세 연하의 김승환씨와 남남(男男) 결혼식을 갖고 서대문구청에 혼인신고서를 제출했다가 반려되자 동성결혼을 인정해 달라며 2014년 5월 서대문구청장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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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힘이 강한 이유와 그 사회의 특징 5가지
30년간 무슬림 사역한 줄리안 리드스턴 선교사, 오엠 세미나서 강의
IS 대원들이 환상을 보고 예수님을 영접한 이야기를 '순교자의소리(VOM)'를 통해 세상에 알린, 이슬람권 선교 전문가 줄리안 리드스턴(Julyan Lidston) 선교사 부부가 방한했다.
한국교회에 무슬림 사역을 도전하기 위해 온 그는 지난 23일 예능교회(조건회 목사)에서 진행된 한국오엠 연례 선교 세미나에서, 오늘날 이슬람이 왜 이토록 강한지와 기독교에게 가장 크고 유일한 경쟁 세력이 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30년 넘게 무슬림들을 대상으로 선교한 줄리안 리드스턴 선교사가 23일 예능교회에서 열린 한국오엠 연례 선교 세미나에서 강의하고 있다.
그는 이슬람의 힘이 강한 이유는 그들의 다섯 가지 기본 실천사항인 다섯 기둥, 즉 '신앙고백, 기도, 자선, 라마단 단식, 성지순례'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이슬람 신앙은 '거짓, 두려움, 율법주의, 민속 이슬람(신비주의), 사회적 정체성(움마)'이라는 다섯 가지 무슬림 사회의 특성으로 나타난다고 말했다.
그는 이슬람은 우주의 핵심 진리(요일 2:22)를 부정함으로써 거짓에 개방되고, 그 문화에 '거짓'이라는 특징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꾸란은 반복적으로 '신이 아버지가 아니며 아들이 없다'고 말하는데, 이는 신체적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라며 "기도 시간마다 '그는 자식을 보지 않으면 태어나지도 않는다'는 수라 알이흐라스(Surah Al Ikhlas)를 암송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리를 선포하라고 주셨다"고 강조했다.
두 번째, 꾸란에서 알라는 보살펴 주는 아버지가 아니라 두려운 폭군으로 나타나며, 지옥에 대한 협박으로 가득하여 '두려움'을 준다고 말했다. 신약의 사랑과 꾸란의 두려움을 비교한 뒤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한 이란인의 사례를 소개한 그는, "무슬림 사회는 두려움으로 가득하다"며 "정부·가정·기관은 폭력과 협박투성이고, 이는 최근 이슬람 원리주의와 지하드의 부상으로 더욱 악화됐다"고 주장했다.
특히 "꾸란과 하디스에는 신이 적에게 공포(테러)를 주어서 무함마드가 성공했다는 구절이 많다"며 "이것은 IS의 뚜렷한 전략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리드스턴 선교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증거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기도 하는데, 교회도 비이성적인 두려움이 가득하다"면서 "두려움은 증거를 못하도록 억누르며, 거짓과 합쳐 의심을 양산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러나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쫓는다. 성령은 우리에게 선포할 수 있는 담대함을 주신다"고 강조했다.
세 번째, 무슬림 사회의 특징은 '율법주의'다. 리드스턴 선교사는 "만약 신이 아버지가 아니라면, 우리는 아들이 아니라 종이고 그분의 복을 그저 받는 것이 아니라 노력해서 벌어야 한다"며 "하디스와 이슬람법인 샤리아는 매우 사소한 것들에 대한 규정들로 넘쳐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율법주의는 교만, 정죄주의와 외식을 낳으며(눅 18:8~14), 이것들은 모두 무슬림 세계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잘 알려져 있다"고 말했다. 그는 기독교의 율법주의에 대해서도 인식이 필요하다며 "우리는 겸손, 깨어진 마음, 사랑, 수용의 자세를 가지고 성령 안에서 진정으로 살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네 번째, '민속 이슬람과 신비주의'에 대해 그는 "만약 신이 아버지가 아니라면, 우리에게는 그분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확신이 없다"며 "이슬람에서는 신이 기도를 듣는 데 확신이 없기 때문에, 이슬람 이전의 정령 신앙적 관행으로 돌아가는 면이 있다"고 주장했다.
다섯 번째, '사회적 정체성'에 대해 "만약 신이 아버지가 아니라면, 우리는 가족이 아닐 것"이라며 "이슬람에는 억압과 통제를 기반으로 가족을 대체하는 다른 사회(움마)가 있다"고 말했다. 리드스턴 선교사는 "무슬림들에게 서로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교회의 교제로 응답해야 한다"며 "우리는 새로운 신자에게 가족이 되어야 하며, 서로 사랑하는 교회 가족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오엠 세미나가 23일 예능교회에서 진행되고 있다. ⓒ크리스천투데이
영국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리드스턴 선교사는 14세 때 주님을 떠났다가 맨체스터대학 시절인 21세 때 영적 회심을 했다. 이듬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OM국제선교회 인도선교사로 4년간 헌신한 그는, 이후 영국 글래스고성경대학을 졸업하고 1980년부터 터키 앙카라·이즈밀에서 교회 개척, 현지 지도자 양육 사역을 하고, 1993년부터 1995년까지 터키 현장 지도자로 섬겼다.
2002년부터 2014년까지 OM국제선교회의 터키·이란·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방글라데시·중앙아시아 지역을 관리·감독하는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WACA) 지역 책임자로 왕성하게 사역했고, 작년부터는 오엠 무슬림 선교 동원 및 무슬림 선교사 사역 개발 책임을 맡아 '무슬림들을 위한 특사'로서 새로운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또 영국 글래스고에서 터키·이란 난민 사역도 깊이 관여하고 있다. 그의 모교회인 퀸즈파크침례교회에서는 1998년 목사 안수를 받은 직후부터 지금까지 봉사·선교 담당 부목사로도 섬기고 있다.
한편 이날 오후 리드스턴 선교사는 '오늘날 이슬람의 세계적 정황', 이정순 교수(백석대 선교학)는 '21세기 한국 이슬람의 실재와 현황'을 강의했다.
