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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가, 통합측 ‘요가 참여 금지’ /바울의 어처구니없는 실수 /직통계시자들의 7가지 특징
    2017-09-22 14:50:42   read : 3296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인기 가수 이효리 씨는 4년 전 결혼하며 방송 일을 접고 제주도에서 정착하며 살았다. 그녀가 사는 마을이 ‘소길리’여서 ‘소길댁’으로 불리게 됐는데, 이 씨가 방송에 컴백하면서 시청자들은 그녀의 귀환을 반기면서 여전히 탄력있는 그녀의 모습에 감탄했다. 그녀의 신체 관리 비결은 ‘요가’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때아닌 요가 붐이 일기도 했다.

    이런 때, 한국교회 최대 교단 중 하나인 예장 통합측이 2017년 9월 18일~21일 서울 서초구 온누리교회 양재성전에서 열린 102회 총회에서 요가에 대해 “요가의 기원과 목적 자체가 이방신을 섬기는 종교적 행위일 뿐 아니라 힌두교인으로 되게 하는 수단이다”며 “교회는 요가의 위험성을 철저히 교육해서 성도들이 그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대위는 “요가의 본질적인 철학적, 종교적 의미와 그 정신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며 “가장 인기가 많은 신체 운동에 중점을 두는 '하타 요가'에 깊이 빠져들면 들수록 자연스럽게 정신 수련에 치중하는 ‘라쟈 요가’로 전이되어, 타종교와 맞닿아질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사료된다”고 보고했다. 다음은 통합측의 요가와 관련한 보고서 전문이다.

    요가에 관한 연구 보고서
    Ⅰ. 연구 경위

    강원동노회는 "요가에 대하여 '해도 된다', '해서는 안 된다'는 팽팽하게 맞선 두 가지 의견에 직면하여, "이러한 때에 어떻게 교인을 지도해야 할 것인지 혼란"스럽기에 "요가에 대한 총회의 입장을 명쾌하게 밝혀"달라고 헌의했다. 그리고 본 청원 건이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에서 연구하기로 결의해 조사와 연구가 진행됐다.

    Ⅱ. 연구 보고

    1. 요가라는 용어는 '결합하다'의 파생어이다.

    요가(Yoga)라는 용어는 범어(Sanskrit)로 동사 '결합하다', '함께 연결하다', '묶어두다'라는 의미를 가진 어근(yuj, 유즈)으로부터 파생된 단어이고, 명사로는 '결합', '억제', 그리고 '삼매(三昧, 해탈/결합/합일/전체성/내부로의 흡수/정신의 총체적 집중/열반/초월/무야경)의 뜻을 가진다. 이런 관점에서 요가란 요기(Yogi, 요가 수행자)가 신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 주체와 객체, 마음(정신)과 육체 등의 합일을 목적으로 고대 인도로부터 전해져 온 자아와 우주의 근원을 깨닫는 수행법이다.

    2. 요가의 기원은 고대 인더스 문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요가의 기원은 대략 B.C. 3000년에서 B.C. 2000년경까지 번영했던 인더스 문명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B.C. 3000년 전의 유물에서 요가 수행의 기본 자세인 결가부좌를 한 시바신(힌두교 주요 신들 중에 하나)상이 발견된다. 인도의 종교인 바라문교(힌두교의 전신)나 불교나 힌두교 등은 요가 수행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

    한편, 요가의 수행법은 바라문교의 문헌인 <리그 베다>(B.C. 11-16세기)와 <우파니샤드>(B.C. 13세기)에 나타나 있고, 다른 한편 힌두교화로 인해 모든 계층이 요가에 접근할 수 있도록 구상된 문헌인 <마하바라타>(B.V. 6-7세기)에도 등장한다. 참고로 우리나라 경우 요가는 불교의 전파에 따라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서 삼국시대 때 들어와 전승되고 확산된다.

    3. 요가의 근본 경전은 <요가 수트라>이다.

    A.D. 400-450년경 파탄잘리는 고대로부터 전수된 요가 수행법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체계화하여 요가의 근본 경전인 <요가 수트라>를 편찬한다. 인도 사상사에서 보편적으로 요가의 위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요가 수트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왜냐하면 파탄잘리에 의해 성문화된 고전 요가의 대표작인 <요가 수트라>는 무수한 형태의 비체계적인 대중적 요가와 비브라만교의 요가, 즉 불교의 요가와 자이나교의 요가뿐만 아니라 마술적이고 신비적인 구조를 가진 요가와는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4. 우리나라에서는 '하타 요가'와 '라쟈 요가'가 유행하고 있다.

