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의 예술성(說敎의 藝術性) 2002-07-29 17:22:10 read : 6164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나는 매주일 찬양대 연습실에서 찬양 단원들을 기다리다가 그들과 함께 예배실에 입장한다. 거기서 많은 것을 배운다.
음의 적당한 고저, 장단, 강약, 정신, 마음의 표현, 각양 음의 조화 등을 통하여 아름답고, 감동적인 찬양이 창작되고 있음을 듣고, 보면서 설교자인 나는 설교의 예술성을 절실히, 아주 절실히 느낀다.
음악, 찬양은 작사, 작곡자의 혼이 담긴 한 악보를 가지고 합창하는 찬양대의 지휘자와 대원의 혼을 담아, 찬양을 듣는 청중의 혼이 융합, 어우러질 때 거기 눈물겨운 감격, 또는 삶의 환희, 신앙 생활에 필요한 힘을 얻고, 하나님께로 깊이, 아주 깊이 인도되어지는 메세지Message를 받게 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지휘자의 기능에 따라 이것의 승패가 좌우된다고 느꼈다. 여기서 나는 설교자의 입장으로 찬양의 모든 음악적 요소들을 찬양의 Story라고 해석하고 그것이 잘 짜여질 때 그 Story 이상의 Message가 창작되어지고, 찬양의 본질적 사명과 예술적 기능이 완성되어진다고 해석을 한다.
이러한 느낌으로 설교도 찬양의 경우와 같이 예술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예술이란 것이 무엇인지를 상고하자.
몇몇 사전들의 정의를 종합하여 보면 예술하는 사람은 일상생활에 보편적인 것들을 직관, 직감하여 그것들을 종이, 말, 문장, 물감, 돌, 나무, 소리, 기호 등의 물질적인 재료에 의하여 표현하고 이것을(이것들을 나는 Story라고 표현한다.)관상(觀賞)하는 사람에게 직관, 직감시키려(이것을 나는 Message라고 표현한다.)애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예술작품으로부터 관상자가 누리는 것은 단순한 Story를 통한 관능적 쾌감에서 끝나는, 단지 수종적(隨從的)인 입장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작품을 통하여, 그 Story를 통하여 그 이상의 미적 (美的)세계의 Message를 받거나 재창조(追創造)하는 과정에서 예술의 참 목적은 달성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설교는 그 무엇보다도 정밀한 예술 활동이다.
첫째, 설교의 목적은 예술의 경우와 같이 Story를 통하여 깊은 Message의 세계를 전달하려는 것이다.
둘째, 예술의 경우와 같이 설교는 설교자를 통하여 전달되는 Story를 통하여 청중이 주관적으로 Message의 세계를 재창조(追創造)하는 경우에 설교의 목적이 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그런 의미에서 예술과 같이 설교자가 가지고 있는 성경 속에 Message와 설교자의 설교 Story속에 Message와 청중의 영혼 속에 Message가 하나로 이루어질 때 거기에 설교 활동의 목적이 성취되기 때문이다.
넷째, 미술의 경우는 종이, 물감, 점, 선, 평면의 적절한 조화 속에 미술 작품이 이루어지고, 음악은 음의 고저, 장단, 강약, 화음 속에 음악 예술이 이루어지듯이 설교의 첫 소재는 설교자의 손에 들린 말씀, 성경이다. 음악가, 미술가의 경우와 같이 설교자는 말씀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설교자의 Story를 통하여 성령의 Message가 좌우된다.
다섯째는 설교자의 Story 능력을 좌우하는 소재는 설교자의 어휘 능력과 언어 능력이다. 깊고, 명확하고, 걸작인 Message를 위한 설교자의 Story는 어휘와 언어로 좌우된다.
여섯째는 비언어적 요소의 정밀성이다. 즉 설교자의 얼굴 표정, 몸놀리는 Gesture, 그 날의 단상의 의상, 강대상 주위의 분위기, 사회자의 언동, 찬양의 내용과 수준, 확성, 조명 장치의 정밀 정확성 등 전부가 설교라는 예술 활동에 직접, 간접 영향을 주는 언어적, 비언어적 재료들이다.
그 다음 일곱째는 청중, 관상자(觀賞者)즉 운집한 성도들의 자세와 분위기 문제이다.
