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승리자가 되자 2002-06-25 16:34:54 read : 2901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2-06-23 // 히5:7-10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아멘.
어제 축구 보셨습니까? 4강입니다. 생각만 해도 너무 좋아서 밤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의 네티즌들 사이에는 히딩크감독을 죄수들에게 벌주는 무기징역형에 해당하는 "무기감독형"에 처하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 죄목의 첫 번째는, 온 국민을 잠을 설치게 한 수면 방해죄라고 합니다. 둘째, 공짜술로 술집 손해를 준 영업방해죄, 셋째,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을 호전되게 한 의료방해죄, 넷째, 선거에 관심이 없게 한 선거법 위반죄, 다섯째, 대표선수들 군 면제시켜 안보에 위험을 가져온 병역법 위반죄라는 것입니다.
하여튼 한국축구팀이 월드컵 4강에 들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저깨 경기가 끝나고 하도 시끄러워서 이태원의 길에 나가봤습니다. 그랬더니 대-단하더군요. 너무 좋아 가지고 길을 갈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이번에 4강에 드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했습니다. 왜 감사하냐? 지난 부활절 축하 연합예배가 상암 축구경기장에서 열렸습니다. 경기장을 너무 잘 만들어 가지고 제일 먼저 집회한 곳이 우리 개신교입니다. 그런데 설교하신 목사님이 "한국이 축구에서 16강 갈 줄로 믿습니다. 8강 갈 줄로 믿습니다. 4강 갈 줄로 믿습니다. 결승 갈 줄로 믿습니다. 우승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그러셨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다들 "아멘"을 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사실 저 분이 나이 많으니 좀 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우리가 4강에 간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주의 종을 사랑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경기장에서 그 많은 인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공언을 한 것이 아닙니까?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신 말씀이 조롱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십니다. 체면을 살려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더 감사를 했습니다. 참 대단합니다. `꼭 결승에 나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결승까지 가서 장로님의 기도대로 우승하기를 꼭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고난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번 주간이 6·25전쟁 기념일이 있기 때문에 고난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앞으로 우리 민족이 어떻게, 또 우리 자신들이 신앙 안에서 이 고난을 어떻게 대처해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자기가 당하는 것과 남이 당한 고난을 위로하는 것과는 차이가 많습니다. 고난은 남이 당할 때보다 내가 직접 당해 보면 솔직히 너무 힘듭니다. 제가 목사인데도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하물며 여러분은 어떠시겠습니까? 여러분을 무시해서가 아닙니다.
지난 이야기지만 자녀들이 속을 썩일 때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제 맘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주먹으로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얼마나 속을 썩었는지 몇 일씩 잠을 못잘 때도 많았습니다. 언젠가는 제 아내가 암이라는 판명을 받았습니다. 눈 앞이 아득한데, 참으로 막연했습니다. 죄송하지만 기도도 되질 않았습니다. 그 심정을 이해하시겠습니까? 결국 나중에는 암이 아닌 다른 병으로 판명이 나서 치료를 받았지만, 정작 그런 일을 당할 때에 본인들의 심정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사업이 안되어 먹고 살기 힘들게 되었을 때, `나만 이런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을 하면 더욱 힘들고 또 `무슨 죄가 이렇게 많아서`라고 생각하면 더욱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믿는 사람이 배신을 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솔직히 힘이 들 때는 기도도 안나옵니다. 그리고 신앙에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분명히 고난은 축복이고 고난은 승리하게 하고 고난은 우리에게 신앙의 인격을 새롭게 하는 복이다 이런 말씀을 보고 믿지만, 실제적인 삶의 현장에서는 고난을 당할 때의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참 이루 말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이런 속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는가? 오늘 주님의 고난을 통해서 고난의 승리자, 어떻게 하면 고난에 승리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1. 고난은 선택 여하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오래된 서구 풍습에는 엄마가 시집가는 딸에게 진주를 건네는 관습이 있습니다. 이 진주는 `얼어붙은 눈물`이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진주를 얼어붙은 눈물이라고 하는데는 두 가지의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딸이 시집가서 흘려야 할 눈물이다 하는 것에 대한 교훈이고, 또 하나는 눈물을 흘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눈물은 너로 하여금 가치 있는 인생이 되게 할 것임을 교훈 해주려는 엄마의 의도라고 합니다.
