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트만 “미완의 종교개혁, 완성할 수 있는 길/ 뒤틀린 한국교회를 바로 잡으려면 / 로봇 목사가 등장했다 2017-06-02 07:35:51 read : 4032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몰트만 “미완의 종교개혁, 완성할 수 있는 길은…
한신대 신대원 주최 특별강연서 한계 짚고 방향성 제시
▲‘희망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 박사. ⓒ크리스천투데이 DB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이 주최하는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해외 석학 초청 특별강연'이 지난 1일 서울시 강북구 인수봉로 한신대 신학대학원 예배당에서 개최됐다.
이날 특별강연에는 최근 방한한 세계적인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91)이 강사로 나서 '미완의 종교개혁(부제: 풀리지 않는 문제들-에큐메니컬한 대답)'이라는 주제로 16세기 종교개혁의 여러 한계를 짚고 교회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논의했다.
몰트만 박사는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의 한계에 대해 "종교개혁운동은 서구의 라틴교회에서만 일어났을 뿐"이라며 "동방의 정교회들에게는 종교개혁운동의 이념이 전혀 미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즉 종교개혁운동이 '신성로마제국'의 환경과 조건 아래에서만 진행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종교개혁운동가들은 이 기독교권(Corpus Christiantum)에만 머물렀다고 그는 설명했다.
몰트만 박사는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은 미래적인 기독교가 아니라 기존의 기독교와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믿음의 개혁운동이었지 희망의 선교를 개혁하자는 운동이 아니었다. 일종의 재(Re)형성(Formation)이었던 셈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세상으로 보냄받는 교회를 새롭게 형성하는 것은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몰트만 박사는 또 종교개혁의 핵심 주제인 칭의에 대해서도 거론했다. 그는 "개혁신학의 중심에는 칭의론이 있는데 거기에는 무엇인가가 빠져 있다. '믿음 안에서 오직 하나님의 은총을 통한 죄의 용서'를 말하는 칭의론은 가해자(죄인)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는다. 가해자로 인해 피해를 본 피해자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피해자의 경우 어떻게 그들이 부끄러움과 비참한 데서 벗어날 수 있을지 방도를 찾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몰트만 박사에 따르면 하나님의 정의는 단순히 옳고 그름을 확정하는 정의가 아니며 죄에 희생된 사람들을 위한 권리를 제공하는 정의이다. 그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의인론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먼저 가해자는 자기가 회개하는 죄를 용서받음으로써 의롭게 되는데 이를 위해 '입으로 고백하기'(confession oris), '진심으로 엎드리기'(contrition cordis), '행위로 충족시키기'(satisfaction operum)의 단계를 거친다.
피해자의 의인론 역시 '입으로 말하기'(confession oris)로 시작된다. 불의와 폭력의 피해자는 자신이 겪는 고통에서 헤어나올 뿐만 아니라 자신을 영적으로 비하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예를 들어 성폭력을 당한 여성은 그녀가 당한 능욕에 더해 부끄러움까지 생긴다. 그녀에게는 자신의 고통을 받아주고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귀가 필요하다. 이를 통해 자기연민과 자기증오로부터 사랑받는 인생을 긍정하는 정도로까지 돌아서고, 보복이 아니라 용서를 행함으로 바울의 말처럼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롬 12:17) 선으로 악을 이기는(롬 12:21) 데까지 나아간다.
▲위르겐 몰트만 박사가 1일 한신대 신대원 예배당에서 열린 해외석학 초청 특별강연에서 강의하고 있다. ⓒ이미경 기자
이어 몰트만 박사는 분열된 교회의 연합을 위한 대안으로 '성만찬'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지난 50년 동안 루터교회, 개혁교회, 연합교회, 보헤미안 형제교회, 발덴져교회와 복고 천주교회(Altkatholiken)는 1973년 로이엔베르크 합의문에 서명했고 복음주의교회와 앵글리칸 교회들도 마이센에서 이것을 긍정했다"면서 "독일에서도 교인의 숫자가 감소하고 있지만 성만찬을 중심으로 교회가 활성화되고 있는 현상은 상당히 고무적"이라고 밝혔다.