    요가에는 여덞 가지의 유파가 있다. 이는 다음과 같다. ① 신체 수련에 중점을 두는 '하타 요가', ②마음 작용의 억제를 위한 정신적 수련에 치중하는 '라쟈 요가', ③ 지식 또는 지성적 깨달음을 갈망하는 '지냐나 요가', ④ 선행 의무의 충실한 이행에 몰두하는 '카르마 요가', ⑤ 근원의 소리인 '옴'이라는 주문을 외우는 것에 집중하는 '만트라 요가',

    ⑥ 우주의 최고 신에 대한 종교적 헌신에 몰입하는 '바티크 요가', ⑦ 성적 에너지 승화에 초점을 맞추는 '쿤달리니 요가', ⑧ 정욕 통제에 의한 육신의 해방에 중점을 두는 '탄트라 요가'. 이러한 모든 유파의 공통점은 요가의 본질로서의 마음의 평정함에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하타 요가와 라쟈 요가가 인기가 있는데, 결국 신체 수련인 하타 요가는 정신 수련인 라쟈 요가에서 행해지는 '집중'(集中)과 '명상'(冥想)으로 삼매에 도달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에 해당한다. 물론 현재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는 '하타 요가'와 '라쟈 요가'는 궁극적으로 요가 수트라에 의존한다.

    5. 요가는 철학이요 종교이다.

    ① 요가 학파는 종교적 철학적 체계를 가지고 있다. 종교학자이며 요가 수행가인 미르체아 엘리아데의 저서 <요가>에 따르면, "요가는 철학이요 종교이다. (...) 인도에서는 종교와 철학이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철학 체계는 종교적 의식과 수행이 바탕이 된다." 심지어 요가는 "종교로부터 철학, 심리학, 생리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 걸쳐서 인간의 생활 원리"를 가르친다.

    이처럼 인도에서 요가는 우파니샤드 철학 시대 이후 불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브라만교, 자이나교, 아지비카교, 힌두교, 불교 등)에서 행해진 공통적인 수행법이다. 이처럼 요가는 본질적으로 인도인의 정신생활의 뿌리인 동시에 종교적 실천의 공통된 지주이다. 고대 인도에는 육파 철학이 있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요가 학파'이다. 즉, 이 학파는 육파 철학에서 독립된 파로써 다른 여러 학파의 공통분모를 구성한다. 상술한 <요가 수트라>는 요가 학파의 근본 경전으로써 절대자의 최고선을 인정한다.

    ② 요가는 이른바 범신론적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을 지향한다. 요가 사상은 인도 철학 체계뿐만 아니라 이를 기초로 '해탈'을 얻고자 하는 종교적 수행 방식이다. 요가 수행은 범아일여적인 깨달음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다.

    즉 요가의 목표는 참된 자아인 '아트만'과 우주적인 실재인 '브라흐만'이 하나라고 자각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범아일여의 실현을 성취하는 요가는 종교적인 수행법으로 엊인적인 훈련, 즉 신체적이고 정신적이고 영적인 훈련인 것이다. 결국 요가는 단지 관념적인 사상 체계를 넘어 종교를 포괄하고 있다.

    ③ 이런 측면에서 요가는 건강 증진과 마음의 수양을 위한 단순한 운동이라 말할 수 없다. 요가는 힌두교의 종교의식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는 보편적으로 요가가 종교가 아닌 운동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요가는 종교이기 때문에 힌두교 그 자체라 말할 수 있다.

    요가는 본질적으로 3억 3,000만여 신을 숭배하는 다신교인 힌두교에 근거한다. 결국 요가는 힌두교의 선교 전략으로 사용될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도 철학자이자 불교학자인 정태혁은 "다른 종교를 믿으면서도 요가의 길로 들어갈 수 있다. 오히려 요가를 닦음으로써 불교나 그리스도교, 그 밖의 어떤 종교라도 그 종교의 정신을 더 잘 알게 된다고 할 수 있으니, 요가는 모든 종교적 수행의 근본이 된다고도 할 수 있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6. 요가의 주요 수행법에는 운동법, 호흡법, 명상법 등이 있다.

    요가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8단계의 수행법은 '정신적인 아름다움'(제1단계의 금계[자기 훈련/자제], 제2단계의 권계[심신의 청정/고행], 제5단계의 제감[포기], 제6단계의 집중[응념/종제/정신통일], 제7단계의 명상[정려/깊은 사색/선정], 제8단계의 삼매)와 '육체적 아름다움'(제3단계의 운동법[좌법/체위법], 제4단계의 호흡법[조식법])을 추구한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운동법과 호흡법은 하타 요가에 속하며, 정신 수행법인 제감과 집중과 명상과 삼매 등은 라쟈 요가에 속한다.

