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때에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족속 중에 아모스가 왕을 모반하나니 그 모든 말을 이 땅이 견딜 수 없나이다. 11 아모스가 말하기를 여로보암은 칼에 죽겠고 이스라엘은 정녕 사로잡혀 그 땅에서 떠나겠다 하나이다 하고 12 아마샤가 또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서나 예언하고 13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이는 왕의 성소요 왕의 궁임이니라. 14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요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로서 15 양 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 16 이제 너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 네가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대하여 예언하지 말며 이삭의 집을 향하여 경계하지 말라 하므로 17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아내는 성읍 중에서 창기가 될 것이요 네 자녀들은 칼에 엎드러지며 네 땅은 줄 띄워 나누일 것이며 너는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정녕 사로잡혀 그 본토에서 떠나리라 하셨느니라.
드디어 한국축구가 월드컵 4강에 들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는 하나가 되는 문화를 만들어냈습니다. 거기에서나 집에서나 경기장에서 모두가 하나가 되는 놀라운 응집력을 보였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러한 열정을 바탕으로 이 나라와 이 민족이 더욱 더 하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실 6·25에 대한 관심은 멀어진 듯하지만, 어쩌면 6·25기념식을 하는 것보다 실질적인 면에서 이 나라와 민족이 하나됨을 위해 더욱 열매를 맺는 현상이라 생각됩니다. 더욱이 열광 가운데서도 질서정연하게 진행되는 모습을 볼 때 그래도 이 나라에 아직 희망이 있다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래도 우리 민족의 분단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을 고통의 늪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단지 이산가족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와 우리의 후손에게까지 고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우리 민족에게는 별로 희망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나라가 점점 작아지는 역사를 걸어온 우리입니다. 남북이 하나됨에 대한 노력은 이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순간이 되어야 합니다.
분단의 아픔은 단지 우리 민족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세계 곳곳에 크고 작게 많이 있습니다. 언젠가 TV에서 우리보다 더 절박하게 나뉘어진 가족들에 대해 소개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현재 저 가나안 땅 팔레스타인에서도 분단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골란고원을 점령하면서 나뉘어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국경에 걸쳐 쳐진 철조망을 가운데 두고 약 500-600m의 거리를 두고 서로 안부를 전하고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나와 확성기를 들고 서로 가족과 친척의 안부를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휴전선을 두고 서로 보지도 만나지도 못하고 있는 우리 민족보다 더 가슴 아픈 삶을 살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차라리 그 아랍계 가족들을 요르단쪽으로 보내주기나 하면 이러한 고통이 줄겠건만, 이스라엘 정부가 너무한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보다 작은 수의 사람들의 문제이기에 잘 드러나지 않아 그렇지 사실은 나뉘어짐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은 무척 많습니다.
오늘 말씀은 분단을 치유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갈라진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가 되게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솔로몬 왕 이후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로 갈라진 지 약 200년이 지난 때, 곧 지금부터 약 2700년 전, 하나님은 그래도 그 나라가 다시 하나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이 일을 이루기 위해 아주 색다른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평범한 사람 가운데 선지자로 세워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아모스는 평범한 서민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선지자의 아들 오늘날로 말하면 신학생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양을 기르던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던 농부였습니다. 이는 당시에 보통 사람들이 종사하던 직업들이었습니다. 그가 양떼를 기르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를 택하여 나뉘어진 동족들에게 가서 예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평범한 사람을 택하여 보낸 이 사건은 매우 이례적인 사건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평범한 그리스도인을 선택하여 사용하실 수도 있습니다. 