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의 생활 2002-06-06 13:38:33 read : 2227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창세기 4:3-7 2001. 11. 18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우리 대구제일교회의 뜰에 보면 두 가지 과일나무가 심겨져 있습니다. 하나는 감나무요 다른 하나는 사과나무입니다. 이 두 나무가 나란히 심겨져 있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둘이 합치면 ‘감사과’입니다. 감사와 사과를 보여준다고 저는 해석하고 싶습니다.
감사와 사과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꼭 있어야 할 요소입니다. 감사는 내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좋은 것을 받음에 대한 응답이요, 사과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끼친 것에 대한 응답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 좋은 것을 끼치면 감사를 받을 것이요,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잘못을 끼쳤으면 사과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교회 뜰 안에 심겨진 감나무와 사과나무를 볼 때마다 그냥 지나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는 우리로 감사하며 사과하는 자세로 살아가라는 멧세지를 전합니다. 이러한 감사와 사과의 자세는 비단 사람에게만 향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을 향해서도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이시며 우리에게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약속에 대한 우리들의 긍정적이요 적극적인 반응입니다. 그렇기에 감사는 진실로 우리의 진솔한 마음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가르침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아들이었던 가인과 아벨은 첫 수확을 얻게 되자 각자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렇게 드린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약속을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내쫓으시면서 한편으로 저주를 하셨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 3:19에 의하면,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으리라.” 얼굴에 땀을 흘려야 하는 것은 에덴동산 안에서의 삶에 비하면 저주이지만, 땅이 소출을 내어 식물을 먹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복의 약속입니다. 바로 그 약속의 말씀을 믿고 아담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땅에서 소산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도 드렸습니다. 그들의 아들인 가인과 아벨도 부모의 행동을 보고 열심히 자기의 일에 임했고 소출을 얻게 되자 감사의 제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감사는 바로 땀을 흘리는 수고 이후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도 그러했겠지만, 아이들이 감사할 줄 모르는 이유는 우선 자기가 땀을 흘려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요 또한 부모가 감사의 교육을 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 땅에서의 수고를 고통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축복으로 아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그래서 영어권에서 직업을 vocation 즉 ‘부름을 받은 것’이라고 부릅니다. 누구에게 부름을 받은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땀을 흘리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장소에서 우리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직업에 대해 최선을 다해 감당하여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점을 Marx Weber가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라는 책에서 잘 설명한 것이 아닙니까? 자기의 직업에 열심히 일해서 얻은 소득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믿고 발전된 것이 바로 자본주의요 함께 나누는 삶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자기의 직업에 대해 최선을 다하고 감사하는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우리가 이마에 땀을 흘리는 대로 복을 얻게 하시는 약속입니다.
대구제일교회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직업에 충실하여 최고가는 전문가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일로 인해 많은 소출을 얻고 거기에다 함께 나누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농사하시는 분은 농사일로 인해 가장 영양가 있는 소출을 추수하는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이로 인해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업을 하시는 분은 땀을 흘려 잘 경영함으로써 그 분야에서 최고의 기업가가 되십시오. 많은 소득을 함께 나누는 삶으로 인해 감사하여야 할 것입니다. 전업주부라 한다면 가정을 가장 잘 이끌어 가는데 전문가가 되십시요. 자녀를 참 인격자로 키우는 것보다 더 나은 소득은 없습니다. 혹 분식점을 운영하며 떡볶이를 만들어 판다하더라도 그 분야에서 최고의 맛을 만들어 내는 마음으로 일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자기의 기업을 하나님이 주시는 분깃으로 알고 사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됩니다.
감사는 우리가 항상 대하는 평범한 생활에서 생활화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보면 가인과 아벨은 자기들의 생업 가운데 제물을 드렸다고 했습니다. 농사일을 했던 가인은 그의 소출 가운데 일부를 떼어 드렸고, 아벨은 자기가 기르던 양 가운데 한 마리를 잡아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습니다. 어디에 가서 새로운 것을 산 것도 아닙니다. 아주 특별한 것을 구해온 것도 아닙니다. 자기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 가운데 골라서 드렸습니다. 아니 자기의 생활의 일부 가운데 골라서 드린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데살로니가전서 5:16-18을 보면,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는 생활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특별히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만 감사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평범한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그리고 나의 직업을 통해서 감사의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난 일년 동안 우리의 생활 가운데 주어진 감사의 제목들을 살펴봅시다. 우리가 감사한 일들을 하나 하나 세어보면 상당히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찬송가 489장도 보면 이러한 점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약한 마음 낙심하게 될 때에
내려주신 주의 복을 세어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우리의 일상 생활을 통해 받은 복을 우리가 알 때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를 알지 못하고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제물을 바칠 때 우리의 자세가 문제입니다. 가인은 농사꾼으로서 그가 얻은 농산물 가운데 일부를 제물로 드렸습니다. 특별히 나쁜 것을 드린 것도 아닙니다. 단지 그가 얻은 것 가운데 일부를 바쳤을 뿐입니다. 반면에 아벨은 목동이었기에 그가 기른 양 가운데 특별한 것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양의 첫 새끼를 드렸다고 했고 그 기름까지 다 바쳤다고 했습니다. 첫 새끼라는 단어는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을 의미하며 기름까지 드렸다는 것은 모든 것을 드렸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바로 아벨은 정성을 드려 제물을 바쳤습니다.