    운동법의 기본자세는 결가부좌이며, 호흡법의 근본은 우주의 리듬을 지향하는 리듬 있는 심호흡이다. 물론 요가의 궁극적인 목표인 '해탈'(解脫)의 경제로서의 삼매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집중'과 '명상'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 결과로 요기는 신과의 신비적 합일을 이룸으로써 해탈에 도달하게 된다. 이런 요가 수행법은 '엑스터시'를 전혀 허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요가는 오히려 '엔스타시스'(영혼의 이탈을 통하지 않고 삶의 현실에서 자유와 해탈을 지속시키는 자기 몰입), 즉, 삼매를 그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7. 요가는 신인합일을 목표로 삼는다.

    요가의 목표는 요가를 수행하는 요기들과 "힌두교 신과의 합일"로 간주된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바라보면, 하타 요가의 경우는 분명 힌두교의 시바 신에게 바쳐지는 힌두교인의 종교적인 수행 방법이다. 요가 전문가들은 요기들이 요가의 단순한 동작만 따라해도 그 동작 하나 하나에는 '신인합일'이란 궁극적인 목적을 추구하기 위한 동작의 의미를 가진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래에서 언급될 뉴에이지 운동의 속성인 범신론적인 신비주의에 근거하여 신과 요기의 자아가 하나를 이루는 신인합일이라는 최후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곧 요가의 목표이다. 요가 수행을 통한 대가로 주어지는 천인합일 내지 주객합일의 의미를 내포하는 신인합일은 무아의 세계, 해탈 내지 깨달음의 세계를 지향한다.

    8. 요가 사상은 자력 구원을 주장한다.

    요가학파의 수행법 가운데 최종단계(8단계)인 '삼매'는 주객이 융합된 상태, 즉 일상에서 경험하는 세계와는 다른 고차원적인 세계를 말한다. 이는 요기들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즉 자력으로 구원을 얻는 것으로써 순수 자아가 물질세계로부터 벗어나 절대 경지에 들어갈 수 있는 해탈을 성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요가 사상에 있어서 최대의 공덕은 구원으로써의 해탈을 지칭한다. 요가는 요기 자신에게 닥쳐오는 고행(苦)을 자기 안에서 찾도록 하며 요기 스스로 해결하는 방법을 명시한다.

    이 방법이 곧 요가의 수행법으로서 운동법, 호흡법과 명상법 등이다. 요가의 수행법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결가부좌 자세로 하는 명상의 목적은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와 융합하려는 염원을 달성하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자력 구원으로써의 해탈인 것이다. 요가에서 해탈의 근거, 즉 구원의 근거는 요기 자신이 '밖'에서부터가 아니라 '안'에서 자력으로 자기 관조를 정교화함으로써 참 자아를 발견하는 데 있다. 요기 자신이 스스로 이루는 구원의 순간은 자기 안에 있는 기(氣)와 우주 안에 있는 기가 하나가 되는 해탈의 지점인 신인합일이다.

    9. 예수님을 요가 수행자라고 주장한다.

    어떤 요가 전문가는 예수님께서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기간 동안 하타 요가 수행을 위해 인도의 카슈미르에서 요기의 생활을 했다고 주장한다. 진리의 깨달음을 얻고, 계시와 신통력을 받아 초능력을 발휘하는 예수님이 행하신 신약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은 모두 요가 훈련의 결과라고 요가 전문가는 간주한다. 심지어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조차 요가 수행법이 호흡 조절법을 통해 실제적 죽음이 아닌 심장박동이 잠시 멈춘 깊은 수면이라는 것이다. 이는 요가 명상가인 예수님이 하타 요가를 수행함으로서 육신을 정신적인 성숙을 위한 도구로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10. 요가는 대표적인 뉴에이지 운동이다.

    요가 사상은 "종교적인 신념의 수준으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위협하는 오늘날 가장 도전적인 세계관"으로 체계화되어 있는 인본주의 운동으로서의 '뉴에이지(New Age)' 운동의 일종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을 치명적으로 위협하는 뉴에이지 세계관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요가는 운동법과 호흡법, 그리고 명상법 등으로 육체를 무력하게 하고 요기 안에 내재되어 있는 자아의 능력을 극대화함으로써 '인간이 곧 신이 된다'고 가르친다.

