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 버렸고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눅 8:1-8)
평양의 수경재배 단지
이번 평양 방문중에 해야 할 중요한 일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 중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이 지금까지 돕고 있었던 곳을 찾아가서 일의 진행과정을 확인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보낸 분유가 평양 육아원과 여러 탁아소에 잘 공급되고 있는지, 또보내준 밀가루가 봉수 국수공장에서 가공되어 필요한 사람들에게 배분되고 있는지,그리고 비디오 내장형 텔레비전 200대를 500여 가정교회에 보내 주었는데 그것들이 잘 사용되고 있는지 꼼꼼한 확인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수경재배 단지가 잘 운영되고 있는지도 확인했습니다. 4년전에 북한 그리스도교 연맹이 시드니 방문중에 그곳에 우리 교포 000집사님의 수경재배 농장 비닐하우스에 가득 차 있는 여러 채소들을 보고 감탄하면서 그것을 평양에 하나 지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평양 두루섬에 100평의 비닐하우스를 지어서 수경재배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작년 여름 저희가 1500평의 수경재배 단지를 지을 수 있는 자재들을 보내주었고 이번 방북 중에 그것이 잘 지어졌는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튼튼하게 잘 지어놨는지 이번에 60㎝넘게 내린 눈 속에서도 조금도 상하지 않았습니다. 1500평 비닐하우스는 그 규모 또한 대단했습니다. 밀알학교의 바닥 면적이 600평 정도인데, 이 세배의 면적이 온통 비닐하우스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 대규모의 단지를 지어 놓고 이번에 보일러와 발전기(generator), 그리고 이스라엘에서 수경제배에 필요한 비료와 농약을 보내 주었습니다. 아마 올해부터는 농사가 시작될 것입니다. 그런데 겨울에 기온이 영하 28도 이하로 내려가는 바람에 방치된 상태로 놔뒀는데, 여름에 한창 오이가 열릴 시기에는 600평에서 하루에 1000㎏의 오이를 매일 땄다고 합니다. 1톤 가량을 매일 따니까 얼마나 힘겹겠습니까? 그 오이들을 북한이 제일 자랑하는 의료기관인 평양산원-한 1000개의 침상을 갖춘 산부인과 병원-과 고아원, 탁아소의 아이들에게 공급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수경재배가 땅에 심어서 재배하는 방법이 아니라, 뿌리에 계속 습기를 공급해서 재배하는 기술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이러스도 없고, 또 각종 해충도 접근할 수 없어서 가장 청정한 채소를 재배할 수 있다고 합니다. 늘 수분과 질소인산가리를 필두로 식물에 가장 좋은 영양소를 고루 공급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뿌리가 땅에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힘차게 잘 자라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습기가 없으므로
이런 모습을 보면서 한 성경 본문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눅 8:6) 흙이 엷은 돌밭에 떨어진 씨앗이 싹이 나도록 잘 자랐습니다. 그러나 햇빛이 쨍쨍 쪼이니까 얼마 안 있다가 엷은 흙 속에서 자라나던 식물은 타 버리고 말았습니다. 습기가 없어 말랐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환란이나 핍박이 인해 자라나는 나무가 죽었다고 주님께서 설명하시기 전에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다고 하셨습니다. 해가 아무리 쨍쨍 쪼인다 할지라도 수경재배처럼 습기가 계속 공급된다면 그 태양빛을 받아 더욱 잘 자랐을텐데 습기가 보충되지 않아서 말랐다고 설명합니다.
위기의 원인
우리 신앙생활에도 위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외부로부터의 핍박과 환란입니다. 사람인지라 그 위기에 흔들리고 약합니다. 그런데 주께서는 그것은 2차 원인일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1차 원인은 우리 안에 습기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습기가 있으면 문제될 게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핍박속에서 지켜낸 진정한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예로 손양원 목사님은 무서운 핍박 속에서도 마음속에 끊임없이 신앙의 영양소들이 공급되었기 때문에 기독교 100년 사상 가장 위대한 믿음의 꽃을 이땅에 피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되는 것은 외적인 핍박보다 우리 속에 습기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습기가 없어서 말랐고... 외적인 어려움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네 속에 습기가 있는지 주님께서는 묻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습기-회개의 습기
우리 안에 어떤 습기가 필요할까요?