그는 “16세기 루터의 종교개혁은 본래 가톨릭교회 개혁을 목적으로 한 것으로 일종의 가톨릭적인 보편적 개혁 운동이었으므로 개신교회와 가톨릭교회의 분열이 지속되는 한 종교개혁은 완성되지 못한 것과 다름 없다”며 “이 미완의 종교개혁을 완성할 수 있는 길은 모든 교회들이 함께 참여하는 성만찬에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서 "하나의 교회를 세우는 종교개혁운동은 무엇보다도 먼저 축복의 식탁인 성만찬 공동체 속에서 완성된다. 나는 축복의 만찬 운동이 개 교회에서 개 교회로 퍼져나가길 소망한다"고 밝혔다.
이 밖에도 루터교 전통에서는 부활절이 아니라 성금요일이 최고의 기념일이 되었는데, 이에 대해 몰트만 박사는 "루터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빛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보지 못했다"면서 "기독교적인 희망은 십자가에 달리셨던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신 것으로 시작된다. 종말은 하나님의 세계가 새롭게 시작되는 출발이다. 믿음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약속과 '생생한 희망을 향한 새로운 탄생'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몰트만 박사는 루터가 '광신자'라고도 불렀던 '재세례파'에 주목하며 "내 생각에 그들은 유일하게 '오직 믿음으로만' 종교개혁운동을 한 사람들"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한편, 이날 특별강연 논찬은 전 한신대 석좌교수인 도올 김용옥 박사가, 통역은 연세대 명예교수인 김균진 박사가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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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로금란교회 성장 키워드는 ‘철야기도’ ‘노방전도’”
미국 LA에 있는 나성순복음교회(담임 진유철 목사)가 세계로금란교회 주성민 목사를 초청해 현지시간 17일부터 19일까지 전교인 전도부흥성회를 개최했다. 3일간의 집회 동안 성도들은 한 영혼을 향한 간절한 구령 열정을 재확인하고 헌신을 다짐했다.
2004년 6월 12명의 성도가 모여 기도하면서 개척을 준비한 세계로금란교회는 100일간 철야기도를 하며 부흥을 사모했다. 기도의 힘으로, 교회가 공식적으로 개척되기 전 공원에서 예배드리면서도 30명으로 성장했고 12월 창립 시엔 이미 150명으로 성장해 있었다. 개척 10개월 만에 7백 명을 돌파하더니 2년 만에 2천 명을 넘어서고 2012년 집계로 8천 명을 기록했다. 이 교회의 성장은 정체기에 들어간 한국교회에 신선한 도전을 주고 있다.
이 교회의 성장 비결은 구시대의 유물에 가깝다. 한국교회에서는 사라진 지 오래된 철야기도, 촌스러운 것으로 치부되는 노방전도가 세계로금란교회의 성장 키워드로, 주성민 목사는 "현재도 주일예배에 매주 적게는 수십 명, 많게는 1백 명 이상의 새신자가 교회를 방문하는데 한 사람도 전도자 없이 그냥 온 사람이 없다"며 전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주 목사는 "우리 교회는 불신자에서 전도된 사람이 95%에 달한다"고 말하며 "청년들 중심으로 급격히 부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 나성순복음교회는 남미 선교사 출신인 진유철 담임목사를 중심으로 수년 전부터 '가든지 보내든지 돕든지'라는 구호 아래 세계선교에 헌신하는 가운데 2017년부터는 미국 내에 10개 교회, 세계 선교지에 10개 교회를 개척 혹은 후원하겠다는 '10·10 미션' 운동을 추진 중이다.
