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21: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 21:16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요 21:17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요 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 21: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요 21: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요 21: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요 21: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뚜르게니에프의 ' 거지와 신사 ' 라는 작품을 보면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한 신사가 산책하는 중에 거지를 만났습니다. 거지는 말할 것도 없이 적선을 애걸하였고, 그를 불쌍하게 여긴 신사는 지갑을 꺼내기 위해서 주머니 속에 손을 넣었습니다. 그러나 낭패스럽게도 그날 따라 지갑을 들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런 경우 웬만한 사람이라면 마음이 변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주려해도 줄 돈이 없는 데야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지만 신사는 그렇다고 그냥 지나쳐 버리지 않습니다. 그는 다른 주머니 속에 손을 넣었습니다. 꼭 돈이 아니더라도 무엇이든지 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주머니 속 역시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바지와 저고리의 주머니란 주머니는 다 뒤졌습니다. 불행히도 주머니마다 모두 텅 비어있었습니다. 그렇건만 그는 거기서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거지의 손을 꼭 잡으면서 말하였습니다.
" 용서해 주시오. 아무 것도 드릴 것이 없군요. "
그 말을 들은 거지가 말했습니다.
" 아닙니다. 신사 양반 ! 난 이미 당신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
거지가 도대체 신사로부터 받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받은 것이 없는데 거지는 신사로부터 많은 것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무엇을 받았다는 말입니까?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봅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진실한 마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노동자들이 데모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사주는 잘 사는데,기업가는 망하지 않는데 자신의 고통을 감추고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들에게만 부담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 데모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힘들고 때로는 회사를 그만두어야 할 입장이지만 불평하지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 왜? 사주의 진실한 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함께 고통을 겪고 있거든요. 근로자들을 진심으로 가족같이 사랑하는 그 마음을 알고 있기에 고통이 와도 그것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진실한 마음이 전달되는 곳에는 힘이 들어도 감동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을 몰라도 자신은 어떤 일이 있어도 주님을 따르겠다고, 사랑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최후의 만찬 석에서도 도대체 누가 우리 주님을 배반할 수 있는가 분노하면서 요한을 통해서 예수님에게 묻기도 하였습니다.
주님을 사랑함에 있어서 누구보다 자신만만했고, 당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이 심문을 받을 때 하찮은 계집종에게 주님을 부인했고, 그것도 세 번이나 맹세하며 저주하며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장담과 고백이 다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이 그렇게 연약한 사람임을 알고 있습니다. 더 이상 주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주님이 부활하셨고 그것을 분명히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마음은 살아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주님의 제자 될 자격이 없음을 알고 그는 다시 옛날로 돌아가서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쓰디쓴 실패를 경험한 후 베드로는 진실해졌고 겸손해졌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연약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베드로를 주님은 찾아오셨고 다시 그를 회복시키시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그에게 맡겼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하나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면 나도 아프고, 기쁜 사람을 사랑하면 나도 기쁘고, 우는 자를 사랑하면 나도 웁니다.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동참하게 되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능력이고, 신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하겠다고 장담했던 베드로를 보십시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마당에 그는 무엇을 했습니까? 그를 사랑한다면 어찌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같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주님을 떠났습니다. 아니 주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장담은 하였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만나자마자 주님이 일성으로 묻고 있는 것은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관계가 깨졌거든요. 베드로가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면 어떻게 주님이 고난 받을 때 모른 다고 할 수 있으며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가정 문제로 상담해 오는 분들이 가끔 있습니다. 어려운 사정을 다 듣고 난 후에 제가 묻습니다. ' 정말 남편을 사랑하십니까? ' 하면 네 하고 대답하는 사람 거의 없습니다. 문제는 거기에 있었습니다. 뭐 남편이 인격이 부족하고, 무능하고, 별의별 이유와 항변이 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태산같은 문제도 소화할 수 있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 물으시는 것입니다.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모든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
그 때 베드로는 대답합니다. "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
세 번 주님이 물으시고, 베드로는 세 번 대답하였고 주님은 세 번 같은 내용의 사명을 맡겨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베드로를 부를 때 '베드로야' 하지 않고 그의 옛날 이름인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불렀습니다.
"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 라고 고백했을 때 주님께서 그에게 주신 이름은 베드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상급으로 주신 이름이 반석이란 뜻을 가진 베드로였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주님은 줄 곧 그를 베드로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은 그를 베드로라 부르지 않고 옛날 이름인 '시몬' 으로 부르십니다.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시몬' 이라는 말은 부서지기 쉬운 조약돌이라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야' 부르지 않고 '시몬아' 라고 부른 것은 ' 그래 내가 너의 연약함을 안다. 네가 나를 부인할 수밖에 없는 그 연약함을 내가 안다. 네가 다시 물고기 잡으러 갈 수밖에 없었던 그 연약함을 안다.' 그 말입니다. 흠도 티도 없는 완벽하신 주님이셨으나 주님은 우리를 회복하기 위해서 한없이 낮아지시고 그 낮은 자리까지 내려오셔서 내 허물을 책망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안으시고 담당하심으로 나를 다시 일으키시고 믿음의 용기를 갖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실수 할 때마다 주님의 책망을 들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 사람도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줄곧 장담하지만 넘어집니다. 멋지게 고백하지만 고백한대로 살지 못합니다. 그래도 우리가 이 자리에서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그럴 때마다 주님이 나를 용납해주시고, 나의 약함을 인정하시고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처음÷?낮은 곳으로 오셨고 우리의 수준으로 내려와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의 수준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조연경 씨라고 하는 작가 " 세상에서 가장 멋진 프로포즈라" 라는 꽁트 집을 썼는데 그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가난한 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아기를 낳는 출산 일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묻습니다.
