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ay : 2025년 04월 11일 (금요일)      로그인      회원가입
Home     헌재 전원일치로 윤석열 대통령 파면 /교회 건물 명의만 소유했던 목사…법원               산불 피해 한국교회 지원 총력 / 고령 교인 10명 중 6명               기독교인 수, 감소 멈추고 안정세 /일제 침략으로 예수 믿었으니 '수고했다'고 말해야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 이마에 십자가 인터뷰 출연               사순절에 대한 흥미로운 5가지 사실/ 트럼프 2기 첫 내각 회의, 목사·장관인 터너의 기도로 시작               국회 앞 25만 인파 “3.1정신으로 체제 전쟁 승리” /인사만 잘 해도 좋은 일이 생깁니다               수십만 시민들 모여 “탄핵 반대” “자유 수호/ 이만희 교주로부터 수년간 성폭행 피해               교회가 농촌 살릴 수 있다 /목회자 10명 중 6명 "노후준비 못하고 있다               정치 양극화 ‘몸살’… 분노·혐오 내려놓고 하나님 뜻 구해야 / 목회자들에게 희망 은퇴 나이 물으니               극심한 절망 속 다시 일어난 비결 끝 아닌 해피엔딩 / “탈북어민 강제북송 문재인,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              

  홈     강대식     강문호     계강현     고신일     곽선희     곽창대     권오선     권오진     김경진     김광일     김기석     김도완     김명혁     김병삼     김삼환     김상복     김상수     김성광     김성수     김승규     김양인     김영훈     김용혁     김원효     김은호     김의식     김재곤     김정호     김진수     김진흥     김창규     김창진     김형익     김홍도     남수연     노창영     노환영     류영모     명설교(A)     명설교(B)     명설교(C)     문기태     박병은     박봉수     박신진     박요한     박일우     박진호     박한응     박형근     배영진     배의신     배진기     배혁     서명성     서진규     손재호     송기성     스데반황     신만교     신현식     안두익     안효관     양인국     양향모     염두철     오주철     오창우     옥한흠     원영대     유기성     유민용     유은호     유장춘     유평교회     이강웅     이건기     이국진     이규현     이기복     이대성     이동원     이동희     이백민     이삼규     이상호     이성우     이성희     이양덕     이영길     이영무     이우수     이윤재     이은규     이익환     이일기     이재철.박영선     이재훈     이정원     이정익     이종철     이준원     이지원     이하준     이한배     이호준     임현수     장부완     전승문     정근두     정오영     정준모     조봉희     조상호     조성노     조영식     조용기     조학환     조향록     주준태     지성래     지용수     차용철     채수일     최동규     최인근     피영민     피종진     하용조     한경직     허창수     홍문수     홍정길.임영수     홍종일     외국목사님     .     괄사(왕)     기도문     (1)새벽     새벽.금언     인물설교     상식/주일     장례,추도.심방     가정설교     영문설교     목회자료/이단     교회규약     예화     성구자료     강해설교     절기설교     창립,전도,헌신,세례.주례사     어린이.중고등부     << 창세기>>     출     레     민     신     수     삿     룻     삼상     삼하     왕상     왕하     대상     대하     스     느     에     욥     시     잠     전도     아     사     렘     애     겔     단     호     욜     암     옵     욘     미     나     합     습     학     슥     말     <<마태복음>>     막     눅     요     행     롬     고전     고후     갈     엡     빌     골     살전     살후     딤전     딤후     딛     몬     히     약     벧전     벧후     요일     요이     요삼     유     <<요한계시록>>     말씀별설교     제목별설교     A)행사,심방     B)행사심방     예수님행적설교     성구단어찾기     이야기성경     설교(틀)구성하기     자주사용하는본문     구약사건     신약사건     구약삽화     신약삽화  

:: 로그인 ::
 ID   
 PASS   
로그인  회원가입
Home
  설교작성법(여기누르면 다나옴)
  설교잘하는 방법(여기누르면 다나옴)
  김기홍 설교학
  동영상.간증자료(여기누르면 다나옴)
  교계 뉴스 ------- (전체보기)
  생활전도(여기누르면 다나옴)
  전도편지
  참고 설교(성구)
  장례식 설교(내부에 많이있음)
  웃음치유와 영업
  기타

