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약혼식 주례는 조만식 장로…결혼식은 주기철 목사 집도 / 5월 24일을 기억하십니까? 2017-04-07 08:08:52 read : 4314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내 약혼식 주례는 조만식 장로…결혼식은 주기철 목사 집도”
[길을찾아서] 한세기를 그리다-101살 현역 김병기 화백의 증언
평양은 기독교 문화의 요람
김병기가 태어난 1910년대 평양은 기독교 부흥운동의 진원지였다. 1893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모펫(마포삼열)이 개척한 장대현교회를 시초로 산정현교회, 남문밖예배당 등 수많은 예배당이 자리했다. 사진은 1905~9년 길선주 목사의 새벽기도운동으로 시작된 평양대부흥운동 때 장대현교회 앞에 운집한 교인들. 사진 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
김병기가 태어난 1910년대 평양은 기독교 부흥운동의 진원지였다. 1893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모펫(마포삼열)이 개척한 장대현교회를 시초로 산정현교회, 남문밖예배당 등 수많은 예배당이 자리했다. 사진은 1905~9년 길선주 목사의 새벽기도운동으로 시작된 평양대부흥운동 때 장대현교회 앞에 운집한 교인들. 사진 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
평양은 20세기 초 한국 기독교 문화의 요람이었다. 특히 장로교회가 활발했다. 일제강점기라는 암흑의 시대에 복음을 전달하면서 민족정신을 곧추세운 곳, 바로 평양이었다. 그래서일까, 평양은 수많은 기독교 중요 인물을 배출했다. 특히 장로교의 본거지로 자리매김되었다. 장로교회가 10개라면, 감리교회는 2개 정도의 비율이었다. 그 무렵 장로교는 교회를 세우고 영혼 구제에 주력했다면, 감리교는 학교와 병원을 세우면서 선교 활동에 주력했다. 화가 김병기는 어려서부터 어머니 품에 안겨 교회에서 살았다. 기독교 문화와 자연스럽게 익숙해졌다. 다음은 화가의 증언이다.
대동강은 평양 시내의 동쪽에서 와서 남북으로 흐르고 있다. 아주 아름답고 풍만한 강이다. 시내의 산에는 고개(峴)마다 예배당이 있다. 제일 먼저 있는 고개가 장대현이고, 거기에 장대현교회가 있다. 그다음 산정현교회가 있는데, 장대현과 산정현은 장로교회다. 남산현교회와 시내의 중앙교회 정도만 감리교였다. 일제시대인데도 평양에는 선교사 마을인 양촌도 있었고, 이른 시기부터 신학교가 들어섰다.
1920년대 평양 장로교의 중심으로 자리한 산정현교회는 1940년 담임 주기철 목사가 신사참배 거부로 옥중 순교하면서 한국기독교사의 성지가 됐다. 사진은 1937년 1월 산정현교회 제직들 모습으로, 앞줄 왼쪽부터 조만식·김동원·박정익 장로, 주기철 목사, 유계준·김봉순·오윤선·김찬두 장로이고, 둘째 줄 오른쪽 넷째가 김동원의 부인이자 김병기의 장모, 다섯째가 주 목사의 사모 오정모 등이다.
1920년대 평양 장로교의 중심으로 자리한 산정현교회는 1940년 담임 주기철 목사가 신사참배 거부로 옥중 순교하면서 한국기독교사의 성지가 됐다. 사진은 1937년 1월 산정현교회 제직들 모습으로, 앞줄 왼쪽부터 조만식·김동원·박정익 장로, 주기철 목사, 유계준·김봉순·오윤선·김찬두 장로이고, 둘째 줄 오른쪽 넷째가 김동원의 부인이자 김병기의 장모, 다섯째가 주 목사의 사모 오정모 등이다.
산정현교회에는 ‘3대 장로’가 유명했다. 조만식·오윤선 그리고 장인어른인 김동원이다. 이들은 평양의 유지로 상징적 인물이었다. 고당 조만식 선생은 민족의 스승으로 거목이었고, 장인은 국회 초대 부의장을 지냈다. 내 친구 극작가 오영진의 부친이기도 한 오윤선은 평양에서 포목상 등 사업을 크게 했다. 그는 조만식의 비서 노릇도 했다. 김동원과 오윤선은 실업인으로 조선물산장려운동 같은 데에도 관심이 컸다. 특히 김동원은 기업인의 대표였다. 그는 고무공장과 석유회사도 운영했다.