이상을 구체적으로 강론할 지면이 없다. 오늘은 우선 설교자의 어휘 문제를 다루어 보자. 한 예를 들어 피카소의 미술품이 고가인 이유는 희귀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그 표면상 그림이라는 Story속에 피카소 만이 줄 수 있는, 주어지고 있는 Message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깊고, 크고, 강한 Message가 있는 설교를 위해서는 설교자의 분명하고, 정확하고, 풍부한 어휘와 음성이 있어야 한다. 내가 공부하던 Wastern신학교 설교학 교수의 설교 준비하는 책상머리에 Wabster의 대사전이 펼쳐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이유를 물었다. 그는 정색을 하면서 질문하는 나를 좀 이상하다는 눈치로 보았다. 설교에 어휘는 음악에 악보와 같다. 미술에 물감과 같지 않을까!.
나는 부교역자를 맞이함에 몇 가지 표준이 있었다. 첫째로는 성경에 관계되는 책외에 사상 서적과 문학 서적을 많이 읽은 사람에게 비중을 둔다.
그 이유는 그 독서에서 얻은 사색의 특성과 어휘의 다양함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 함께 일하면서 부족하다고 생각될 때는 김형석 교수의 에세이를 정독하게 한다.
그 다음에 이어령 교수의 에세이를 읽게 한다. 얼마 후에 보면 분명히 어휘의 수준이 달라짐을 본다. 어느 주일학교 학생이 부모와 함께 예배에 참석하고 돌아와 이렇게 어머니에게 물었다.
"엄마, 오늘 목사님께서 사랑에 대하여 설교하시는데 목소리나 표정이 누구를 미워하고 있는 것 같았지"하더라는 것이다. 그 목사의 강당에서 설교하는 사랑의 Story에서 사랑의 Message는 주지 못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설교는 정밀한 예술이다. 음악에 음이, 미술에 적절한 색깔과 점, 선이 틀리면 바른 Message를 전달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설교에 어휘와 표정이 적절하지 않으면 정확한 Message를 창출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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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예술과 설교
꽤 오래 전 일이다. 우연히 손 가까이에 있는 영화 제작에 관한 책을 살핀 적이 있다. 원래 사진에 취미가 있기에 유심히 읽었다. 또 설교자의 한 사람인 나는 자연히 설교와 관련지어 해석하며 적용하면서 적지 않은 느낌을 받았다.
영상 예술이란 빛에 의하여 일련의 피사체의 화상을 필름에 담아 1초당 24프레임을 연속적으로 스크린에 투영하고 화면을 움직이게 하여 목적하는 바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예술이라고 한다. 여기서 설교자인 나는 단상에서 설교하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본다.
설교란 설교자의 입의 말만이 아니라 필름에 담긴 화상과 같이 설교자의 영 성속에 화상과 같이 포착된 그날의 메시지를 1초에 24프레임의 연속적인 투영과 같이 빠르지 말고, 느리지도 말고, 명암의 조절과 아니 설교자의 마음, 정신, 영혼, 영성이라는 필름에 담겨 있는 화상과 같은 그날의 메시지를 설교자의 전 인격적 활동 즉,
언어의 변화, 정서의 변화, 표정의 변화, Gesture의 변화라는 스크린에 투영하여 교회 회중으로 하여금 한편의 영상 예술을 감상함과 같은 분명하고도 확실한 그 무엇을 받아 가지고 가도록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후 가끔씩 이 표준에 맞추어 자신의 설교 준비와 전달을 검토하고 점검하고 예술적 차원에서 사명 감당을 생각해 보았다.
좀더 분류 정리를 한다면 영상 예술에 있어 감독이라는 직책을 설교자의 입장과 비교해 보면 흥미롭다. 한편의 영화가 완성되는데는 일반적으로 ① 시나리오, ② 연출, ③ 촬영, ④ 편집 등의 과정을 거쳐 완성된다고 한다.
이것들을 총지휘하는 것이 감독의 책임이요, 직무다. 그러나 감독은 단순히 시나리오만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 속에 가장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메시지를 선명히 부각시키는 것이 그 첫째의 사명이요, 실력이다.
춘향전의 메시지는 사랑, 심청전은 효도가 그 메시지이듯이 어떤 작품에 손대려 할 때 우선 무엇을 관중에게 줄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 분명하여야 할 것이다.
설교자의 본질적 사명도 그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자는 영상 예술에서 감독과 같은 역할인 동시에 시나리오 작가, 연출자, 편집자, 상영 기사이다. 그래서 설교자도 한편의 설교 작성에 초점은 무엇을 줄 것인가에 정확히 맞추어져야 할 것이다.