설교내용검색

성경 찾기

네이버.다음.구글


검색



Daum


(방송)설교 교회

해외교회사이트

예배와 찬양


목회자 컬럼
  • 교회와신앙칼럼
  • 뉴스미션칼럼
  • 뉴스엔조이칼럼
  • 당당칼럼
  • 기독공보칼럼
  • 기독목회칼럼
  • 크리스천칼럼
  • 타임즈칼럼
  • 김명혁목사
  • 김형준목사
  • 양인순목사
  • 이동원목사
  • 조현삼목사
  • 밤중소리

  • Home

    설교의 새로운 회복: 창조적인 설교를 위하여
    2015-12-16 16:05:58   read : 3232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김운용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주일 예배에 한 60대 중반의 할머니가 들어와 좌석에 힘없이 앉았다. 고개 숙인 그녀의 마음은 몹시 무거웠다. 아직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남편이 교회에 가는 것을 못마땅해하며 던진 몇 마디의 욕설이 아직도 그녀의 귀에 생생했다.

    “들어올 생각 말고 아예 그놈의 교회에 가서 살지 그래!” 늘 들어온 소리였지만 오늘은 유난히 마음이 상했다. 오늘따라 온몸은 쑤시고 천근 만근이어서 너무 힘이 들었다. 그녀는 추운 겨울이 정말 싫었다.

    날씨가 추워지면 신경통으로 안 아픈 곳이 없기 때문이다. 기름 값이 많이 올라서 보일러도 마음놓고 돌릴 수 없고, 빠듯한 생활비로 보내야 하는 겨울은 힘들기만 했다. 신앙이 아니었으면 지금껏 버텨올 수 없었을 것이다.

    목사님이 강단에 올라왔을 때 그녀는 정말 갈급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은 너무 힘이 들고 몸도 마음도 많이 아파요. 오늘 목사님을 통해서 특별히 저에게 말씀 좀 해 주세요. 전 지금 말씀이 필요합니다!” 그 날 설교 본문은 창세기 9장이었다.

    창세기 강해 시리즈 스물두 번째 말씀이었고, 제목은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시다>였다. 말씀의 개요를 따라 설교해 가시는 목사님은 그의 해박한 원어와 성경 지식을 과시하듯이 그의 대지들을 따라 설명해 가셨다: 1) 나타난 피조 세계의 모습(1-3절), 2) 주요한 심판(4-7절), 3) 약속된 언약(8-17절)…….

    교인들 몇 사람은 의무감으로 주보 뒷면에 이러한 설교의 개요를 받아 적고 있었다. 그녀는 실망이 되어 한숨이 나왔다. “지난 주와 또 비슷한 타령이군!” 그녀는 지긋이 눈을 감고 등을 좌석에 가만히 기댔다. 차라리 아침에 읽었던 시편의 말씀이나 계속 읽어 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다음 주일 목사님이 출타하신 후 남미 안데스 산맥 인근에서 오랫동안 사역하다가 은퇴하신 선교사님이 설교를 맡으셨다. 공교롭게 그가 택한 설교본문도 창세기 9장이었다. 설교 제목은 <언제나 무지개를 찾으라>였다. 제목부터 뭔가 끌리는 데가 있었다.

    그는 선교지의 어느 산중에서 경험했던 혹독한 비바람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설교를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 인생에 닥치는 비바람에 대해 언급했다. “비바람은 우리 인생의 한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그런 방식으로 진행되게 만드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고난으로 가득한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 가지 비결을 터득했는데, 오늘도 나는 큰 도움을 얻고 있습니다: ‘언제나 무지개를 찾으라!’세상은 무지개 저편 어딘가를 노래하기도 하고 어려운 일 가운데서도 인생의 밝은 면을 생각하라고 충고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것보다도 훨씬 더 좋은 것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에서 무지개를 보았던 사람을 만나본 적이 있습니까?” 그 설교자는 노아를 폭풍우 후에(after) 무지개를 보았던 사람으로 소개하였다. “어쩌면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은 지금 비바람 한가운데를 지나고 계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 안타까움 속에서 ‘주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시며 돌보시는 것일까?’ 의심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을 신뢰하십시오. 언젠가 무지개를 보게 되면, 주님께서 얼마나 놀랍게 그 폭풍우 속에서 나를 돌보셨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자는 에스겔 1장에 나오는 에스겔이 살던 암울한 시대에 대해 언급하면서, 에스겔은 폭풍우 그 한가운데서 어떻게 무지개를 볼 수 있었는가를 말씀했다.