그는 조만식하고 동료이면서, 도산 안창호의 수제자 노릇을 했다. 평양에는 도산과 고당이라는 거목이 나란히 있었다. 고당은 평양 시내, 도산은 강서 출신이다. 강서는 평양과 진남포의 중간에 있다. 강서의 강이 넓어지고 밀물 때 바닷물이 대동강까지 올라오면서 평양이 생긴 것이다. 모란봉 근처까지 큰 배가 들어올 수 있는 이유는 밀물 덕분이다. 일제 때 도산은 미국에 있었고, 국내에는 조만식이 있었다. 도산이 감옥 갔다 나왔을 때, 평양역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환영 인파가 너무나 많아 도산이 자동차 위에 올라가서 인사말을 할 정도였다.
평양의 중요한 일은 산정현교회에서 일어났다. 신사참배 반대 운동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주기철 목사가 담임이던 시절이었다. 그는 경남 창원 출신으로 정주 오산학교를 거쳐 평양의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를 졸업했다. 그 뒤 마산 등지에서 목회 활동을 하다 1936년 산정현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했다. 조만식과 김동원 장로가 모셔 온 것이다. 1940년 주기철 목사는 일제의 신사참배 ‘명령’을 거부했다. 민족정신과 하나님 정신에 따른 신사참배 반대는 목사직 파면과 더불어 교회 폐쇄를 불러왔다. 5년간 감옥생활을 해야 했던 주 목사는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 그래서 순교자로 추앙받고 있다. 널리 알려진 찬송가 ‘저 높은 곳을 향하여’가 바로 주기철 목사를 찬양한 것이다.
20세기초 평양시내 고개마다 교회 우뚝
산정현교회 조만식·김동원·오윤선 삼총사
1940년 주기철 목사 신사참배 거부로 순교
“1939년 결혼땐 그렇게 큰인물인줄 몰라”
장인 김동원 별채 김재준 목사 사택으로
‘보수 대부’ 한경직 목사 유학비도 지원
어머니 따라 남문밖예배당서 살다시피
아동극 ‘화가’ 배역·중학교때 야학교사도
평양 출신 예술인 목사 자손들 유독 많아
길림 손정도 목사가족 김일성 옥바라지 인연
둘째아들 손원태와 어릴적 같이 놀던 친구
“91년 평양 초청해 금시계 선물 등 대접”
우리 약혼식 주례는 조만식 선생이 했고, 결혼식 주례는 주기철 목사가 했다. 1939년 결혼식을 올릴 때만 해도 주 목사가 그렇게 큰 인물인 줄 몰랐다. 훗날 주 목사께서 주례를 해주었다니까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영광 중에도 영광인 셈이다. 김찬영-김동원 두 가문의 위상에 맞추느라 우리 결혼식은 교회 대신 평양에서 제일 큰 공회당에서 했다. 그만큼 양가의 하객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미국 유학파 신학자로 촉망받았던 송창근(왼쪽)·김재준(오른쪽) 목사도 1930년대 평양 산정현교회 담임을 잇달아 맡았다. 사진은 1927~8년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시절 함께 찍은 모습이다. 1930년대 만주 길림 시절 손정도 목사는 기독교 집안이었던 김일성의 옥살이를 보살펴줬다. 김일성은 보답으로 1991년 미국 시민권자인 손 목사의 차남 원태씨 부부를 평양에 초대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미국 유학파 신학자로 촉망받았던 송창근(왼쪽)·김재준(오른쪽) 목사도 1930년대 평양 산정현교회 담임을 잇달아 맡았다. 사진은 1927~8년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시절 함께 찍은 모습이다. 1930년대 만주 길림 시절 손정도 목사는 기독교 집안이었던 김일성의 옥살이를 보살펴줬다. 김일성은 보답으로 1991년 미국 시민권자인 손 목사의 차남 원태씨 부부를 평양에 초대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산정현교회에 주기철 목사가 취임하기 이전 함경도에서 온 청년 목사가 있었다. 장인이 그의 거처로 자택 정원 남쪽의 별채를 내주었다. 그가 바로 김재준 목사로, 1960~70년대 민주화운동 진영에서 진보적 인사로 빛나는 활동을 했다.