둘째로 설교자는 위에서 말한바 영화 제작의 경우와 같이 설교는 말씀과 성령의 빛에 의하여 피사체의 화상과 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필름이 아니라 설교자의 지성, 감성의 도움을 받은 영성에 착상하여 그 화상을 설교자의 전인격적 활동
즉, 어휘의 선택, 언어의 고저 장단, 정서의 변화, 표정의 변화, Gesture의 변화 등의 스크린에 투영하여 그것도 영상 예술의 경우와 같이 1초당 24프레임이라는 절대적 기준 같은 설교 학적 기준을 따라 그 변화와 연속 속에 분명한 메시지가 정확히 전달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해 보려고 노력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는 아무렇게나 하면되는게 아니라 정밀한 법칙 따라 준비하고 정리하고 전달해야 하는 정밀한 예술이라고 절실히 느낀다. 셋째로 영상은 대중을 향한 강력한 예술 매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영화는 시각적 예술이요, 청각적 예술이요, 한 공간에서 많은 사람에게 동시에 막강한 의지 전달의 힘을 가진 종합적 예술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를 시인하면서 우리 설교의 경우를 솔직히 생각해 본다.
설교는 영상보다 더 깊이 설교자를 통하여 투영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진리를 보다 강력한 힘으로 회중의 시각을 통하여 생명에 침투시키고 청각을 통하여 영혼 속에 창작 작업을 일으키는 영적 예술이며 같은 시간, 공간에 있는 많은 청중의 영혼을 쥐어짜고 새 생명을 주는 생명 예술이 아닐 수 없다.
설교자의 영성에 착상된 하나님의 음성을, 설교자의 전인격적 활동이라는 스크린에 투영되어 청중의 영혼에 영향을 주는 설교야말로 인간의 어떤 방법으로도 흉내낼 수 없는 생명적 창조 예술이라고 생각하며 그런 의미에서 설교자는 테크니션이 아니고 사람의 생명 속에 그리스도를 착상(해산하는 수고)시키는 아티스트이다.
넷째로 제한된 지면이기에 평소에 설교자와 관계에서 많은 느낌을 가진 영상 예술의 용어 몇 가지를 풀이하겠다. 영화의 필름 한 장에 담긴 화면을 한 프레임이 라고 한다.
설교자의 말 한마디, 표정, Gesture하나에 해당 하다고 생각한다. 의미 없는, 그 자리에 맞지 않는 프레임은 절대 용납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이 연속되어 단편의 의미를 담을 때 이것을 한 쇼트(shot)라고 한다. 설교의 한 문장, 한 소절에 해당한다. 벌써 이때부터 그 설교의 그날의 중심 메시지가 직접, 간접 비쳐져야 한다.
그 다음 이와 같은 쇼트가 모여 한 신(scene)을 구성한다. 벌써 구체적인 의미를 담은 장면이다 설교에 한 소지와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신이 몇 개 모여 한 시컨스(sequence)를 이룬다. 이것은 우리 설교의 대지와 같은 것이다.
사람을 설명함에 벌써 상반신 같은 구성이다. 끝으로 이와 같은 시퀀스가 몇 개 모여 한편의 영화가 완성된다. 우리의 설교도 몇 개의 대지(大旨)가 모여 한편의 설교가 구성되는 것과 같다. 영화가 예술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정밀한 구성이 필요하다면 우리 설교는 더더욱 그러해야 할 줄 안다. 또 한가지, 영화 촬영 다음에 편집하기 전의 필름을 러시 필름(Rush Film)이라 한다.
이것을 살피면서 효과적인 목적 전달을 위하여 앞뒤로 짜 맞추고 미흡한 것을 보충하는 필름이다. 우리 설교의 초고 노트, 또는 처음 기도 중에 구상과 같은 것이다. 잔소리 같으나 한번 더 정리 해보자. 설교는 설교자의 영성이라는 필름에 말씀과 성령의 조명에 비취어 그날의 메시지가 착상되면 그 한프레임 한 프레임이 편집하기전 Rush Film과 같은 것을 기도하고 묵상하고 깊은 영감에 잠기면서 한 shot, 한 shot로 정연히 배정된다.