    요가를 수행하는 요기 자신이 신이 되는 것은 요가의 궁극적인 목표인 해탈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만물은 하나'라는 논리로 구성되어 있는 요가 사상의 체계는 일원론적이고 범신론적인 뉴에이지 철학의 토대 위에 세워져 있다. 따라서 요가의 실체의 본질은 개별적 인격의 정체성을 거부하면서 힌두교뿐만 아니라 불교나 자이나교 등에 침투하여 종교혼합주의를 지향하기에 이른다.

    11. 요가는 전형적인 영지주의이다.

    종교의 용광로인 혼합종교주의를 지향하는 요가 사상은 전형적인 영지주의에 몰입되어 있다. 왜냐하면 요가 사상은 본질적으로 물질세계를 부정하는 영지주의에 채색되어 있기 때문이다. 요가의 가르침에 따르면, 인간의 자아가 무지하면 물질세계에 머물 수밖에 없지만, 요가의 수행자인 요기가 다양한 요가 수행법을 통해서 무지를 때뜨려 순수 자아의 깨달음을 경험할 때 비로서 물질세계는 정신세계의 상태 속에 흡수되고, 그와 동시에 현상계의 다양성을 소멸하게 된다.

    한편, 힌두교는 영혼 구원에 대한 세 가지 길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업보를 쌓는 길, 신을 사랑하므로 완전한 복종으로 걷는 헌신의 길, 그리고 신비한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지식의 길이다. 여기에서 요가의 영지주의적인 구원론은 세 번째 길을 의미한다. 영지주의적 수원은 진리의 깨달음을 통한 구원을 뜻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개인의 정신으로서의 '아트만'은 대우주의 정신인 '브라만'에 귀속되어 요기 자신이 대우주 속의 일부라고 깨닫는 순간이 바로 구원의 순간이다. 이런 뜻에서 요가의 다양한 수행법은 깨달음을 추구한다. 요기는 요가를 통해 깨달음의 길을 걷는다.

    12. 요가는 윤회설을 주장한다.

    요가의 궁극적인 목적은 힌두교에서 영원한 '윤회'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일환으로 요기들이 명상을 수련하여 참된 자기 수행을 하게 되면 신인합일, 즉 정신의 영원한 자유에 대한 깨달음인 '해탈'을 경험하는 데 있다. 해탈이란 곡 악과 고행(苦), 특히 윤회의 굴레 속에 같힌 업보(業, 카르마)라는 관념으로 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즉 윤회를 극복하기 위한 "요가는 인간의 영혼이 자유인 해탈을 목표로 한다.(…) 요가는 '해탈'을 얻기 위한 적절한 기법들, 수단들의 총합"인 것이다.

    따라서 요기들의 "궁극적 목표는 진리의 소유가 아니라 해탈, 절대적 자유의 성취이다." 분명한 것은 힌두교에서 끝없는 윤회의 족쇄로부터 진정으로 해방하기 위한 해탈은 요가 수행법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따라서 요가는 단순히 운동, 정신 안정, 스트레스 해소, 다이어트 등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13. 요가의 사상은 연금술과 샤머니즘 사상까지 포괄한다.

    본래 인도의 요가는 연금술적인 요가를 추구한다. 물론 요가와 관련해서 연금술과 회춘과 장생은 상호간 관계는 맺고 있다. 인도에서 생명을 연장하는 수은(水銀)이 '해탈'이라는 지상 목표에 이르는 직접적인 수단이 된다. 연금술에서 얻는 묘약은 탄트라 요가가 추구하는 불명예 상응하고, 연금술과 하타 요가는 긴밀히 연계되어 있다. 게다가 요가의 영향을 받은 불교는 라마교 형태로 북아시아와 시베리아의 샤머니즘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샤머니즘 특유의 엑스터시와 고전 요가의 고유한 삼매를 통한 해탈은 서로 무관하지 않다.

    14. 요가는 심지어 교회와 기독교인의 일상에까지 침투되어 있다.

    ①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요가는 웰빙의 열풍으로 말미암아 심신 수련과 치료요법으로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요가 학원 내지 요가 센터를 비롯하여 백화점 문화 센터, 노인 대학, 구민 복지관, 초등학교(방과 후 학습 시간) 등에서 요가가 유행하고 있다. 또한 요가 명상 학습법을 통해 성적을 향상시키려고 하는 초·중·고등학생들 사이에서 요가는 상당히 인기가 있을 뿐 아니라 대학이나 대학원에서는 요가 명상과 관련된 학과가 생겨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심지어 요가의 침투는 교회와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예외라고 말할 수 없다. 요가 강습을 알리는 광고가 교회 홈페이지에 실리기도 하고, 교회의 문화센터에서 요가 강의가 개설되기도 한다. 덧붙이자면 기독교 계통의 대학조차 요가 과목을 개설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YMCA에서도 요가를 가르치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 가운데 요가 지도자 자격증에 도전하는 사람도 간혹 있다.