한국오엠 대표 최현미 선교사는 "전 세계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일상의 16억 무슬림, 평범한 무슬림을 향해 편견과 두려움으로 바라볼지, (그런 시각은) 일부 극단주의적으로 과장되고 왜곡된 것이라 여길 것인지 우리는 질문해야 할 것"이라며 "이번 세미나를 통해 이슬람을 바로 알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무슬림을 품을 수 있기를 소원한다"고 말했다. 한국오엠 연례 선교 세미나는 오는 30일 부산 온천교회(안용은 목사)에서 한 차례 더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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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조광수씨 초청 행사 논란-반대하는 교계 단체]
“동성애 찬성 입장만 듣는 홍보 자리”
계속 옹호하면 정체성 문제 삼을 것
▲이요나 탈동성애인권포럼 상임대표(오른쪽)가 25일 서울 종로구 한국기독교연합회관 앞에서 김조광수씨 초청 행사 취소를 촉구하는 공문을 NCCK 관계자에게 전달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28일 동성결혼 합법화 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김조광수씨를 초청해 대화마당을 개최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동성애 반대 운동을 펼치고 있는 교계 단체들은 즉각 철회를 요구하며 한국교회 연합기관으로서 정체성까지 문제 삼고 나섰다. 이에 대해 NCCK는 사회적 이슈인 동성애 문제의 해법을 찾기 위해 당사자의 이야기를 들으려는 것일 뿐이라며 억측과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한국교회언론회는 26일 ‘NCCK가 동성애 조장 반대운동에 맞선다면 한국교회가 해체해야 한다’는 논평을 발표하고 “NCCK가 동성애와 동성결혼을 지지하거나 옹호하는 듯한 행사를 계속 한다면 한국교회가 존재 이유를 문제 삼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동성애문제대책위원회 등 37개 단체도 25일 기자회견을 열고 실력행사에 나섰다. 이요나 탈동성애인권포럼 상임대표는 “성경은 동성애를 죄라고 말하는데 NCCK가 정말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 NCCK에 예수가 있는 것인지 묻고 싶다”면서 “다수의 동성애자들이 동성애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통을 겪는데 탈동성애의 길을 알려주지 못할망정 동성애를 홍보하는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게 말이 되냐”고 항의했다. 강사근 대한민국미래연합 대표도 “NCCK는 부도덕한 성행위를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이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대표적 연합기관인 NCCK가 동성애 찬성 입장만 청취하며 친동성애적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행사명도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꾸는 이야기 마당- 김조광수 감독과 함께 차이를 듣다’여서 동성애를 ‘차이’로 보며 ‘차별’ 즉, 동성애에 대한 비판과 비난도 금지해야 한다는 친동성애적 뉘앙스를 갖고 있다.
기독 네티즌들은 “지난해 동성애 옹호 논란을 불러온 책자를 발간해 혼란스럽게 했던 NCCK가 동성결혼 합법화와 차별금지법 제정에 앞장서온 대표적 동성애자를 불러 이야기를 듣겠다니 어이가 없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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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교회는 다 미자립? '톡톡' 튀는 자립 목회 이야기
이상진 목사(충남 광시송림교회)는 20년 전부터 주변 목사들에게 '목사가 목회는 안 하고 순 밭일만 하고 장사에 눈이 멀었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목회 초창기부터 교회 인근 밭에다 콩을 잔뜩 심고 수확기가 되면 두부 가공에 열을 올렸다. 누가 보면 저 사람이 목사인지 농부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농사일에 몰두했다.
첫 농사는 말아먹었다. 2년간 열심히 했는데 결국 허탕이었다. 콩 농사 지어서 두부도 만들고 콩나물도 재배했는데 수확이 변변찮았다. 수지 타산이 맞지 않아 더 이상 콩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었다. 아무래도 신참내기가 겁 없이 덤벼든 탓에 땅도 작물도 순순히 받아 주지 않은 것 같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즈음 병까지 얻었다.
병명은 당뇨병 합병증. 시력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다리 한 쪽은 마비 증세가 악화돼 병원에서는 아무래도 절단해야 할 거 같다고 했다. 점점 나빠지던 시력은 급기야 실명 위기에 놓였다. 담당 의사는 시한부 이야기까지 꺼내는 판이었다. 눈앞만 캄캄해진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어두워졌다. 목회도 농사도 건강도 실패의 연속이었다.
병원 치료에 더 이상 의존할 수 없겠다는 판단이 섰다. 식이요법으로 자구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혈액 순환에 도움이 되는 음식들을 연구했고, 양파가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직접 엑기스를 만들어 마시기 시작했다. 그 외에도 몸을 살리고 소생시키는 먹거리를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자기 몸으로 실험하면서 효과를 직접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몰라보게 몸이 나아졌다. 시력도 되돌아왔다. 건강이 회복됐다는 것을 스스로 체감할 수 있었다. 먹거리가 몸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이 목사는 그 뒤로 몸 살리는 먹거리를 만들고 알리는 일에 뛰어들었다. 양파 농사를 본격으로 지기 시작한 게 이때부터다.
▲ 이상진 목사는 20여 명이 모이는 농촌 작은 교회를 목회하고 있다. 그러면서 양파 농사도 짓고 양파즙을 내서 팔기도 한다. ⓒ목회멘토링사역원 엄태현
소 먹이 실어 나르는 마을 전도사
강형주 목사(선장중앙교회)는 20대 후반 전도사 시절 아내와 갓난 딸을 안고 홍성 시골 마을로 들어갔다. 거기서 7년을 목회했다. 부임 당시 교인은 5명밖에 없었고, 목회자 사례비로 20만 원이 책정돼 있었다.
애초에 농촌 목회를 하리라 마음먹고 들어가서인지 동네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동네 부역이라고 해서 길을 닦고 각종 공공시설 정비 사업이 있을 때마다 팔을 걷어붙였다. 동네 이장님들이 와서 전도사님이 왜 이런 일을 하냐고 말리기도 했지만 당연하게 여기고 참여했다.
마을 꼬마 애들을 데리고 읍내까지 유치원 통학 버스를 운행하기도 했다. 읍내까지 누구도 데려다 주질 않아서 유치원에 다니지 못하던 아이들이었다. 매일 반복하는 통학 버스 운전에 마을 주민들이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저 양반, 마을 일에 관심 많은 분이다'라고 하면서...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얻은 이유는 또 있었다. 홍성은 한우로 유명한 고장이다. 그런데 동네에 소 먹이를 차로 실어 나를 사람이 없어서 늘 골머리를 앓았다. 이것도 역시 젊은 전도사의 몫이 됐다. 2.5톤 트럭을 몰고 30~40km를 운전해서 소 먹이를 실어 날랐다. 마을 어르신들이 농촌에 온 젊은 전도사가 마을 일에 적극 나선다고 칭찬했다. 교회 소문이 좋게 나면서 성도들도 늘었다. 강 목사가 다른 지역으로 옮기기 직전에 30명 가까이 출석하게 됐다.
▲ 강형주 목사는 마을분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목회 초창기부터 마을 일에 빠지지 않았다고 했다. ⓒ목회멘토링사역원 김재광
목사가 '농사꾼' 된 이유
이상진 목사가 농사일에 매진하게 된 배경은 이렇다. 목회 초창기 콩 농사가 실패하긴 했지만, 농사일을 관둘 생각은 없었다. 마침 전환한 양파 농사로 이제 제법 매출도 궤도에 올랐지만 지금도 농사로 생계를 이어 갈 생각은 별로 없다.