주기철 취임 이후에는 부목사로 활동했을 것이다. 한국신학대학을 김재준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진보적 목사로는 김재준 전임이었던 송창근 목사도 생각난다. 송 목사는 어머니를 만나러 우리 집에도 왔다. 어머니는 남문밖교회의 집사였다. 장인은 한경직 목사의 미국 유학자금을 대주기도 했다. 그러니까 평양은 한경직 목사 같은 보수적 인사부터 송창근·김재준 목사 같은 진보적 인사를 두루 아우른 폭넓은 교회의 도시였다.
장대현교회의 담임은 길선주 목사다. 바로 나와 도쿄 유학 시절 어울렸던 화가 길진섭의 아버지다. 길진경이 맏아들이고 작은아들이 길진섭이다. 길선주 목사는 시력이 좋지 않았다. 맹인(시각장애인)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는 성서를 다 외웠다. 105인 사건으로 수난 당했고,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하나로 참가했다. 그만큼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분이다. 그는 평양장로교회신학교 제1회 출신으로 한국인 최초의 목사 7인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평양 대부흥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했고,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새벽기도회를 처음 시행한 분이다.
평양 널다리골에 자리한 남대현교회는 보기 드문 한옥 양식에 남녀 신도 출입구가 구분된 독특한 구조로 유명했다. 사진은 1903년 72칸짜리 기와집으로 준공을 앞둘 무렵 전경이다.
평양 널다리골에 자리한 남대현교회는 보기 드문 한옥 양식에 남녀 신도 출입구가 구분된 독특한 구조로 유명했다. 사진은 1903년 72칸짜리 기와집으로 준공을 앞둘 무렵 전경이다.
20세기 초 평양 시내에는 높은 고개마다 교회가 자리해 한때 기독교인이 전체 인구의 10%에 이를 정도로 번성했다. 사진 오른쪽으로 감리교 중심 교회였던 남산현교회의 뾰족한 양식 지붕이 보인다.
20세기 초 평양 시내에는 높은 고개마다 교회가 자리해 한때 기독교인이 전체 인구의 10%에 이를 정도로 번성했다. 사진 오른쪽으로 감리교 중심 교회였던 남산현교회의 뾰족한 양식 지붕이 보인다.
평양 교회 가운데 완전 한옥은 장대현 예배당뿐이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건물 구조가 기역자였다는 점이다. 남녀의 출입구가 달라 서로 바라볼 수 없는 구조였다. 목사님만 꺾어진 가운데 자리에서 설교하고 양쪽의 남녀를 볼 수 있었다. 다른 교회는 모두 양옥이었다. 남산현 예배당은 서울 정동교회 같은 양옥이었다. 1924년부터 오기선 목사가 담임했는데, 그의 아들은 문교부 장관을 지낸 오천석이다. 이승만 정권은 기독교인과 북한 출신들을 많이 기용했다. 이승만 자신이 감리교 사람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서 살았다. 다양한 교회 활동 등 장로교의 여러 문화를 체험했다. 남문밖 예배당에서도 야학을 운영했는데 나는 중학교 1학년 때 나보다 훨씬 나이 많은 처녀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학교에서는 일본어를 쓰고 밤에는 한글을 가르쳤다. 내가 광성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간 것은 어머니 뜻이었다. 광성은 감리교 계통의 학교로 부잣집 아이들이 많이 갔고, 평양고보는 공부를 잘해 관직을 꿈꾸며 출세하려는 시골 아이들이 많이 갔다. 숭실학교는 장로교 계통으로 더 기독교적이었다.
숭실 교내에 훌륭한 강당이 있어 대형 부흥회를 열었다. 미국인 윤산온 박사가 교장으로 있었다. 광성학교에도 멋진 강당이 있었다. 김득수 교장이 시카고에서 건축을 전공한 분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스테인드글라스까지 있는 강당에서 많은 집회를 열었다. 고교 시절 영국에서 신학을 전공한 한 맹인이 일본어로 강연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있다. 그는 셸리의 영시를 외우면서, 암울한 조국의 현실을 상기시켰다. ‘이프 윈터 컴스 와이 스프링 낫 소 파?’, 겨울이 오면 어찌 봄이 멀겠는가. 이는 내 일생을 통하여 항상 새기고 다니는 시구절이 되었다.
매년 크리스마스이브 때가 되면 찬양대가 집집마다 다니면서 축가를 불렀다. 찬양대는 늘 우리 집을 제일 마지막으로 들렀다. 우리 집에서는 러시아식 커다란 주전자인 ‘서모알’(사모바르)로 영국제 립턴 홍차를 끓여 카스텔라와 함께 대접했다. 어머니는 십여명의 찬양대를 정성으로 대접했다. 교회에서 아동극을 할 때 내가 화가 밀레 역으로 무대에 오른 적도 있다. 평양은 교회가 많은 덕분에 음악도 발전했다.
