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소수자 부모 모임 매월 한 차례씩 / 한기총· 더민주 표창원 사퇴 촉구 2016-04-07 21:47:47 read : 4128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성 소수자 부모로 살아간다는 것
"힘든 청소년기 견딘 아이들에 고마워"…성 소수자 가족 불행하게 하는 주범은 한국교회
이은혜 기자
▲ 서울 마포구에서 성 소수자 자녀를 둔 어머니 세 명을 만났다. 엄마들은 모임에서 쓰는 활동명이 따로 있다. 라라 씨(맨 오른쪽)는 트랜스젠더 딸을 둔 엄마다. 지인 씨(맨 왼쪽)과 하늘 씨는 아들이 동성애자다. 이들은 울고 웃으며 성 소수자 부모로서 살아가며 느낀 점들을 나눴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어느 날 내 아들이 사실 남자를 좋아한다는 고백을 한다고 가정해 보자. 자녀의 고백에 "그래? 엄마는 괜찮아"라고 주저하지 않고 대답할 수 있는 부모가 몇 명이나 있을까. 종교를 가지고 있든 무신론자든 자녀가 동성애자라 할 때 "그래 난 너를 지지해"라고 단번에 얘기할 수 있는 부모는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한국 사회에서 성 소수자에 대한 인식은 아직 서구에 비하면 걸음마 수준이다. 유럽 일부 국가와 미국은 동성 결혼까지 인정하고 있고 혐오 및 차별 발언을 처벌하는 법도 있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성 소수자를 차별하면 처벌받는 '차별금지법' 제정은 먼 나라 이야기인 것 같다. 개신교에서 이 차별금지법을 적극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성 소수자는 우리 곁에 존재한다. 성 소수자 자녀를 인정하고 그들을 지지하는 부모도 있다. '성 소수자 부모 모임'은 동성애자·양성애자·트랜스젠더 자녀를 둔 부모와 가족의 모임이다. 2014년 시작된 이후 매월 한 번씩 꾸준히 모임을 이어 오고 있다. 성 소수자 자녀를 둔 부모와 그 가족들, 성 소수자 당사자가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다.
<뉴스앤조이> 기자는 이 모임에 참석하고 있는 어머니 세 명을 만났다. 세 명 모두 모임에서 활동하는 이름이 따로 있다. 라라 씨는 남성으로 태어났지만 여성이 되는 과정에 있는 트랜스젠더 딸의 어머니다. 하늘 씨와 지인 씨는 모두 게이 아들을 둔 어머니다. 라라 씨는 기독교인, 하늘 씨는 가톨릭교인, 지인 씨는 무교다.
성 소수자 자녀를 둔 기독교인 어머니의 생각을 듣고 싶었는데, 인터뷰하다 보니 이야기가 길어졌다. 어머니들은 그동안 쌓인 말이 많은 듯했다. 1시간 반 정도로 예상했던 인터뷰 시간은 세 시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자녀들이 커밍아웃했을 때 어머니로서 느낀 감정, 죄책감, 극복하기까지 과정을 들었다. 성 소수자의 엄마로서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도 들었다.
내 아들이 성 소수자라니…
자녀가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안 엄마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엄마도 있다. 라라 씨 경우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여성스럽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도가 지나친 것 같아 정신과 상담을 받았는데, 의사는 세상에 다양한 사람이 존재한다며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투로 이야기했다. 하늘 씨는 아들이 먼저 고백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먼저 알게 된 경우였다.
라라 / 우리 애는 어렸을 때부터 여성스러웠다. 초등학교 때도 주로 여자아이들과 놀고 여성스럽다고 놀림당하고 그랬다. 중학교 1학년이 되면서 머리 깎고 교복 입는 것을 싫어했다. 애는 울면서 학교 못 다니겠다고, 홈스쿨링하고 싶다고 앞으로 공부 계획표를 만들어 왔다. 그때 선생님에게 학교에서 하루 종일 엎드려서 잠만 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후로 중학교,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봤다. 머리 기르고 화장하고 여성스럽게 다녔는데 미련하게 성 정체성 문제는 전혀 생각하지 못 했다. 16살부터 미용 일을 배워 꾸준하게 그 일을 했다. 잘 지내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자살 시도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애는 생과 사를 오가는데 내가 아이의 성 정체성을 거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받아들이기가 더 수월했던 것 같다.
하늘 / 8년 전 아들이 게이라는 걸 알았을 때 머릿속이 그냥 말 그대로 하얘졌다. 아들이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이 전해 줘서 알게 됐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우선 미국에 살고 있는 동생한테 전화를 했다. 동생은 미국에서 중학교 선생님이다. 내가 너무 당황스러워 하니까 동생이 "언니, 한쪽 끝에는 동성애가 한쪽 끝에는 이성애가 있다. 그 사이에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는데 이성애에는 사람이 많고 동성애에는 사람이 적을 뿐이야. 잘못된 게 아니고 다만 숫자가 적을 뿐"이라고 얘기해 주더라.
그 얘기를 듣고 난 후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아들한테 얘기했다. "너 고민 있지, 엄마는 너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다 받아 줄 수 있으니까 엄마한테 얘기해"라고. 그렇게 하루, 이틀 지나는데도 말을 안 하더라. 계속 기다리다가는 속이 터질 것 같아 그냥 내가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엄마는 지구가 뒤집어져도 네 편이야. 네가 누구든 아무 문제없다"는 내용이었다.
그때 아들이 심한 우울증에 학교도 안 가고 자기 방에서 꿈쩍하지 않고 밖으로 나오지도 않을 떄였다. 밥도 안 먹고 정말 폐인처럼 그렇게 있었다. 그 편지를 주니까 정말 한참을 읽고 또 읽고 하더니 일어나서 밥을 달라고 하더라. 그렇게 털고 일어나서 무사히 대학까지 마쳤다.
▲ 2010년 미국 워싱턴 D.C 퀴어 퍼레이드에 참여한 부모. '게이 아들의 자랑스러운 부모'라는 피켓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하나님 왜 하필 나예요?
내 아들이 남들과 다른 성 소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엄마들은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꾸준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던 사람도 "하나님 왜요?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 거예요?"라는 물음이 절로 나왔다고 했다.
라라 / 우리 애는 2013년에 처음 자살 시도를 했는데 한 번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아이가 성 소수자인 것이 힘들어서라기보다 자신이 되고 싶은 모습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존감이 계속 낮아져서 그런 것 같다. 반복적으로 자해하고 심해지면 자살 시도로 갔다.
우리 아이는 외모에 정말 관심이 많다. 처음에는 남성을 좋아해서 동성애자인 줄 알았는데 외모에 관심이 많고 꾸미고 하는 걸 보니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지금 한창 연애에 관심이 많은 나이인데 아직 감정적으로 힘든 것을 못 받아들인다. 좋아하던 사람과 어렵게 사귀었는데 헤어지면 전 세계를 다 잃은 것처럼 힘들어한다.
트랜지션(성 전환)하려고 정신과 상담을 받고 있었는데 약 받아 온 것을 그때그때 먹지 않고 한번에 다 먹었다. 하루에 세 알씩 먹는 약이었는데 뜯어 놓은 봉지가 180개 정도 됐다. 애가 이틀 동안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기다리는 시간이 얼마나 지옥 같은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이런 일 처음 겪었을 때는 하나님한테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40년을 교회 다녔다. 남편도 나도 정말 열심히 교회 생활을 했다. 교회 식당 일도 마다하지 않았고 교회학교 선생님, 성가대원으로 섬겼다. 새벽 기도, 철야 예배, 아파트 전도단 등 열심히 봉사했다. 시댁 식구들도 다 교회 다니고 가족 중에 신학교 나온 사람도 있을 정도로 독실한 가족이다.