이 의미는 진주가 생성되는 과정을 보면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진주조개에 모래알이 들어와서 진주가 되는 것은 다 아실 것입니다. 이 진주는 본래 아비큘레대라고 불려지는 굴속에서부터 만들어집니다. 굴속에 모래알들이 굴러 들어오게 되면 즉각적으로 나카라는 물질이 생성되는데 이것이 모래알을 둘러싸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지나서 나카가 많이 쌓이면 쌓일수록 진주는 더욱 커져 값진 진주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작은 진주라도 수개월이 걸리고 어떤 진주들은 수년씩 걸려서 만들어지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굴속에 들어오는 모든 모래알이 진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굴 자체의 선택 의지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습니다. 내버려 둘 것인가? 진주 조개가 될 것인가? 하는 선택을 합니다. 모래알이 조개의 몸 속에 들어왔을 때, 그대로 놓아두면 나중에는 결국 그 모래알 때문에 살에 상처가 생기고 썩게되고 병들어 죽어버리게 됩니다. 반면에 처음에는 상당히 고통스럽지만 나카를 생산해서 모래알을 둘러싸기 시작하면 이것이 고귀한 진주를 만들게 됩니다.
사람들이 이 진주조개를 찾지 않습니까? 그것을 귀하게 여깁니다. 저는 우리 인생을 사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고난을 잘 받아들여서 진주와 같은 인생을 만드는 사람은 세상도 귀하게 여기고 찾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는 고난이라고 하는 크고 작은 모래알들이 계속 굴러 들어옵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예수를 믿어도 들어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세상에 사는 한,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고난은 계속되는 법입니다. 왜 그러냐? 근본적인 것은 죄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난의 때에 우리들이 이 고난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결과는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고난 때문에 어떤 사람은 죽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더 잘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을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까? 고난 때문에 죽는 것, 저는 그것 때문에 설교하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 때문에 더 잘되는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어떻게 사는 것이 고난을 잘 사는 것인가?
오늘 본문 8절, 9절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그랬습니다.
아들이면서도 고난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았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고난을 어떻게 하였는가 하면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고난에 대해서 순종을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고난의 승리는 순종에서 판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난에 순종을 하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고난의 승리자가 되기 위한 비결은 무엇입니까?
1) 고난에 순종한다고 하는 것은 고난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고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고난이 올 때 이상히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12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했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승리하기 위한 첫 번째 비결은 무엇보다 고난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고난을 실패하는 사람들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고난을 이상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상한 일 당하는 것처럼 여긴다는 것입니다. `내가 왜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 난이 내게 왜 왔는가, 고난의 원인이 무엇인가` 하고 그 원인을 밝히려고 합니다. 이는 고난을 더 어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책임의 소재를 찾기에 바쁩니다. 이 고난이 죄 때문인가? 시련 때문인가? 하는 입니다.
그런데 고난이 죄 때문이라고 하면 예수님도 죄가 있다 그렇게 얘기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고난을 이상하게 받아들일 때 절대로 고난에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고난의 승리는 속이 시원하게 잘잘못을 가리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을 가린다고 시원할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되지를 않습니다.