첫 번째로 필요한 습기는 회개의 습기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밝은 빛 앞에 나아가 내 인생이 얼마나 잘못 되었나를 바라보며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회개의 습기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잘 보지 못합니다. 시력이 약해져 자기가 누군지를 모르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커텐이 쳐져 있는 방은 깨끗해 보입니다. 그러나 커텐을 걷어내고 화사한 봄볕이 온 방을 가득 채우면 이제까지 깨끗했던 방이 구석구석 먼지로 꽉 차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빛이 내 속에 들어오면 그 때, 내가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 인생을 사는지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람은 자식을 내 자신의 목숨보다 사랑한다고 모두들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남편이 외국에 가서 체코산 크리스탈 화병을 사왔습니다. 크리스탈 중 체코산 크리스탈이 제일 좋다고 합니다. 그 화병을 애지중지 했는데 어느 날 아이가 그 화병을 깼습니다. 그걸 보자마자 성이 나서 아이에게 꽥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또 그 화병 때문에 잔소리를 합니다. 그런데 마침 남편이 사온 화병이 두개였습니다. 다음 번엔 그 아내가 화병을 깹니다. 그랬더니 '내가 왜 이러지?' 하고는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우리가 자식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기실은 나만큼 자식을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지 이러한 예를 통해 깨닫습니다.
뺨 맞았다고 자살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다고 자살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남의 말을 듣고 자살하는 사람은 참 많습니다. 프랑스에 유명한 장관이 한 분 계셨는데 이 장관님께서 독직사건의 혐의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장관이 돈을 받고 그 대가로 부하직원을 승진시켜 주었다는 내용의 사건이었습니다. 그 장관은 자기 결백을 유서로 작성한 다음 자살했습니다. 그리고 후에 이모저모 검사해 본 결과 그 장관은 유서대로 결백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세상에 참 많습니다. 싸늘한 말 한마디로 생긴 상처를 평생 가슴에 안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개 아이들은 부모가 했던 아픈 말들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아픈 말들이 가슴에 담겨 그 아이의 인격이 형성되고, 쓴뿌리를 만들어 냅니다. 말로 인한 상처가 지워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라면서 말이라는 것이 얼마나 독한 것인가를 몸 전체로 느끼고 삽니다. 그러면서도 내가 다른 사람 얘기는 아무런 여과 도, 생각도 없이 입에 뱉는 대로 또는 더 사나운 말을 골라서 남의 가슴을 쥐어박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러한 인생의 모습을 볼 때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므로 그 입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는 말이 사실인 것을 봅니다. 우리의 말속에 다른 사람의 영혼에 상처를 주는 독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또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을 향해서 가혹한 사람일수록 그 자신에 대해서는 얼마나 너그러운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을 보는 눈으로 자기를 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남을 난도질하는 인생을 삽니다. 이 악한 모습을 보다보면 차마 나를 볼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요일 1:8) 성경은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죄 없다는 착각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죄는 곳곳에 자리잡습니다. 금식기도 하는 그곳에도 죄가 나와 함께 웅크려 기도하는 폼을 잡는 것을 봅니다. 신학교라고 하면 세상 학문 다 버리고 거룩한 학문을 하니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학교에 가면 신학의 죄라는 놈이 또 웅크리고 있습니다. 제일 웃기는 사실은 신학교마다 컨닝을 잘한다고 합니다. 그러한 신학생들이 있다면 회개하십시오. 심각한 문제입니다. 도처에 죄가 있는데 아무도 죄를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회개의 눈물이 있다면 그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주께서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시 44:2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사 1:18)
이 말씀은 회개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입니다.