교회를 위해, 하나님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마음을 쏟아 봉사했는데 내 아이가 이렇다고 하니 죽을 것 같았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미운 마음도 들었다. 내 마음을 온전히 다 드렸는데 당신이 내게 주는 보상이 이거라면 난 차라리 안 믿고 안 받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럼에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신앙의 힘이었다. 아이 문제를 신앙 안에서 고민하려고 노력했다.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서 '남을 판단하지 말고 정죄하지 말라'고 배웠다. 말씀 중에 좋아하는 구절이 "항상 감사하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다. 아이가 누워 있을 때도, 마음이 힘들 때도 의도적으로 항상 감사한 것을 생각하는 연습을 많이 했다. 어려운 일이 생겨도 절망하는 것보다 희망을 가지려고 했다.
하늘 / 나는 성당을 다니는 가톨릭교인이다. 가톨릭에서도 아직 동성애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아들이 동성애자라는 걸 알게 된 후 2년 동안 방황했다. 매일 미사 보러 가서 성당 뒤에 앉아 "하느님 정말 너무하십니다. 저한테 왜 이러시는 겁니까. 저는 어떻게 살라고 이러세요. 저희 부부 하루하루를 정말 성실하게 살아온 것 하느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라고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이런 기도를 수도 없이 올렸어요. 십자가를 못 쳐다보겠더라고요.
▲ 전환 치료 반대 기자회견에 참석한 지인 씨(왼쪽)와 하늘 씨. 지인 씨는 아들이 성 소수자라는 사실을 안 후 상담소를 찾아 다녔다. 하지만 성 소수자에 대한 지침과 제대로 된 지식을 갖고 상담하는 곳은 없었다. 그는 직접 상담학 공부를 하고 활발하게 성 소수자 모임에 임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쯧쯧, 애를 어떻게 키웠으면…"
엄마들은 아들이 성 소수자라는 소리를 듣고 제일 먼저 '내가 뭘 잘못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성 소수자 자녀를 둔 엄마들은 무지에서 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내가 잘못 키웠기 때문에 애가 동성애자가 '됐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 소수자 부모 모임에 와 보니 동성애자는 키워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입을 모았다.
하늘 / 애한테는 "엄마는 널 지지해"라고 이야기했지만 2년 동안 정말 헛갈렸다. 내 아들이 동성애자인 건 알겠는데 '왜?'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따라다녔다. 잘 모르니까 정신과 의사, 온갖 상담사들한테 가서 물어봤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다 시간 낭비였다. 정신과 의사는 덜한데 상담사는 자기 편견대로 상담한다.
아들의 고백 이후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결혼 생활 시작부터 아들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 순간까지 온갖 기억을 다 끄집어내서 구석구석 돌아봤다. 한마디로 자아 성찰의 시간을 보냈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찾아내려고 코피 터지게 생각했다.
내가 잘못한 거라고 생각나는 게 애가 태권도 가기 싫어했는데 적극적으로 권장하지 않은 거, 피아노 치기 싫다고 하는데 억지로 시키지 않은 거, 학원 보내다가 안 보내도 공부 잘해서 그만두게 한 거 이런 것밖에 생각 안 나더라. 내 몸이 힘들고 귀찮을 때 애들한테 잔소리하고 소리 지른 것도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나를 돌아본 귀한 시간이었다. 하나님 앞에서 반성했고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
라라 / '어렸을 때부터 더 엄하게 가르쳤어야 하는 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가끔 하긴 했다. 자살 시도한 걸 알게 됐을 때도 내가 뭘 잘못해서 그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안 들 수가 없다. 심지어 내가 대학 다닐 때 여성주의에 관심 있는 친구 영향으로 관련 영화도 보고 했는데 그것 때문에 아이가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성 소수자 부모 모임에 오고 나서 아이들이 그렇게 태어났다는 것을 알게 됐다. 여러 부모님을 만나고 성 소수자 당사자들을 만나면서 나에게 잘못이 있다면 그렇게 키운 것이 아니라 성 소수자로 낳은 잘못이라는 걸 인지하게 됐다.
▲ 하늘 씨가 시아버지가 물려 주신 성경 필사본을 꺼냈다. 하늘 씨의 시아버지는 12년 동안 성경을 다섯 번 필사하셨다. 그는 성 소수자는 환경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라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평범한 가정의 평범한 자녀
한국교회는 동성애자를 항문 섹스에 중독된 사람으로만 묘사한다. 유독 남성 동성애자만 부각하는 경향도 있다. 여성을 좋아하는 레즈비언, 아예 자신을 반대 성으로 인식하는 트랜스젠더는 한국교회에서 논외다. 동성애 반대 운동에 앞장서는 사람들은 성 소수자는 환경적인 요인 때문에 동성애자가 '된' 것이라고 말한다. 남성과 여성을 놓고 쾌락을 좇아 남성을 '선택'했다고 주장한다. 엄마들은 이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
하늘 /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오해를 풀고 싶어 이 책을 가져왔다. 여기 들고 온 성경은 우리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쓴 성경 필사본이다. 2000년에 영세(세례) 받으신 후 2013년 돌아가시기까지 성경 필사만 다섯 번을 하셨다. 마지막 2년은 누워 투병하시는 가운데서도 신약 성서만 한 번 더 필사하셨다.
내가 성당에서 돌아가시는 분들 마지막을 많이 지켰다. 시아버님은 그 누구보다 평안하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하늘나라에 가셨다. 그분이 쓰신 필사본은 우리집 가보다. 아들에게도 한 권, 딸에게도 한 권, 성당에도 한 권 기증했다. 신앙적으로 존경하는 시아버지다. 우리 남편은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성실한 남자다. 그의 아들이 내 아들이다.
기독교에서 환경적 요인 어쩌고 하는데 그러면 우리 가정에는 무슨 환경적 요인이 있는 건지 묻고 싶다. 우리는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은 가장 평범한 사람들이다. 늘 변함없이 평범하게 살아왔다. 어디에서 좋은 거 있다고 해도 좇아가지 않았고, 나쁜 일에 막 빠져들지도 않았다. 매일매일 일상에서 남 잘난 거 쫓아가고 싶어 하지 않고, 주어진 것에 감사하면서 살아왔다.
이 필사본을 가져온 것은 우리 가족이 함부로 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들은 현재 오랫동안 함께한 파트너가 있다. 시아버님 살아 계실 때 두 번이나 와서 뵙고 인사드리고 갔다. 그 친구는 아버님 장례식 때도 와서 도와주고 빈소를 지켰다. 뭐가 문제인가. 기독교인들만 난리치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문제없다.
지인 / 기독교는 계속 환경적 요인을 얘기한다. 그래서 동성애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그 가정이 맞으려면 가족 사이에 뭔가 공통점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성 소수자 부모 모임에 와서 보면 부모들 사이에 전혀 공통점이 없다.
강한 엄마도 있고, 약한 엄마도 있다. 엄격한 아버지도 있고 자녀 일에 관심 많은 아버지도 있다. 한 부모 가정도 있고 화목한 가정도 있고, 서로 간섭하지 않는 가정도 있다. 형제 관계도 다 다르다. 3남매 중에 둘째인 경우도 있고, 형제만 둘인 집도 있고, 1남 1녀인 집도 있다. 공통점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태권도 같은 남성적인 운동 시키면 애들이 변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성 소수자 중에 태권도·검도 유단자도 있다. 환경적인 요인이 동성애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 모임에 보니 동성애는 선천적이라는 확신이 더 들었다.
