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2001-12-13 20:37:56 read : 1866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1년 4월 1일
엡 1:3-6
꽃을 피우는 힘은 어디에서 올까?
산수유가 노란 옷을 입고 살며시 나타나더니 개나리도 노란 손수건을 가슴에 달고 내밉니다. 목련은 부풀어 하얀 가슴이 터질 듯 합니다. 봄이 왔습니다. 그 동안 어디 있다가 이렇게 나타났을까요? 온 세상의 나무들의 움이 트이고 가지가지 색깔로 꽃을 피우는 저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오늘은 그 힘 앞에 감사와 찬양의 예배를 드려봅니다. 그때 찾아오는 하늘과 땅의 은총, "하나님 보시기에 참 좋았다"한 그 일체 좋음의 세계 안에 평화의 띠로 묶어 하나되게 하신 그분의 뜻을 헤아려 봅니다.
어느 한 아이가 이런 질문을 합니다. "왜 개나리는 노랗고 진달래는 왜 빨간색인 줄 알아?" 그런 물음에 어른들은 대답을 하지 못하지요. 이미 선악과를 먹을 대로 먹은 존재가 되었고 가슴의 언어를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기에 바른 정답을 말하기 어렵지요. 그런데 질문을 던졌던 아이가 이렇게 대답을 스스로 합니다.
"개나리는 지난밤에 노란 꿈을 꾸어서 노란색이고 진달래는 빨간 꿈을 꾸어서 빨간 색이야". 가슴에서 나오는 소리요 에덴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이것이 회개라면 회개가 아닐까 합니다.
20세기말부터 머리로부터 가슴으로 내려오는 내적 우주여행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부터 서구사회에 일기 시작한 지성중심에서 감성중심으로의 교육과 상담과 심리학의 발전과 일반 대중화, 감성회복 내지는 영성회복 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아는 차원이 아닌 영혼의 첫소리인 감성, 느끼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단계에까지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봄이 온 것이 아니고 겨울이 변하여 봄이 된 것입니다. 봄은 또 봄으로 충분히 익고 익어서 여름으로 변할 것입니다. 물론 이 여름도 그대로 여름으로 있을 수 없습니다. 틀림없이 여름은 변하여 겨울이 될 것입니다. 누군가가 이런 표현을 했어요. "잠자는 밤은 겨울이고 일하는 낮은 여름이고 밥 먹는 저녁은 가을이며 깨는 아침은 봄이다" 라고. 우리는 지금 깨는 시간에 자리잡고 있고, 깨어야 할 계절인 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법
사랑과 애정을 받아야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어린 아이에서 성인으로 성숙해지면서, 육체적인 사랑의 표현에 대한 욕구를 자제하는 반면, 말로써 하는 사랑의 표현을 받고 싶은 욕구를 점점 강하게 나타냅니다.
혹시 "우리는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어떠한 사람도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태어났기에 살았고 또 지금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리라고 한번도 스스로 생각하고 계획한 다음에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또 나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은 채 우리는 우리 부모에게서 이 때, 이 나라에,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내가 우리 부모의 자녀로 태어난 것을 원망한다면 우리 부모도 할 말이 없습니다. "내가 너를 낳고 싶어서 낳은 것이 아니다."라고 밖에 대답할 수 없습니다.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시 139:13-14)
다윗은 자신을 지으시고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기이하신 섭리와 능력을 묵상하면서 자기 존재에 대하여 감탄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폴 브랜드라는 사람은 "우리가 놀랠 것은 나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탄생한 사실이다."라고 「오묘한 육체」라는 책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한 인간의 탄생은 기적 중의 기적이며 신비 중의 신비라고 했습니다. 감탄 부호 하나로 인간 탄생의 신비를 다 표현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난 것에 대해서 신기해하고 감탄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부모에게 물어도 해답이 없고 나 자신에게 물어도 해답이 없습니다. 나를 낳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니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아무도 "내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나? 너를 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나?"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나를 창세 전부터 이 때에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만이 그 해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스스로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 창조하신 분의 뜻을 따라 존재할 뿐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근거해서 사랑 받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대해 스스로 반문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아무도 나를 사랑하는 이가 없고 나는 요즘 너무 외로이 살고 있는데 내가 사랑 받기 위해서 태어났단 말인가? 내가 어려서는 조실부모해서 부모님 사랑도 받지 못하고 이 집 저 집 전전하면서 미움받고 살았고 또 결혼해서 남편이라고 만났는데 사랑의 "사"자도 모르고..."라고 하면서 지금까지 온갖 학대를 받으면서 살아온 자신의 생애를 한탄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랑 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요? 사랑 받기 위해서 학교에 간 일이 없고, 사랑 받기 위해서 직장에 간 일이 없고, 사랑 받기 위해서 결혼했다고 말하지만 사랑 받는 사람 별로 없고, 사랑 받기 위해서 누구를 만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려고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다" 우리 주님만이 그 대답을 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4절 말씀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4절). 하나님은 창세 전에 나를 아셨고 창세 전에 나를 사랑하셔서 이 세상에 태어나도록 계획하셨다는 것입니다. 또 그 다음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5절).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해서 양자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시려고 양자를 삼은 것입니다.
