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단 헐린 동대문 교회에 소녀상기념교회 설립 추진/ 인천국제공항의 '기도실' 2016-01-15 14:33:56 read : 4812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무단 헐린 동대문 교회에 소녀상기념교회 설립 추진
뉴스사람10년간 위안부 품은 목사, 소녀상 옆에 서다
[인터뷰] 설립 1주년 맞은 위안부기념교회 박영규 목사 강혜원 기자
[뉴스앤조이-강혜원 인턴기자] 1991년, 고 김학순 할머니의 폭로로 위안부 참상이 사회에 드러났다. 25년의 세월이 흘렀다. 위안부에 대한 사회의 관심도 긴 시간만큼 점차 무뎌졌다. 얼마 전, 한일 위안부 협상이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와 법적인 배상 없이 양국 정상 간에 졸속으로 타결됐다. 다시 사회가 위안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불가역적'으로, 위안부 협상이 타결된 후에 말이다.
한편 10년 동안 위안부 피해자를 기억하는 교회를 꿈꿔 온 목사가 있다. 그는 제자감리교회 박영규 목사로, 1년째 동대문 천막 교회에서 '세계위안부소녀기념교회'(위안부기념교회) 예배를 진행했다. 이번 위안부 협상 결과를 보며 수요 집회에도 나서게 됐다. '위안부 소녀 기림 예배'로 말이다. 박영규 목사를 만나기 위해 위안부 교회 설립 1주년 예배가 진행되는 동대문 천막 교회를 찾았다.
위안부기념교회 설립 예배는 1주년을 맞았지만 여느 때처럼 조촐하게 진행됐다. 가스가 새어 나오는 낡은 난로가 천막 한 가운데서 위태롭게 작동되고 낡은 스피커에서는 찬송가가 흘러나왔다. 동대문교회 교인들과 제자감리교회 교인들은 찬송과 기도를 하며 예배를 했다. 예배를 마친 후 박영규 목사에게 위안부기념교회의 초창기부터 수요 집회 예배를 하기로 결심하게 된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들었다.
▲ 1900년 초 동대문교회 사진.
▲ 1월 10일, 동대문 천막 교회에서 예배가 진행되고 있다. ⓒ뉴스앤조이 강혜원
위안부기념교회 설립 예배 장소 찾던 중, 고 김학순 할머니가 다니던 동대문교회를 만나다
동대문 천막 교회에서 위안부기념교회 예배를 진행한 데는 특별한 이야기가 있었다. 동대문교회는 2013년 동대문성곽공원이 생기면서 철거됐다. 동대문교회 교인들은 교회 복원을 위해 공원 초입부에 천막을 세우고 예배를 했다. 위안부를 최초로 세상에 알린 고 김학순 할머니는 동대문교회 출신이다. 당시 김학순 할머니는 몇 교인들의 권면으로 위안부 참상을 최초로 고발하게 됐다.
"원래는 감리교 재단인 배화여대나 이화여대 강당을 빌려서 위안부기념교회 예배를 하려고 했어요. 그러던 도중 동대문 천막 교회가 눈에 들어왔죠. 좋은 건물보다 허술한 천막에서 예배하면 하나님이 더 기뻐하실 것 같았습니다. 돌아가신 할머니들을 추모하는 의미도 더 잘 전달될 것 같았고요. 그래서 무작정 동대문교회 원로목사님이신 문세광 목사님께 전화를 드렸죠. 통화 중에, 위안부 참상을 고발하신 고 김학순 할머니가 다니시던 교회가 바로 이 곳 동대문교회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동대문 천막 교회의 전경. ⓒ뉴스앤조이 강혜원
▲1월 10일, 1주년을 맞이한 '세계위안부소녀기념교회' 설립 예배에 참석한 박영규 목사. ⓒ뉴스앤조이 강혜원
동대문교회는 지금도 위안부 역사와 관련이 깊은 분들이 출석하고 있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위안부 참상을 고발할 때 도움을 줬던 고 장기천 감독도 동대문교회 출신이다. 현재는 그의 부인 김영혜 씨를 비롯하여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일제 치하에서 구국 간호사로 활동했던 최애도 장로도 매주 위안부 예배에 참석한다.
1년 전 동대문교회와의 운명적 만남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세계위안부소녀기념교회 건립'이라는 목적을 위해 달려 온 박영규 목사. 그는 왜 위안부 역사를 기리기 위해 굳이 '교회'를 세우려고 하는 것일까. 그가 단지 목사이기 때문일까?
박영규 목사는 이번 협상을 통해 현 정권이 위안부의 역사를 지우려고 한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교회만이 가질 수 있는 강력함을 주장했다. 박영규 목사는 '교회'를 통해 위안부 역사를 영원히 기록하길 바랐다.
"정대협을 비롯한 다른 민간단체들은 위안부 기념관을 세우고 소녀상을 설치하려고 하잖아요. 물론 그러한 움직임도 굉장히 중요합니다만, 지금 현 정권을 보세요. 이번 위안부 협상 타결한 거 보면, 아픔의 역사는 점점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근데 교회는 강력해요. 공산주의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교회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거든요. '세계위안부기념교회'를 세우면 위안부 역사도 이 교회와 함께 영원히 기록되겠죠. 제가 굳이 위안부를 위해 다른 게 아닌 교회를 세우려는 이유입니다."
"위안부 협상, 대통령은 용서할지 몰라도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을 것"
박영규 목사는 위안부 협상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10년간 위안부를 위해 기도하고, 1년 동안 천막에서 위안부기념교회 설립을 위한 예배를 매주 진행했다. 박영규 목사에게 이번 위안부 협상은 더 의미가 클 것 같았다. 그는 피해 당사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사과 없이 돈 몇 푼으로 타결된 이번 협상에 대해 유감을 밝혔다.
"이번 협상은요, 겨우 100억 주고 이제 더 이상 위안부 얘기를 꺼내지 말라는 협박이나 마찬가지였어요. 일본 총리가 방송에 직접 나와서 사과를 했어야죠. 강자가 약자한테 돈 몇 푼 줄 테니 입 다물라, 이거 아닌가요?"
그는 일제 치하에서의 위안부 참상을 거침없이 쏟아 냈다. 일본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받아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위안부는 초경도 안 한 어린 여자 아이들이 대부분이었어요. 남자 여럿을 상대하고 만신창이가 돼 있는데 아래에 묻은 정액을 닦아 낼 때 종이 한 장 주지 않고요, 새끼줄을 가랑이 사이에 넣고 지나가게 했답니다. 제대로 된 사과를 받아 내야 해요. 직접적인 사과요. 대통령 혼자서 전화받고 용서하면 뭐합니까. 이번 협상은 하나님도 용서하지 않으실 겁니다."
새로운 '행동'의 시작, 수요 집회 사전 예배 진행
오랜 기간 위안부를 위해 힘써 온 그이기에, 이번 위안부 협상에 더 분노했다. 그리고 더 좌절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박영규 목사는 이번 협상 결과를 통해 다시금 기독교인들이 행동해야 할 때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예수가 사회에서 세리·창녀 등 사회적 약자와 함께하는 실천을 보여 줬던 것처럼 말이다.