우리나라의 서양 음악은 교회에서 시작했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가톨릭은 그림을, 신교는 음악을 했다. 가톨릭은 희랍인들의 습성에 따라 조각을 만들었다. 조각을 모시게 되니 신전이 되었다. 희랍 미술이라는 것이 집 짓고 모신 것, 그게 신전이다. 그런 전통 때문에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가서 전도할 수 있었다. 베드로와 바울이 예수교를 희랍인들에게 전달한 첫 전도사다. 희랍인들에게는 독특한 습성이 있었다. 자기 자신의 조각도 만들고, 자기 조상도 만드는 것이다. 사실 유대교에서 형상(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한다. 그러니까 가톨릭은 그림을 하고, 기독교는 음악을 한다.
평양대부흥의 물꼬를 튼 길선주(갓쓴이) 목사는 한국인 최초 장로교 목사 7인 가운데 한명이다. 1902년 황해도·평안도 도조사 시절 가족사진으로 앞줄 가운데 남자 아이가 훗날 화가로 김병기와 절친했던 둘째아들 길진섭이다.
평양대부흥의 물꼬를 튼 길선주(갓쓴이) 목사는 한국인 최초 장로교 목사 7인 가운데 한명이다. 1902년 황해도·평안도 도조사 시절 가족사진으로 앞줄 가운데 남자 아이가 훗날 화가로 김병기와 절친했던 둘째아들 길진섭이다.
한국 현대음악은 교회음악으로 출발해 북에서 남으로 퍼졌다고 본다. 평양 출신 음악가만 해도 바이올리니스트 계정식, 성악가 김천애, 작곡가 김동진 등이 있다. 평양의 기독교 가정 출신 가운데 문학 예술가들도 많이 나왔다. 길진섭과 마찬가지로, 김동진도 목사 아들이었고, 시·소설·희곡 등 각각 작가로 이름난 주요한·주요섭·주영섭, 이들 3형제의 부친도 유명한 주공삼 목사였다
. 주영섭은 고리키의 <밤주막>을 연출한 연극인이었다. 오윤선 장로의 아들인 오영진은 경성제대 출신으로 뮤지컬 <시집가는 날>을 썼다. 처음에는 일본어로 <맹진사댁 경사>로 발표했는데, 어느 나라 오페라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명작이다. 오영진은 내 사촌형의 딸과 결혼해 나와도 가까운 사이였다. <순교자>의 작가 김은국도 남문밖교회 이학봉 목사의 외손자이자 김찬도 목사의 아들이다. 목사 자손이라고 해 모두 훌륭한 것만도 아니다. 목사와 장로 아들 가운데 일본 여성과 사귀거나 결혼한 이들도 적지 않다.
평양 기독교계는 일제강점기 도산 안창호(왼쪽)의 흥사단운동에도 중심으로 참여했다. 사진은 1920년 도산의 생일 기념으로 상하이 임시의정원 원장 손정도(오른쪽) 목사와 함께한 모습.
평양 기독교계는 일제강점기 도산 안창호(왼쪽)의 흥사단운동에도 중심으로 참여했다. 사진은 1920년 도산의 생일 기념으로 상하이 임시의정원 원장 손정도(오른쪽) 목사와 함께한 모습.
1930년대 만주 길림 시절 손정도 목사는 기독교 집안이었던 김일성의 옥살이를 보살펴준 인연이 있었다. 김일성은 보답으로 1991년 미국 시민권자인 손 목사의 차남 원태씨 부부를 평양에 초대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30년대 만주 길림 시절 손정도 목사는 기독교 집안이었던 김일성의 옥살이를 보살펴준 인연이 있었다. 김일성은 보답으로 1991년 미국 시민권자인 손 목사의 차남 원태씨 부부를 평양에 초대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만주 길림교회를 만든 손정도 목사 집안과도 남다른 인연이 있다. 그는 원래 서울 정동교회 목사로 있다 북경을 거쳐 길림으로 갔다. 손 목사의 맏아들 원일은 해군을 영도한 제독이고, 작은아들은 내 친구이기도 한 원태이다. 해방 이후 같은 친목회원이었는데, 미국으로 이민 가 의사로 살았다. 그의 여동생 손인실은 의사 문병기의 부인으로,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 회장을 지냈다. 1954년께 나는 서울대 교수라고는 했지만 전쟁 직후여서 너나없이 살림이 어려웠다. 손인실이 미국 대사관 문정관 부인들 대여섯명을 모아 내 미술 수업을 받도록 주선하고 통역까지 맡아 주었다.
