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제를 통해 하나를 이룹시다. 2002-05-31 18:36:58 read : 2526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2목회비전(교제)
마태복음 28:18-20, 고린도전서 12:15-27, 에베소서 2:1-4
벌써 새해를 시작한 지도 한달이 지났습니다. 새해가 되면서 일상생활 속에서 꼭 실천하고 싶었던 것들을 지금까지 잘 지켜오고 있습니까? 목적을 정해놓고 실천하다가 3일을 넘기지 못한다고 해서 생긴 말이 있습니다. "작심삼일(作心三日)" 실제로 사람들은 결심한 바를 3일이 못되어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해마다 목회비전을 나누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목회비전을 세워놓고 이를 꼭 이루기 위함 아닙니까? 올 2002년에는 이 목회비전을 나누면서 신앙생활에 새롭게 결심한 바를 꼭 이루시는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목회비전 다섯 번째 교제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 다섯 가지 목적이 무엇입니까? 다함께 해봅시다.
우리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은
1. 예배로 하나님을 드높이고
2. 봉사로 이웃을 섬기고
3. 전도로 세상을 구원하고
4. 훈련으로 자신을 온전케 하고
5. 교제로 서로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1. 참된 예배자가 되어 모든 예배에 참석하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2. 자신의 은사를 발견하여, 교회와 세상에서 한가지 이상 봉사합니다.
3.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시간과 물질로 전도에 참여합니다.
4. 자신의 신앙을 온전케 하기 위해 과정별 교육훈련에 참여합니다
5. 작은 모임에 소속하여 서로를 세워가는 교제를 합니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작은 모임에 소속하여 서로를 세워가는 교제'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1. 교제란 무엇입니까?
'교제'란 말은 희랍어로 코이노니아(κοινωνια) 인데, 친밀한 상호관계(fellowship) '함께 나눔(sharing)', '협력(partnership)', '연보(contribution)' 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어떤 사람과 연관을 맺고 그 일에 동참하는 것, 또는 영적인 연합이나 상관관계를 의미합니다. 더 풀어보면 '공유하다' '서로 나누다' '동반자가 되다'라는 의미인데 계획, 감정, 슬픔, 기쁨 등을 나눔으로써 서로가 동반자가 되는 것입니다. 동반자가 된다는 것은 서로를 위해서 시간을 내고, 서로 높여주고 서로 격려하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교제한다는 것은 서로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나아가 성도의 교제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서 나와 이웃간에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교제는 공동체 안에서의 교제이어야 하고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반드시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2. 왜 교회에서 성도의 교제가 필요합니까?
미국에 유명한 공원 중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애틀로 가는 도로변에 레드우드 스테이트 파크(Red Wood State Park)가 있습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붉은 나무가 있는 도립 공원' 정도가 될 것입니다. 이 곳에는 엄청 큰 나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중 어떤 나무에는 그 밑둥에 터널을 뚫어 놓았는데, 2차선 도로 정도의 폭이 됩니다. 심지어 그곳에 있는 나무 중에는 장정 20명이 손을 잡고 둘러서야 그 아름드리를 겨우 두를 만큼 되는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렇게 굵고 큰 나무니까 그 뿌리가 얼마나 깊이 들어갔을지 궁금해서 그 뿌리를 파헤쳐 보기 시작했습니다. 보통은 나무의 높이만큼 뿌리가 깊이 들어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레드우드는 뿌리가 전혀 깊이 내려지지가 않았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그 이유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각각의 레드우드의 뿌리가 서로 옆의 나무와 굳건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옆의 나무와 서로 뿌리가 연결되어 있으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할 수가 있었고, 그 큰 덩치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곳에 있는 나무들 중에는 죽어 있는 나무도 있었습니다. 왜 죽었는지 아십니까? 다른 나무들과 뿌리가 연결되어 있지 않아, 쓰러져 뿌리가 뽑혀 죽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기서 평생 잊지 말아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성도는 레드우드 나무처럼 교제를 통해서 함께 세워져나가야 환난이 닥쳐와도 서로에게 힘이 되어 믿음을 지탱해 나갈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12:26-27은 "26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27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생명력 있는 신앙의 소유자라면 성도들과 믿음의 교제를 계속해야 합니다. 고립적인 신앙은 포도나무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끊어져 있는 상태와 같습니다. 그런 가지는 잎이 시들고 꽃은 떨어지며 열매를 절대로 맺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에서의 성도의 교제는 신앙의 열매를 맺는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하고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한 몸 안에 혈관을 통해 피가 돌듯이 영적인 교제를 통해 신앙이 서로에게 전해집니다. 손이나 발, 입과 눈도 한 몸에 연결되어 있어야 생명이 있고 자기 기능을 발휘할 수 있지 따로 떨어져 있다면 아무리 잘 생겼다 해도 단순한 시체토막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집이 여러 가지 건축자재로 지어져 있으니까 값이 나가지 만일 하나하나 따로 철거해 놓으면 값싼 목재나 고철에 불과합니다. 이와 같이 교회는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지어지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하나님의 집이 됩니다. (성도의 교제는 접착제입니다)
에베소서2:21-22 "21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22너희도 성령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3. 교제에 대한 성서적 근거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1) 세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것을 우리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어느 때에 믿지 않던 사람이 우리의 형제가 되고 자매가 됩니까? 믿지 않던 사람이 교회공동체 안에 한 지체로 들어오는 순간은 언제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교제는 언제 일어납니까?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바로 세례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마태복음28:19-20의 예수의 위대한 명령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본문에 보면 세 개의 명령이 나옵니다. '가라' '세례를 주라' '가르치라' 가 그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예수께서 '세례'주는 일을 전도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과 같은 위대한 임무들과 동등하고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왜 세례가 이렇게 중요합니까? 그것은 세례가 교회의 목적 중 하나인 교제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세례는 입술로 예수를 나의 구세주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겠다는 결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초대교회 당시 목숨을 걸고 행해졌던 의식입니다. 그럼으로, 세례를 통해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은 그 만큼 강한 결속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죽음까지 두려워하지 않고 맺었던 교제, 그것이 초대 교회 성도들이 받은 세례입니다.