    “바벨론에 포로로 붙잡혀 갔던 때였고,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모두 파괴된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의 때에도 하나님은 보좌에 계신 분이심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폭풍우가 몰아쳐 올 때 눈을 감고 그것을 외면한다고 해서 그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그 한가운데서도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의 다스리심의 무지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지개는 바로 비바람 한가운데도 있습니다.”

    “노아가 폭풍우 이후에(after) 무지개를 봤고, 에스겔은 폭풍우 한가운데서(in the midst of) 무지개를 보았다면 사도 요한은 폭풍우 이전에(before) 무지개를 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것도 무지개의 일부분만 본 것이 아니라 아예 무지개의 전체 원을 보았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이 보좌에 높이 앉아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분이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보좌에 계신 예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는 것을 그가 발견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천국에 이를 때까지는 우리의 삶 속에 늘 폭풍우가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 그 때에는 모든 폭풍우는 그치겠지요. 그렇습니다. 인생 가운데 폭풍우는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는 맙시다. 왜냐 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폭풍우 가운데서도 언제나 무지개를 찾으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합시다.

    어느 때는 폭풍우가 지나고 나면 무지개를 보여 주시기도 하실 것이고, 어느 때는 폭풍우 한가운데서 무지개를 보여 주시기도 하실 것입니다. 또는 폭풍우 이전에 보여 주시기도 하십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놓치지 않으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절뚝거리며 느릿느릿 집으로 돌아가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오랜 가뭄 끝에 단비를 맞은 것과 같은 기분, 마음 가득 차 오르는 기쁨과 만족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집에 가서 남편을 만나는 일도 겁이 안 나고 추운 겨울도 두렵지 않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도대체 무엇이 일어난 것일까? 이 설교자의 설교는 무엇이 달랐던 것인가?

    이것은 웨렌 워어스비(Warren Wiersbe)가 그의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이야기이다.1) 동일한 설교본문, 동일한 회중들, 동일한 교회에서 주어진 설교였는데, 무엇이 그 결과를 그렇게도 달라지게 한 것일까? 한 설교자는 말씀의 능력은커녕 오히려 마음의 상처만 안겨 돌려보내는데, 어떻게 한 설교자는 영적인 자양분을 공급해서 그들로 하여금 전사(戰士)와 같이 세상을 향해 용감하게 나가게 하는가?

    소위 “성경적으로” 설교를 잘 준비해서 전하는데도 아무런 영적인 흡족함을 갖지 못하였는데, 어떻게 한 설교자는 성도들에게 새 힘을 공급해 주었으며 깨달은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결심과 용기를 북돋아줄 수 있었을까?

    “강단에서 흐느적거리는 해골”

    성도들은 왜 그 설교가 의미 없고 지루한가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설명하지는 못한다 해도 그 설교가 지루하고 나와는 상관없는 말씀들이며, 별다른 의미를 주지 못하는 말씀이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하게 안다. 설교자들이 자기의 설교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지 못하며, 그것을 새롭게 하려는 열망도 없고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다는 점이 큰 문제로 대두된다.

    또한 나의 설교를 듣는 회중들이 어떠한 느낌을 가지고 나아가는지에 대해서도 별로 관심이 없다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고개를 숙이고 있거나 다른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회중들, 생기 잃은 눈빛으로 허공을 주시하고 있거나 아무런 기대감도 없이 시간을 때우고 있는 설교 현장을 설교자들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설교에는 언제나 두 가지 가능성이 공존하는데, 심령을 살릴 수 있는 가능성과 죽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소생시킬(revive) 수도 있지만 영혼을 시들게 할 수도 있다. 마치 태양 빛이 생명력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일사병을 가져다주기도 하는 것과도 같다.

    그래서 E. M. 바운즈는 “설교는 영적 생명을 심고 기르기 위해 하나님께서 정하신 위대한 제도”라고 주장한다.2) 제대로 실행하면 그 혜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지만 잘못 실행하게 되면 그 결과로 오는 피해는 그 어떤 악이 자행되는 것보다 더 크게 될 것임을 경고한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과 영적 자양분을 공급하시기 위해 친히 세우신 이 제도를 위협하고 무기력하게 하는 많은 요소들로 둘러쌓여 있다. 그러므로 설교를 새롭게 하려는 설교자의 간절한 노력 없이는 오늘의 설교는 당시로는 최첨단 장비를 갖추고 있었던 호화 여객선이었으나 빙산에 부딪혀 힘없이 침몰하고 말았던 “타이타닉 호”와 같이 될 수도 있다.

