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하며 사는 삶 2002-02-18 14:53:49 read : 2433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롬 2:1-8> 2002/02/17
□ 회개하며 사는 삶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로마서 2장 1-8절)
1. 신앙인의 삶은 회개하며 사는 삶입니다.
누구인들 완전하게 행하며 사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신앙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신앙이란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행위입니다.
불완전하기에 실수를 하고, 그 실수를 회개할 줄 아는 것이 신앙인입니다.
즉 죄를 회개할 줄 아는 것이 신앙인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은 회개한 자들에게 주어진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허물과 잘못됨이 없이 살아가느냐 하는 것 보다도, 얼마나 진지하게 뉘우치고 회개하고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회개(悔改)는 인간에게만 있는 인간됨의 본성입니다. 짐승에게는 종교가 없지만 사람에게만 종교적 양심이 작용합니다.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란 항상 회개하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회개가 없는 신앙생활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스스로를 뉘우치고 회개하는 심정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가는 사람들인가? 자신의 허물과 죄됨을 항상 회개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다윗은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의 죄가 항상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신앙생활을 가장 잘 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자신의 허물과 죄를 빨리 깨닫고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빨리 빨리 회개하면 하나님도 빨리 빨리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십니다.
회개가 빠른 만큼 축복도 빠르고, 회개가 빠른 만큼 행복도 빠르고, 회개가 빠른 만큼 신앙도 빨리 성장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많은 인물들을 참조해 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가 수제자가 되었던 것은 그는 빠르게 회개할 줄 안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성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빠르게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던 사람들은 모두가 회개하는 일에 용감했고, 회개하는 일에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회개의 종교입니다.
회개 없는 기독교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회개가 있었기에 복음이 전파되었고,
회개가 있었기에 죄인이 살 수 있는 길이 열렸고,
회개가 있었기에 천국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모두 회개한 사람들이고, 지금도 회개를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회개 없는 그리스도인은 있을 수 없습니다.
2. 회개가 있는 삶에는 남을 이해하고 관용할 줄 알게 됩니다.
자신의 부족을 항상 알고 있기에 교만해지지 않습니다.
남의 실수와 허물에 대하여 영적으로 관용하게 됩니다.
그 관용은 상대방을 측은하게 여기게 되고, 그 측은한 마음은 사랑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이러한 관용과 사랑이 없었기에 예수님의 책망을 들었습니다. 저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가리우고 언제나 사람들 앞에서 허위와 가식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기에 저들은 도리어 모세의 율법을 강조했고, 그 율법으로 스스로를 죄인 되게 하였습니다.
오늘도 이런 신앙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남을 용서하게 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허물을 직시하고 영혼의 눈이 맑아졌다는 뜻입니다.
회개의 눈물이 깊으면 깊을수록 영혼은 맑아지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눈이 맑아지지 못하면 남의 단점만 보이고 자기의 잘못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주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길거리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거짓된 의의를 드러내기에 급급하였기 때문에 남을 용서할 줄 몰랐습니다.
그러기에 저들에게는 사랑이란 없었습니다.
오늘도 이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부족을 스스로 회개하는 마음에서 남을 사랑하게 됩니다.
회개한 눈에는 모든 사물이 새롭게 보입니다.
사람들도 새롭게 자기에게 다가서는 것을 봅니다.
이웃이 없던 사람에게 이웃이 보입니다.
추하게 보이던 사람들에게도 가까이 다가서게 됩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전도의 문이 열리게 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회개 없는 사람에게는 은혜의 감격이 없고, 전도도 못합니다.
눈물이 흘려져야 자신의 영혼이 맑아지고, 영혼이 맑아져야 상대를 보는 눈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화> 푸에르토리코의 국민 미술관에는 <노인과 여인>이라는 그림 한 폭이 걸려 있습니다.
푸른 수의를 입은 노인이 젊은 여자의 젖을 빠는 얼른 보면 삼류 포르노적인 그림처럼 보이는 그런 그림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문객들은 처음 그 그림을 볼 때 불쾌한 감정을 표출한다고 합니다. 이런 싸구려 그림이 어떻게 국립미술관의 벽을 장식할 수 있단 말인가... 딸 같은 여자와 놀아나는 노인의 부도덕을 통렬히 비난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알고 나면 모두 그 그림 앞에 숙연해 진다고 합니다.
그림의 주인공인 이 노인은 푸에르토리코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싸운 애국 투사였습니다.
독재정권은 노인을 체포하여 감옥에 넣고 가장 잔인한 형벌을 내렸습니다. '음식물 투입금지'령으로 노인은 서서히 굶어 죽어갔습니다. 딸은 해산한지 며칠 지나서 무거운 몸으로 아버지를 찾았습니다.