전혀 예기하지 아니하고 준비하지 않은 여러분도 하나님은 선택하여 그의 선지자로 사용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여러분을 택하여 북녘의 동포들에게 가라고 명령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 한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할 수 있다면, 여러분의 이름과 사역도 후대에 성경의 글처럼 길이 기억이 되고 기념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양치고 뽕나무를 키우던 아모스를 택하신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주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권력과도 아주 먼 농부와 목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깨닫게 하고 경고하고 심판하시려 하였습니다. 남왕국 유다보다 더 경제적으로 발전되어 강했던 북왕국 이스라엘을 치시려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27에서도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세상의 약한 것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십니다. 이 말과 연관되어 최근에 재미있는 사실은 축구대표팀 선수 가운데 한 사람이 이탈리아전 후 인터뷰하던 가운데 이 구절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신문에 약한 것을 택하사 강한 것을 부드럽게 하신다고 전해졌습니다. 아마도 기자가 실수로 부끄럽게 라는 단어를 부드럽게로 잘못 들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하나님은 약한 아모스를 강한 북왕국 이스라엘에 보내어 심판의 말씀을 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나라가 하나되게 하기 위해 아주 평범한 사람들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대통령이 북녘 땅에 가는 것도 중요하기는 하지만, 더 많은 국민들이 북한을 방문하여야 합니다. 북한을 방문한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지도층이 변하지 않으면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같다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방법은 다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로 하여금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무너뜨리는 방법을 사용하시기를 좋아합니다. 무력적인 면에서 강한 것으로 여겨지는 북녘 땅도 하나님 앞에서는 열 수밖에 없게 됩니다. 정치, 경제, 군사, 정신적인 모든 면에서 아무리 꽉꽉 걸어잠근 폐쇄적인 북한이라 할찌라도 하나님이 원하시건데 풀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이러한 시도에 대해서 반발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기의 기득권을 유지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제사장이었던 아마샤가 그러한 세력으로 등장합니다. 그는 우선 자기의 왕 여러보암 2세에게 아모스라는 사람이 왕에 대하여 거역하는 말을 퍼뜨리고 있다고 고발합니다. 그리고는 아모스를 향해서는 곧 왕의 체포명령이 떨어질 것이니 이 땅에서 떠나라고 알려줍니다. 그러면서 네 고향에 돌아가 떡이나 먹고 예언하라고 제언합니다. 다시 말하면, 왜 죽으려고 하느냐? 네 고향에 돌아가 편히 살다 죽으라는 이야기입니다. 왜 아마샤는 그렇게 말했을까요? 아모스를 위해서 그러했을까요?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아마샤는 피를 흘리게 해서 자신에게 그 책임이 돌아오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아마샤는 자기의 영역과 기득권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이는 왕의 성소요 왕의 궁정이니라. 종교적인 면에서도 자기의 기득권을 지키려 했습니다. 하나님보다도 왕이라는 권력을 더욱 앞세우는 자세를 보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아모스서에 대해 권위있는 신학자 한스 볼프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마샤의 통고는 두 가지 사실을 침묵에 빠뜨리고 있다. 그는 아모스를 감동시켜서 규칙적으로 선포하도록 자극을 준 그 원인들, 곧 하나님의 말씀과 이스라엘의 불의를 지적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그는 아모스가 말씀을 선포한 다음에 그대로 재앙을 베푸는 자가 하나님이신 것을 알리지 않고 있다고 했습니다. 세상적인 왕과 하나님으로부터 동시에 권력을 얻으려 했던 아마샤는 스스로 분열과 모순에 빠졌기에 스스로 제사장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세상적인 것과 야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북한이 남한에 대하여 문을 열지 않습니까?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까? 이는 정신적이며 종교적인 면에서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외부세계에 대한 개방을 통한 발전과 자신들의 체제구축을 동시에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는 김일성 주석을 숭배하는 신앙 때문입니다.
최근에 제가 읽은 책이 있습니다. 이는 미중앙정보부 CIA 소속 헬렌-루이스 헌터(Helen-Louis Hunter)라는 북한분석관의 보고서인데, 그 가운데 최근에 비밀해제된 글은 북한 사회를 이렇게 진단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두 개의 축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출신성분이요 또 다른 하나는 김일성 숭배사상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두 번째 축 '김일성 숭배사상'은 이미 신앙화 되어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다른 종교를 부인하면서 자체적인 종교를 만들어 나가고 있는 것이지요.