그러면서 가시적으로도 지난 1년여 동안 이 교회는 한어권 청년부와 30대 젊은 부부들이 2배 가까이 부흥했다. 이런 여세를 몰아 교회는 이번 부흥회를 아예 전도부흥회로 준비하며, 성장하는 세계로금란교회의 간증을 듣고 전도 및 선교에 더욱 헌신하기로 결단한 것이다.
부흥회 직후 주일인 5월 21일 전도를 위한 새생명 전도 작정 카드를 성도들에게 배부했으며 온 교회가 기도에 돌입한다. 6월 11일을 새생명 전도축제로 정하고 이때 불신자들을 초청해 전도할 예정이다.
진유철 목사는 "이번 부흥회를 통해 성장이 멈추고 쇠퇴하는 한국 기독교가 아니라 여전히 일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었다"면서 "'가든지 보내든지 돕든지' 하나님의 사명을 따라 새생명을 전도하는 최고의 가치를 위한 충성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자"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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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 등장한 로봇 목사, "죄도 사해주나요?"
로봇이 바둑에 이어 종교까지 진출하는 걸까요?
종교 개혁의 본고장 독일 비텐베르크에 로봇 목사가 등장했습니다.
화면으로 만나보시죠.
다소 투박한 디자인의 로봇 목사 BlessU-2(블레스유-투)입니다.
과연 어떤 일을 하는지 볼까요?
가슴에 있는 터치스크린을 눌러 언어와 목소리 성별, 축복의 종류를 선택하면 갑자기 손을 치켜듭니다.
이어 손에서 빛을 쏘며 성경 구절을 암송한 뒤 축복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독일 비텐베르크에서는 루터의 종교 개혁 500주년을 맞아 다채로운 전시가 열리고 있는데요.
이 로봇 목사도 한 교회에 전시돼 방문객 누구나 만날 수 있습니다.
로봇 목사를 만든 스테판 크렙스는 "논쟁거리가 될 걸 알고 있었다"면서 "사람들이 로봇에게 축복받길 바라는지 궁금했다"고 밝혔다고 합니다.
로봇 성직자의 등장은 처음이 아닙니다.
지난해에 중국 베이징의 한 불교 사찰에서는 불경을 외우고 교리의 기본을 설명하는 로봇 스님 시아너를 선보여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종교계까지 진출한 로봇, 다음에는 어떤 분야에 등장할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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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장합동 총회 재판국원 돈 봉투 요구 "3,000 정도는 써야"
"정치인 흐름을 알고 있다…국장·서기는 단가 세"
"국장하고 서기를 직접 만나셔 가지고 접촉하셔야 합니다. 국장·서기 같은 경우 단가가 좀 큽니다. 최저로 얘기하면 3 정도는 생각하셔야 될 거예요. 일단 국장을 트라이(try)해 가지고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세요."
[뉴스앤조이-최유리 기자] 여기서 '3'은 3,000만 원이다. 국장과 서기는 총회 재판국장과 재판국 서기를 말한다. 재판에서 유리해지려면 3,000만 원 정도는 뿌려야 한다는 말이다. 국장과 서기는 일반 국원보다 단가(?)가 좀 더 세다는 구체적인 설명도 빠지지 않는다.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가 2017년 실제로 일어났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예장합동·김선규 총회장) 총회 재판국에서 일어난 일이다. 여러 교단을 취재하면서 "교단 재판은 썩었다", "누가 더 돈을 많이 쓰느냐의 싸움이다"라는 말은 많이 들어 봤지만, 이렇게 노골적인 금품 요구가 드러난 경우는 처음이 아닐까 싶다.
문제의 대화는 당시 총회 재판국원이었던 A 목사와 피고 변호인 B 목사의 통화 내용이다. 두 사람은 올해 2월, 분쟁 중인 ㄱ노회 ㅇ교회 사건으로 통화했다. B 목사가 A 목사에게 전화를 걸어, 재판을 원만하게 해결하고 싶다며 돈을 얼마나 쓰면 되겠는지 구체적인 조언을 구했다. A 목사는 "사실 정치인 흐름을 내가 안다"며 구체적으로 금액을 제시한다. <뉴스앤조이>는 최근 이 통화 녹음 파일을 입수했다.
