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능력으로 승부하라. 2002-05-31 18:38:58 read : 2740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사도행전4:12-22
(김일 부목사)
한 어린 소년이 이미 세상을 떠난 이태리 화가의 화랑 문을 두드렸습니다. 문이 열리자 그 소년은 부인께서 대가의 붓을 제게 주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소년을 미술가가 되고 싶은 간절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대가와 같은 화법을 갖기를 원했습니다. 부인은 붓을 그의 손에 쥐어주고 그려보라고 권했습니다. 그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자기 붓으로 그린 것보다 더 잘 그릴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자 부인은 대가의 정신을 이어받지 않고는 위대한 대가와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신앙을 갖고 싶어도 그리스도의 영 없이는 잘 믿을 수가 없습니다.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려고 하면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 8:9절에 "그리스도의 영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죄송한 질문이지만 여러분!
그리스도인입니까? 교회에 나오시는데 예수님은 믿으십니까? 여러분은 거듭났습니까? 젊은 목사 한 분이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유학생활이 하도 시원치 않으니까 누군가 물었습니다. "형제님 예수 믿어요". 그가 대답하기를 "우리 아버지가 어느 신학대학 총장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더랍니다. 아니 신학대학 총장 아들과 예수 믿는 것과 무슨 상관입니까? "당신 그리스도인이요?" 재차 물었더니 그가 답하기를 "나는 목사입니다"라는 겁니다.. 질문하는 사람이 목사라는 직분하고 그리스도인이라는 것과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얼마 나왔다, 무슨 직분을 받았다는 거와 믿음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야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철학자 루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보통 10대에는 먹는 것 즉 과자에 의하여 움직이고, 20대는 사랑에 의하여 움직이고, 30대는 쾌략에 의하여 움직이고, 40대는 야심에 의하여 움직인다. 또한 50대는 탐욕에 움직이고, 60대는 명예심에 의하여 움직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에 의하여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가득한 사람입니다. 남이야 뭐라고 말하든 그 얼굴은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욕망의 지배를 받기에 범죄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부활하신 이후 제자들을 만나시면서 요한복음 20:22에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하신 것입니다.
▣ 왜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라 하였습니까?
1. 제자 된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께서 하시는 일을 제일 많이 본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바로 열한 사도입니다. 그들은 직접훈련을 받았습니다. 절름발이가 일어나 걷고, 소경이 눈을 뜨며 더 나아가 죽은자가 살아나는 것도 보았습니다. 심지어 자신들이 이적을 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자기들은 예수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이라고 자부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힐 때에는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십자가 지시는 그 자리에 있지 아니하였습니다. 아니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이 들려져도 어떤 사람은 부활을 의심하고 주변의 환경에 대하여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모였어도 문을 꼭 잠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제자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부름받은 것만으로는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교육받았다고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이름은 제자인지 모르나 실제는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이제는 제자가 되라는 말입니다. 참된 제자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라고 인정하고 고백하고, 나의 잘못된 생활을 철저히 회개하고,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명령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었으면 거듭나야 합니다.
예수께서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이 사람이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요3:6)고 하셨습니다. 영으로 나지 아니하고 육신으로 만난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거듭났다면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 변화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물리적인 변화인데 이는 외형만 달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나무가 있습니다. 나무를 톱으로 켜서 책상을 만들었습니다. 나무는 같은 나무인데 모양만 달라진 것뿐입니다. 다른 하나는 화학적인 변화입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나무를 갖고 종이를 만들었습니다. 여하간 근본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물리적인 변화만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은 옛사람이고, 직분만 알았고, 주일에 성경책 끼고 교회에 왔다가는 것입니다. 성령은 사람을 근본적으로 달라지게 합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성령으로 근본이 달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변화되는데 무엇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행동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달라지고, 주인이 달라지고, 삶의 목적이 바뀌어지고, 삶의 의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신자다운 신자! 직분자다운 직분자가 되기를 원하신다면 성령받으시기를 바랍니다.
2. 부활의 증인되기 위해서입니다.