그 다음 논리적이며 인과 관계를 고려하여 소지 같은 Scene을 구성하고 이것이 모여 대지 같은 Sequence를 구성하여 그날의 메시지의 골격이 두드러지게 하며 몇 개의 Sequence 가 모여 한편의 영화 같은 설교가 완성된다. 설교의 경우에 Screen은 설교자의 전 인격적 활동 즉, 어휘, 언어 활동, 정서 활동, 표정 활동, Gesture와 같은 것에 그 영성에 비축된 영상의 한 프레임 한 프레임이 투영되고 메시지는 전달이 된다. 이렇게 생각할 때 설교자의 전인격적 활동에 적은 한 부분도 소홀히 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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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인격
지난번에 "영상예술과 설교"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릴 때 설교자의 인격적 활동은 영상예술의 스크린과 같다고 말씀을 드렸다.
필름에 담겨있는 한 프레임 한 프레임이 빛에 의하여 스크린에 투영될 때 거기서 그 영상이 목적하는 메시지가 전달되는 것 같이 설교는 설교자의 필름과 같은 영성 속에 축적 준비 되어있는 Sermon 이 말씀과 성령의 빛에 의하여 설교자의 인격적 활동, 언어적 활동, 비언어적 활동, 즉 언어변화, 정서의 변화, 표정의 변화, 제스츄어 변화라는 스크린에 투영되어 그 날의 설교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설교자의 설교 준비란 정밀하게 구성되어 있는 카메라가 신비로운 빛에 조화를 받아 비상한 직관, 직감, 달관, 영감적인 상태에서 필름과 같은 영성 속에 메시지를 축적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여기서 생각하려는 것은 이렇게 준비된 메시지가 투영되는 스크린과 같은 설교자의 인격이 문제라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설교자의 인격문제는 영상의 기계적 기능에 비하여 설교자의 활동을 인격적인 활동이라는 의미로 말했다. 둘째, 인격문제는 인격, 즉 사람들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알아주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칼빈은 "메시지는 멧센저 보다 크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분명 메시지는 멧센저보다 크다. 예를 들어 대통령이 친서를 내게 주면서 백악관에 전달해 달라고 한다고 하자. 그 친서는 나보다 크다.
내가 청와대를 떠나면서부터 받는 예우가 다르다. 그리고 내 자신이 느끼는 긍지, 자부심도 그 친서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술에 취하거나, 남루한 옷을 입었거나, 삼류여관에 잠을 잔다거나 그 친서에는 아무 변화나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메시지는 멧센저보다 크다. 그러나 설교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설교자의 인격은, 때묻고 구겨지고 찢어진 스크린의 영상이 정확하게 투영될 수 없듯이, 설교의 효과에 영향을 준다.
한번은 경북노회산하에 한 교회에 문제가 생겼다. 파송받은 위원중 한 사람인 나는 설교를 분담 받았다. 설교가 끝난 뒤에 회중의 어떤 분이 "설교야 잘한다. 흥" 하는 것이다. 그 사건의 책임이 내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를 오해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 그 날밤 내 설교는 바로 전달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분명히 메시지는 멧센저보다 크다. 그러나 멧센저의 인격은 메시지의 효과에 영향을 준다. 그 날 나는 헛수고를 했다. 그래서 필립브룩스는 "설교자야, 설교를 강조하기 전에 네 인격을 강조해라"라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셋째, 설교자의 인격문제는 나만이 아는 나의 인격의 문제이다. 남들이 아는 나의 인격문제가 영상의 스크린의 문제라면, 나만이 아는 나의 인격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필름의 문제이다. 필름이 나쁘면 아예 영상이 착상되지 않는다. 행 3:6절에 "내게 있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갈 2:20절에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 이루어 질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설교는 입의 말이기 이전에, 머리의 생각이기 이전에, 영성의 사건, 영으로 난자의 사건이기에 나만이 아는 나의 인격에 결함이 있을 때 Preaching 이전에 Sermon 이 착상 할 곳이 없다. 그래서 청중의 영혼에 전달되는 메시지는 논리나, 웅변이나, 열광이나 고함소리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흠이 없는 인격, 나만이 아는 나의 인격에 문제가 해결된 자의 영성에 착상된 것이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자의 인격적 활동의 스크린에 투영되어 청중에 바른 메시지가 전달될 때, 이루어지는 대 사건이다.