예장합동 총회 재판국원이 재판하는 목사에게 돈을 요구한 정황이 드러났다.
B "큰 교회면 5,000 쓰라 할 텐데"
A "먼저 재판국장 만나 1,000 줘라"
두 사람의 대화에서는 구체적인 액수 이야기가 오간다. 재판국원 A 목사는 3,000만 원 정도가 필요할 것이라고 말하고, B 목사는 "도시 교회라면 5,000 정도 쓰라고 얘기하고 싶은데, ㅇ교회는 농촌 교회라 2,000 정도를 생각하고 있다"고 답한다.
구체적인 정보는 금액뿐이 아니다. A 목사는 재판국장에게 전달할 때 주의해야 할 사항도 알려 줬다. 그는 수표 대신 현금을 가져가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이야기를 꺼내라고 했다. 먼저 재판국장을 만나 돈을 건넨 후, 어떻게 나오는지 봐서 재판국 서기를 만나라는 구체적인 조언을 해 준다.
"아무도 없는 데 얘기 딱 하면 목사님도 말하기 좋고, 그 사람도 그 합니다. 그래서 재판국장에게 '하나'를 내 놓으세요. 그냥. 딱 밀어 보세요. 목사님이 2,000만 원을 얘기하셨으니까요. 하나는 (만나서 바로) 내밀고 하나는 나중에 하고. 수표로 갖고 가시면 안 됩니데이. 현금으로 딱 내놓으시고 근신하면서 목회할 수 있도록 해 달라. 그리 얘기하시면 그 사람이 감을 잡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우리한테 정치를 해요."
재판국 소위원장이었던 A 목사는 소위원 5명도 빼놓지 않았다. 소위원회는 5명인데, 이들에게 교통비를 주라고 했다. 그는 "한 사람 당 20만 원씩이라도 돌리면 그나마 그게 또 유리합니다"라고 말했다.
그 대가는 ㅇ교회 ㅂ 목사가 면직과 같은 중징계를 피하는 것이다. A 목사는 "아마 당회장권이 6개월이나 1년 정지될 것"이라며 재판 결과를 짐작하고, B 목사는 "저도 그것이거든요"라면서 동의한다.
매우 능숙한 듯 보이는 A 목사의 지침에 B 목사는 감사를 표한다. A 목사는 "전에 목사님을 따로 부른 것은 목사님이 노회장도 역임하셔서 말이 통할 것 같아 그런 것"이라는 말도 남긴다. 두 사람의 통화는 화기애애하게 마무리된다.
A "천 단위 아닌 십 단위 생각"
B "A 목사 먼저 돈 이야기 꺼내"
재판국장 "돈 받은 적 결코 없다"
A 목사 재판국원 '해임' 아닌 '사임'
<뉴스앤조이>는 A·B 목사와 통화할 수 있었다. A 목사는 B 목사와의 통화에서 분명 재판국장에게 1,000만 원을 건네라고 얘기하지만, 그런 적이 없다고 발뺌했다. 그는 "재판국장에게 3을 줘야 한다는 것은 30만 원을 얘기한 것이다. 천 단위는 B 목사가 먼저 언급했고,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황당했다"고 말했다.
"정치인 흐름을 잘 안다"고 말했던 A 목사는 오히려 자신은 잘 모른다고 잡아뗐다. 그는 "애초부터 돈을 요구할 생각이 아니었다. 나는 재판국 들어온 지 3개월도 안 됐다. 여기 생리를 모르는데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B 목사가 나와 다른 생각을 할 때 나도 '아니다'라고 말했어야 하는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고 항변했다.