그는 목사로서 본인이 할 수 있는 예배로 수요 집회에 힘을 더하기로 결심했다. 1월 13일, 1213차 수요집회부터 '위안부 소녀 기림 예배'를 드리게 됐다. 그는 "하나님이 그만하라고 하실 때까지 함께, 끝까지 예배로 수요 집회에 연대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는 앞으로도 계속될 수요 집회 사전 예배에 종교계와 많은 시민이 연대해 주기를 청했다. 첫 예배는 주위에 알리지 않고 조촐하게 시작할거라는 그는 점진적인 연대를 바랐다. 1년간 위안부기념교회 설립 예배를 꾸준히 진행하자, 세상에 조금씩 알려진 것처럼 말이다. 박 목사는 벌써부터 수요 집회 예배가 또 다른 시작이 될 것임을 강조하며 설레는 표정을 드러냈다. 비장하기도 했다.
박 목사는 수요 집회 전에 진행되는 '위안부 소녀 기림 예배'가 새롭고 다양한 행동의 시작이 될 것임을 말했다. 그의 최종 목적은 단지 '세계위안부소녀기념교회'를 세우는 것에 있지 않다.
"이번 수요 예배는 새로운 행동이자 실천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이걸 시작으로 동대문 성곽 공원에 위안부 소녀 기념 동산을 세우고 사대문 안에 위안부 소녀상을 세우는 것도 나중의 계획이랍니다."
거창한 계획을 듣고 후원 부분을 걱정하는 기자의 질문에, 박영규 목사는 당차게 답했다.
"후원이 별로 안 되면 뭐 어때요. 저희 제자감리교회 이름을 '세계위안부소녀기념교회'로 바꿔서라도 꼭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교회를 세우겠습니다. 위안부 역사를 영원히 남길 수 있는 운동을 꾸준히 할 겁니다."
제1차 위안부 소녀 기림 예배, '평화' 강조
1월 13일, 1213회 수요 집회가 열렸다. 이날 박영규 목사는 수요 집회 시작에 앞서 '제1차 위안부 소녀 기림 예배'를 진행했다.
▲1월 13일, '제 1차 위안부 소녀 기림 예배'를 진행하고 있는 박영규 목사의 모습이다. ⓒ뉴스앤조이 강혜원
영하 10도를 웃도는 날씨였지만 박 목사는 예배가 시작하기 한 시간 전인 10시부터 예배를 준비했다. 소녀상 옆에서 조그만 강대상을 두고 자신의 차례를 꿋꿋이 기다렸다. 미리 만들어 온 주보를 주변 시민과 기자들에게 나눠 줬다.
그는 '12곳에 평화가 필요합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정치·가정·노사 등에서의 사랑과 평화를 강조했다. 이어진 기도에서는 일본 정부의 직접적인 사과와 한국 정부의 각성을 촉구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건강과 평안을 위해도 기도했다. 예배는 '한국위안부소녀기념교회 설립 취지문'과 박 목사가 작성한 '위안부 소녀'라는 시 낭독으로 마무리 됐다.
수요 집회와 연대를 시작한 '위안부 소녀 기림 예배'. 박영규 목사는 첫 예배를 마친 후 "이 예배는 하나님이 제게 주신 사명입니다. 감개무량합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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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담장에 성화 그린 은진교회 한경수 장로
“전주 한옥마을 새 명소… 24시간 전도지 역할해 보람”
동방박사부터 예수의 탄생과 부활까지 병풍처럼 펼쳐… “행인들 유심히 보면 뿌듯”
▲전주시 완산구 은진교회 담장에 그려진 ‘예수님의 승천’ 장면(막 16:19)을 노사무엘 목사(왼쪽)와 한경수 장로가 설명하고 있다.
전북 전주시 완산구 마당재2길. 왕복 2차로를 지나는 차량이 서서히 속도를 줄인다. 신호등 때문이 아니다. 은진교회(노사무엘 목사) 담장에 그려진 아홉 폭의 벽화를 보느라 그렇다. 지난 10일 찾아간 이곳엔 별을 보며 따라가는 동방박사부터 아기예수의 탄생, 십자가 고난과 부활에 이르기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었다. 한경수(77) 장로의 작품이다.
은진교회에서 노사무엘 목사와 한 장로를 만나 벽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한 장로는 18세 때부터 40년 넘도록 영화 간판을 그려온 1세대 ‘간판장이’다. “해방직후 전주시내 유일의 극장이었던 도립전주극장의 간판부터 웬만한 영화 간판들은 다 제 손을 거쳤지요. IMF 이후에 작은 극장들이 줄줄이 문을 닫고 영화 간판이 실사로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은퇴라는 걸 하게 됐지요.”
한 장로는 “하지만 그때부터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로 하나님을 위해 온전하게 쓰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라고 은퇴 당시를 회고했다. 그는 은퇴와 함께 내려놓을 뻔했던 붓을 다시 들고 성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한 장로가 그린 성화는 부활절 성탄절 등 주요 절기마다 교회의 벽면을 채웠다.
지난해 여름 노사무엘 목사는 한 장로에게 “교회 담장을 아름다운 벽화로 채워 전도의 도구로 활용하면 어떨까요”라는 재미있는 제안을 했다. 처음엔 “나이가 들어 손이 떨려서 붓 들기도 힘들다”며 고사했지만 주변 성도의 격려와 응원에 힘입어 그 어떤 그림을 그릴 때보다 열정을 쏟았다.
한 장로는 “구상하는 데만 열흘이 걸렸다”며 “성화 수백 장을 찾아보고 벽화의 원본을 축소판으로 제작한 뒤 그 그림을 손에 쥔 채 작업을 시작했다”고 과정을 설명했다. 본격적인 벽화 작업에는 꼬박 2주일이 걸렸다. 8월 중순의 뙤약볕을 피하기 위해 새벽기도회를 마친 직후부터 출근길 정체가 시작되기 전까지 매일 3∼4시간을 벽화 그리기에 매진했다.
“마치 한계에 도전하는 듯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승천하시는 마지막 벽화를 그리고 나니 육체적으로 힘들었던 것이 하나도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그렇게 그려진 벽화는 전주 한옥마을로 향하는 관광객, 기린봉을 찾는 등산객, 출·퇴근하는 시민, 등·하교하는 학생, 인근 경로당 어르신 등 수많은 사람들에게 지역의 또 하나의 명소이자 24시간 내내 복음을 전달하는 ‘전도지’가 됐다.
한 장로는 “주말이 되면 한옥마을을 찾는 차량이 줄을 지어 이동하는데 창문을 내리고 유심히 벽화를 보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뿌듯함을 느낀다”며 웃었다. 노 목사는 “담장뿐 아니라 교회의 어떤 일부라도 하나님을 알리고 복음을 전하는 데 쓰일 수만 있다면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또 다른 아이디어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노 목사가 한 장로에게 물었다. “장로님, 벽화가 2∼3년이면 변색이 되어 수정이 필요할 것 같은데…. 그땐 천지창조를 담아보면 어떨까요?” “2∼3년 뒤에 제 손이 더 떨리지 않도록 목사님이 기도만 해주신다면 얼마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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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성도 위한 ‘북한어 성경’ 나왔다
모퉁이돌선교회 출간… 1차로 3000권 무료 배포
북한 구호 및 선교단체인 모퉁이돌선교회(대표 이삭 목사)는 ‘북한어 성경’(신·구약 66권 합본·사진)을 출간해 북한과 중국교회 등에 전달하기 시작했다고 13일 밝혔다. 이 성경은 북한주민이나 탈북민들이 성경을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북한말로 제작된 것이다.