훗날 뉴욕에서 살 때 그 부부와 인연을 이어가게 되었다. 뉴욕 허드슨강 북쪽 끝 태펀지 다리 옆에 한국 교회가 하나 있다. 내가 그곳에서 장로를 지냈는데, 부부를 그곳 교회로 인도했다. 손원태는 김일성의 친구이기도 했다. 어려서 ‘왕치기’ 놀이라고 왕 잡기 놀이를 같이 하고 놀았다고 했다. 김일성도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손원태 가족 이야기를 자세히 소개했다. 김일성은 길림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손정도 목사의 큰 보살핌을 받아, 평생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의 가족과 지낸 일화도 소개했다. 원래 김일성 가문도 교회에 다녔다. 그 집안에 강양욱 목사가 있지 않은가. 1991년 김일성이 손원태를 평양으로 초청해 금시계를 선물하면서 후한 대접을 했다고 들었다.
구술·집필/윤범모 동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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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은혜교회 청년들, 새벽예배 참여 열기 ‘가득’
장년 못지 않게 높은 참여율… 3월 1일 ‘새날 새벽예배’를 가다
큰은혜교회 새날새벽예배
▲청년들이 설교 후 통성기도를 하고 있다. ⓒ교회 제공
사순절 첫날이자 삼일절인 3월 첫날,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서울 낙성대동 큰은혜교회 본당을 가득 메웠다. 매달 1일 큰은혜교회는 '자녀를 위한 새날 새벽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휴일이면서 새학기를 앞둔 이날 청년대학부 학생들이 대거 참석한 것.
큰은혜교회 청년대학부는 새날 새벽예배뿐 아니라 매일 새벽을 깨우고 있다. 보통 새벽예배는 장년 세대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데 비해, 큰은혜교회 새벽예배는 그 못지 않게 청년들의 참여도가 높다. 청년들뿐 아니라 거의 전 성도들이 참석하다 보니, 본당은 일찌감치 들어갈 자리가 없다.
청년들은 새날 새벽예배마다 교인들에게 제공되는 아침식사 준비를 돕고 설거지를 함께하며 기쁘게 봉사하고 있기도 하다. 큰은혜교회 성도들은 가족이나 또래끼리 삼삼오오 모여 새벽예배 후 식사를 함께하며 '영에 이어 육까지' 든든히 채운 다음, 일터나 학교, 가정으로 나아간다.
큰은혜교회 새날새벽예배
▲청년들이 새벽예배 후 설거지를 하고 있다. ⓒ교회 제공
이 같은 전통이 이어지다 보니, 이들이 결혼하여 부모가 되어서도 자녀와 함께 새벽예배에 출석하고 있다. 그래서 새벽예배 때면 자모실과 영·유아부실도 엄마와 자녀들로 붐빈다. 자녀들 때문에 오래 기도하진 못하겠지만, 일찍부터 자녀들에게 '새벽을 깨우는 습관'을 몸소 보여줄 수 있으니 이만한 조기교육도 없다.
새날 새벽예배 때는 이 자녀들을 중심으로 찬양대가 세워진다. 유치부에서부터 고등부까지, 자녀들이 부모님과 함께 하얀 색 옷을 맞춰 입고 예배시간보다 일찍 나와 찬양연습을 하고, 예배시간 내내 성가대석에 앉게 된다. 자녀들 참여가 계속 늘어나면서, 성가대석이 부족해 강대상에 걸터앉는 자녀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 날은 151명의 학생들이 'He is Change Me'를 소리높여 함께 불렀다.
큰은혜교회 새날새벽예배
▲이규호 목사가 설교하는 가운데, 성가대 찬양을 맡은 자녀들이 강대상에서 경청하는 모습. ⓒ교회 제공
이날 이규호 담임목사는 '당신의 인생에 기쁨이 필요합니다(빌 1:1-6)'는 제목으로 은혜와 샬롬, 감사와 간구 등에 대해 말씀을 전했다. 그는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지만 그냥 주시는 사랑과 축복이고 엄청난 혜택이다. 은혜가 있으면 기쁨이 넘치고 능력 있는 인생이 된다"며 "샬롬이란 소극적 평화가 아니라 적극적 평화로, 문제가 해결되고 기쁨이 충만해져 영육이 강건한 관계로까지 가게 된다. 한글로는 잘 표현할 수 없지만 평화와 강건함"이라고 말했다.