(2) 교제에 대한 성서적 근거는 성만찬을 통해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0:16-17 "16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17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하나되고 성도들끼리 하나가 되는 잔치가 곧 성만찬입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몸과 쏟으신 피는 '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만찬은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 하신다는 것은 사랑하신다는 의미이고, 아들을 보내심과 성령의 오심은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는 떡과 포도주를 주시면서 우리가 당신으로 말미암아 변화되도록 당신 자신을 음식으로 주십니다. 예수의 살과 피인 떡과 포도주를 나누는 성만찬은 당신 스스로를 주신 예수께 일치하는 것이며 또한 믿음 안에서 형제, 자매들과도 일치하는 것입니다.
4.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까?
(1) 소그룹에 소속해서 마음을 나누어야 합니다.
바른 교제는 내가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나눌 수 있을 때 이루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교제하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실되게 마음을 같이 나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커졌다고 해서 교제를 포기해야 합니까? 아니지요? 소그룹에 속해서 교제를 나누면 됩니다. 소그룹에서는 서로의 진실된 마음을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소그룹에 속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다름 아닌, 마음을 같이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마음을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①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고 가까이 해주시는 사람은 바로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상대성 원리를 발견한 아인슈타인에게 그의 제자가 "선생님은 너무 너무 위대한 발견을 했습니다"라고 했을 때, 그는 조용히 손가락에 물 한 방울을 찍어 보이면서 "이 상대성 원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창조 앞에 그저 물 한 방울 정도밖에 안되는 것이네"라고 말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에게는 대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해주시고 붙들어주십니다. 그리고 겸손한 자를 높여주십니다.
②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길 줄 알아야 됩니다.
빌립보서 2장 3절에는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말씀합니다. 참으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 -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엇을 보면 알 수 있습니까? 틈만 나면 내 입술에서 남을 비방하는 말이 나옵니다. 다른 사람을 욕하는 사람이 있으면, 귀가 솔깃해집니다. 다른 사람이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그것을 이용해서 자신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남을 나보다 못하게 여기는 것 아닙니까?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경지에 이르면 인간관계의 모든 문제는 해결됩니다. 한번 해봅시다. "당신은 나보다 나은 분입니다"
③ 정직한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결국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지 못하니까 어떻게 됩니까? 거짓을 말하거나 거짓에 동조하게 됩니다. 스스로에게도 거짓말을 하게 되지 않습니까? 왜 우리 마음이 답답한지 아십니까? 쓰레기통에 오염되고 부패되고 상한 것이 쌓여있으면 악취가 나고 보기도 흉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이 미움과 질투,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차 있다면, 그것때문에 답답한 것입니다. 정말 생수같이 맑고 깨끗하면 그 마음에 답답함이나 복잡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온갖 부정한 것으로 가득 차 있으니까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는 연령별로 신앙의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 각 남녀 선교회 지회를 만들었고, 사는 지역을 중심으로 속회를 만들었습니다. 또 여러 가지 관심 분야에서 함께 교제를 나누도록 위원회와 기관들을 두었습니다. 부디 바라기는 선교회, 속회, 위원회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소그룹이 되길 바랍니다.
(2) 사랑해야 합니다.
요한복음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사랑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주님은 사랑에 대한 본을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사랑은 추상적이 아닙니다. 사랑은 구체적인 실천입니다. 요한1서3:8에서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말씀하십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서로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서로의 것을 나누며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근본원인은 예수께서 친히 가르치시고 본을 보이신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데 있습니다. 교회가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이 없어서 입니다.