    ② 한국 기독교 안에서는 요가에 대해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 기독교는 미국 기독교의 영향을 쉽게 받게 되는데, 미국에서는 이미 기독교인 요기들이 이른바 '크리스천 요가'로서의 '홀리[신성한] 요가'를 수행함에 있어서 만트라 요가에서처럼 '옴'이라는 소리 대신 '아멘'으로 대체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힌두교의 색채를 배제하기 위해 그들은 요가라는 말 대신 '높낮이 팔굽혀펴기'로 변경하여 부른다고 한다. 이러한 영향을 한국 교회가 받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종교가 아닌 단순한 운동으로 부담감 없이 요가를 즐기는 현실에 직면한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에게 과연 요가는 성경적인 방법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Ⅲ. 연구 결론

    1. 우선 요가의 본질적인 철학적, 종교적 의미와 그 정신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사료된다. 구태여 요가라는 이름으로 운동을 할 필요가 있는 것인지, 교회 안에서조차 '크리스천 요가'라는 이름을 붙여 운동을 해야 하는 것인지, 기독교와 요가가 어울릴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되물어야 할 것이다. 크리스천 요가를 쉽게 허용하게 되면, 크리스천 쿵푸, 크리스천 점성술, 크리스천 최면술, 크리스천 염불, 크리스천 기운동, 크리스천 마음 수련, 크리스천 강신술, 크리스천 초월명상 등도 허용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다.

    2. 비록 요가가 건강에 미치는 효과를 감안하더라도 교회가 요가를 받아들이기에는 위험한 요소가 많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신체 운동에 중점을 두는 '하타 요가'에 깊이 빠져들면 들수록 자연스럽게 정신 수련에 치중하는 ‘라쟈 요가’로 전이되어, 타종교와 맞닿아질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사료된다.

    3. 상술한 바와 같이 본질적인 요가의 측면에서 바라보면, 요가는 철학과 종교이며, 기독교 세계관에 전적으로 배치되는 뉴에이지 운동의 세계관에 근거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아니라 자력 구원을 주장하며, 범신론적 신비주의에 의한 신인합일 사상을 추구하며, 업보로부터 해탈하는 윤회사상을 가르치며, 교회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문제가 되어왔던 영지주의 사상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에 요가는 비성경적이고 비기독교적인 것으로써 기독교와 교회를 위협하고 있다고 사료된다.

    4. 이상을 고려해 볼 때, 요가가 정서 안정, 스트레스 해소, 다이어트, 스트레칭, 우울증 치료 등을 위한 단순한 운동이라 단정하면서 교회가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사료된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요가가 교회 안에 들여오거나, 어떤 형식으로든 요가를 지원하거나 관여해서도 안 된다.

    요가의 기원과 목적 자체가 이방신을 섬기는 종교적 행위일 뿐 아니라 힌두교인으로 되게 하는 수단임을 감안하면, 교회는 요가의 위험성을 철저히 교육해서 성도들이 그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요가라는 용어 자체가 힌두교의 간접 전도를 초래하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는 요가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교회는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혼란을 초래할 수 있는 요가의 참여를 금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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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통계시자들의 7가지 특징

    정윤석 | unique44@paran.com
    기자는 취재 현장에서 수많은 직통계시자들을 만나왔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피해를 입었다는 사람들도 수없이 만났다. 기자(교회와신앙 www.amennews.com)가 만난 피해자 중에는 “하나님께서 강남의 압구정 현대아파트를 바치라고 했다”는 직통계시자의 말을 듣고 4억을 헌금한 사람도 있었다. 경기도 과천의 고가의 아파트를 팔아서 6억원을 헌금한 사람도 만나봤다. 모두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거나 하나님을 직접 만나서 환상과 계시를 보고 듣는다는 직통계시자들을 만난 후 생긴 현상이었다.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절대로 만나서는 안 될 사람들이 직통계시자들이다. 과연 그들의 특징이 무엇일까? 부디, 아래에 언급한 유형의 사람들을 평생 만나지 마시고, 혹시 만나시더라도 ‘아 직통계시자구나’라고 생각하며 발길을 끊으셨으면 좋겠다.

    1. 직통계시자는 주로 직접 하나님을 만나서 특정 내용이나 사건에 대해 직접 보고, 들었다고 말한다. 자신이 받은 직통계시의 내용에는 타인의 경조사, 생로병사·생사화복 등도 포함된다.

    2. 직통계시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전달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신도들에게 절대 복종 이외의 선택이 없도록 몰아간다.