그럼 농사를 짓는 목적이 무엇이냐 물었다. 이 목사는 "이왕 농촌에 와서 목회하는데 농부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직접 흙 만지고 작물을 재배하고 농사 지은 걸 내다 파는 모든 과정을 나도 겪어 보고 싶었다. 그래야 이분들의 고충이 뭔지 헤아릴 수 있지 않겠나. 목사가 뭘 도와 드려야 하고 어떤 이야기를 해 줘야 하는지 알 수 있지 않겠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야기를 하다 말고 교회 인근에 있는 양파밭으로 데리고 갔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밭이 가까워오자 표정이 밝아졌다. 여지없는 농사꾼의 얼굴이었다. 그러더니 땅을 밟아 보라고 했다. 보드랍고 푹신한 느낌이 발바닥 전체로 전해져 왔다. 이 목사는 그것이 땅이 살아 있다는 증거라고 했다.
양파밭에는 풀이 자라고 있었다. 왜 풀을 안 뽑는지 물었다. 이 목사는 땅은 만물이 자라고 숨 쉬는 터전이라고 답했다. 풀이며 곤충이며 벌레며 다 함께 더불어 자라는 곳이 바로 땅이라는 것이다. 상품 작물을 키우겠다고 제초제, 살균제, 살충제를 뿌려 대면 땅은 제 구실을 잃고 그렇게 자란 작물이 몸에 생기를 불어 넣을 리 없다고 잘라 말했다. 풀과 곤충, 벌레의 각축에서 튼튼하게 제힘을 기르며 자란 곡식이 인간의 몸에 활력을 가져다준다고도 했다.
농사꾼만 된 게 아니라 농의 철학이 온몸에 배인 천생 농부가 다 되었다. 이상진 목사는 교우들과 양파를 친환경 유기농으로 기르고 양파즙을 내서 판매하는 전 과정을 함께한다. 교우들이 재배한 양파를 정상가에 수매해서 즙 만드는 기계로 양파즙을 낸다. 직거래 판매까지 담당한다. 이 목사는 포장하는 일을 도맡아서 하고 나머지는 각자 분업을 통해 협력한다.
교인들 살림살이가 몰라보게 나아졌다. 전에는 거대 유통 업체가 양파값 허리를 싹뚝 잘라 대기 일쑤였다. 수지 타산을 이유로 턱없이 가격을 내리 깎아서 분통 터지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이제는 땀 흘린 만큼 제값 주고 농산물을 내줄 수 있게 되었다. 교인들뿐 아니라 마을 주민들도 이 과정에서 소외되지 않아 동네 사람들이 교회를 참 곱게 알고 있다고 한다.
내년부터는 동네에서 추수하는 쌀을 서울시 소재 학교들에 친환경 식재료로 보내기로 했다. 서울시장과 얼마 전 면담을 하고 왔다는 이 목사는 이야기를 하면서 얼굴빛이 환해졌다. 실은 부임하고 10년 가까이 교회 십자가 네온사인에 불을 넣지 않았다. 마을을 비추는 몫을 제대로 못 하면서 십자가에만 불을 켜는 게 무슨 의미인가 싶었다. 3년 전부터 불을 밝혔다. 마을분들이 교회가 마을을 위해서 있다고 여기고 있다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 제초제, 살균제, 살충제를 전혀 안 쓴다는 이상진 목사의 밭은 밟으면 푹신푹신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목회멘토링사역원 엄태현
'키워서 남 준다'
다시 선장중앙교회 이야기다. 강형주 목사는 이제 농촌 목회 24년 차가 되었다. 24년간의 목회 이야기를 하다가 뭐 보여 줄 것이 있다며 교회 바깥으로 나갔다. 강 목사도 밭 구경을 시켜 줬다. 눈빛이 반짝이면서 손가락으로 이쪽저쪽을 부산하게 가리켰다. 저기는 매실나무, 저기는 아로니아, 저기는 단감나무, 저기는 블루베리.
강 목사 역시 농사와 목회가 분리된 적이 없었다. 1,000평 밭농사로 오랫동안 고구마를 키웠고, 각종 묘목을 심어서 열매 나무로 키우는 일도 계속하고 있다. 심고 기르다 보니 애정이 생겨 그런지 묘목은 어떻게 기르면 좋은지 열매 나무들을 어떻게 가꿔야 하는지 노하우가 정교하고 세세하다. 일장 설명을 듣고 있다 보니 이분이 목회자인지 농부인지 헷갈릴 정도다.
강 목사는 '키워서 남 준다'를 지론으로 삼고 있다. 열매 나무들에서 나는 과실들은 모두 교인들 몫이다. 묘목은 자유롭게 나누어 준다. 인근 농촌 작은 교회 목사들에게도 그 몫이 돌아간다. 강 목사는 미자립 농촌 교회 목회자들에게 시골 땅 100평이라도 사서 블루베리나 아로니아 묘목을 심을 것을 권했다. 심다 보면 열매도 나고 목사 가정 살림에 보탠다기보다는 그걸로 남 주기 좋지 않겠느냐는 게 이유였다.
▲ 묘목을 정성스럽게 키우는 손길이 교회 주변 곳곳에 엿보였다. 매실, 단감, 아로니아, 블루베리 등 종류도 다양했다. 과실은 모두 교인과 주민들 몫이다. ⓒ목회멘토링사역원 김재광
설교 준비나 기도 생활은 어떻게 하는지 물었다. 강 목사는 "여태껏 새벽 예배에 빠져본 적이 없다. 수요일, 토요일에는 다른 약속을 안 잡는다. 지금도 빼놓지 않고 원고 설교를 고수한다. 여러 일을 하긴 하지만 영성 훈련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 교인들이 대번에 알아챈다. 책 읽고 성경 연구하고 기도하는 걸 게을리 하지 않도록 스스로 원칙을 세워서 지낸다"고 했다.
침례교농선회 사무총장으로 활동하는 강형주 목사는 1년에 한 차례씩 농어촌 목회자들을 위한 세미나를 열고 자립, 자활 기금을 마련해 어려운 형편의 목회자들을 돕는 사역도 하고 있다. 무슨 사역인지 물었더니 묘목 키우길 원하는 목회자들을 돕는 지원 사역이라고 답했다. 오미자, 아로니아, 블루베리, 여주 등 뭐든 키워 보겠다고 하는 분들에게 지원금을 보태 주고 있다.
농촌 목회 자립의 길을 물어 보려고 찾아갔는데, 두 목사는 자립이 중요한 게 아니라 농촌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는 삶이 더 중요하고 우선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이상진 목사가 한 말이다.
"목회자들이 긍지를 가지고 목회하면 좋겠다. 도시 사역이 꽤 삭막하지 않은가? 농촌으로 내려와서 농부들 사랑하면서 목회하면 참 신바람 나는데… 자립도 어렵지 않다. 여기에 뼈 묻을 생각을 하면 자립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농부들 생각하면서 뭘 도울 수 있을까 생각하면 자립은 자연스럽게 되는 거 같다. 그리고 먹고사는 게 뭐 그리 대수인가. 먹는 거 입는 거는 다 주실 거라고 믿는다."
