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2001-12-28 16:52:50 read : 1883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본문: 시편 72:1-7,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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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코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36세 되던 해(98년) 만든 영화 '원더풀 라이프'―가장 행복했던 기억―(原題는 死後?8일 개봉)가 있습니다. 저도 아직 못 보았습니다마는, 언제 한 번 보려고 합니다. 이 영화는, '산다는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죽음' 영화인데, 39세 밖에 안된 젊은 감독의 영화로는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삶의 모습과 아이러니를, 시종 따스함을 잃지 않은 긍정적 시선으로 보여준다고 합니다. 이 영화에 의하면, 죽은 이들이 사후(死後) 세계로 들어가기 전, 1주일간 머무는 림보(limbo?천당과 지옥 사이 머무는 곳이란 뜻 외에, '감옥,' '망각'이란 뜻도 있다)라는 곳에 가면, 죽은 사람은 이곳 직원과의 면담을 통해 생전의 행복했던 추억을 하나씩 떠올리게 된답니다.
이 영화에서, 림보에 머물면서 일생을 평범하게만 살아왔던 40대 샐러리맨은 중학생 시절, 운전석 옆자리에 앉았던 전차 통학의 한 순간을 그 어떤 장면보다 뚜렷한 행복의 순간으로 기억하고, 16살 소녀는 디즈니랜드에서 놀이기구를 타던 기억을, 그리고 팔순 할머니는 대숲에 소풍가서 주먹밥 먹던 추억을 떠올립니다. 나중에 버스 표, 엽차 맛, 눈, 유치원 발표회 때 신었던 빨간 구두, 철없이 놀이공원의 추억을 떠올렸던 소녀는 마침내, 엄마가 귀지를 파주던 기억과 그 장면 엄마의 무릎 감촉, 냄새를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수정해냅니다. 푸른 대나무 숲과 벚꽃 활짝 핀 봄날, 연인을 기다리던 다리, 전쟁에 나가는 연인과의 마지막 데이트… 햇살 가득한 날, 한동안 자리잡았던 그 행복의 순간들은, 죽음이 무섭거나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삶의 연장이라고 이 영화는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한 번 이제까지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하나만 떠올려 보십시오. 물론 인생이 전부 '행복한 순간'만 있었던 건 아닐 겁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로 가득 찬 삶이었을 지도 모르고, 마음에 둘만큼 뚜렷하게 행복했던 기억이 없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기억들은 뒤로하고, 그립고 가슴 뛰던 기억을 한번쯤 되살려 낼 수 있다면, 그것은 답답하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고, 삶에 생기가 솟아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사실 평생 기억할 만한 그리움이 사람마다 다 있을 텐데, 그것을 잊어버리고 사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캘빈 밀러의『그리스도가 계신 자리』(The Table of Inwardness)라는 책을 읽다보니,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영적(靈的)인 내면성(內面性)이란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움을 말합니다." 저는 이 말이 너무 좋습니다. "왜 신앙생활이 무미건조(無味乾燥)하고, 답답하고, 생명력이 없을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것은 다른 데 이유가 있는 게 아닙니다. 곧,「그리스도에 대한 그리움」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대림절은 우리 모두에게 주님이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면서, 또한 주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을 회복하는 절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주님이 오시는데, 이렇게 오신다고 했습니다. "저는 벤 풀에 내리는 비 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 같이 임하리니"(6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목장에 풀을 벤 후에 내리는 단비처럼, 가물던 대지에 내리는 소낙비 같이 우리에게 오신다는 겁니다. 또 호세아 6장에는 "새벽마다 여명이 오듯이... 주님께서도 그처럼 어김없이 오시고, 해마다 쏟아지는 가을비처럼 오시고,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신다"고 했습니다. 기막힌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시편 18:28을 보면, "아, 주님, 진실로 주님은 내 등불을 밝히십니다. 주 나의 하나님은 어둠을 밝히십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어두운 세상, 혼란한 이 시대 백성들에게 주님이 오셔서 어둠을 밝히신다고 하는 이 말씀이야말로, 우리에게 크나 큰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걸 볼 때, 주님이 오시는 것은 우리에게 크나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주님은 심판의 주로도 오십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과 그 외 몇 곳에서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오시는 주님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주 예수님을, 희망 중에서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그리워하며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어떤 일을 이루시는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1. 오셔서 주의 백성에게 평강을 주십니다.
3절에 보면, "의로 인하여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라고 했고, 7절에 보면, "저의 날에 의인이 흥왕 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평강'이란 평화, 평안과 같은 말인데, 단지 마음이 편안한 것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히브리어로는 '샬롬'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그 어떤 악이나 전쟁 따위에 어지럽혀지지 않은, 포괄적인 구원과 번영과 온전함"을 의미합니다.
본문의 시는 <솔로몬의 시>로 되어 있는데, 사실은 다윗이 아들 솔로몬을 위해 기도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1절에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라고 한 것을 보면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그의 통치 초기에 하나님의 지혜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통치하였습니다. 이 이상적(理想的) 통치는 메시아 왕국에서 메시아를 통해 실현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메시아는 만 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의로 통치하시게 될 때, 백성에게 평강―구원, 번영, 온전함―이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평강에 대한 축복의 말씀이 엄청나게 많이 나옵니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열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했고, 에베소서 1:2에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축복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3:16에서는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삼 1:15에서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라고 했고, 유다서 1:2에선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라고 했고, 계시록 1:5에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는 도무지 기쁨과 평화를 찾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절망하고 있습니다. 너무 답답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현실은 더욱 어둡습니다. 희망이 없는 것 같이 생각됩니다. 절망적이라고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다고 단정해선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만 왕의 왕 되신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오시면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공생애를 사시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셨는데, 그 중에서 칭찬 받은 사람들은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믿음이란 다른 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통치하신다는 믿음을 말합니다. 이런 믿음을 가집시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가집시다. 주님이 우리에게 평화의 주님으로 임하신다는 믿음을 가집시다. 그러면 아무리 어둡고 답답한 세상이라도 주의 평화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고린도 후서 4:8에서 바울은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한다"라고 했습니다. 어떤 일을 당해도 절망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평강의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바울은 숱한 고난을 다 이겼습니다. 그리고 승리했습니다. 이 눈물 골짜기 같은 세상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을 소유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평화와 기쁨을 주시려고 오십니다. 아니, 주님이 바로 우리의 기쁨이요, 평화이십니다. 이것을 기억합시다. 그러면 곧 행복해 질 것입니다.