성령 받은 것이 개인적인 행복을 위한 체험이 아닙니다. 물론 영적으로 행복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힘 있게 증인이 되어 사명을 다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라 땅끝까지 가서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행1:4-8)" 하였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능력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왜 능력을 주십니까? "증인이 되라"고 주신다는 것입니다. 무슨 증인입니까? 부활의 증인입니다.
증인이란, 법정용어로서 현장에서 보고 들은 것을 생명을 걸고 증거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순교자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올바른 증인이란, 예수님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생명까지 내놓을 수 있을 만큼의 신앙인을 말합니다. 오직 구원의 확신 있고, 성령충만하며, 능력과 은사를 받아서 열매를 맺는 성도만이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어느 분이 이런 말을 합니다. 성령을 받으니까 "3쁨"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는 '기쁨'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그렇게 기쁠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에 대하여 기쁘고 구원받았음에 대하여 기쁘고 날마다 주님이 함께 하심이 믿어지기에 기쁘더라는 것입니다. 다음은 '예쁘더'라는 것입니다. 아내도 예쁘고, 자녀들도, 목사님도, 교회에 성도들이 예쁘게 보이더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바쁘더'라는 것입니다. 성령받으니까 새벽기도 가야하지요, 예배시간마다 교회 빠질 수 없지요, 전도하려 나와야지요, 그래서 너무 바쁘더라는 것 이것이 사실입니다. 여러분! 무슨 일 하는데 바쁘셨습니까? 충성하는 데 바빠야 합니다. 전도하는 데 그렇게 분주해야 합니다.
고전 2:4절에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했다"라고 바울이 말하였습니다. 성령이 역사하면 듣는 사람들이 나도 예수를 믿어야 하겠다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영접하게 됩니다. 이 사명을 다하라고 성령을 받으라 하신 것입니다. 전도하면 놀라운 축복이 임합니다.
3. 능력 있게 살기 위함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던 전날 밤에 제자들은 모두 도망하였습니다. 3년 동안 배우고 이적을 보았으나 그들은 너무나 무능한 무리들이었습니다. 자기 선생님이 붙들려 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음에도 가보지도 못했습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능력입니다. 힘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힘입니다. 능력입니다. 오늘의 현실은 힘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대우가 달라지는 세상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는 '권능'을 받습니다. 이때 '권능'이란 능력, 권세, 권력, 영적인 힘, 세상을 이기는 힘, 마귀를 이기는 힘등을 받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아들로서의 권세와 능력이 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임을 확증하십니다.
여러분! 능력있습니까? 성령의 능력이 있습니까? 이 성령의 능력은
1) 믿어지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왜 무능합니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은 자기 신념이 있습니다. 그들은 보장이 없는 신념만으로도 잘하고 있는데, 우리는 왜 무능하게 세상을 살고 있습니까? 믿음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배후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신데 왜 밀리고 연약합니까? 믿음이 문제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믿음이 생깁니다. 믿어집니다. 기도응답이 믿어집니다.
2) 이기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항상 외부로부터 오는 유혹 즉 세상의 유혹, 이생의 자랑, 안목의 정욕으로 유혹을 받습니다. 다른 하나는 내적으로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죄성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임하면 이 두가지를 다 이길 수가 있습니다. 마귀의 유혹으로부터 이길 수가 있습니다.
3) 사랑하는 능력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하기에 봉사하는 것도 기쁘고 좋기만 합니다. 교회를 사랑하게 됩니다. 주의 종들을 사랑하게 합니다. 더 나아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 성령충만한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갑니까?.