이 목사는 "자녀를 볼 때마다 감사가 넘치면 부모도 행복할 것이고, 아내와 남편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행복의 절대 조건"이라며 "자녀가 잘 되길 원하면 자녀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하기보다, 새벽에 나와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실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어떤 부모들은 잔소리는 있지만 기도가 없고, 걱정은 있지만 기도의 무릎이 없다"며 "내가 키우면 콩나물 키우는 정도 밖에 안 되지만,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맡기면 어마어마하게 키워주실 것"이라고 전했다.
이규호 목사는 "간구란 쉽게 말해 일반적인 기도보다 더 간절히 하는 것이다. 명궁의 첫째 조건이 활 실력보다 '눈이 밝은 것'이듯, 인생을 제대로 살아가려면 눈이 열려야 한다"며 "기도하면 비전이 생기고 은혜의 눈이 열린다. 기도하면 희미하던 목표가 분명해진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으면 만사형통하더라도 기쁠 수 없다. 눈앞의 현실이 캄캄하다 해도, 기도함으로 눈이 열리면 비전이 보일 것"이라고 선포했다.
큰은혜교회 청년대학부는 새학기를 맞아 오는 11일까지 '항상 기뻐하라(빌 1-2장)'는 주제로 특별새벽기도회를 열고 있다.
큰은혜교회 새날새벽예배
▲청년들이 설교를 듣고 있다. ⓒ교회 제공
청년들 중에는 이번 '특새'를 계기로 새벽을 깨우기로 결심한 이들이 적지 않다. 서희정 청년은 "새벽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하나님이 내 삶의 '예비 타이어'가 아니라 '운전대'를 잡고 계심을 고백하고 훈련받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라며 "기도하면서 바라는 것이 있다면, 내 기분이나 몸 상태에 좌지우지 되지 않는 신앙생활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믿음"이라고 각오를 전했다.
최성전 청년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고 싶어 새벽예배를 시작했다"며 "예전부터 죄를 떠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이번 새벽예배를 통해 변화된 제 모습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은희 청년은 "예전에도 새벽기도를 다닌 적이 있지만, 그 때는 '올바른 신앙인은 새벽기도도 다녀야 해' 하는 수동적 의미였다"며 "이번에 다시 새벽예배를 시작한 이유는 우선 친언니의 건강이 조금 안 좋아 더욱 정성스러운 기도가 필요하고, 단기선교 이후 받은 은혜를 놓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키워나가고 싶어서"라고 설명했다.
조 청년은 "또 다른 이유는 중보기도학교를 다니면서 중보기도 시간을 따로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면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실 것 같았기 때문"이라며 "저보다 저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저를 이 세상에 보내신 진정한 이유를 알고 싶고, 그 뜻대로 행하는 삶을 살 뿐 아니라 중보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응답이 올 수 있기를 바란다"고 기대했다.
큰은혜교회 새날새벽예배
▲전 성도들이 기도하고 있다. ⓒ교회 제공
이규호 목사는 큰은혜교회 부임 직후부터 새벽예배를 강조했으며, 새날 새벽예배에는 전날부터 문자를 발송하는 등 전 교인들의 출석을 독려하고 있다. 특히 초등학생들과 청년들, 초신자와 남성들을 깨우는 새벽예배를 강조한다.
이 목사는 지난 2013년 새벽기도 관련 컨퍼런스에서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이 새벽예배 가고 싶다고 부모를 조르고, 청년들이 서로를 깨워주면서 새벽기도에 나오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기쁘다"며 "새벽기도와 담을 쌓았던 남성 직장인들도 새벽기도에 나오고, 초신자들도 새벽기도의 맛을 들이도록 누군가 도와줘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 "초신자나 믿음이 연약한 자들에게도 새벽기도가 필요하고, 그들도 기회만 주어지면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며 "부모는 자녀들이 한 시간이라도 잠을 더 자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자녀들도 부모가 깨워주면 얼마든지 새벽을 깨울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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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교육 새 패러다임 제시하는 불로교회학교 ‘화제’
기존 주일학교에 ‘방과후학교’ 접목한 새로운 교회 교육 시스템 개발
불로교회학교
▲불로교회학교 학생들 ⓒ불로교회 홈페이지
'인재를 키우는 미래형 대안학교'를 표방하는 불로교회학교가 지역 주민들을 중심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인천광역시 서구 불로동에 위치한 불로교회(담임 한민수 목사)와 3C비전스쿨·3C통합코칭센터를 통해 미래 인재를 양육해온 황만철 대표가 의기투합해 기존 주일학교에 '방과후학교'를 접목한 새로운 유형의 교회 교육 시스템을 개발한 것.