    혹자는 오늘의 설교상황을 가리켜 “강단에서 흐느적거리는 해골, 회중석에는 쓰러져 있는 송장들”이라는 충격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3) 너무 냉소적이고 부정적인 생각이라고 던져 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현상들이 오늘의 설교 현장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음을 감안할 때 그 표현만으로도 섬뜩함을 갖게 한다.

    피땀을 쏟아 열심히 준비한 설교인데, 아무런 감동과 생명의 기운도 전하지 못하는 마른 뼈와 같은 설교자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생명력이 넘치는 말씀이 되기보다는 메말라 버린 메시지로 다가가기에, 회중들에게 어떤 생기도 전하지 못해 메마른 심령으로 죽어가게 한다면 “설교자를 세우신 주인” 앞에 얼마나 죄송한 일인가? 틀림없이 성경의 말씀들을 외치는데, 왜 저들은 넘어져 있다는 말인가?

    그냥 설교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회중들에게 말씀이 “들려지게” 설교해야만 생명의 역사는 가능하게 된다. 아무리 깊은 연구를 통해서 준비된 설교라고 하더라도 오늘의 회중들이 그 말씀의 귀를 닫아 버린다면 거기에서 우리는 어떤 말씀의 “기적”도 경험할 수 없게 된다.

    설교의 영광은 얼마나 놀라운 것이며, 또한 그것이 미치는 영향은 얼마나 크고 굉장한 것인가? 오늘도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의 보좌로 서 있기 때문에 그 영광과 신비함에 대해서는 우리의 설명을 초월한다. 오늘도 교회의 설교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현존하시며,4) 우리는 그것을 통하여 그분의 부르심을 듣게 되고, 그분의 뜻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디트리히 본훼퍼(Dietrich Bonhoeffer)는 “설교는 교회의 부요(riches)이면서도 그것은 빈곤(poverty)의 이유”라고 주장한다.5) 설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는 형식인데, 그것을 통해 우리 자신들의 정체성(identity)을 찾을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생명을 걸고 그것을 깊이 보존해야 한다. 교회가 그것을 잘 보존하게 되면 부요를 누리게 될 것이지만 그렇지 못하게 되면 강단에서는 해골이 춤추고 있고, 회중석에는 마른 뼈들로 가득한 에스겔 골짜기와 같이 황량한 결핍의 처소가 될 것이다.

    이러한 빈곤의 소리들을 우리는 각처에서 듣게 된다. 마치 물로 넘쳐나는 홍수 때에 정작 마실 물이 부족한 것처럼 설교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는 이때 우리 강단에는 이 빈곤의 소리가 높아가지 않는가를 점검해야 한다.

    루돌프 보렌(Rudolf Boren)은 설교는 행해지고 있지만 “설교의 사건”은 일어나지 않고, 설교자는 많이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희귀하여 오늘날 설교는 의심을 받고 있다고 지적한다.6) 설교라는 제도가 아니라 설교한다는 것 그 자체가 힐문을 당하고 있는 상황임을 간파하는 그의 주장은 우리가 함께 정말 마실 물을 필요로 하는 홍수 때를 살고 있음을 경고해 준다. 지루하고, 아무런 의미도 발견할 수 없고,

    그래서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견디는 설교”의 현장은 오늘 “추운 겨울을 살고 있는” 회중들의 가슴을 더욱 꽁꽁 얼어붙게 한다. 중요한 것은 설교의 곤혹스런 상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작 필요한 것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태”(die ratlosigkeit)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지에 대한 “충고”이다.

    7) 그렇다면 오늘 설교자로 세움을 받은 우리는 오늘 우리의 사역의 현장 속에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지 않기 위하여 무엇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인가?

    “보다 좋은 설교”에 대한 관심

    교인들은 보다 좋은 교회 조직이나, 예배 형식, 토론 그룹이나, 건물보다는 언제나 보다 좋은 설교(better preaching)를 원하고 있다.8) 많은 요인이 작용하지만 결국 설교의 문제는 설교자의 문제이다. 더 좋은 설교가 되는데 가장 큰 장애도 설교자 자신에게 있으며, 그 열쇠도 설교자가 가지고 있다.