이삭 목사는 “신학자와 목회자, 탈북민 등의 도움을 받아 제작했다”며 “특히 한글성경을 읽는 탈북민 등 북한사람들이 성경을 쉽게 이해하고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 목사는 “탈북민과 북한 주민, 이 성경을 북한선교를 위해 효과적으로 사용할 교회나 선교단체에 1차로 3000권을 배포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 성경은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으로 구성돼 있다. 구약은 히브리어 원문, 신약은 헬라어 원문을 번역해 북한말로 옮겼다. 주기도문과 사도신경, 십계명, 바울의 선교여행 지도 및 예수님의 사역 지도 등도 포함시켰다.
북한 주민이나 탈북민이 성경을 소지해도 들키지 않도록 아무런 장식이나 제목을 달지 않았다(cornerstone.or.kr).
100주년기념교회 사례 보니…‘매월 첫 주일 모든 교인에 보고’ 정관에 규정, 홈피에 보고서 올려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 홈페이지에 게재된 결산보고서. 이 교회는 2005 년 7월부터 매월 성도들에게 결산 내용을 공개하고 있다. 교회 홈페이지 캡처
서울 마포구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이재철 목사) 홈페이지에 최근 ‘2015년 12월 결산보고서’가 올라왔다. 교회는 2005년 7월부터 매월 결산내용을 보고하는데, 성도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세부적 내용을 꼼꼼하게 확인할 수 있다. 교회의 이 같은 ‘클린 재정’ 운용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100주년기념교회 정관 제7조 2항에 따르면 헌금의 50%는 교회를 위해, 나머지 50%는 지역사회 등 교회 밖을 위해 사용하도록 정했다. 정관 제7조 3항에선 매월 첫째 주일 전월의 재정 입출금에 관한 모든 사항을 전 교인에게 서면으로 보고하도록 했다. 교회 홈페이지에도 상시 게재해 누구나 열람 가능하도록 했다.
이영란 선임목사는 “역대상 29장 14절을 보면 다윗이 주님께로부터 모든 것이 왔다고 말한다”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물질을 어떻게 사용했는지에 대해 하나님과 성도들에게 보고한다는 의미로 이같이 실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모든 교인들이 교회 살림살이를 충분히 이해해 헌금 사용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와 소모적 논쟁을 원칙적으로 차단하기 위함”이라며 “비본질적인 일에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추구해야 할 본연의 길에 매진하도록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감사팀 활동도 재정 낭비를 방지하는 데 한몫했다. 감사팀은 매주일 단위로 통장 거래내역과 지출 결의서를 일일이 비교·대조한 후 감사보고서를 작성해 결산보고서와 함께 상임위원회에 상정한다. 주간 단위로 감사를 하는 이유는 실무자에 의한 회계 및 자금운용 사고 환경을 철저히 제거하는 데 있다.
그래서 이 교회는 빚이 전혀 없다. 제1금융권에서 하는 정기예금 외엔 일절 다른 운용 수단을 배제한다. 윤병환 사무장은 “성도들의 헌금으로 조금이라도 이익을 남기려는 투자 접근은 아예 안 한다”면서 “빚을 내서 사역하는 것도 철저히 지양한다. 하나님이 주신 재정의 범위 내에서 모든 것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윤 사무장은 “성도들에게 재정 사용을 공개하니 교회의 재정 투명성 부분을 신뢰하고 피드백을 주기도 한다”며 “성도들이 직·간접적으로 교회 재정 운용에 참여한다”고 말했다. 그는 “1원까지 모두 공개되기 때문에 때론 구성원의 프라이버시 노출 등 어려운 점도 생긴다”면서 “하지만 큰 틀에서 보았을 때 장점이 더 많기에 재정 공개를 계속 할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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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억 혐의와 부자세습 목사, '대상' 수상
조용기 목사, 김성길 목사 '세계선교대상'과 '목회자대상' 수상
▲ '제3회 한국교회 원로 목회자의 날' 행사에서 조용기 원로목사(사진 왼쪽)와 김성길 원로목사(사진 오른쪽) 각각 세계 선교 대상, 목회자 대상을 수상했다. 김 목사는 지난 2014년 자신의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줬다. 조 목사는 특별 선교비 600억 횡령 혐의로 검찰 수사를 앞두고 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서울 종로 AW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3회 한국교회 원로 목회자의 날’ 행사에서 600억 횡령 혐의로 검찰수사를 앞둔 조용기 목사와 2014년 자신의 아들에게 교회를 세습한 김성길 목사가 ‘세계선교대상’과 ‘목회자 대상’을 각각 수상했다.
은퇴목회자 8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제3회 한국교회 원로 목회자의 날’ 행사에서 주최측은 ‘자랑스러운 원로 목회자 대상’ 시상식을 거행했으며, ‘세계선교대상’에 조용기 원로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 ‘목회자 대상’에 김성길 원로목사(시은소교회), ‘낙도선교봉사대상’에 강의구 원로목사(등촌제일교회) 등이 수상했다.
주최측은 수상자 선정 이유로 ‘복음전파’, ‘솔선수범’, ‘봉사’ 등을 꼽았으나, 수상자인 조용기 목사는 지난해 10월 특별선교비 600억 횡령 혐의로 검찰에 고발됐으며, 김성길 목사는 자신이 개척한 3,000 출석교인의 대형교회를 2014년 3월 아들에게 물려줘 논란이 된 목사들이다.
이번 수상자 선전의 문제점을 지적한 <뉴스앤조이> 기자는 행사중간에 자리를 떠나는 조용기 목사에게 “특별선교비 600억원을 어디에 썼느냐”는 질문을 던졌으나, 조 목사는 “모른다”, “검찰에서 조사할 것이다”며 답변을 피했고, 수행원들은 “오늘 같은 날 그런 질문을 하면 어떡해!”라며 기자를 막고 소리쳤다고 보도했다.
한편, 조용기 목사 특별선교비 횡령을 조사중인 검찰은 지난해 12월 여의도순복음교회 교회바로세우기장로기도모임의 장로들을 불러 조사를 마쳤으며, 피고발인 조사는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뉴스앤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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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국제공항의 '기도실'
▲최덕성 교수. ⓒ크리스천투데이 DB
인천국제공항에 기도실(Prayer Room)이 있다. 미국, 영국, 중국, 일본에서 보지 못한 공항 기도실이 대한민국 공항 안에 있다. 나는 출국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는 동안 기도하러 이곳에 들렀다. 기도실 안은 텅 비어 있다. 책걸상이 없다. 신을 벗고 마루에 올라야 한다. 이 기도실은 모든 사람들, 모든 종교인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일 게다. 특정 종교인들을 위한 공간은 아닐 것이다.
나는 창조자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교회당 안에서 올리는 기도만을 들으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불교 사찰 대웅전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한다. 예의에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말이다. 유일하신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다. 참 신은 여호와 하나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어디서든지 기도한다. 그분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기에, 나는 언제든지 어디를 향해서든지 기도한다. 소리 내면서 하기도 하고 아무 말 없이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천국제공항 기도실에 들어섰을 때는 기도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이유가 있었다. 기도실에 들어가면 바닥에 새겨져 있는 큼직한 방향계가 눈에 들어온다. 동서남북을 가리키는 방향계를 갖춘 기도실, 이 공간은 틀림없이 무슬림들을 배려한 장소이다. 창조주 하나님께 기도를 하려고 하니 이슬람 테러집단들이 생각난다.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순교당한 수많은 기독인들이 떠오른다. 움찔한 느낌이 들자 기도할 맘이 사라진다.