불로교회학교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방과 후에 진행되는 '방과후학교'와 토요일과 주일 진행되는 '주말학교'로 운영된다. 두 과정 모두 6세(2학기 9개월부터)에서 고등학교 3학년 사이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며, '3C 통합코칭'이 교육의 기본 방향이다. '작은 학교'로 불리는 8개 반과 그 아래 40개 반을 두고 있다.
3C통합코칭의 3C는 인격(Character), 실력(Competence), 헌신(Commitment)의 영어 첫 글자를 딴 것으로,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인재가 갖춰야 할 기본적인 소양을 말한다. 따라서 불로교회학교 역시 이 3C를 기준으로 한 통합코칭을 지향하고 있으며, 그 최종 목표는 위대하고 거룩한 예수님의 제자들을 양육하는 것이다.
불로교회학교가 기존 주일학교와 가장 크게 구분되는 것은 평일 방과 후에도 운영된다는 점이다. 황만철 대표는 "일반적인 대안학교들은 전통적인 공교육 시스템어서 벗어나 별도로 커리큘럼을 짜지만, 불로교회학교는 대안학교를 표방하면서도 기존의 공교육 시스템을 부정하지 않고 그 기반 위에서 서로 서너지를 내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구체적으로 말해, 불로교회학교 학생들은 평일 자신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지식을 습득하고 학교를 마치면 불로교회에서 신앙과 인격, 바른 태도 등을 함양한다. 즉, 학습 능력과 자기 주도적인 태도를 기르기 위해 성경을 읽고 쓸 뿐만 아니라, 암송하며, 믿음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지침들을 따른다. 황 대표는 이를 두고 지역 학교와 교회의 '상생 모델'이라고 했다.
불로교회학교의 또 하나의 특징은 '삑삑' '존중' '안전' '배려' '주도' '팀' '시간' '긍정'이라는 단어들로 표현할 수 있다. '삑삑'은 소리를 듣고 바른 자세로 집중하기, '존중'은 자신과 타인을 존중하는 언어와 행봉 보여주기, '안전'은 위험한 행동 하지 않기, '배려'는 타인에게 양보하고 도와주기, '주도'는 해야 할 일 찾아 하기와 행동 전에 생각하기, '팀'은 목표를 향한 공동의 행동하기, '시간'은 시간 지키기와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긍정'은 주어진 환경에 긍정적인 반응 보이기다.
불로교회 한민수 목사는 "위대함과 거룩함으로 가는 불로교회학교의 핵심가치와 목표는 믿음과 행함으로 위대하고 거룩한 예수님의 제자를 양성하는 것"이라며 "우리의 믿음은 믿음의 이야기를 읽고, 듣고, 암송하고 인정하는 것이며, 우리의 행함은 믿음의 이야기에 대한 행함 실천계획을 만들고 실천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8개의 작은 학교가 교회 성장의 원동력이 되기를, 40개 반을 이끄는 리더들이 교회학교 성장의 원동력이 되기를 꿈꾼다"며 "또 7일 동안 매일 오는 교회학교를 꿈꾸고, 2017년 작은 학교 40개 반에 5명의 정원이 채워져 200명이 함께 예배하는 교회학교를 꿈꾼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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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4일을 기억하십니까?
1980년 5월 24일 오전 7시 서울형무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김재규는 묶인채 걸어서 서울구치소 사형실로 들어갔다. 죽음의 의자에 앉자 유언을 물었다.
“하고 싶은 남길 말이 있으면 하시지요”
전날 장문의 유언을 남겼는데 무슨 할말이 있단 말인가? 또 말은 산자들이 속이고 자랑하려고 하는 짓거리들인데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무슨말이 필요할까?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면서 “다 이루었다”고 승리를 선언했다.
부처님은 죽으면서 “조용히 웃기만” 했다.
김재규는 말이 없었다.
