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소문 2002-05-03 17:46:01 read : 2370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누가복음 7:11-18
오늘은 누가복음 7장 11절에서 17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예수의 소문"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17절을 보면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라는 말씀을 줄여서 오늘의 제목을 '예수의 소문'이라고 정하였습니다.
아시스의 성자라고도 하고 작은 예수라고도 하는 성프란시스가 한 번은 "전도하러 나가자"고 하면서 제자들을 데리고 나갔습니다. 제자들은 전도를 한 번 열심히 해 볼 요량으로 따라 나섰습니다. 앞장을 서서 인도하는 선생을 따라 갑니다. 따라가면서 로타리가 나오자 '이 로타리에서 전도하려나 보다'하고 제자들이 생각하지만 지나갑니다. 또 다음 로타리가 나옵니다. '역시 이 로타리에서 전도하려나 보다'하고 생각하지만 또 지나갑니다. 하루 종일 시내를 한 두 바퀴 정도 돌고는 돌아가자고 합니다. 제자들은 '참 이상하다'라고 생각하고는 수도원에 돌아온 다음에 "선생님! 전도하러 가자 하시고는 전도하는 말 한마디 없이 그대로 돌아오는데 전도는 왜 안 하셨나요?"하고 묻습니다. 그 때 프란시스가 "이미 전도는 다 했다"라고 합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리를 보는 사람들이 나도 예수 믿어야 되겠다 하고 믿어야지 우리를 보고도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 말로 아무리 설명해야 전도가 되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이 말의 뜻은 우리 자신을 보고 즉 우리의 생활을 보고 '나는 저런 예수는 안 믿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설명을 아무리 잘 해 보십시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프란시스와 수도원에 있는 모든 사람들로 인해서 예수 소문이 사방에 널리 퍼졌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나인성의 한 과부입니다. 그와 그의 가정을 통해서 사방에 예수 소문이 났습니다. 그 가정을 통해서 예수의 어떤 소문이 났는지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는 말씀을 따라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찾아오시는 예수 (11-12)
'내가 예수님을 찾아 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찾아와 주셨습니다'라는 소문입니다. 이것이 곧 복음입니다. 처음에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하와와 함께 신방을 차렸습니다. 에덴동산 자체가 바로 아담의 생활 터전이요, 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리고는 너무 무섭고 부끄러워서 숨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나타났더니 아담과 하와가 행방불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숨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어이 아담과 하와를 찾아 내셨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모습을 보니 그 부끄러움을 해결해 보고자 무화과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가렸습니다. 그런다고 해결이 안되지 않습니까? 그 때 하나님께서 양을 잡았는지, 송아지를 잡았는지 모르겠지만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양인지, 송아지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또한 가죽을 만들려면 양이나 송아지를 죽여야 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 예수님의 공로와 의를 힘입혀 인간의 공포와 죄와 부끄러움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사 즉 찾아 오사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에덴동산을 찾아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너무 무서워서 숨어야 될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찾아오셨습니다. 혹시 여러분들 가운데 내가 도망가야 될 입장에 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정말로 숨어야 이 어려움을 피하겠다 할 만큼 어려운 입장에 있는 분은 없습니까? 에덴동산의 아담이 바로 그런 입장입니다. 그 때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아 오셨다는 그 자체로 이제는 살수가 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본문으로 돌아가서 11절에서 12절을 보면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쌔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나인성에 아가씨 하나가 있었습니다.