여러 해 전, 천안아산역에서 서울역까지 고속열차에 올랐을 때, 입구 공간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백인이 있었다. 누구에게 기도했느냐고 하자 "위대한 알라에게"라고 답했다. 자신은 독일인이고 사업차 한국에 왔다고 했다. 사람들이 통행하는 출입구에서 기도하는 것은 결례라고 말해 주자, 기차가 그곳에 설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대전역과 천안아산역은 그다지 멀지 않다.
무슬림의 하루는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끝난다. 새벽부터 밤까지 하루 다섯 번 기도한다. 깨끗한 장소에서 얼굴을 씻고 메카를 향해 기도한다. 대한민국에서 메카의 방향은 서북서 285.8도로, 서쪽을 바라보고 약간 오른쪽으로 몸을 틀면 된다. 기도는 양손 엄지를 귓불 가까이 올리고 "알라후 아크바라(알라는 위대하다)"를 외는 것으로 시작하여 5가지 절차로 진행된다.
기독교의 요람이던 유럽은 더 이상 그 지위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유럽의 주류 기독교는 자유주의 신학의 안착과 종교다원주의·진리상대주의 신념 탓으로 극도로 퇴락했다. 몰락 직전 상태이다. 유럽교회는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또는 암과 같은 죽음의 병에 걸렸다. 그럼에도 신학을 하려고 유럽으로 유학을 가는 한국인들을 보면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든다.
인천국제공항 기도실
▲인천국제공항 내 기도실. ⓒ최덕성 교수 제공
교황청은 최근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The Gifts and Calling of God are irrevocable)"라는 공식 문서를 통해 "유대인들을 개종시키려 하지 말라"면서 "유대인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필요가 없다(예수 없이 구원을 받았다)"고 말해 큰 논란을 일으켰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가 이미 확언한 바 있는 내용이다.
세계교회협의회(WCC) 중심으로 20세기에 등장한 신종 기독교는, 모든 종교가 구원의 길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신념 구도는 예수를 믿어야 할 당위성을 가지지 못한다. 유럽에 기독인이 전무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종교' 차원의 기독교는 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에 항거하여 목숨을 바칠 정도의 기독교 신앙, 또는 이슬람을 막아낼 정도의 결속력을 가질 수 있는 기독인들이 없다고 함이 옳을 듯하다.
WCC는 부산에서 제10차 총회(2013)를 열었다. 대한민국과 한국교회도 거액을 제공했다. 김삼환 목사가 앞장섰고, 진보 신학자들이 적극 지지했다. 예장 통합, 기장, 감리회가 재정을 지원했다. 교회로 하여금 AIDS나 암에 걸리도록 도운 셈이다.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진지를 허물고 복음 전도의 열의를 약화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이에 대한 논의는 필자의 <교황 신드롬(2014)>에 담겨 있다.
선교학자 이동주 박사(전 아시아연합신학대학교)는 한국개혁신학회에서 필자가 'WCC의 개종전도금지주의'라는 논문을 발표하자, 머지않아 대부분의 한국 여성들이 히잡 또는 부르카를 두르고 다닐 것으로 예측된다고 논평한 적이 있다. 대한민국 안에 기독인보다 훨씬 더 많은 무슬림이 생겨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알라에게 기도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한국교회가 무슬림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면 좋으련만, 그런 경우는 드물다. 실상은 그 반대다. 기독교 대학으로 알려진 모 대학에 교비 유학생으로 온 어느 무슬림은, 하숙집 주인과 어려 명의 동료 대학생들을 이슬람으로 개종시켰다고 한다. 이 정보가 사실이든 아니든, 나는 무슬림이 한국에서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다.
기독교가 예수 구원 복음전도는 하지 않고 WCC가 추구하는 '미시오 데이(mission dei)'에 에너지를 쏟으며 기독교를 사회복음실천운동이나 윤리실천운동쯤으로 여기고 있는 동안, 이슬람은 역사 이래 최대로 강력하게 확산되고 있다. 기독교가 영적인 생명(zoe)에는 관심이 없고 생물학적 생명(bios)에만 집착하는 동안, 이슬람은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다.
기독교 신앙의 요람이던 유럽은 난민 사태로 말미암아 돌이킬 수 없는 변화 직전에 있다. 수십만 명의 무슬림이 유럽으로 몰려들고 있다. 장차 3백만 명이 더 유입될 것으로 예상된다. 유럽의 이슬람화는 돌이킬 수 없는 듯하다.
이슬람 인구가 증가하면, 이들은 이슬람 관습, 심지어 이슬람 법인 샤리아를 자국의 법보다 우선시할 것이다. 유럽은 한두 세대 안에 이슬람화될 것 같다. 이슬람 군대가 732년 프랑스 투르, 1492년 스페인 그라나다, 1683년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서 힘으로 이루지 못한 일을, 이제는 총 한 발 쏘지 않고 이루고 있는 것 같다. 장차 20년, 많이 걸려도 30년이면 유럽 대륙은 이민을 통한 이슬람 정복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일 것으로 보인다.
최덕성 인천공항 기도실
▲인천공항 기도실 내부 모습. 바닥에 ‘나침반 모양’으로 ‘그쪽’ 방향을 표시하고 있다. ⓒ최덕성 교수 제공
유럽은 기독교 사회에서 세속주의라는 '종교'로 개종했다. 세속화된 유럽 사회의 테마곡은 존 레논의 '이매진(Imagine)'이다.
“천국이 없다고 상상해 보세요(Imagine there's no heaven). 우리가 노력하면 그것은 쉬워요(it's easy if we try). 살해와 죽음이 없고(nothing to kill and die for) 종교도 없죠(and no religion too).” -존 레논의 '이매진(Imagine)' 중 일부
위 가사는 “종교를 없애면, 아무도 사람을 살해하려 하지 않을 것이고, 유럽을 지키려고 죽을 필요도 없다”는 뜻이다. 종교적 다양성을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자동차 기어를 후진으로 두기 전에 중립을 거치는 것처럼, 유럽은 기독교 사회에서 떠나 세속화 영역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그리고 불가항력적인 형태로 이슬람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한국은 유럽 실패의 전철을 밟을 것인가? 우리에게 희망은 없는가? 유럽이건 한국이건, 유일한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다른 해결책은 없다. 하나님을 만난 자는 특별계시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과 구원의 길을 '객관적 진리'를 수납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자유주의 신학과 진리상대주의·진리주관주의에 바탕을 둔 종교다원주의와 만인보편구원주의를 버린다. 예수 믿지 않는 유태인, 무슬림, 미지의 신을 찾는 자들, 양심에 따라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주어진다고 믿는 정박지 없는 신학을 버린다. 예수만이 그리스도이시며, 그분만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임을 고백한다.
"내가 누구를 보낼 것인가?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사 6:8)".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믿지 않는 분의 이름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또 들어보지도 못한 분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말씀을 전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롬 10:13-14)?"
예수 구원의 도리를 전하는 복음전도자가 필요하다. 하나님은 지금도 일할 자를 찾고 계신다.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책임을 배제하지 않으신다. 복음이 전해질 때 성령의 구원 역사가 일어난다. 신학교 입학을 고려하는 계절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고 있는가? 하나님이 당신을 복음전도자, 복음전도 특공대원으로 부르시지 않는가?
/최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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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신이 못내 그리운 시절
'성서신앙'으로 '민족구원' 갈망한 선각자
김명곤
군대에서 제대한 지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았던 1980년대 초, 그때는 우리 땅이 군화발 앞에서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들 정도로 캄캄하고 숨이 턱턱 막히는 상황이 계속되던 때였다.