욥의 경우를 보십시오. 친구들은 찾아와서 기껏 하는 일이 무엇인가 하면 "너 죄 지었지? 빨리 회개해" 그러는 것입니다. 고난의 원인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가 당한 고난을 도와주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의 고난의 원인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그것만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도 아니 제자들까지도 그랬습니다. 한 눈먼 소경아이를 보고하는 말이 "저 아이의 죄는 아버지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 자신의 죄 때문입니까?"하고는 죄의 원인만 밝히는 것입니다. 그의 고난을 이상히 여기고 문제로만 보았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문제는 하나도 해결이 안되고 오히려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가진 사람을 죽게 하는 일 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 눈을 뜨게 해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생각과 세상 사람들의 차이입니다. 우리 주님은 철저하게 고난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고난을 우리 인생에게 필연적으로 올 수밖에 없는 것을 알고 고난을 원하지는 않지만 고난이 받아들이는 저는 다음과 같은 신앙적 태도를 가지고 삽니다. 병도 많이 치뤘습니다만 저는 제가 살면서 병이 없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건강을 자랑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제가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것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고난 없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고낭의 원인을 밝히지도 않습니다. 다만 내가 고난을 당하든 안당하든 내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서의, 목사로서의 자부심만은 손상받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저는 남이 내 뜻대로 해주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자식들이나 아내까지도 내 뜻대로 해달라고 원치 않습니다. 말은 하지만 안된다고 실망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 삶 속에, 내 가정 속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저는 분에 넘치는 이익도 바라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 주시면 주시는 대로 가치 있게 살려고 애를 쓸 뿐입니다. 저는 억울하게 고난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밝히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옳은 만큼의 자부심이 손상을 받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에 대해서도 순종을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육신을 가지셨으니 굶주림으로 인한 괴로움, 사랑하는 제자가 배반을 함으로 겪어야 했던 괴로움, 유대종교지도자들 즉 기득권자들의 비난과 음모 해하려하는 것을 겪는 괴로움, 몰이해하는 제자들을 가르쳐야 하는 괴로움,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괴로움까지도 주님은 순종하심으로 괴로움을 그대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이상히 여기지 않으신 것입니다. 우리도 고난이 올 때 이상히 여기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 고난을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닌 감당해야 할 숙제로 삼는 것이다.
예수님은 고난을 문제로 보지 않고 감당할 숙제로 보았던 것입니다. 문제와 숙제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문제는 푸는 것, 즉 원인을 밝히는 것에 목표가 있습니다. 반대로 숙제는 고난을 해결하고 그 책임을 감당하는 일에 목표가 있습니다.
다음의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어느 부잣집 앞에 널직한 빈터가 있었습니다. 잘 살려고 멋있게 지어놓고 담장도 치고 정원도 잘 가꾸었습니다. 그런데 이 집 앞에 빈 공터가 있는데, 사람들은 이 빈터에 쓰레기를 갖다버려 그만 이곳이 쓰레기장이 되버리고 말았습니다. 쓰레기가 하나씩 쌓이면서 냄새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속이 상했겠습니까?
이 부자가 화가 나서는 쓰레기 차를 불러 이 쓰레기를 다 치웠습니다. 다시 깨끗해졌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부터 또 갖다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부자가 안되겠다고 생각을 하고는 그 쓰레기 싹 치워버리고 철조망을 치고 팻말을 써 붙였습니다. "이곳에 쓰레기를 버리지 마시오." 그랬는데도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계속 갖다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부자는 쓰레기를 치우고는 몰래카메라를 설치했습니다. 그리고는 팻말에 "이곳에 쓰레기를 버리지 마시오 몰래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음. 적발 시는 고발 조치함." 이라고 더 크게 써 붙였다.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 듯 했습니다. 마침내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을 붙잡아 고발 조치를 하고 벌금을 물게 했습니다. 그제야 동네사람들은 정신을 차리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이전보다 더 영악스럽게 동네사람들은 카메라를 피해서 쓰레기를 갔다 버렸습니다. 부자는 동네사람들은 아주 나쁘다고 욕을 했습니다.