마을을 섬기는 시골 교회 워크숍
목회멘토링사역원은 5월 2일(월) 대전 늘사랑교회에서 '마을을 섬기는 시골 교회 워크숍'을 개최합니다. 농촌 목회 현장의 고민을 나누고, 마을에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교회들의 이야기를 모아서 공유하는 자리입니다. 시골 교회, 농촌 목회를 놓고 고민을 나누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하고 싶은 분들을 초대합니다.
워크숍 프로그램 및 참가 안내(신청서 접수) 바로 가기
문의: 목회멘토링사역원 (070-8766-2312, meet@pastormentor.kr)
이상진 목사는 농촌 목회가 행복하다고 했다. 마을 속으로 들어가 농부들 사랑하는 마음으로 목회하면 자립도 어렵지 않다고 했다. ⓒ목회멘토링사역원 엄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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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 경전’의 핵심 가르침들은 무엇인가
J. 매튜 바버, 동성애 등 성적인 죄 분석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하라. 그것이 율법의 전부다.” -알리스터 크로울리(사탄학 사제이자, 현대 성교육의 아버지 알프레드 킨제이의 모델)
▲J. 매트 바버. ⓒ미국 크리스천포스트
미국 크리스천포스트 칼럼니스트인 J. 매트 바버(J. Matt Barber)는 최근 ‘성적인 죄와 사탄성경의 ‘황금률’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동성애를 비롯한 성적인 죄에 대해 깊이 다뤘다.
바버는 “질서와 무질서, 선과 악, 진실과 거짓, (결혼관계 안에서의) 자연스러운 성과 (여러 형태의) 동성애. 이들의 대비는 낮과 밤과 같이 명확하다. 그리스도는 모든 ‘성적인 부도덕’을 반복적으로 정죄하셨으며, 이는 구약 유대인들의 도덕법(동성애 행위 포함)에도 규정돼 있다. 신구약을 통틀어 일관된 하나님의 말씀은 ‘사랑, 일부일처, 헌신’ 외의 모든 동성 간 성행위를 ‘가증한 죄악’으로 명확히 지적하고 있다”며 말문을 열었다.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레 18:22)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
바버는 “음행은 속이는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면서 “오늘날 참으로 성적인 죄를 합리화하는 배교적인 성경 수정주의자들이 계속 성장해 가고 있다”고 했다.
이어 “기만이 깊은 마음과 순수한 소망의 감정에 뿌리내리고 있으나, 수천 년의 역사 동안 인간이 타협할 수 없고 부정할 수 없는 성경에 따르면, 회개하지 않는 동성애 행위는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항상 100% 구속할 수 없는 죄”라고 말했다.
그는 “여전히 일부 사람들은 동성애(실상은 모든 형태의 성적인 음란)를 인정할 뿐 아니라, 죄를 모든 교리의 핵심으로 하는 ‘경전’이 있다는 것을 안다. ‘죄를 짓고 싶은 만큼 지어라’, 이것이 그 경전 교리의 핵심이자 ‘황금률’”이라고 했다. 바버는 “환상적인 신간 ‘동성애 의식 -성적인 면에서 아버지의 마음과 그리스도의 마음의 발견’을 펴낸 랜든 쇼트 장관은, 동성애를 긍정하는 ‘경전’을 만드는 데 헌신했다”고 비꼬기도 했다.
랜든 쇼트는 그의 책에서 “31,102구절의 성경 그 어디에서도 동성애를 지지한다는 구절이 없었다. 단 한 구절도. 동성애를 지지하는 성경 구절을 찾고 있다면, 성경(Holy Bible)을 덮고 이 사탄 경전(The Satanic Bible)을 펴라”고 했다.
바버는 “그렇다. 사탄 경전이다. 사탄 경전은 ‘동성애를 긍정’하며, 성경을 의도적으로 오역한 모조품이며, 이단적인 책”이라고 말했다. 바버는 “악마주의? 이는 보다 ‘가치중립적’이며 오늘날 대부분의 공립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주입되는 ‘성교육에 대한 이해’의 교육 과정과 같이 들린다. 이는 기독교에 반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3-14)
랜든 쇼트는 사탄 경전을 인용한 뒤, “악마 숭배는 여러분의 개인적인 욕망을 적절하게 만족시켜 주는 모든 형태의 성행위를 용납하며, 이는 이성애·동성애·양성애·무성애(asexual)가 될 수도 있다. 여러분이 선택하기 나름이다. 사탄주의는 또한 여러분의 성생활을 강화하는 어떠한 성적 집착(페티쉬)이나 일탈도 허용한다”고 말했다.
그는 “사탄의 존재는 하나님과 그분의 통치 명령을 조롱하고 창조의 질서를 무시한다. 사탄교회는 주기도문을 순서를 뒤집어 거꾸로 말하고, 하나님께 도전하는 그들만의 예배를 시작한다. 하나님께서 사랑을 말씀하실 때 사탄교회는 미움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이성 간 관계를 말씀하시면, 사탄교회는 동성 간 관계를 말한다. 하나님께서 한 남성과 한 여성 간 결혼을 말씀하시면 사탄교회는 일부다처 혹은 성적으로 개방된 관계를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10계명을 주셨는데, 사탄교회는 그들만의 버전으로 9개의 신조를 만들었다. 다음은 그 9개의 신조다.
1. 사탄은 절제 대신 탐닉을 주장한다.
2. 사탄은 영적인 꿈 대신 현실에 초점을 맞추라고 주장한다.
3. 사탄은 위선적인 기만을 순결한 지혜라고 주장한다.
4. 사탄은 사랑을 낭비하지 말고 받을 만한 자에게 친절히 주라고 주장한다.
5. 사탄은 (뺨을 때린 이에게) 다른 쪽 뺨을 대는 대신 복수하라고 주장한다.
6. 사탄은 사람이 단순히 또 다른 동물일 뿐이며, 때로는 모든 동물들보다 낫기도 나쁘기도 하지만, ‘거룩한 영성’과 ‘지능의 발달’로 가장 사악한 동물이라고 말한다.
7. 사탄은 소위 죄라 불리는 모든 것들이 육체적·정신적·감정적 만족을 이끈다고 주장한다.
8. 사탄은 1년 내내 자신의 사업에 집중하되, 교회와는 가장 친하게 지내라고 주장한다.
9. 누구도 방해하지 말고 개방적으로 살되, 누군가 방해한다면 막고, 그럴 수 없다면 그를 파괴하라고 주장한다.