"통상 얼마 정도 줘야 하는가" 조언을 구했던 B 목사는 A 목사가 먼저 돈 봉투 얘기를 꺼냈다고 주장했다. 그는 "A 목사와 통화하기 전 두 번 만났다. A 목사가 '정치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으로 해결해야 한다'며 돈 봉투 이야기를 했다. 대화를 나누면서 재판국에서 돈을 요구하는 것 같다는 감이 들었다. 이전에도 '재판국은 돈을 받고 재판한다더라'는 카더라 소식을 들었다. 이후 A 목사에게 전화해 방법을 물어봤다"고 했다.
B 목사는 A 목사 지침대로 재판국장을 만나지는 않았다고 했다. B 목사는 "실제로 돈을 건네지는 않았다. (ㅇ교회) ㅂ 목사가 하나님 앞에 떳떳하고 싶다며 돈을 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재판국장 ㅇ 목사도 기자와의 통화에서 결코 돈을 받고 재판한 적이 없다고 단언했다. 그는 "재판국장 된 지 이제 1년이 다 돼 간다. 나는 회의할 때마다 목사들에게 '돈 받지 말라'고 강조한다. 내가 신학대 교수도 하고 있는데, 돈 받고 재판한다는 이야기가 알려지면 교수직 잘린다. 누가 그런 짓을 하겠느냐"고 반박했다. ㅇ 목사는 "이번 사건은 A 목사 개인 일탈이다. 재판국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사건은 A 목사가 재판국에 사임서를 제출하면서 일단락됐다. A 목사는 "통화에서 한 말은 독단적으로 판단한 것으로, 녹취록이 공개되고 재판국에 더 이상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 사임했다"고 말했다. 재판국장에게 왜 A 목사를 징계하지 않고 사임 처리했느냐고 묻자, 그는 "재판국장이라도 국원을 징계할 권한은 없다"고 답했다.
ㅂ 목사는 4월 20일 '이단성'을 근거로 출교 조치됐다. 뉴스앤조이 최유리
총회 재판국, ㅂ 목사 면직
ㅂ 목사 "돈 주지 않아서"
교인들 "통화 녹음 못 믿어"
재판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예장합동 총회 재판국은 4월 20일, 피고 ㅂ 목사를 면직·출교했다. 출교 이유는 '이단성'이었다. ㅇ교회 교인들은 ㅂ 목사 지지 측과 반대 측으로 갈라져 있다. 반대 측 교인들이 ㅂ 목사가 이단성이 있다며 고소한 것이다. 재판국은 교인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ㅂ 목사가 평소 예배 시 설교와 교훈, 심술과 행위가 이단성이 있다 할 것이다"고 판단했다.
ㅂ 목사는 판결이 부당하다고 호소했다. 그는 "돈을 주는 게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지 않아 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이런 판결이 나왔다. 이단성이 있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설교에서 어느 구절만 따다가 이단성 시비를 걸면, 여기서 자유로운 목회자는 없을 것이다. 나를 반대하는 교인 중 한 사람은 '지령'이란 말을 썼다. 지령은 신천지가 쓰는 말이다. 그들이 나를 이단으로 모는 방식을 대입해 보면, 그 사람도 신천지가 된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반대 측 교인들은 ㅂ 목사 주장이 터무니없다고 했다. 교인들은 "ㅂ 목사는 자신을 영적인 아버지라고 말하며, 자기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설교 중 '자기가 만든 성경'이라는 표현을 쓰며, 자기가 성경 저자인 것처럼 말했다. 교회에서도 자신을 반대하는 원로장로에게 '후레자식'이라고 욕하고 자기 모든 행동은 성령님이 시켜서 한 것이라고 했다. 이것만 봐도 이단성이 짙다"고 말했다.
교인들은 A·B 목사의 통화 내용을 다 믿지 못하겠다고 했다. 오히려 A 목사가 B 목사에게 당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ㅇ교회에서 출교당한 한 교인은 "B 목사가 ㅂ 목사와 짜고 (통화에서) 먼저 돈을 언급했고, A 목사가 성품이 좋아 꼬임에 넘어갔다"며 대화 내용을 부인했다.