    3.직통계시자는 자신의 말을 거절하거나 듣지 않으면 성령 훼방하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사람이라는 정죄를 한다. 직통계시자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공포와 두려움을 신도들에게 심어준다.


    4. 직통계시자는 처음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주는 ‘계시의 전달자’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스스로 ‘계시자’가 돼 간다. 직통계시자는 늘 하나님께서 자신을 직접 만나서 뜻과 음성을 들려주신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 따라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교만과 독선에 빠지게 되며 ‘계시의 전달자’와 ‘계시자’의 경계를 허물어 뜨리게 된다.

    5. 직통계시자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받은 계시를 합리화하고 수단화하는 방법으로서 성경을 이용한다.

    6. 직통계시자는 진지하고 지속적으로 성경을 연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분의 음성을 늘, 직접 들려주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직통계시자 중에는 설교를 해야 할 때조차 설교를 준비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성령이 직접 할 말을 지도하시니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는 착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7. 직통계시자의 최종 목적은 자기 뱃속을 채우는 것이다. 따라서 늘 거액의 헌금, 돈을 요구한다. 상대가 가난한지, 부유한지의 사정은 봐주지 않는다. 헌금을 바치지 않을 경우에도 ‘저주’가 내려진다고 협박한다.

    위와 같은 직통계시자를 따르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 신도들이 처음엔 “저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한다”고 생각한다. 신도들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직통계시자라는 ‘사람’에 얽매이는 자신을 발견하고 그의 눈치를 보는 삶, 예속된 삶을 살게 된다. 갈수록 인격적 결단력은 약해지고 삶이 피폐해진다.

    몇 해 전 ‘보스와 리더의 차이’라는 짧막한 글이 관심을 끌었던 적이 있다. 예를 들면 “보스는 '가라'고 말한다. 리더는 '가자'고 말한다” 등의 내용이다. 회사에서는 물론이고 교회에서도 자신의 유형이 보스인지 리더인지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곤 했다. 한번쯤 생각해봐도 좋을 듯하다. ‘내가 따르는 지도자가 직통계시자는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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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의 어처구니없는 실수

    최재석 | jschoi@cnu.ac.kr

    바울이 창세기 12-20장을 잘못 읽었다고 하면 많은 사람이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항의하려 할 것이다. 그 위대한 바울이 그런 실수를 하다니 불경스러운 소리 하지 말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싶을 것이다. 그들의 태도는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그 위대한 사도 바울이 창세기 12-20장을 잘못 읽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창세기 12-20장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데, 바울은 그가 의심 없이 믿었다고 말했다. 신학자들이 그의 이 분명한 실수를 읽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러나 그 실수가 그의 신학의 기반을 흔들 만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을 보고도 눈감아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로마 속담이 말해주듯이 사람은 실수하는 존재다.

    그리고 히브리서 저자 역시 바울과 같은 종류의 실수를 했기 때문에 히브리서 저자의 실수도 부가적으로 다루려고 한다. 필자는 바울과 히브리서 저자의 실수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는 그들이 왜 그런 실수를 했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보고, 우리가 그들의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을 길을 찾아보려고 한다. 반면교사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창세기 18:12) Sarah Hears and Laughs, circa 1896–1902, by James Jacques Joseph Tissot (French, 1836-1902)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은 아브라함 내외

    창세기 12-20장에서 보면, 하나님이 단산한 사라의 몸을 통해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을 때, 아브라함 내외는 그 약속을 믿지 않았다. 하나님이 사라의 몸에서 낳은 아들의 자손들을 창대케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도 아브라함은 애굽에 갔을 때 바로에게 사라를 내어주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두 번째 약속하신 후에도 그는 사라가 아들을 낳을 수 있으리라고 믿지 않았기 때문에, 사라가 시키는 대로 하갈과 동침하고 하갈이 임신하자 그녀를 내어 쫓았다.

    하나님이 아브라함 내외에게 그들의 자손을 번성하게 해주시겠다고 세 번째 말씀하시자 아브라함은 그런 말씀은 그만하시라고 생각하면서 웃었다. 창세기 18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찾아와서 사라가 아이를 잉태할 것이라고 말하자, 그 말을 엿듣고 있던 사라도 속으로 웃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네 번째 약속하신 후에도 아브라함은 사라를 누이라고 말하면서 아비멜렉에게 사라를 내어주었다. 1차 약속 후에 그가 사라를 바로에게 내어주었는데, 4차 약속 후에 아브라함이 다시 사라를 딴 남자에게 내어준 것을 보면, 소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그가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집스럽게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그의 고향을 떠난 것을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은 사람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아브라함 내외는 그들이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만은 한사코 믿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17:17)라고 생각하며 웃었다.