바버는 “사탄 경전의 마지막 구절은, 잠언서 30장 20절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에 관한 이야기를 생각나게 한다. ‘음녀의 자취도 그러하니라 그가 먹고 그의 입을 씻음 같이 말하기를 내가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이것이 간음한 여인의 길이다. 그녀가 입을 씻고 나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다고 반복해서 말한다. 성경이 육체의 성적인 욕망에 저항하라고 가르친다면, 사탄 경전은 독자들에게 그녀는 잘못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단지 자연적·성적 욕망을 따라갈 뿐이라고 가르친다”고 지적했다.
이어 “비록 동성애의 죄는 악마적인 힘을 갖고 있지만, 동성애자들이 반드시 악마의 힘에 씌인 것은 아니라는 것에 동의한다. 단지 그들은 간절히 그리스도의 진리와 사랑, 또한 많은 기도가 필요하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죄는 사탄에게서 왔다. 동성애 행위는 죄다. 그러므로 동성애 행위 역시 사탄에게서 온 것이다. 동성혼은 죄악이며, 동성애 역시 죄악”이라며 “성경이, 또한 사탄 경전이 그렇게 말해 주고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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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기독교인 부부 태워 죽인 주동자, 보석으로 풀려나
▲살해된 기독교인 부부. ⓒ트위터
신성모독죄로 고소된 젊은 파키스탄인 부부가 고문을 당하고 벽돌 가마에서 산 채로 화장된 지 1년 반 만에, 유력한 용의자가 보석으로 풀려났다고 미국 크리스천포스트가 23일(이하 현지시각) 보도했다.
유사프 구자르(Yusaf Gujjar)는 2014년 11월 기독교인 쉐흐자드 마시(Shehzad Masih)와 그의 임신한 아내인 샤마 비비(Shama Bibi)를 심하게 구타하고 산 채로 불태운 혐의로 고발당한 100여 명 가운데 주동자다. 4명의 자녀를 둔 마시 부부는 당시 사건으로 사망했다.
파키스탄 기독교 비영리단체인 복음주의법률지원및개발(Legal Evangelical Assistance and Development)은 “펀자브 지방의 칸수르 지부에서 보석을 위한 청문회가 끝난 후, 희생자 가족들은 눈물을 흘렸다”고 전했다. 다음 청문회는 4월 28일로 예정됐다.
UCA 뉴스에 따르면, 사건을 다룬 경찰 역시 법정에서 “이 사람(구자르)이 아니었다면 이번 사건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건을 면밀하게 조사해 온 기독교인 변호사 무스타크 길(Mustaq Gill)은 “경찰의 소극적인 태도는 공모로 의심되며, 공정함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앞서 희생자 가족들은 경찰의 보호 아래 있는 구자르 등의 가족이나 친구에게서 간헐적으로 협박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마시 부부는 꾸란 조각을 쓰레기통에 버렸다는 혐의로 살해를 당했다. 경찰은 그가 폭동을 일으킨 4명 가운데 있었다고 했다. 목격자들은 “사람들이 그의 집 문을 부수고, 그들을 끌고 나와 심하게 때린 후 산 채로 태웠다”고 진술했다.
국제기독연대 토드 다니엘스(Todd Daniels) 지역 대표는 성명을 통해 “이 끔찍한 살인은 파키스탄 기독교인들이 일상적으로 직면하고 있는 종교적 열광주의가 지닌 극도의 위험성을 다시 한 번 보여 주고 있다”면서 “신성모독으로 인한 고소는 어떤 논쟁에나 사용될 수 있으며, 때로는 이번과 같이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대중이 이 젊은 부부를 잔인한게 살해했다”고 지적했다.
파키스탄의 기독교인들과 다른 소수종교인들은 ‘종교적 사형’에 해당되는 신성모독 혐의에 지속적으로 노출돼 있다.
파키스탄 형법의 298개 조항 중 295개에 악명 높은 신성모독법이 들어 있으며, 그에 대한 처벌은 벌금부터 사형에까지 이른다. 신성모독법은 때로 기독교인이나 시아파 무슬림, 힌두교인, 아흐마디야족 등 종교적 소수인들을 표적으로 남용된다. 신성모독에 대해 잘못된 고를 하거나 잘못된 증거를 제시하는 것을 처벌하는 조항은 없다.
파키스탄 기독교인은 전체 1,700만명 인구 중 약 1.6%에 해당하며 97%는 수니파 무슬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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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가? ―
김종길(구약학)
I. 서언
전통적인 그리스도교는 헬라 철학 및 이방 종교의 영향으로 실체론(substantialism)과 이원론(dualism)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소위 정통신학의 인간론은 인간의 전적 타락에 기초하고, 구원론은 대속 은총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신의 주권과 예정을 지나치게 강요하는 신학에서 인간의 양심과 책임이 위축됩니다.
축자영감설 및 성경 무오설을 내세우는 성경의 문자주의는 성서의 진리를 왜곡하고, 하느님의 폭력성을 정당화합니다. 성서의 오용과 잘못된 철학에 근거한 교리로 교회는 소유와 권력을 강화하여 왔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기독교 근본주의와 물량적 성장이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건전한 교회를 세우는 데에 올바른 성서 읽기가 요구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성서를 읽는 행위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성서를 어떤 눈으로 읽어야 하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성서에 접근하는 방법에 따라서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기 때문이지요.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은 인습적인 신학/신앙의 폐쇄성을 지양하고 열린 마음으로 성서 읽기를 권합니다. 성서해석학 내지 성서독법으로 분류되는 그의 저서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가(How to Read the Bible and Still Be a Christian)」는 창세기에서 계시록에 걸쳐서 나타나는 하느님의 폭력을 새로운 관점에서 재조명합니다.
크로산의 책을 읽으면서 독서를 위한 질문을 제기하는 것도 좋습니다. 좋은 물음은 깊이 있는 읽기로 이끌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질문은 나중에 토론을 위한 논제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 고대 근동 제국들은 성서 저자들의 하느님 이해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 하느님의 폭력적인 심판과 보복을 믿으면서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가?
- 가나안 정착 과정에서 정복 전쟁 및 ‘헤렘’(진멸)은 정당한가?
- 성서 자체는 왜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를 계속 부정하며 또 전복시키는가?
- 성서의 하느님은 문명의 정상성을 보다 선호하는가?
- 성서가 가르치는 진짜 원죄는 무엇이며, 교회는 원죄를 어떻게 오해했는가?
- 복음서의 비폭력적 예수와 계시록의 폭력적 예수 중에 누가 참 메시아인가?
- 바울은 예수의 하느님 나라를 어떻게 계승했으며, 어떻게 로마제국을 변화시켰는가?
- 위기에 봉착한 인류가 성서에서 배워야 하는 지혜는 무엇인가?
- 성서에서 폭력적인 본문을 무조건 임의대로 배제할 것인가?