양자를 삼은 이유
그런데 "왜 양자를 삼았느냐"라는 대답이 3절에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3절) 복 주시려고 양자를 삼았다는 것입니다. 자녀 없는 부모들은 양자를 삼습니다. 양자를 삼는 이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자기에게 있는 모든 재산을 그 자식에게 주려고 양자 삼습니다. 자기가 세상을 떠나면 그 재산을 누가 가져가겠습니까? 친척에게 주기는 아깝고, 형제에게 주기도 그렇고, 조카에게 주기도 그렇고 그래서 양자를 삼는 것입니다. 전혀 이름도, 얼굴도 몰랐으나 그를 택해서 양자로 삼아 그에게 복을 줍니다. 또 사랑해주려고 양자 삼는 것입니다. 양자 삼아 일 시키려고 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양자로 삼으신 것은 하늘의 복을 주기 위해서, 그리고 사랑하기 위해서 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사랑 받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믿습니다. 그리고 죄사함을 받고 천국에서 영생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것은 이런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받으라고 태어나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까? 나를 사랑하셔서 내가 행복하게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까? 나를 사랑하셔서 죽으셨습니다. 전부 거기에 "나"라는 존재가 있습니다. 왜 부모님을 이 세상에 살게 하셨을까요? 나를 사랑해서 낳아주라고 우리 부모님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왜 이 교회에 목회자를 세우셨습니까? 여러분을 영적으로 성숙하게 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이 목회자를 수 없는 연단을 통해서 세워주셨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을 위해서 이 목회자를 하나님께서 보내주셨다고 믿으신다면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요한 사도는 하나님의 본성을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할 대상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해 줄 사람이 필요하고 하나님이 사랑해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셔서 자녀 삼으셨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낳을 때 그 자녀에 대해서 하나의 목적이 있습니다. 사랑해 주려고 낳습니다. 그 자식을 낳아놓고 일 시키려고, 뭘 받으려고 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낳을 때는 사랑하려고 낳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 받기 위해서 태어났고 지금도 사랑 받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곡조보다는 가사가 마음에 와 닿는 노래입니다.
"내가 만일 하늘이라면 그대 얼굴을 물들고 싶소.
붉게 물든 저녁 노을 어린아이처럼 그대 뺨에 물들고 싶소"
그런데 이미 하나님은 우리 얼굴에 당신의 모습을, 우리 마음 가운데 당신의 형상을 물들어 놓으셨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과 아주 연결이 잘 되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 성가대가 한 번 찬양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태초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만남을 통해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낳게 할 때 일 시키려고 낳게 했다면 내가 얼마나 비참한 존재겠습니까? 만약에 나를 고생만 하라고 태어나게 했다면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 마음이 얼마나 부정적이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기 위한 유일한 믿음이라면 나를 사랑하려고 태어나게 했다고 믿어야 그 믿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자기 생에 대하여 한없는 기쁨을 갖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나게 했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얼마나 좋으신 분으로 고백하겠습니까?
미국 오페라계에 유명한 힐리니 헐버튼이라는 가수가 있습니다. 그 가수가 어느 날 2층 창밖을 바라보다가 우연히 자기 집 아이와 이웃집 아이가 놀다가 하는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웃 집 아이가 "우리 아버지는 시장님과 아주 잘 알아 그래서 시장님과 골프 치러 갔어" 하니까 그 얘기를 듣고 있던 자기 아들이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을 잘 아신다.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아"라고 하더랍니다. 이 얘기를 듣던 헐버튼이 창가에 서서 커튼을 잡고 소리내어 울었습니다. "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그 하나님을 아버지가 안다고 고백해 준 아들이 너무 너무 자랑스러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안다는 것이 뭡니까? 하나님이 사랑해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 받게 하기 위해 태어나게 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여기에 신비가 있고 감사가 있습니다. 이것은 기적 중에 기적입니다. 창세 전에 나를 사랑하신 계획과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뜻을 안다면 현재도, 미래도 우리 삶 전체가 다 하나님의 사랑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존재가 언제나 사랑 받고 있다는 사실 속에 있을 때 신성한 자존심이 생기며 살만한 가치가 있고 살맛이 나고 긍지를 가지며 인생의 모든 장애를 다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을 받게 될 때부터 자기 자신을 자기가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내가 나를 사랑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기 위해 창조한 나를 내가 싫어한다면 하나님을 얼마나 노엽게 하는 것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 한 번 살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는 날을 소중히 알고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므로 나도 나를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주시므로 나도 나를 받아주어야 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
하나님은 내가 선하고 착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므로 나의 출생과, 신분과, 용모와, 성격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시는 것입니다.