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사는 중에 아들 하나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죽어 젊디 젊어서 과부가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여자가 과부가 된다는 것 그 이상의 불행하고 괴로운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도 외아들 하나가 있기에 견딜만 했습니다. 외아들로 낙을 삼고 기대를 걸고 고생을 하면서도 보람을 느끼고 아들을 잘 키웠습니다. 이제는 다 키웠다. 다 되었다 싶을 때 청년이 된 그 외아들이 앓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죽었습니다. 젊디 젊은 여자가 과부가 되고, 또 외아들 하나 남았던 것을 다 키워놓았더니 죽었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난감할 수가 또 어디 있습니까? 하늘이 무너진다, 땅이 꺼진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너무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이럴 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으나 찾아온 그 많은 사람들이 그 여자에게 무슨 도움이 되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무슨 위로가 되었습니까? 도움도 되지 않고, 위로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때 마침 예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지금 공동묘지로 장례를 치르러 가는 중입니다. 장례만 치렀다 하면 끝나는 것입니다. 정말 시간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그 때를 맞추어 찾아 오셨습니다. 장례 행렬과 예수님이 마주쳤습니다. 그리고는 과부에게 '울지 말라'고 위로하시고 문제를 해결해 놓고 가셨다는 것이 본문입니다. 죽을 맛이었는데 살 맛, 죽을 판이었는데 살 판을 만들어 놓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찾아오심으로 이처럼 살수가 납니다. 여러분들도 이렇게 나인성 과부처럼 난감한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없다고 그러지 마십시오. 나인성에 찾아오시기 전에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계셨습니다. 나인이라는 이름은 성경에 꼭 한번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그 과부를 생각하고 찾아오신 걸음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렇게 불행 당한 성도를 찾아오셔서 그 불행과 동참 하셨습니다. 여러분들도 불행 당할 수 있으나 반드시 그 불행 속에 예수님이 계시고, 가장 가까이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만 오시면 살수가 납니다. 살판이 열립니다. 그 예수가 오셨다고 하는 그 자체가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일본 사람 중에 도모다까 시모지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얼마나 사람이 고약한지 사형수입니다. 그 때만 해도 일본의 북해도 탄광을 한창 개발을 할 때입니다. 그러나 환경이 너무 열악한지라 누구도 탄광에 가서 일하고 돈 벌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일본 정부에서는 불가불 사형수들을 탄광으로 보내어 일을 하게 했습니다. 탄광에 가서 일하는 동안은 사형을 집행하지 않기에 사형수들은 기쁘게 탄광으로 일을 하러 갔습니다. 그래서 사형수 수천 명이 탄광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래도 다른 사형수들에게는 면회를 옵니다. 그러나 시모지에게는 면회 오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어느 날도 숙소에 누워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어디서 면회를 왔다고 합니다. "누가 날 찾아 왔을까? 찾아 올 사람이 없는데?"라고 생각하면서 나가 보았습니다. 허리가 굽고 머리가 하얀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의지하여 서 있었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반가워해 주면 좋겠지만 시모지는 어머니를 보고 "어머니가 여길 무엇 하러 왔어요?"하고 얼마나 짜증을 내고 야단을 하는지 모릅니다. 어머니가 살고 있는 곳이 어딘지 아십니까? 일본에서도 제일 남쪽 끝, 거기서도 배를 타고 몇 시간을 가면 작은 섬이 있습니다. 거기가 시모지의 고향입니다. 거리로 따지면 3,000리 길을 온 것입니다. 허리가 굽어서 지팡이를 짚지 않으면 안 되는 어머니가 말입니다. 요즘처럼 교통이 좋았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아들을 찾아 온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이 구박을 하자 어머니가 아들에게 "그래 내가 돌아갈께, 그러나 이 보따리 하나는 받아라"하고 보따리를 놓고 갔습니다. 