라라 / 얼마 전 애 아빠가 그런 얘기를 하더라. 6살 정도 됐을 때 친척들이랑 다 같이 남자 목욕탕에 갈 일이 있었는데 죽어도 안 들어가겠다고 버텨서 결국 둘은 목욕탕에 못 들어갔다고.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애는 그냥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누가 만들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달랐다.
▲ 2015년 대구 퀴어 퍼레이드에 참여한 성 소수자 부모 모임. 엄마들은 이때 만난 기독교인들 때문에 큰 상처를 받았다고 했다. (사진 제공 성 소수자 부모 모임)
청소년기를 버텨 준 고마운 아이들
우리나라 청소년 10명 중 1명은 청소년기에 자살을 시도한다. 2014년 'LGBT 사회적 욕구 조사'에 따르면 청소년 성 소수자 47%가 청소년기에 자살을 시도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성 소수자 두 명 중 한 명은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는 얘기다. 이런 한국 사회 현실에서 부모들은 청소년기를 벗어나 성인이 된 자녀들이 고맙기만 하다.
라라 / 우리 애가 만나는 성 소수자 친구들 보면 손목에 다 자해 자국이 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은 아마 100이면 100명 다 해 봤을 거다.
지인 / 청소년 성 소수자들이 자살을 생각하는 건 성 소수자라는 정체성 때문이 아니다. 사회의 혐오와 차별 때문이다. 부모에게 커밍아웃했다가 거절당한 아이들의 자살 시도율은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8배가 더 높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거절당했을 때 아이들은 좌절하는 것이다. 우리 애도 학창 시절에 놀림받고, 따돌림당했는데 이렇게 살아남아서 견디고 있는 것이 너무 고맙다.
하늘 / 사춘기 때 아들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몰라서 "엄마는 네 편이야"라는 말을 못 해 준 것이 너무 미안하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야 한다는 것도 미안하다. 혐오받지 않는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만들고 싶어 부모 모임을 시작하게 됐다.
한국교회, 혐오를 가르치지 말아 달라
성 소수자 부모 모임은 2015년 퀴어 퍼레이드 때 행진에 참여했다. 자녀들의 손을 잡고 함께 거리를 누볐다. 그들은 그 현장에서 만난 한국 기독교인들과 그들이 내뱉던 혐오 가득한 발언을 잊지 못한다.
라라 / 작년 퀴어 퍼레이드 갔을 때 반대 집회 참여하기 위해 모인 교인들을 본 후로 신앙에 회의감이 들었다. 할머니·할아버지들이 뭘 반대하는 건지도 모르고 '항문 섹스', '사랑하니까 반대한다' 이런 피켓 들고 서 있는데 기가 막히더라.
기독교는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의 아픈 부분을 만져 주는 종교라고 배웠는데 반대로 공격하고 있다. 동성애라는 것을 이해하든 반대하든 먼저 제대로 알아봐야 할 것 아닌가. 교단이나 목사님 지시에 따라 '이날 모입시다, 모여야 합니다' 이러면 우르르 몰려가서 피켓 드는 것이야말로 선동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잘 생각도 안 하면서 남에게는 아무렇지 않게 폭력을 행사한다. 그 이후 교회에 가도 말씀이 귀에 잘 안 들어왔다.
사실 40년 교회 다니면서 동성애 반대하는 설교를 들어 본 적은 없었다. 우리 목사님은 외부 일에 크게 휘둘리거나 하는 분이 아니었다. 그런데 올해 시댁 교회에 갔더니 주보에 '이단 척결, 동성애 반대 집회' 안내가 써 있었다. 반대 운동이 점점 거세지는 것 같다.
내가 성 소수자 부모인데 나를 불쌍하게 봐 달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내 딸이 트랜스젠더인 것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상관없다. 하지만 알리고 싶다. 우리는 분명히 존재하는 사람들이고, 당신 주변에도 있을 수 있고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는 질문을 던져 보고 싶다.
어떤 대상이나 현상을 놓고 다양한 종교적 시각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동성애를 싫어할 수도 있다. 종교인이 아닌 젊은 사람도 혐오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소수인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보호하는 법이 만들어지는 데 반대하는 것은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하늘 / 신앙을 갖는 것,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결국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아닌가. 자신들의 영혼이 썩어 가는 것은 보지 못하고 남을 향해 혐오만 외치고 있다. 자기들 눈에 들보는 모른 척하고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끄집어내려고 기를 쓰고 있는데, 눈 속에 티는 그들이나 나나 다 가지고 있다. 우리 다 하느님 앞에 죄인 아닌가. 부족하고 불완전한 사람이니까 신앙을 갖는 것 아닌가. 하느님 도우심 없이는 완전하지 못하니까. 그래서 늘 남 이야기 듣고 경청하고, 겸손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건데 개신교인들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지인 / 개신교에서 혐오 발언을 할 때 우리 자녀들이 이런 글 읽고 자괴감에 빠지고 괴로워할 거 생각하면 너무 힘들다. 나도 읽고 기분이 나쁜데 성 소수자들이 그런 글 읽고 어떤 마음이 들지 생각 안 해 보는가. 자신들의 신념이라고 남을 그렇게까지 매도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개신교가 자꾸 성 소수자 향한 혐오 발언을 퍼뜨리는데 청소년이 듣고 배울까 겁난다.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청소년 성 소수자들이 너무 걱정된다. 그 아이들이 받을 상처가 너무 클 것 같다. 우리 애들은 쉬쉬하던 때를 지나왔지만 지금은 다르지 않나.
하늘 / 생명은 죽음이 아니라 사는 것을 지향해야 하는 것 아닌가. 청소년 성 소수자가 날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건 그 청소년을 둘러싼 세상이 제대로 된 곳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지인 / 성 소수자 가족들은 개신교인들만 그렇게 조직적으로 반대하지 않으면 혐오와 편견 없는 세상에서 잘 살 수 있다. 개신교인들은 그렇게 조직적으로 반대하지 않으면 좋다. "동성애는 불효고 너희 때문에 부모가 얼마나 힘들겠냐"는 피켓 들고 시위하는데 그 사람들만 없어지면 우리는 불행하지 않다. 우리가 불행한 것은 성 소수자 자녀를 두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 성 소수자 부모 모임은 매월 한 차례씩 진행하고 있다. 전국에서 각지에서 이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부모들이 온다. 모임은 꼭 성 소수자 자녀를 둔 부모만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임은 성 소수자 당사자에게도 열려 있다. 부모와 자녀들이 만나 서로의 마음을 나눈다. 같은 상황에 있는 부모들끼리도 의지하는 시간이 된다. (사진 제공 성 소수자 부모 모임)
[뉴스앤조이-최유리 기자]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이영훈 대표회장)와 한국교회언론회(유만석 회장)가 더불어민주당 표창원 후보(경기 용인정)에게 사퇴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표창원 후보는 지난 달 16일 한 인터넷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포르노 합법화 찬성한다"는 의견을 밝힌 바 있다.