2. 가난한 자, 궁핍한 자를 도우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신다고 했습니다.
4절에 보면, "백성의 가난한 자를 신원하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라고 했습니다. 13절에 보면, "저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긍휼히 여기며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라고 했습니다. 메시아로 오시는 우리 주님의 일차적인 관심은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 압박 당하는 자들에게 있었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 궁핍한 자, 억압당하는 자에 대한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레위기 19:10에 보면,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했고, 신명기 15:7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라"고 했습니다. 시편 10:12에선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를 잊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가만히 보면, 예수님의 주위에 모였던 자들도 다 힘든 처지에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1:5에 보면,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는 말씀을 보면 이걸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감리교회는 그 창시자 존 웨슬리로부터 가난한 자, 궁핍한 자, 억압받는 자들에 대한 봉사에 힘쓰는 아름다운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웨슬리는 죄수에 대한 목회를 모든 감리교회 설교자의 의무로 결정하였고(1778년), 그 외에 '버려진 아이들을 위한 가정'(Children's Home), '구빈원'(救貧院: The Poor House), '노인들을 위한 감리교회의 집'(Methodist House for the Aged), '나그네 친구회'(The Stranger's Friendly Society), '기독교 공동체'(Christian Community)등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 강릉중앙교회에서도 오래 전부터 샬롬센터, 노인대학을 하고, 엄마랑 아기학교, 아버지 학교, 또 양로원과 모자원을 운영하고, 강릉병원에서 원목실을 두어 선교와 자원 봉사를 하고, 의료선교회를 통해 봉사하는 등,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관심이 바로 그리스도인 된 우리의 관심이 되어야 하기에 우리가 이런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소위 서민(庶民) 교회입니다. 물론 사회 지도층에 있는 이들도 더러 있습니다만, 거의 다 보통 사람들입니다. 그 중에서 특히 노년층과 가난한 분들이 많습니다. 저는 이런 우리의 교회를 '귀하게'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물론 여기서 얘기하는 가난이란, 무조건 물질적으로 궁핍한 것만을 가리키는 것만은 아닙니다. 고통 당하는 사람들, 압박 받는 사람들을 포함한 것입니다. 주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가난한 자, 궁핍한 자를 핍박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불의(不義)한 구조를 만들고, 자기 잇속만을 차리는 자들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십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또한 불의를 그냥 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여지없이 불의를 꺾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는 "압박하는 자들을 꺾으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신나는 말씀입니다. 압박 받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은 희망의 말씀, 복음, 곧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얼마 전에 찾아보았더니 대림절을 맞아 떼제 공동체에서 드리는 중보 기도문 중에 이런 기도가 있었습니다.
O Morning Star, Splendour of Light eternal and bright Sun of Justice; come and shine on all who live in darkness and in the shadow of death. ―Lord Jesus, come soon!
오, 새벽 별 되시며, 영원한 빛으로 영광스럽게 임하시는 밝고 의로우신 주님이시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 속에 사는 모든 이들에게 오셔서 빛을 비추어 주옵소서.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에게 빛(복된 소식)을 비추어 주시기 위해 오십니다. 주님은 억압받는 자들을 어둠의 세력에서 해방시키려고 오십니다. 무언가에 꽉 눌려서 꼼짝 못하는 사람들을 자유케 하려고 오십니다. 이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이런 억압받는 사람들을 다르게 표현하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 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무언가에 속박되어 어찌 할 줄을 모르는 사람들을 그 억압에서 풀어 주심으로써 편히 살 수 있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복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며칠 전에 감리교 인턴 목회자들을 위한 '목회상담의 이론과 실제'라는 강의를 하러 일영 연수원에 갔습니다. 구파발 역에서 내려서 어떤 목사님이 차를 가지고 와서 저를 데려 갔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운전해 가면서 "목사님이 번역하신『탈진한 목회자들을 위하여』(존 샌포드)을 읽고, 전에 교회 목회 할 때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걸 지금도 잊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힘들어도 앞으로 목회자들을 위해서 유익한 책을 번역하는 작업을 계속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사람의 목회자라도 그가 심적(心的) 압박을 당할 때, 거기서 나올 수 있도록 돕는 일이라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닌가"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왕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왕으로 오셔서 이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주님이 오시면, 이 어둡고 답답한 땅에 평화(平和)가 이루어집니다. 주님은 오셔서 가난한 자, 궁핍한 자를 도우시며, 또한 그러한 이들을 압박하는 자를 꺾으십니다. 우리는 이런 주님을 사모하며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또한, 본문 18-19절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 <영광>이 충만할지어다"라고 노래한 것처럼, 마음을 드높여 만 왕의 왕으로 오시는 메시야, 주님을 힘껏 찬송하며, 주께 영광을 돌리는 생을 힘차게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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