어느 날 시골에서 부자의 아버지가 상경을 했습니다. 노인은 부자아들의 불편을 들었습니다. 노인은 다음 날 아침 일찍 빈터에 나가서 철조망을 걷어 내고 쓰레기를 한곳으로 모으고 팻말도 빼버리고는 땅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삽과 괭이로 빈터를 가꾸기 시작했습니다. 돌을 골라내고 두둑을 만들어 밭을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무엇인가 정성껏 심었습니다. 노인은 그 후로 며칠동안 만들어 놓은 밭에 물을 주었습니다. 때를 맞쳐 하늘에서 촉촉히 비가 내리자 밭에서는 파란 싹이 나기 시작하더니 보기 좋은 시금치가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팻말이 써 붙였습니다. "필요하신 분은 먹을 만큼 뜯어 가시오." 노인은 부자 아들에게 "얘야, 시금치가 다 쇠면 상추, 파, 오이 같은 것을 심거라. 그리고 꽃도 좀 심어라."
부자아들은 아버지가 일러준대로 했습니다. 동네사람들이 이 밭에 와서 시금치도 뜯어가고 상추도 뜯어가고 오이도 파도 따가고 꽃도 구경하면서 쓰레기만 가득하던 이 빈터는 자연스럽게 동네의 사랑방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과 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동네사람들은 전에 생각한대로 나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알고 보니 순박하고 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부자와 부자아버지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부자는 자기의 빈터에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을 문제로 보고 그것을 막으려는 것에 목표를 두었습니다. 그 결과는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리고 이런 문제가 계속 될수록 이웃과의 관계는 더욱 나빠졌습니다.
반대로 부자의 아버지는 빈터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 땅에 무엇을 채울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빈터에 버리는 쓰레기의 문제의 해결보다는 빈터를 어디에 쓸 것인가?의 고민을 한 것입니다. 같은 빈터를 가지고도 문제로 보는 사람과 감당해야 할 숙제로 보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삶을, 고난을 문제로 보고 그 원인을 푸는 일에 목표를 가지고 삽니다. 그래서 산다는 것은 매일 그 문제를 푸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남편도 문제고 아내도 문제고, 부모도 문제고 자식도 문제입니다. 자녀가 공부를 잘 해도 문제고 못해도 문제입니다. 교회가 작아도 문제고 커도 문제입니다. 사업이 안되어서 문제고 잘되어도 문제입니다. 모든 것을 문제로 보면 문제는 없어지기는커녕 갈수록 날마다 새롭게 생기는 것이 인생사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누가 문제로 내주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문제로 내준 사람도 없는데 그런 것들을 문제로 알고 끙끙대며 풀고 있으니 이런 태도는 잘못된 것입니다.TV나 언론에서 문제로 보면 모두가 그 바람에 휩쓸려 문제라고 합니다.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로 보는 한 고난은 하나도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네 책임이다", 이런 식으로 문제를 풀다보면 내 책임이 있습니까? 다 남의 책임만 있습니다. 가정이나 교회의 문제를 얘기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문제의 원인을 밝혀내는 것만으로는 고난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난에 대하여 감당해야할 책임이요 숙제입니다.
이번 한일 월드컵 4강전의 승리는 축구선수들 뿐 아니라 국민들의 응원의 힘도 컸다는 것은 누구도 잘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어제는 5백만명이 거리에서 응원을 했다고 합니다. 아무튼 그 빨간 티셔츠를 만든 사람은 수억을 벌었다고 합니다. 이 국민들의 응원 속에는 축구선수들의 수고에 같이 동참하고 힘을 실어주려는 의도가 다분히 보입니다. 대한민국의 국민의 장점은 고난의 시기에는 고난을 문제로 보기보다는 숙제로 보고 책임을 감당하려는 태도입니다.