한기총은 4월 6일 발표한 성명서 '공명정대한 제20대 총선이 되기를 기대한다'에서 "'포르노를 합법화 한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는 사람에게 검증 없이 후보 자격을 부여한 사실에 대해서 경악을 금치 못한다. 후보자 스스로도 국민 앞에서 사죄하고, 사퇴를 통해 몰상식한 발언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져야 할 것이다"고 했다. 성명서에 이름이 거론되지는 않지만, 정황상 표창원 후보에게 사퇴 촉구를 한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동성애를 조장하는 차별금지법안, 할랄 식품 등으로 침투해 오는 이슬람문화 등을 반드시 저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교회언론회(유만석 회장)도 4월 5일 '한국교회와 성직자들을 모독한 더민주당 표창원 후보'라는 제목의 논평을 올렸다. "국회의원 후보로서 포르노 합법화를 당연시하는 것을 보며 한국교회는 심각한 우려를 금할 수가 없다. 인터넷과 SNS에 음란물이 홍수를 이루고, 성범죄가 폭증하고 있는 가운데 포르노 합법화를 찬성한다니 할 말을 잃는다"고 했다.
이들은 포르노 합법화 발언을 포함, 2012년 표창원 후보가 레이디 가가 공연을 반대하는 교계를 비판한 사실도 언급했다. 한국교회언론회는 레이디 가가가 노골적인 성행위 묘사는 물론, 동성애를 타고난 것으로 노래하고, 동성애를 지지하고 확산하기 위해 공연을 적극 활용한다고 비판했다.
이어 "경찰대 교수로서 이 땅에 법과 질서를 지켜 나가야 할 경찰 간부들을 양성하던 공인인데, 아무리 개인 의견이라지만 전 세계에 무서운 확산성을 가지고 있는 인터넷에서 선한 일을 하려는 기독교와 성직자들을 향해 독설을 뿜어 매도할 수 있는가? 공개적으로 사과함으로 상호 간에 불필요한 갈등과 오해를 풀고, 좋은 정치인이 되어 주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다음은 한기총 성명서와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전문.
공명정대한 제20대 총선이 되기를 기대한다
투표는 국민들에게 주어진 중요한 권리이다. 투표를 통해 정치 활동에 참여할 뿐 아니라 개인의 의사를 국가 정책과 방향성에 반영시킬 수 있게 된다.
제20대 국회의원 선거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지금, 후보나 정당 그리고 유권자들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선거를 준비해야 함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공명정대하게 치러져야 할 선거가 과열 양상으로 치달아 서로를 향한 비방과 흑색선전이 되고 있는 것에 안타까움을 표한다.
어느 때보다 이번 선거에는 교계와 관련된 민감한 이슈들이 많이 있다. 특히 기독교 신앙 정체성과 성경의 원리를 무너뜨리며 사회적으로도 용인될 수 없는 동성애 합법화와 동성애를 조장하는 차별금지법안, 할랄식품 등으로 침투해 오는 이슬람문화 등은 반드시 저지시켜야 한다. 각 국회의원이 입법부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만큼, 어떤 국회의원을 선출하느냐 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가 된다.
법치주의 국가에서 이러한 이슈들이 법제화되지 않도록 강력하게 의사를 표현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이다. 그런데 그러한 행위를 반인륜주의의 상징인 나치나 범죄 집단에 비유하고 기독교를 폄하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포르노를 합법화 한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는 사람에게 검증 없이 후보 자격을 부여한 사실에 대해서 경악을 금치 못한다. 후보자 스스로도 국민 앞에 사죄하고, 사퇴를 통해 몰상식적인 발언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져야 할 것이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제20대 국회의원 선거가 후보들과 정당의 정책과 공약, 실현 가능성을 따져서 더 나은 대한민국, 일하는 국회가 될 수 있도록 하는 디딤돌이 되기를 기대한다. 또한 남은 기간 동안 깨끗하며 공명정대한 선거 운동으로 올바른 선거 문화가 정착되기를 바란다.
2016년 4월 6일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이영훈 목사
한국교회와 성직자들을 모독한 더민주당 표창원 후보, 한국교계 앞에 공개 사과해야
4.13 총선을 앞두고 각 정당들과 후보들 간의 선거운동이 맹렬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선거판에서 우리 기독교계를 분노케 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어 유감이다.
이는 지난 2012년 4월 26일 자 모 신문에 게재되었던, '표창원 "레이디 가가 공연 반대, 전체주의적 독재 연상케 해"'라는 기사와 함께 2012년에 표창원 교수가 한국교회와 성직자들에 대해 비판한 모욕적인 블로그와 트위터의 글들이 나돌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엔 알려지지 않았던 이 기사와 글들이 4·13 총선을 앞두고 기독교계에 알려지면서 일파만파를 일으키고 있다.
이는 레이디 가가의 내한 공연이 2012년 4월 27일 오후 8시에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리기에 앞서 한국 교계가 '15세 이상 관람가'로 되어 있는 이 공연을 강력히 반대하여 '19세 이상가'의 성인 관람으로 바뀐 것에 대한 당시 표창원 교수의 한국 교계에 대한 비판 글들이다.
거기다가 지난 3월 23일에 게재된 모 인터넷 신문의 인터뷰 기사에 보면, 표창원 후보는 "포르노 합법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라는 질문에 "어… 단도직입적으로 찬성이구요"라고 대답한다. 어떤 정치인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던 포르노 합법화를 거침없이 지지한다. 동성애 반대 운동을 펼치고 있는 교계로서는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이번 총선을 앞두고 표창원 씨가 더민주당에 영입되어, '용인 정' 선거구에 공천 받아 국회의원 후보가 되면서 이런 글들이 이슈화되는 가운데 한국 교계에도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개인의 표현의 자유를 뭐라 하겠는가. 그러나 표창원 후보가 비판 글을 쓴 2012년 당시는 경찰대 교수라는 공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들에서는 레이디 가가의 15세 이상 관람가의 공연을 반대하는 한국교회와 성직자들에 대한 폄훼와 모욕적인 글귀들이 구구절절이다. 인간의 언어로서 표현할 수 있는 가능한 험악한 말은 다 동원한 것 같다. 차마 표창원 후보의 글을 이 논평에 옮기기가 민망스러워진다.
이렇게까지 표창원 후보가 레이디 가가 공연을 지지하며, 동성애를 옹호하고, 이를 반대하는 한국교회 성직자들을 모독하며 나쁜 선동가로 매도한 그의 글은 그 자신의 인성과 윤리관의 단면의 어떠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레이디 가가는 음악의 예술성 보다는 엽기적이고 선정적인 상업 공연을 통해 세계의 청소년들과 젊은이들에게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며 돈을 벌어 왔다.
피로 물든 고기로 옷을 만들어 입고, 노골적인 성행위 묘사는 물론, 동성애를 타고난 것으로 노래하고, 동성애를 지지하고 확산시키기 위해 공연을 적극 활용하였다. 인기를 끌어 돈만 벌 수 있다면 무슨 짓도 할 수 있다는 천박한 상업주의의 전형이다. 동성애자들 중에는 레이디 가가를 '자신의 신'이라고까지 고백하는 자들도 있다.
또 공연 중에는 기독교를 비하하고 조롱하는가 하면, 관객들을 향해서는 지옥으로 가자고 거침없이 주장하며, 사탄을 위한 제의(祭儀)의 포퍼먼스도 보여 준다. 이는 단순한 음악 공연의 문화를 뛰어넘어 신(神)들린 무당굿판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15세 이상의 우리 청소년들을 마케팅의 주 타겟으로 삼으려는 레이디 가가의 전략으로부터 우리 청소년들을 지키겠다는 것이 어찌 기독교만의 배타적이고 종교적 이기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모방 심리와 성적 호기심이 강한 청소년들에게 성적 방종과 문란을 부추기는 이런 공연을 어른들이 방치하고 구경만 해야 하는가!