사울왕은 큰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후회는 했지만 회개의 눈물을 보이지 않았고, 그보다 훨씬 더 큰 죄를 지은 다윗은 하나님 앞에 눈물로 나가서 그 죄를 이기는 놀라운 승리의 삶을 살게 됩니다. 똑같이 죄를 지었습니다. 가룟 유다도 주님을 배반했고 베드로도 배반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후회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예수님을 대가로 받은 돈을 가지고 가 다시 물려달라고 말합니다. 뜻대로 되지 않자 그는 스스로 목을 메고 자살했습니다. 주님의 가장 사랑 받던 제자 베드로, 당당했던 그가 주님을 저주하며 배반합니다. 그러다 닭이 우니 네가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배반하리라는 주님의 음성이 생각나서 통곡을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는 평생 닭소리가 들릴 때마다 일어나 무릎꿇고 회개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기독교에서 성자라 함은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죄 안에 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깨닫는 자도 없습니다. 단지 기독교의 성자는 자기 죄악의 깊이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어느 분이 말하기를 기독교의 성자는 자서전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참회록을 쓰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자서전은, 사람들이 그때는 나를 오해했지만 기실은 그것이 아니었고 이렇게 결백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형식이라면 참회록은 다른 사람은 나를 이렇게 멋지게 보았지만 내 속삶은 이렇게 엉터리라고 고백하는 형식입니다. 오거스틴의 참회록과 로마서 7장의 참회록, 톨스토이의 참회록.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거짓되고 모순된 존재인가를 내어놓고 눈물 흘리는 습기, 그 습기가 내 신앙을 우리 주님 앞에 늘 겸손하게 서도록 만들어 줍니다. 내 인생을 교만에서 막아주고, 하나님처럼 높아지고 싶은 망상에서 나를 깨우쳐주고, 하나님 앞에 용서받은 감격을 날마다 회복하게 하므로 승리의 삶을 살수 있게 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습기-감격의 습기
두 번째, 우리에게 필요한 또 다른 습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감격의 습기입니다. 언제 감격해서 울어 보신 적 있습니까? 허준이라는 텔레비전 드라마 볼 때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일본의 한 성도가 처음으로 예수 믿을 때의 얘기를 했습디다. 자기가 성경 첫장을 펴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말씀을 읽고 너무 감격스러워 울었답니다. 그 성도의 말은 이러합니다. "그 크신 하나님이 태초에 세상의 모든 천지를 만드셨다면 그러면 나도 만들었을 것이 아닌가. 내가 하나님의 작품이라니.." 내가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것을 감격으로 붙잡고 사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이므로 스스로를 멸시할 자격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 이러저러하게 말하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내가 하나님 작품입니다. 밀알 미술관에 가보면 이쾌대씨란 화가의 작품을 비롯 길진섭씨, 김만영씨등 한 스무분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 개화기 당시에 내노라하던 중요한 월북 작가들입니다. 이분들 작품을 소장하고 있으니 무척 부러워하십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부러워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사실입니다.
아프리카의 한 선교사가 이런 보고서를 해왔습니다. 자기가 아프리카 어린 아이들 몇명을 모아놓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이 말씀을 낭송한 다음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세상에 찾아오셨는지, 그 분이 어떻게 우리와 함께 사시고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아 주셨는지, 그리고 인류의 죄를 위해서 어떻게 십자가에서 죽으셨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하자 갑자기 한 아이가 흐느끼며 울었습니다. "나를 위해서 그렇다니요!" 이 선교사가 집에 돌아와서 "하나님, 어째서 십자가를 말하는 나는 감동이 없고 십자가를 듣는 저 아이에게는 저런 감동이 있습니까? 익숙해서 감동을 잃어버린 내 악을 용서해 주시옵소서."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보고를 받아보았습니다. 감동의 눈물이 없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람은 기독교는 감상주의로 빠지면 안된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철학 과 논리를 넘어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그분과 생생히 만나는데 어떻게 감동이 없습니까? 감동이 빠져버린 찬양, 그것은 창가일 뿐입니다. 옛날에는 노래를 창가라고 했습니다. 감동을 잃어버린 설교는 그냥 얘기에 불과합니다. 감동이 사라진 봉사, 감동이 사라진 위로는 소리나는 구리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합니다. 감동의 습기가 내 심령의 빈곳을 채우고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웁니다. 이 감동은 나를 주님을 향해서 든든히 나아가게 만드는 놀라운 능력이 됩니다. 가장 비참한 얘기중의 하나는 이런 얘기입니다. "내가 과거에는 참 은혜가 많았고 감동도 있었다." 이 사람은 비참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지금은 어떻단 말입니까? 하나님이 안 계십니까? 하나님이 닳아 지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탈색했습니까? 그래서 감동이 없습니까? 주께서 네 첫사랑을 회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감동을 회복하라는 말입니다. 다시 원위치로 가서 어디서 그 감동을 잃었는가 에베소 교회를 향해 똑똑히 알아서 그 지점으로 돌아가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어디서 감동의 습기를 놓친 채, 깡마른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하십니까? 다시 돌아가십시오.