    ‘나의 설교를 개선하기 위해 설교자로서 내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와 ‘내가 섬기는 교회의 회중들에게 어떻게 하면 보다 좋은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진솔하게 묻고 그것을 위해 깊이 노력하는 것만이 ‘더 좋은 설교’를 이루어 가게 하는 지름길이다. 결국 보다 좋은 설교는 우리가 보다 좋은 설교자가 될 때 가능해진다.

    설교자가 오늘 설교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서 보다 창조적인 설교를 하려는 지속적인 노력이 있느냐가 관건이 된다. 다시 말해서 창조적인 설교는 “영원히 창조를 계속하시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려는 노력으로부터 시작된다. 여기에서 설교자는 오늘 나의 회중들이 복음의 풍요를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설교의 방법론과 원리들에 대해 부단히 추구하고 연구하여야 한다.

    유니온신학대학원의 설교학 교수였던 폴 세어러(Paul Scherer)는 그의 설교학 책에서 “보다 좋은 설교”에 대한 관점을 잘 설명해 준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설교가 가장 독특하고 유일한 사건(the onl  y thing)으로 자리 매김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언제나 ‘보다 좋은 설교’(better preaching)를 추구하였기 때문이다.‘보다 좋은 설교’는 누구나 감당할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완벽하다고 말할 수 있는 ‘좋은 설교’(good preaching)를 할 수 있는 능력은 없을 수도 있고, 그것은 우리의 능력 아주 너머의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보다 좋은 설교’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우리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감당하지 못할 사람은 없다.9)

    더 좋은 설교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기회일 뿐만 아니라 요구이다. 그 어느 누구도 완성을 선언할 수 있는 설교자는 없으며, 설교자는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과 떨림을 가지고 서 있는 영원한 아마추어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프로이기를 거부하는 설교자로 선다는 것은 부단히 “보다 좋은 설교”를 추구하고, 개발해 나가는 창조적인 설교자로 선다는 의미이다. 그의 가슴 속에는 불타는 논리가 있으며, 복음이 전달되는 경로를 가슴 속에 그리고 있는 사람이다. 그의 머리에는 언제나 복음의 영광에 대한 영상을 담고 사는 사람이다.

    설교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불러 세우시는데 가장 “중심적인 수단”(the chief means)이 되어 왔다.10) 설교가 강력하게 행해지던 시대는 영적으로 충만했고 교회도 건강했다. 반면 설교가 무기력하게 진행되던 시대에 교회는 쇠퇴해 갔다.

    기독교의 역사, 특별히 설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설교자들은 강단과 회중석 사이에(between) 존재하는 거룩한 처소에서 그 둘 사이를 중재하는 놀라운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 온 마음을 두고 살았던 존재들이었다. 이 황공스럽기만 한(awesome)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 - 더 좋은 설교를 위해 - 발버둥쳤던 시대에는 강단은 복음의 풍요를 누릴 수 있었으며 설교의 영광의 시대를 경험하였다.

    반면 이러한 노력이 약하거나 희미했던 시대에는 역시 설교의 암흑기와 신앙의 빙하기를 경험하였다. 이러한 점 때문에 교회는 설교를 새롭게 하려는 노력을 계속해 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 시대마다에서 설교의 붕괴를 개탄하면서 그것을 새롭게 하려는 목소리들을 듣게 된다.

    이러한 목소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인 “설교의 리바이벌”(revival)과 말씀의 효과적인 전달을 위한 “방법론의 재구성”(re-forming)에 대한 관심으로 정리될 수 있다.11)

    최근의 설교학의 경향은 오늘의 회중들에게 “들려지기 위한 설교”가 되게 하기 위해 모든 노력들을 경주하고 있다.12) 특히 성경의 본문을 정확하게 연구하여 메시지를 찾아내는 작업, 설교의 적절한 바른 형태(form)의 추구, 설교의 파트너인 회중들에 대한 새로운 이해, 그리고 보다 적절한 말씀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설교의 현장에 대한 깊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지난 40여 년 동안의 설교학의 이론들은 설교가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신비한 인도하심 아래서 본문과 설교자, 회중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어 가도록 하는데 그 강조점을 두고 있다. 급변하는 시대의 가장자리에 서서 “오늘의 청중(listeners)들을 향한 관심의 전환”은 설교학의 형성에 새로운 발견이며, 가치 있는 공헌으로 평가되고 있다.13)

    이러한 흐름의 중심에는 오늘의 회중들이 어떻게 말씀을 듣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보다 좋은 설교”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이러한 관심의 표출로 인해 설교의 새로운 형태(form)가 추구되었고, 설교의 새로운 틀에 대해서 깊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창조적인 설교 방법론을 추구하면서

    설교가 새롭게 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요소는 무엇인가? 설교의 새로운 회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일까? 혹자는 설교자에게서 찾으려 하고, 혹자는 설교의 내용을 강조하기도 하고, 설교의 방법론에서 찾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한 부분에 대한 강조보다는 이 모든 요소들이 함께 어우러지고 균형을 이룰 때 설교의 영광과 능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설교의 새로운 회복을 위해 요구되는 이러한 다양한 요소 중에서 이번 연재에서는 특별히 설교의 방법론들을 추구하고, 시도하게 될 것이다.