건강한 한국 사회의 통념과 윤리를 파괴하고 청소년들의 성적 방종을 부추기는 자들을 엄하게 꾸짖는 건 성직자의 사명이요 사회 지도자로서 너무나 당연한 의무가 아닌가? 종교 차원을 떠나서라도 우리 사회의 건전한 윤리와 도덕성을 지켜 나가고, 청소년들의 인성 교육을 위해서라도 너무 당연한 일을 단지 기독교 성직자들이 반대했다고 해서 험한 말로 모독하고 매도를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더구나 표창원 후보는 2012년 당시에는 경찰대 교수로서 이 땅에 법과 질서를 지켜 나가야 할 경찰 간부들을 양성하던 공인인데, 아무리 개인 의견이라지만, 전 세계에 무서운 확산성을 가지고 있는 인터넷에서 선한 일을 하려는 기독교와 성직자들을 향해 독설을 뿜어 매도할 수 있는가? 더구나 이를 살인마 유영철이나 히틀러에 비유하는 표창원 박사의 지성과 도덕성은 도대체 무엇인가?
거기다가 국회의원 후보로서 포르노 합법화를 당연시하는 것을 보며 한국교회는 심각한 우려를 금할 수가 없다. 인터넷과 SNS에 음란물이 홍수를 이루고, 성범죄가 폭증하고 있는 가운데 포르노 합법화를 찬성한다니 할 말을 잃는다.
포르노 합법화 찬성은 개인의 소신이라 해도, 2012년 한국교회와 성직자들에 대한 모독적인 글들에 대하여 표창원 후보는 공개적으로 사과함으로 상호 간에 불필요한 갈등과 오해를 풀고, 좋은 정치인이 되어 주기를 바란다.
한국교회언론회
==================================================
2만 명 아파트 선거관리위원장 하석범 목사 분투기
"불법인 줄 알면서도 저지른다"는 동대표들과 싸우는 작은 교회 목사 이야기
최승현 기자
[뉴스앤조이-최승현 기자] 국토교통부와 전국 17개 광역자치단체, 경찰청으로 구성된 '국무조정실정부합동부패척결추진단'이 2016년 3월 공개한 전국 공동주택 실태 점검 결과 우리나라 아파트 10곳 중 7곳에 비리가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관리비 횡령, 금품 수수 등 이유도 각양각색이었다. 이쯤 되면 '비리가 만연해 있다'고 표현해도 과하지 않다.
그 와중에 잘못을 개선하려 애쓰는 사람들이 있지만 싸움은 쉽지 않다. 지난 2월, 아파트 비리와 맞서고 있는 남기업 소장(토지+자유연구소)을 만났을 때, 남 소장은 자신을 쫓아내려는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와 선거관리위원회의 부당한 행위를 고발했다. 기대 속에 입주자대표회장이 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해임하려는 사람들과 싸움을 시작해야 했다.
시도는 집요했다. 3개월간의 길고 지리한 싸움은 지난 2월, 남 소장에 대한 '해임 투표'로 이어졌다. 긴 싸움이 시작됐다. 해임 반대표가 더 많이 나오자 투표 절차를 문제 삼아 재투표에 들어갔다. 3월 30일, 법원이 입주자대표회장의 업무를 방해하지 말라고 가처분 결정을 내리면서 남 소장은 회장 업무에 가까스로 복귀할 수 있었다.
▲ 하 목사는 준비한 서류를 책상에 늘어놓았다. 모두 아파트 일을 하며 모은 투쟁의 산물이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아프리카 TV'로 공청회 생중계…감추려는 사람과 공개하려는 사람
투명한 아파트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또 한 명의 기독인을 4월 5일 만났다. 서울 잠실에서 작은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하석범 목사(땅빛교회) 이야기다. 하 목사는 잠실 신천역 앞에 있는 한 아파트에서 선거관리위원장을 맡고 있다. 5,500여 세대 2만여 명이 입주한 대단지 아파트다.
남기업 소장을 쫓아내기 위해 동대표와 선거관리위원회, 관리사무소가 합심했듯이, 하석범 목사를 쫓아내기 위해 여러 명의 동대표가 모였다. 하석범 목사가 선관위원장으로 들어와서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다들 알아서 하던 문화를 뒤집어 놓고, 모든 걸 공개하라고 요구하니 반대하는 사람들이 생긴 것이다.
하석범 목사 얘기를 듣기 위해 선거관리위원회를 찾자 수북한 서류 더미가 눈에 먼저 들어왔다. 국토교통부와 송파구청의 공문, 검찰 약식명령 통지서, 아파트 관리 규약집, 정보공개 청구서 등 종류도 다양했다. 하석범 목사는 "법 공부 많이 했다"며 웃었다.
하 목사가 이 아파트에 산 지 8년이 됐다. 처음부터 아파트 문제에 관심을 둔 건 아니다. '공간과 도시'라는 주제로 목회자 모임을 하면서, 어떻게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였다. 주민 몇몇이 하 목사에게 선거관리위원장을 제안했다. 입주자 중에서 아파트를 소유한 사람만 동대표를 할 수 있고, 세입자는 못 한다는 법이 있으니 대신 그런 제약이 없는 선거관리위원회 활동을 부탁한 것이다. 마침 아파트 재건축을 기점으로 조합장들이 온갖 비리에 연루되고, 1~3기 대표들도 소송에 휘말리는 등 혼란스런 상태였다. 하 목사는 일종의 '비상대책위원'격으로 일을 시작하게 됐다.
그가 가장 신경 쓴 건 '투명성'이다. 지난해 2월, 입주자대표회장과 감사 2명 선출 투표가 있었다. 5,000세대 65개 동의 대표를 뽑는 일이니만큼 작은 일은 아니다. 우리나라 162개 시·군 가운데 인구가 2만 명 전후인 자치단체는 14곳이다(2015년 6월 기준). 인구수만 따지면 웬만한 군수만큼의 대표성을 띌 수 있는 자리다.
하석범 목사는 회장 선출을 위한 주민 공청회를 열었다. 누구나 자치회 대표의 공약을 보고 판단할 수 있도록 '아프리카 TV'로 공청회를 생중계했다. 아파트 입주자 카페에 공지를 올려 많은 사람이 공청회에 관심을 가지도록 유도했다. 하 목사는 "주민들이 후보자 공약이 얼마나 진실하고 실현 가능성이 있는지 꼼꼼하게 살펴보는 계기가 됐다. 주민 뜻이 잘 반영된 선거로 치러졌다"고 자평했다.
"X갑 떤다" 욕먹다
단지가 변화하려는 조짐을 보이던 찰나, '시련'도 함께 찾아왔다. 새로운 체제를 환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하 목사에게 폭언을 일삼고 협박 전화와 문자를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하 목사는 온갖 협박에 시달렸다고 고백했다. 한 동대표는 공개 회의석상에서 하 목사에게 무슨 자격으로 선거관리위원장이 아파트 일에 간섭하느냐며 폭언을 퍼부었다. "X갑 떤다"는 말도 들었다. 분위기가 험악해질 수밖에 없었다.
은혜롭게 덮지는 않았다. 명예훼손과 모욕으로 그를 형사 고소했고, 그 동대표는 벌금 100만 원 약식명령을 받았다. 나중에 다른 동대표들 앞에서 하 목사에게 사과하고, 교회에도 몇 주 출석하며 반성의 기미를 보였다. 하 목사는 그가 사과하는 영상을 유튜브에 올려 주민들에게도 공개했다. 자치회에 만연한 언어폭력을 순화하는 계기가 됐다.