IMF로 어려움을 겪을 때, 온 국민은 이 어려움을 먼저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여 금 모으기 운동을 했습니다. 이런 나라가 있습니까?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 나라만이 그런 운동을 했습니다. 일제시대에는 국채보상운동을 함께 했습니다. 그 뿐입니까? 여름에 수해가 나면 너나할 것없이 수재의연금을 모아 어려움을 같이 해결하려는 것은 바로 이 민족의 자랑거리입니다. 우리 나라는 어느 나라보다도 고난을 많이 겪어본 나라입니다. 살아보니까 문제의 원인을 밝히는 것보다는 문제에 책임을 지는 것이 삶을 윤택하게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태도가 오늘의 축구의 4강을 이루기도 한 것입니다. 이런 책임지는 태도는 우리가 계속 개발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신앙의 선배들도 다 이렇게 살았습니다. 문제의 원인을 풀기 보다는 문제가 생길 때 그것을 숙제로 삼고 책임을 감당하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조카 롯 사이에 양을 키우는 것으로 인해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것은 고난입니다. 그 때 찾아온 조카 롯에게 아브라함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리라"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조카가 더 좋은 땅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니까 작은아버지가 하는 말이 "야, 내가 아무리 그렇게 말했다고 네가 그렇게 할 수 있냐? 그래도 그 땅은 나한테 양보해야지" 이렇게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문제의 해결, 고난을, 문제의 책임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 것인가 하고 감당할 것만 생각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왔지만 그는 문제의 원인을 찾지 않습니다. 만약에 고난을 문제로 봤더라면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절대 그에게 복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할 뿐이었습니다. 노예로 있으면 노예로 최선을 다하고 죄수로 있으면 죄수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승리의 비결이었습니다. 신앙의 선배들은 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요셉은 주어진 고난을 잘 받아들일 뿐 아니라 숙제로 알고 고난의 책임감당을 잘해서 애굽의 국무총리까지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 십자가 지는 것이 너무나 힘들고 어려워서 이 고난의 잔을 옮겨달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사 그는 묵묵히 십자가 지는 것을 감당하셨습니다.
고난의 승리자가 되는 비결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을 문제로 보고 풀려고 하지 말고 원인을 밝히려고 하지 말고 고난 속에 내가 해야 될 일이 무엇인가를 찾는 여러분, 그런 사람이 참 신앙인고 그런 사람이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바울은 문제로 보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뭐라고 했습니까? 이 어려움에 처해 있는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다른 것에 있지 않았습니다. 이 고린도 교회는 은사를 받은 사람이 많았습니다. 능력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문제가 복잡했습니다. 왜 그럽니까? 늘 이들은 이 문제를 누구 때문이라고 얘기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고린도 교회를 향해 "사랑을 하라!"라고 책임을 강조합니다. 이것이 믿음보다 소망보다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 어려움이 생길 때 그 원인을 찾기보다는 내 사명을 감당할 줄 아는 여러분에게 은혜 있을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받는 것에 관심을 두게 되면 내가 받지 못한 것이 섭섭한 것입니다. 내가 이 집에 시집을 와 가지고 받은 것이 무엇이 있나? 생각해보면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내가 이 집에 시집올 때 봇다리 싸 가지고 왔지, 자식 낳아 주었지, 키워 줬지, 이것이 꼴이 뭡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오늘 하루도 못삽니다.
조오지 피바디라는 사람은 자신의 막대한 재산을 자선사업과 교육사업을 위해 내놓은 다음,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내 평생에 걸쳐 피와 땀을 흘려 모은 재산을 내놓는 것은 확실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결단을 하고 내놓았을 때, 재산을 모으는 기쁨에 비할 수 없는 신비로운 기쁨이 있었다."
