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자 하면 삽니다(2) 2002-06-13 19:53:09 read : 2805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 영광의 삶 -
요한복음 12:24-26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불패(不敗)의 세계 제패자를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저들은 다니엘을 위시한 구약의 예언자들이 말하고 있는 인자의 영광(단 7:13-14)은, 바로 저들이 기다리는 메시야가 나팔소리 울려 퍼지는 행진 속에서 승리의 투사로 세계를 정복하고, 권력을 장악하고, 예루살렘 성도(聖都)에서 영원한 다윗 왕국의 영광과 솔로몬 왕국을 재현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시고, 나사렛에서 사시고, 갈릴리에서 사역하시면서 선언하신 예수님 자신의 영광, 곧 인자의 영광은 십자가의 죽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의 메시야관에 비추어 볼 때 이런 예수가 메시야라는 것은 저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나사렛 사람 예수는 위선자요 신성모독자로서 마땅히 제거해야 될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들로서는 당연한 생각이었습니다. 몇몇 갈릴리 어부들과 놀아나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예수는 사실상 하루빨리 없애버려야 될 저주받은 존재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의 메시야였습니다. 그는 구원받기로 작정된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불멸의 진리를 말로 남기고, 십자가와 부활의 행동으로 남기고, 성령을 통한 계시기록(성경)으로 남겼습니다.
그 결과 2000년 역사의 한가운데 예수를 따르고 예수를 위하는 영광의 삶을 사는 별같이 빛나는 무리(교회)들이 그의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교회) 운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영광의 진리가 ‘죽고자 하면 산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2장 24절에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신 예수의 자기 선언은 예수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입증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자의 영광이라고 하였습니다. 실로 영광의 진리였습니다.
이제 다시 그 영광의 진리가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적용되어야 할 것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 12장 25-26절입니다. 곧 죽고자 하면 산다는 진리가 어떻게 적용될 것인가 그 구체적인 내용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내용입니다.
주님 자신의 경우는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이었습니다(벧전 2:24). 그렇다면 제자들(교회)의 경우는 어떤 것인가? 제자들의 경우 한 알의 밀이 된다는 경우는 어떤 것인가?
Ⅰ.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자기 부인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2장 25절에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자기 생명’은 육신의 목숨을 의미합니다. 곧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기 만족만을 추구하는 욕망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철두철미하게 이기주의적이고 자기 안전제일주의를 가리킵니다. 바울의 영감의 표현대로 말하면 ‘육신’입니다. 또 ‘육신의 생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의 종국은 사망입니다(롬 8:3, 4, 5, 6, 7, 8, 13). 이것을 사랑(filevw)한다는 말은 자기 부모나 자녀, 사랑하는 육친(마 10:37)이나 자기 것에 대한 애착심을 가리킵니다(요 15:19). 그것은 육체적이고, 감각적이고, 본능적이고, 현실주의(금세주의)적인 모든 애착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가 곧 ‘죽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미워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여기 ‘미워한다(misevw)’는 말은 ‘원수를 미워한다’(마 5:43)든가, ‘불법을 미워한다’(히 1:9)라는 뜻에 해당되는 단어입니다. 자기 생명에 대한 본능적인 불쾌감, 거부감, 나아가서 증오심까지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구체적으로 계속 반복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4장 26절에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9절에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5절, 마가복음 8장 35절, 누가복음 9장 24절에도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생명을 미워한다는 말은 예수와 예수의 복음을 위하여 자기 생명, 자기 가족, 자기 재산, 자기 욕망, 자기 자랑, 자기 명예, 자기 목적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부인을 말합니다. 그런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 12:25)고 하였습니다. 여기 ‘보존’(fulavxei)은 현재이면서도 동시에 미래적인 영생(eternal Life)의 독특한 성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상 영생입니다(마 25:46). 불행스럽게도 밭에 소출이 풍성한 한 부자는 이 진리를 몰랐습니다. 그는 시간도 내 것이고, 공간도 내 것이고, 밭도 내 것이고, 풍성한 소출도 내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물론 창고도 내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날 밤에 하나님이 그 부자의 영혼을 도로 찾아 버렸을 때, 이 세상에서 자기를 위하여 예비한 것까지 다 잃고 말았습니다. 주님께 영생문제를 질문했던 한 부자 청년도 그에게 있던 재물 때문에 주님을 떠나 버렸습니다. 결국 그는 모두를 다 놓치고 잃어버린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눅 18:18-25). 그래서 주석가 벵겔(Bengel)은, ‘우리의 영혼이 자신의 생명을 미워함에 도달하는 방법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푹 적시움에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롯의 아내는 자기생명을 미워하지 못했던 한 표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뒤(소돔=세상)를 돌아본고로 소금기둥이 되어 버렸습니다(눅 17:32). 예수께서 말씀하신 영광의 삶은 ‘죽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부인을 의미합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금세와 내세에서 보존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실로 엄청난 역설의 진리가 아닌가!
Ⅱ. 예수 자신을 따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6절에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죽음이 영광이 된다는 말은 ‘예수를 따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따른다’(ajkolouqevw)는 말은 ‘같은 길에 함께 있다’라는 뜻입니다. 마가복음 1장 18절에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좇으니라」고 한 경우입니다. 마가복음 2장 14절에 예수께서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고 한 경우입니다. 자기 자리를 털어버리고 일어나는 행동을 말합니다.