1. 담대한 삶을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의 속성을 아주 단면적으로 확실하게 말해주는 그런 내용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라고 하는 예수님의 제자, 대표적인 그리스도인이 지금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섰습니다. 과거에 예수를 부인하던 그 자리입니다. 이 산헤드린 공회라고 하는 것은 당시 유대 나라의 종교정치를 통합한 그런 귀한 국회와 같은 공회입니다. 여기서 생사를 결정합니다.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것까지 여기서 재판을 해버립니다. 예수님이 이 자리에서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베드로가 이 자리에서 예수께서 재판 받으실 때, 베드로가 저 뒷전에서 벌벌 떨다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바로 그 자리입니다. 그 현장에 베드로와 요한이 섰습니다. 오늘 베드로와 요한은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오늘 이들의 특징은 담대합니다. 용기가 있습니다. 현대인의 결정적인 약점이 용기가 없는 것입니다. 돈은 있으나 용기가 없습니다. 지식은 있으나 용기가 없습니다. 여건만 그만하면 괜챦은데 용기가 없습니다. 왜 이렇게 쫄아들고 있습니까? 왜 이렇게 비겁해졌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오늘 본문에 나타난 베드로와 요한은 성령충만했습니다.
성령충만한 자의 의식은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대답합니다. "하나님 앞에서"하라고 말합니다. 자기 눈 앞에서는 지금 공회의 회원들 71명이 즐비하게 앉아서 아주 무서운 눈초리로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를 또 죽이려고 하는 바로 그 자리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는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있다고 하는 의식을 가진 것입니다.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있는 존재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어떤 사건, 어떤 말, 어떤 일을 보더라도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과거에 찾아 볼 수 없었던 담대함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2.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가 과일 나무를 심는 이유는 꽃을 보기 위한 것이 아니요, 최종적으로 그 열매를 따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도 우리 인생들로 하여금 많은 열매를 맺어 알곡으로 천국 창고에 들이기 위함입니다. 봄에 씨를 뿌린 농부가 가을의 풍성한 수확을 바라는 것처럼, 우리에게 성령의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많은 성령의 열매를 기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껫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15:8)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들은 성령충만함 받아서 은사를 받을 뿐만 아니라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성경은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말씀했습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결코 이와같은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오직 주님 안에 거할 때만이, 성령께서 우리안에 충만히 임하셨을 때만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충성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수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본 회퍼라고 하는 독일의 신학자는 말합니다.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은 간단하게 구별이 된다. 그것은 기독교인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다. 원망과 불평하는 것은 세상 사람이요, 오로지 감사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표식이라고 말합니다". 그도 그럴 것은 죽음을 넘어서는 아름다운 세계를 전망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부활, 머지않아서 곧 나 자신이 부활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천국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만족한 감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교회에 신실한 여자 집사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의 남편은 교회에 나오질 아니해서 아내로서 그 남편을 위해서는 늘 기도하며 꾸준히 권면을 하고 늘 교회에 함께 나가기를 독려했습니다만(여기에도 그런 분이 계시지요?) 그렇게 쉽게 따라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런 어느 주일날 아침에 남편이 느닷없이 하는 말이 "나 오늘 당신과 함께 교회에 갈꺼야"하러랍니다. 깜짝 놀라서 이제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시는가 보다 하고 서둘러서 남편과 함께 교회에 가게 됩니다. 가면서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오늘 어느 목사님이 설교하시나? 모처럼 가는데 좋은 목사님이 설교 하셔야겠고 무슨 제목으로 하실까? 어떤 본문을 택하실까? 