그 보따리를 들고 숙소로 돌아와서 열어 보니 성경이 들어 있습니다. "어머니가 그 동안에 예수쟁이가 되었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재수 없다는 듯이 방구석에 성경을 내 던져 버렸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몇 일을 지나다 보니 거기서 함께 일면서 한 방을 쓰고 있는 사람들이 성경을 한 장 한 장 뜯어서 담배를 말아 피웁니다. 요즘은 그렇게 담배를 말아서 피우는 사람이 없지만 얼마전 까지만 해도 그렇게 담배를 말아서 피웠습니다. 담배를 말아 피우는 종이가 없으면 신문지로 말아 피우곤 했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시모지의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어머니가 3,000천리를 마다하지 않고 찾아와서 전해 주고 간 성경책인데 이 놈들이 담배를 말아 피워' 야단을 치고는 재수 없다고 짚어 던졌던 성경책을 빼앗았습니다. 어머니는 뭐가 좋길래 성경에 빠져 버렸는가 싶어서 성경을 읽기 시작합니다. 자석에 붙은 듯이 눈을 떼지 못합니다. 계속 읽어 나가면서 성경에 빨려 들어갑니다. 잠자는 시간과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성경만 읽었습니다. 그 날도 성경을 가지고 탄광 갱도 속에 들어가 일을 했습니다. 점심 시간이 되었습니다. 점심을 빨리 먹고 다른 친구들은 모여서 떠들고 있을 때 시모지는 귀찮아서 다른 갱도로 옮겨갔습니다. 그 곳에서 성경을 읽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순간 벼락치는 소리가 납니다. 바로 자기가 일하고 있던 갱도가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함께 일하던 37명이 몰살해서 죽었습니다. 시모지는 거기에서 살아났습니다. 살아난 시모지는 '하나님이 날 살려 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을 만나고 영접하고 모범수가 되었습니다. 감형이 되고 또 감형이 되어서 결국은 살아서 출옥했습니다. 살아 나와 보니 어머니는 벌써 세상을 떠나고 없었습니다. 돈을 열심히 벌어서 그 동안 어머니를 모시지 못하고 속태웠던 것을 후회하면서 양로원을 세웁니다. 양로원만 세운 것이 아니라 또 돈을 벌어서 중학교, 고등학교를 6개를 세웁니다. 일본 정부가 주는 교육자 대상을 받았습니다. 사회 사업가에게 주는 대상도 받았습니다. 77살에 그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생애를 남겨 놓고 갔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이렇게 악질로서 사형수가 되었던 그가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어머니와 함께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그 예수님을 모시고 아들을 찾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시모지를 찾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런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여러분들과 여러분들의 가정에 예수님이 찾아오신다는 사실을 확신하시기를 바랍니다. 나인성 과부가 가장 비참한 처지에 놓였을 때 예수님이 찾아 오셨기 때문입니다. 나인성 과부의 가정을 통해서 고난 중에 있는 성도의 가정에 찾아오시는 예수라는 소문이 났다는 말입니다.
둘째, 바꿔 주시는 예수 (13-15)
마태복음 7장 11절의 뜻을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아버지가 아무리 악할 지라도 아들이 생선이 먹고 싶어서 생선을 달라고 하면 뱀을 줄 아버지가 없지 않느냐? 아버지여 알이 먹고 싶습니다. 알 좀 주십시오 하면 알 대신에 전갈을 줄 아버지는 없지 않느냐? 세상에 나가면 그렇게 악한 노릇을 하는 아버지일지라도 아들 딸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지 않느냐? 하물며 하늘 아버지께서야 밤 낮 간구하는 자녀들에게 더 좋은 것을 주지 않겠느냐? 알을 달라하면 그 알보다 더 좋은 것, 생선을 달라하면 생선 보다 더 좋은 것으로 바꾸어 주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는 '더 좋은 것'이라고 했는데 누가복음 11장 13절에는 똑 같은 내용을 말씀하신 끝에 '더 좋은 것'이라는 말 대신에 '성령을 주지 않겠느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껏 구하는 것은 '알을 주십시오, 생선을 주십시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보다 더 좋은 것을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더 좋은 것은 성령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온갖 생선을 다 쌓아 놓고 먹으며 산다고 합시다. 그것이 복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지 못했다 하면 그것이 어떻게 복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신을 받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세상 것을 가지면 좋고 못 가진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아들 딸 된다는 것이 최고의 복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 바로 성령을 받는 길입니다. 성령을 주시어 당신의 아들 딸을 삼아 주셨다 것이 무엇보다도 더 좋은 것입니다. 즉 세상에 아무리 좋다는 것보다도 더 좋은 성령으로 바꾸어 주신다는 이야기입니다.