    물론 방법론들보다 더욱 중요한 요소들이 많이 있으며, 먼저 고찰되어야 할 설교학적인 원리들도 있다. 여기에서 설교의 새로운 회복을 위하여 방법론을 개관해 보려고 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설교의 형태는 그 설교의 의미와 효과에 있어서 실질적으로 절대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14) 잘 준비된 설교의 내용(content)은 적절한 형태를 따라 균형을 잡아 가며, 배열할 때 그 내용이 효과적으로 전달되게 한다. 마치 음식이 잘 준비된 다음에는 그 음식을 담을 그릇을 찾는 것과 같이 설교자는 성경을 통해 증거할 메시지를 발견한 다음에는 그것을 담을 적절한 그릇으로서 설교의 형태를 찾아야 한다.

    물론 그 음식을 먹는 손님은 그것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을 수도 있는 것처럼 설교를 듣는 회중들도 설교의 형태에 대해서는 깊이 관심을 갖지 않을 수도 있다. 오늘 들었던 설교가 어떤 설교의 형태를 사용했는가를 묻는다면 대부분의 회중들은 그에 대해 정확하게 대답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의 형태는 설교의 흐름과 방향을 결정해 주는 중요한 요소이며, 설교에 있어 틀을 가져다주고, 또한 활력을 갖다주는 요소이다.

    적절한 설교의 형태는 설교의 내용을 적절하게 전달해 준다는 점에서 “복음의 커뮤니케이션을 도와 주며,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러므로 설교의 형태는 “설교에서 무엇을 말하고 행할 것인가와 무엇을 계속 연결시킬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한 조직적인 계획”이기 때문에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는다.15)

    둘째로는 그 동안 한국교회 설교자들은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다양성보다는 어느 한 설교 형태에 고착되어 왔기 때문이다. 어떤 설교자들은 언제나 대지설교 형태만, 어떤 설교자는 언제나 강해설교 형태만 고집한다. 본문의 특성이나 설교의 내용, 그리고 설교를 듣게 될 청중들이 메시지를 받는 방식은 거의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이 선호하는 방법에만 고착되어 있다.

    설교의 방법론을 강조하는 것은 비신앙적인 것처럼 매도되면서 방법론에 대해서는 애써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이것은 마치 조선시대 후기에 실학을 학문의 축에는 넣어 주려고 하지 않았거나 무시하는 경향과도 맥을 같이 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쓰여진 성경은 다양한 형태들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에는 내러티브, 시, 비유, 편지, 논술적인 교리, 역사, 찬양의 형태 등이 다양하게 사용된다. 성서기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당시대의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이렇게 다양한 양식과 수사학적인 기법을 동원하였다.

    예일대학 교수인 린더 켁(Leander E. Keck)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로마 세계에 복음을 전하면서 히브리 전통과는 다른, 정반대의 질문을 통해 메시지의 핵심에 이르게 하는 연설 방법(diatribe method of communication)을 사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16) 즉 청중들이 궁금해하는 의문사항이 무엇인지를 예견하면서 설교자는 청중들을 위해 대신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해서 대답을 제시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복음의 메시지를 이해하도록 도와 준다.

    그러한 방법은 당시에 스토익 학파의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였던 방법이었는데, 헬라 문화권에 있던 근동 세계는 이러한 방법에 아주 익숙해 있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즐겨 듣는 방법을 사용하여 과감하게 도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은 그가 전하려는 메시지의 내용과 관련하여 청중들의 생각이 보다 깊어질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헬라권의 청중들을 위해 전혀 새로운 방법들을 도입하였다. 반면 예수님은 비유(스토리)를 즐겨 사용하셨는데,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는 그것이 널리 사용되던 히브리적인 커뮤니케이션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히브리적인 방법이 최선이 아님을 감지하였다.

