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마음 2001-12-28 20:42:27 read : 1926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본문 : 사42:1-9
스티븐 코비의 「원리 중심의 리더쉽」에서 리더쉽의 네 가지 차원과 기본 원칙에 대한
개념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개인차원의 신뢰성입니다. 신뢰성이란 성품과 역량의 조합입니다. 원리중심의 리더
의 특징적인 성품으로 성실성, 성숙도, 풍요의 심리를 들고 있습니다. 둘째는 대인 관계 차
원에서의 신뢰입니다. 셋째는 관리 차원에서의 임파워먼트입니다. 아직 개발되지 않은 잠재
력이 있다는 인식입니다. 넷째는 조직 차원에서의 한 방향 정렬입니다. 비전이 사람들에게
공유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리더쉽을 개발할 수 있습니까?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출발하여 점차 외부
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양심을 훈련하고 자기 발전을 가로막는 과거의 속박들 즉 식욕과 정
욕, 자존심과 가식, 야심과 허영심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성장은 지름길
이 없고 자기만의 '6일 간의 창조' 과정을 거쳐야 하기에 지금 현재 위치에서 할 것을 권합
니다. 무엇보다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기도로 연구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하고도 강력한
자기 훈련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의 모습을 보면 어떠합니까? 선거 때가 되면 사람들은 누가 당선될 것
인가에 대한 기대와 새로운 정계 구도에 대한 전망으로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일말의 기대감
을 갖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소박한 그 일말의 기대마저 짓밟아버리곤 합니다. 선거 때마다
금권 타락 선거와 지역주의로 좌절감에 빠지고 우리의 가슴에 멍이 들기 일쑤입니다. 사람
을 갈아치운다고 더 나아질 것 같지 않고, 판을 바꾼다고 해서 정직한 사회가 될 것 같지도
않다는 무력감에 빠집니다.
사치향락은 더 극에 달하고, 뇌물과 탈법은 점점 더 심해지고, 실종된 시민의식이 온 세상
을 어지럽히고, 음란, 퇴폐, 극단적인 이기주의, 청소년에게까지 만연된 충동적인 폭력, 무책
임한 환경 파괴 등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희망의 단서를 도저히 찾아볼 수 없게 만듭니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정치 지도자가 되어야 이 백성을 정신 차리게 하고 이 사회를 다시금
살 맛나게 만들 수 있습니까? 그러나 사실 무슨 기대를 한다는 것 자체가 바보 같다는 생각
이 들 정도로 우리는 날마다 서글픈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역사를 통해 경험적으로 배운 진리가 있습니다. 정치 지도자에게 기대를 하면
하는 만큼 실망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세상 국가에 대해 이상주의를 펼치면 펼치는 만큼
절망의 늪에 빠질 확률이 더 커집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역사를 통해 누누이 배웠고 또 우
리나라의 짧은 헌정사를 통해서 많이 경험했습니다. 사람들은 속는 줄 알면서 다시 한 번
믿어주고, 당할 줄 뻔히 알면서 또 한 번 기대를 가져보는 것입니다. 일종의 '정치 중독증'이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달리 뾰족한 대안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상나라의 숙명이요, 이 세상국가의 운명입니다. 달리 대안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이 세상나라에 모든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참으로 어
리석은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훌륭한 정치가가 출현하면 우리 인생의 꿈이 성취될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감을 품는 것은 순진하다기보다 오히려 어리석은 것이라고 해야 옳을 것
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국가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라거나 이 세상의 장래사를 놓고 무
조건 비관적으로 생각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 본연의 자세를 바로잡아야 된다는 말입니
다. 이 세상은 지나가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더 나아질 것도 더 나빠질 것도 없습니다. 죄악
으로 물든 세상은 원래가 그런 것입니다. 인생이란 본래 이런 세상에서 그저 그렇게 살다
가는 것입니다. 그 이상도 없고 그 이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무슨 영원한
소망이 있는 것처럼 넋을 잃고 추종한다면 신기루를 따라가는 사람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우리의 현실이 이러한데, 역사의 주인이신 만군의 여호와께서 철저하게 절망하고 있는 우
리를 향해서 놀라운 말씀을 들려주고 계십니다. 바로 이사야서 42장의 말씀입니다. 이 본문
은 이해하기가 쉬운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나 한 번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1절을 보면,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하나님
이 택한 사람이 여기 있으니 이 사람을 주목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택한 자가 누구입
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온 세상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 모든 사람이 소
망하는 이상적인 나라를 세우고 영원토록 통치하실 의의 왕이 여기 있으니 이 사람을 보라"
는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
에게 소망을 줄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사람입니다. 그를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실 때, 왕자로 오시지
않고 종으로 오셨다는 것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옛날 이사야 선지자는 인류의 구세주(예수 그리스도)가 종으로 오신다고 예언하였으며, 하
나님은 그 종을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였습니다(사 42:1). 예수님은 분명히 종으로 오셨고,
종으로서 섬김의 생활을 하였고, 자신을 죽기까지 낮추시되, 최하 말단에까지 낮아지셨습니
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왜 이와 같이 선택하시고 우리에게 주셨습니까? 그 이유는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는 말씀, 곧 이방에 공의를 베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
은 3절과 4절에 다시 한번 나옵니다.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이렇게 세 번이나 반복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것은 바
로 공의를 베풀기 위해서임을 그만큼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사야서 11장 4절에서 5절을 보면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
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
며,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 말씀합니다.
