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건 증인! 2002-03-04 12:12:13 read : 2372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사도행전 20장 23-24절) [2002년 2월 3일]
동물들의 생태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을 보면 흥미를 끄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초원에서 영양 떼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몇 마리의 사자가 사냥을 위하여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영양들은 전혀 눈치를 못하였습니다. 수풀 사이에 납작 엎드려 다가오는 사자들이 모습은 쉽게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더 다가서면 영양 중 한 마리가 희생하게 될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높은 나무에서 이것을 보고 있던 원숭이들이 꽥하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놀란 영양 떼가 스프링이라도 달린 듯이 뛰어 달아났습니다. 위기가 다가오면 달아나는 것은 모든 생물의 본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도 예외는 아닙니다. 환난이 다가오면 도망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면 바울이 환난과 결박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데도 마다하지 않고 다가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언제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동하는 바울이었습니다. 성령의 지시를 받아 선교지로 떠났고 그는 매 순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성령의 인도는 마치 방황하는 사람에게 비치는 빛과 같았고 풍랑 만난 배에게 등대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기를 고난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분명 성령은 바울에게 각성에서 결박과 환란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복음 때문에 많은 환난이 기다리고 있을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미 많은 환난을 격은 바울의 입장에서는 환난이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고린도 후서 11장 23절 이하를 보면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하여 그가 당한 고난이 얼마나 어려웠었는지를 고백하였습니다. 이 보다 더 심한 고난과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성령의 지시였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자신에게 주신 귀중하고 복된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위하여 목숨을 걸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4절에서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하였습니다. 목숨을 걸고 주신 사명을 감당하겠다는 의연한 결의입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의 소명이 그냥 단순한 자신의 의지나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소명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언제나 그는 철저한 소명 의식을 가지고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헌신하였습니다. 갈라디아 1장 1절에 보면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이라고 하여 그가 받은 사명은 철저히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고백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분명한 소명의식이 있어야합니다. 막연하게 해야지, 또는 의미가 있겠다, 가치있는 일일거야 라는 자기 식의 판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위로부터 받은 소명의식을 가지고 헌신하려는 자세가 되어야 제대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나의 달려갈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달려갈 길이란 자신의 삶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자신의 사는 의미와 목적이 바로 소명을 감당하는데 있다는 분명한 고백입니다. 빌립보서 1장 20절에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라는 말씀에서 볼 수 있는 고백입니다.
달려갈 길이란 표현에는 억지나 의무라기 보다는 기쁨으로 감당하려는 의지가 강한 표현으로 보기도 합니다. 은혜를 받고 구원의 은총을 체험한 사람들에게 소명을 감당하는 일은 생각할수록 은혜요 감당할수록 감사할 따름입니다. 나같이 보잘 것 없고 미련한 것을 부르시어 주의 귀한 일에 끼어주심에 감사하는 마음이 솟구쳐 수고하면서도 기쁘고 감사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는 일을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라고 하였습니다. 분명 그는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오려고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나는 큰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때 주님께서는 바울에게 위대한 소명을 주셨습니다. 특히 이방인들을 위하여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체험을 다시 상기하면서 주 예수께 받은 소명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주님과 만남으로 얻은 체험 그것이 바울이 오늘의 바울이 되게 하신 힘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도 이렇게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과 기쁨이 있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은 주신 사명을 마치기를 원하였습니다. 마친다는 말은 완수한다는 뜻입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여 주신 사명을 이루겠다는 분명한 의지와 헌신적인 결단이 있는 고백입니다. 그는 주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어떤 희생도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수 많은 시련과 환난은 고사하고 목숨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헌신의 결의가 분명하였습니다. 그래서 목숨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발견한 예수, 그를 변화시킨 예수, 그의 삶의 가치를 하늘까지 높여주신 예수를 증거하는 일이라면 어떤 희생도 각오가 되어 있다는 고백입니다.
디모데 후서 4장 7-8절에 보면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라고 하여 자신이 생명을 걸고 헌신했던 복음 사역은 죽음 앞에서도 결코 후회함이 없는 복된 일이었다고 바울은 고백하였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유별나게 병약하게 살았습니다. 학교 가는 날 보다는 집에 누워있는 날이 많은 해도 있었습니다. 몸이 약하고 학교엘 제대로 다니지 않다 보니 학업이 억망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공부에 전혀 취미를 가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몸이 약하니 아이들과 싸움에서 언제나 밀리게 되었고 학업이 지진하니 학교 생활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항상 생각이 부정적이었으며 심한 열등감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못한다. 나는 안 된다. 잘못되는 것이 내게는 당연한 것이다 등의 부정적인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치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잘못되는 것이 운명과 같은 것이라고 체념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제 자신의 학교생활을 하다 보니 희망도 없었고 바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냥 하루하루 아무런 의미나 가치 없이 살았습니다. 좀 심하게 표현하면 죽지 못해서 사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던 제가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는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정말 성령께서 심령 안에 역사하심으로 어두웠던 영의 눈이 밝아지고 막혔던 심령의 귀가 열려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의 세계에 접하게 되면서 자신도 놀랄 정도의 변화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고린도 후서 5장 17절에 있는 말씀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전혀 새로운 생각, 가치관, 인생관을 가진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생의 기쁨을 발견하게 된다는 말씀대로 정말 작은 내 가슴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놀라운 기쁨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기쁨과 감격은 작은 잔에 차고 넘쳐 다윗이 시편 23편에서 고백한 대로 "내 잔이 넘치나이다"를 함께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엄청난 감격이었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언제나 긍정적이고 적극적이 된다는 말씀대로 입니다. 부정적이고 소극적이며 열등감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삶에서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가 되시며 그분이 나를 돕는 자시니 못할 것이 무엇이냐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에 있는 대로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믿음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이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시고 때를 따라 도와주시고 엄청난 은혜로 역사 하셨습니다. 정말 감사와 감격의 삶이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는 말대로 나 자신의 삶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것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보기에는 전혀 의미가 없는 존재였으니 하나님의 사랑의 시각으로 보면서, 즉 자신의 아들까지 십자가에 제물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눈으로 자신을 드려다 보는 순간 너무 귀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어느 공사장을 지나다 깨닫게 된 은혜입니다. 공사의 마무리를 하면서 아시바리를 매기 위하여 벽에 구멍을 뚫었던 곳에 반쪽의 벽돌을 집어넣어 마무리를 하였습니다. 반쪽 자리가 없으면 잘라서라도 반쪽을 만들어 집어넣었습니다. 그 순간 꼭 필요한 반쪽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록 반쪽이지만 꼭 필요한 반쪽은 멋있다는 생각이 들어 멋있는 반쪽이라 정의를 내렸습니다. 꼭 필요하고 멋있는 것은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어 위대한 반쪽이라 덧 붙였습니다. 그 이후로 제 인생을 꼭 필요한 반쪽, 멋있는 반쪽, 위대한 반쪽이라 생각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나를 변화시키는 진리요, 이렇게 무가치한 인생을 최고의 가치를 찾게 하는 진리요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 진리이니 생명을 걸만한 진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사도 바울이 생명을 걸고 헌신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보면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하였습니다. 분명 복음은 생명을 걸고 전할 만한 진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