"과거에는 이런 볼썽사나운 일이 생기면 선관위원장이 사퇴했어요. '내가 무슨 영화를 누리려고 이런 일을 하고 있나' 싶으니까, 험한 꼴 보지 말자 한 거죠. 근데 여기서 그만두면 주민 뜻과 전혀 무관하게 과거 방식대로 부정부패가 만연할 수 있으니 물러서지 않았어요. 나름 주민의 입장을 대변하려고 그 자리에 서 있었어요."
▲ 1년 전 하 목사가 선관위 일을 시작할 때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말 많고 탈 많은 일을 그는 지금까지 하고 있다.
"불법인 줄 알면서도 한다"
"불법인 줄 알면서도 해요. 규약에 위배되는 거 다 알면서도 하니 기가 막힌 거죠."
하석범 목사가 기가 막힌 건, 알면서도 불법을 자행한다는 사실이다. 이러이러한 행위는 안 된다, 저것은 저렇게 해야 한다, 관리 규약에 다 써 있고, 주택법과 시행령에 나와 있지만 알면서 넘어가는 문제가 많다.
작년 추석에는 관리 주체 재계약을 앞두고 업체에서 동대표들에게 추석 기념이라며 와인과 배 상자 등을 돌렸다. 와인과 배가 무슨 대수냐 할 수 있지만, 45명이면 몇 백만 원이다. 아파트 규약에 의하면 이런 물품 제공은 해임 사유에 해당한다. 하 목사는 정보공개 신청을 했다. 하지 말라고 한 건 하지 말고, 잘못을 사과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사과한 사람은 딱 한 명. 동대표 해임 사유에 해당하는 사건이지만, 해임을 요구하는 주체가 동대표인 까닭에 '셀프 해임'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나 더. 최근에는 관리비 400만 원이 부당하게 지출된 것을 잡아냈다. 동대표가 완전하게 선출되지 않아 '입주자대표회의'가 구성되지 않았을 때 일이다. 간담회 형식으로 행사를 열었는데, 나중에 여기 참석한 사람들이 5만 원에서 10만 원씩 참가비를 청구했다. 총 400만 원이 지출됐다.
"정보공개를 요청해 파악해 보니 이렇게 청구하면 안 되는 거예요. 주민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내놓으라고 요구했어요. 재미난 건 이분들이 원래는 내놓으려 하다가 갑자기 배 째라는 식으로 돌변했다는 거에요. 입주자대표회의와 선거관리위원회 사이의 자존심 싸움으로 몰아가는 거예요.
어떻게 생각하면 별 일 아니죠. 몇 천만 원 사안도 아니고 작은 거잖아요. 하지만 이 문제는 소액 재판을 청구할 생각이에요. 돈을 받아서 주민들에게 돌려줄 거에요. 법규를 어기면서까지 주민 뜻에 반하는 행위를 하는 것을 이제는 바로잡고 싶어요."
목회는 목회고, 일은 일? "저에겐 이게 목회입니다"
하석범 목사는 선거 때만 소액의 활동비가 나올 뿐 평상시는 무보수로 이 일을 하고 있다. 그는 이 일이 일종의 신앙고백이라고 믿는다.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어렵고 힘든, 거친 싸움에 뛰어들어야 하는 이유는 뭘까. 하 목사는 이 일이 또 하나의 목회라고 고백한다.
"이 아파트를 민주적인 마을로 만드는 것이 결국 제게는 신앙이고 목회에요. 교회 언어로 다가가지는 않지만, 제가 하는 일이 그런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어려움도 있고 온갖 압박과 폭언에 시달렸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즐기면서 이 일을 했어요."
입주자대표회장은 언제부턴가 하 목사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변화의 물결이 일어나길 기대하는 하 목사는 긴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 하 목사를 만난 날 아침, 하 목사는 동대표 24명에게 회의 참가비를 반납하라는 내용증명을 발송했다. 앞으로 힘든 일들이 더 많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그의 임기는 2017년 2월까지고 한 번 더 연임할 수 있다. 하 목사는 웃으며 말했다.
"또 하라면 또 할 겁니다."
=======================================
'뺄셈'에 갇힌 농촌 목회
30년간 '농어촌 선교'에 몸담은 목회자 3인 인터뷰
김재광
농촌 목회를 주제로 글을 쓰거나 말을 하는 사람마다 꼭 가져다 붙이는 서두가 있다.
"농촌 목회가 위기입니다"
"농촌 목회가 위기라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들려옵니다"
"농촌 목회가 위기라는 사실은 여러분 모두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굳이 위기론을 앞세우지 않더라도, '농촌 목회'를 주제로 한 대부분의 말과 글의 요지에는 모두 '위기론'이 전제로 깔려 있다. '다들 어렵다는데 이런 교회도 있다, 다들 무너져 가는데 그래도 이 방법을 써 보면 어떨까.' 보통 이런 식이다.
거슬러 올라가 보자. 10년 전, 20년 전, 30년 전. 서두는 마찬가지였다.
1965년 5월 25일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춘추는 '신학생 백서, 신학 지망 동기 및 현 상태 조사 보고서'를 펴 낸다. 50년 전, 그때도 '농촌 목회'는 위기였을까.
보고서에서 김규당 학생과장은 이렇게 진단한다.
"농촌 교회는 피폐 상태에 있다. 농촌 교회의 실정은 중병 환자와 같다. 지금과 같이 약간의 학력이라도 가진 자는 모두 도시로 빠져나가는 실정으로는 농촌의 발전을 기대하기 힘들다. 신학교를 졸업하는 이들이 농촌으로 진출해야 한다."
50년 전에도 농촌 목회는 위기 상태였다.
▲ 농촌 목회 위기의 역사를 되짚어 보기 위해 농촌 선교에 30년 가까이 몸담아 왔던 목회자 3인을 만났다. 사진 왼쪽부터 김기중 목사, 한경호 목사, 차흥도 목사. ⓒ목회멘토링사역원 김재광
위기의 뿌리를 보자
반 세기에 걸친 문제라면 이미 곪을 대로 곪아 있을 것이 분명하다. 위기 역사의 궤적을 한번 살펴보기로 했다. 30년을 되짚어 볼 수 있는 관록의 농어촌 선교 전문가들을 찾아 나섰다. 한국농어촌선교단체협의회 총무 김기중 목사, <농촌과 목회> 편집위원장 한경호 목사, 기독교대한감리회 농촌선교훈련원 원장 차흥도 목사를 차례로 만났다.
첫 번째 질문을 던졌다. '30년째 반복되는 농촌 목회 위기론을 어떻게 보는가.'
한경호 목사는 잠시 멈짓하더니 슬며시 미소를 띄웠다. 천천히 입을 떼는데 눈빛은 한없이 깊었다.
"어떻게 보긴 뭘, 다 아는 걸."
김기중 목사도 차흥도 목사도 반응은 비슷했다.
차흥도 목사는 30년 전 강원도 산골의 탄광촌 마을 교회에서 첫 목회를 시작했다. 지금이야 탄광촌이 쇠퇴 국면이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탄광촌 교회라고 하면 제법 뜨는 교회 축에 끼었다. 많게는 1,500명이 모이는 대형 교회도 있었고, 대부분의 교회가 수백 명의 교인들이 모이는 중형 교회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30명도 채 모이기 힘든 교회가 많아졌고, 그마저도 문을 닫는 교회가 태반이다.