김순애 권사님을 통해서 많이 배우셨죠? 이웃에 아픈 분이 있습니까?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준비해서 갖다줘보세요. 가족들에게 저녁상을 준비해야 할 부담을 덜게 되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개미처럼 열심히 일해도 자기만을 위해서 일하면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는 벌처럼 남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랑을 베풀 때,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해 주십니다. 누가복음 6:38절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또한 잠언 11:25절에는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 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 주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 몸에는 다양한 지체들이 있습니다. 서로 다른 모양과,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이 지체들이 모여서 한 몸을 이룹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 몸이 많은 지체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은 지체가 여럿이라는 다양성보다는 여럿인 지체가 유기적인 일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더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는 주님을 섬기는 방법에 있어서는 제각기 다른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러나, 성도는 다같은 성도라는 것입니다. 다만 성도와 성도는 상호연관성을 가지고 유기적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한 몸에 많은 지체가 있는데 지체와 지체 사이에는 상호 연관성이 있어서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지체들이 다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들도 다 영광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몸의 각 지체는 개별적으로 생각되어서는 안 됩니다. 각 지체를 함께 놓고 말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새끼발가락이 아프다고 해서 새끼발가락만 병원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온 몸이 함께 갑니다. 눈이 아파도 마찬가지요, 손이 아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 여러분
무엇을 깨달아야만 합니까? 그래서 고린도전서 12장 26절은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라고 말씀하는 것 아닙니까?
성도 여러분,
어떤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까?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신앙이 성숙해있고, 영적으로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면 그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각 지체들 모두가 함께, 정말 모두가 함께, 신앙생활의 성숙을 경험하고 영적인 성장을 경험하게 될 때, 그 교회가 건강한 교회이며, 그런 교회가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고 제구실하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서로가 다르다는 것 인정하시지요? 은사나 성품 등 다양성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성숙해지고 성장하려면 내가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방도 잘해야 합니다. 나만 잘해서는 소용없습니다. 상대방이 병들면 나도 병듭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상대방을 세워주고, 상대방의 부족을 채워주고,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주어야 합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속도원이든, 선교회원이든, 교사이든, 성가대원이든-다른 사람이 건강하게 서 갈 때, 비로소 나도 함께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다양성을 인정하는 차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상대방의 입장에서 '저 사람이 무엇을 원할까? 내가 어떤 모습으로 다가가야 저 사람이 기뻐할까' 마치 연애하는 심정으로 성도들의 교제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 백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 서로 나누어 주는 교제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무엇이든 나누면 나눌수록 커진다는 진리를 깨우쳐야 합니다. 사랑은 주면 줄수록 커지고 풍부해지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는 사랑을 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도 없고 남에게 사랑을 받을 필요가 없을 만큼 부자도 없습니다. 아무리 가난한 어머니도 자녀에게 나누어 줄 사랑은 있고, 세상의 대단한 부자도 사랑받기를 갈망합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나누어야 합니까?
① 은혜를 나누어야 합니다.
로마서1:11"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성도의 받은 은혜와 은사는 다양합니다. 그러므로 각자의 은혜를 나누어야 합니다. 마치 농촌의 농산품과 도시의 공산품을 서로 유통하듯이 영적은혜 역시 나누어야 합니다. 나눌 때 강해집니다.
② 물질을 나누어야 합니다.
로마서12: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디모데전서6:18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히브리13: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물질이란 나만을 위해 쓰도록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서로 쓰도록 주신 것입니다.
③ 고락을 나누어야 합니다.
마태복음25:35-45의 말씀처럼 성도의 아픔에 관심을 기울이고 성도의 슬픔에 마음을 씀으로써 교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이름으로 냉수 한 그릇이라도 작은 소자에게 주는 것이 곧 예수께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웃과의 교제는 작은 일부터 시작됩니다. 작은 관심이 커다란 용기를 갖게 합니다. 따스한 말 한마디가 세상을 밝게 합니다.
성도 여러분.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보세요. 고난당하는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세요. 무엇이 필요합니까? 따스한 말 한마디, 작은 정성이 감격스럽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성도의 교제이고 도리입니다.
<정 리>
교제는 성도가 되는 그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해야 합니다.
바른 교제를 위해서는 반드시 소그룹에 소속되어야 합니다. 소그룹을 통해서 마음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을 나눌 때 보다 깊은 교제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속회를 통해서 마음을 나누세요. 선교회를 통해서, 위원회를 통해서 마음을 나누어서 우리 춘천중앙교회가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모두 힘쓰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사랑의 교제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과감히 허물어야 합니다. 쓸데없는 자존심, 우월감, 시기심, 교만함, 험담, 비난, 세력다툼, 불평 등 교제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오랫동안 용서하지 못한 마음도 버려야 합니다. 성도의 마음을 아프게 하며 상처를 준 것이 있다면 용서를 구하십시오. 손을 맞잡고 하나됨의 기쁨과 감격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로 5주간에 걸쳐 목회비젼을 함께 나눔으로써 어떻게 하면, 좋은 교회가 될 수 있을까 함께 말씀을 통해 나눠 보았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교회는 - 좋은 교회는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힘쓰지 않으면 결코 아름다운 교회, 내가 머물고 싶은 교회를 이룰 수 없습니다. 교회다운 교회는 온 성도가 함께 모여 지체의식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워갈 때 가능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아름다운 성전에서 함께 열심히 신앙생활함으로써 예배로 하나님을 드높이고, 봉사로 이웃을 섬기고, 전도로 세상을 구원하며, 훈련을 통해서 자신을 온전케 하고, 교제로 서로를 세워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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