우리도 알게 모르게 가인의 자세를 보일 때가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감사의 양식은 취하되 진정한 감사가 없는 모습입니다. “뭐 내가 일해서 얻은 것인데, 누구한테 감사해?”라는 자세를 가질 때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정성어린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들이 우리 교우들 가운데 많이 있습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이니 농산물과 연관되어 한두 가지 예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얼마 전 교회에서 관리를 담당하는 집사님 한 분이 저에게 감을 세 개 주시면서 그 유래를 설명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 뜰 안에 큰 감나무가 두 그루가 있는데, 또 하나를 심은 모양입니다. 이제 심은지 삼 년이 되어 첫 열매를 맺었는데, 원래 네 개가 열렸다고 했습니다. 애지중지 하며 키웠는데, 막상 따서 저에게 주려 했는데 그만 하나가 밤새 없어졌다고 하면서 매우 서운해 하셨습니다. 저는 그것을 받으면서 감 세 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참 그 정성에 감복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하나님은 아니지만, 이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이 부족한 사람을 하나님께 향하는 통로로 생각하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주신 것입니다. 아무튼 하나님을 향한 정성의 표현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교우들 가운데도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려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느 집사님은 농장에서 추수를 하면서 첫 열매를 목사가 와서 기도하는 가운데 거두기를 원합니다. 어느 집사님은 자기의 사업처에서 첫 사업을 목사를 모시고 예배하며 시작합니다. 그리고 첫 날의 매출액을 하나님께 감사헌금으로 드리기도 합니다. 어려운 시절 어렵게 취직을 하였지만,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첫 달 월급을 하나님께 드리는 청년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처음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자 하는 첫 열매의 정성입니다.
정성어린 첫 열매를 감사의 표로 드리는 중요성은 또 다른 데에 있습니다. 예물을 드린다는 것은 바로 자신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을 보니, 하나님이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벨은 받으시고 가인은 받지 않으셨다 하심도 아니요, 아벨의 제물은 받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셨다 하심도 아닙니다.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드리는 제물에 드리는 사람이 바로 하나가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은 정성으로 드려진 제물과 바로 드린 그 사람을 함께 받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연관해 로마서 12:1을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할 때 우리의 모든 것을 드리라는 의미입니다. 비록 소설이기는 하지만 심청이는 자신의 몸을 아버지의 눈뜸을 위해 바다에 던졌습니다. 또한 30년전에는 노동자들을 위해 전태일씨는 자신의 몸을 실제로 불에 태웠습니다. 물론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몸을 물에 던진다든지 불에 태우라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몸이 하나님께 받쳐짐은 우리의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께 합당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진정한 감사는 자기의 잘못을 지적할 때 나와야 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 서술된 바와 같이 가인이 화를 낼 때 하나님은 적당한 경고를 하셨습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만약 가인이 하나님의 경고를 받고 오히려 감사할 줄 알았더라면 그의 악은 거기서 그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질 못했습니다. 동생 아벨에게 화를 내었던 것이 그를 죽이는 살인까지 이어졌습니다. 화와 미움은 바로 살인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잘못을 행하고 잘못에 대한 지적을 받을 때 오히려 감사합시다. 이러한 모습은 세상 사람들이 도저히 가질 수 없는 모습입니다. 이는 오직 하나님을 섬기며 경외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자세입니다. 그러한 믿음의 자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하나님은 축복하십니다.
한 예로 저는 울진에 사는 한 분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귀농을 해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소득을 위하여 농사법을 배워 열심히 일했습니다. 비료도 뿌리고 농약도 치고 온실도 만들고 하며 발버둥을 치며 살았습니다. 살아야 한다는 목적 아래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아래 세상이 가르치는 농법에 따라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러다가 언젠가 그는 유기농법을 가르치는 기독인들의 세미나에 참석을 했습니다. 그곳에서 농사가 그저 작물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다루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돈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참 육신의 생명이 건강하게 살아가게 하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더 나가서 그렇게 하는 것이 정말 하나님의 창조의 법칙대로 살아가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큰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그리고 유기농을 시작하는데 갑자기 됩니까? 첫 해의 소출이 형편없었습니다. 둘째 해는 조금 나아졌지만 별로였습니다. 그런데 세 해가 지나고 네 해가 지나면서 상황은 점점 달라졌습니다. 그 이전의 소출이 나오고 오히려 더 많은 소출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유기농에 의한 생산이 알려지면서 그의 농산물은 더 비싼 가격에 팔리기 시작했고 지금은 계약에 따라 없어서 팔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더 감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감사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방법으로 갚아주십니다. 아니 더 풍성한 은혜와 복을 내려주시는 분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이요 오늘날도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저에게는 모든 교우들을 향한 바램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하기에 상당히 인색합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좋은 일을 당하든지 나쁜 일을 당하든지 항상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했으면 하는 저의 바램입니다. 이러한 감사의 표현이 진심에서 우러나오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은 천국의 방언이라고까지 말씀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자그마한 일에도 감사하고 큰일에도 감사하는 생활을 할 때 우리 하나님께서 더욱 더 축복하시는 삶을 사시게 될 것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소출이 더욱 많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