'중생한 기독교인'으로 5·18을 부끄럽게 비켜서고 난 직후 나는 '우리의 지도자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 땅에서 복음이, 크리스천이, 교회가 무엇이어야 하는가' 따위의 뒷북치기식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광화문의 어느 기독교 서점에서 막 나온 회색빛 표지의 <김교신 인물평전>을 발견했다. 손에 넣자마자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보석은 시간이 지날수록 빛이 나는 것인가. 도서관 한 귀퉁이에서 그 책을 읽으며 가슴이 벅차올랐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 김교신 선생(공개자료)
나는 이미 1970년대 중반 내공이 깊은 것으로 정평이 나 있던 백발성성한 노인들의 성서 연구 모임에 참석해 지나치듯 몇 차례 '김교신'이라는 이름을 주워듣고 있었다. 성경관련 서적을 탐독하고 있던 나는 언젠가 버릇처럼 청계천 고서점을 뒤적이다 누렇게 변한 김교신의 구약 <느헤미야> 강해 단편을 우연히 발견해 읽고 탄성을 내질렀던 기억도 있다. "그 시대에도 이런 강해서를 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이제는 '무교회주의를 비판한 무교회주의자'로 알려져 있는 김교신에 관한 조각 글들이 신문, 잡지와 일반 대학원, 신학대학원 논문들을 통해서 발표되어 제법 많은 사람들이 그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나에게 김교신은 여전히 은밀히 숨겨두고 즐기는 애인 같은 존재다.
복음이 무엇이며, 교회가 무엇인가
멀쩡하던 시절의 김동길 연세대 교수는 한국 근대사에서 존경할 만한 두 인물을 고르라고 한다면 첫 손가락에 김교신을 꼽겠노라고 했다. 지금은 변질됐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두레마을' 김진홍 목사는 한때나마 그의 여러 편의 설교와 글에서 김교신의 조선산 기독 신앙을 깊이 흠모하는 마음을 토하였고, 어느 미주 집회에서는 그가 주도하여 발간했던 <성서한국>이 김교신이 전력을 다하여서 발간하였던 <성서조선>에 담긴 신앙 유산을 이어받은 것임을 밝히기도 했다.
성품이 강직하다 하여 '양칼'이라는 별명이 붙여져 있었던 김교신은 눈물이 많은 스승이기도 했다. 그의 눈물에 대한 일화는 무수히 많다. 김교신의 양정학교 제자였던 손기정은 마라톤 동경 예선에서 선두를 달리는 자신을 보고 선도차에서 시종 눈물을 훔치던 스승 김교신의 눈물만 바라보고 뛰어서 끝내는 우승했다고 한다.
그는 새 시대를 열어 나가야 할 조선 학생들이 교실에서 주먹다짐을 하는 장면을 보면서 아무 말 없이 눈물을 흘렸고, 특히 컨닝하는 제자를 뒤에서 지켜보며 장탄식과 함께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아무개는 더럭더럭 내주는 졸업장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하면서 툇자를 놓고 나간 적이 있는데, 그대는 어쩌자고 그 짓을 하고 앉았는고.... 남의 것을 보고 베껴 좋은 끝수를 땄다고 치자. 그런 식으로 학교를 나오고 그런 식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면 협잡꾼밖에 더 되겠는가... 한심한 노릇이로다." 그런 말씀을 하시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리시는 것이었다. (동요작가 윤석중의 <잊을 수 없는 스승>에서)
김교신은 소외당한 소록도인들에게 '문둥아!'라는 '연애편지'를 쓰면서 참회의 눈물을 훔쳤으며, 끝내는 흥남 질소 공장에서 '그리스도의 복음 심장에서' 마지막으로 체험한 '민족' 속에 누웠다. 그는 친구들과 제자들에게 '한국의 예레미야'로 불렸다.
▲ 올릭픽 출전에 앞선 대회에서 손기정이 뛰고 있는 모습. 오른쪽 사진은 달리고 있는 손기정을 보며 김교신이 눈물을 흘리며 소리치고 있는 듯한 장면을 연상시킨다(공개자료)
1902년 함남 함흥에서 태어난 김교신은 1920년 6월 동경 유학 중 결신하여 그곳 성결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으나, 기성교회 지도자들의 타락과 위선에 회의를 느껴 일본의 반전·반제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의 문하에 들어가 신앙 수업을 했다.
그는 1927년 귀국하여 함석헌, 송두용, 유석동, 정상훈, 양인성 등과 함께 <성서 조선>을 창간, 1930년 주필로 편집, 발행을 책임지면서 심혈을 기울였고 중세기 수도승 같은 경건 생활을 계속했다.
"아, 전멸은 면했나보다"
이어 김교신은 1924년 <성서조선> 158호에 실린 권두언 '조와'(죽은 개구리를 애도함)라는 글의 마지막 문장에서 살아남은 한 마리의 개구리를 묘사하여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라고 썼는데, 이 표현이 민족의 부활을 암시하고 있다 하여 폐간과 함께 피검, 함석헌, 유달영 등 13인과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1944년에는 흥남 질소회사에 입사하여 노무자의 복리를 위해 진력하며 발진티프스 환자들을 돌보다가 감염되어 이듬해 4월 25일 해방을 4개월여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났다. 여기 함께 일했던 외과의사 안상득 앞에서 숨지기 전 힘없이 그가 토한 마지막 말을 적어본다.
"안 의사, 나 언제 퇴원하여 공장으로 갈 수 있습니까…. 나 40 평생에 처음으로 공장에서 민족을 내 체온 속에서 만나보았소…. 이 백성은 참 착한 백성입니다. 그리고 불쌍한 민족입니다. 그들에게는 빵보다도 따뜻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이제 누가 그들을 불쌍한 무리로 만들었냐고 묻기 전에 이제 누가 그들을 도와 줄 수 있느냐가 더 급한 문제로 되었습니다. 안 의사, 나와 함께 가서 일합시다. 추수할 때가 왔으나 일꾼이 없습니다. 꼭 갑시다. (김정환 저 <김교신 평전> 중에서)
공장에서 만난 '민족'
김교신에게서 '조선'을 빼고 그의 신앙과 삶을 이해할 수 없다. 한국교회사를 쓴 민경배는 "김교신의 신앙고백은 진리에 대한 충성과 함께 민족의 얼과 양심의 표현이었다"고 적고 있다.
김교신은 구미 선교사들의 성서 해석과 복음 이해의 유풍을 벗어나서 조선 사람의 다리로 체험되어지고 조선 사람의 심장으로 녹아진 순수한 '조선산 기독교'를 형성하는데 처절한 내적 투쟁을 했던 인물이다. 함석헌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뒤늦게 고난당하는 조선 민중들의 삶의 현장에 뛰어들어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 부여한 섭리사적 존재 이유를 체험하게 되었다.
김정환은 섭리사적 민족의식에 터전한 김교신의 신앙적 몸부림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참새 한 마리라도 하나님의 뜻이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한다. 그렇다면 몇 천 년에 걸쳐 이 땅에 터 잡고 영고성쇠의 역사를 경영해온 우리 민족의 섭리사적 사명은 무엇인가? 이것을 외국의 신학자가 다듬어 줄 것인가? 또 외국의 역사가가 알려줄 것인가? 그게 아니다고 외친 사람이 김교신이었다."
김교신의 삶의 궤적을 추적하다 보면, 기독교 신앙이란 단지 '말의 성찬'과 '깨달음'에 그 궁극이 있지 않다는 것, 총체적 의미로서의 복음(예수의 말씀과 삶)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 창조된 '민족' 속에 들어가 영글게 하는 데 있다는 것을 절로 알게 된다.