II. 크로산의 성서 독법
1. 문제제기 및 연구방법
성서의 난제
크로산은 성서 안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지적합니다. 하느님의 이중성, 곧 분배적(distributive) 정의를 시행하는 비폭력적인 하느님과 보응적(retributive) 정의를 시행하는 폭력적 하느님의 모습이 성서에서 함께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성서에 표면적으로 나타난 내용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성서의 결말이 야만적인 하느님에 대한 찬양인가요? 성서의 결론은 계시록의 재림 예수가 군마를 타고 심판하는 대량학살인가요? 스퐁(John Shelby Spong)이 「성경과 폭력(The Sins of Scripture)」에서 지적하듯이, 성서에는 폭력적이고 불합리하며 몰상식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폭력성을 극복하는 것이 신학의 일차적인 과제입니다.
위에서 지적한 난제를 포함하고 있는 성서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크로산은 열린 마음으로 그리고 비판적으로 성경을 읽기를 권합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을 담고 있다.” 다시 말하면, 다량의 금을 함유한 금광석처럼, 성서에는 참 계시와 거짓 계시가 섞여 있습니다. 따라서 독자는 옥석을 가려서, 성서 안에 있는 참 계시는 수용하되, 거짓 계시를 거부해야 합니다. 성서에 내재한 난제를 푸는 해결책으로 저자는 세 가지 과정과 두 가지 열쇠말을 제안합니다.
성서에 접근하는 방법
크로산은 성서해석 과정에 모체, 은유 그리고 의미를 제시합니다. 첫째로, 모체(matrix)란 텍스트가 근거하고 있는 컨텍스트를 말한다. 성서에 있는 이야기들은 히브리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따라서 독자는 본문에 나타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상황 등의 역사적 배경(background) 및 성서를 기록한 정황, 곧 본문이 형성되고 활용된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둘째로, 성서 탐구는 세 단계의 발굴로 진행됩니다. 저자는 각 단계에서 급행열차, 심장박동 및 성화의 초점이라는 은유(metaphor)를 사용합니다.
① ‘성서의 급행열차’는 독자를 궁지에 빠뜨리는 성서의 양면성을 말합니다. 열차가 복선 철로 위를 달리듯이, 성서에는 하느님의 양극성(폭력과 비폭력)이 함께 나타납니다. 복음서에서 나귀를 탄 평화로운 예수가 나오고, 계시록에는 군마를 탄 심판자 예수가 등장합니다.
② ‘성서의 심장박동’이라는 은유는, 성서가 하느님의 급진성과 문명의 정상성이 변증법적 긴장을 이루며 투쟁하는 원형경기장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비폭력적 분배 정의라는 급진성이 주장된 후에 문명이 정상으로 간주하는 폭력적인 보복적 정의에 의해 전복된다.”다시 말하면, 성서 안에서 긍정과 부정, 주장과 전복의 율동이 교대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발생합니다.
③ ‘성서의 성화 초점’이라는 은유를 통하여, 저자는 성서의 내용을 시각화하고, 성서의 중심에 초점을 맞추도록 권합니다. 성서를 통전적으로 보기를 제안하는 크로산은 성서의 결말보다 성서의 중심을 중시하고, 성서의 중심은 역사적 예수임을 역설합니다. “그리스도교 성경의 규범과 기준은 성경의 그리스도이지만, 성경의 그리스도의 규범과 기준은 역사적 예수이다.”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가 성서에 우선합니다. 역사적 예수에게 계시된 비폭력적인 하느님이 참 하느님인 것입니다.
셋째로,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찾아낸 성서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느님을 올바르게 알고 섬기는 것입니다. 성서의 전통은 분배 정의와 비폭력을 가르칩니다. 성서의 하느님은 정의와 자비의 하느님입니다. 정의는 자비의 몸이며, 자비는 정의의 얼입니다. 양자는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인의 존재 의미는 정의와 자비를 실천하여 이 땅에 하느님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성서를 푸는 열쇠말
히브리 성서는 오랜 기간에 걸쳐서, 고대 근동 지역에서 유래한 이야기를 차용하고 각색하는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발생한 수메르 문명 및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가져온 재료들을 토착화하여 고유한 사상을 형성하였습니다. 원역사(창 1-11장)에 실린 이야기들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궁극적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에덴동산 이야기에서 인간의 타락과 원죄 대신에 인간의 양심과 책임을 강조합니다.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가 시사하는 바는 인간은 불멸적 존재가 아니며 선악을 아는 도덕적 존재라는 것이지요. 저자는 창세기 4장에 있는 카인과 아벨의 설화에서 인간의 원죄를 해설합니다. 죄란 문명 속의 결함이며 문화 속의 단점입니다. 죄는 공동체와 폭력에 관한 것이지요. 성서가 말하는 죄는 확대되는 폭력을 가리킵니다.
확대되는 폭력은 불가피한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인과응보, 곧 인간의 행동이 초래한 귀결입니다. 크로산은 원역사의 설화를 재해석하여 찾아낸 양심(conscience)과 폭력(violence)을 성서를 풀어나가는 열쇠말로 설정합니다. 따라서 독자가 성서에서 주목할 주제어는 세상의 폭력과 인간의 책임입니다.
성서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하여 먼저 성서에 나타난 왜곡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구약성서에 나타난 왜곡
(1) 히브리 성서와 언약
야웨 신앙은 율법 전통, 예언 전통, 지혜 전통, 묵시 전통 등 다양한 지류가 모여 하나의 강을 이룬 것입니다. 크로산은 위에서 제시한 방법론을 통하여 다양한 전통으로 구성된 히브리 성서를 언약(covenant)이라는 범주에서 분석합니다.
언약은 종교-정치적이고 종교-사회적이며 종교-경제적인 결단입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은 고대 근동에서 통용된 종주국과 봉신국 사이에 체결된 조약(treaty)으로부터 유래하였습니다. 히타이트의 종주권 조약은 다음과 같이 6개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① 전문(preamble): 주권자의 이름과 족보를 소개하며, 위엄과 권능을 묘사합니다.
② 역사적 서언(historical introduction): 과거에 종주국이 종속국에게 베풀었던 은혜를 상기시키어, 종속국의 절대 충성을 유도합니다.
③조약규정(stipulations): 종주국이 종속국에게 부과하는 구체적인 의무 사항들을 진술합니다.
④ 문서의 공탁과 낭독(storage and periodical reading): 신전에 조약문서를 보관하고 주기적으로 낭독하도록 합니다.
⑤ 증인이 되는 신들의 명단(list of gods as witness): 조약의 증인으로서 신들의 이름을 나열합니다.
⑥ 저주와 축복(curse and blessing): 종교적인 차원에서 조약 규정의 이행을 강요합니다. 히브리 성서는 조약의 틀을 변용하여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설명했습니다.