또한 폴 투르니에도 "선물을 주는 것은 사실상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주는 일" 당신은 얼마나 잘하고 계십니까? 주는 일을 잘하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줄 줄을 모르고 받으려고만 하는 사람을 일컬어 일종의 "유아기적 고착"에 빠진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혹, 아직도 유아기적 고착에 빠져 계시지는 않습니까? 당신은 주는 것과 받는 것 중 어느 쪽을 더 즐겨하고 계십니까? 받는 것이 표면적인 기쁨이라면 주는 것은 내면으로 승화된 기쁨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상황이 주어졌든지 간에 이것은 내 책임인 줄로 알고 이 사명을 감당한 것, 하나님이 기억하고 하나님이 복 주실 줄로 믿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교회 일을 하다 보면 우리들 가운데 `내가 이 교회에서 받은 것이 뭐가 있어? 교회는 문제가 많아. 말과 행동이 달라. 위선자들이 다 모여있는 곳이야. 교회는 보면 나쁜 사람이 더 많아`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옳습니다. 교회에 오면 나쁜 사람도 많고 위선자도 많습니다. 목사님도 다 믿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문제를 밝혀내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신앙인에게는 문제는 없고 숙제만 있습니다. 가정 숙제, 교회 숙제를 해야 합니다. 이 민족의 숙제, 누가 감당해야 하느냐? 내가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면 승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민족이 6·25전쟁의 고통을 받은 것, 이것은 누구 때문에 생겼습니까? 다 압니다. 6·25전쟁이 끝나서 남북이 나뉘어져서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가 되었습니다. 참 불행한 일입니다. 언제까지 그 원인을 찾겠습니까?
가만히 겪어보면 이북 사람들 믿지 못하겠습니다. 믿을 만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햇빛정책을 해서 갖다주어도 저 사람들, 우리가 원하는대로 잘하지 않습니다.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저 사람들은 정상이 아니다, 정상이 아닌 사람한테 정상적인 것을 요구하면 누가 비정상입니까? 내가 비정상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통일 정책 다시 세워야 할 것입니다. 저는 햇빛정책이 옳으냐 그르냐를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고난의 승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짜 통일을 염원한다면 주님의 고난을 배워야 될 줄로 믿습니다. 정상적으로 하지 마십시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고 하지 않습니까? 주님의 사랑으로 그들을 대할 때 남북 통일되고, 복음 통일되고, 하나님의 역사가 이 땅에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6·25전쟁, 분단국가, 이것은 문제가 아니라 숙제입니다. 이 책임을 잘 감당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3. 고난에는 영성이 있다.
본문 말씀 중에 7절을 보십시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
예수님은 고난을 받을 때에 가만히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책임감당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에 한가지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내 힘으로는 다 안되는구나` 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내 힘으로 다 됩니까? 안됩니다. 여러분, 내가 박사학위를 열 개를 받은들 인생의 문제들이 다 해결될 것 같습니까? 안됩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때에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아뢰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경건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은 이런 예수님의 간구와 소원을 들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고난의 영성이라는 말은 간증거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난 때에 우리가 할 일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하나님께 맡길 때에 승리하는 역사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고난을 통해서 얻어야 될 영성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약하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계획하고 사는 삶은 고난이 올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인도하시는 삶이 더 복되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빌립보서 4장 11-13절에서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그 응답을 받아 본 일이 있습니까? 그 때 기분은 어떠했습니까?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나만의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지난 주일 우리 이 목사님이 설교를 하고 간증을 했습니다. 이 목사님의 신앙의 간증을 들으면서 그 가정의 삶을 보면서 내가 한가지 깨닫게 되는 것은 저렇게 힘든데, 저렇게 감사하고 기뻐할 수가 있나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만 가능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이런 간증이 있어야 합니다. 간증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인간의 힘으로는 안된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고 도와주셔야 될 줄로 믿습니다"
박창빈 목사님, 북한에 자주 갔다 오시지만 갔다 오실 때만다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니까 하신다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는 안되는 분들과 대화가 되느냐? 사람의 힘으로는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힘으로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고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는 고백이 없으면 우리는 고난의 승리자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번에 중국에 가서 아주 반가운 소식을 하나 들었습니다. 연길 교회 유두봉목사의 말인데, 이번 연길교회에서 총동원 전도주일을 해서 3000여명의 결신자를 얻었다고 합니다. 이런 총동원 전도가 우리나라에서는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지만 중국에서는 전도가 법으로 금지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전도를 했다는 것은 아주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들은 이 일을 통해 자기 간증들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법을 넘어설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이 믿음의 결단에 중국의 공산당의 조사도 있었지만 무사히 넘어 행사가 잘 끝난 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는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유두봉 목사에게 전도하지 말라는 것은 상품을 만들어 놓고 팔지 마라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좋은 것은 팔아야 합니다. 전도는 믿는 사람이면 당연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한 것이 간증거리를 만든 것입니다.