6절에서 9절에는 "그 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
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
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와 그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
을 소망하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 자신의 비유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다.
마태복음 20장을 보면 이런 비유가 있습니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으니, 저
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또 제 삼 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저희에게 이르되“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하니, 저희가 가고 제 육 시와 제 구 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제 십일 시에도 나가 보니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가로되“너희는 어찌하여 종일
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가로되“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가로되“너희
도 포도원에 들어가라.”하니라.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
중에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제 십일 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받은 후 집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
답하여 가로되“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
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
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
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 20:116).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남의 마음, 감정이나 생
각은 들여다보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독심술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상대
의 마음을 잘 읽은 삼국지의 제갈 공명은 적들을 마음대로 쥐락펴락하고 있으며 서양 마술
에서 독심술은 오늘도 관객을 사로잡는 메뉴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요즘 TV 대하사극 '태
조 왕건'에서 '내가 네 맘을 다 알고 있으니 내 뜻에 맞게 하라'며 신하를 꼼짝 못하게 하는
궁예의 관심(觀心)법이 퍼지고 있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의 행동을 주목하고 있다"는 말도
들려 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의 의중을 읽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세상살이
에서 이러한데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읽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이 비유는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리라는 격려의 말씀
입니까?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된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까? 경쟁심을 일으키는
격려의 말씀입니까?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서 사람들이 가장 오해하는 말씀이 이 비유입니다.
이 비유의 가장 핵심적인 교훈은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된 자가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종
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먼저 된 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분명 먼저 된 자
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나중 된 자(종)가 되셨
습니다.
우리가 비행기를 탈 때에 누가 제일 먼저 탑승합니까? 비행기 조종사와 승무원들이 먼저
탑승하여 비행기를 점검하고, 멀고도 먼 목적지까지 갈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것입
니다. 그 후에 승객들이 탑승합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누가 먼저 내립니까? 승객들을 먼저
내리게 하고, 그 후에 승무원과 조종사가 나중에 내립니다. 조종사와 승무원은 먼저 된 자로
서 나중 된 자들(승객)을 먼저 안전하게 내리게 한 후에 자기들은 나중 된 자가 되는 것입
니다. 먼저 된 자는 나중 된 자를 위하여 희생하고, 양보하고, 봉사함으로써 자신은 나중 되
는 것입니다. 가난한 가정에서 장자(먼저 된 자)로 태어나서 부모님을 모시고 동생들을 위해
희생적으로 봉사를 잘하면, 동생들(나중 된 자)이 교육도 잘 받고 성공을 하여 먼저 된 자가
됩니다.
이런 경우 장자가 원망을 하면 바로 이 비유에 나오는 먼저 된 자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
는 것입니다. 자신이 종이 되어, 나중 온 자들을 위해 수고하는 사람이 되어, 나중 온 자들
이 먼저 되는 것을 바라보면서 기뻐하고 감사하는 사람을 우리는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
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었다고 원망을 한 사람들도 성경에는 있습니다. 가인은 원망하다
가 동생을 죽였습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은 나중 된 자(탕자)를 영접하는 아버지
에게 원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분명 먼저 된 자였지만, 나중 된 자를 먼저 되도록(구원받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이 나중 된 자가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모세는 분명 먼저 된 자였지만 금송
아지를 만들고 섬긴 자기 동포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자기 이름을 제하여
달라."고 기도하였으며(출 32:32), 사도 바울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
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고 말하였습니다.
모세와 사도 바울은 분명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된 자가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20장의 비유는 경쟁심을 유발하기 위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된 자(종)가 되라는 주님의 권고요, 축복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섬기되 종으로서 섬기지 아니하고, 언제나 먼저 된 자만되려고 경쟁하고 다투는 그리스도인이 너무 많습니다.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된 자도 축복을 받았지만,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된 자가 사실은 더 큰 축복을 받은 자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을‘나의 종’이라고 말씀
하고 계십니다(사 42:1). 종은 먼저 된 자가 아니라, 나중 된 자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이 종은 분명 나중 된 자입니다. 그는 자신이 가장 똑똑하고 능력이 있다고 외치지 아니합
니다(사 42:2). 종은 외칠 수도 없고 목소리를 높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분명 먼저
된 자였지만 나중 된 자(종)가 되어, 상한 갈대를(나중 된 자) 꺾지 아니하고 꺼져 가는 등
불(나중 된 자)을 끄지 아니하면서, 자신이 스스로 나중 된 자가 되고 그들을 먼저 된 자가
되도록 하는 종이 되었습니다.