그는 개인주의적 이기와 정치적 경박까지도 벗어나 고난당하는 우리 민족의 삶의 현장에서 깊은 영적·도덕적 구원을 기원했다. 김교신이 '성서조선'을 발간하면서 서문으로 쓴 '성서조선의 해'에는 그의 순영적 민족구원의 신앙이 절절이 배어 있다.
"사랑하는 자에게 주고 싶은 것은 한두 가지에 그치지 않는다. 하늘의 별이라도 따 주고 싶으나 인력에는 스스로 한계가 있다. 혹자는 음악을 조선에 주며, 혹자는 문학을 주며, 혹자는 예술을 주어 조선에 꽃을 피우며, 옷을 입히며, 관을 씌울 것이나, 오직 우리는 조선에 성서를 주어 그 골절을 세우며, 그 혈액을 만들고자 한다.
같은 기독교도로서는 혹자는 기도생활의 법렬의 경을 주창하며, 혹자는 영적 체험의 신비세계를 역설하며, 혹자는 신학지식의 조직적 체계를 애지중지 하나, 우리는 성서를 배워 성서를 조선에 주고자 한다. 더 좋은 것을 조선에 주려는 이는 주라. 우리는 다만 성서를 주고자 미력을 다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성서를 조선에, 조선을 성서 위에" (<성서조선> 창간호 '성서조선의 해'에서)
오늘, 김교신이 못내 그리운 이유
▲ <성서조선> 창간 동인 6명. 1927년 2월 촬영한 사진이다. 뒷줄 왼쪽부터 양인성·함석헌, 앞줄 왼쪽부터 류석동·정상훈·김교신·송두용. (출처 <김교신 전집>)
인간의 끝없는 탐욕과 이기심을 정당화 시켜주는 기복주의, 그리고 기복주의의 종착점에 절묘하게 따라 붙여진 '개인구원'에 천착하고 있는 교회들. 타자의 고통에 눈 감은 채 스스로의 게토를 형성하여 집단적 자기도취의 황홀경에 빠져 있는 교회들. 허탄한 성장주의 신화에 들뜨고 정복적 복음주의를 무기로 휘두르며 세상을 지배하려드는 교회들이 허다한 지금. '하나님의 세속도시'로 탈출하여 낮은 자리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작은 자들을 부둥켜안았던 김교신이 그립다.
어느 배에 타고 있는지 조차 가늠하지 못한 채 탈색된 경전에 매달려 '참을 수 없는 구원의 가벼움'으로 즐거워하며, 우상이 불어대는 피리 소리에 자기 암시의 소고로 춤추며 열지어 따라가는 군중들이 허다한 지금. '신 앞에 홀로서기'를 깨우쳐 내고, 운명공동체로서의 이웃과 더불어 인격적 연대를 실천해낸 김교신이 그립다.
'저 높은 곳'의 삶을 '지금, 여기서'의 삶으로 환치하기를 꿈꾸고, 순수 성서신앙을 통해 잃어버린 민족의 골절을 세우고 혈액을 만들어 민족 구원을 꿈꾸었던 김교신. 60년 넘게 남으로 북으로 갈려 있으면서 찢겨진 가슴으로 살아가는 남북 백성들의 구원이 절실한 지금이어서 못내 그가 그립다.
김명곤 / <코리아위클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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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장과 서울에 방문한 첫 개신교 선교사 1883년 10월~12월
부산·원산·제물포·서울 탐사 후 성경 반포…산동 지푸 다우스웨이트 의사
옥성득 sungoak@hotmail.com
지금까지 개신교 선교사 가운데 한국의 서해안을 처음 방문하고 선교한 자는 귀츨라프(1832년 고대도), 평양은 토머스(1866년), 서울은 1884년 6월에 온 매클레이 부부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매클레이가 오기 7개월 전인 1883년 10월부터 6주일간 부산·원산·제물포·서울 등을 탐사하고 많은 성경을 반포한 후, 개항장과 한국 8도와 주요 도시 상황과 개신교 선교 전망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한 스코틀랜드인 선교사가 있었다. 민경배 교수의 <한국 기독교회사>에 언급조차 되지 않는 잊힌 선구자였던 그는 산동반도 지푸항에서 중국내지선교회 소속의 의료 선교사로 활동하던 다우스웨이트(Arthur William Douthwaite 稻惟德, 1848~1899) 의사였다.
다우스웨이트는 누구?
▲다우스웨이트. 1874년 의료 선교사로 상하이에 도착할 당시.
윌리 다우스웨이트는 1848년 영국 스코틀랜드 쉐필드에서 출생했다. 불우한 가정 형편으로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했으나, 다행히 플리머스형제단 교인인 자형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사환으로 일하기 시작했고 형제단교회에 출석했다. 1868년 "천국에 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는 전도지를 받고 고민하다가 감리교 목사의 설교를 듣고 개종했으며, 곧 거리에 나가 가난한 자들을 돕고 전도하기 시작했다. 1872년 제야에 기도하며 하나님께 생애를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다음 날 YMCA 신년 특강에 온 중국내지선교회의 두 선구자 메도우와 구인네스의 연설을 듣고 중국 선교사로 지원했다. 그 무렵 형제단 신자로 쉐필드회중교회 교인 엘리자베스(릴리)와 사랑하게 되었고, 두 사람은 선교사로 나갈 결심을 하고 결혼했다.
1873년 중국내지선교회(CIM) 선교사로 지원했으며, 6월에 런던에 가서 중국내지선교회 선교사 훈련 대학인 할리대학(Harley College)과 런던병원의학교(London Hospital Me dical School)에서 6개월간 의사 교육을 받았다. 1885년 이전에는 정규 의과대학 과정 없이 실습 위주의 교육이었으며, 해외 의료 선교사로 나갈 경우 6개월~1년 정도 실습이면 족했다. 1874년 할리대학을 마친 4명의 첫 졸업생 네 명이 중국에 파송되었다. 이후 40년간 할리대학은 1,000명 이상의 중국 선교사를 배출하였고, 내지선교회는 중국 최대의 선교회로 성장했다.
다우스웨이트는 그중 한 명의 선구자로 의료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상하이에 도착했다. 이후 1899년까지 25년 간 그는 중국내지선교회 초기 선교사로서 헌신된 전도인으로 살았다. 그러나 8년 동안 안식년 없이 시골 전도 사역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1882년 여름에 산동의 지푸(지금의 烟台)항으로 임지를 옮겼다. 그는 지푸에 CIM의 선교지부를 개척하고, 학교와 진료소를 개설하여 학생들을 가르치고 병자를 고쳤다.
1882년 한영조약이 체결되자, 주일 영국대사 파커스(Harry Parkes) 경은 다우스웨이트에게 한국의 개항장들과 서울을 방문하고 한국 현황과 선교 개시 가능성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 줄 것을 요청했다. 동시에 지푸의 스코틀랜드성서공회 총무 윌리엄슨은 한국 방문 때 성경을 반포해 줄 것을 요청했다. 개척 정신이 강한 다우스웨이트는 1883년 10월부터 6주일 동안 부산·원산·제물포·서울을 방문하면서, 많은 성서와 소책자를 반포했다. 세관에 근무하는 외국인 관리들은 특히 그가 의사였기 때문에 반겨 주었다.
▲ 1883년 10월 방문 사실을 언급하는 보고서 일부(55~56쪽).