마을에 사람이 없으면 교회가 도태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차 목사는 "농촌의 현실이 곧 농촌 교회의 현실이 된다. 교회가 마을과 분리될 수 없는데, 자꾸 마을은 빠지고 교회의 위기만을 말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들린다. 농촌에 사람이 없어지는데 교회가 승승장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거 자체가 앞뒤가 안 맞는 거 아닌가"라고 했다.
한경호 목사는 위기론의 양상이 최근 들어 조금씩 변하고 있다고 했다.
"예전에는 농촌 교회의 위기가 농촌 교회만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농업의 위기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시간이 점차 지나면서 이것이 비단 농촌 교회와 농업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농촌 교회의 위기는 농촌 교회만의 위기가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의 위기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농업의 위기 역시 마찬가지다. 농업의 위기는 한국 사회 전체의 위기라고 하는 인식이 점차 확대됐다."
한 목사의 지적이 이어졌다.
"우리 사회가 유기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에 어느 한 부분이 망가지면 거기만 망가지는 게 아니다. 다 연결돼 있지 않은가. 특히 농업은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생존의 절대 영역인데, 그 생존의 절대 영역을 망가뜨리고 그 위에 교회와 문화와 사회가 어떻게 건강하게 설 수 있겠는가. 못 선다."
정거장 목회에서 정주 목회로
위기 일변도의 농촌 목회를 바라보는 목회자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김기중 목사는 "농촌 사회가 극심하게 공동화되던 70~80년대, 한국교회 대다수 목회자들 사이에서 농촌 목회에 대한 기피 현상이 나타났다"고 회고했다. 김 목사는 "70~80년대가 어떤 때인가. 한국교회가 온통 도시 대형 교회를 좇던 때 아닌가. 성장주의가 유행을 끌면서, 교회의 성장이 곧 목회자 개인의 성공으로 비춰졌다. 자연히 농촌 목회는 실패한 목회라는 인식이 생기게 됐다"고 했다.
차흥도 목사는 "그때 농촌 교회에 '정거장 목회'의 바람이 불었다"고 했다. 도시로 진출하기 전 잠깐 머물다가 가는 곳으로 농촌 목회를 이해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일부 교단의 '농촌 목회 의무 기간 제도'와 맞물리면서 하나의 현상처럼 굳어지게 됐다. 젊은 목회자가 어쩔 수 없이 잠깐 머물다가 2~3년 의무 기간만 채우고 다시 도시 교회로 떠나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한경호 목사는 "가뜩이나 정적이고 답답한 농촌 사회에 젊고 똑똑한 친구들이 버틸 수나 있었겠나"하고 그 시절을 돌이켜 봤다.
하지만 90년대 후반부터 정거장 목회에 대한 반성이 일었다. 차흥도 목사는 96년부터 '정주 목회 운동'을 주창한 당사자다. "정거장 목회가 아닌 정주 목회만이 농촌 교회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주장하면서, 감리교 안에서 1년에 4차례 각 지역을 순방하며 현장 목회자들을 교육하고 서로 연대의 끈을 모색했다고 한다. 10년, 20년 정주 목회를 해야 의미 있는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게 농촌 목회 회생을 위해 꺼내든 화두였다. '정주 목회 운동'은 타 교단으로까지 번졌다.
김기중 목사도 2000년대 초반의 변화된 흐름을 짚었다. 도시 교회의 지원으로 연명하던 농촌 교회 미자립 현실을 타파하자는 목소리가 이때부터 소장파 농촌 목회자들 사이에서 유포됐다. 목회자들이 교회 울타리를 넘어 마을 사역, 유기농/친환경 농법 보급, 복지 사업 확대, 소농 자립형 목회 등 다양한 시도를 활성화했다. 이같은 노력은 정부의 농어촌 지역 살리기 정책과 소농 지원 사업 등과 맞물려 탄력을 받았다.
차흥도 목사, 김기중 목사, 한경호 목사는 한목소리로 소수의 흐름이긴 하지만 이런 움직임이 분명 의미 있는 변화를 불러일으켰다고 평가했다. 김기중 목사는 정주 목회와 마을 사역이 맞물려 가면서 농촌에서도 목회가 행복할 수 있고 농촌 교회도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근거를 마련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더불어 사는 연결망을 만들자
그렇다면 지금의 과제는 뭘까. 미래를 어떻게 내다보고 있는지 물었다. 백발이 성성한 목회자 세 명은 지금도 '농촌 선교'에 여념이 없다. 김기중 목사는 올해 3월부터 '농촌 목회 학교'를 열었다. 진짜배기를 키우기 위한 미래 준비라고 했다. 세미나 몇 번 해서는 농촌 목회의 철학도 정신도 자립 가능성도 배양하기가 힘들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그러면서 지역마다 모델을 키우고 지역 연대망을 통해 하나씩 하나씩 건강하게 자립하고 마을을 살리는 교회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한경호 목사는 작년부터 소속 교단에서 발족한 온생명소비자협동조합 발기인회 총무로 활동하고 있다. 한 목사는 "작고 약한 교회들이 협동조합을 통해 뜻과 힘을 모으고 도시 큰 교회들이 이들의 활동을 뒷받침해 주는 것은 새로운 협력 패러다임이 될 것이다"고 했다. 온생명소비자협동조합은 서울, 경기 지역에서 교회 열 곳 내외, 지역의 광역권 도시 교회에서 한 곳씩을 시범 교회로 선정해 소비자 협동조합을 구축하고, 농어촌 교회 중심의 생산자 협동조합과 지속적인 연대망을 만들어갈 계획이다.
차흥도 목사 역시 '생명의 망 잇기 운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마을 목회에 관심을 가졌다면, 이제 좀 더 넓은 범위의 지역 연결망을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 지금의 농촌 마을은 한 단위에서 교육과 문화, 생산과 소비가 순환되기 힘들다고 지적하면서, 최소 지자체 단위의 연결망을 만들어 지역 안에서 생활 구조가 순환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 면에서 지역의 교회들이 '생명의 망'으로 연결되어 서로 협력하고 상생할 수 있는 운동을 펼쳐 가야 한다고 했다.
차 목사가 제기한 또 하나의 기회는 바로 '귀농, 귀촌 현상'이다. 작년에 최초로 귀농, 귀촌 인구가 도시 유입 인구를 역전했다고 한다. 그만큼 귀농, 귀촌 인구가 늘어가고 있는데, 농촌 교회든 도시 교회든 이러한 현상에 대한 대비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차 목사는 "도시 교회는 교회 안에 귀농, 귀촌 학교를 열어야 하고, 농어촌 교회는 귀농, 귀촌 인구를 어떻게 맞을지 대비를 구체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지난 50년, 농촌 목회는 '뺄셈'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2000년대부터 소수의 현장 목회자들 사이에서 새로운 변화를 도모하는 움직임이 10년여간의 지형을 바꾸어 놓았다. 30년 동안 농촌 선교에 몸담아 왔던 세 명의 목회자들은 이제 농어촌과 도시 간, 농어촌의 광범한 지역 안에서의 연결망을 고민하고 있다.
목회멘토링사역원은 지난 4년 동안 '마을을 섬기는 시골 교회 워크숍'을 열어 마을 목회, 자립 목회를 위해 20년 가까이 현장에서 변화를 도모한 사례를 소개해 왔다. 올해는 5월 2일(월) 대전 늘사랑교회(정승룡 목사)에서 제6차 워크숍을 연다. 농촌 목회의 현실과 앞으로 나아갈 바를 함께 고민하고 협력의 기회를 엿보는 만남이 되기를 바라며, 여러 목회자, 신학생, 농촌 목회에 관심 있는 여러분들을 초대한다.