한편, 예장합동 재판국은 6월 16일, 재판국원의 금품 요구 사건을 주제로 기자회견을 열어 입장을 밝힐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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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틀린 한국교회를 바로 잡으려면
최재석 | jschoi@cnu.ac.kr
일전에 왜 한국교회가 이토록 뒤틀렸는가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는 모임에 참석한 일이 있다. 발제자는 한국교회가 이렇게 된 것은 구원관이 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세 가지 ‘오직’을 내세우면서 오직 예수, 오직 믿음,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확신과 고백이 없는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참된 교회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구원관이 확실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참된 교회가 된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을 따르는 복음주의자들은 그 유명한 ‘오직’ 시리즈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가르쳐왔다. 그래서 나는 그분에게 개혁자들의 신학에 근거한 그런 구원관을 교회에서 오랫동안 열심히 가르쳤는데도, 지금 한국교회가 이렇게 뒤틀리게 된 것을 어떻게 이해하면 되겠느냐고 질문했다.
그분은 성령이 구원받은 사람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도록 도우신다고 대답했다. 그분은 칼빈의 성화와 견인으로 답했는데, 그것 역시 우리가 많이 들어온 것이다. 그분은 내 질문에 답하기보다는 개혁자들의 말을 되풀이했을 뿐이다.
복음주의자들은 오직 믿으면 된다는 것이 성경에 근거한 복음이라고, 믿으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루어주신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야고보서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고,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하라’ 혹은 ‘하지 말라’는 명령형으로 되어 있는 십계명은 인간의 노력을 요구한다.
그러면 믿음만을 강조하고 행함을 소홀히 하는 것은 성경을 왜곡하는 것 아닌가? 그렇게 성경을 편향적으로 읽어서 왜곡하다보니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렇게 뒤틀리게 된 것 아닌가? 달리 말하면, 하나님이 해주신다고 모든 것을 그분에게 맡기고서 인간은 뒷짐 지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뒤틀린 것 아닌가? 본회퍼의 말대로 값싼 은혜에 매달린 결과 아닌가?
스탠리 J. 그렌츠가 『복음주의 재조명』(기독교문서선교회)에서 이 문제에 대한 답답함을 시원하게 풀어주고 있다. 그 책에서 복음주의자 그렌츠는 복음주의의 영성을 논하면서 ‘오직’을 강조한 개혁자들과는 달리 구원받은 자의 내면과 외면의 균형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균형이 바로 복음적이라는 것이다. 이제 그의 글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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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자들의 영성은 기독교인의 삶에서 그 내면적 측면과 외면적 측면의 창조적 긴장을 유지하려는 시도를 수반한다. 영성이 있는 신자는 내면적 경건과 외면적 활동 간의 균형을 잘 유지한다.
하지만 이러한 긴장 가운데서도 분명한 것은 우리가 신앙에 있어서는 항상 외면적 측면보다 내면적 측면을 우선시한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타협할 수 없는 복음주의 원리는 바로 신앙은 마음의 문제라는 점이다.
물론 각기 다른 전통을 가진 복음주의 교단 및 교파의 지도자들은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서로 다르게 기술하겠지만 그들 모두에게 있어서 최고의 관심사는 언제나 마음의 상태다. 설교나 사적인 대화에서나, 우리가 계속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묻는 질문은 바로 “이것이 당신의 마음에 와 닿는가?”다.
어거스틴으로부터 조나단 에드워즈에 이르는 믿음의 선배들의 저서들에서 정립된 것은 우리는 신앙을 인간의 지적 요소를 뛰어넘는 문제로 본다는 점이다. 신앙은 어떤 사람의 존재의 내면에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애정’을 포함한다고 우리는 주장한다. 기독교는 단순히 한 묶음의 교리적 진술들에 대한 지성적인 동의만이 아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사도신경의 암송 그 이상이다.