    이와 같이 설교 방법론은 세대, 문화, 집단의 특성에 따라서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으며, 모든 설교가 반드시 따라야할 가장 이상적이고 표준적이며, 반드시 이것이어야만 하는 불변의 형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마치 신데렐라의 유리구두와 같이 그것만 착용하면 모두 왕자비가 되게 하는 절대적인 설교 방법론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은 가능한 한 설교에 있어 다양한 방법론을 따르는 것이 좋다. 왜냐 하면 성경에 나오는 복음의 제시는 시간과 공간, 대상에 따라 아주 다양한 방식을 따르고 있으며, 복음의 특성이 고착된 것이 아니며, 생명력을 가진 유기체(living organism)와 같기 때문이다.

    흔히 설교학에서는 전통적인 설교의 형태와 현대 설교학에서 제시되고 있는 새로운 설교 패러다임에 따른 방법론과 실험적인 방법론들이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설교의 형태들에 대한 장점과 한계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적절하게 병행하는 것은 설교의 새로운 회복을 위한 하나의 시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번 호부터 계속될 본 연재에서는 오늘의 설교 현장에서 다양하게 적용될 수 있는 설교의 창조적인 형태에 대해 고찰하게 될 것이다.

    먼저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한 설교형태”는 주로 1970년대 이후 현대 설교학에서 논의된 설교 방법론에 대해 다루게 될 텐데, 주로 귀납적 설교(inductive preaching), 이야기식 설교(narrative preaching), 전개식 설교(phenomenological move preaching), 이야기 설교(story sermon), 에피소드로 엮어 가는 설교(Conversational Episodial preaching) 등이 그것이다. 두 번째 항목으로는 우리에게 익숙한 방법론들인 “전통적인 패러다임을 통한 설교 형태들”이다.

    여기에서는 주로 분석설교와 강해설교, 대지설교 등이 다루어지게 되며, 세 번째 항목으로는 “실험적인 설교 형태들”이다. 여기에서는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는 영상설교, 스킷 드라마와 같은 형태를 도입하여 행해지는 드라마 설교,

    그리고 찬송을 중심으로 엮어 볼 수 있는 찬송설교, 역할극(role play)이나 인터뷰, 일인칭 설교 기법 등을 활용한 역할극 설교 등을 다루게 될 것이다.17) 설교학을 가르치고 있는 전공 교수들에 의해 집필될 본 연재에서는 각 설교 형태와 관련한 설교학적인 원리들과 설교 준비를 위한 지침, 그리고 설교의 실제 등을 포함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창조적인 설교에 대한 시도의 가장 근본적인 목적은 오늘의 회중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효과적으로 들려 주기 위함이다. 설교자의 임무는 말씀에 대해 익숙하게 느끼면서 새로움을 느끼지 못하면서 둔해진(dull) 청중들의 귀에 말씀이 들려지게 하는 것에 민감해지는 것(sharpen)이다.18)

    그러나 이러한 노력과 함께 설교자는, 유니온신학대학원의 설교학 교수였던 엘리자베스 악트마이어(Elizabeth Achtemeier)가 주장한 대로, “창조적인 설교가 창조적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창조적이시며 오늘도 계속하여 재창조하시는(re-creating)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 때문”19)임을 고백해야 한다.

    창조적인 설교의 힘은 설교자의 말이나 어떤 방법론적인 시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수면을 운행하시며 혼돈의 세계를 하나님의 질서의 세계로 바꾸셨던 성령님의 역사로만 가능한 것임을 함께 고백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시도들은 설교의 모든 것이 충족되는 필요충분조건일 수는 없으며, 이것은 우리에게 복음을 위임하신 우리 주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려는 설교자들이 주님께 드리는 오병이어라는 사실도 함께 기억되어야 한다.

    우리가 효과적인 복음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연구하고, 설교자로서 자신의 모습을 가다듬으면서(ethos) 기도하고, 또한 복음을 위해 자기 드림의 헌신을 계속하면서 열정을 가지고(pathos)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를 위해 온 마음을 두고 일한다면 이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의 말씀의 기적을 위한 하나님의 동역자(coworker)들로 힘있게 사용하실 것이다.

    목회자들에게 있어 이것보다 더 소중한 목적(purpose)이 없음을 알고 하나님이 위임하신 사역에 충실할 때, 과거 찬란했던 설교의 영광의 시대에서와 같이 오늘에도 그렇게 일하실 것이다.