제가 방문한 한 교회도 교회의 건축을 하는데 자기들의 힘으로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 간증이 신앙의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돈도 돈이지만 고난을 감당해야만 하는 책임으로 믿고 헌신할 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비로소 참 신앙인인 사도 바울처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중국선교가, 중국교회가 선택해야 하는 신앙인의 길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시를 하나 소개하려고 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정원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도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가
아기가 엄마를 부르는 것이듯이
그리고 그 언어가 엄마에게 가장 감동을 주어
아기에게 오게 하듯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는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곁에 오게 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를 때
그분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가까이 오십니다.
주를 부르는 자는 그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침에 자리에서 잠이 깨었을 때
조용히 주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그것은 행복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방법입니다.
4. 결론- 고난은 우리는 온전케 한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온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온전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완전이 아닙니다. 그 온전은 하나님이 주시는 안에서만 온전의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의 현장 속에서 당하는 이 고난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고난을 문제로 풀려고 하지 말고 숙제고 감당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우리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그 고난 속에서 주시는 능력과 은혜 속에서 우리는 `인생은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이 있어야 산다`고 하는 그런 고백들이 여러분에게 많아질 때, 우리는 병들 수도 있고, 가난할 수도 있습니다. 내 자식이 속을 썩일 수도 있습니다. 내 뜻대로 안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속에서도 우리는 감사할 수 있고, 평안할 수 있고, 이 세상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어떤 신문을 보십니까? 저는 국민일보를 보는데, 이 국민일보에 월드컵 선수들의 가정에 대한 얘기가 나왔습니다. 여러분, 이탈리아하고 우리나라하고 경기를 할 때, 패널티킥을 실축한 안정환 선수가 있습니다. 그 패널티킥을 실축하고 나서 그 선수가 그 연장전까지 뛸 수 있다고 상상할 수 있습니까? 내가 감독이라고 뺏을 것 같습니다. 무슨 기분으로 뛰겠습니까? 그런데 그 부인이 기사를 보니까, 그 신문 1면에 그 부인이 기도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안정환 선수가 잘 뛸 수 있도록 그 부인이 매일 정오까지 금식을 하는데, 링거주사를 세 번이나 맞고, 이탈리아 전이 끝나고 난 뒤에는 한시간 동안 울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남편 안정환이 부인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 마지막에 그 골을 넣을 수 있었던 것이, 그의 신앙 고백이, 하나님이 남편의 머리 위에 축구공을 얹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우연이라고 하고 투지라고 하지만 기도한 사람은 아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머리 위에 공을 얹어 주시니까 들어간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신앙의 고백을 하는 선수가 무엇이 무섭겠습니까?
어제 패널티킥을 잘 막은 이운재 선수 부인도 그 어머니가 예수 안 믿으면 너희들 절대 결혼 못한다고 하니까 4년 동안 교회 다니고 확인한 후에 결혼을 했습니다. 이 거미손 뒤에는 기도의 힘이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국민일보에 보면 "믿음의 전사들에게 힘이 쏟아 불가능을 넘는다." "투혼 뒤에 기도부대, 손 모은 가족과 교회들"의 기사가 많이 실렸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정말 자랑하고 정말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이 고난 속에서 이 어려움 속에서 문제로 보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도우심의 손길을 기다리며 기도하고 그 기도가 응답 받아 간증하고 이것이 우리 인생의 힘이 되어질 때 우리는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그 기쁨과 감격 속에서 우리는 승리하는 인생을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