간혹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또 이 세상에 태어날 기회가 있다면 부잣집의 아들로, 그리고 잘 생긴 인자한 부모에게서, 시골에 태어나지 않고 서울 한복판에서, 귀부인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나서 보살핌을 받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주님의 은혜를 받은 이후에 "그 모습 그대로 내가 너를 사랑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일 백 번 또 태어나도 이대로 태어나야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많은 인류 가운데 한 사람도 똑같이 생긴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얼굴이 똑같은 쌍둥이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주 똑같지는 않고 약간은 다릅니다. 그런데 얼굴이 독특하게 생겨서 이상하게 보이는 사람은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셔서 금방 알아보기 위해서 그렇게 만드셨다고 생각하시면 은혜가 될 것입니다.
자신을 미워하지 말자
우리는 자신을 미워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이 사랑 받지 못하는 것을 원망하고, 부모를 미워하고, 자기를 미워하고, 상처받은 과거를 용서하지 못하고 한탄하며 사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랑 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은 자신을 용서하며 현재 그대로 자기를 용납하는 것입니다.
미국 남가주 대학의 어느 교수가 이런 강좌를 개설했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법" 그런데 이 강좌가 대 히트를 쳤습니다. 현대인의 모든 문제는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처럼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자기가 되십시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십시오. 행복하십시오.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자기가 자기를 좋아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좋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자신을 싫어합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학대하는데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사랑하니 너도 너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일생동안 자기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큰 요인이 자기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 받기 위해서 태어났다면 자기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도록 살아야 됩니다. 사랑 받기 위해서는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했으니까 나도 나를 사랑해야 됩니다.
교육학의 원리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할 수는 없지만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받은 사람만이 성장해서도 사랑할 수 있고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남을 사랑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 사람은 후에도 여유가 있고, 정서가 건전하고 사랑하며 사는 성품이 됩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정서 상 결함이 있습니다. 또 어렸을 때부터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은 남을 사랑하기가 어렵습니다. 자수성가하느라고 고생해서 돈 번 사람은 그 돈 남에게 주지 못합니다. 그냥 가지고 있다 죽지 쓰지도 못합니다. 이런 사람에 대하여 비판할 필요 없습니다. 그 사람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 가장 필요한 것
구약시대에는 짐승의 죽음을 통한 피로 인간의 죄를 속죄하였습니다. 이 짐승의 피는 후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예표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흘린 피로 우리는 모든 죄를 사함 받게 되었습니다. 이 땅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피였습니다. 이 피가 없이는 인간은 죄에서 용서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이 세상에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고귀한 것입니다. 우리가 죄 값으로 영원히 지옥 형벌을 받아야 하는데 우리를 대신해서 주님께서 그 형벌을 대신하여 받으셨으니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가 그리스도께 입은 바 사랑의 빚은 우리가 평생을 갚아도 도저히 갚을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소망과 생명을 주신 분입니다. 만일 주님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이 없었다면 이 세상은 절망 속에서 영원한 파멸만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공로로 영원한 나라를 상속받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예수님의 이 피의 복음을 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여기에만 소망과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 아름다운 사랑은 우리들 가슴 속에 각인된 채로 오래오래 남아있게 됩니다. 그처럼 오래도록 남는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꽃이 자기를 가꾸어주는 손길에게 향기를 남기듯이 <받은 사랑을 되돌릴 줄 아는 사랑>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사랑의 문은 두들겨야 열리는 것을 깨달아서 <열심히 두들길 줄 아는 사랑>도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또한 아는 척이나 잘난 척하는 것과 같은 "척"하는 버릇을 없앤 <벌거숭이의 솔직한 사랑>도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리고 사랑을 일생 속의 에피소드로 생각하지 않고 일생의 역사로 생각하는 <진지한 사랑>도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또한 사랑은 죽어 땅속에 묻힐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사랑은 실천이 뒤따라야 하는데 이와 같이 <실천된 사랑>도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때로 사람들은 사랑하는 상대를 잃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 사랑하는 상대를 잃어버렸을 때까지를 포함하며, 오히려 그 때에 비로소 사랑이 완성된다는 <미래지향적 사랑>도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아름다운 예술작품
사랑은 그 자체로서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 취하는 모든 것은 하나의 아름다운 예술작품이 됩니다. 사랑이 빠진 예술, 사랑이 빠진 아름다움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이라면 사실상 <더 아름다운 사랑>과 <덜 아름다운 사랑>의 구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우리의 삶에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이제 아르바이트와 같은 사랑은 피하고 진정한 사랑을 추구해 보십시오. 자욱한 안개에 휩싸인 인생 길에서 진정한 사랑의 빛을 따라가 보십시오. 그러면 곧 우리의 삶에 찬란한 봄이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꽃은 세상에 태어나 사랑을 받습니다. 꽃보다 더 귀한 우리 인간의 생명도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당당히 사랑 받을 권리를 가지고 현재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부부사이에도, 부모님들로부터도, 자녀들로부터도, 이 사회와 나라에서도, 하나님의 교회에서도, 이웃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특별히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미 엄청난 사랑을 받았고 구원에 이르는 사랑 받은 존재입니다. 오늘 세례를 받으신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앞으로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