끝으로 생각할 문제는 땅에 사는 사람이, 설교자라도 신과 같이 거룩할 수 없고, 천사같이 순결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설교자는 최소한 진실해야 한다. 여기 진실이란 말은 윤리적 도덕적 의미가 아니라, "나"의 됨됨이 진실해야 한다는 말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의 진실, 애통하고 회개하는 자의 진실, 의원이 필요함을 인정하는 병든 자의 진실, 십자가의 강도의 진실, 그 다음 하나님 앞에, 말씀 앞에, 설교자로서의 진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을 읽어보면 위선의 성직자는 저주를 받았어도 진실한 창녀는 하나님의 딸이 되었다. 마태복음 13장에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이 있은 옥토는 선량한 마음, 겸손한 마음, 온유한 마음이 아니다. 나만이 아는 나에 대한 고민이 있는 심정, 무거운 짐진 자의 심정, 목마른 사슴 같은 심정들을 뜻하는 것이다.
스펄전이 이런 말을 했다. "근간에 열 명의 설교자의 설교를 들어보았다. 그 중에 아홉 명은 방금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말하는 것 같았다. 단, 한 명만이 사람같이 설교하더라" 이 말이 무슨 뜻인가? 메시지는 멧센저보다 크다. 그러나 멧센저의 인격에 따라 그 효능과 영향이 달라진다. 우리는 설교를 강조하기 전에 내 인격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위선의 성직자가 되지 말고 차라리 진실한 창녀가 되어 하나님의 인정받는 동리, 전도에 성공한 사마리아 여인 갖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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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의 씨눈(GERM, GIST)
모든 종자에는 씨눈(배종, Germ)이 있다. 그 씨눈이 생명이다. 외피, 내피, 녹말 부분 등 전부 이 씨눈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한편의 설교에도, 이 씨눈(Gist, Germ)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한편의 설교의 생명이다. 다른 것 30분, 40분 외쳐도 이 씨눈"Germ"을 설명, 증명, 변증하는 외피요 내피요, 녹말 부분에 불과하다. 이 씨눈이 한편의 설교 속에서 자라 그 씨눈의 생명이 굉장한 거목(巨木)으로 나타나야 한다.
문제는 이 씨눈의 성질이다. 이 씨눈의 성질이 얼마나 깊고, 참신하고 어느 정도 상식 이상의 높은 것인가에 따라 그 설교가 신자들의 정신을 관통하고 영혼에 전달이 되는데 성공과 실패가 달려 있다. 사람은 다 생각하고 느끼고 사물을 의식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씨눈이 일반 사람의 상식 수평선 이하에 것일 때는 아무도 관심을 가져 주지 않는다.
이 씨눈의 포착은 설교자의 창작적 과제이다. 물론 이미 우리가 몸담고 사는 지식의 광야, 상식의 초원에 일반화되어 있는 것, 나타나 있는 것, 증명되어져 있는 것, 설명되어져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설교자의 생명과 관계가 맺어지는 창작적 충격이 있어야 거기 설교자 나름의 생명이 열정으로, 감격으로, 안타까움으로 강력한 감화력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한번 생각해 보자. 어떤 홀어머니가 많은 고생으로 자식을 길렀다. 그러나 그 자식은 어머니가 그 큰 희생, 사랑으로 자기를 기른 것을 머리로는 다 안다. 그러나 언제나 불효한 자식이다. 어느 날 문득 어머니의 얼굴의 주름살, 반백이 넘은 머리를 보는 순간 그 어머니의 희생, 고생, 사랑 이것이 머리로 아는 지식에서 가슴에 감격으로 부딪혀 온다. 이 부딪힘, 이 충돌은 그 아들에게 있어 한가지 창작적 충격이였다. 이 충격이 그를 효자 되게 했다.
같은 의미로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의 은총, 구원의 감격, 다 잘 안다. 설명할 수도 있다. 강조할 수도 있다. 논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 가지고는 생명 있는 씨눈 있는 설교가 될 수는 없다. 이와 같이 다 아는 상식적인 문제라도 어느날 이것이 가슴에 부딪쳐올때, 머리에 성경 지식, 신학 지식, 교리 지식이 내 인격 속에, 영혼 속에 사건으로 충돌되어 올 때, 이것이 한편의 설교의 씨눈이 될 적에, 거기에 생명이 약동하는 설교가 창작되어 질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 씨눈(Gist, Germ)이 어떻게 포착되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믿고 봉사해 왔다. 무엇이냐 하면, 우리는 현재 설교자와 같이 하시는 임마누엘을 믿는다. 현재 감동, 감화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믿는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임마누엘과 성령의 간섭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내게 관계되어 오느냐는 것이다.