로마서 5장 5절을 보면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물 붓듯이 부어 주신다는 말씀인데 우리에게 사랑을 물 붓듯이 부어 주시는 까닭은 성령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알이 문제가 아닙니다. 생선이 문제가 아닙니다. 더 좋은 성령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3절에서 15절을 보면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결론적으로 말하면 바꾸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랑스러운 아들도 살아 있을 때 사랑스럽고, 살아 있을 때 귀한 것입니다. 죽은 아들을 무엇합니까? 그것은 복일 수가 없고 사랑일 수가 없습니다. 송장을 사랑하는 어머니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제는 할 수 없이 공동묘지로 장례를 치르러 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울지 말라'고 위로했겠지만 그 위로의 말이 위로가 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찾아오시더니 '울지 마라'고 하십니다. 말은 똑 같습니다. 그러나 내용은 전혀 다릅니다. 사람들은 책임지지 못할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울지 말라'하심은 '내가 책임지겠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관에 손을 대셨습니다. 과부 어머니에게는 관속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손을 댔다는 것은 개입을 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문제에 개입하시면 판세가 달라집니다. '청년아 일어나라'고 말씀하시자 청년이 관 뚜껑을 열고 벌떡 일어나 앉았습니다. 죽어 죽어 하는 죽을 일밖에 없던 그 가정에 살맛이 나지 않았습니까? 죽음을 생명으로 바꿔 주셨습니다. 공동묘지로 향하던 길을 집으로 향하도록 방향을 바꿔 주셨습니다. 초상집을 잔칫집으로 바꿔 주셨습니다. 지옥 같은 집을 천국 같은 집으로 바꿔 주셨습니다. 바꿔 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어디에 가서 공로를 쌓고 대가로 받은 것입니까? 돈을 주고받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이 공짜로 은혜로 바꿔 주셨기 때문에 천국 같이 살맛 나는 집안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의 가정도 예수님이 찾아 오셔서 여러분들의 불행스럽고 암담한 현실을 바꿔주시면 살 맛 나는 집안이, 천국 같은 집안이 될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바꿔 주시는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30편을 보면 다윗이 병들어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 날밤을 넘길 수 없다 할 정도로 앓았습니다. 시편 30편 이외에는 다윗이 중병에 걸려 죽어 죽어 한일이 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오늘밤을 넘기지 못할 것 같다' 했는데 그 날을 고비로 해서 아침에 툭툭 털고 일어났습니다. 시편 30편 11절을 보면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를 띠우셨나이다'라고 노래를 했습니다. 베옷은 언제 입습니까? 초상나고 사람이 죽었을 때 입는 옷이 아닙니까? 내가 죽어서 모든 사람들이 즉 가족들이 베옷 입게 될 뻔했는데 베옷을 벗기시고 기쁨이 띠를 띠우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죽게 된 것을 살려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완전히 판을 바꿔 주셨다는 말입니다. 죽음을 삶으로 바꿔 주셨다는 말입니다. 죽을 맛 밖에 벗는 가정을 살 맛나는 가정으로 바꿔 주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들이 가정을 바꿔 주시는 은혜와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 챙겨 주시는 예수 (16-18)
저는 챙긴다는 말을 많이 씁니다. 그러나 그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지는 않았었습니다. 이번에 사전을 찾아보니 '잘 살펴서 좋은 것은 모아 안겨주는 것'이라고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내 사정을 다 살펴보고 주님이 좋은 것 다 모아서 너 가져라 하고 안겨주신다'는 말입니다. 시집간 딸을 위해서 친정 어머니가 좋다는 것이 생기면 다 모았다가 '너 가져라'하고 안겨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돌아보아 주신다는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6절에서 17절을 보면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상여를 메고 뒤 따라 가던 사람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한 말입니다. 즉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 된 나인성 과부를 이렇게 돌보아 주시는 구나'라고 자기들이 체험을 하고 고백한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을 내 몰라라 하고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이런 불행을 당했을 때는 버림받은 것 같은 기분이지만 단지 기분일 뿐입니다. 반드시 끝에 가서는 챙겨주십니다.