한국 상황, 8도 현황 소개하며 선교사 파송 촉구
다우스웨이트는 성탄절이 되기 전 지푸로 돌아왔고, 1884년 초 한국 방문 여행기를 상하이에서 발간되던 새 잡지 에 게재했다. 신문사는 연재물을 모아 소책자인 를 발간했다. 이 보고서는 한국 상황과 8도의 현황을 자세히 소개하면서 선교 개시의 가능성을 알리고, 하루빨리 상주 선교사를 파송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다우스웨이트는 한국 방문 후, 10년 만에 안식년 휴가를 보내기 위해 1884년 8월 런던에 도착했다. 그러나 시간을 낭비하지 않던 그는 안식년 기간을 이용하여 중국내지선교회의 지원을 받아 미국 내쉬빌대학교 의과대학에 가서 1년간 의사 과정을 수료했다. 내쉬빌대학교와 밴더빌트대학교로부터 동시에 의사(MD) 학위와 졸업장을 받고, 1884년 11월 영국으로 돌아와서 바로 중국을 향해 떠났다. 1887년 5월 아내가 장티푸스로 급사하는 비극을 당했으나 이를 잘 극복했다.
1890년 재혼한 후 행복한 의료 선교를 했다. 많은 아편중독자들도 치료했다. 같은 해 상해선교사대회에서 '선교 기관으로서의 의료 사역'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예수는 가르치고 고치고 선포했으나, 지상명령에서는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으므로 의료 선교는 전도에 부수적인 수단이라는 입장이었다.
▲ 1890년대 중국내지선교회 지푸 선교학교와 선교사 주택.
1895년 1월 청일전쟁 당시에는 많은 군인을 치료하여 정부로부터 쌍룡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1896년 2월 아들을 낳은 아내가 사망하자, 어린아이 세 명을 보며 영육이 허약해졌다. 영국 처가에 아이들을 데려갔고, 이들을 동정한 처제가 결혼을 약속했다.
▲ 1895년 1월, 다우스웨이트가 설치한 지푸 적십자병원.
그러나 1899년 그녀는 결혼하기 위해 상하이로 가던 중 싱가포르에서, 10월 5일 지푸에 있던 다우스웨이트가 이질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푸 언덕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다음 문구가 새겨져 있다. (John Owen, "Arthur William Douthwaite (1848–99), Order of the Double Dragon, MD (USA) FRGS: Evangelist, Medical Missionary, Explorer.")
나에게 하나가 아닌 천 개의 생명이 주어진다면,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영광스러운 사역에 그 모두를 쓸 수 있도록 허락받는 최대의 명예를 부탁할 것이다.
다우스웨이트의 전기가 그의 후손들에 의해 2006년에 출판되어 그의 생애가 재조명되었다. (John D. Owen and Diana C. Morgan, Douthwaite of Double Dragon: Portrait of a Medical Missionary--A Life Spent for God and Man. Felixtown, Suffolk, UK: Braiswick, 2006.) 그러나 이 책은 그가 한국을 1884년에 방문했다고 서술하는 등 한국 방문 선교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다루었다. 또한 국내에는 아직 그의 한국 선교 활동이 간단하게 소개되어 있고 그의 보고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선교 활동을 서술하고 평가하기 전에 먼저 기존 역사서에서 대표적인 세 저술을 중심으로 그의 활동이 어떻게 서술되어 있는지 살펴보자.
다우스웨이트의 선교 활동은 기존 역사서에 어떻게 서술돼 있나
백낙준의 <한국 개신교사> 한글판(1973년)은 80~81쪽에서 그의 활동을 초기 "여러 성서공회들의 사업" 항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1883년, 지푸 주재 중국내지선교단 소속 미국인 선교사 A. W. 다우스웨이트(Douthwait)는 스코틀랜드성서공회의 대리인 알렉산더 윌리암슨(Alexander Williamson)의 요청에 따라 한국의 여러 항구를 역방했고, 성서공회 사업의 일환으로 성경을 반포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어디를 역방하였으며 얼마큼 성과를 내었는지, 또 얼마나 오래 여행하였는지 전연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곧 백낙준 박사는 만주의 로스 역본과 일본의 이수정 역본의 번역과 반포에 이어 다우스웨이트가 한국의 여러 항구를 방문하고 한문 성서를 반포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잡지들에 발표된 간단한 정보 외에는 자세한 기록을 찾지 못했다. 때문에 그의 활동을 상술할 수 없었고, 그의 활동에 대한 의미도 부여할 수 없었다.
한편 이 짧은 서술에 작은 오류가 숨어 있다. 첫째, 다우스웨이트는 미국인이 아니라 영국인이었다. 둘째, 박사가 아닌 의사였다. 초기 한국 개신교 문서에서 'Dr.'가 Medical Doctor(Doctor of Medicine)일 경우에도 '박사'로 번역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Dr. Allen을 알렌 박사로, Dr. Philip Jaisohn을 서재필 박사로 번역하는데 알렌 의사, 서재필 의사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다. 1880년대까지 정규 의과대학을 다닌 의사가 별로 없었고, 의대를 다녔더라도 1년 이하가 대부분이었다. 다우스웨이트는 6개월 실습 교육만 받은 의사였기 때문에 의학 '박사'는 아니었다.
민경배 교수의 <한국 기독교회사>(1982년 개정판)는 "이루지 못한 서구 교회의 선교" 항(134~148쪽)에서 귀츨라프, 토머스, 윌리엄슨의 선교 활동을 서술했으나 다우스웨이트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생략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또한 이 세 선교사는 무력 사용과 국가 개입을 정당화하는 강경한 선교 정책을 가지고 있었던 '서구형 교회론'의 소유자로 정교분리를 지향한 미국인 '경건주의와 복음주의' 교파형 교회 선교사들과 대비했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귀츨라프와 토머스는 동아시아에서 경건주의와 복음주의 선교의 선구자들이었다. 다우스웨이트도 중국내지선교회 소속으로 플리머스형제단과 회중교회 계통의 의료 선교사였다.
한국기독교사연구회의 <한국 기독교의 역사 I> (1989년 초판)은 "중국을 통한 한국 선교의 시도" 절(129~140쪽)에서 1) 귀츨라프의 내한, 2) 윌리암슨의 한국 선교 지원, 3) 토마스와 제너럴셔먼호 사건 등 3개 항을 서술하고, 다우스웨이트의 한국 방문은 2)항에서 언급했다. 백낙준과 동일하게 "다우스웨이트의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그는 1883년 말에서 그 이듬해 초의 겨울에 지푸로부터 한국을 방문한 것으로 보인다"고 썼다. <한국 기독교의 역사>는 연구회의 여러 학자들이 나누어 쓴 것인데, 이 부분은 이만열 교수가 쓴 것이다. 그는 백낙준이 이용한 허드슨 테일러의 보고서를 번역하여 인용했다.
우리 선교부의 한 멤버인 다우스웨이트는 윌리암슨 박사의 요청에 따라 스코틀랜드성서공회의 일로 한국을 방문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아주 많은 양의 '하나님의 말씀'을 반포하였다. 그의 반포 활동은 곧 금지되었다. 그러나 금지 조치가 취해지기 전에는 그곳에 있었다. [(July 1884): 98.]