그 대답으로 나는 이렇게 믿고 경험하며 봉사해 왔다. 어떤 때 성경을 읽다가, 기도를 하다가, 찬송을 부르다가, 성도와 상담하다가, 여러 가지 경우에 놀랍게도 비상하게 직관적이며, 직감적이며, 달관적이며 영감적인 때가 있다. 어두움에서 빛을 만난 것 같이 내 생명에 충돌되어 오는 것이 있다. 지금까지의 머리의 신앙, 성경진리,… 가슴에 와 충돌한다. 거기 눈물이 있다. 회개가 있다. 자각이 있다. 결단이 있다.
나는 이것을 나와 같이 계시는 임마누엘의 역사요, 성령의 간섭이라고 분명히 믿는다. 이 경우에 포착되는 것이 평소에 아는 것일 수도 있다. 또 평소에 전혀 깨닫지 못했던 진리일 경우도 있다. 완전히 새로운 느낌으로 내 영혼에 비추어 온다. 여기에 내 설교의 씨눈이 포착되어진다. 진주 보옥을 손에 잡은 것 같이 소중한 감격으로 이것을 묵상한다. 그 묵상과 함께 한편의 설교의 외피, 내피, 녹말 부분이 짜여진다.
설교자의 가슴에 감격 없이 성도의 감격을 바랄 수 없다. 눈물 없이 설교자는 성도의 눈에 눈물을 강요하지 못한다. 이 Gist, 씨눈은 때로 나를 감격하게 한다. 황홀하게 한다. 강권하기도 한다. 이와같은 Gist, Germ, 씨눈은 새벽 재단에서 많이 만나진다. 성경을 일고 묵상할 때 솟아지도록 만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이Gist는 별똥별과 같이 그 순간 강력히 비취다가 그 다음 곧 사라지기 쉽다.
그 시간이 지나고 그것이 필요할 때 기억을 아무리 짜 보아도 사라진 별똥별은 되살아나지 않고 막연한 여운만 아물아물할 뿐이다. 이렇게 포착된 별똥별 같은 씨눈, Gist는 그 즉시 노트에 수록하고 이어서 깊은 묵상과 함께 한편의 설교, 식구들에게 먹일 밥상을 구상해야 한다. 그래서 내 손에는 언제나 메모를 위한 노트가 쥐어져 있다. 내 침대 옆벽에도 백지 몇 장과 볼펜이 매달려 있다. 잠자기 전 시간에 문득 이 별똥별이 확 지나간다.
불을 켜고 할 여가가 없다. 어두움 속에서라도 그 벽의 벽지에 대충 글적 글적해 놓는다. 아침이 되어 그것들을 읽어보면 지난밤 그 별똥별이 되살아난다. 이것이 설교 초고 노트에 차욱차욱 쌓인다. 이것은 내 설교의 씨눈들 Gist들이다. 나의 보석함이다. 이 중에서 적당한 것을 골라 한 주일 전에 주보에 예고하고 준비하여 강단에 선다 한편의 설교에는 한 개의 씨눈이 있어야 하고 그것이 사람 상식 수준, 의식 수준 이상의 것이 되어야 참신하고 생명 있는 설교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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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욕이 사명을 망친다
거목 명신홍목사님의 후임으로 무거운 책임을 물려받은 30세의 경험없는 약관의 머리와 마음에는 늘 5가지의 과제가 나를 긴장하게 했다. ① 행여나 경험없어 실수나 하지 않을까! ② 어떻게 하면 선임자 보다 더 높이 올라가는 상승기류를 유지할 수 있을까! ③ 교회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문이 칭찬인지 비양거리는 것인지 분석하는데 신경을 썼고 ④ 어쨌든지 중도하차 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며 ⑤ 어차피 나선 목회의 길 다른 사람에게 뒤지지 말아야지 하는 명예욕들이 늘 나를 긴장하게 했다.
첫째, 나의 설교에 나타나는 명예욕이였다.
설교, 이 신성한 직무수행에 선임자와 비교, 경쟁하려는 심리같은 것이 없지 않았다. 그러니 늘 내가 설교를 더 잘해야지, 큰 설교를 해야지, 교인들이 깜짝 놀라도록 해야지, 설교를 통하여 선임자보다 더 인기를 얻어야지, 설교를 통하여 교인 수가 증가되도록 해야지 이런 유치한 명예욕이 나를 열심있게 한 것 같다. 훗날 설교학을 전공하면서 부로듀스의 '큰 설교를 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말라'는 글을 일고 나의 어리석음에 얼굴을 붉혔다. 말씀 전달이라는 사명보다 큰 설교라는 명예욕에 노예였기 때문이다.