이는 다시 말하면 종교적인 전쟁이 예상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 김일성 숭배사상을 무너뜨리게 되면 그들의 체제가 무너지고 그들은 권력을 잃게 됩니다. 바로 기득권을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북한의 지도층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땅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꼭꼭 문을 걸어 잠그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때일수록 우리는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보내어 그 북한을 녹이는 사건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이런 저런 도움을 주면서 우리는 자주 접촉을 하여야 합니다. 바로 그러한 방법으로 동독을 무너뜨리지 않았습니까? 그 길은 전쟁을 피하면서도 가장 피해를 줄이면서 통일을 할 수 있는 길임이 분명히 증명되었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여야 할 일이 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다양한 길을 열어 북한과의 교류를 더 시도하여야 합니다. 금강산 관광을 비롯하여 남북한 무역을 통해 바닷길을 열었고 대통령의 북한 방문과 이산가족 상봉 그리고 많은 민간단체들의 북한 방문 등을 통해 하늘길을 열었고 이제는 철로 및 찻길을 통해 땅길을 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문화적인 면에서도 조금씩 길이 열리고 있습니다. 얼마 전 신문보도에 의하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남한의 가요 20개를 해금시켰다고 했습니다. 지난 해 4월 가수 김연자씨를 초청해 공연하게 하고는 '눈물젖은 두만강' 등 일제시대 때 지어진 노래들 태진아의 '사모곡' 등 최근의 노래들을 북한에서도 부를 수 있게 했다는 것입니다. 대중문화적인 면에서 길이 열리고 있고 숨통이 트이고 있습니다.
이제 다음 단계는 무엇이어야 합니까? 바로 정신적이고 영적인 면에서도 길이 열리고 눈이 뜨고 또한 가슴을 열 수 있도록 하여야 합니다. 바로 이를 위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하고 또한 실질적인 노력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 교회도 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명이요 또한 우리가 감당하여야 할 책임입니다. 우리교회는 지금까지 이 문제에 대하여 너무나도 등안시 해 왔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가장 많은 피난민을 받았고 또한 그들을 위해 수고한 이 교회이건만 지금은 점점 잊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교회는 북한 선교를 위하여 1300만원의 예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써야할지 어떻게 선교를 진행하여야 할 지 전혀 방향조차 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 2월경 해외선교부와 대화를 가졌을 때 북한동포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전도를 앞으로 기회를 보아 추진할 것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달 의료선교회가 이번 여름에 의료봉사를 가고자 하는데, 어느 지역으로 갔으면 좋겠느냐는 질문에 중국 동북 3성에 있는 탈북자를 위해 갔으면 좋지 않겠느냐 제안한 바 있습니다. 현재 너무 위험한 상황이라 중국의 다른 지역으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있습니다만, 우리의 동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데 우리는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북한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 두 가지를 갖추어야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또 다른 하나는 떡입니다. 임마누엘 칸트도 "평화라는 것은 도덕적인 것으로만 오지는 않는다. 설교만 해서 될 일은 아니다. 금력이 또한 중요하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북한과의 평화통일도 우리의 기도만이 아니라 이에 더하여 우리의 노력도 함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북한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영적인 전쟁입니다. 그들은 김일성숭배사상으로 이미 종교화된 상태요, 그 뒤에는 악한 영이 그들을 조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악한 영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단순히 동포에 대한 사랑을 뛰어넘어 영적인 전쟁에서의 승리를 목표로 이 문제를 접근하여야 합니다. 너무 전투적이고 투쟁적인 분위기를 제시하여 상당히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영적인 상태가 그러함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영과 육 모든 면에서 생명을 가져다 주는 노력을 다 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교회도 남북한의 하나됨을 위하여 헌신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이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기도로 매어달리는 일을 우선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더불어 실제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길을 또한 찾고 북한 선교를 위하여 일할 일꾼 또한 키우는 일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나라와 민족의 화해와 하나됨에 참여하시는 교우가 됨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길입니다. 이 일에 참여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