==================================================
처음 한국으로 떠나는 아펜젤러가 받은 편지
1885년 1월 15일 선교부 총무 리드의 편지로 본 선교 개시 과정
미국 북감리회 해외선교부가 임명한 첫 한국 선교사는 20대 의사 스크랜턴 목사와 아펜젤러 목사였고, 북감리회 여자해외선교부의 첫 선교사는 50대의 스크랜턴 여사였다. 이들의 임명과 안수, 미국을 떠나 임명지인 서울로 오는 험난한 여정을 1885년 1월 15일 자 리드 총무가 아펜젤러에게 준 편지로 살펴보자. 이들은 1885년 1월 20일 뉴욕을 출발하여 스크랜턴은 5월 6일, 스크랜턴 여사는 6월 21일, 아펜젤러는 6개월이 더 지난 7월 29일 서울에 도착했다.
▲ 한국의 첫 감리회 선교사들. 스크랜턴, 아펜젤러, 스크랜턴 여사. 의료, 목회, 교육이 함께 가는 기독교 문명의 선교 방법을 채택했다.
북감리회가 파송한 첫 한국 선교사들
뉴잉글랜드 청교도 명문가 후손인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1956. 5. 29~1922. 3. 23)은 뉴헤이븐에서 자랐다. 홉킨스학교와 예일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으로 가서, 1882년 컬럼비아대학과 그 대학과 연결된 뉴욕의과대학을 졸업했다. 그 해에 루이자 암즈(Louisa W. Arms)와 결혼하고, 신흥도시인 오하이오 클리블랜드에서 엘리트 의사로 개업했다.
어머니인 스크랜턴(Mary Fletcher Scranton, 1832~1909) 여사도 함께 이사했으며, 1883년 6월 14일 첫 손녀 오거스타의 출생에 기뻐했다. 여사는 북감리회 여자해외선교부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1873년부터 일본에서 선교사로 일하던 해리스(Merriman C. Harris, 1846~1921) 목사가 1884년 초여름 안식년 기간에 클리블랜드를 방문하고 스크랜턴 가족과 만났다.
그는 매클레이 목사를 통해 한국이 개방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에 의료 선교사로 나갈 것을 권했다. 그가 떠난 후 한 달간 장티푸스를 심하게 앓은 스크랜턴은 선교사로 나가기로 결심했고, 이어서 아내 루이자도 동의했다. 병상에서 스크랜턴 여사와 스크랜턴 부부가 기도하고 대화한 결과였다.
스크랜턴은 1884년 10월 4일 첫 한국 선교사로 임명받고, 한국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난 12월 4일 뉴욕 파크애비뉴교회에서 파울러(Charles H. Fowler) 감독으로부터 장로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같은 해 10월 북감리회 여성해외선교부(WFMS)는 스크랜턴 여사에게 한국 선교사로 나갈 것을 제안하고 부탁했다. 처음에는 50이 넘은 나이 때문에 거절했으나 아들 내외와 함께 나가기로 결심했다. 11월 볼티모어에서 열린 실행위원회 총회에 참석하여 11월 10일 폐회 때 한국 선교사로 파송받았다. 그리고 12월 4일 아들이 뉴욕에서 목사 안수를 받을 때 참석하였으며 여성해외선교부 본부를 방문하고 향후 선교 사업 개척을 의논했다.
아펜젤러(H. G. Appenzeller, 1858. 2. 6~1902. 6. 11)는 부계의 펜실베이니아 주 화란 개혁주의와 모계의 메노나이트파 신앙 속에서 자라다가 감리회로 옮겼다. 드루신학교에서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 그는 차가운 이성과 뜨거운 가슴을 동시에 소유하고, 정통 교리(orthodoxy)와 정통 실천(ortho-praxis) 양자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1883년 10월 코네티컷 하트포드신학교에서 열린 해외 선교를 위한 전국신학교동맹 대회에 드루신학교 대표 5명의 한 사람으로 참석했다. 그 대회에 언더우드(H. G. Underwood, 1859. 7. 1~1916. 10. 16)도 뉴브룬스위크신학교 대표로 참석했다. 두 사람은 이 대회에서 선교사로 헌신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아펜젤러는 1884년 8월 선교부 총무 리드에게 편지하여 선교사로 지원했다. 리드는 연말까지 아펜젤러와 여러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리드가 보낸 편지 날짜는 1884년 9월 5일, 10월 17일, 11월 20일, 12월 1일, 12월 17일, 12월 20일이었다.
아펜젤러는 12월 17일 선교사로 나가기 위해 랭커스터제일감리교회에서 엘라 닷지(Ella Dodge)와 결혼했다. 두 사람이 성탄절을 보내기 위해 수더턴의 아펜젤러 부모 집에 가 있을 때, 12월 20일 자 리드 총무의 편지를 받았다.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세 선교사는 뉴욕 선교부에서 만나 1월 20일 함께 열차로 뉴욕을 출발했다. 미국 대륙을 횡단하여 2월 1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아펜젤러는 다음 날 샌프란시스코에서 파울러(C. H. Fowler) 감독에게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다. 2월 3일 두 가족(6명)의 일행은 아라빅(Arabic)호에 승선해 일본을 향해 출발했다. 미국 북감리회가 미지의 땅 조선 왕국에 파송한 첫 선교사들이었다.
1885년 1월 15일 자 리드 총무의 편지
선교부 총무 리드가 1885년 1월 15일~19일 두 개척 선교사에게 보낸 편지는 뉴욕 컬럼비아대학교 유니언신학교 도서관에 있는 아펜젤러 자료 안에 보관되어 있으며, 드루대학교 감리회역사관에서 만든 마이크로필름 "Letter book 208, Financial, Korea, 1885~1896"에도 들어가 있다.
한국 북감리회의 선교가 어떻게 출발되었는지 알려 주는 이 중요한 편지가 지금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이 편지가 선교부의 일반 편지가 아닌 재정 관련 편지로 분류되어 "Letter book 208, Financial, Korea, 1885~1896"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이 편지 수신자는 아펜젤러이지만, 1월 19일 리드가 스크랜턴에게 보낸 편지에서 함께 읽는 권한을 주었다. 곧 이 편지는 한국선교회에 준 선교부의 첫 공식 서한이다. 편지 전문을 해독하려면 마이크로필름 판독기에서 본문을 확대해서 인쇄한 후 단어별로 확인하면서 읽고 옮겨 써야 한다.
아펜젤러에게 준 1월 15일 자 편지는 타자로 친 9페이지 26개 문단으로 이루어진 긴 글이고, 스크랜턴에게 보낸 1월 19일 자 편지는 4페이지이다. 지면 한계로 첫 편지만 번역하고, 두 번째 편지는 해석 부분에서 추가하려고 한다.
첫 편지도 길기 때문에 일부는 요약하되 중요한 부분은 전체 문장을 번역하고 따옴표를 넣었다. (원문에는 번호가 없지만, 논의를 위해 각 문단 앞에 필자가 번호를 추가했다.)
리드 총무는 첫 한두 해에 일어날 일을 예상하면서 큰 그림을 그려 주었다. 선교지로 떠나는 청년 선교사들에게 선교부는 어떤 내용으로 첫 편지를 보냈는지, 25세 아펜젤러의 심정이 되어 선교부 총무의 편지를 읽어 보자.
1885년 1월 15일
아펜젤러 형제에게,
1. 어제 당신이 완전히 안수를 받지 못해서 아주 유감이다. 스크랜턴 의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더 할 것이다. 그를 통해 더 알려 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