이‘종’이 누구입니까?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종은 누가복음 15장에 나
오는 탕자의 형님처럼 자신이 나중 되었다고 낙담하지 아니합니다(42:4). 오히려 세상에 공
의를 세우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 종의 교훈을 앙망하게 됩니다(42:4). 참으로 역설적
입니다. 먼저 되었던 자가 나중 되었는데 하나님은 이 나중 된 자를 다시 가장 먼저 된 자
로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과, 죽으심과, 부활의 사건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위대한 메시야(구세주)로 오신 증거는 그가 종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스릴 공의로운 나라가 우리 앞에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서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만큼 큰 불행은 없습니다. 그 나라의 백성이 되는 기회를
놓치는 것만큼 큰 손해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 사람이라도 더 전도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믿습니까? 그 나라가 지금 눈앞에 가까이 다가와 있는 것을 믿
으십니까? 그렇다면 왜 전도하지 않습니까? 목전에 와 있는 그 나라를 보면서도 옆에 있는
형제나 이웃을 그 나라로 인도하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예수를 믿고 있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성령으로 기름 부으신 그 종을, 분명히 우리가 믿음의 눈으
로 바라보며 그분이 다스릴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고 있다면,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
을 볼 때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다스리는 천국에
서 영원히 살 새로운 백성을 창조하시기 위해 전도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유명한 정신과 의사 엠 스콧펙 박사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정신 치료가
잘 되는 사람은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라고 합니다. 약한 의지의 소유자는 정신 치료가
잘 안 된다고 합니다. 강한 의지의 소유자는 뒷마당에 건장한 말 열두 필을 키우는 것과 같
고, 약한 의지의 소유자는 뒷마당에 작은 당나귀 한 마리를 키우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당나귀 한 마리는 자갈을 물리고, 훈련을 시켜도 별로 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또 말을 안
듣고 반항을 해도 별로 큰 손해도 입힐 수 없습니다. 꽃잎 몇 개를 뜯어먹을 정도일 것입니
다. 그러나 열두 필의 말은 그와는 다릅니다. 복종을 안할 때는 그 집 마당을 쑥대밭으로 만
들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큰 의지에 복종시키고 마구를 채워 주면 엄청난 일을 할 것
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전도하시면서 세 가지 태도를 취하셨습니다.
첫째로 온유하라
2절에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
며."
쉽게 말하면 예수님은 세상사람들에게 전도하실 때 온유하게 대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니
하며'라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면서 표현을 바꾸어 말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온유하심
을 특별히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분은 초라한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부드럽게, 그리고 너무나 자
연스럽게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만나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부드러
운 말씀은 날카로운 화살 같아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꽂혔습니다. 그분은 학자의 혀를
가지고 있어서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였고 절망하는 자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는 자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복종하는 놀라
운 기적이 여기저기서 일어났습니다. 온유함 속에 능력이 있었습니다. 온유한 자가 승리합니
다. 그러므로 불신자를 대할 때 온유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불쌍히 여기라.
3절에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말씀합니다. 상한 갈대와 같은 자, 꺼져가는 들불과 같은 자를 주님께서 얼마나 불
쌍히 여기시는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변에 상한 갈대와 같은 연약한 자가 있습니까? 꺼져가는 등불같이 양심도 없는 사람처
럼 보이는 자가 있습니까? 이런 자를 보면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그를 불쌍히 여겨야 합니
다. 그리고 기대를 가지고 그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비록 지금은 약하지만 소망이 있다는 눈
으로 불신자들을 보고 대해야 합니다.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자세입니다.
셋째는 포기하지 말라.
4절에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
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말씀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전도하시다가 절망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아무리 복음을 듣지 않아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하늘나라의 백성이면 그는 반드시 회개하고 돌아올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
고 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절대로 포기하는 법이 없습니다. 언제까지든지 기다려
주십니다. 지금까지 수년 동안 전도해도 아직 회개하지 않고 있는 가족이 있습니까? 가까운
사람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절대로 그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
니다.
당신의 강한 의지를 어디에다 묶어 놓을 것입니까? 주님의 손에 맡기십시오. 그리하면 엄
청난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강한 의지를 하나님께 묶어 놓은 종으로
서, 인류를 구원하는 큰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십니까? 우리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을 갖고 계십
니까? 그분이 다스리는 나라가 공의로운 나라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그 나라에만 소망
이 있는 줄로 확신합니까? 그렇다면 혼자 들어가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서운 이기주의입니
다.
그러므로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기 위해서 예수님과 같은 자세로
그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온유함을 가지고 대합시다. 상한 갈대를 다루듯이, 꺼져가는 등불
을 다루듯이 불쌍히 여기면서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합니다. 완악하게 복음을 거역할지라도
그들에게는 아직 작은 불꽃이 남아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절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기다림이 있을 뿐입니다.
5절에서 8절에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베푸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
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신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나 여호
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
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방인의 빛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와 같은 자세로 주변에 믿지 않는 불쌍한 자들을 찾아가면 우리의 손을 통해, 우리의
입술을 통해,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전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예수님의 마음과 태도를 가지고 안 믿는 자들을 찾아
가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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