그러자니 미사어구, 웅변쪼의 열정있는 설교를 목이 터져라고 절규했었다. 또 교인들의 선임자와 비교하는 반응은 언제나 나를 비참하게 하였다. 어눌하고, 힘이 없는 것 같은 명목사님의 설교는 교인의 마음에 전달이 되었고 나의 열광의 설교는 교인들의 머리까지 밖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그 증거는 명목사님이 지나가신지 벌써 50년이 넘었는데도 '옛날 명목사님이 이렇게 말했다' 하고 기억을 더듬어 받은 영향을 추억하는 흔적을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목회 초기에 얼마 동안은 이와같은 인기에 목적을 두고 있었다. 명예욕에 유혹되어 '큰설교'를 하겠다는 경우치고 성공한적은 한번도 없었다.
둘째, 명예욕의 유혹은 오늘도 흔히 볼 수 있는 수자(數字)를 통한 것이다. 한번은 기차를 타려고 기다리는데 그리 친숙하지도 않은, 그저 안면이 있는 목사님 한 분이 나를 찾아와 별 인사도 없이 "이번 어느 교회에 집회를 하고 오는 길인데 새벽은 몇 명이 모이고 낮에는…… 저녁에는 몇 명이 모이고 이번이 135번째 집회"라고 자랑을 한다. 그가 떠나간 뒤에 나는 깊이 생각에 잠겼다. 나는 그보다 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내 얼굴을 붉힌다. 나는 교인 숫자가 선임목사님 계실 때 보다 감소되는 것이 너무 괴로워 주보에 기록되는 예배에 참석하는 교인숫자를 조작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이것도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래도 저래도 교인은 다 안다. 이것도 일종의 명예욕의 유혹이다.
셋째, 명예욕의 유혹은 교회 영광 독식의 명예욕이다.
교회의 좋은 일은 혼자 다한 것 같이 자화자찬하는 인기전술이다. 나 자신이 그러한 사람 중에 하나이다. 한번은 교회 장래를 내다 보면서 또 모범적인 교회가 하고 있는 일을 나도 영웅심을 품고 연구, 정보수집, 견문, 다 계획을 세웠다. 당회와 제직회를 거쳐 실천하려고 굳이 작심하였다. 당회와 제직회에 내어 놓았다.
생전처음 듣는 수 십명 장로님이나 제직들에 의견이 없을 수 없다. 나는 관철을 위하여 역설한다. 의견은 속출한다. 꼭 관철하려는 결심 때문에 동의해 주지 않는 당회원, 제직앞에 짜증을 부린다. 심한 말을 하게 된다.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는 문제를 어떻게 " 동의합니다". "제청합니다". 그렇게 결정 지을 수 있는가 말이다. 이것은 내가 어떤 일을 "내가 했다"는 결과를 노린 명예심, 인기전술의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 날 이후 나는 좀 겸손해졌다.
주님의 교회, 하는 일도 주님, 안되는 일도 주님, 영광도 주님이라고 정리하고 교회에 꼭 어떤 새롭게 할 일이 있으면 자세한 형편을 당회, 제직회 앞에 의견을 제시하는것 만으로 내 사명을 삼았다. 그렇게 제시한 안건은 한 달쯤 지나면 그것이 당회원의 의견, 제직회원의 의견으로 회중에서 발의가 된다.
목사가 하는 일을 짐짓 한번쯤 발목을 잡는 습성이 있는 분이라도 그것이 회중에서 발의가 되니 아주쉽게 합의가 된다. 그동안 많은 견문, 생각, 정보, 사적의론 등을 거쳐 회중에 말이 된것이니 아무 어려움 없이 가결 실천이 된다. 아쉬운 것은 일들이 한 두달 늦어지는 것과 내가 했다는 명예의 면류관을 독식하지 못함 일것이다. 많은 경우 명예욕이 나를 위선자되게 하였다.