    창세기 12-15장을 잘못 읽은 바울과 히브리서 저자

    창세기에서 보면 이렇게 아브라함 내외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는데, 바울은 그들이 그 약속을 의심 없이 믿었다고 말했다. 바울은 로마서 4장 18절에서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라고 기록했다. 그리고 이어서 아브라함이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4:19)라고 말했다. 그 다음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것을 확신하였으니”(4:20-21)라고 언급하고 나서 하나님이 그의 확고한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결론지었다.

    많은 사람이 성경의 말씀은 진리라고 믿을 뿐 아니라, 특히 바울의 말에 오류가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 없이 믿었다고 하는 로마서 4장 18-22절에 기록된 바울의 언급을 창세기 12-20장의 내용과 대조해 보면 바울의 말이 창세기의 내용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사도 중의 사도라고 하는 바울이 어떻게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했단 말인가!

    히브리서 저자도 11장에서 사라가 의심 없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고 말했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11:11) 개역개정 성경의 ‘미쁘신’을 표준새번역 성경에서는 ‘신실하신’으로, NIV에서는 ‘faithful’로 번역했다. 히브리서 저자는 사라가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을 신실한 분으로 믿었기 때문에, 달리 말하면, 아들을 낳게 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 없이 믿었기 때문에 아들을 낳을 수 있었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사라는 하나님의 사자가 자기에게 아들을 주시리라고 하는 말을 엿듣고는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창 18:12)라고 생각하면서 속으로 웃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의 약속을 믿지 않는 사라의 생각을 간파하시고 “왜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18:13)라고 사라를 질책하셨다. 사라가 그 말씀을 듣고는 웃지 않았다고 말하자, 하나님께서는 왜 거짓말을 하느냐고 그녀를 다그치기까지 하셨다.

    히브리서의 저자 역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은 아브라함 내외를 그 약속을 믿은 사람으로 바꾸어 놓는 실수를 한 것이다. 히브리서는 로마서보다 10여년 후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히브리서 저자가 로마서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혹시 히브리서 저자가 로마서를 읽지 않았다면, 그 역시 바울처럼 창세기 12-20장 전체를 믿음이라는 안경을 쓰고 읽은 사람이다. 왜 성경 저자들이 이렇게 번갈아 가면서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했단 말인가.

    그들이 그렇게 잘못 읽은 이유

    창세기 15장 6절에는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이 아브람의 믿음에 대한 언급이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고향을 떠나고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천지의 주재라고 고백한 것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렇게 아브람은 하나님을 믿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고쳐주시면서 그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을 때 하나님의 그 약속은 믿지 못했다. 그런데 바울은 창세기 15장 6절의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었다는 언급을 아브라함 내외가 그들에게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까지도 믿은 것으로 확대 해석했다. 왜 그랬을까?

    바울이 이렇게 확대 해석한 이유는 먼저 그가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다는 이신칭의의 논리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로마서 4장 3절에서 창세기 15장 6절을 인용한 것을 보면, 그가 창세기 15장 6절에 기록된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를 읽고서 유레카라고 외쳤을 것으로 보인다. 이 구절의 내용은 그가 내세우려는 이신칭의 논리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아브라함을 이신칭의를 구현한 전형적인 인물이라고 믿었다.

    바울이 그렇게 확대 해석한 데에는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는 생각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언급한 창세기 15장 6절에 이어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한 22장에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릴 만큼 철저한 믿음의 사람이라는 근거를 발견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는 생각은 이제 그의 마음에 확신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믿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아브라함이야 말로 철저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 없이 믿은 사람이라고, 아브라함 내외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인해서 의롭다고 인정받았고, 그 결과 복을 받은 것이라고 확신했다. 아브라함은 철저한 믿음의 사람이라는 확신, 이 흔들리지 않는 선입견으로 인해서, 15-20장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다는 기록이 한 번도 아니고 반복적으로 언급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바울의 눈에는 그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바울과 히브리서 저자는 이신칭의의 논리에 따라 아브라함이 아들을 낳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그의 믿음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이 이삭을 얻기까지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계속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이삭을 낳은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 없이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믿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었다. 여기서 믿음에 매혹된 바울과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이 부분에서 드러난다는 것을 읽지 못했다.

    우리가 바울과 히브리서 저자의 오독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글을 읽을 때 선입견을 가지고 시작하면 그 글 전체가 온통 그 선입견으로 채색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 문제점은 성경을 교리 중심으로 읽는 ‘교리적 읽기’에서 흔히 나타난다. 어떤 교리를 앞세워서 성경을 읽으면 그 교리를 뒷받침하는 구절만 보이고,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 구절들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선입견을 가지고 글을 읽으면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게 된다.