우리에게 필요한 습기-긍휼의 습기
그리고 세 번째로, 긍휼의 습기가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을 향해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신문에 나타난 무서운 악을 보면서 "이 못된 것들!" 하며 그것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불쌍히 여김이 필요합니다. 어째서 인생을 그렇게 밖에 살 수 없는가에 대해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과거에 그렇게 살았던 내 삶이 하나님의 긍휼에 의해서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긍휼을 내 것으로 소유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른 사람을 긍휼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소년 소녀 가장의 모습을 볼 때 우리 마음으로부터 진정한 감동이 일어야 합니다. 진정한 긍휼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 ARS 불우이웃돕기 전화번호로 전화를 거는 사람들 중 부자는 거의 없고 대다수가 서민이라고 합니다. 특히 강남 지역의 통화율이 제일 낮습니다.
주께서 긍휼을 베푸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왜 복이 있습니까? 다른 사람을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이미 그의 심정안에 그리스도께서 긍휼의 문으로 구속해 주신 그 은총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속과 긍휼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남을 긍휼의 눈으로 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동티모르의 비참한 인도의 저 큰 재앙을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긍휼의 눈물이 필요한 때입니다. 자식들이 속을 썩입니까? 자식들이 몸이 아파서 가슴 졸입니까? 자식들이 마음대로 안되어 애가 닳습니까? 자식을 위해서 긍휼의 눈물 흘리기를 중단하지 마십시오. 계속 우십시오. 암부르시우스 주교는 말했습니다. "모니카 자매여, 눈물의 기도는 자식을 반드시 구원할 것입니다. 낙심하지 마소서." 눈물의 기도는 자식을 구원한다고 하더니 그 눈물의 기도가 기어코 기독교 역사상 사도바울 다음의 위대한 성자 어거스틴을 만들어 냈습니다. 눈물의 기도, 자식들을 살립니다. 눈물의 기도, 남편을 살립니다. 눈물의 기도, 아내를 살립니다. 긍휼의 눈물을 흘리시는 것을 중단하지 마십시오. 놀라운 사실은 자식을 위해서 내 이웃을 향해서 긍휼의 눈물을 흘리는 자를 향해서 하나님께서 은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축복해 주십니다. 월요일이면 우리 은혜교회 예배당에서 큐티 모임이 있습니다. 000 집사님이 인도하십니다. 거기 다녀오는 사람들은 눈이 퉁퉁 부어서 나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신앙을 든든히 세워 가는 모습을 제가 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인도하는 자매님은 제가 CCC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대학교 3학년때 처음 만났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여정을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은 세상을 떠났고, 그리고 자녀들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속상할 때마다 많이 울었습니다. 그 울음을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복된 길로 자녀들을 인도해 주셨고, 또 한가지 생각지 않았던 축복은 우는 그 자매를 주께서 풍성한 습기로 키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만 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습기를 공급해 주고 있습니다.
부족한 습기의 회복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어떤 습기가 내게 부족합니까? 하나님 앞에 내 잘못을 시인하는 회개의 습기입니까? 하나님께서 베푸신 그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 바로서는 감격의 습기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 위에 서서 하나님 없는 세상을 바라보며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는 긍휼의 습기입니까? 어떤 습기가 우리에게 없습니까? 습기를 회복하십시다. 습기가 보충되면 표토가 깊지 못한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돌밭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평양 두루섬에 있는 수경 재배 단지에는 물통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습기가 계속 공급되니까 아름답게 자라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회복된 습기의 은혜
우리가 이 땅에서 우리 두 눈에 습기가 있을 때에 주께서 놀라운 약속을 해 주십니다. 다윗은 늘 하나님 앞에서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시 56:8) 자기가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도망자로 쫓기는 신세를 당할 때마다 악에게 악으로 대항하지 않고 그 억울한 눈물을 하나님의 눈물 병에 담아달라고 외쳤습니다. 히스기야가 하나님 앞에 울면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왕하 20:5)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천성에 입성할 때 주께서 뛰어나와서 가장 처음 행하시는 일은 우리의 두 눈에서 눈물을 씻기시는 것입니다. 눈에 습기가 없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안아주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내 신앙에 습기가 마르면 바리새적인 신앙밖에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깡마른 논리로 끝나버릴 수 있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4) 이 말은 습기가 없는 자는 저주가 있다는 말을 바로 바꿔 해석해도 됩니다. 다시 습기를 회복하십시다. 외부에서 우리를 향한 고통과 환난과 핍박이 문제가 아니라 내 속에 습기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 앞에 잘못했을 때 잘못을 시인하는 회개의 습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의 습기. 하나님 없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긍휼의 습기로 저들에게 나아가 세상을 살 때 주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복되도다." 이 은혜가 사랑하는 성도들의 삶 속에 역사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