" 당신이 아기를 낳으면 무슨 선물을 해주면 좋을까? "
아내는 아기를 낳는 순간에 장미꽃을 꺾어다 달라고 했습니다. 어느 날 잠을 자는데 갑자기 아내가 해산을 하려고 합니다. 급히 산부인과로 달려가서 새벽 두 세시 경에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 순간 남편은 아내와의 약속이 생각나서 장미꽃을 가지러 갑니다. 그런데 그 시간에 문을 연 꽃집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자기네들이 전세 들어 살고 있는 동네 어떤 집 담 밖으로 줄 장미가 나와 있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밤에 가시에 찔려 가면서 장미를 꺾었습니다. 그 장미꽃을 들고 가면서 남편은 진한 감동을 느낍니다. ' 아 아내가 나를 사랑하는구나. 만약 아내가 아이를 낳는 날 코트를 사달라고 했다거나 보석반지를 사달라고 했다면 내 형편에 도저히 할 수 없었을 텐데 새벽이든 밤이든 내가 할 수 있는 것, 가서 꺾기만 하면 되는 것을 요구하다니 아내는 정말 나를 사랑하는구나. "
바울은 " 사랑은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 " 이라고 하였습니다.
점수가 안 나오는 아이에게 좋은 점수를 요구하는 것, 돈 못 버는 남편에게 돈 많이 벌어 올 것을 요구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상대의 수준으로 내려오고, 상대의 눈높이를 맞추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아가페의 사랑을 요구하였을 때 베드로는 그것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필리아의 사랑으로 내려가 주었을 때 베드로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자기 생애를 던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주님의 양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 네가 필리아로 나를 사랑하느냐? "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 예 제가 주님을 필리아로 사랑합니다. "
그 때 주님은 " 내 양을 먹이라 " 고 당부합니다.
" 내 양을 먹이라. "
사랑의 구체성입니다.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내가 사랑하는 자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나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사랑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한 주님의 양을 내가 사랑한다면 그것이 바로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 주님의 계명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를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가 죽기까지 사랑한 주님의 양떼들을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피흘려 값 주고 사신 바 된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 주님을 사랑하는 그 증거를 무엇으로 보여줄 수 있습니까? 교회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정말 남편을 사랑하는 어느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남편은 장로님이신 데 직장이 없습니다. 그래서 권사님이 양품점을 하면서 어렵게 가정을 꾸려 가는데 장로님은 거의 사진 작가로 불릴 정도로 카메라를 사랑하며 오랫동안 취미생활을 즐겨온 분입니다. 어느 부활절 날 장로님께서 멋있는 사신을 찍기 위해서 교회에 카메라를 가지고 오셨는데 옆에다 놓고 기도하는 사이에 카메라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카메라는 최고품으로 대단히 고가였습니다. 장로님은 속이 상해서 사흘동안이나 밤을 잡수시지 않습니다. 그 때 권사님은 빛을 내어 똑같은 카메라를 하나 사드렸습니다. 이것을 본 성도들이 어이도 없고 한편으로는 감사해서 " 권사님, 그렇지 않아도 어려우신 데 그것을 또 사드렸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권사님은 " 우리 장로님에게 카메라를 빼앗은 것은 죽으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최고의 취미인데 그것을 어찌 그냥 두고 보겠습니까? " 하고 대답을 합니다.
비록 빛은 졌지만 잘하셨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남편이 소중히 여기는 것을 아내도 소중히 여기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상대방이 미적 감각을 소중히 여기면 그 아름다움을 같이 느껴주고, 책을 소중히 여기면 같이 책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 내 양을 먹이라. "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그 소중한 양을 나도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위하여 죽으신 이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교회에 나오시는 한 사람의 영혼들.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정말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교회 안에 있는 의자하나라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새 가족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어린양입니다.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어린양을 먹이라. 하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나를 따르라." 그 따름이 순교를 위한 따름인 줄을 알았지만 그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평생을 주님을 위해서 살았고, 주님을 위해서 죽었습니다. 왜? 주님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한 그 사랑, 내가 주님을 잠시 멀리 했을 때에도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내가 주님을 부인했지만 그 과거를 묻지 않으시고, 내가 약하지만 그것을 탓하지 않으시고 내 수준으로 내려오셔서 나를 다시 높여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마음에 담아 끝까지 주님을 따르고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여 믿음과 감동을 남겨주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