크로산에 따르면, 조약 구조 가운데 무엇을 강조하느냐에 따라서, 히브리 성서에서 ‘언약상의 분열’이 나타납니다. 성서를 구성하는 다양한 전통들이 법(조약규정)을 기준으로 역사(역사적 서언)와 상벌규정(저주와 축복)으로 양분됩니다. 법은 현재의 충성을 강조하고, 역사는 과거의 은혜에 감사하게 하며, 상벌규정은 미래의 처벌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킵니다. 제사 문서 전통과 지혜 전통은 역사 쪽에 자리하고, 신명기 전통, 예언자 전통, 시편 전통, 그리고 묵시 전통은 상벌규정 쪽에 위치합니다. 하느님의 분배적 정의와 인간의 책임으로 이루어진 언약은 세속적인 가치와 타협하고 변질되어갔습니다.
(2) 언약의 변화
창세기 1장과 9장에 나타난 제사문서 전승에는 창조와 재창조에 관한 상벌규정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자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었고, 사람이 만물을 다스리게 하였습니다(창 1:26-28). 홍수 심판 이후에 하느님은 인간과 언약을 세우면서, 강제와 처벌을 언급하지 않습니다(창 9:8-17). 그런데 아시리아의 제국신학이 이스라엘의 언약신학 속에 스며들었습니다. 신명기 전승에서는 상벌규정이 강화되어, 저주가 강복보다 많습니다. 예를 들면, 신명기 28장 1-14절에서 복을 다루고, 27장 15-26절과 28장 15-68절에서 저주를 선포합니다.
신명기의 인과응보적인 신학은 예언자 전통으로 이어집니다.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언약상 최상의 법을 최악의 상벌규정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내가 나의 대적들에게 나의 분노를 쏟겠다. 내가 나의 원수들에게 보복하여 한을 풀겠다”(사 1:24). “오늘 내가 뭇 민족과 나라들 위에 너를 세우고, 네가 그것들을 뽑으며 허물며, 멸망시키며 파괴하며, 세우며 심게 하였다”(렘 1:10). “주님은 질투하시며 원수를 갚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주님은 원수를 갚으시고 진노하시되, 당신을 거스르는 자에게 원수를 갚으시며, 당신을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하신다”(나 1:2).
용서와 자비를 간청하는 시편 전통은 야웨 하느님의 진노와 처벌을 반영합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송하여라. 주님이 베푸신 모든 은혜를 잊지 말아라. 주님은 너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 모든 병을 고쳐 주시는 분,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해 주시는 분, 사랑과 자비로 단장하여 주시는 분(시 103:2-4).” 시인은 원수를 두고 날선 저주의 기도를 올리기도 합니다. “그가 살 날을 짧게 하시고, 그가 하던 일도 다른 사람이 하게 하십시오. 그 자식들은 아버지 없는 자식이 되게 하고, 그 아내는 과부가 되게 하십시오”(시 109:8-9).
지혜 전통이 역사를 회고하는 반면에, 종말론(묵시) 전통은 미래를 소망합니다. 두 전통 역시 변질됩니다. 지혜 전통에서 분배 정의에 대한 급진적 주장은 분배적 자선에 의해 약화되었습니다. 잠언도 정의와 공평을 훈계합니다. “주님께서는 정의와 공평을 지키며 사는 것을 제사를 드리는 일보다 더 반기신다(잠 21:3).” 기득권자의 입장에 있는 그는 사회의 급진적인 변혁보다 회복적 자선을 말합니다. “옛날에 세워 놓은 밭 경계표를 옮기지 말며, 고아들의 밭을 침범하지 말아라(잠 32:10).”
묵시 전통에서 불순종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으로 인하여 정의와 평화의 나라를 향한 열망이 축소됩니다. “그러나 심판이 내려서, 그는 권세를 빼앗기고, 멸망하여 없어질 것이다.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열국의 위력이 가장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다. 권세를 가진 모든 통치자가 그를 섬기며 복종할 것이다(단 7:26-27).”이러한 메시지는 ‘정의를 통한 평화’와 ‘승리를 통한 평화’가 타협한 것이지요.
이제 신약성서로 넘어가서 예수와 바울이 어떻게 변모되어 갔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3. 신약성서에 나타난 왜곡
(1) 예수의 경우
하느님나라가 임박함을 예언하는 묵시종말론자인 세례 요한은 하느님의 기적적인 개입을 기대하고, 인간의 준비와 회개를 강조했습니다. 예수는 세례 요한의 프로그램을 개조하여 하느님나라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의 하느님나라는 서로 어떻게 다를까요? 세례 요한은 미래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금식하고, 예수는 현재를 축하하는 마음으로 잔치를 벌렸습니다(막 2:18-20).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눅 17:21)고 선언했습니다. 임박한 하느님나라가 현존하는 하느님나라로 바뀐 것은 하느님의 일방적인 개입으로부터 하느님과 인간의 협력으로 바뀐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없이 일하지 않으며, 우리는 하느님 없이 일할 수 없습니다. 예수가 가르친 구원의 길은 초자연적 기적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이 협력하는 구원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신-인 협동으로 이루어집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하느님나라를 떠안거나 그 안으로 들어갈 때만 하느님의 나라는 도래한다.”
그 나라는 쌍방적이며, 참여하고 협력하는 나라이며, 언약적 프로그램이다. 세례 요한과 같이 예수도 비폭력적이었습니다. 악에 대해 비폭력적으로 저항하는 것이 하느님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마 5: 44-45).”
그런데 역사적 예수의 하느님나라 운동은 로마제국 문명의 영향으로 폭력성을 띄게 되었습니다. Q복음에서 세례 요한과 아울러 예수는 폭력적으로 변모되었습니다. 유대인 및 이방인과 논쟁하는 과정에서 복음서 기자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예수의 입에 담아서 상대방을 반격한 것이지요. 율법학자와 바리새인에게 저주를 선포하는 마태복음 23장에서 보듯이, 비폭력적인 역사적 예수는 복음서에서 언어폭력을 쓰는 그리스도로 바뀝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물리적 폭력을 휘두르는 그리스도로 등장합니다. “그들이 어린양에게 싸움을 걸 터인데, 어린양이 그들을 이길 것이다”(계 17:14). “그의 입에서 날카로운 칼이 나오는데, 그는 그것으로 모든 민족을 치실 것입니다. 그는 친히 쇠지팡이를 가지고 모든 민족을 다스리실 것이요, 전능하신 하나님의 맹렬하신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으실 것입니다”(계 19:15). 힘없이 도살당한 어린양이 무자비하게 도살하는 어린양이 되었습니다.
(2) 바울의 경우
바울 사상의 불일치와 보수화 경향에 관하여, 혹자는 후대에 등장한 소위 ‘바울 학파’의 탓으로 돌립니다. 혹자는 바울이 애초에 역사적 예수를 묵시적 메시아로 오인하고, 생명문화 공동체를 재림대망 집단으로 변질시켰다고 봅니다. (문동환, 「예수냐 바울이냐」참조) 이러한 의견에 대하여 크로산은 바울을 로마 제국과 대결한 진보적 사도로 평가합니다. 그는 복음서들과 바울의 서신들을 치밀하게 해부하여, 바울이 어떻게 유대인들의 율법주의에 도전하고 로마제국을 변화시켰는지를 보여줍니다.