    1) Warren W. Wiersbe, Preaching and Teaching with Imagination: The Quest for Biblical Ministry(Wheaton: Victor Books, 1994), 57-59.
    2) Edward M. Bounds, Prayer, 김원주 역, 『기도 I』(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0), 22.
    3) Wiersbe, Preaching and Teaching with Imagination, 6장 참조.
    4) Dietrich Bonhoeffer, The Cost of Discipleship, rev. ed.(New York: Macmillan, 1959), 201.
    5) Bonhoeffer, Christology, trans. John Bowden(London: Collins, 1966), 52.
    6) Rudolf Boren, Predigtlehre, 박근원 역, 『설교학 원론』(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9), 29-30.
    7) 위의 책, 34.
    8) Helmut Thielicke, The Trouble with the Church: A Call for Renewal, trans. and ed. John W. Doberstein(New York: Harper & Row, 1965), viii.
    9) Paul E. Scherer, For We Have This Treasure(Grand Rapids: Baker, 1943), 22.
    10) Jean-Jacques von Allmen, Preaching and Congregation(Richmond, VA: John Knox Press, 1968), 9.
    11) Richard Lischer, “Introduction: The Promise of Renewal,” in Theories of Preaching: Selected Reading in the Homiletical Tradition, ed. Richard Lischer(Durham, NC: The Lavyrinth Press, 1987), 4-5.
    12) 이러한 경향들에 대해서는 김운용, “왜 설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말하는가?” 「기독교사상」, 통권 495(2000. 3): 98-109; “변화하는 시대를 향한 몸부림,” 「기독교사상」, 통권 497(2000. 5): 132-147을 참조하라.
    13) Beverly Zink-Sawyer, “The Word Purely Preached and Heard: The Listeners and the Homiletical Endeavor,” Interpretation, vol. 51, no. 4(October, 1997): 342.
    14) Thomas G. Long, The Witness of Preaching, 정장복, 김운용 역, 『증언으로서의 설교』(서울: 쿰란출판사, 1998), 190.
    15) 위의 책, 191.
    16) Leander E. Keck, The Bible in the Pulpit(Nashville: Abingdon Press, 1980), 65-66.
    17) 이러한 실험적인 설교는 미국의 설교학계에서는 1970년대 이후로부터 다양하게 시도되었고, 오늘날에 다양한 관점에서 시도되고 있다. 이에 대한 보다 상세한 자료로는 Elizabeth Achtemeier, Creative Preaching: Finding the Words(Nashville: Abingdon Press, 1980), 5장을 참조하라(이 책은 『창조적 설교』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또한 John Killinger, ed., Experimental Preaching(Nashville: Abingdon Press, 1973) 등을 참조하라.
    18) Achtemeier, Creative Preaching, 13.
    19) 위의 책, 11.






    독자 설교

    설교작성하기 (3년 후에는 자동삭제됩니다.)
    이 름 E-mail
    제 목



    프린트하기 기사메일보내기 독자설교


    이전으로
    설교잘하는 방법(여기누르면 다나옴)
    설교는 목사의 무기가 아니다. 하나님 말씀이다
    설교 잘하는 방법 100가지 제안
    설교 잘하는 목사가 되려면
    건강한 교회 성장을 위한 설교의 8가지 특성
    멀티미디어 시대를 위한 효과적 설교 방안:
    목사와 설교
    변화하는 시대, 새롭게 설교하기(I)1)
    새롭게 설교하기는 설교의 신학적 이해에 달려있다1)
    청중이 달라지고 있다: 커뮤니케이션 환경의 변화1)
    청중이 달라지고 있다2: 포스트모던 상황1)
    청중이 달라지고 있다3: 전통 가치관의 변화1)
    설교의 형태가 새로워져야 한다
    설교의 이야기성(Narrativity)이 회복되어야 한다1)
    청중이 듣도록 돕는 설교형태: 귀납적 설교(2)1)
    청중이 듣도록 돕는 설교형태: 귀납적 설교(3)1)
     | Home | 사이트맵 | 설교검색 | 설교전체보기 | 설교쓰기 |___ | 
    Copyright by 본 설교신문 자료를 다른사이트로 무단복사 절대금합니다(추적장치가동)/ 김효자 /사업자번호831-29-0156/서울시강남구도곡로1길14 /통판:서울강남01470/문자로 질문바람010-4394-4414 /E-mail:v919@naver.com   Contact Webma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