왜냐하면 신앙은 신자의 애정에 궁극적으로 초점이 맞추어진 개인적 결의를 수반해야 하기 때문이다. 신념은 단순히 머리에만 박혀있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삶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그렇게 해서 신념은 한 사람의 마음속에 깊숙이 자리하게 된다. 복음주의자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바와 같이, 우리의 신념은 단순히 머리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서 마음에 자리 잡아야 한다.
신자가 그리스도에게 위탁하는 데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강한 감정적 요소를 포함한다. 하나님의 속성을 논하는 일은 감정과 상관이 없지만, 마음의 경건은 주님께 대해 느끼는 사랑의 감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복음주의자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위대한 신학적 진술을 고안하거나 암기하는 능력보다 예수에 대한 신자의 개인적 고백에 더 큰 관심을 가진다.
이것은 복음주의 교단의 목사안수 면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거기서 그들은 후보자의 신학적인 수준보다는 부르심에 대한 소명과 개인의 신앙 간증에 종종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왜냐하면 복음주의자는 마음속 깊은 데서부터 “오, 내가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는지”라는 찬송을 부를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영성은 개인의 내면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그 내면적 동기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영성이 단순히 외면적 형태로만 구성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면적 생명력이 없는 외면적 행동은 단지 죽은 의식일 뿐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주류 교회들 안에서조차 매주 반복되는 예전적인 행위들이 비난을 받아왔다. 예전만을 중시하는 것은 우리의 복음주의 선배들이 생각했던 진정한 기독교인의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복음주의 영성과 관련해서, 마음의 신앙과 더불어 중시되는 것은 바로 경건주의에서 강조한 체험적 신앙이다. 신앙은 체험의 문제여야만 한다. 그래야 신자의 삶이 변화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체험적 신앙에 대한 관심은 사복음서에 나오는 거듭남 신학을 강조했던 경건주의에서 시작했다.
경건주의에서는 기독교인의 생활에 있어서 개인적 체험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본다. 회심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으며 그 무엇과도 협상할 수 없는, 하나님과 신자와의 동행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이것은 영성의 좁은 길이기도 하다. 이러한 체험적 영성에 대한 지대한 관심으로 인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당신은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삶이 변화된 경험을 했습니까?’
그러나 새롭게 거듭남은 경험적 신앙의 시작에 불과하다. 회심 뒤에는 거룩함에서 자라나는 개인의 영적 ‘여정’이 따라야 한다. 제임스 휴스턴은 수많은 복음주의자를 대변하여 영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영성은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 영혼에서 일하시는 것인데, 회심으로 시작해서 그리스도의 죽음 혹은 재림으로 끝난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으로 성장하고 성숙해 나간다.”
결국 우리는 지속적으로 우리 스스로와 서로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에 확신을 심어 주어야 한다. ‘당신은 주님 안에서 성장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주님과의 우정을 발전시키고 있습니까? 그래서 당신의 삶은 변하고 있습니까?” 이러한 질문들은 한 사람이 교인이 됨과 동시에 신자들 상호 간에 반드시 가져야 할 관심이다. 그래서 우리는 “죄 짐 맡은 우리 구주”와 “이제 우리 달라졌어요”를 마음속 깊이 새기며 함께 노래한다.
복음주의 영성에서 기독교인의 삶의 외면적 차원은 핵심적인 내면적 차원 못지않게 강조된다. 이 둘의 중요성은 실제로 수평선상에 나란히 놓여 있어서 신자의 영성에서 그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창조적 긴장을 형성한다. 영성은 마음의 문제지만, 일면 훈련을 필요로 하는 기독교인의 삶이기도 한데, 훈련은 외면적인 것이다.
실제로 진정한 영성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내면적 결의는 외면적 활동으로 반드시 연결되어야 한다. 내적 신념은 가시적이어야 하며, 기독교인들은 사는 방식을 통해서 그들 자신의 신념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전형적인 복음주의자들이 우리의 신앙에 대해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말과 행동을 일치시켜야 한다.’