이 말의 헬라적 용법은 ① 신하가 왕명을 좇는 경우, ② 병사가 지휘관의 명을 좇는 경우, ③ 헬라의 시민들이 시민법을 좇는 경우, ④ 제자가 스승의 교훈을 좇는 경우 등에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따른다’, ‘좇는다’는 이 말은 같은 길을 뒤좇는다, 같은 길에 함께 간다, 앞선 분을 닮는다는 뜻입니다.
바로 완전 방향전환, 의미전환, 목적전환을 의미합니다. 결정적인 행동이 수반되는 전인적 전환, 곧 돌이켜 행함을 의미합니다. 바로 그것이 죽음과 같다는 것입니다. 육에서 영으로의 전환입니다.
세상에서 하늘에로의 전환입니다. 사탄의 지배에서 예수에게로의 전환입니다. 무신론, 유물론, 진화론, 우연론에서 유신론, 기독론에로의 전환입니다. 그것이 ‘죽음’과 같은 사명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방향전환의 목적은 예수만 섬기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만 섬기는 새로운 차원의 삶이 벌어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나(예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고 한 것입니다. 전 삶의 존재 의미와 가치와 내용과 목적이 바뀌어야 영광된 새로운 삶이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그것이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고 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 순간에 그 사람은 벌써 그 인생 전부가 주님 계시는 곳에 자리를 같이하는 축복을 누린다고 하였습니다.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요 12:26)라고 하였습니다. ‘나 있는 곳’이란 주님의 보좌를 가리킵니다. 그 사람은 이 세상에 살지마는 실제로 그 삶의 중심은 이미 천국중심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가리켜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요 12:26)고 하였습니다. ‘귀중히 여긴다’는 말은 ‘값을 치른다’, ‘값을 정한다’라는 뜻으로 벌써 하나님의 축복의 보상을 받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것을 가리켜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 16:24)고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 요한복음 12장 24절은 이 진리를 알려주는 예수님 자신의 죽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곧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인자의 영광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5-26절은 제자(신자)들의 영광입니다. 오늘날 그를 따르는 제자된 우리들의 죽음을 가리킵니다. 그 죽음이 무엇일까? 바로 세상에서 ①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것이요(요 12:25), ② 예수를 따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요 12:26). 그것은 실로 죽음과 같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죽음의 과정을 통과한 사람에게 오히려 다시 사는 영생이 보존되고(요 12:25), 주님이 계시는 천국보좌에서 하나님의 보상을 받게 된다고 하였습니다(요 12:26). 이 위대한 역설의 진리는 그 진리를 믿는 자들에 의해서 역사의 한가운데 ‘그리스도의 나라’ 곧 ‘교회운동’으로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역사의 한가운데 자리잡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예수와 그의 복음 때문에 죽고자 하여 자기 목숨을 미워하면서, 예수를 따른 자들에 의해서 이룩된 역설의 단체입니다. 바로 예수 자신의 십자가 사건이 그러했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죽음이 없었다고 한다면, 영광의 부활이 없었을 것입니다.
초기박해 300년의 교회들은 로마황제 숭배의 박해와 온갖 이교도의 박해 속에서 그야말로 죽음의 행진을 이루었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박해와 암흑과 카타콤(지하교회)의 어둠에서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영광을 맛보았습니다. 저들은 모두 이 세상에 죽으러 온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저들은 가이사의 영광보다 예수 십자가의 가시면류관 쓰기를 더 영예롭게 여겼습니다. 중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은 실로 죽음의 전사(戰士)들이었습니다. 종교개혁 이전의 영국의 위클립이나 보헤미야의 순교자 요한 후스나 저 왈도파들은 복음의 진리를 위해서 죽고자 하였습니다. 개혁자 마틴 루터는 부름스 종교회의에 소환되어 가면서 자기를 죽이려는 마귀떼들이 기왓장 조각처럼 많을지라도 나는 가고야 말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 1000년이 넘도록 잠들었던 구라파 영계에 아침이 동트지 않았습니까? ‘만약에 당신이 제네바로 가지 않으면 하나님이 당신을 저주하고 말 것이다.’라고 하던 파렐의 책망을 받은 칼빈은 죽음을 각오하고 제네바로 뛰어들었습니다. 그 결과 제네바는 종교개혁의 성지가 되지 않았습니까?
영국과 스코틀랜드와 화란에서 그 얼마나 많은 진리의 백성들이 진리를 위하여 목숨을 던지는 죽음의 걸음을 걸었습니까? 그 결과 구라파는 선진 문명의 축복을 누리지 않았습니까?
진리를 위하여 목숨을 던진 필그림들로 말미암아 오늘의 미국이 21세기의 요셉의 창고가 되지 않았습니까? 일제박해 36년 동안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한국 교회가 떼죽음을 당할 때 살고자 했던 자들은 모두 진리의 배반자가 되었고, 죽고자 했던 진리파수의 순교자들로 말미암아 오늘의 한국 교회가 21세기 세계선교의 주역이 되지 않았습니까?
주기철 목사를 위시한 수많은 순교자들이 흘린 피가 오늘 한국 교회 부흥의 종자가 되고, 밑거름이 되지 않았습니까? 살고자 하면 죽습니다. 그러나 죽고자 하면 삽니다.
죽음을 통하여 생명이 나오고, 자기 희생을 통하여 영광의 결실이 오는 것은 자연계와 영계에 하나님이 정하신 천정(天定)의 법칙입니다. 바로 우리 교회 생존의 법칙입니다. 우리 교회 부흥의 법칙입니다.
우리 교회 축복의 법칙입니다. 바로 영광의 삶의 법칙입니다. 이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 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