그러자 봉지처럼 만든 하얀 보자기가 얼굴위로 덮여 씌워졌다. 머리위로 올가미가 달린 밧줄이 소리 없이 내려왔다. 밧줄이 목에 걸리자 의자 밑이 갈라졌다. 덜커덩! 소리와 함께 김재규의 몸은 아래층으로 떨어지면서 대롱대롱 매달렸다.
목이 졸려 숨이 막혀 죽어가면서 김재규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유도시합 하던 때를 생각하고 있었다. 김재규는 검은 띠 유도선수였다. 시합때 상대를 넘어뜨리고 목조르기를 시도한다. 상대가 숨이 막혀 질식기절하기 직전 심판이 한판승을 선언한다. 통쾌한 순간이다. 이순간의 영광을 위하여 피나는 훈련을 한다.
그런데 유도의 묘미는 목조르기를 당할 때이다. 상대선수가 위에서 조르거나 뒤에서 목을 조른다. 발버둥 치다가 기진맥진 축 늘어저 숨이 막히면서 질식순간이 온다. 생명이 끊어지기 직전이다. 그런데 그 순간 오르가즘 비슷한 희열이 오면서 아늑하고 조용한 평안이 찾아온다.
(아!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다!)
죽음 같은 평화라고 할까? 어느 유도선수는 목조르기 당할 때의 맛을 잊지 못하여 유도를 한다고 고백했다. 김재규는 죽어가면서 목조르기를 체험하고 있었다.
(내가 전두환에게 한판승으로 목조르기를 당하여 죽는구나. 그러나 다음순간 환생으로 영생할 터이니 내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랴!)
누가 봐도 김재규는 마지막까지 의연했다.
이어서 박선호 이기주 유성옥 김태원이 1시간 간격으로 잇따라 처형됐다. 착하고 정의로웠던 부하들은 죽으면서도 장부답게 김재규를 따라갔다. 박흥주는 현역군인이기에 항소가 안됐다. 그래서 두 달 앞서 3월 6일 총살형을 받았다.
“김재규씨의 시신을 가져가시오. 빨리 찾아가지 않으면 교도소당국이 화장해 버리겠습니다. 장례는 내 일안으로 끝내야합니다.”
동생 김항규가 형의 시신을 빼내왔다. 다음날 5월 25일 경기도 광주군 보포면 능골리 삼성공원묘지에 김재규를 묻었다. 박흥주는 경기도 포천의 천주교묘지에 묻혔다. 박선호는 경기도 고양의 공원묘지에, 이기주는 경기도 양주군 구내면 공원묘지에 묻혔다. 유성옥과 김태원은 화장했다. 원래는 김재규의 유언대로 경북 선산의 선영에 6인묘를 만들고져 했으나 당국이 막았다. 죽어 혼백으로 합쳐서 복수할까 두려웠던 모양이다.
1989년 2월 24일 전남 광주의 송죽회는 경기도 광주로 올라와 “의사 김재규장군
추모비”를 세웠다. 추모비에 새겨진 추모시.
“먹구름이 하늘을 덮고
광풍 몰아 덮칠 때에
홀로 한줄기 정기를 뿜어
어두운 천지를 밝혔건만
눈부신 저 햇살은 다시 맞지 못하고
슬퍼라, 만사람 가슴을 찢는 구나
아! 화천의 그 기상 칠색 무지개 되어
이 땅위에 길이 이어지리.“
1989. 1. 20 송죽회
위의 글은 이계선이 쓴 김재규복권소설 “신부님, 김재규는 악인인가요?”의 끝부분입니다. 이소설을 노창현의 뉴스로가 연재해주고 있습니다. 컴퓨터 Google에 “뉴스로”를 쓰고 누르면 반갑게 튀어나옵니다.
촛불탄핵이 일어나는 바람에 신으로 떠 받들던 박정희신화가 벗겨져 버렸습니다. 조카사위 김종필은 국모 육영수여사가 투기심 많은 중전마마라고 폭로했습니다. 박근혜가 탄핵당했기 때문이지요.
4년전 “신부님, 김재규는...”을 썼지만 출판할 수가 없었습니다. 청와대가 무서워 출판사들이 기피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말할수 있습니다. 오는 4월 27일 뉴욕 맨해튼에서 소설로 쓴 “김재규이야기 모임”을 갖습니다. 공명(정광채)이 이끄는 흥사단강좌시간입니다. 이민사회의 선구자 도산안창호선생이 나성에서 시작한 흥사단의 “홍익인간”은 이민의 표상이기도합니다. 찾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