우리는 외면적 행동에 대한 특정한 복음주의적 이해를 갖고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부름 받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외면적 행동이 하나님의 호의를 얻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고자 하는 우리의 소망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이 중요하다. 영적 삶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일이다. 제자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삶에서 보여준 특정한 모델을 따르고자 하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참된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나타내려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모방하려는 제자도에 대한 강조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대한 이해에도 큰 영향을 준다. 모범적 교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단지 주일 예배에만 참석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매일의 삶을 중시한다. 제임스 휴스턴은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인의 예배는 특별한 예배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방식의 문제다.”
예배에 참석하는 핵심 동기는 매주일의 예배에서 매일의 거룩한 개인적 삶을 강조하고 각 신자가 신실한 삶을 살 것을 서로 권면하는 데에 있다. 전형적인 복음주의 설교는 이러한 관심을 구현하기 위한 도전으로 가득 차 있다. 비록 세부적 주제는 다소 다를 수가 있겠지만, 복음주의 설교가가 매주일 전하는 설교의 주제는 다음과 같이 동일하다.
당신이 신자라면, 거룩한 행위가 당신의 삶 속에서 주일 아침에만 아니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주일 예배 때 들은 것을 주중에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당신의 기독교 신앙은 허울뿐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처럼 복음주의가 매일의 삶에서 교인다움을 강조하는 것은 참으로 바람직하다. 그리고 이러한 올바른 이해는 교회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결정한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본질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필연적으로 신자의 매일의 거룩한 삶을 강조하게 마련이다.
우리의 선배들은 중세 가톨릭의 교회론에 반대해서 교회란 하나님의 은혜를 담는 그릇이라고 보았다. 사람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교회에 모이기보다는 구원의 은혜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교회에 위임된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하기 위해서 기독교 공동체에 모인다.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충성하려는, 세상을 향한 사명을 의식하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이는 곳이다.
따라서 복음주의 영성은 기독교인의 삶의 내면적 차원과 외면적 차원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과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삶 사이에서 창조적 긴장을 유지하려고 한다.
우리는 외면적 차원보다 내면적 차원에 우선권을 둔다. 하지만 제자도의 삶에 있어서 적절한 외면적 표현이 없으면 내면도 죽은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부르는 찬송에는 이 두 차원이 결합되어 있다. “예수 따라가며,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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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미 재단, 쌀 58톤 전달하고 5월의 북한 모습 전해
'재미 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의 저자 신은미씨는 지난 5월 13일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떠나 15일 육로로 쌀 58톤을 싣고 압록강을 건넜다. 이번 인도적 차원의 지원이 이루어지기까지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보다 투명한 지원을 위해 신은미 재단(NGO)을 설립, 미국 정부의 승인을 받았지만 이후에도 우여 곡절이 많았다.
성금이 모금된 한국의 한 은행의 인출 거부 논란이 있었고, 미국 정부의 북한 지원 승인까지 오랜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중국에 있는 회사를 통해 쌀을 구입하고,단동 현지에 있는 북한 영사관에서 비자를 수령한 후 국경을 통해 58톤에 이르는 쌀이 북한 주민들의 구호에 쓰일 목적으로 조선적십자사에 전달됐다.
15일 신의주 '압록강려관'에서 묵은 뒤 16일 저녁 평양으로 이주한 신은미씨는 17일 오전, 누적된 피로로 '평양친선병원'에서 수기치료(지압)를 받고, 눈이 아파 바로 '류경안과병원'에 가 진료를 받았다. 신은미 재단측은 경직되어 있는 북미관계에도 불구하고 북한 주민들은 비교적 평온하게 생활하고 있다고 전했다. 아래는 이번 일정 중에 신은미 재단에서 직접 촬영한 사진들로 허락을 받아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