    마치면서

    세상사를 올바로 판단하려면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선입견이 강한 사람은 자기의 생각에 맞는 것은 무조건 좋다고 말하고, 맞지 않으면 무조건 나쁘다고 말한다. 그런 사람에게서는 객관적인 판단을 기대할 수 없다. 특히 글을 읽을 때 중요한 것은 선입견을 버리고 전체를 있는 그대로,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려는 노력이다. 이것은 글 읽기의 기본이다. 그렇게 노력하지 않으면, 우리는 성경은 물론 어떤 글이라도 올바르게 읽지 못한다.

    위대한 개혁자 루터까지도 로마서에서 이신칭의를 읽고 그것에 매료되어 실수를 했다. 그는 믿음에 치중한 나머지 바울의 서신서들에서 믿음에 관한 부분에만 주목하고 그 서신서들에 나오는 삶에 대한 부분은 외면했다. 로마서의 경우 1-11장은 믿음에 대한 기록이지만 12-16장은 삶에 관한 기록이다. 갈라디아서와 에베소서도 전반부에서는 믿음에 대해서 말하고 후반부에서는 삶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런데 루터는 그 후반부의 삶에 관한 구절들은 무시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루터는 행위를 중시하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라고 말했고, 야고보서와 요한계시록은 정경에서 제외시켜야 한다고 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예수님 자신이 나를 본받으라고 하시면서 행함을 강조한 복음서의 말씀에 대해서도 주목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루터는 자기의 주장에 맞지 않는 것은 제외하고 맞는 것만을 골라서 ‘정경 안의 정경’을 정하는 오류를 범했다.

    루터는 믿음을 내세워 교리적 해석을 하다가 성경을 편향적으로 읽었고, 바울과 히브리서 저자의 경우에는 믿음을 앞세우다가 아브라함 내외가 의심한 것조차 의심하지 않은 것으로 잘못 읽었다. 한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을 골라서 성경을 읽었고 다른 두 사람은 자기들의 생각에 맞추어서 성경을 읽었다는 차이가 있지만, 그들은 모두 이신칭의라는 선입견을 앞세워서 성경을 읽음으로써 성경을 왜곡하는 실수를 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대부분의 사람이 자기가 보고 싶은 세계만을 본다’고 말했는데,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거기서 자기가 보고 싶은 것, 자기의 생각에 맞는 것만을 보는 경향이 있다. 그리스도교의 교리는 다양하다. 가톨릭의 교리와 개신교의 교리가 다르고, 개신교 안에서도 감리교의 교리와 장로교의 교리가 다르다. 교인들은 자기가 속한 교파의 교리에 맞추어서 성경을 읽도록 훈련을 받는다. 그 교리 때문에 일반적인 글을 읽을 때보다 성경을 읽을 때 독자의 선입견이 더 강하게 작용한다.

    성경의 독자가 성경에 기록된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리에 관한 선입견을 버리고 객관적인 눈으로 성경을 읽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성경을 천천히 읽으면서 납득이 안 되는 부분이나 내가 배운 교리와는 다른 구절들이 나오면, 다시 돌아가서 읽으면서 앞뒤의 문맥을 자세히 살펴야 한다. 우리는 어느 구절의 바로 앞뒤뿐 아니라 신약성경 전체 안에서 그 부분이 갖는 의미까지를 살펴야 한다. 어느 한 구절은 단독으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문맥 안에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문학비평에서는 작품의 어느 한 부분은 그 부분만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위해서 꼭 필요한 부분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비평의 효시로 알려진 『시학』에서 작품은 처음, 중간, 마지막 부분으로 구성된다고 말했다. 이 말은 얼핏 너무 빤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작품의 세 부분 가운데서 어느 한 부분이 없거나 부실하면 훌륭한 작품이 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철학자의 말은 어느 작품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세 부분 가운데서 어느 한 부분도 제외시키지 말고 세 부분을 모두 중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달리 말하면, 작품의 어느 한 부분만을 중시하고 다른 부분을 제외하는 것은 올바른 작품 읽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작품 읽기의 기본이다.

    신약성경 전체에 하나님의 복음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 복음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약의 어느 한 부분만을 중시하고 다른 부분을 제외하면 안 된다. 그런데 바울과 루터는 이러한 성경 읽기의 기본을 지키지 않았다. 우리가 강한 선입견을 가지고 성경을 읽으면 그들처럼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게 된다. 우리는 글 읽기의 기본을 지키지 않은 사도와 개혁자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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