(고전 4:1∼4, 노련한 목회자 바울이 다시 한번 부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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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하기는 비둘기 같이, 지혜는 뱀 같이
목사의 전무(행 6:1∼4)할 일, 가장 귀중한 직무는 말씀 전하는 일이다. 이것은 주님 맡기신 사명, 영혼들이 요구하는 일, 교회가 교회될 수 있는 제일의 과제이다. 다른 어떤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이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은 주님과 영혼들 앞에 죄악이다. 만일 의사가 다른 어떤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죽어가는 자의 수술, 치료를 미룰 수 있겠는가! 사회가 변하고 시대가 바뀌어도 변할 수 없는 것이 이 과제다. 또 나의 어떤 이유, 나와 다른 사람과 관계에 어떤 이유, 또 교회의 어떤 이유로 이 과제의 효능과 영향에 장애 받아서는 안된다.
한번은 당회 중 아버지 뻘 되시는 노장로님이 너무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고집하기에 " 거 쓸 때 없는 말 좀 하지 말라"고 화를 내었다. 그것이 토요일 밤이라 주일 예배에 설교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망설이다가 주일아침 일찍 그 장로님을 찾아가 정중히 사과하고 용서를 청했다. 그 주일설교 서두에 이 사실을 고백하면서 나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단상의 자유를 찾았다. 청중의 말씀 받는 자세에서 성의와 진지함이 보였다. 내가 전무해야 할 일이 헛수고가 되지 않기 위해서이다.
또 한번은 두 여 집사가 시비문제를 가지고 나를 찾아왔다. 그 중 한 분은 옳고, 다른 한 분은 잘못되었다고 판단을 받고 돌아갔다. 아무리 잘못되었지만 그 나름대로는 또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잘못되었다는 목사의 판단이 마음에 많은 상처를 주었던 것 같다. 교회 출입하는데, 말씀 경청하는데, 나를 대하는데 평화가 없어졌다.
목사는 옳은 것을 옳다 소리도 못하고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도해서는 안되는 신분인줄 알고 그 다음부터는 그러한 경우에 쌍방의 이야기만 듣는다. 진지하게 반응을 보이며 경청한다. 그 다음 내 대답은 "자! 두사람 이제부터 내 시키는 대로 해야한다. 무엇이냐 하면 지금부터 로마서 12장을 50번씩 읽고, 그래도 해결되지 않으면 그때 다시 내게 오라"하고 내좆아 버린다. 얼마 후에 보면 그 두 사람은 아주 친한 친구가 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이것은 내가 전무 해야 할 일의 효과를 위한 내 나름대로의 방법이다.
또 한번은 장로님 한 분이 가정교육상 문제가 있어 치리를 받았는데 당회원이 다 합의하고 결정한 일이다. 그런데 목사만 원수가 되었다. 온 가정이 총동원하여 나를 원수시 하는데 참 기가 막힌다. 약한 것이 목사다. 이를 이해시키고 달래고 위로하고, 마음을 풀어주는데 참 비굴하였다. 이제는 그 후손들이 선친의 대를이어 교회 봉사에 모범이 되고 있다. 그후 나는 가급적 치리를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내가 전무해야 할 일의 효과는 치리 문제보다 더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목사는 어떤 경우에도 내 전무할 일에 장애를 받지 않도록 순하기는 비둘기 같이 지혜는 뱀같이 하여야겠다고 절실히 느꼈다. Calvin의 말 같이 message는 messenger보다 크다, 그렇다 말씀은 설교자보다 크다. 설교는 설교자보다 크다. 그러나 나는 좀 이의가 있다. 경우에 messenger의 인격상 문제는 message의 효과와 영향에 크게 관계된다고 생각한다. 어떤 목사님이 단상에서 열심히 설교를 하고 있다. 청중의 한 부인이 "말이야 잘한다"하고 비아냥거린다. 분명히 그 설교자의 인격상 무슨 문제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부르드스는 "네 설교를 강조하기 전에 네 인격을 강조하라"라고 지적하였다.
우리 목회상 다른 일에 다소 소홀하고 부족이 있다 하더라도, 내가 교회를 위하여 꼭하고 싶은 일에 지장이 생긴다 하더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내가 바보천치가 되고, 무시천대를 받는 한이 있더라도 나의 제 일차적 과제요, 전무하여야 할 말씀 전달사명에 효과감소나 단상에 영적 자유나 청중과 나 사이에 Communication에 장애되는 일이 없도록 세심, 조심, 주의해야 할 것이다.
고전 9:16∼23의 바울의 모습과 심정을 바로 이해하고 본받고 그 자취를 따라가는 목사가 되자.
이성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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