폴틸리히라고 하는 유명한 신학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독일 신학자입니다. 히틀러 정권이 눈에 가시처럼 밉지만 죽이지는 못하고 추방을 시켜 독일에서 쫓아냈습니다. 그래서 미국으로 갔습니다. 워낙 유명한 신학자이기에 미국의 모든 신학교에서 자기 학교의 교수로 모시고 싶어합니다. 그 많은 신학교 중에서 유니온 신학교가 그 분을 교수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학생들에게 열강을 했습니다. 그의 강의는 아주 명 강의입니다. 그런데 학생들이 자꾸 비웃곤 합니다. 웃기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 낄낄대고 웃는 것처럼 괴로운 일은 없습니다. 자기를 자꾸 비웃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강의 시간마다 학생들이 자꾸 비웃음은 계속되었습니다. 한 학기를 겨우 마쳤습니다. 그 다음 학기에 가서 또 강의 할 것을 생각하니 강의실이 꼭 도살장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 날도 낙심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는데 카드 한 장이 우편함에 꽂혀 있습니다. 꺼내 보았더니 롤로 메이라고 하는 학생에게서 온 카드였습니다. '교수님, 우리들이 웃는다고 해서 결코 낙심하지 마십시오. 힘내십시오. 우리들이 웃는 것은 교수님이 독일 분이어서 영어를 할 때 독일식 영어를 하기에 발음이 이상해서 우리가 웃는 것뿐이지 교수님의 강의 내용이 불실해서 웃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교수님 힘내십시오. 우리 학생들은 교수님을 존경합니다. 교수님을 사랑합니다. 롤로 메이 드림'이라는 내용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이 카드 한 장에 폴틸리히 교수가 얼마나 힘을 얻었는지 아십니까? 그 날 저녁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너무 기뻐서 통곡을 하며 "하나님! 나 같은 인간 미국 땅에서도 버림받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챙겨 주시는군요. 나에게 배우는 학생을 통해서 이렇게 용기를 주시고, 힘을 주사 나를 이렇게 챙겨 주신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나중에는 이 롤로 메이라고 하는 학생과 둘도 없는 친구가 됩니다. 롤로 메이라고 하는 학생은 나중에는 유명한 세계적인 심리학자가 됩니다. 마지막에 스승 폴틸리히가 죽었을 때 롤로 메이가 조사를 합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지금까지 지내온 일을 열거하며 조사를 할 때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이름 있고 자신 있는 경우일지라도 난감하고 절망과 좌절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롤로 메이를 통해서 폴틸리히를 하나님이 챙겨 주셨습니다. 본문에는 나인성 과부를 예수님이 직접 챙겨 주셨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방법이 다를 뿐이지 여러분들과 여러분들 가정, 우리와 우리의 가정을 예수님이 챙겨 주실 줄로 믿고 힘내시기를 바랍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이 났습니다. 즉 나인성 과부의 가정을 통해서 난 소문입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찾아오시는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불행을 당한 성도의 가정에 예수님이 반드시 또는 가장 가까이서 찾아주십니다. 둘째는 좋지 않은 것을 좋은 것으로 바꿔 주시는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죽음을 생명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초상집을 잔칫집으로, 지옥 같은 집을 천국으로 바꿔 주신 예수님이라는 소문입니다. 셋째는 챙겨 주시는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가난한 과부를 세상은 모른다 할지라도 예수님은 아무 힘이 없는 약하디 약한 과부를 찾아서 챙겨 주시고 좋은 것으로 안겨주셨습니다. 여러분의 가정도 예수님께서 챙겨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