이이가 첫 번 교회에 나가서 바로 은혜를 받아야 하겠는데 이거 어떻게 하면 좋을까?'하고 궁금하게 생각하며 교회에 나갔는데 주보를 딱 받아보니까 본문이 뭐냐하면 창세기 5장이더랍니다. (찾아보지 마세요) 창세기 5장에는 사람의 이름만 나옵니다. 이 계보라고 하는 족보가 쭉 나오는데 사람의 이름만 나옵니다. 아 이거 큰일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내용을 요약하면 이런 겁니다. "아담은 930세를 살고 죽었다. 셋은 912세, 에노스는 905세, 계난은 910세, 마할랄렐은 895세, 야렛은 960세, 그리고 므두셀라는 969세를 살고 죽었다" 뭐 이런 이야기입니다. 이 집사님이 놀란 것은 당연하지요. 남편이 교회에 처음 나왔는데 자기가 뻥이라고 믿고 있는 이야기가 처음 교회에 나온 남편이 어떻게 받아들일는지 아찔하더랍니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여호수아 6:1절이 생각이 나더랍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하라"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예배를 마쳤는데 남편이 나오면서 "여보 나 등록할거야"하면서 스스로 등록을 하더랍니다. 어째든 너무 좋아서 물어볼 새도 없이 등록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 너무 기뻐서 반찬도 맛있는 것 하며 식사하면서 너무 궁금해서 조용히 물었습니다. "여보, 내가 생각하기에는 오늘 특별한 말씀이 없었는데 어떤 말씀을 들었기에 그렇게 결심을 하게 되었는냐?"고 물었더니 남편이 조용히 말하면서 " 오늘 성경 보니까 아무개도 죽었더라, 아무개도 죽었더라, 아무개도 죽었더라. 이거 보니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오래는 살았는데 그러나 다 죽더라고. 그런데 갑자기 '너도 죽어'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런데 나는 죽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내게는 구세주가 필요하다. 그래서 믿기로 했어"라더랍니다. 죄와 죽음 문제, 죽음과 죄 문제 이것이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톨스토이는 "인생 존재의 참 비결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를 아는 데 있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나와 함께 있을 때, 이제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알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나누는 저와 여러분에게 성령의 단비가 부어져서 우리 마음이 부드러워지길 바랍니다. 기도해야 됩니다. 성령 충만해야 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여러분의 가정, 부모 자식이라고 믿을 수 있는 줄 아십니까? 요사이는 아이들에게도 말 한마디 못합니다. 그냥 자살해 버려요, 죽어버려요, 노인도 자살합니다. 자녀가 부모를 죽입니다. 그냥 불지르고 죽이는 것이 일상화 됩니다. 한동안 억억해서 억이 돈같이 안보이더니 이제는 사람 죽이고 죽는 것이 그냥 일상화 되버린 느낌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정체감에 문제가 있습니다. 내가 누굽니까? 여러분은 스스로를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나 됨의 정체, 사람됨의 정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 하나님의 자녀 됨의 정체를 잃어버렸기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작곡가 하이든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영혼 깊은 데서 환희가 솟아난다고 합니다. 주님이 여러분 마음에 거하시고 성령의 충만한 심령이 되어 늘 기쁨이 충만하길 바랍니다. 성령충만한 삶은 항상 하나님을 높이고 예배드리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가장 귀하게 생각합니다. 위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왜? 내안에 하나님의 영이 오셨습니까? 인간에게 우상의 영, 사탄의 영이 오면 땅의 것을 찾아가지만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거하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상추와 배추를 보면 깨닫는게 많습니다. 상추는 제 잘났다고 하며 잎이 꼭 하나씩 뻗어나갑니다. 절대로 상추는 뭉치는 법이 없습니다. '내가 잘났다. 내가 잘났다' 그래서 색깔도 검습니다. 시커멓든지 시퍼렇든지, 그런데 배추는 그렇지 않습니다. 배추는 전부 서로가 모여서 잎이 전부 안으로 들어가요. '나는 부족하다'함 서로 감싸주어요. '사랑해요, 감사해요' 전부 안으로 들어가서 똘똘 뭉칩니다. 어느 배추든지 그렇습니다. 참 신비합니다. 배추는 전부 하나가 잘됩니다. 배추는 서로를 생각합니다. 배추는 속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전부 다 감춥니다. 겸손합니다. 서로가 하나가 됩니다. 나중에 보면 속이 노랗고, 맛이 좋고, 배추 속을 보면 신비한 궁궐 같습니다. 배추는 김치를 담구어 일년 내내 먹는데 상치로 김치로 담는 분 보셨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배추 같이 살아야 됩니다. 서로 감사하고 서로 감싸주고 서로 겸손해야 됩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서로 하나가 되고 서로 안아주고 서로 존귀히 여겨야 합니다. 이제는 나 혼자 잘났다하며 상추처럼 빠지지 말고 전부 안으로 들어와서 감싸고 한 덩어리가 되어서 이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성령받은 사람이요, 이러한 성령의 능력이야말로 세상과 더불어 겨눌 때 승리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승리의 길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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