다른 한편, 제국의 폭력성이 어떻게 하느님 이해에 영향을 미치고, 어떻게 바울을 왜곡하였는지를 밝힙니다. 저자는 바울이 기록한 것으로 알려진 13편의 서신을
① 급진적 바울(데살로니가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고린도전후서, 로마서), ② 보수적 바울(데살로니가후서, 골로새서, 에베소서),
③ 반동적 바울(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등 세 부류로 구분합니다. 첫째 집단만이 원래 바울의 기록이며, 나머지 두 집단은 바울 사후에 기록된 것이다. 전자와 후자 사이에는 내용상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저자는 급진적 바울이 문명의 정상성에 의해 보수적인 바울을 거쳐서 반동적인 바울로 변해갔다고 진단합니다.
예수와 마찬가지로 바울은 로마 제국과 유대교에 도전하고 이 땅에 하느님나라를 이루고자 했습니다. 급진적 바울은 가부장제, 노예제도, 위계질서, 폭력적 승리 등 로마제국의 가치에 반대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7-29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그리스인, 종과 자유인, 남자와 여자가 모두 평등하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를 통하여 그는 노예제도에 대한 전향적인 태도를 보여주었습니다(몬 1:8-20).
그런데 사후에 기록된 서신들에 의해 바울의 원래 메시지가 변질되었습니다. 보수적 바울은 남성과 여성의 차별을 수용하고(골 3:18-19; 엡 5:22-33), 노예들이 그들의 주인들에게 순종하도록 권면하였습니다(골 3:22-23; 엡 6:5-8). 더 나아가 반동적 바울은 여자는 교회 안에서 잠잠하고(고전 14:34), 여자가 남자를 지배하거나 가르칠 수 없다고 단언하였습니다(딤전 2:11-14). 그리하여 바울의 급진적인 주장은 위조된 바울에 의해 전복되어 탈급진화되고 재로마화되었습니다.
III. 논평
크로산의 공헌
성서 읽기에 ‘샤아르(רעשׁ, 관조하다)’와 ‘라함(םחר, 동정하다)’이 요구됩니다. 통찰의 눈과 긍휼의 마음이 없이 성서를 읽으면, 도리어 성서의 진리를 왜곡하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게 됩니다. 성서에 있는 거짓 계시를 맹목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이나 테러를 자행하는 이슬람 국가에서 보듯이, 성서의 내용을 확신하는 사람일수록 하느님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크로산은 성서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참된 계시와 거짓 계시를 구분하고, 인류 문명이 정의와 평화의 하느님을 보복과 폭력의 하느님으로 왜곡시킨 역사적 과정을 규명합니다. 이 책은 성서 읽기에 다음과 같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① 성서에서 하느님의 선한 계획과 의지를 동일한 하느님의 이름으로 부정하고 있다. 성서에 참된 계시와 거짓 계시가 공존한다. 거짓 계시는 인간의 문명에 깃든 폭력과 보복의 산물이다.
② 성서의 규범과 기준은 비폭력적으로 불의한 세력에 저항하며 하느님 나라 운동을 전개한 역사적 예수이다. 폭력을 정당화하는 신화적, 묵시적 그리스도는 그리스도교의 근거가 될 수 없다.
③ 성서에 나타난 야웨는 정의와 자비의 하느님이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예수가 보여준 하느님의 성품에 근거해야 한다.
크로산은 탈육신의 종교에서 성육신의 길로 나아가기를 제시합니다. 성육신이란 예수를 신격화하고 숭배하는 탈육신의 신앙에서 벗어나 ‘예수 살기,’ 곧 하느님의 현존인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을 믿고 예수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려면 이제 주체적인 성서 읽기가 요구됩니다. 세상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폭력과 위기는 하느님의 처벌이 아니라 인간의 책임입니다. 그러므로 불의와 폭력이 만연한 세상에서, 우리가 양심을 따라서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성서를 읽는 목적입니다.
사영리 신학과 삼박자 축복을 복음으로 선포하고 ‘육체 부활’과 ‘사후 천국’을 신앙의 척도로 삼으며 국가권력과 자본권력에 동조하는 한국 교회에게, 이 책은 이제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임을 깨우칩니다.
크로산의 성서 독법에서 성서를 통찰하는 ‘샤아르’와 민중의 고난에 공감하는 ‘라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성서 해석과 작은 교회 운동의 관계를 고려하면, 이 책은 물량적 교회 성장을 지양하고 질적 성숙을 추구하는 ‘한국적 교회 세미나’의 기대와 부합된다고 봅니다.
비판
저자의 탁월한 고견에 수긍하면서도, 왠지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성서에서 폭력적인 본문을 무조건 임의대로 배제해야 할까요? 사람이 부정적인 감정을 억압하고 배제하기보다 슬픔과 분노의 감정을 솔직하게 토로할 때, 상처 입은 내면에서 정화와 승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막강한 힘을 가진 상대방에게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시편 109편이나 137편처럼 복수를 구하는 기도를 해서는 안 되는가요? 셀류쿠스 왕조 안티오쿠스의 박해에 대항하여, 유대 공동체에서 한편으로 마카비 혁명이 발생했고, 다른 한편으로 다니엘서와 같은 묵시문학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평화적인 묵시 운동은 옳고, 무력을 쓰는 혁명은 그른가요? 일제 강점기에 홍범도의 무력 항쟁은 이승만의 외교 전략보다 열등한가요?
바울은 복음, 정의, 평화 등 황제와 관련된 용어들을 차용하여 그리스도교의 신학을 정립함으로써 에둘러서 로마 제국에 저항하였습니다. 그는 교회로 하여금 폭력적인 방식으로 맞서지 말고, 지배하는 권위에 복종하도록 가르쳤습니다. 바울의 비폭력적인 저항은 신생 교회를 보호하기 위한 생존의 선교전략입니다.
로마 제국에 대항할 만한 힘이 교회에 있었다면, 바울이 동일한 방식으로 선교하였을까요?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폭력적인 내용을 무시하고 배제할 것인가요? 묵시문학은 피압박 계급/민족의 생존 전략입니다. 복수와 심판은 묵시문학의 요소입니다. 탄식과 부르짖음은 인생 막장으로 내몰린 민중의 ‘저항언어’입니다. 따라서 독자는 성서에서 귓속의 귀로 목소리 속의 목소리를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묵시문학에서 폭력을 묘사하는 장면을 읽을 때, 고난받는 민중의 한숨과 눈물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요?
끝으로, 크로산은 인습적인 교회의 원죄 교리에 이의를 제기하고, 원죄를 문명의 폭력으로 대체합니다. 그리고 폭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의 양심과 책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