아버지의 임종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버지를 바라보는 딸의 눈에는 핏발이 서렸습니다.
마지막 숨을 헐떡이는 아버지 앞에서 무엇이 부끄러운가? 여인은 아버지를 위하여 가슴을 풀었습니다. 그리고 불은 젖을 아버지의 입에 물렸습니다. 바로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부녀간의 사랑과 헌신과 애국심이 담긴 숭고한 작품입니까?
푸에르토리코 국민은 이 그림을 볼 때마다 민족혼이 담긴 최고의 예술품으로 자랑하고 있다고 합니다.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십자가의 달린 예수를 바라보는 눈도 마찬가지입니다.
강도처럼 처형당한 예수가 무슨 인류의 구세주인가?라고 지금도 그런 눈으로 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회개한 맑은 영혼은 십자가를 쳐다 볼 때 눈물 없이 볼 수 없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자신을 보게 되고, 그리고 진실하게 회개한 자들은 죄인을 볼 때 도리어 측은한 마음으로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게 되고, 그를 구원하려는 사랑의 손길을 펴게 된다는 말입니다.
3. 회개가 있는 삶은 본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나타납니다.
사람에게는 귀소본능(歸巢本能)이란게 있습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자신이 낳고 자란 고향을 사람들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 명절에도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나선 줄 압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실향민의 아픔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크게 보면 인생은 모두 실향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온 실향민입니다.
아버지의 것을 가지고 나와 허랑방탕하게 지내는 둘째 아들과 같습니다.
아직도 갖고 있는 것들 때문에 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직도 갖고 있는 것이 많을수록 본향은 생각도 못합니다.
<젊음>과 <건강>과 <지식>과 <재물>과 <명예>와 <지위>가 있는 한, 현실의 거리에서 자유라는 기생과 놀아나는 재미에 취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오늘 하나님 없이 인생을 즐기며 살아보려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날엔가 하나 둘씩 손에서 빠져나갈 때, 그리고 빈손이 되어갈 때, 누구나 본향을 그리게 됩니다.
그때 순간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아버지의 집일 것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먹을 양식이 많은데 나는 여기서 죽게 되었구나' 하는 그 생각에서 결단을 내리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우리 모두 남루한 옷을 입고서라도 아버지께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것이 구원받은 성도들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회개하며 사는 성도들에게는 이 소망이 유일한 소망일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돌아갈 아버지의 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비록 아직 아버지의 집을 생각할 여유도 없이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구원의 예정된 사람들에게는 결단의 기회는 남아 있는 존재들이란 말입니다.
존 뉴튼은 당시 지중해를 오가는 상선의 선장이었던 아버지를 통해 나이 11살 때 부터 선원이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에는 경건한 신앙인이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신앙적인 훈련을 받았지만, 7살 되던 해에 어머니가 폐병으로 돌아가시고 난 후 선원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성격도 거칠어지고 삐뚤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자라면서 더욱 난폭한 성격으로 모든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특히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노예로 잡아오는 노예선에서 일하게 되면서 그는 배 안에서 온갖 나쁜 짓만 골라서 하는 잔인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1748년 3월 1일 그는 배 안에서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란 책을 우연히 발견하고 그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책을 읽는 동안 그는 오랫동안 그의 영혼 속에서 깊이 잠자고 있던 어머니의 기도 소리와 찬송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회개하였습니다.
그후 그는 새로운 삶의 출발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삶을 정리하고 그가 대적했던 바로 그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받고 목사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는 버킹검에서 16년간을, 올니 교회에서 27년간을 사역했습니다.
그런 중에 그가 회개한지 29년 되는 1779년, 찬송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작사하여 미국 민요 Amziging Grace곡에 붙여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찬송가에서 그는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방황하던 자신을 건져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늘 감사하는 생활을 하게 된 그의 마음을 그대로 나타내어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지금은 탕자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일지라도, 어느 한 순간 자신의 손에서 모든 것이 다 사라져갈 때 아버지의 집을 그리며, 결단의 순간은 올 것이란 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란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집을 떠나 하나님과 멀어진 상태에서 세상의 온갖 풍요를 만끽하며 지내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그것이 어쩌면 나 자신들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느 한순간 아버지를 생각해 낼 순간이 이를 것이란 말입니다.
그 순간 우리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면 회개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들이란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만세 전에 예정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감동적인 말입니까?
어차피 우리는 누더기 옷을 입고서라도 아버지께로 돌아만 갈 수 있다면, 거기에서 우리의 인생의 문제는 해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사람은 어떻게 사는 사람들입니까? 회개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내 자신의 범한 죄와 허물을 회개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회개하는 심령 속에 샬롬의 은총은 임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