다우스웨이트가 중국내지선교회 소속이었으므로 그 선교회의 월간 잡지인 1884년 1월 호에서 그의 한국 방문을 언급했고, 7월 호에서 위와 같이 말했다. 이 글만 보면 다우스웨이트가 한국에 간 것은 스코들랜드성서공회 윌리엄슨 총무의 요청에 의한 것이고, 주목적은 성서 반포 활동인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이 부분에도 오류가 있다. 첫째, 인용문 번역의 오류이다. "그의 반포활동은 곧 금지되었다. 그러나 금지 조치가 취해지기 전에는 그곳에 있었다"에서 색깔로 표시한 부분은 오역이다. 원문은 "He was informed that it was shortly to be prohibited. He, however, was there before any prohibition had been issued"이다. "그는 반포 활동이 곧 금지된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그는 어떤 금지령이 발표되기 전에 그곳에 있었다"로 번역해야 한다. 둘째, 책에서 다우스웨이트의 방문을 별도로 분리하여 제4항으로 서술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윌리엄슨의 요청으로 1866년 토머스가 평양을 방문한 이후 7년 만에 이루어진 한국 방문이므로, 연대기적으로도 3항의 토머스에 이어서 서술하는 것이 좋고, 중요성을 강조하는 면에서도 더 나은 서술이 될 것이다. 이는 다음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셋째, 다우스웨이트의 방문은 윌리엄슨의 요청뿐만 아니라, 한국 상황 전반을 조사해 달라는 일본 주재 영국 대사 파커스 경의 요청으로 이루어졌다. 후자를 위해 개항장 도시들(부산, 원산, 제물포와 서울)을 방문했으며, 8도의 산업과 천연자원에 대한 자료를 수집 정리하여 보고했다. 다우스웨이트는 두 사람의 부탁을 받고 6주간 탐사 여행을 한 후 종합적으로 선교 사업 개시 시점이 왔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귀츨라프, 윌리엄슨, 토머스에 이은 네 번째 선구적인 방문 선교사로 서술해야 할 것이다. 파커스(1828-1885)는 1865년 일본 대사로 부임했고 그 마지막 해인 1883년 조영조약을 체결하도록 주선한 장본인이었다. 그는 일본 대사직에서 은퇴하면서, 1884년 초대 주한 영국 총영사로 서울에 부임했으며 이듬해 사망했다. 파커스로서는 조약 후 한국 사정을 조사할 필요가 있었다. 다우스웨이트의 탐사는 그의 총영사직 부임을 위한 사전 포석이기도 했다. 제국과 선교가 함께 손잡았던 오랜 역사를 가진 영국이었기에 새로운 일은 아니었다.
넷째, 그의 서울 방문은 1883년 9월에 있었던 그의 교인이 서울 군대의 병사로 파병되면서 성경을 반포하려다가 실패한 사건과도 연관된다. 그 사건으로 인해 다우스웨이트는 한국 선교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883년 청국 병사와 다우스웨이트의 성서 반포
백낙준의 <한국 개신교회사> 80~81쪽은 다우스웨이트의 한국 방문을 간단히 언급한 후, 1902년에 쓴 한국 남감리교회의 창설자인 리드(C. F. Reid) 목사의 보고에 나오는 청군 병사의 전도 활동을 인용했다.
다우스웨이트 박사는 자기가 기른 신자 중 한 사람이 중국인 병사에게 복음서와 전도지를 대어 주었는데, 그가 1883년에 원세개(遠世凱)와 같이 한국에 갔다는 것이다. 리이드 목사는 그 자료의 출처를 밝히지는 않았으나, 중국인 병사가 한국인들에게 기독교 서적을 반포하고 기독교 신앙을 전도하다가 마침내 한국 관헌에게 발각까지 되었다는 사실을 밝혀 말하였다. 관헌들은 그를 죽이려다가 실패하고 겨우 중국으로 쫒아 보냈다.
1882년 7월 임오군란 후 원세개는 청 군대를 제물포와 서울에 상주시키고 점령군 노릇을 했다. 그는 마건상(馬建常)과 마건충(馬建忠)과 묄렌도르프를 파견하여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깊이 간여했다. 마건충은 왕후 시해 사건에 가담한 죄를 물어 대원군을 납치했다. 민 씨 일파의 지지를 받은 시랑 오장경(吳長慶)은 대원군을 천진으로 압송했다. <매천야록>에 의하면 마건충의 후임자가 된 오장경은 청군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훈련도감 군사들이 많이 사는 왕십리 일대 노약자들을 도륙했다. 원세개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으로 청 상인의 특권을 보장하고, 청의 북양대신과 조선 국왕을 동격으로 규정하는 등 조선을 청의 속방으로 취급했다.
이런 상황에서 1883년 9월 서울에 파견된 군인 중에 다우스웨이트의 교인이 있었다. 그는 청의 황제뿐만 아니라 "자신의 구세주를 위해서 싸우기로" 작정하고 한국 관리들에게 증정하기 위해 지푸에서 다우스웨이트로부터 약간의 성경을 받았다. 그러나 서울에서 길에 나가 한문 복음서와 전도 문서를 한국인들에게 반포하다가 바로 체포되었다. 그의 책은 압수되어 왕에게 보내졌다. 왕은 즉각 기독교 문서를 반포하는 자를 체포하라는 칙령을 내렸고, 그 병사는 첫 구금자가 되었다. 보수파 양반들은 효수형에 처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중국군 오 장군(아마도 갑신정변을 진압한 吳兆有)이 나서서 그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 그는 미국 유학을 거치는 동안 기독교로 개종한 자였기 때문에, 그의 중재와 원세개의 도움으로 그 기독교인 병사는 석방되어 산동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옥성득‧이만열, <대한성서공회사 I>, 103; C. F. A. Kenmure, "An Early Colporteur in Korea," Bible Society Monthly Report [March 1896]: 60; Douthwaite, Notes on Corea, 54.) 이 일 후에 다우스웨이트가 서울을 방문하게 되었다.
▲ 1884년 스코틀랜드성서공회 연례 보고서(175~176쪽).
지푸에서 의료 선교사로 활동하던 다우스웨이트는 1883년 스코틀랜드성서공회 중국지부 윌리엄슨 총무가 안식년 휴가로 본국에 가게 되자, 그를 대리해 임시로 총무직을 맡았다. 일본 주재 영국 공사와 윌리엄슨의 부탁을 받은 다우스웨이트는 10월에 다량의 한문 성서와 소책자를 가지고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여행을 통해 한국인들은 우호적이나 관리들은 외국 서적의 유입을 반대하고 철저히 금지하고 있으며, 내륙 여행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부산, 원산, 제물포에서 그는 상당한 양의 성서와 소책자를 반포할 수 있었다. [옥성득‧이만열, <대한성서공회사 I>(대한성서공회, 1994), 102~103.] 다만 서울에서는 반포하지 않기로 했다.(, 56.) 청군 병사 사건의 교훈 때문이었다.
1883년 당시 영국 선교사가 바라본 한국의 모습은?
다우스웨이트는 1883년 12월에 지푸에 돌아온 후, 그 방문기를 에 발표했다. 현재 이 잡지를 구할 수 없어 정확히 언제 몇 회에 걸쳐 발표했는지 알 수 없다. 참고로 이 잡지는 1883년 1월 5일 상하이에서 창간되었다. 그런데 신문사 겸 출판사가 그 기사들을 모아 1884년에 단행본 (Shanghai: Shanghai Mercury Office, 1884)로 발간했다. 81쪽의 소책자였다. 보고서의 내용은 다시 영국 왕립지리학회의 VI (December 1884), 747쪽에 요약되어 실렸다.
▲ 1884년 다우스웨이트의 한국 방문 보고서 표지와 차례.
보고서 차례를 보자. 22페이지까지 부산·원산·인천·서울을 다루고 "한국에 대한 노트"로 1부를 정리한다. 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